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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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나우지뉴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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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나우지뉴의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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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tbol Club Barcelona Ambassador | |||||
이름 | 호나우지뉴 Ronaldinho | ||||
본명 | |||||
출생 | |||||
국적 | |||||
신체 | |||||
직업 | |||||
주발 | 오른발 (양발) | ||||
소속 | 선수 | 그레미우 (1987~1998 / 유스) 그레미우 (1998~2001) 파리 생제르맹 FC (2001~2003) FC 바르셀로나 (2003~2008) AC 밀란 (2008~2011) CR 플라멩구 (2011~2012)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2012~2014) 케레타로 FC (2014~2015) 플루미넨시 FC (2015) | |||
기타 | FC 바르셀로나 (2016~ / 앰버서더) | ||||
국가대표 | |||||
통산 득점 | 313골 | ||||
SNS | |||||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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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포르투알레그리에서 태어났다. 8살 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한다. 여타 브라질의 축구선수들처럼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공을 찼겠구나 싶지만, 형 호베르투가 프로 팀인 그레미우와 계약한 덕에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도 그럴듯이 그레미우는 브라질에서 최상위급 명문 클럽 중 하나다. 다만 형은 부상때문에 일찍 선수 생활을 접고 지금은 호나우지뉴의 에이전트로 활동 중.
대중에게 처음 알려진 것은 13세 때 지역 팀과의 경기에서 혼자 23골을 넣은 것이 언론에 보도된 것이었다. 이후 형이 있던 그레미우와 계약해서 어린 나이임에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1997년 U-17 월드컵에서 세계 축구계에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대중에게 처음 알려진 것은 13세 때 지역 팀과의 경기에서 혼자 23골을 넣은 것이 언론에 보도된 것이었다. 이후 형이 있던 그레미우와 계약해서 어린 나이임에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1997년 U-17 월드컵에서 세계 축구계에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자세한 내용은 호나우지뉴/클럽 경력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호나우지뉴/국가대표 경력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호나우지뉴/플레이 스타일 문서 참고하십시오.
- 파리 생제르맹 FC (2001~2003)
- UEFA 인터토토컵: 2001
- FC 바르셀로나 (2003~2008)
- 라리가: 2004-05, 2005-06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005, 2006
- UEFA 챔피언스 리그: 2005-06
- CR 플라멩구 (2011~2012)
-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2011
-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2012~2014)
- 캄페오나투 미네이루: 2013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2013
-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2014
- FIFA 월드컵: 2002
- 코파 아메리카: 1999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2005
- 브라질 U-23 축구 국가대표팀
- 올림픽 동메달: 2008
- 브라질 U-17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U-17 월드 챔피언십: 1997
- 남미 U-17 챔피언십: 1997
- 발롱도르: 2005
- FIFA 올해의 선수: 2004, 2005
- FIFPro 올해의 선수: 2005, 2006
- FIFA FIFPro 월드 XI: 2005, 2006, 2007
-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 2005-06
- UEFA 올해의 공격수: 2004-05
- UEFA 올해의 팀: 2004, 2005, 2006
