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에 황궁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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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왕궁(皇城化/Hoàng thành Huế)은 베트남 중부의 도시 후에에 있는 궁전으로, 1802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약 150여 년간 응우옌 왕조의 왕궁이었다. 인도차이나 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건물들이 심각하게 파괴되었으며, 현재는 경복궁처럼 복원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전쟁 시절에 입었던 피해가 워낙 컸던 탓에 거의 대부분의 건물들이 다시 복원되지 못한 상태로, 현존하는 건물들은 옛 시절의 25% 정도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1993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맨 위는 왕궁의 정문인 오문, 가운데는 정전인 태화전, 아래는 태화전의 내부 모습이다. |
빨간색으로 표시된 건물들이 현존하거나 복원된 건물들이며, 초록색으로 된 건물들은 현재 사라진 건물들이다. |
사진에서 보다시피 대부분의 건물들이 베트남 전쟁 시기에 불타 사라졌다. 가장 아래쪽에 있는 1번 건물이 바로 왕궁의 정문인 오문이며, 2번이 금천 역할을 하는 태액호이고 태액호 위에 놓인 다리가 중도교(中道橋, Cầu Trung Đạo)이다. 4번은 정전인 태화전 앞의 마당으로 비대조의(𡓏大朝儀)라고 부른다. 5번 건물이 바로 왕궁의 중심인 태화전(太和殿)이며, 6번 건물은 왕궁의 내정이자 왕실 가족들의 생활 공간인 자금성의 정문이었던 대궁문(大宮門)이다. 7번의 두 채의 건물들은 따부와 후부라고 하여 문무관원들이 대기하던 장소이며, 8번 건물은 황제의 집무실이었던 근정전(勤政殿)이다. 가장 거대한 10번 건물은 황제의 침전인 건성전(乾成殿)이며, 11번 건물은 황후의 침전인 곤태전(坤泰殿)이다. 12번 건물이 유럽과 베트남 양식이 혼합되어 지어졌던 건중루(建中樓)이다. 13번 건물은 황제가 독서를 하며 즐기던 태평루(太平樓)라 부르는 전각이며, 14번은 왕실 정원이다. 16번 건물은 보물들을 보관하던 누각이며, 17번 건물은 응우옌 왕조의 조상들을 모시던 조조묘(肇祖廟)이다. 18번 건물이 응우옌 가문의 시조를 모시는 태묘(太廟)이며, 19번 건물은 태황태후가 거주하던 장생궁(長生宮)이다. 20번 건물은 황태후가 거처하던 연수궁(延壽宮)이며, 21번은 왕가 선조들을 배향한 봉선전(奉先殿)이다.
22번 건물은 자롱 황제의 아버지를 모신 흥묘(興廟)이며, 23번 건물은 응우옌의 역대 황제들을 모신 세묘(世廟), 24번은 그 앞에 놓여 있는 9개의 청동 항아리를 의미하는 구정(九鼎)이라고 부른다. 25번 건물은 황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은 높다란 누각인 현임각(顯臨閣)이며, 26번과 27번, 28번 건물은 각각 성벽에 있는 동문과 서문, 그리고 북문이다. 참고로 27번의 북문 건물 옆에는 누사방무사(樓四方無事)라고 하여 황제가 휴식을 취하거나 경연을 열던 2층 누각이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29번 건물군은 왕실 내부의 궐내각사이며, 30번 건물군들은 후궁들이 머물던 처소이다.
자롱 황제는 후에 왕성을 지을 적에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을 본떠 짓도록 명령하였다. 아예 왕궁의 내정(內庭, 황제 일가가 생활하는 공간)을 자금성(Tử Cấm thành, 紫禁城, 뜨껌타잉)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원래 자금(紫禁)이라는 건 중국 자금성만의 고유명사라기보다는 한자문화권 전반에서의 일반명사적 성격이 짙다. 현재의 황거 이전에 일본 천황이 대대로 머물렀던 궁성이었던 교토어소의 중심 전각의 이름도 자신전(紫宸殿)이다. 자(紫)는 예로부터 황제 중심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말로서 하늘의 별들 가운데 중심을 뜻해서 황제의 거처를 표현하는 단골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금궁(禁宮) 역시 황제가 사는 곳이니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 해서 중국에서 옛날부터 자주 쓰이던 말이다.
