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형산강 兄山江 | Hyeongsangang River | |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에서 발원해 경주시와 포항시 도심을 관통해서 영일만을 통해 동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다. 유역면적은 1,139.96㎢, 유로연장이 61.95km로써 남한 땅에서 본류 기준으로 유역면적 9위, 유로연장은 8위의 하천이다. 강줄기가 형산강 지구대를 따라 형성되어 있다.
강 줄기는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건천읍과 경주시내 동 지역을 지난다. 이때 동 지역 남쪽(율동, 탑동 경계)에서 남천이, 경주시내에서 보덕동 발원, 덕동호에서 나오는 하천과 합류한다. 이 후 경주시내를 지나 현곡면과 천북면 사이를 지난다. 그 이후 안강읍에서 칠평천이 합류하며, 이후 진로를 북동쪽으로 꺾고, 강동면 인동리에서는 기계천이 합류한다. 이후, 포항시 남구 연일읍을 거친다. 그리고 포항시 동 지역에서 영일만으로 흘러든다.
경상북도 경주시 서면 도리에서 발원한 하천은 처음에는 '심곡천'으로 명명되다가 심곡저수지를 지난 후 아화초등학교 앞에서 합류해 들어오는 지류 하천의 이름을 따라 '대천' 으로 불리며 흘러가고 '나정교'에서 울산 백양골못이 발원지인 '복안천' 과 합류한 이후 정식으로 '형산강' 이 되어 흘러가는 듯하다. 그러나 실제 지도 맵에는 백양골못 발원지를 기준으로 하여 흘러가는 지류를 '형산강' 으로 이름 붙이고 있으며 심지어는 명계저수지 인근에서 발원하는 지천까지도 형산강으로 이름을 붙이고 있다.
현재 다른 강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취수로 인해 유량이 현저하게 감소한 하천 중 1곳이다. 특히 주변을 보면 경주에는 경주평야, 포항에는 포스코가 있으며 기본적으로 이 지역 인구가 많은 편인 지라[1] 취수량이 많은 반면 대한민국 주요 10대 하천 중 강수량은 가장 적다. 한 때 취수량이 전체 유량에서 71%[2]라는 기록을 세웠다.
형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673년부터 보이는 지명인 북형산(北兄山)에서 유래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신라시대에 북형산은 서형산(西兄山)과 짝을 이루는 지명이었는데, 서형산은 서술(西述)·서연(西鳶) 등의 명칭으로도 나타난다. 이는 산 꼭대기와 같은 높은 곳을 언급하는 '수리'를 음차로는 술(述), 또 뜻으로는 '솔개'를 뜻하는 연(鳶)으로 표기한 것으로 추측되며 형(兄)이라는 글자도 그 점에서 주변에 비해 도드라지게 높은 산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서형산은 선도성모 신앙이 부각되면서 새롭게 선도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고, 두 형산의 이름 가운데 북형산만이 남았다가 현재에도 형산으로 불리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형산에는 봉수대가 두어졌기 때문에, 지리적 기점으로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
한편 형산강은 경주·포항 일대에서 원체 중요한 강이었기 때문에, 신라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는 구역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삼국사기의 용례를 통해 보면 경주 남쪽 지역을 흐르는 상류 구간은 본래 문천(蚊川)으로 불렸고, 함월산에서 보문 일대를 지나 형산강 하류에 합류하는 지류를 알천(閼川)[3]으로 불렀다. 