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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파의 구호, 존황토간(尊皇討奸) 천황을 받들어 간신들을 토벌한다는 뜻이다. | |
황도파 / 皇道派[1] | |
영어 | Imperial Way Faction / Kōdōha |
활동기간 | |
이념 | |
스펙트럼 | |
연관 사건 | |
반대 세력 |
어딘가 잘못됐다. 천황을 구름 위에 떠받들고, 구름 아래에서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현상이 오늘날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었다.[2] 이것은 요운(妖雲)[3]이다. 이 요운을 하루라도 빨리 열어젖히고 진짜 일본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요운을 걷어낸 새벽에 천황께서 니주바시(二重橋) 앞에 나오시게 해서 국민과 함께 천황을 헹가래 치지 않겠는가?” 이것이 우리 청년장교들 사이의 솔직한 기분이었다.
ー오오쿠라 에이이치(大藏梁一)
황도파의 구성은 장성급, 좌관급, 위관급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장성급 인물에는 파벌의 영수격인 아라키 사다오와 부영수격인 마사키 진자부로가 있었다. 아라키는 시베리아 출병 당시 러시아 사회의 후진성에도 불구하고 노농적군이 철저한 규율과 감투정신을 가지고 있음에 놀라, 소련이 산업화를 진행하기 전에 빨리 시베리아를 정복해야 한다는 대소주전론자가 되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파벌화된 이유는 우가키 가즈시게 육군대신의 우가키 군축이었다. 우가키는 나가타 테츠잔을 비롯한 엘리트 군사관료들을 중용했는데, 이 우가키 인맥, 즉 훗날의 통제파는 소련의 계획개발경제를 높이 평가한 지소파, 반영미파였다.
한편 좌관급은 일석회라는 사조직에서 시작한다. 일석회는 당시 일본 군부를 다 해처먹고 있던 삿초 번벌에 대한 반항심을 가진 소장파 장교들의 모임이었는데, 1차대전 당시 유럽 주재무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일본의 군사적 수준이 유럽의 총력전에 비해 뒤떨어졌음을 목격하고 군의 현대화와 총동원체제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 모임의 지도자가 나가타 테츠잔과 오바타 토시로였는데, 1932년 나가타와 오바타가 분열하면서 오바타 세력이 황도파에 합류하게 되었다.
위관급은 찢어지게 가난해서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군에 들어온 도호쿠 지방 출신 청년장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도호쿠의 문맹률과 농촌의 피폐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친가가 망하고 그 자매들이 인신매매로 팔려가는 병사들의 고충을 이해했다. 그리고 동시에 인사적체로 인해 진급을 못하고 있는 점도 그들이 사회에 대한 불만을 키우는 주요 요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위관급 청년장교들은 기타 잇키의 국가개조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부패한 군 상층부를 재벌들과 함께 쓸어버리자는 국가개조론은, 농촌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청년장교 자신들의 인사적체 해결을 위해서도 마땅한 것이었다.
1931년에 청군파[4]가 일으킨 3월 사건과 10월 사건의 여파로 아라키 사다오가 이누카이 내각의 육군대신으로 입각했다. 아라키는 스기야마 하지메, 카나야 한조, 니노미야 하루시게 등 우가키 인맥(통제파)를 한직으로 내쫓고 마사키를 참모차장으로 삼고 야나가와 헤이스케, 야마시타 도모유키 등 자기 인맥의 좌관급을 요직에 꽂았다. 하지만 육군성 중앙은 이미 통제파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아라키 인맥은 고립되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아라키를 선두로한 황도파 장교들은 그동안 통제파에 소외당해 중앙의 군정을 맡아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무능했다. 그들은 기껏 장악한 군정조직을 통해 무엇을 해본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 할 능력도 없었다.
그래서 아라키 일파는 자신들의 무력적 행동대장을 맡아줄 존재로 위관급 청년장교들을 끌어들였다. 아라키와 마사키는 쇼와 유신을 주장하는 청년장교들을 격려하면서 그들에게 지지 의사를 표명해 포섭했다. 청년장교들은 아라키를 "무사성충의 인격자"로 숭배하면서 아라키 인맥에 합류했고, 이로써 1930년대 초에 비로소 황도파가 형성되었다.