후에 왕궁의 성벽은 둘레 2,500m, 남북길이 604m, 동서길이 620m, 성벽 높이 6.5m, 성벽두께 104cm에 달한다. 동서/남북 각각 622m 인 고구려의 안학궁과 거의 비슷하며, 동서 500m 남북 700m 로 알려져 있는 경복궁보다는 작다. 동서 760m 남북 960m 인 자금성과는 차이가 크다. 왕궁을 둘러싸고 있는 두 겹의 해자는 후에를 관통하여 흐르는 기다란 강인 흐엉강에서 물줄기를 끌어왔으며, 해자 안에 인공 섬과 정원 등을 만드는 등 그 규모도 매우 크다.
22번 건물은 자롱 황제의 아버지를 모신 흥묘(興廟)이며, 23번 건물은 응우옌의 역대 황제들을 모신 세묘(世廟), 24번은 그 앞에 놓여 있는 9개의 청동 항아리를 의미하는 구정(九鼎)이라고 부른다. 25번 건물은 황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은 높다란 누각인 현임각(顯臨閣)이며, 26번과 27번, 28번 건물은 각각 성벽에 있는 동문과 서문, 그리고 북문이다. 참고로 27번의 북문 건물 옆에는 누사방무사(樓四方無事)라고 하여 황제가 휴식을 취하거나 경연을 열던 2층 누각이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29번 건물군은 왕실 내부의 궐내각사이며, 30번 건물군들은 후궁들이 머물던 처소이다.
자롱 황제는 후에 왕성을 지을 적에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을 본떠 짓도록 명령하였다. 아예 왕궁의 내정(內庭, 황제 일가가 생활하는 공간)을 자금성(Tử Cấm thành, 紫禁城, 뜨껌타잉)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원래 자금(紫禁)이라는 건 중국 자금성만의 고유명사라기보다는 한자문화권 전반에서의 일반명사적 성격이 짙다. 현재의 황거 이전에 일본 천황이 대대로 머물렀던 궁성이었던 교토어소의 중심 전각의 이름도 자신전(紫宸殿)이다. 자(紫)는 예로부터 황제 중심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말로서 하늘의 별들 가운데 중심을 뜻해서 황제의 거처를 표현하는 단골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금궁(禁宮) 역시 황제가 사는 곳이니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 해서 중국에서 옛날부터 자주 쓰이던 말이다.
후에 왕궁의 성벽은 둘레 2,500m, 남북길이 604m, 동서길이 620m, 성벽 높이 6.5m, 성벽두께 104cm에 달한다. 동서/남북 각각 622m 인 고구려의 안학궁과 거의 비슷하며, 동서 500m 남북 700m 로 알려져 있는 경복궁보다는 작다. 동서 760m 남북 960m 인 자금성과는 차이가 크다. 왕궁을 둘러싸고 있는 두 겹의 해자는 후에를 관통하여 흐르는 기다란 강인 흐엉강에서 물줄기를 끌어왔으며, 해자 안에 인공 섬과 정원 등을 만드는 등 그 규모도 매우 크다.