이후 삼국유사 단계에서는 경주 서쪽의 중류역에서 문천과 합수하는 하천을 서천(西川)이라고 부름이 확인되며, 강에 대한 이칭도 생겨나 문천에 대해서는 사천(沙川)·연천(年川)[4], 알천에는 북천(北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단계에서는 문천의 수원에 가까운 상류 부분을 사등이천(史等伊川)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알천과 북천은 동천(東川)이라는 이름의 이칭으로 밀려났으나, 북천이라는 명칭은 이후에도 단절되지 않고 현재에도 계승되고 있다.[5] 한편 서천에 합류하는 경주 도심 남쪽, 남산 서쪽의 지류들 또한 명확히 파악되었으며, 서천은 경주 일대 형산강의 본류로 인식되고 있었음이 뚜렷이 보인다. 이 서천이 동천에 합수하는 지점부터를 굴연천(掘淵川)이라고 불렀고, 이 굴연천이 형산 일대에 닿은 곳을 형산포(兄山浦)라고 불렀으며 강물이 영일현으로 나아가 바다에 닿는 곳을 주진(注津)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쓰이던 시기의 관념으로는 형산은 포구의 이름이지, 강의 이름이라고 할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현재의 포항 시내 상당 부분이 간척되기 이전이라, 강 하구 구간이 현재보다 짧았기 때문이다.[6]
그런데 조선 중후기에는 물류 교통이 발달하면서 점차 포구의 중요성이 커졌으며, 이 덕분에 형산포에도 형산창(兄山倉)이 두어져 발달하였다. 또한 18세기 전반 형산강 하류 유역에 포항창(浦項倉)이 두어지고 조선 정부에 의해 함경도까지 이어지는 거래망이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형산강 하류 일대의 중요성이 높아짐과 함께 점차 형강(兄江)을 거쳐 형산강이라는 명칭이 정착되게 되어, 비교적 짧은 역사를 지닌 하구의 형산강이라는 지명이 상류의 모든 지명을 잡아먹고 강 전체의 이름으로 부각되게 된다.[7]
한편 경주시와 포항시의 접경 지대에는 언젠가부터 경순왕과 관련된 전설이 형성되었다.# 7번 국도 경주와 포항 경계 지점의 유강터널이 지나는 제산(弟山)과 관련된 전설이 그것이다.[8] 강 건너편에 있는 산이 형산이다. 당시에는 형산과 제산이 하나로 합쳐져 있었는데 남천, 기계천 등에서 나오는 물로 지금의 안강읍 지역에 큰 호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물난리가 잦아 치수가 어려웠는데, 이를 위해서는 용으로 승천하여 그 산을 갈라야 했다. 그 때문에 경순왕(또는 그의 아들)[9]이 기도를 드려 승천을 했는데, 이때 용이 되기 위한 조건이 바로 누군가가 승천한 왕을 용으로 불러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때 승천한 왕이 뱀처럼 보여 사람들이 모두 다 큰 뱀이라고 불렀으나, 유금이라는 이름의 어린 아이 한 명만이 뱀이 아니라 용으로 불러주었고, 그제서야 용으로 승천할 수 있었다. 그 덕택에 산이 갈라지고 물이 빠져 나가게 되었으며, 물이 빠져 나간 뒤에 생긴 들판을 그 어린 아이의 이름을 빌어 유금이라고 불렀다. 현재 지명으로 강동면 유금리가 존재하는데, 유금이라는 명칭이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와 관련하여 형산 쪽에는 경순왕과 그 아들을 모시는 절과 사당이 있는데, 대표적인 곳이 형산 정상에 있는 왕룡사이다. 이 곳에는 다른 절에서는 보기 어려운 왕장군용왕전에 경순왕을 상징하는 목각이 있다. 이후 조선 후기부터 포항시 연일읍 중명리~경주시 강동면 국당리 일대에 부조장터라는 큰 규모의 시장이 들어서서 구한말 무렵까지 존재했고 현재까지도 각종 지명과 도로명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포항시에서도 부조장터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테마공원을 조성하고 2008년부터 연일읍 생지리 강변 둔치에서 매년 민속 장터를 주제로 한 지역축제를 진행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는 후대에 형성된 민간 어원인 것으로 보이며, 신증동국여지승람·대동지지 등에는 제산의 명칭이 보이지 않아 조선 후기 이전으로 소급할 수 없다. 