- UEFA 올해의 궁극적인 팀[8]: 2015
-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 2013
- 남아메리카 올해의 팀: 1999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2002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골든볼: 1999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브론즈볼: 2005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골든슈: 1999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결승전 MOTM: 2005
- FIFA 클럽 월드컵 브론즈볼: 2006
- FIFA 클럽 월드컵 득점왕: 2013
- UEFA 챔피언스 리그 도움왕: 2005-06
- 리그 1 올해의 골: 2002-03
- 라리가 도움왕: 2005-06
- 트로페오 EFE: 2003-04
- 세리에 A 도움왕: 2009-10
- 볼라 지 오우루: 2012
- 볼라 지 프라타: 2000, 2012, 2013
- 세리 A 팬 선정 올해의 선수: 2012
- 세리 A 올해의 팀: 2011, 2012
- 세리 A 도움왕: 2012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도움왕: 2012, 2013
- 캄페오나투 가우슈 득점왕: 1999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2004, 2005
- 옹즈도르: 2005
- 옹즈 드 옹즈: 2002, 2004, 2005, 2006
- ESM 올해의 팀: 2003-04, 2004-05, 2005-06
- FIFA 100: 2004
- 골든풋: 2009
- 골든풋: 2009
- RSSSF 올해의 선수: 2004, 2005
-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10년의 팀[10]: 2009
- 돈 발롱 21세기 드림팀: 2010
-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 2013
- AC 밀란 명예의 전당: 2017
- 글로브 사커 어워즈 플레이어 커리어 어워드: 2021
- IFFHS 올타임 남아메리카 드림팀[11]: 2021
시즌 | 클럽 | 소속리그 | 리그 | FA컵 | 대륙대회 | ||||||
경기 | 득점 | 도움 | 경기 | 득점 | 도움 | 경기 | 득점 | 도움 | |||
1998 | 그레미우 | 세리 A | 14 | 1 | 0 | 2 | 0 | 0 | 15 | 3 | 2 |
1999 | 그레미우 | 세리 A | 17 | 6 | 0 | 3 | 0 | 0 | 4 | 2 | 0 |
2000 | 그레미우 | 세리 A | 21 | 14 | 0 | 6 | 6 | 0 | - | - | - |
2001-02 | 파리 셍제르맹 | 리그 1 | 28 | 9 | 8 | 6 | 2 | 0 | 14 | 2 | 2 |
2002-03 | 파리 셍제르맹 | 리그 1 | 27 | 8 | 6 | 7 | 3 | 0 | 4 | 1 | 2 |
2003-04 | FC 바르셀로나 | 라리가 | 32 | 15 | 6 | 6 | 3 | 2 | 7 | 4 | 3 |
2004-05 | FC 바르셀로나 | 라리가 | 35 | 9 | 12 | 0 | 0 | 0 | 7 | 4 | 2 |
2005-06 | FC 바르셀로나 | 라리가 | 29 | 17 | 15 | 2 | 1 | 1 | 12 | 7 | 4 |
2006-07 | FC 바르셀로나 | 라리가 | 32 | 21 | 8 | 4 | 0 | 0 | 11 | 3 | 3 |
2007-08 | FC 바르셀로나 | 라리가 | 17 | 8 | 1 | 1 | 0 | 0 | 8 | 1 | 2 |
2008-09 | AC 밀란 | 세리에 A | 29 | 8 | 5 | 1 | 0 | 1 | 6 | 2 | 1 |
2009-10 | AC 밀란 | 세리에 A | 36 | 12 | 14 | 0 | 0 | 0 | 7 | 3 | 1 |
2010-11 | AC 밀란 | 세리에 A | 11 | 0 | 3 | 0 | 0 | 0 | 5 | 1 | 1 |
2011 | 플라멩구 | 세리 A | 31 | 14 | 7 | 5 | 1 | 1 | 3 | 2 | 0 |
2012 | 플라멩구 | 세리 A | 2 | 1 | 0 | 0 | 0 | 0 | 8 | 2 | 6 |
2012 |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 세리 A | 31 | 9 | 15 | 0 | 0 | 0 | - | - | - |
2013 |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 세리 A | 14 | 8 | 2 | 2 | 0 | 2 | 14 | 6 | 7 |
2014 |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 세리 A | 2 | 0 | 0 | 0 | 0 | 0 | 7 | 1 | 2 |
2014-15 | 케레타로 FC | 리가MX | 25 | 8 | 4 | 4 | 0 | 0 | - | - | - |
2015 | 플루미넨시 | 세리 A | 7 | 0 | 0 | 2 | 0 | 0 | 0 | 0 | 0 |
호나우지뉴의 플레이는 예측할 수 없다. 그가 왼쪽으로 갈지 오른쪽으로 갈지 알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를 상대하는 수비수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호나우지뉴의 플레이를 예측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뿐이다.