후에 왕궁의 전성기 시절 모습 |
1802년 6월에 응우옌 왕조의 창업군주인 자롱 황제가 즉위한 이후, 자롱제는 응우옌 가문의 중심지였던 후에에 새로운 왕궁을 짓기로 결심한다. 이후 1804년에 왕궁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수 천명에 달하는 인력이 동원되어 왕궁 주위의 길이 10km에 달하는 해자, 성벽, 그리고 왕궁을 지었다고 전한다. 이후 후에 왕궁은 민망 황제의 시기와 뜨득 황제의 재위기에 대대적인 개축을 거치며 약 150여 년 간 응우옌 왕조의 중심지로 자리하였으며, 그 절정기에는 수많은 전각들과 누각, 그리고 유럽식 건물들까지 들어서며 수백여 칸에 달하는 거대한 왕궁으로서 상당히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880년대에는 프랑스군이 쳐들어오고, 응우옌 왕조의 힘이 유명무실해지고 황제의 권한이 바닥으로 추락하면서 후에 왕궁 역시 함께 쇠퇴기를 맞았는데, 황제는 프랑스의 꼭두각시로 전락하면서 자기 앞가림에만 급급한 처지로 변해버렸고 이에 따라 왕궁도 대대적인 개축이나 보수 작업을 하지 못하면서 열대의 태풍, 그리고 홍수 등 자연재해 등을 겹겹이 맞으며 점차 쇠락해 갔던 것이다. 이때만 해도 명색이 한 나라의 왕궁이었던 덕에 기본적인 골조나 보수 작업은 간간히 이루어졌고, 자롱 황제 시기에 지어진 건물들도 대부분 온전히 남아있는 등 현재처럼 휑한 모습은 아니었다. 프랑스는 일본 제국이 조선 경복궁에 했던 것과 같이 대놓고 민족 정신을 탄압하기 위하여 궁궐까지 밀어버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 물론 베트남에는 황실이 꼭두각시일망정 명맥은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후에 왕궁이 본격적으로 파괴되어버린 시기는 20세기 중후반부이다. 1947년에 베트민이 후에 왕궁을 점령했고, 프랑스군이 이를 쫒아내기 위하여 왕궁에서 전투를 벌이면서 전각 상당수가 포격과 총격으로 날아가버렸고, 이때 황제와 황후의 침전이 불타버리는 등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왕궁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던 1968년 1월 31일에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후에를 장악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공습전을 펼치며 왕궁에 무자비한 폭격을 가했고, 전투 후반부에는 후에 왕궁 내부에서 베트남 공산군과 남베트남군이 본격적으로 격돌하며 왕궁은 옛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폐허 가까운 상태로 변해버렸다. 연합국 측은 베트콩이 해자 외벽에 설치한 대공포를 무력화하기 위하여 미사일을 왕궁의 성벽에다 발포했고, 이로 인하여 무려 10km에 달하던 왕궁의 성벽 역시 한낱 돌더미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구정 공세 때는 아예 후에의 흐엉 강을 경계로 해서 강 남쪽은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북쪽은 베트콩이 대치하는 구도가 되었다. 베트콩은 후에왕궁에 들어가 저항했고 미군은 왕궁을 공습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경우에는 후에의 역사적 가치를 알았기에 함부로 소이탄이나 공습으로 후에에 폭탄을 쏟아붓는 짓은 최대한 자제하려 들었으나,[2] 시가전과 전쟁의 급박한 상황에서 이를 지키기는 대단히 어려웠으며 결국 후에 왕궁에도 엄청난 피해가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전투로 인하여 후에 왕궁의 150여 개에 달하는 전각들 중 10개만이 겨우 살아남았으며, 이 10동의 건물마저도 여기저기 총탄을 맞거나 일부 불타는 등 왕궁 내에서 멀쩡한 건물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전쟁 이후 베트남 정부는 후에 왕궁의 역사적 가치 때문에 왕궁의 입구이자 얼굴인 오문과 태화전을 우선 복원하고, 해자를 정비하는 등 점차 왕궁의 복원 작업을 실시하고는 있으나, 워낙 전쟁통에 왕궁 대부분이 철저하게 박살난 탓에 아직까지 큰 진척을 보이고 있지는 못하다. 