장성급 인물에는 파벌의 영수격인 아라키 사다오와 부영수격인 마사키 진자부로가 있었다. 아라키는 시베리아 출병 당시 러시아 사회의 후진성에도 불구하고 노농적군이 철저한 규율과 감투정신을 가지고 있음에 놀라, 소련이 산업화를 진행하기 전에 빨리 시베리아를 정복해야 한다는 대소주전론자가 되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파벌화된 이유는 우가키 가즈시게 육군대신의 우가키 군축이었다. 우가키는 나가타 테츠잔을 비롯한 엘리트 군사관료들을 중용했는데, 이 우가키 인맥, 즉 훗날의 통제파는 소련의 계획개발경제를 높이 평가한 지소파, 반영미파였다.
한편 좌관급은 일석회라는 사조직에서 시작한다. 일석회는 당시 일본 군부를 다 해처먹고 있던 삿초 번벌에 대한 반항심을 가진 소장파 장교들의 모임이었는데, 1차대전 당시 유럽 주재무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일본의 군사적 수준이 유럽의 총력전에 비해 뒤떨어졌음을 목격하고 군의 현대화와 총동원체제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 모임의 지도자가 나가타 테츠잔과 오바타 토시로였는데, 1932년 나가타와 오바타가 분열하면서 오바타 세력이 황도파에 합류하게 되었다.
위관급은 찢어지게 가난해서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군에 들어온 도호쿠 지방 출신 청년장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도호쿠의 문맹률과 농촌의 피폐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친가가 망하고 그 자매들이 인신매매로 팔려가는 병사들의 고충을 이해했다. 그리고 동시에 인사적체로 인해 진급을 못하고 있는 점도 그들이 사회에 대한 불만을 키우는 주요 요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위관급 청년장교들은 기타 잇키의 국가개조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부패한 군 상층부를 재벌들과 함께 쓸어버리자는 국가개조론은, 농촌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청년장교 자신들의 인사적체 해결을 위해서도 마땅한 것이었다.
1931년에 청군파[4]가 일으킨 3월 사건과 10월 사건의 여파로 아라키 사다오가 이누카이 내각의 육군대신으로 입각했다. 아라키는 스기야마 하지메, 카나야 한조, 니노미야 하루시게 등 우가키 인맥(통제파)를 한직으로 내쫓고 마사키를 참모차장으로 삼고 야나가와 헤이스케, 야마시타 도모유키 등 자기 인맥의 좌관급을 요직에 꽂았다. 하지만 육군성 중앙은 이미 통제파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아라키 인맥은 고립되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아라키를 선두로한 황도파 장교들은 그동안 통제파에 소외당해 중앙의 군정을 맡아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무능했다. 그들은 기껏 장악한 군정조직을 통해 무엇을 해본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 할 능력도 없었다.
그래서 아라키 일파는 자신들의 무력적 행동대장을 맡아줄 존재로 위관급 청년장교들을 끌어들였다. 아라키와 마사키는 쇼와 유신을 주장하는 청년장교들을 격려하면서 그들에게 지지 의사를 표명해 포섭했다. 청년장교들은 아라키를 "무사성충의 인격자"로 숭배하면서 아라키 인맥에 합류했고, 이로써 1930년대 초에 비로소 황도파가 형성되었다.
아라키는 사이토 내각에서도 육군대신으로 유임되었지만, 무능하여 대장성과의 육군예산협상에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아라키가 무능으로 인해 육군성 내부의 인망을 잃는 가운데 참모본부에서도 마사키가 실권을 전횡하자 참모총장인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이 불쾌감을 가졌다. 한편 참모본부 제3부장 오바타는 제2부장 나가타와 대소, 대중 전략을 두고 대립하며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라키가 바람을 불어넣은 청년장교들은 하루빨리 제2유신을 단행하자고 밖에서 난리를 쳐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아라키는 1934년 술을 과음했다가 폐렴에 걸려 육군대신에서 사임한다. 그는 후임으로 마사키를 추천했지만 마사키의 독단에 질렸던 간인노미야 친왕이 비토하여 낙마하고 하야시 센주로가 육군대신이 되었다. 마사키는 하야시의 후임으로 교육총감이 되었다. 그 뒤 황도파 막료들은 중앙에서 야전으로 쫓겨나고, 동년 11월 츠지 마사노부가 황도파 청년장교들을 색출해 고발하는 육군사관학교 사건이 벌어지면서 통제파의 마사키 배제공작이 시작되었다. 이듬해 7월 마사키는 하야시와 간인노미야에 의해 강제로 경질되었고 와타나베 죠타로가 후임으로 임명된다.