애초에 경순왕의 재위 시기부터 북형산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시기보다 늦을 뿐만 아니라, 서형산이 서술·서연 등과 상통한 사례에서 볼 때 형산의 형(兄)은 설화의 내용과 달리 형제 관계를 의미하는 단어도 아니었다. 심지어 이 전승에서 원래 경순왕의 아들은 '김충'이라는 사람으로 전해질 뿐이다가 어느 순간 마의태자가 되었는데, 경순왕이 승천해 버렸다면 고려에는 누가 갔으며 마의태자가 여기서 승천해 버렸다면 금강산엔 누가 갔단 말인가? 게다가 왕장군용왕전의 경순왕이라는 목각 옆에 있는 다른 목각은 김충 또는 마의태자라고 하다가 김유신이라고 했다가 아예 경순왕이라고 하던 목각까지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이라고까지 하기도 하는 등, 이와 관련된 전승은 현대까지도 안정되지 못하고 있다. 경순왕은 무속에서 워낙 좋아하는 대상이라 전국 곳곳에 이름이 퍼져 있고 아들을 자처하는 이들 역시 매우 많기에[10] 후에 덧붙여진 요소일 가능성도 높으며, 그런 고유명사를 빼고 나면 이 이야기는 한반도에서 널리 전해지던 이무기 설화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때문에 그저 민간에서 이런 전승이 전해지고 있었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11]
포항시 하류에서 강을 따라 조성된 대략 10미터 높이의 강둑은 1930년대에 축조 되었다고 알려져있고 1950년대 초반까지는 경주 시내까지는 거뜬히 중소형 선박과 배가 하류에서부터 올 수 있을 정도로 수량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20세기 중반까지 포항[12]에서 소금장수가 걸어서 경주까지 와서 소금을 팔고, 다 팔면 형산강의 배를 타고 하류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1950년 9월에는 6.25 전쟁이 진행되던 중 북한군의 남하로 이곳을 방어선 삼아 일주일간 교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2000년대에는 하천정비를 실시하면서 퇴적물들로 형성된 불규칙한 지형이 반듯해지고 강을 따라 콘크리트 제방이 건설되었다. 2010년대 이후엔 강둑 위로는 자전거 도로가. 강둑 아래로는 주차장과 공원 및 정원이 대거 조성되면서 황량했던 강변에 캠핑과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이 늘어났다.
한편 형산강은 경주·포항 일대에서 원체 중요한 강이었기 때문에, 신라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는 구역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삼국사기의 용례를 통해 보면 경주 남쪽 지역을 흐르는 상류 구간은 본래 문천(蚊川)으로 불렸고, 함월산에서 보문 일대를 지나 형산강 하류에 합류하는 지류를 알천(閼川)[3]으로 불렀다. 이후 삼국유사 단계에서는 경주 서쪽의 중류역에서 문천과 합수하는 하천을 서천(西川)이라고 부름이 확인되며, 강에 대한 이칭도 생겨나 문천에 대해서는 사천(沙川)·연천(年川)[4], 알천에는 북천(北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단계에서는 문천의 수원에 가까운 상류 부분을 사등이천(史等伊川)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알천과 북천은 동천(東川)이라는 이름의 이칭으로 밀려났으나, 북천이라는 명칭은 이후에도 단절되지 않고 현재에도 계승되고 있다.[5] 한편 서천에 합류하는 경주 도심 남쪽, 남산 서쪽의 지류들 또한 명확히 파악되었으며, 서천은 경주 일대 형산강의 본류로 인식되고 있었음이 뚜렷이 보인다. 이 서천이 동천에 합수하는 지점부터를 굴연천(掘淵川)이라고 불렀고, 이 굴연천이 형산 일대에 닿은 곳을 형산포(兄山浦)라고 불렀으며 강물이 영일현으로 나아가 바다에 닿는 곳을 주진(注津)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쓰이던 시기의 관념으로는 형산은 포구의 이름이지, 강의 이름이라고 할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현재의 포항 시내 상당 부분이 간척되기 이전이라, 강 하구 구간이 현재보다 짧았기 때문이다.[6]
