[외신속 3·1 운동] ⑨ '영일동맹' 허울에 英언론 日 '받아쓰기' 그쳐
송고시간2019-02-20 10:00
英 대표 정론지 더타임스·가디언 "한국서 볼셰비스트 주도 소요 발생" 보도
영일동맹으로 日 한국병합 승인한 英 정부 인식, 언론보도에도 반영돼
※ 편집자주 = "조선독립만세". 지금으로부터 100년전 한반도 전역을 울렸던 이 함성은 '세계'를 향한 우리 민족의 하나 된 외침이었습니다. 한민족이 앞장서 '행동'함으로써 제국주의에 신음하던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의 각 민족을 자각시켜 함께 전 세계적 독립운동을 끌어가자는 외교적 호소였습니다.
강대국의 이권다툼이 판치던 당시 국제질서는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자격을 얻었던 일본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고만장하던 일본이 두려워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국제사회의 여론을 움직이는 외신 보도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3.1운동 초기 보도통제와 '프레임 조작'으로 관련 보도를 막는데 그야말로 전력투구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의 문제이지, 진실을 감출 순 없었습니다.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중국 상하이(上海)로부터 시작해 미국 샌프란시스코, 뉴욕, 워싱턴 D.C.에 이어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러시아 모스크바로 3·1운동 소식은 요원의 들불처럼 번져나갔습니다. 길지 않은 기사도 많았지만 이에 자극받은 각 식민지 국가에서는 앞다퉈 독립선언문이 나오면서 민족적 독립운동이 촉발됐습니다. 비록 한민족이 '자립'(自立)에는 실패했지만, 외신의 창(窓)을 통해 민족 자결과 독립에 대한 세계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전세계에 포진한 특파원망을 총동원해 당시 외신 보도들을 발굴해 시리즈로 보도합니다.
<관련기사>
[외신속 3·1 운동] ① 그 날 그 함성…통제·조작의 '프레임' 뚫고 세계로 [외신속 3·1 운동] ② 日언론엔 '폭동'뿐…총독부 발표 '앵무새' 전달 [외신속 3·1 운동] ③ 상하이서 첫 '타전'…은폐 급급하던 日, 허 찔렸다 [외신속 3·1 운동] ④ 韓人 여학생이 띄운 편지, '대륙의 심금'을 울리다 [외신속 3·1 운동] ⑤ 샌프란發 대서특필…美서 대일여론전 '포문' 열다 [외신속 3·1 운동] ⑥ 美 타임스스퀘어에 울려퍼진 독립선언…세계가 눈뜨다 [외신속 3·1운동] ⑦ WP "선언문 든 소녀의 손 잘라내"…日편들던 워싱턴 '충격' [외신속 3·1 운동] ⑧ 러 프라우다·이즈베스티야도 주목…"조선여성 영웅적 항쟁" [외신속 3·1 운동] ⑦ WP "선언문 든 소녀의 손 잘라내"…日편들던 워싱턴 '충격' [외신속 3·1 운동] ⑧ 러 프라우다·이즈베스티야도 주목…"조선여성 영웅적 항쟁"(런던=연합뉴스) 박대한 특파원 = "한국 황제(고종)의 장례식 기간 전국적으로 '소요'(disturbances)가 발생했다. 3월 1일 수백명이 황제의 관이 놓여있던 궁으로 몰려 들어갔는데 이들은 한국의 독립을 요구했다."
"한국에서 3월 1일 이후 발생한 소요는 파리평화회의가 한국의 독립을 승인했다고 믿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에서의 시위는 독립을 확보하기 위한 조직적인 운동이다"
1795년 창간 이후 영국을 대표하는 최고 정론지로 자리잡은 '더타임스'는 3·1 운동이 발발한 지 18일이 지난 1919년 3월 19일에야 처음으로 관련 소식을 전한다.
더타임스는 '한국과 평화회의-민족주의자 소요'라는 제목 하에 3개의 단신기사를 하나로 묶었다. 이마저도 자사 특파원이나 기자가 아닌 영국의 통신사인 로이터(Reuter)의 상하이와 오사카, 도쿄 특파원이 보낸 기사를 그대로 전재하는데 그쳤다.
그러다보니 한국에서의 자세한 상황을 알리기보다는 3·1 운동 발생 소식을 짤막하게 전달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3·1 운동을 '소요'(disturbances)나 '폭동'(rioting)이라는 단어로 묘사한 것 역시 일본 정부의 발표 내용을 비판없이 기사화한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날 실린 3개 기사 중 오사카발 기사에는 "폭동은 내륙 여러 지방에서 발생했고, 이로 인해 양측 모두에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시위대가 마치 '폭력'을 사용한 것으로 오해할만한 내용이었다.
더타임스는 20여일이 지난 4월 10일자 지면에는 4월 6일 상하이에서 보내온 로이터 기사를 실었다.
'한국의 볼셰비즘'(Bolshevism in Korea)이라는 제하의 기사는 한국에서 소요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으며, 곤봉과 낫, 도끼로 무장한 폭도(rioters)들이 경찰을 공격하고 관공서를 불태웠다는 일본 정부의 발표를 그대로 전했다.
이러한 폭력 발생은 중국 상하이에 본부를 두고 반일 운동을 전개하는 볼셰비스트 한국인들이 이끌고 있다고 밝혔다.