이렇게 황도파의 장성급과 좌관급은 군부 중앙의 기반을 모두 잃었다. 이에 불만을 가진 위관급 황도파의 불만은 8월의 아이자와 사건과 이듬해 2월의 2.26 사건이라는 초대형 자폭을 터뜨리면서 황도파는 철저히 숙군되어 파벌로서 괴멸한다. 예편당하지 않고 현역에 남은 황도파 장교는 야마시타 등 극소수에 그쳤다.
1940년 이후 중일전쟁의 정세가 슬슬 늘어지기 시작하며 군부 내에 통제파의 정책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늘어나자 야나가와 헤이스케 등 군 현역에 남았던 극소수의 황도파 장교들을 주축으로 약간 세력을 회복했고, 히라누마 기이치로 등 관념우파와 손잡고 고노에 후미마로의 신체제 운동을 결딴내는 것에 한몫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아라키는 1934년 술을 과음했다가 폐렴에 걸려 육군대신에서 사임한다. 그는 후임으로 마사키를 추천했지만 마사키의 독단에 질렸던 간인노미야 친왕이 비토하여 낙마하고 하야시 센주로가 육군대신이 되었다. 마사키는 하야시의 후임으로 교육총감이 되었다. 그 뒤 황도파 막료들은 중앙에서 야전으로 쫓겨나고, 동년 11월 츠지 마사노부가 황도파 청년장교들을 색출해 고발하는 육군사관학교 사건이 벌어지면서 통제파의 마사키 배제공작이 시작되었다. 이듬해 7월 마사키는 하야시와 간인노미야에 의해 강제로 경질되었고 와타나베 죠타로가 후임으로 임명된다.
이렇게 황도파의 장성급과 좌관급은 군부 중앙의 기반을 모두 잃었다. 이에 불만을 가진 위관급 황도파의 불만은 8월의 아이자와 사건과 이듬해 2월의 2.26 사건이라는 초대형 자폭을 터뜨리면서 황도파는 철저히 숙군되어 파벌로서 괴멸한다. 예편당하지 않고 현역에 남은 황도파 장교는 야마시타 등 극소수에 그쳤다.
1940년 이후 중일전쟁의 정세가 슬슬 늘어지기 시작하며 군부 내에 통제파의 정책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늘어나자 야나가와 헤이스케 등 군 현역에 남았던 극소수의 황도파 장교들을 주축으로 약간 세력을 회복했고, 히라누마 기이치로 등 관념우파와 손잡고 고노에 후미마로의 신체제 운동을 결딴내는 것에 한몫했다.
도조 히데키와 통제파는 권력투쟁에 밀려 몰락했을 것이며 재벌에 대한 규제는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므로, 일본의 군수 생산력은 원래 역사보다 약화되었을 것이다.[5] 더군다나 황도파는 최신 무기보다 정신력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기에 신예 무기들의 배치와 생산도 늦어지거나 다른 열강들에 비해 뒤쳐졌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실 황도파의 정신주의 및 단기속결전 이론은 애초에 '서구에 대한 물적 열세'를 전제한 것이므로, 국민의 정신적 무장을 통해 국가총동원으로 서구와 싸워 승리한다는 발상의 통제파의 인식보다 비현실적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황도파의 현실인식을 고려해보면 1940년대의 세계 역사는 원래 역사와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1930년대 시점에서도 일본은 일정 부분 국제적 고립을 경험하긴 했지만 그 이상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석유 제재와 같은 일은 당장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황도파는 공산주의와 소련을 경계했고 공공연히 소련에 대한 공격을 주장했다. 따라서 일본은 영미권과의 전쟁보다는 소련과의 전쟁에 집중했을 것이다.
