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 시기 한성제 휘하에서 태자의 하인으로 일했으며, 엄숙하고 위엄이 있음과 동시에 학문에 전념하여 방봉(房鳳)을 스승으로 모셔 곡량춘추(穀梁春秋)를 학습하였다. 신나라 초년 후패는 회평대윤(淮平大尹)이 되었다.
28년, 광무제가 유한을 재건한 이후 상서령에 임명되어 전한 시기의 문서들을 참조하여 많은 법령 문서를 작성하였다. 후패가 작성한 문서들은 광무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29년 , 복담(伏湛)을 이어 대사도,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37년 병사하자 광무제는 후패의 시호를 칙향애후(則鄕哀侯)라 한 뒤, 식읍 2천 6백호를 내렸으며 그의 아들인 후욱(侯昱)에게 뒤를 잇게 하였다.
551년, 후경이 소동을 축출하고 한나라의 황제로 즉위하자 후패의 후손임을 자처[2]함과 동시에 그를 시조로 추존하고 칠묘에 모셨다.
28년, 광무제가 유한을 재건한 이후 상서령에 임명되어 전한 시기의 문서들을 참조하여 많은 법령 문서를 작성하였다. 후패가 작성한 문서들은 광무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29년 , 복담(伏湛)을 이어 대사도,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37년 병사하자 광무제는 후패의 시호를 칙향애후(則鄕哀侯)라 한 뒤, 식읍 2천 6백호를 내렸으며 그의 아들인 후욱(侯昱)에게 뒤를 잇게 하였다.
551년, 후경이 소동을 축출하고 한나라의 황제로 즉위하자 후패의 후손임을 자처[2]함과 동시에 그를 시조로 추존하고 칠묘에 모셨다.
- 부친: 후씨(侯氏)
- 족부(族父): 후연(侯淵)
- 아들: 후욱(侯昱)
- 손자: 후건(侯建)
- 증손: 후창(侯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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