그런데 조선 중후기에는 물류 교통이 발달하면서 점차 포구의 중요성이 커졌으며, 이 덕분에 형산포에도 형산창(兄山倉)이 두어져 발달하였다. 또한 18세기 전반 형산강 하류 유역에 포항창(浦項倉)이 두어지고 조선 정부에 의해 함경도까지 이어지는 거래망이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형산강 하류 일대의 중요성이 높아짐과 함께 점차 형강(兄江)을 거쳐 형산강이라는 명칭이 정착되게 되어, 비교적 짧은 역사를 지닌 하구의 형산강이라는 지명이 상류의 모든 지명을 잡아먹고 강 전체의 이름으로 부각되게 된다.[7]
한편 경주시와 포항시의 접경 지대에는 언젠가부터 경순왕과 관련된 전설이 형성되었다.# 7번 국도 경주와 포항 경계 지점의 유강터널이 지나는 제산(弟山)과 관련된 전설이 그것이다.[8] 강 건너편에 있는 산이 형산이다. 당시에는 형산과 제산이 하나로 합쳐져 있었는데 남천, 기계천 등에서 나오는 물로 지금의 안강읍 지역에 큰 호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물난리가 잦아 치수가 어려웠는데, 이를 위해서는 용으로 승천하여 그 산을 갈라야 했다. 그 때문에 경순왕(또는 그의 아들)[9]이 기도를 드려 승천을 했는데, 이때 용이 되기 위한 조건이 바로 누군가가 승천한 왕을 용으로 불러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때 승천한 왕이 뱀처럼 보여 사람들이 모두 다 큰 뱀이라고 불렀으나, 유금이라는 이름의 어린 아이 한 명만이 뱀이 아니라 용으로 불러주었고, 그제서야 용으로 승천할 수 있었다. 그 덕택에 산이 갈라지고 물이 빠져 나가게 되었으며, 물이 빠져 나간 뒤에 생긴 들판을 그 어린 아이의 이름을 빌어 유금이라고 불렀다. 현재 지명으로 강동면 유금리가 존재하는데, 유금이라는 명칭이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와 관련하여 형산 쪽에는 경순왕과 그 아들을 모시는 절과 사당이 있는데, 대표적인 곳이 형산 정상에 있는 왕룡사이다. 이 곳에는 다른 절에서는 보기 어려운 왕장군용왕전에 경순왕을 상징하는 목각이 있다. 이후 조선 후기부터 포항시 연일읍 중명리~경주시 강동면 국당리 일대에 부조장터라는 큰 규모의 시장이 들어서서 구한말 무렵까지 존재했고 현재까지도 각종 지명과 도로명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포항시에서도 부조장터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테마공원을 조성하고 2008년부터 연일읍 생지리 강변 둔치에서 매년 민속 장터를 주제로 한 지역축제를 진행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는 후대에 형성된 민간 어원인 것으로 보이며, 신증동국여지승람·대동지지 등에는 제산의 명칭이 보이지 않아 조선 후기 이전으로 소급할 수 없다. 애초에 경순왕의 재위 시기부터 북형산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시기보다 늦을 뿐만 아니라, 서형산이 서술·서연 등과 상통한 사례에서 볼 때 형산의 형(兄)은 설화의 내용과 달리 형제 관계를 의미하는 단어도 아니었다. 심지어 이 전승에서 원래 경순왕의 아들은 '김충'이라는 사람으로 전해질 뿐이다가 어느 순간 마의태자가 되었는데, 경순왕이 승천해 버렸다면 고려에는 누가 갔으며 마의태자가 여기서 승천해 버렸다면 금강산엔 누가 갔단 말인가? 게다가 왕장군용왕전의 경순왕이라는 목각 옆에 있는 다른 목각은 김충 또는 마의태자라고 하다가 김유신이라고 했다가 아예 경순왕이라고 하던 목각까지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이라고까지 하기도 하는 등, 이와 관련된 전승은 현대까지도 안정되지 못하고 있다. 경순왕은 무속에서 워낙 좋아하는 대상이라 전국 곳곳에 이름이 퍼져 있고 아들을 자처하는 이들 역시 매우 많기에[10] 후에 덧붙여진 요소일 가능성도 높으며, 그런 고유명사를 빼고 나면 이 이야기는 한반도에서 널리 전해지던 이무기 설화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때문에 그저 민간에서 이런 전승이 전해지고 있었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11]