현재 후에 왕궁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은 전성기 왕궁의 모습의 25% 정도도 못 미친다고 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왕궁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던 황제와 황후의 침전은 현재 기단부도 찾아보기 어려우며, 왕궁 내부 대부분은 잔디밭으로 가득한데 이 잔디밭 대부분에 한때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1993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그러나 1880년대에는 프랑스군이 쳐들어오고, 응우옌 왕조의 힘이 유명무실해지고 황제의 권한이 바닥으로 추락하면서 후에 왕궁 역시 함께 쇠퇴기를 맞았는데, 황제는 프랑스의 꼭두각시로 전락하면서 자기 앞가림에만 급급한 처지로 변해버렸고 이에 따라 왕궁도 대대적인 개축이나 보수 작업을 하지 못하면서 열대의 태풍, 그리고 홍수 등 자연재해 등을 겹겹이 맞으며 점차 쇠락해 갔던 것이다. 이때만 해도 명색이 한 나라의 왕궁이었던 덕에 기본적인 골조나 보수 작업은 간간히 이루어졌고, 자롱 황제 시기에 지어진 건물들도 대부분 온전히 남아있는 등 현재처럼 휑한 모습은 아니었다. 프랑스는 일본 제국이 조선 경복궁에 했던 것과 같이 대놓고 민족 정신을 탄압하기 위하여 궁궐까지 밀어버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 물론 베트남에는 황실이 꼭두각시일망정 명맥은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후에 왕궁이 본격적으로 파괴되어버린 시기는 20세기 중후반부이다. 1947년에 베트민이 후에 왕궁을 점령했고, 프랑스군이 이를 쫒아내기 위하여 왕궁에서 전투를 벌이면서 전각 상당수가 포격과 총격으로 날아가버렸고, 이때 황제와 황후의 침전이 불타버리는 등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왕궁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던 1968년 1월 31일에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후에를 장악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공습전을 펼치며 왕궁에 무자비한 폭격을 가했고, 전투 후반부에는 후에 왕궁 내부에서 베트남 공산군과 남베트남군이 본격적으로 격돌하며 왕궁은 옛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폐허 가까운 상태로 변해버렸다. 연합국 측은 베트콩이 해자 외벽에 설치한 대공포를 무력화하기 위하여 미사일을 왕궁의 성벽에다 발포했고, 이로 인하여 무려 10km에 달하던 왕궁의 성벽 역시 한낱 돌더미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구정 공세 때는 아예 후에의 흐엉 강을 경계로 해서 강 남쪽은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북쪽은 베트콩이 대치하는 구도가 되었다. 베트콩은 후에왕궁에 들어가 저항했고 미군은 왕궁을 공습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경우에는 후에의 역사적 가치를 알았기에 함부로 소이탄이나 공습으로 후에에 폭탄을 쏟아붓는 짓은 최대한 자제하려 들었으나,[2] 시가전과 전쟁의 급박한 상황에서 이를 지키기는 대단히 어려웠으며 결국 후에 왕궁에도 엄청난 피해가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전투로 인하여 후에 왕궁의 150여 개에 달하는 전각들 중 10개만이 겨우 살아남았으며, 이 10동의 건물마저도 여기저기 총탄을 맞거나 일부 불타는 등 왕궁 내에서 멀쩡한 건물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전쟁 이후 베트남 정부는 후에 왕궁의 역사적 가치 때문에 왕궁의 입구이자 얼굴인 오문과 태화전을 우선 복원하고, 해자를 정비하는 등 점차 왕궁의 복원 작업을 실시하고는 있으나, 워낙 전쟁통에 왕궁 대부분이 철저하게 박살난 탓에 아직까지 큰 진척을 보이고 있지는 못하다. 현재 후에 왕궁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은 전성기 왕궁의 모습의 25% 정도도 못 미친다고 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왕궁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던 황제와 황후의 침전은 현재 기단부도 찾아보기 어려우며, 왕궁 내부 대부분은 잔디밭으로 가득한데 이 잔디밭 대부분에 한때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1993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사진 | 설명 |