호나우지뉴가 뛰어난 선수라는 점은 트릭을 사용할 때와 단순하게 경기를 풀어나갈 때를 명확하게 파악하기 때문이다. 경기가 0:0일 때 호나우지뉴는 오직 패스에 집중한다. 그가 트릭을 사용하는 것은 경기를 이길 때뿐이다.
저는 제가 바르사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호나우지뉴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항상 제 첫 골을 도와준 그를 기억합니다. 저는 단지 그의 유산을 이어받기 위해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호나우지뉴가 전성기일 당시 그와 함께 경기를 치렀다. 그는 누구도 할 수 없는 것들을 해냈다. 로커룸에 들어갔을 때 호나우지뉴가 걱정하거나 압박에 시달리는 표정을 본 적이 없다. 호나우지뉴는 축구는 즐거워야 하기에 우리 모두가 경기를 즐겨야 한다고 항상 말했고, 실제로도 그리했다.
나는 모든 선수들을 우러러봤다. 개중에 특히 호나우지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는 내가 팬과 동료로서 본 선수 중에서 최고다. 나와 함께 뛰어본 선수 중 가장 뛰어난 선수일 것이다.
2020년 3월 5일(현지시간) 파라과이수도 아순시온주 호텔에서 위조 여권을 사용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브라질 여권이 아닌 아는 사업가가 선물한 파라과이 여권을 사용한 것. 이때 호나우지뉴는 자국 여권 자체를 몰수당한 상태였는데, 이유는 호나우지뉴가 브라질 내 보호구역에 불법으로 부두를 증축한 혐의로 체포되어 벌금이 청구되었는데 벌금+이자를 갚지 않자 여권을 몰수한 것. 결국 위조 여권을 사용한 혐의로 체포되어 교도소로 갔다.
본인은 선물받은 여권이라 당연히 쓸 수 있는 여권인줄 알았다며 문제가 될 줄 몰랐다고 주장했다. 변호사도 호나우지뉴가 바보(...)라 입국심사 자체를 의례적인 것으로 여겼다며 선처를 부탁했다. "호나우지뉴는 바보라서 몰랐다" 변호사의 '위조여권' 해명. 그런데 정작 브라질과 파라과이는 국경 간 협약을 맺어 입국할 때 여권이 필요없다고 한다. 그래도 교도소에선 친선배 풋살 대회에 출전해 5골 6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감방 동료들과 잘 지냈다고 하며, 이때 축구화가 없어 출전하지 못할 뻔했는데 교도관이 축구화를 빌려주었다고 한다.
결국 한 달 만인 4월 7일에 보석금을 내고 출소했다. 교도소 동료들이 출소할 때 아쉬워하며 출소 기념 깜짝 바베큐 파티도 열어주고 호나우지뉴도 다시 한번 오겠다는 농담을 남기며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 과거 국내에서는 Ronaldinho를 "호나우딩요"라고 많이 불렀지만[13], 해당 이름의 발음은 '호나우징뉴[ʁonawˈdʒĩɲu]'다. 즉, "-dinho"의 표기는 딩요보단 지뉴에 가깝다. 이에따라 각종 언론 매체에서 호나우지뉴라 부르기 시작하면서 이쪽이 정착되었다.[14] 다만 애칭 비슷한 개념으로 "딩요"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으며 간혹 포르투갈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까지 껴서 헷갈려하는 사람도 있다.
- 브라질 내에서 호나우지뉴는 호나우지뉴 가우슈(Ronaldinho Gaúcho) 또는 더 줄여서 가우슈로 불린다. 이렇게 불리는 까닭은 호나우지뉴가 브라질 국가대표에 처음 불렸던 1999년 무렵 대표팀의 중심 선수가 바로 호나우두 루이스 나자리우 지리마였기 때문이다. 호나우두가 나이로 봐도 선배고 경력으로 봐도 호나우지뉴보다 훨씬 유명한 선수였기 때문에 '작은 호나우두'라는 뜻으로 호나우지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았고 호나우두와 구분 짓기 위해 뒤에 가우슈를 붙인 것이다. 유럽 진출 이후로는 마케팅 차원에서 가우슈라는 부분을 뺐으나, 브라질 복귀 이후 자국민에게 친근한 별명인 가우슈를 다시 살렸다. 페이스북 및 트위터의 표기 역시 Ronaldinho Gaúcho를 사용 중이다. 반면 호나우두는 브라질 사람들에게 페노메누(Fenomeno)라 불리므로 혼동을 피하게 말할 때에는 둘다 호나우두를 빼고 페노메누와 가우슈로 구분해서 부른다.
