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초 실종’ 논란을 불러온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초본 삭제는 정당한 조처였다는 판결이 6일 나왔다.
대선을 앞두고 우리 사회를 분열로 몰아넣었던 사초 실종 논란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 여부를 놓고 벌어진 정쟁에서 비롯됐다. 여당 의원들이 노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을 제기하면서 회의록 열람에 이르게 됐고, 결국 검찰이 칼을 빼는 데까지 나갔다.
우리사회를 한바탕 논란으로 뒤덮게 한 ‘사초’란 무엇일까? 사초가 무엇인지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에서 시작해 조선왕조와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사초 논란을 되짚어 봤다.
1. 사초(史草)는 왕의 말을 녹음한 기록이었다
안도현 시인은 <한겨레> 칼럼 ‘안도현의 발견’에서 사초에 대해 이렇게 썼다.
“조선시대에 사관이 왕의 주요회의에 참여해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 것을 ‘사초’라 했다. 왕조차 함부로 들여다볼 수 없었을 만큼 공정성과 객관성에 만전을 기했다. 그리하여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의궤>는 후세에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남겨졌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까지 등재됐다. 유네스코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방대하고 치밀하면서도 놀라운 기록”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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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가기 : [안도현의 발견] 기록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36399.html)
시인의 글처럼, 사초는 사관(史官)의 기록이다. 원래 ‘사기’(史記)의 ‘초고’(草稿)란 뜻의 ‘사기초고(史記草稿)’였다. 이를 더 줄인 게 ‘사초’다. 실록의 원고라는 뜻이다. 사초는 고려와 조선에서 쓰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한자어다.
사초에서 ‘초’(草)는 들판에 어지러이 널려 있는 잡초를 뜻한다. 잡초처럼 거칠게 쓴 글 또는 다듬지 않은 문장을 일컫는다. 녹음기가 없던 사관은 왕의 말을 받아 적을 때 속기체인 흘림체의 초서(草書)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즉 사초는 잡초처럼 초서체로 대강 흘려 쓴 문장을 의미한다. 초서체로 쓴, 최종 탈고를 하지 않은 역사기록이 곧 ‘사초’다. 사초를 바탕으로 정서체로 다듬어 완성한 것이 ‘실록’이다.
실록 편집이 끝나면 세초(洗草·실록 편찬이 끝난 뒤 사초를 없애는 것)를 해 비밀리에 부치는 게 원칙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사초를 정치적으로 악용했다. 그 논란의 발단이 된 게 ‘조의제문’이다.
2. 사초 논란의 발단이 된 ‘조의제문’
‘조의제문(弔義帝文)’. 조선시대 사초 논란의 발단이 된 글이다. 조선 전기의 학자 김종직이 수양대군(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기 위해 썼다. 초나라 황제인 의제(義帝)가 신하인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슬퍼하는 내용이다. 단종이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비유한 것으로 세조를 비난한 글이다.
김종직은 사림파의 ‘대부’로 불린다. 김종직 제자(김굉필)의 제자가 바로 중종 때 혜성같이 나타난 조광조다. 사림파는 성종 후반부터 서서히 중앙정계에 나오기 시작했다. 성종은 조선 초기부터 권력을 차지하고 있던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젊은 피’ 사림을 등용했다. 하지만 중앙집권세력인 훈구파와 지방의 신흥권력인 사림파는 갈등을 빚게 된다.
사림은 권력 핵심을 장악했던 훈구파들을 비판했는데, 비판의 정점은 3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였다. 성종은 훈구파가 포진한 의정부와 6조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3사에 중용했다. 사헌부는 권력남용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업무를 맡았는데, 요즘으로 치면 감사원이나 검찰에 해당한다. 사간원은 왕의 과오를 감시하고 견제한 곳으로, 현대의 언론사 구실을 했다. 홍문관은 왕의 국정 자문을 맡았는데, 자문을 할 때 역대 선왕들의 치적과 과오를 들어 시시비비를 다뤘다. 사림파는 3사를 기반으로 훈구파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조의제문이 사초 논란의 발단이 된 건,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에 의해서였다. 그는 홍문관·사간원 등 3사에서 요직을 맡았다. 그러다 김일손은 성종 때 사관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스승의 글인 ‘조의제문’을 사초에 넣었다. 그의 사초가 훈구파의 손에 들어가면서 정치적 참극이 일어나게 된다. 바로 무오사화다.
3. 발췌된 사초로 사림파를 숙청한 ‘무오사화’
“발췌된 사초를 토대로 사림파를 숙청한 것이 무오사화입니다. 조선에 4대 사화가 있습니다. 혁신세력이라 할 사림파가 훈구파에 의해 피의 숙청을 당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오, 갑자, 기묘, 을사사화 모두 선비 사(士)를 써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무오사화만큼은 역사 史를 씁니다. 사림이 당한 것은 같지만, 사화의 빌미가 사관의 사초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⑭’에 나오는 내용이다.
조선 4대 사화의 신호탄이 된 무오사화는 사초가 도화선이였다. 그 시작은 성종의 사망이었다. 조선시대 왕이 사망하면 바로 실록청을 꾸리고 왕이 생존해 있을 때 기록한 사초를 기초로 실록을 편찬했다. 김일손은 성종 때 사관으로 있으면서 그가 보고 들은 내용을 사초로 기록해 두었다.