오문(午門, Cửa Ngọ Môn) 왕궁의 남쪽 정문으로, 중앙 누각에는 황제의 상징인 황색 기와를 덮고 양 옆 누각들에는 청색 기와를 얹은 것이 특징이다. 1833년 민망 황제 시기에 완성되었으며, 중앙에 있는 문은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었고, 그 양 옆의 두 문은 대신들이 사용하였으며, 양 옆에 붙어있는 2개의 문은 시종이나 궁녀들이 사용하여 드나들었다. 2층으로 된 누각은 '푸 반 라우'라고 부르는데, 이를 거의 100여 개에 달하는 철목들이 떠받치고 있으며, 용마루와 잡상 자리에 수많은 봉황상들을 설치하였다.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가 퇴위 선언문을 읽고 응우옌 왕실의 종결을 선언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 |
태화전(太和殿, Điện Thái Hòa) 왕궁의 정전(正殿)으로, 13명에 달하는 황제들이 이 곳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자롱 황제가 1805년 2월에 착공하였으며, 그해 10월에 완공하였다. 1833년에 민망 황제가 태화전을 더더욱 개축하였고, 카이딘 황제 시기에 또다시 개축 작업을 거쳤다. 중국, 한국 등 궁궐의 정전들에 비하여 중층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건물의 높이가 낮아 보이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비가 많이 내리는 베트남의 날씨와 베트남의 전통 건축 방식 때문에 그래 보이는 것이다. 또한 앞에서 볼때는 보이지 않지만, 옆에서 보면 2개의 전각이 마치 이어져 있는 것처럼 지어진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내부는 건물 바깥쪽이 천장이 높은 편이며 안쪽이 오히려 천장이 낮은데, 이는 바깥쪽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 오히려 건물 내부 공간이 더 넓어 보이는 착각을 준다고 한다. 중심에는 황금빛 옥좌가 놓여있다. 지붕의 용마루에는 황제의 격에 맞게 총 9마리의 용이 장식되어 있다. 오문에서 태액호(太液湖, Hồ Thái Dịch) 위에 놓인 중도교(中道橋, Cầu Trung Đạo)를 건너면 바로 보인다. 면적은 1200m²이다. | |
태묘(太廟, Thái Miếu) 응우옌 왕조의 시조들을 기리는 사당으로, 응우옌 가문의 시조인 응우옌호앙에서 응우옌푹투안까지를 모시고 있었다. 1804년 자롱제 연간에 남서쪽에 있는 세묘와 짝을 이루어 태화전의 남동쪽에 세워졌으며, 응우옌 왕조 시기에 세워진 가장 거대한 목조 건축물이기도 했다. 벽돌로 된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사방에 5개의 문이 있었고 매년 5번씩 제를 지냈다. 프랑스와 베트민의 전투 과정에서 완전히 파괴되어 현재는 볼 수 없다. | |
세묘(世廟, Thế Miếu) 초대 황제인 자롱 황제의 묘(廟)로 태화전 왼쪽에 있으며, 정전을 현림각(顯臨閣, Hiển Lâm Các)이라 한다. 본디 자롱 황제의 아버지인 응우옌푹루언을 모시는 사당이었으나, 민망 황제가 크게 증축하면서 자롱 황제의 사당으로 바꾸었다. 이후 역대 황제들이 모두 이 세묘에 배향되면서 한국의 종묘와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높이가 1m 정도 되는 석조 기단 위에 놓여 있으며, 정면 11칸, 그 양 옆 끝에 따로 2칸이 있는 건물로, 안에는 자롱 황제, 민망 황제, 티에우찌 황제, 뜨득 황제, 동카인 황제, 카이딘 황제와 그 황후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앞에는 구정(九鼎)이라고 하는 아홉 개의 솥이 진열되어 있다. | |
흥묘(興廟, Hưng miếu) 자롱 황제의 부모에게 바쳐진 사당으로, 아버지인 응우옌푹루안을 모시고 있다. 자롱제는 제위에 오른 직후 곧바로 아버지를 모시는 사당을 지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4개월만에 공사가 끝났다고 전하며 1805년에 처음으로 제를 지냈다. 이후 민망 황제 시기인 1821년에 이 사당을 허물고 새롭게 세묘를 증축하였고, 원래 있던 흥묘는 뒷편으로 옮겨 새로 지었다. 흥묘 역시 1947년에 프랑스군과 베트민과의 전투에서 전소하였으며, 바오다이 황제가 뒷편에 있는 전각을 옮겨와 복구하였으나 이 역시 베트남 전쟁 시절에 불타 버렸다. 현존하는 건물은 1995년에 복원된 것이다. | |