-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선수로 박지성을 뽑았다.
- 침대 위에서의 개인기 또한 어마하다고 한다. 2002 월드컵 당시 호나우지뉴와 잠자리를 했다는 영국 랩 댄서인 리사 콜린스는 인터뷰에서 "그는 마치 드릴 같았다.(like a pneumatic drill)"고 말하는 바람에 호나우드릴이라는 별명도 얻었으며 또 그의 전 애인이었던 알렉산드라 파레상은 침대 위에서의 호나우지뉴를 이렇게 표현했다.호나우지뉴는 축구 뿐만 아니라 침대위에서도 예술가다. 8번째 그가 힘을 주었을때는 마치 드릴로 몸을 파고 드는것 같았으며 그 순간 나는 기절했다. 처음에는 베컴을 원했지만 호나우지뉴와 사랑을 나누고 나서는 그런 맘이 사라졌다. 이로 인해 2006년 폭스스포츠에서 선정한 역대 플레이보이 축구인 7위에 오르기도 했다.
- 명품 옷과 신발을 곧잘 걸쳤는데, "그 얼굴에 왜 그리 명품에 집착하나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내가 이렇게 생겼는데, 옷이라도 잘 입어야죠."라 대답했다.
- 호나우지뉴가 NASA의 협력업체를 방문한 사진이 올라오자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한 외계인" 등의 드립이 일부 커뮤니티에서 흥하기도 했다.
- 아르헨티나 대표팀이 훈련을 마친 뒤 스타디움에서 빠져 나가는 데 이때 리오넬 메시에게 접근한 모 팬이 호나우지뉴와 꼭 닮아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심지어 호나우지뉴의 지인인 메시조차도 순간 착각했다가 빵 터졌을 정도였다. 정말로 착각하긴 했는지 주변의 다른 팬들이 난입할 때는 심드렁하게 반응하던 메시가 이 팬은 등장할 때부터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다가오자 먼저 손을 내밀기까지 했다. 영상. 본인이 인터뷰에 밝히기로는 뭘 그리 뛰어오냐며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고. 이후 착각한 걸 알고도 호나우지뉴와 너무 닮았다고 생각했는 지 완전 빵 터졌다. 여기서 나온 드립이 '딩요 애미도 속겠다'. 하지만 2020년 말에 호나우지뉴의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사용 빈도가 크게 줄었다. 한편, 호나우지뉴를 닮은 그 당사자는 브라질 전국적으로 유명해져서 주로 그의 대역이 필요할 때 맡는 이미테이션 배우를 하고 있다고 한다.
- 2018년 브라질 대선에서 자이르 보우소나루를 공개 지지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19] 본인은 "우리에게 행복을 돌려줄 후보를 뽑았다"라고 발언했는데, 이에 대해 당시 바르셀로나 대변인 조셉 바이브스는 "우리의 민주주의적 가치는 이 후보가 최근 한 발언과 일치하지 않는다"라며 팀 레전드이자 현직 팀 홍보 대사의 정치 행보에 우려섞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20] 이 때문에 아예 호나우지뉴가 브라질 정치판에 입문할 것이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으나 이후 잠잠한거 보면 아닌 모양이다. 그리고 보우소나루와는 맞팔되어있고, 나머지 가족들까지 전부 인스타 팔로우하며 친보우소나루인 것으로 보인다.
