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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자선당 - 나무위키

경복궁 자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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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자선당
景福宮 資善堂
소재지
건축시기
1427년 (창건)
1553년 (중건)
1866년 (중건)
1999년 (복원)
external/www.cha...
자선당[1]
1. 개요2. 역사
2.1. 자선당 유구
3. 구조4. 여담5.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편집]

경복궁의 건물로, 왕세자왕세자빈이 머무는 동궁의 처소이다. 그들도 사람이니만큼 먹고, 자고, 입고 쉬면서 여러 활동을 하는 자신만의 생활공간이 당연히 필요한데 이 곳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하는 곳이다.

'자선(資善)'은 ‘착한(善) 성품을 기른다(資)’는 뜻으로, 중국 북송황태자의 강학소로 설치되었던 ‘자선당(資善堂)’에서 유래했다.

조선 초, 중기정전 근정전의 동쪽에 있었으며 고종 때 중건한 이후 현재는 편전인 사정전동쪽에 있다.

현재 현판은 각자장[2] 철제 오옥진(吳玉鎭. 1935 ~ 2014)이 새겼다.

2. 역사[편집]

경복궁을 창건했을 때는 동궁궁궐 밖에 있었다. 그래서 세자왕실 어른을 찾아 문안하거나 경서 공부를 할 때 일일이 궁을 오가야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리고 경복궁동궁을 지을 타이밍을 잡기도 애매했다. 태조세자 이방석1차 왕자의 난피살되고, 이어 세자가 된 영안군은 거의 곧바로 정종으로 즉위했다. 정종의 세제였던 정안군개경동궁을 이용했고, 역시 얼마 지나지않아 태종으로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한양으로 돌아왔지만 창덕궁에 주로 머물렀고, 세자였던 양녕대군충녕대군는 어디서 거주했는 지 불분명하나 분명 경복궁 일대에서 머물지는 않았다. 그리고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이 경복궁을 주로 이용하면서 재위 9년 뒤인 1427년에서야 비로소 경복궁 안에 제대로 동궁을 지었다. 이 때 자선당도 건립했다.#

동궁으로 지었으나 초창기엔 임금이 이 곳에서 정사를 보기도 했다.# 문종세자 시절을 대부분 이 곳에서 보냈으며 문종의 아내 현덕왕후세자빈 시절 이 곳에서 단종을 낳고 얼마 뒤 운명하였다. 문종 즉위 후엔 단종이 머물렀다.

1462년(세조 8년)에는 확실한 이유는 모르나, 동궁을 옮겼고# 이 때 자선당도 이건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옛 동궁 자리에는 예문관의 일부를 옮겨 보관하였다.#

1543년(중종 38년) 1월에 화재로 불탔다.# 이후 동궁 재건을 위해 자재들도 마련하였으나 1550년(명종 5년) 경에 기와를 인수궁[3] 건립과 종묘 보수 등에 사용하였다.#

그래도 1553년(명종 8년)에 소실된 경복궁내전을 다음 해에 다시 지을 때, 동궁도 넓혀 중건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그 사이에 복구한 듯하다.# 이 때 상량문[4]을 당시 대제학이던 퇴계 이황이 지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경복궁의 다른 건물들과 함께 불 타 없어지고 270년 간 버려진 채 방치되었다가 1866년(고종 3년)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어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일본인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에게 불하되어 일본으로 헐려가, 도쿄의 오쿠라 호텔에서 ‘조선관(朝鮮館)’이라는 이름의 별채가 되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었다. 경복궁 내 기존의 자선당 자리엔 1915년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미술관으로 건립되었다가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들어섰다.
일본으로 옮겨간 자선당
일본으로 옮기고 집고관 세운 ...
오쿠라호텔로 옮겨간 자선당
박물관 '집고관'을 세운 이후 자선당
조선총독부 박물관
자선당 자리에 세운 '조선총독부박물관'. 훗날 '국립박물관'이 된다.

지금 건물은 1999년 12월에 문화재청에서 복원한 것이다.

2.1. 자선당 유구[편집]

자선당 유구
자선당 유구[5]
위에 언급했듯, 1923년 자선당 건물이 불탄 뒤, 자선당의 기단은 에 그을린 채 오쿠라 호텔 한 구석에 방치되어 있었고 1970년대엔 아예 정원석으로 쓰였다. 그러다 1993년 김정동 목원대학교 명예교수가 찾아내어 반환을 위해 노력한 끝에 1995년 12월에 경복궁으로 돌아왔다. 이 때 문화재관리국이 삼성문화재단에게 무상으로 기증을 받는 형식을 취했다.[6]

원래는 자선당 복원 때 활용하려 했지만 손상이 너무 심해 경복궁 건청궁녹산 사이에 놓아 보존하고 있다. 한동안 비공개였으나 2012년 11월부터 개방하여 볼 수 있다.#

3. 구조[편집]