지속적으로 벌어지던 소련과 일본의 국경분쟁이 양국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해전에서는 일본이 큰 우위를 점했겠지만 할힌골 전투에서 증명되었듯 지상전에서는 일본 육군이 소련군에게 대적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만주는 물론이고 최악의 경우 한반도까지 밀렸을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일본은 한반도-만주-중국 지역 일대에 건설해두었던 공장지대를 비롯해 대륙침탈을 위한 거점이 상실될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수탈하던 물적-인적 자원도 급감해 일본 경제도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내부에서는 폭동이 벌여졌을 것이고 일본 군부 더 나아가 천황친정체제 자체가 몰락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되었을 경우 일본의 군국주의, 제국주의적 분위기는 크게 상실될 것이고 혼란한 사회를 틈 타 소련의 지원을 받은 공산주의 세력이 활개칠 수도 있다. 다만 일본이 소련과 단독으로 전쟁을 벌였을 경우에 그렇고 소련이 엄청난 대국인만큼 일본이 신중을 기하거나, 전쟁 준비를 오래 하거나 하는 사이 1940년대에 접어들어 히틀러가 원하던대로 독일이 서부를 공격하는 틈을 타서 일본이 그에 협력해 동부에서 거의 동시에 공격했다면 소련이 대패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주장도 있지만 시베리아 출병에서도 드러났듯이 일본이 승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황도파의 현실인식을 고려해보면 1940년대의 세계 역사는 원래 역사와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1930년대 시점에서도 일본은 일정 부분 국제적 고립을 경험하긴 했지만 그 이상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석유 제재와 같은 일은 당장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황도파는 공산주의와 소련을 경계했고 공공연히 소련에 대한 공격을 주장했다. 따라서 일본은 영미권과의 전쟁보다는 소련과의 전쟁에 집중했을 것이다.
지속적으로 벌어지던 소련과 일본의 국경분쟁이 양국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해전에서는 일본이 큰 우위를 점했겠지만 할힌골 전투에서 증명되었듯 지상전에서는 일본 육군이 소련군에게 대적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만주는 물론이고 최악의 경우 한반도까지 밀렸을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일본은 한반도-만주-중국 지역 일대에 건설해두었던 공장지대를 비롯해 대륙침탈을 위한 거점이 상실될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수탈하던 물적-인적 자원도 급감해 일본 경제도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내부에서는 폭동이 벌여졌을 것이고 일본 군부 더 나아가 천황친정체제 자체가 몰락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되었을 경우 일본의 군국주의, 제국주의적 분위기는 크게 상실될 것이고 혼란한 사회를 틈 타 소련의 지원을 받은 공산주의 세력이 활개칠 수도 있다. 다만 일본이 소련과 단독으로 전쟁을 벌였을 경우에 그렇고 소련이 엄청난 대국인만큼 일본이 신중을 기하거나, 전쟁 준비를 오래 하거나 하는 사이 1940년대에 접어들어 히틀러가 원하던대로 독일이 서부를 공격하는 틈을 타서 일본이 그에 협력해 동부에서 거의 동시에 공격했다면 소련이 대패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주장도 있지만 시베리아 출병에서도 드러났듯이 일본이 승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낙관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황도파 청년장교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기타 잇키의 성향을 생각하면, 최소한 중일전쟁으로 사태가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6] 중일전쟁을 피한다는 것은, 중일전쟁으로 인한 금수조치가 촉발시킨 외교관계 악화도 없다는 것이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의 패전을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 기타 잇키의 국가개조론이 오늘날 일본국 헌법과 7할이 통한다고 평가되는 것을 고려하면, 조선인을 포함한 일반 국민들의 권리와 복지가 상당히 신장되었으리라고도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중일동맹을 맺어 소련을 공격하여 아시아 패권을 차지했을 것이다.