- 2018년 11월 기준으로 현재 통장잔고가 6유로(7,600원)에 빚만 25억원 정도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친형과 함께 구아이바 강에서 낚시배 부두를 지으려다 이게 하필이면 보호구역 내에서 짓는 바람에 불법건축 혐의로 벌금형 + 모기지 대출로 인한 높은 이자로 인해 채무를 지게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브라질 법원으로부터 계좌 압류에 여권까지 압수당했다. 이유는 많은 채무를 진 상태에서도 보란듯이 광고 촬영을 명목으로 일본이나 중국을 방문하고, 아프리카나 유럽에 가서 자신의 이름을 딴 나이키社 신발을 홍보하는 등, 명백한 수입을 얻을만한 증거들이 있다고 판단했기에 압수했다고 한다. 링크1 링크2 참고로 호나우지뉴가 홍보하는 신발은 지난 9월에 나이키에서 발매한 티엠포 레전드 7 10R이다.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선수, 최고의 미드필더 5인을 각각 선정했는데, 2000년대 최고의 선수와 미드필더 1위에 이름을 올렸다.
- 몸에 문신이 있다.
- 후원사가 나이키이다.
- 2024년, 남아공의 어느 여자 축구 선수가 외모때문에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Miche minnies라는 2001년 태생 선수인데, 그로부터 1년 전인 2000년도에 브라질의 유명 축구선수가 남아공에서 친선경기를 가진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알게 된 전세계의 여러 네티즌들이 하나같이 그 용의자를 호나우지뉴로 생각하고 있다.
본인의 등번호 10번과 에이스 자리를 계승한 리오넬 메시와의 인연으로 유명하다. 클럽 내부에서는 메시파와 호나우지뉴파로 여론이 갈리어 정치적인 다툼이 발생했지만 정작 두 선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이가 매우 좋았기 때문이다. 축구 경력이나 위상에서 넘사벽으로 차이가 나는데다 브라질 vs 아르헨티나라는 필연적인 라이벌리에도 불구하고, 호나우지뉴는 성격도 내성적이고 나이도 가장 어렸던 당시 메시의 1군 적응을 적극적으로 도와줬다고 한다. 사실 호나우지뉴 입장에서 보면 당시의 메시가 아무리 어렸다고는 해도 언젠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 만큼 위협적인 선수였는데도 경쟁심이나 질투는 커녕 오히려 메시가 빨리 데뷔하고 성공할 수 있도록 가장 열렬히 지원하고 지도해줬으며, 팀에서 방출된 이후로도 자신의 자리를 계승한 메시의 성공을 누구보다 축하해 주었다.
메시가 1군 훈련에 처음 합류했을 때 첫만남을 가졌는데, 당시 시우비뉴나 차비 에르난데스 등 1군 선수들이 메시의 재능에 깜짝 놀랐었고 특히 호나우지뉴는 메시는 자기보다도 더 뛰어난 선수가 될거라며 극찬을 퍼부었다고 한다. 중요한 건 이 당시 메시의 나이가 16살, 말 그대로 어린 시절이었다는 것. 덕분에 이 이야기를 들은 주변 선수들이 팔불출이 심하다며 웃었다고 한다. 훈련을 마치고 호나우지뉴 본인이 평소 잘 알던 기자에게도 방금 나를 뛰어넘을 만한 선수를 만나고 왔다고 이 이야기를 했는데 이 기자도 어이없어 했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은 진지했던 모양인지 자신의 절친인 코비 브라이언트를 만나는 자리에도 리오넬 메시를 대동하고 나가선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될 녀석을 소개해주겠다고 당당하게 말해서 브라이언트도 속으로 어이없어 했다고 한다.[24]
호나우지뉴는 이때부터 메시를 눈여겨보고 거의 가족처럼 대해주었다고 하는데, 조국인 브라질과 불구대천의 라이벌인 아르헨티나 출신에, 성격도 전혀 달랐던 어린 유망주 메시와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호나우지뉴의 우정은 상당히 주목 받았었다. 단순히 립서비스 뿐이 아니었던 것이, 이당시 메시가 B팀으로 차출되며 더이상 1군 훈련에 합류하지 않게되자 1군 선수들과 호나우지뉴가 당시 감독 레이카르트를 찾아가서 B팀에 있을 재목이 아니라며 메시의 1군 승격을 강력히 요구했다고 한다.
