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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자선당 景福宮 資善堂 | ||
소재지 | ||
건축시기 |
자선당[1] |
경복궁을 창건했을 때는 동궁이 궁궐 밖에 있었다. 그래서 세자가 왕실 어른을 찾아 문안하거나 경서 공부를 할 때 일일이 궁을 오가야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리고 경복궁에 동궁을 지을 타이밍을 잡기도 애매했다. 태조의 세자 이방석은 1차 왕자의 난 때 피살되고, 이어 세자가 된 영안군은 거의 곧바로 정종으로 즉위했다. 정종의 세제였던 정안군은 개경의 동궁을 이용했고, 역시 얼마 지나지않아 태종으로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한양으로 돌아왔지만 창덕궁에 주로 머물렀고, 세자였던 양녕대군과 충녕대군는 어디서 거주했는 지 불분명하나 분명 경복궁 일대에서 머물지는 않았다. 그리고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이 경복궁을 주로 이용하면서 재위 9년 뒤인 1427년에서야 비로소 경복궁 안에 제대로 동궁을 지었다. 이 때 자선당도 건립했다.#
동궁으로 지었으나 초창기엔 임금이 이 곳에서 정사를 보기도 했다.# 문종은 세자 시절을 대부분 이 곳에서 보냈으며 문종의 아내 현덕왕후가 세자빈 시절 이 곳에서 단종을 낳고 얼마 뒤 운명하였다. 문종 즉위 후엔 단종이 머물렀다.
1462년(세조 8년)에는 확실한 이유는 모르나, 동궁을 옮겼고# 이 때 자선당도 이건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옛 동궁 자리에는 예문관의 책 일부를 옮겨 보관하였다.#
1543년(중종 38년) 1월에 화재로 불탔다.# 이후 동궁 재건을 위해 자재들도 마련하였으나 1550년(명종 5년) 경에 기와를 인수궁[3] 건립과 종묘 보수 등에 사용하였다.#
그래도 1553년(명종 8년)에 소실된 경복궁의 내전을 다음 해에 다시 지을 때, 동궁도 넓혀 중건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그 사이에 복구한 듯하다.# 이 때 상량문[4]을 당시 대제학이던 퇴계 이황이 지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경복궁의 다른 건물들과 함께 불 타 없어지고 270년 간 버려진 채 방치되었다가 1866년(고종 3년)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어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일본인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에게 불하되어 일본으로 헐려가, 도쿄의 오쿠라 호텔에서 ‘조선관(朝鮮館)’이라는 이름의 별채가 되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었다. 경복궁 내 기존의 자선당 자리엔 1915년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미술관으로 건립되었다가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들어섰다.
그리고 경복궁에 동궁을 지을 타이밍을 잡기도 애매했다. 태조의 세자 이방석은 1차 왕자의 난 때 피살되고, 이어 세자가 된 영안군은 거의 곧바로 정종으로 즉위했다. 정종의 세제였던 정안군은 개경의 동궁을 이용했고, 역시 얼마 지나지않아 태종으로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한양으로 돌아왔지만 창덕궁에 주로 머물렀고, 세자였던 양녕대군과 충녕대군는 어디서 거주했는 지 불분명하나 분명 경복궁 일대에서 머물지는 않았다. 그리고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이 경복궁을 주로 이용하면서 재위 9년 뒤인 1427년에서야 비로소 경복궁 안에 제대로 동궁을 지었다. 이 때 자선당도 건립했다.#
동궁으로 지었으나 초창기엔 임금이 이 곳에서 정사를 보기도 했다.# 문종은 세자 시절을 대부분 이 곳에서 보냈으며 문종의 아내 현덕왕후가 세자빈 시절 이 곳에서 단종을 낳고 얼마 뒤 운명하였다. 문종 즉위 후엔 단종이 머물렀다.
1462년(세조 8년)에는 확실한 이유는 모르나, 동궁을 옮겼고# 이 때 자선당도 이건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옛 동궁 자리에는 예문관의 책 일부를 옮겨 보관하였다.#
1543년(중종 38년) 1월에 화재로 불탔다.# 이후 동궁 재건을 위해 자재들도 마련하였으나 1550년(명종 5년) 경에 기와를 인수궁[3] 건립과 종묘 보수 등에 사용하였다.#
그래도 1553년(명종 8년)에 소실된 경복궁의 내전을 다음 해에 다시 지을 때, 동궁도 넓혀 중건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그 사이에 복구한 듯하다.# 이 때 상량문[4]을 당시 대제학이던 퇴계 이황이 지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경복궁의 다른 건물들과 함께 불 타 없어지고 270년 간 버려진 채 방치되었다가 1866년(고종 3년)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어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일본인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에게 불하되어 일본으로 헐려가, 도쿄의 오쿠라 호텔에서 ‘조선관(朝鮮館)’이라는 이름의 별채가 되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었다. 경복궁 내 기존의 자선당 자리엔 1915년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미술관으로 건립되었다가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들어섰다.
오쿠라호텔로 옮겨간 자선당 | 박물관 '집고관'을 세운 이후 자선당 |
자선당 자리에 세운 '조선총독부박물관'. 훗날 '국립박물관'이 된다. |
자선당 유구[5] |
- 1916년에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 ~ 1959)는 일본 테이코쿠 호텔의 설계를 맡아 일본에 갔다가 오쿠라 호텔의 조선관으로 변했던 자선당에서 온돌을 체험한다. 이 때 라이트는 바닥에 파이프를 놓아 난방을 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1937년 이를 적용한 '허버트 제이콥스 하우스(Herbert Jacobs house)'를 만든다. 이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현대식 바닥 난방 보일러의 시초가 된다.
- 《돌아온 자선당 주춧돌》 책 표지
복원 된 직후엔 동궁으로 사극에 많이 나왔다. 그러나 2000년대 중, 후반 부터 궁궐 촬영이 어려워진 이후엔 실제 자선당이 등장한 적은 없다. 대신 경상북도 문경에 조성한 〈대왕세종〉 세트장에 자선당을 재현한 세트가 있어 그 곳에서 촬영을 많이 하는 편이다. 대신 다른 건물로 나온 경우가 훨씬 많다.[15]
[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나무판에 글자나 그림을 새기는 각자(刻字)의 제작 기능을 가진 장인.[3] 선왕의 후궁들이 거처하던 불당이다. 1661년(현종 2년) 자수원(慈壽院)과 함께 철폐되었다.[4] 새로 짓거나 고친 건물의 내력, 공역 일시 등을 적어둔 문서.[5]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6] 정확히는 삼성그룹 계열사 호텔신라와 오쿠라호텔이 자매 호텔이란 인연으로 삼성문화재단이 순조롭게 반환받을 수 있었고, 국가에 기증한 것이다.#[7]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8]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9] 창방과 직접 만나 보를 받치는, 쇠서(소 혀 모양의 자재)를 두 겹으로 낸 공포.[10] 공포 대의 기둥 사이마다 상하에 위치한 도리 방향의 긴 부재 사이를 받쳐주기 위해 사용하는 부재.[11] 이익공에서 화반의 윗부분에 얹혀 장여와 도리를 받치는 구름 모양의 목재.[12] 高柱, 이름 그대로 굉장히 높은 기둥을 말한다.[13] 부재(部材)의 두 끝 부분에만 칠한 단청.[14] 가운데에만 창을 낸 뒤 위, 아래를 종이로 바른 형태.[15] 대표적으로 〈정도전〉 초반에서 고려 성균관 대성전으로 나온 곳이 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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