봉선전(奉先殿, Điện Phụng Tiên) 왕궁의 서부에 있던 전각으로, 응우옌 왕조의 황제와 황후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었다. 여성은 제에 참가할 수 없었던 위의 세묘나 태묘와는 달리 여성들도 봉선전에서 제를 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자롱제 시기에 처음으로 창건되었으며, 민망 황제 시기에 이름을 봉선전으로 개칭하였고 왕가의 사원인 동시에 도자기, 제기류, 옥으로 치장한 보석류 등 각종 보물 수장고로도 사용되었다. 1947년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으로 크게 훼손되었으며, 현재는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9칸의 거대한 건물로 세묘와 비슷한 크기로 추정되며, 넓은 앞마당에 고른 박석이 깔려있어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 |
현림각(顯臨閣, Hiển Lâm các) 응우옌 왕조의 황제들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지어진 누각이다. 높이가 약 17m 정도로 후에 왕궁 내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으며, 1층은 5칸, 2층은 3칸, 3층은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에는 금빛 구름을 희롱하는 용들이 새겨져 있으며, 특히 1층의 기둥에 꽃과 용, 구름 등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현존하는 현임각 건물은 베트남 전쟁 시절에 파괴되었던 것을 2001년에 완전히 복원한 것이다. | |
조조묘(肇祖廟, Triệu Tổ miếu) 자롱 황제 3년인 1804년에 처음으로 세워졌으며, 태묘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레 왕조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인, 그리고 응우옌 가문의 선조 격에 해당하는 응우옌 김에게 바쳐졌으며, 매년 5차례씩 제를 올린다. | |
장생궁(長生宮, Cung Trường Sanh) 장생궁 권역은 본디 황제가 황태후나 황후와 함께 경치를 관람하는 정원이었으며, 후에는 태황태후의 침전으로도 쓰였다. 이후 민망 황제가 1821년에 소규모로 누각을 지어 이 곳에서 꽃들을 감상하였으며, 나중에는 뜨득 황제가 회랑을 짓는 등 대규모 개축하였다. 전쟁 도중 완전히 소실되었고, 2005년 1월에 완전히 복원되어 현재에 이른다. 장생궁 내부는 정원으로 꾸며져 작은 가산들과 개울, 그리고 다채로운 꽃들을 심어놓은 화단 등이 있다. | |
연수궁(延壽宮, Cung Diên Thọ) 왕궁의 서쪽에 자리한 황태후의 침전으로, 봉선전의 북쪽, 장생궁의 남쪽에 있다. 넓이가 약 17,500제곱미터로 현재 남아있는 후에 왕궁 전체에서 가장 거대한 궁전이며, 1945년 응우옌 왕조 멸망 이래 각종 전쟁과 전투의 화를 피해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극소수의 전각들 중 하나이다. 1804년에 자롱제가 처음으로 건설을 지시하였으며, 그 이래로 역대 황태후들이 이 곳에 머물렀다. 1820년에 민망 황제가 대규모 개축을 진행하려다 역병이 돌아 이루지 못했으며, 1846년에 뜨득 황제에 이르러서야 대대적인 개축 작업이 이루어졌다. 정전은 정면 7칸, 양 옆 2칸의 거대한 건물이며, 흑색 목재들과 금빛 재료들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용마루에는 봉황이 장식되어 있으며, 사찰과 거대한 정원, 그리고 유럽풍의 누각을 따로 거느리고 있다. 지어진 이래 8명의 황후들과 4명의 황태후들이 이 곳에서 머물렀다. | |
사방무사루(四方無事樓, Lầu Tứ Phương Vô Sự) 사방무사루는 왕궁 북문에 자리한 2층 누각으로, 역대 황제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왕손들이 경연을 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베트남 전통 건축과 20세기 프랑스 건축 양식이 어우러져 있으며, 내부는 완전히 유럽식으로 지어져 벽돌과 시멘트로 이루어져 있다. 베트남 전쟁 시기인 1968년에 심각하게 훼손되어 거의 반파된 상태로 남아있었으나, 2008년에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
사진 | 설명 |
대궁문(大宮門 Đại Cung môn) 왕궁의 내성이자 생활 공간인 자금성의 정문으로, 민망 황제 시기에 처음으로 지어졌다. 황제의 격에 맞게 5칸의 문이었으며, 가운데의 문은 오직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베트남 전쟁 시기에 파괴되어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양 옆으로 연결된 회랑을 따라가면 '따부'와 '후부'라고 하여 예식을 준비하는 누각들로 향할 수 있었으며, 대궁문을 지나면 근정전으로 나올 수 있었다. | |