물론 메시는 어릴때부터 바르셀로나 내부에서도 유명한 미래의 스타였지만 외국인인데다 허약한 피지컬이란 제약이 있었고 무엇보다 그렇게 어린 나이의 실전경험도 없는 선수를 성인팀에 넣는다는 것은 지금으로 봐도 대단한 도박이었다. 메시의 월반 속도는 그 실력을 감안하고 봐도 비정상적으로 빠른 구석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메시의 잠재력을 일찌감치 알아봤던 클럽 내부 인물들과 호나우지뉴 등 1군 멤버들의 강력한 푸쉬도 한몫했다. 이후 호나우지뉴는 메시의 데뷔골까지 어시스트하며 그를 살뜰히 챙겨주었다. 호나우지뉴는 이 장면을 자신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꼽고 메시라는 선수의 시작을 알린 장면이라며 평생동안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25]
이후 바르셀로나를 떠난 뒤에는 자신의 축구 인생에 있어 유일한 후회는 메시가 커가는 모습을 좀더 오래도록 지켜보지 못했단 것 하나 뿐이라는 말까지 했다. 그가 메시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는 일화. 메시 역시 호나우지뉴를 친형처럼 따랐기 때문인지 그의 이적을 극구 반대했었다. 호나우지뉴가 떠나고 본인이 원탑 에이스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성장을 꽃피웠음에도 당시 바르셀로나 회장이 이젠 메시가 새로운 리더라며 그의 집으로 찾아왔을 때 내 친형과 같던 사람을 떠나보냈다며 원망했다고 한다.
2015년 당시 카탈루냐 방송사에서 등번호 10번의 전임자이던 호나우지뉴에게 싸인한 져지를 선물하는 이벤트를 마련했는데 여기서 메시가 인터뷰 영상에서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팀이 (호나우지뉴를) 그런 식으로 대접하면 안되는 거였고, 그의 명성에 걸맞은 대우가 아니었다고 오히려 바르셀로나의 처사를 비판했다. 이에 반해 호나우지뉴는 자신이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던 거고 팀과 자신 사이에 갈등이 없었으며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은퇴 발표 직후에 메시 역시 다음의 글을 본인의 SNS에 올리면서, 선대 바르셀로나 에이스이자 조력자였던 그의 은퇴를 기념하였다.
메시가 1군 훈련에 처음 합류했을 때 첫만남을 가졌는데, 당시 시우비뉴나 차비 에르난데스 등 1군 선수들이 메시의 재능에 깜짝 놀랐었고 특히 호나우지뉴는 메시는 자기보다도 더 뛰어난 선수가 될거라며 극찬을 퍼부었다고 한다. 중요한 건 이 당시 메시의 나이가 16살, 말 그대로 어린 시절이었다는 것. 덕분에 이 이야기를 들은 주변 선수들이 팔불출이 심하다며 웃었다고 한다. 훈련을 마치고 호나우지뉴 본인이 평소 잘 알던 기자에게도 방금 나를 뛰어넘을 만한 선수를 만나고 왔다고 이 이야기를 했는데 이 기자도 어이없어 했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은 진지했던 모양인지 자신의 절친인 코비 브라이언트를 만나는 자리에도 리오넬 메시를 대동하고 나가선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될 녀석을 소개해주겠다고 당당하게 말해서 브라이언트도 속으로 어이없어 했다고 한다.[24]
호나우지뉴는 이때부터 메시를 눈여겨보고 거의 가족처럼 대해주었다고 하는데, 조국인 브라질과 불구대천의 라이벌인 아르헨티나 출신에, 성격도 전혀 달랐던 어린 유망주 메시와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호나우지뉴의 우정은 상당히 주목 받았었다. 단순히 립서비스 뿐이 아니었던 것이, 이당시 메시가 B팀으로 차출되며 더이상 1군 훈련에 합류하지 않게되자 1군 선수들과 호나우지뉴가 당시 감독 레이카르트를 찾아가서 B팀에 있을 재목이 아니라며 메시의 1군 승격을 강력히 요구했다고 한다.