복원현재의 자선당을 기준으로 한다.
자선당 배치도 1
자선당 및 행각 내부 구성도
자선당 배치도
자선당 대청
자선당 배치도
자선당 대청[7]
경복궁 자선당 서쪽 방의 내부
자선당 동쪽 방
자선당 서쪽 방 내부[8]
자선당 동쪽 방 내부
  • 정면 7칸, 측면 4칸의 총 28칸으로 대청이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총 6칸, 온돌방이 정면 2칸, 측면 3칸의 총 6칸이다(북쪽의 2칸은 쪽방). 온돌방은 좌, 우에 각각 있기에 총 12칸이다. 툇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총 3칸이 각각 대청 남, 북쪽에 있고(남북을 합쳐 총 6칸), 각 온돌방 남쪽에 정면 2칸, 측면 1칸의 2칸이 있어(좌, 우를 합쳐 총 4칸) 총 10칸이다. 대청은 전부 한 공간으로 트여있으며, 방은 남, 북 축으로는 트여있으나 동, 서 축으로는 구분이 되어있다.
  • 공포는 이익공[9]이며 기둥 사이마다 화반[10]을 놓아 절제된 화려함을 강조하고, 그 위에 운공[11]을 설치하였다. 처마는 겹처마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취두와 용두, 잡상설치하여 장식하였다. 기둥은 네모나게 세웠으며 안에 2개의 고주[12]를 세우고 7개의 도리를 설치한 ‘2고주 7량가’ 형식을 띄고 있다.# 단청은 모로단청[13]으로 하여 깔끔한 아름다움을 나타내었다.
  • 대청 천장은 우물반자로, 마루는 우물마루 양식으로 놓았고 대청에서 으로 들어가는 은 완자 장지문으로 설치하고 거기에 불발기 문[14]을 덧대어 이중으로 만들었다.#
  • 비현각과의 사이에 북쪽 1칸, 남쪽 2칸의 측간이 있었고 현재는 남쪽의 2칸의 측간을 복원해 두었다.

4. 여담[편집]

  • 문종세자 시절 여기 머물면서 앵두를 좋아하는 아버지 세종을 위해 자선당 주위에 앵두나무를 심어 앵두가 열리면 직접 따서 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궁녀들이 자선당을 '앵두궁'이라 불렀다고.
  • 복원을 잘못했다는 말이 있다. 잡상도 6개인데 5개로 줄고, 정면의 계단도 통계단이었는데 3개로 나누는 등 엉터리란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남아있는 자선당의 사진은 모두 일제강점기에 옮긴 이후에 찍은 것들이라 이건 과정에서 변형이 가해졌을 가능성도 무시못한다. 실제로 자선당의 계단도 《조선고적도보》에는 2개의 계단으로 나타나있다. 자세한 내용은 이 포스팅을 참조. 다만 《조선고적도보》 및 자선당 유구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측면의 계단을 복원하지 않았고 굴뚝도 잘못 복원한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배치도 참고
  • 출판사 크레용 하우스에서 자선당 주춧돌에 대해 쓴 동화 《돌아온 자선당 주춧돌》을 출간했다. 우리아 작가가 을 쓰고 박나래 화가가 그림을 그렸다.
    돌아온 자선당 주춧돌
    《돌아온 자선당 주춧돌》 책 표지

5. 매체에서의 등장[편집]

복원 된 직후엔 동궁으로 사극에 많이 나왔다. 그러나 2000년대 중, 후반 부터 궁궐 촬영이 어려워진 이후엔 실제 자선당이 등장한 적은 없다. 대신 경상북도 문경에 조성한 〈대왕세종〉 세트장에 자선당을 재현한 세트가 있어 그 곳에서 촬영을 많이 하는 편이다. 대신 다른 건물로 나온 경우가 훨씬 많다.[15]
[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나무판에 글자그림을 새기는 각자(刻字)의 제작 기능을 가진 장인.[3] 선왕의 후궁들이 거처하던 불당이다. 1661년(현종 2년) 자수원(慈壽院)과 함께 철폐되었다.[4] 새로 짓거나 고친 건물의 내력, 공역 일시 등을 적어둔 문서.[5]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6] 정확히는 삼성그룹 계열사 호텔신라와 오쿠라호텔이 자매 호텔이란 인연으로 삼성문화재단이 순조롭게 반환받을 수 있었고, 국가에 기증한 것이다.#[7]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8]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9] 창방과 직접 만나 보를 받치는, 쇠서( 모양의 자재)를 두 겹으로 낸 공포.[10] 공포 대의 기둥 사이마다 상하에 위치한 도리 방향의 긴 부재 사이를 받쳐주기 위해 사용하는 부재.[11] 이익공에서 화반의 윗부분에 얹혀 장여와 도리를 받치는 구름 모양의 목재.[12] 高柱, 이름 그대로 굉장히 높은 기둥을 말한다.[13] 부재(部材)의 두 끝 부분에만 칠한 단청.[14] 가운데에만 창을 낸 뒤 위, 아래를 종이로 바른 형태.[15] 대표적으로 〈정도전〉 초반에서 고려 성균관 대성전으로 나온 곳이 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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