다만 기타의 좋은 의도와는 별개로, 황도파의 장교들은 진심으로 천황을 숭배하고 있었고, 기타는 천황을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인 국민의 총의를 대변하는 상징과 유사하게 국민의 총의를 대변하는 일종의 토템으로 사용하고 싶어했다. 기타가 전권을 잡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본을 개조할 수 있었을지, 혹은 천황을 숭배하는 황도파에 의해 자신마저도 쫓겨났을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일본 역사에서 헤이안 시대 후기 이후 천년이상 천황은 실권 없이 존재했고, 실권을 가지려는 시도가 몇번 성공했지만 결국 무사집단이나 권력집단에 밀려 중앙집권 군주정에 실패한 가장 큰 이유중 하나가, 천황이 직접 지배하는 영역 자체가 없다는 한계때문에 황도파 장교집단이 가진 무력이 있다고 해도 이들이 대부분 하급무사 이하 신분의 지역기반,경제기반이 극히 약한 집단이라는 점에서 결국은 강력한 지방세력에 의해 쓸려나갔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기타 잇키는 사회진화론의 신봉자였기에 조선인 차별과는 별개로 다른 일본인들처럼 조선은 망할 나라라 망했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황도파에 의한 '조선인 차별 폐지'란 일본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조선계 일본국민이 되는 것이 전제인데, 이것이 현실에 존재했던 타협적 조선 민족주의자들의 자치운동이나 전간기의 문화통치 정책과 얼마나 다를지 조차 의문이다.
중일전쟁이 벌어지지 않아 중국의 주인은 장제스가 되어 중국 공산당과 기타 군벌들은 역사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이 사라진다면 한국 전쟁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한반도가 일본 영토로 그대로 남았을 가능성도 있으며 그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일제강점기가 원래 역사보다 더 길어졌을수도 있다.
다만 기타의 좋은 의도와는 별개로, 황도파의 장교들은 진심으로 천황을 숭배하고 있었고, 기타는 천황을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인 국민의 총의를 대변하는 상징과 유사하게 국민의 총의를 대변하는 일종의 토템으로 사용하고 싶어했다. 기타가 전권을 잡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본을 개조할 수 있었을지, 혹은 천황을 숭배하는 황도파에 의해 자신마저도 쫓겨났을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일본 역사에서 헤이안 시대 후기 이후 천년이상 천황은 실권 없이 존재했고, 실권을 가지려는 시도가 몇번 성공했지만 결국 무사집단이나 권력집단에 밀려 중앙집권 군주정에 실패한 가장 큰 이유중 하나가, 천황이 직접 지배하는 영역 자체가 없다는 한계때문에 황도파 장교집단이 가진 무력이 있다고 해도 이들이 대부분 하급무사 이하 신분의 지역기반,경제기반이 극히 약한 집단이라는 점에서 결국은 강력한 지방세력에 의해 쓸려나갔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기타 잇키는 사회진화론의 신봉자였기에 조선인 차별과는 별개로 다른 일본인들처럼 조선은 망할 나라라 망했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황도파에 의한 '조선인 차별 폐지'란 일본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조선계 일본국민이 되는 것이 전제인데, 이것이 현실에 존재했던 타협적 조선 민족주의자들의 자치운동이나 전간기의 문화통치 정책과 얼마나 다를지 조차 의문이다.
중일전쟁이 벌어지지 않아 중국의 주인은 장제스가 되어 중국 공산당과 기타 군벌들은 역사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이 사라진다면 한국 전쟁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한반도가 일본 영토로 그대로 남았을 가능성도 있으며 그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일제강점기가 원래 역사보다 더 길어졌을수도 있다.
이들의 사상(정확히는 위관급 청년장교의 사상)을 노래한 것이 쇼와유신의 노래이다.
[1] 코-도-하(こうどうは, Kōdōha). 영어로는 '임페리얼 웨이 팩션(Imperial Way Faction)'이라고 부른다.[2] 구름이 동양에서 임금을 상징하는 해를 가린다고 임금을 속이는 간신으로 상징됨을 상기할 것.[3] 한자만으로는 '요사스러운 구름'이란 뜻인데 '불길한 조짐'이란 의미로 쓰인다.[4] 1930년 결성된 영위관들의 비밀사조직 앵회(桜会, 사쿠라카이)를 기원으로 하는 약소 파벌. 영수는 하시모토 긴고로. 사상적으로는 오카와 슈메이와 친했다. 정확히 말하면 청군파 자체는 10월 사건으로 앵회가 해산당한 뒤 그 잔당들이 형성한 파벌이다.[5] 통제파는 반대로 미쓰비시와 같은 재벌을 지원하는 것을 통해 현대적인 생산력을 갖추어 총력전 체제를 갖추고자 했다.[6] 왕년의 기타는 쑹자오런의 동지로서 중국 혁명에 투신했던 바 있다. 실제로 2.26 사건 즈음의 기타는 중일전쟁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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