물론 메시는 어릴때부터 바르셀로나 내부에서도 유명한 미래의 스타였지만 외국인인데다 허약한 피지컬이란 제약이 있었고 무엇보다 그렇게 어린 나이의 실전경험도 없는 선수를 성인팀에 넣는다는 것은 지금으로 봐도 대단한 도박이었다. 메시의 월반 속도는 그 실력을 감안하고 봐도 비정상적으로 빠른 구석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메시의 잠재력을 일찌감치 알아봤던 클럽 내부 인물들과 호나우지뉴 등 1군 멤버들의 강력한 푸쉬도 한몫했다. 이후 호나우지뉴는 메시의 데뷔골까지 어시스트하며 그를 살뜰히 챙겨주었다. 호나우지뉴는 이 장면을 자신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꼽고 메시라는 선수의 시작을 알린 장면이라며 평생동안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25]
이후 바르셀로나를 떠난 뒤에는 자신의 축구 인생에 있어 유일한 후회는 메시가 커가는 모습을 좀더 오래도록 지켜보지 못했단 것 하나 뿐이라는 말까지 했다. 그가 메시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는 일화. 메시 역시 호나우지뉴를 친형처럼 따랐기 때문인지 그의 이적을 극구 반대했었다. 호나우지뉴가 떠나고 본인이 원탑 에이스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성장을 꽃피웠음에도 당시 바르셀로나 회장이 이젠 메시가 새로운 리더라며 그의 집으로 찾아왔을 때 내 친형과 같던 사람을 떠나보냈다며 원망했다고 한다.
2015년 당시 카탈루냐 방송사에서 등번호 10번의 전임자이던 호나우지뉴에게 싸인한 져지를 선물하는 이벤트를 마련했는데 여기서 메시가 인터뷰 영상에서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팀이 (호나우지뉴를) 그런 식으로 대접하면 안되는 거였고, 그의 명성에 걸맞은 대우가 아니었다고 오히려 바르셀로나의 처사를 비판했다. 이에 반해 호나우지뉴는 자신이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던 거고 팀과 자신 사이에 갈등이 없었으며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은퇴 발표 직후에 메시 역시 다음의 글을 본인의 SNS에 올리면서, 선대 바르셀로나 에이스이자 조력자였던 그의 은퇴를 기념하였다.
"항상 말했듯이, 나는 형의 곁에서 많은 것을 배웠어. 내가 드레싱 룸에 처음 입성했을 때, 나에게 해준 모든 것들이 얼마나 편안하게 다가왔는지에 대해서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할 거야. 형과 함께 많은 경험을 공유할 수 있던 건 행운이었지. 또, 형은 경기장에서는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준 천재(fenómeno)이기도 했지만, 인간적으로도 정말 좋은 친구였어. 아마 그게 가장 중요한 부분 아닐까? 형이 은퇴를 하더라도, 축구는 절대 형의 미소를 잊지 못할 거야. 항상 좋은 일만 가득하길, 로니."