포항시 하류에서 강을 따라 조성된 대략 10미터 높이의 강둑은 1930년대에 축조 되었다고 알려져있고 1950년대 초반까지는 경주 시내까지는 거뜬히 중소형 선박과 배가 하류에서부터 올 수 있을 정도로 수량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20세기 중반까지 포항[12]에서 소금장수가 걸어서 경주까지 와서 소금을 팔고, 다 팔면 형산강의 배를 타고 하류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1950년 9월에는 6.25 전쟁이 진행되던 중 북한군의 남하로 이곳을 방어선 삼아 일주일간 교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2000년대에는 하천정비를 실시하면서 퇴적물들로 형성된 불규칙한 지형이 반듯해지고 강을 따라 콘크리트 제방이 건설되었다. 2010년대 이후엔 강둑 위로는 자전거 도로가. 강둑 아래로는 주차장과 공원 및 정원이 대거 조성되면서 황량했던 강변에 캠핑과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이 늘어났다.
계류형 하천으로 많은 회귀성 어류가 분포하며 다양한 종들이 분포했지만 현재는 많은 보들[13]로 인하여 정수형 생태계가 되었으며 배스, 블루길 같은 외래 어종이 유입되면서 종의 다양성이 큰 타격을 입었다. 분포하는 물고기는 잉어, 붕어, 큰입 배스, 파랑 볼우럭, 납자루, 가물치, 잔가시고기, 각시붕어, 수수미꾸리, 중고기, 누치 등이 분포한다.
포항시를 가로지르는 하류 부근에서 다양한 조류가 많이 발견된다. 참새, 까치 등 흔히 볼 수 있는 텃새부터 청둥오리와 같은 겨울 철새까지 수많은 조류가 자생한다. 한겨울에는 흰꼬리수리, 검은머리갈매기 등을 목격할 수 있다. 동계에 강변을 따라가다보면 철새를 찍으러 온 사진 작가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정도. 몇 년 전에는 포항시에서도 이를 인식하고 연일읍 중명리 도로변에 철새를 주제로 한 전망대를 건설하였다.
공업도시의 하천이 대부분 그렇듯 하류로 갈 수록 수질이 영 좋지 않다. 경주와 포항에서 배출되는 생활하수야 처리장에서 어느 정도 정화되어 나오지만 진짜 문제는 공업단지에서 방류되는 폐수다.[14] 공업지구로 이어진 하천에서는 퇴적물로 인한 토양 및 수질 오염이 심각한 수준으로 2016년에는 오염도 조사를 한 결과 공업단지와 인접한 하천의 퇴적물과 어패류에서 기어코 수은과 카드뮴을 비롯한 중금속이 적게는 기준치의 수십배에서 많게는 수천~1만 배 이상 초과 검출되었다. 허나 시에서는 낚시 및 어패류 채취를 금지한다는 공고[15] 외에는 별 다른 조치를 내놓지 못 하고 8년 넘게 상황을 방치하고 있어 지역 사회의 비판을 받고 있다. 2024년 현재는 오염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을것이다. 이런 상황이 장기간 지속된다면 최악의 경우 일본에서 발생한 미나마타병이나 이타이이타이병이 포항에서도 보고될 가능성이 있어서 우려되는 상황.
포항시를 가로지르는 하류 부근에서 다양한 조류가 많이 발견된다. 참새, 까치 등 흔히 볼 수 있는 텃새부터 청둥오리와 같은 겨울 철새까지 수많은 조류가 자생한다. 한겨울에는 흰꼬리수리, 검은머리갈매기 등을 목격할 수 있다. 동계에 강변을 따라가다보면 철새를 찍으러 온 사진 작가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정도. 몇 년 전에는 포항시에서도 이를 인식하고 연일읍 중명리 도로변에 철새를 주제로 한 전망대를 건설하였다.