이 사초를 기초로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이 벌어졌다. 당시 실록청 당상관으로 <성종실록> 편찬 책임자였던 훈구파 이극돈이 미리 사초를 열람했던 것이다.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 중에는 이극돈과 관련된 내용이 있었다. 이극돈이 정희왕후(세조의 왕비)의 상일 때 장흥의 관기를 가까이 한 일, 뇌물을 받은 일 등 대부분 부정적인 내용이었다. 이극돈은 김일손을 찾아가 삭제해 줄 것을 부탁했지만 김일손은 단칼에 거절했다.
결국 이극돈은 같은 훈구파인 유자광을 찾았다. 김일손이 사초에 세조를 비난했다는 내용(조의제문)을 썼다는 것을 흘렸다. 결국 이 사실은 당시 국왕인 연산군도 알게 됐다.
[%%IMAGE3%%]연산군 역시 3사에 포진해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림파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연산군은 사초를 가져오라는 전대미문의 명을 내렸다. 곧바로 3사가 벌떼처럼 일어났다. 결국 연산군은 문제될 만한 내용을 일부 발췌해 열람하자는 신하들의 절충안을 받아들인다. 연산군도 사초를 훔쳐본 왕으로 남는 게 걸렸기 때문이었다.
무오사화 결과, 김일손 등 수십명의 사림들이 처형을 당하거나 유배 또는 파면됐다.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심문하고 모두 김종직이 선동한 것이라며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주검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형을 집행했다.
4. ‘노무현-김정일 비밀대화록’ 논란 → ‘사초 실종 사건’ → 검찰 수사대선 정국에 때아닌 ‘노무현-김정일 비밀대화록’ 논란이 정치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북방한계선(NLL)을 주장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의 주장과 관련해, 새누리당은 2012년 10일 ‘영토·주권 포기 대북 게이트’로 규정하고 국정조사를 주장하는 등 공세를 폈다. 민주당은 “당내 분란으로 박근혜 후보의 리더십에 대한 국민의 의문이 커지자 야권에 대한 네거티브 공세로 위기 상황을 모면하려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바로 가기 : “노무현 NLL발언 국조를” “대선겨냥 정치공세 말라”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55205.html)
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2012년 10월,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이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노무현-김정일 비밀대화록’ 을 들고 나왔다. 정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이 2007년 10월 남북 정상회담 때 김정일 위원장에게 ‘북방한계선 때문에 골치 아프다. 남측은 앞으로 북방한계선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며 공동어로 활동을 하면 북방한계선 문제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고 약속을 해줬다”고 밝혔다.
곧바로 정상회담을 수행한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김만복 전 국정원장, 백종천 전 청와대 안보실장 등은 기자 회견을 열어 “단독회담도, 비밀 합의도 없었고, 비밀 녹취록도 존재하지 않는다”며 반박했다.
결국 국회는 대통령기록관에 보관된 회의록 원본을 열람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회의록 원본은 찾을 수 없었다. 회의록 유출에서 시작된 논란이 ‘사초 실종’으로 번진 것이다.
새누리당은 사초가 폐기나 은닉됐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2013년 7월 검찰에 고발했다. 그해 10월 검찰은 노 전 대통령 지시로 사초가 삭제됐다고 최종 결론 내리고 백종천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과 조명균 전 청와대 안보정책비서관을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대통령기록물관리법에 대해 사법부가 판단을 내리는 사실상 첫 사건이었다.
당시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사초 폐기에 관여한 인사는 어떤 식으로든 역사적 도덕적 책임을 국민 앞에 져야 한다”고 말했다.
5. 파기돼야 할 사초는 정쟁의 도구로, 보호돼야 할 대통령 기록은 유출‘사초 폐기’ 논란을 빚어온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초본 삭제는 정당한 조처였다는 판결이 나왔다. 대통령이 재검토와 수정을 지시한 이상, 초본은 대통령기록물이 아니라는 취지다.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불거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 유출과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곤경에 처한 새누리당이 이른바 ‘사초 폐기’ 논란으로 역공에 나섰지만, 이는 결국 정략적 공세였다는 판단이 내려진 셈이다. 또 검찰 역시 정권의 입맛에 맞춘 표적수사를 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 바로 가기 : ‘사초 폐기’라더니…정권 입맛 맞춘 표적수사였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77279.html)
‘사초 실종 사건’은 정쟁으로 시작해 무죄로 끝났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재판장 이동근)는 대화록 초본을 삭제한 혐의로 기소된 백 전 실장과 조 전 비서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단일본을 전제로 작성된 대화록 초본은 대통령기록물로 보기 어렵다’게 법원의 판단이었다.
검찰은 재판 과정에서 초본이라도 일단 결재권자가 전자서명을 했으면 공식 대통령기록물이기 때문에 함부로 폐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녹음파일을 글로 풀어낸 녹취록 초본은 결국 완성본을 위해 만든 것이고, 완성본을 만들고도 초본을 그대로 두면 비밀 유출의 위험도 있어 초본은 폐기하는 게 맞는다고 판단했다. 초본 삭제가 위법하지 않다는 것뿐 아니라, 완성본이 나온 상태에서 초본 삭제는 오히려 당연하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었다. 검찰 기소가 애초부터 무리였다는 참여정부 쪽 인사들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셈이다.
무오사화와 사초 실종 사건은 공통점이 있다. 파기돼야 할 사초가 정쟁의 도구로 악용된 점이다. 반면 보호돼야 할 대통령 기록은 유출되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이 집필되는 과정에서 대통령기록관에서 자료를 열람한 사실이 알려져 대통령기록물법 위반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파기돼야 할 사초는 경쟁의 도구로 악용되고, 보호돼야 할 대통령 기록은 유출되는 슬픈 현실이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