[1] 로망스어와 게르만어권의 인명이나 지명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2] 자신의 선수명을 호나우지뉴라고 정한 이유는 자신의 본명과 같은 이름이면서, 당대 브라질 최고의 선수인 호나우두에 대한 존경심을 담아 작은 호나우두라는 뜻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참고로 호나우두도 1994 FIFA 월드컵 미국과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 각각 호나우당(큰 호나우두)과 호나우두 기아루라는 동명이인 선배들 때문에 호나우지뉴라는 이름을 썼다가 훗날 호나우두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3] 2007년 8월 24일 국적 취득.[4] 현역 시절에는 76~85kg대였다.[5]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 공동 8위.[6] 이외에도 2004 · 2005년 FIFA 올해의 선수, 2004 · 2005년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2006년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 등 개인상을 모조리 쓸어담았다.[7] LW 2위[8] 2군[9] 돈 발롱 어워드[10] 2000~2009[11] B팀[12] 프랑스의 스포츠 전문지.[13] 그 외에도 주니뉴 파울리스타, 호비뉴 역시 마찬가지로 '주닝요', '호빙요' 라고 많이 불렀다.[14] 다만 어디까지나 이는 브라질 포어 표준에서 제시하는 발음이고 매우 많은 방언에서 비음 자음 m, n, nh 앞 모음에 비음을 첨가해서 발음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특히 nh(/ɲ/)의 경우 앞 모음에 비음을 첨가하고 자음은 반모음화(/ɲ/→/~j̃/)되는 경향이 강하다. 즉, 현지인의 발음을 실제로 들어보면 '호나우지뉴'(/ʁonawˈdʒiɲu/)보다는 '호나우징유'(/ʁonawˈdʒĩj̃u/)처럼 들린다. 세징야(Cesinha)가 K리그에 등록할 때 '세지냐'가 아닌 '세징야'로 등록한 것도 이것 때문이다.[15] #[16] 나머지 8명은 시간 순으로 바비 찰튼, 프란츠 베켄바워, 게르트 뮐러, 파올로 로시, 지네딘 지단, 히바우두, 카카, 리오넬 메시가 있다.[17]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펴고 흔드는 것.[18] 브라질 호나우두 RONALDO의 R과 그의 상징적인 등번호 9를 합친 브랜드.[19] 사실 당시 보우소나루는 호세프 대통령 탄핵 이후 유력 경쟁자 룰라 전 대통령의 대선 출마가 불가능해지면서 여론 조사상 1위 후보였다. 그래서인지 호나우지뉴 외에도 히바우두, 카푸, 카카 등 평소 정치 성향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인 브라질 축구판에서 의외로 상당수 축구선수들이 보우소나루를 지지했었다. 덕분에 당시 브라질 전역의 축구팬 단체들이 팬심과 무관하게 보우소나루만은 안된다며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선언문을 내는 등 당시 브라질에서도 꽤나 논란이 됐다. 이런 흐름에 대해 브라질 민주화를 위해 싸운 전 축구선수 발터 카사그랑지는 "80년대 소크라테스와 나는 민주주의와 축구선수들이 공개적으로 정치 발언을 할 권리를 위해 싸웠다. 현재 보우소나루를 지지하는 선수들이 그의 정책 방향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의문이 든다"고 말하면서도 "당시는 군사 정부와 시민 사회 간의 정치적 대립이 명백했던 시절이다. 지금은 부패한 정치인과 싸우는 '정직한 사람들'이라는 프레임이 있다. 보우소나루가 이 프레임을 잘 활용한 사례"라고 말하기도 했다.[20] 참고로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군사정권 당시 탄압받은 대표적인 지역이라 지금도 민주 진영 강세 지역이다.[21] 호나우지뉴 외에도 파비오 칸나바로, 마르코 마테라치 등 왕년의 스타들이 연이어 방한하였다.[22] 모국인 브라질을 포함하여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멕시코 등에서 활동했다. 대부분의 브라질 선수들은 영어권에서 활동하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면 영어 구사가 서툴고 영어권 국가에서 뛰었어도 영어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보인다.[23] "역대 최악의 팀", "(현재 대표팀에는) 존경할 만한 지도자도, 특출난 선수도 없다", "대표팀 유니폼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이 부족하다", "코파 아메리카 경기를 보지도 않을 것이며, 승리해도 축하하지 않을 것"[24] 신기하게도 메시가 정말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고 난 뒤, 둘은 나중에 터키항공 광고를 같이 하게 된다.[25] 호나우지뉴가 마치 "어이쿠 내 새끼! 데뷔골 챙겨줘야지~" 하듯이 잇몸미소가 만개하며 메시에게 어부바를 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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