영국의 대표적 진보 정론지인 '가디언'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디언 역시 3월 19일 로이터 통신 등을 인용해 3·1 운동 관련 소식을 짤막하게 전했고, 4월 10일자에는 더타임스와 마찬가지로 역시 로이터가 보내온 '한국의 볼셰비즘' 기사를 그대로 실었다
다만 가디언은 한국에 있는 선교단 소스를 인용해 일본 정부가 한국에서 무장하지 않은 시위대를 무자비한 방식으로 대응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내용 역시 전했다.
타임스와 가디언의 이같은 초기 보도는 3·1 운동을 균형잡힌 시각에서 바라보거나 신문 1면을 털어 적극적으로 보도한 중국과 미국, 호주, 동남아 등 다른 지역 언론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이는 당시 국제관계 지형과 무관하지 않다.
20세기 초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국제관계가 급변하던 시기였다.
이때 영국과 일본은 1902년 이른바 '영일동맹'을 통해 손을 잡았다. 당초 영일동맹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로 인해 당시 국제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영국은 일본의 한국 침략과 병합을 인정했다.
일본은 영일동맹으로 제국주의 세계 체제 내에서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의 입지도 확고해졌다.
특히 1905년 제2차 영일동맹은 한국조항을 수정해 일본에게 '한국 보호국화'의 빌미를 제공했고, 1911년 제3차 영일동맹은 일본의 한국병합을 공식적으로 추후 승인했다.
영국은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 정책을 일관되게 지원함으로써 일본의 대한정책이 갖는 부당성에 대해 국제사회의 여론이 형성되는 것을 차단했다.
영국의 이 같은 정책은 1907년 헤이그평화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공론화되는 것을 막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2차 영일동맹 당시 주한 영국공사였던 J.N 조던은 한국 정치가에게는 통치능력이 없기 때문에 최근 10년간 한국은 명목상으로는 독립국이지만 이대로 유지하는 것은 곤란하며, 일본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한국인 자신을 위해서도 나을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주한 영국공사였던 그의 인식은 고스란히 영국 정부에 전달됐다.
실제 대한제국의 마지막 영국 주재 외교관으로 영국 정부를 상대로 외교전을 펼치던 이한응 열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한 것 역시 당시 영국 정부의 차가운 반응과 무관하지 않다.
이한응 열사는 1905년 제2차 영일동맹 직전인 1904년 영국 외무부에 두 차례에 걸쳐 한반도 정세에 관한 장문을 메모를 전달했다. 정세 급변에도 대한제국의 주권과 영토가 침탈퇴지 않도록 영국 정부가 보장해야 한다는 요지였다.
이 열사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용인하는 영일동맹 개정 움직임에도 항의를 표출했다.
그러나 이미 일본 쪽으로 기운 영국은 반응은 냉담했고, 결국 주권을 상실해가는 약소국의 외교관으로서 자긍심과 독립 의지를 표출할 마지막 방법으로 이 열사는 1905년 5월 12일 자결로 항거했다.
일본과 손잡은 영국 정부의 이러한 인식과 대처는 동아시아 주재 현지 영국 특파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영일동맹이 1921년에야 미국의 압력으로 폐기된 점을 감안하면 1919년 발생한 3·1 운동을 바라보는 영국 언론의 시각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셈이다.
더타임스가 1919년 9월 9일자 기사에서 다룬 강우규 의사 사건을 봐도 이 같은 시각은 유지된다.
강 의사는 1919년 9월 2일 당시 '남대문 정거장'이었던 서울역 광장에서 제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던 사이토 마코토 일행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사이토 총독 폭살에는 실패했으나 그의 의거로 일제 경찰관 1명이 숨지고 37명이 다쳤다.
로이터 기사를 바탕으로 한 더타임스 기사의 제목은 '한국인의 잔혹행위-조선총독에 대한 공격'이었다. 기사 내용은 폭탄을 통한 암살 시도에 초점이 맞춰졌다.
영국 언론이 그러나 계속해서 일본의 입장만을 두둔한 것은 아니다.
미국 등 다른 지역에서 3·1 운동 이후 한국 상황과 독립에 관한 관심이 커지자 영국 언론의 보도 역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가디언은 3·1 운동 발생 50여일이 지난 4월 23일자 지면서 '한국'(Korea)이라는 제목으로 일제 치하의 한국 상황을 비교적 상세하게 담은 기사를 내보냈다.
가디언은 "한국과 관련해 일본의 검열이 매우 엄격해 일본 내에서도 (3·1 운동 이후) 소란에 관한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다"면서 일본의 한국 지배 시스템에 근본적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가디언은 "한국의 행정부가 일본의 손에 있으며, 한국인들은 정치적·사회적 의견 표출이 제한되고 있으며, 언론이나 대의기관도 마찬가지"라고 전했다.
가디언은 "고종의 죽음과 파리평화회의 개최가 '타고난 권리'(birthrights)에 관한 희망을 한국인들의 마음에 부활시켰다"면서 "일본 정부가 군대를 보내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를 통해서는 한국에서의 평화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가디언은 이어 20일 가량 지난 5월 13일자 지면에 '한국의 독립-일본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한 청원'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기사는 한국 대표단이 파리평화회의에서 일본으로부터의 자유, 독립국가로서의 한국의 재건을 내용으로 하는 청원을 제출했으며, 파리평화회의가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한일합방조약'의 무효화 및 폐지를 선언할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가디언은 "한일합방조약은 강요와 무력에 의해 결정된 것인 만큼 유효하지 않다"는 청원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끝을 맺었다.
pdhis9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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