좌무와 우무(左廡/右廡 Tả vu và Hữu vu) 근정전 바로 앞 마당 양 옆에 있는 2채의 건물로, 따부는 문관을 위한, 후부는 무관을 위한 건물이었다. 이 곳에서 신하들이 예식을 준비하거나 국사를 논의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9세기에 지어진 것이다. 전쟁으로 인하여 크게 반파된 것을 1980년대에 폴란드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복원하였다. | |
근정전(勤政殿 Điện Cần Chánh) 근정전은 후에 왕궁에서 가장 중요한 궁전들 중 하나로, 황제가 외교 사절들을 접견하거나 연회, 궁정 행사 등을 거행한 황제의 집무 궁전이었다. 자롱 황제 3년인 1804년에 지어졌으며, 이후 여러 번에 걸쳐 개축과 보수 작업을 거쳤다. 자금성 내에서 가장 거대했던 건물로, 1m에 달하는 석조 기단 위에 지어져 있었으며 80개의 철목 기둥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고 정면 7칸, 양옆 2칸의 대규모 건축물이었다. 황금으로 만든 옥좌와 유리로 만든 베트남 지도 등 각종 보물들을 전시해 놓기도 하였다. 1947년에 완전히 폭파되어 사라졌으며, 현재까지도 복원되지 못하였다. | |
건성전(乾成殿 Điện Càn Thành) 황제의 침전으로, 근정전 바로 뒤에 자리한 거대한 규모의 궁전이었다. 황제의 침전답게 1.5m 젇도의 석조 기단 위에 세워져 있었으며, 3개의 회랑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7개에 달하는 방을 가지고 있었다. 지붕은 황금빛 기와로 씌워져 있었으며, 문은 유리로 만들어져 왕궁 내부에서 가장 화려하였으며 뒤쪽으로 정원과 후궁들의 궁전으로 바로 갈 수 있게 기와 회랑이 만들어져 있었다고 전한다. 앞쪽으로는 물이 채워진 얕은 연못과 분수가 있었으며, 주변에 꽃을 심어 매우 다채로웠다고 한다. 1947년 2월 전소하여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 |
곤태전(坤泰殿 Điện Khôn Thái) 건성전 바로 뒤에 위치한 거대한 궁전으로, 황후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다. 1804년인 자롱 황제 3년에 처음으로 세워졌으며, 전면 7칸, 양 옆 2칸의 규모였다고 전한다. 옆에 궁정 극장이 있어 황제가 황후와 함께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 타 궁전과 비슷하게 황금빛 기와로 덮여 있었으며, 앞에는 정원과 나무들이 심겨 있었다. 1947년 전투 도중 폭격을 맞아 사라져 현재에는 기단부만이 남아있다. | |
건중루(建中樓 Lầu Kiến Trung) 건중루는 자금성의 맨 후방에 자리했던 궁전으로, 카이딘 황제가 19세기 후반에 유럽 양식을 섞어 만든 생활용 궁전이다. 처음에는 황제의 집무실 용도로 건축되었으나, 시간이 흐르자 황실 가족들의 생활 장소로 용도가 바뀌었다. 프랑스 양식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 베트남 전통 양식이 섞인 2층 건물로, 중간부에 문이 5개, 양 옆으로 문이 2개씩 더 있었다. 지붕은 전통식 황와로 덮었으며, 앞에는 유럽식으로 조경된 정원이 있었다. 1925년 카이딘 황제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며,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는 거의 이 곳에서 살았다. 1946년에 베트남 공산군의 공격으로 인하여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2018년부터 복원을 개시해 2024년 개방했다. 하지만 복원이 고증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 |
태평루(太平樓 Thái Bình lâu) 근정전 주위에 위치한 2층짜리 누각으로, 1919년 카이딘 황제가 건설하였으며 1921년에 완공되었다. 보통 황제가 책을 읽는 등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으며, 높이는 9.55m, 노란 기와로 덮여 있고 장수를 기원하는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또한 용마루에는 봉황과 용 등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현재 건물은 베트남 전쟁 시기에 한 번 파괴된 것을 1990년대에 들어서 다시 복원한 것이다. |
왕릉들은 후에 시가지 바깥 교외에 퍼져있다. 베트남 전쟁의 피해를 덜 받은 편이라 보존상태가 왕궁보다 좋은 곳도 많다. 아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 봉분과 일부 구조물만 있는 한국식 왕릉과 달리 건축물이 좀 더 많이 배치된 것이 베트남 왕릉의 특징이다. 사실상 별궁에 가까운 곳도 있다.
사진 | 설명 |
천수릉(天授陵 Thiên Thọ Lăng) 왕궁 바깥에 있는 자롱 황제의 무덤으로, 1814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1820년에 완공되었다. 42개의 크고 작은 언덕과 가산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롱 황제가 생전에 자주 공사현장을 찾아갈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능묘이다. 두리안 나무와 소나무 등이 주위에 빽빽이 심어져 있다. | |
효릉(孝陵 Hiếu lăng) 왕궁 바깥에 있는 민망 황제의 무덤으로, 1840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1843년에 완공되었다. 이 무덤을 짓는 데에 1만 명의 인부들이 동원되었으며, 거대한 호수와 숲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 |
창릉(昌陵 Xương Lăng) 왕궁 바깥에 있는 티에우찌 황제의 무덤으로, 1848년 2월에 건설을 시작하여 1848년에 완공되었다. 두 선황들의 묘소를 참고하였으나 자연과 더욱 동화된 모습을 보였는데, 전쟁으로 인하여 파괴되어 현재는 일부만이 남아있다. | |
겸릉(謙陵 Khiêm Lăng) 왕궁 바깥에 있는 뜨득 황제의 무덤으로, 1848년 2월에 건설을 시작하여 1873년에 완공되었다. 베트남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릉들 중 하나로 꼽히며, 그 규모와 화려함도 상당하다. 그러나 워낙 가혹하게 공사 인력들을 부린 탓에 공사 도중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 |
안릉(安陵 An Lăng) 왕궁 바깥에 있는 죽득 황제의 무덤으로, 죽득 황제가 3일만에 폐위되어 유폐되어 죽었고, 이후 추존된 탓에 타 황제들의 무덤에 비하여 훨씬 규모가 작고 간소한 편이다. | |
사릉(思陵 Tư Lăng) 왕궁 바깥에 있는 동카인 황제의 무덤으로, 1888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재정 부족으로 건설이 지지부진하다가 1917년에서야 완공되었다. 이전 왕릉들이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사릉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민간의 영향을 많이 받아 황금빛이 덜하고 소박한 느낌을 준다. | |
응릉(應陵 Ứng Lăng) 왕궁 바깥에 있는 카이딘 황제의 무덤으로, 1920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1931년에 완공되었다. 카이딘 황제는 자신의 영묘를 짓기 위하여 전역의 세금을 30% 인상할 정도로 묘 건설에 열성을 올렸고, 이로 인하여 베트남의 재정은 갈수록 약화되었다. 카이딘 황제의 무덤은 이전 황제들의 묘에 비하면 규모는 훨씬 작은 축에 속하지만, 금과 색유리, 보석 등을 많이 사용하여 그 화려함과 정교함은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굉장히 뛰어난 편이다. 왕의 석관 바로 위에는 황금으로 장식한 황제의 상이 있다. |
언어별 명칭 | |
후에 궁궐의 정형된 명칭은 없으며, 전통적으로 동양에서 사용하였던 명칭인 대내, 자금성, 황성 등 황궁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만을 사용한다. 이것이 특이한 것은 아니다. 중국의 자금성의 경우 궁명이 보통명사이며 선양고궁 역시 정해진 명칭이 없다. 또한 일본 역시 어소, 황거 등의 보통명사를 사용한다.
유네스코 등록 역시 궁궐을 하나로 놓지 않고 후에 요새(Citadel of Huế), 대내(Imperial City), 자금성(Purple Forbidden City)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고 이들을 모두 모아서 등록한 명칭이 후에 성, 후에 궁 등이 아니라 후에 기념물 복합지구(Complex of Hué Monuments)인 이유도 이런 이유에 의해서이다.
세부적으로 놓고 보면 명칭마다 약간씩 지칭하는 대상 및 뉘앙스가 다른데, 황성(hoàng thành)/경성(kinh thành)은 주로 금성홍기 깃대가 달린 요새 및 요새 내부의 유적군 전체를 칭할 때에 사용하며, 대내는 요새 내부의 궁성만을 칭하는 경우에, 자금성은 연조(황실 구성원의 실 생활공간)을 칭할 때에 사용한다.
FPS 게임인 라이징 스톰 2: 베트남에서 나오는 맵 중 하나로 나온다. 현재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게임 내적 밸런스라던지... 슈프리머시와 테러토리 모드 2가지의 종류가 있으며 주로 테러토리가 선호된다. 슈프리머시의 경우 과거에는 북베트남이 강세였으나 패치 이후 점령지 위치가 바뀌어 미군에게 매우 유리해졌고 E 거점 방향으로 갈 수 있었던 통로가 막힘에 따라 E 방면으로의 진출이 불리해져 결과적으로 미군에게 자주 지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문 앞에 있으면 현지인들이 영어로 안내해주겠다고 접근하며, 안에서는 인력거꾼이 나선다. 바가지 쓰기 싫으면 그냥 가볍게 미소지으며 지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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