공업도시의 하천이 대부분 그렇듯 하류로 갈 수록 수질이 영 좋지 않다. 경주와 포항에서 배출되는 생활하수야 처리장에서 어느 정도 정화되어 나오지만 진짜 문제는 공업단지에서 방류되는 폐수다.[14] 공업지구로 이어진 하천에서는 퇴적물로 인한 토양 및 수질 오염이 심각한 수준으로 2016년에는 오염도 조사를 한 결과 공업단지와 인접한 하천의 퇴적물과 어패류에서 기어코 수은과 카드뮴을 비롯한 중금속이 적게는 기준치의 수십배에서 많게는 수천~1만 배 이상 초과 검출되었다. 허나 시에서는 낚시 및 어패류 채취를 금지한다는 공고[15] 외에는 별 다른 조치를 내놓지 못 하고 8년 넘게 상황을 방치하고 있어 지역 사회의 비판을 받고 있다. 2024년 현재는 오염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을것이다. 이런 상황이 장기간 지속된다면 최악의 경우 일본에서 발생한 미나마타병이나 이타이이타이병이 포항에서도 보고될 가능성이 있어서 우려되는 상황.
- 상류부터 하류로 내려가는 순서로 작성하였다.
- 주요 교량만 작성.
동해에 합류 | |||||
해도근린공원 방면 | ← | 구형산교(인도교) | → | 포스코 방면 | |
← | → | ||||
← | 섬안큰다리(섬안로) | → | 포항철강산단 방면 | ||
칠성천 합류부 | |||||
포항터미널 방면 | ← | 연일대교(연일로) | → | 연일읍 방면 | |
효자역 방면 | ← | 형산강철교(괴동선) | → | 괴동역 방면 | |
← | 유강대교(31번 국도) | → | |||
강동면 방면 | ← | 국당교(945번 지방도) | → | 경주 방면 | |
왕신천 합류부 | |||||
강동IC 방면 | ← | 강동대교(7번 국도) | → | 경주 방면 | |
기계천 합류부 | |||||
칠평천 합류부 | |||||
← | 형산강교(20번 국도) | → | 북경주IC 방면 | ||
사방천 합류부 | |||||
신당천 합류부 | |||||
현곡 방면 | ← | 황금대교 | → | 용강산업단지 방면 | |
방면 | |||||
방면 | |||||
소현천 합류부 | |||||
현곡 방면 | ← | 금장교(용담로) | → | 황성동 방면 | |
북천 합류부 | |||||
동국대학교 방면 | ← | 동대교(동대로) | → | 성건동 방면 | |
석장동 방면 | ← | 장군교(인도교) | → | 성건동 방면 | |
충효천 합류부 | |||||
← | 서천교(태종로) | → | 경주터미널 방면 | ||
남천 합류부 | |||||
대천 합류부 | |||||
경주IC 방면 | ← | 나정교(서라벌대로) | → | 경주 시내 방면 | |
화곡천 합류부 | |||||
언양읍 방면 | ← | 용장교(35번 국도) | → | 포항,경주 방면 | |
← | 형산강교(7번 국도) | → | 내남IC 방면 | ||
이조천 합류부 | |||||
언양 방면 | ← | 노곡교(35번 국도) | → | 포항,경주 방면 | |
- 영남 동해안 지역에 살지 않는 사람들한테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아서 인지도가 별로인 강이지만, 제19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홍준표 후보가 한강·제주 앞바다·낙동강과 함께 형산강을 언급하여 매스컴을 탔다.
- 남한에서 동해안으로 흘러드는 하천 중 가장 큰 하천이다.
- 남한에서 낙동강과 함께 삼각주가 형성된 하천으로 가끔 소개되기도 한다. 동해안에서는 가장 큰 규모인 영일만으로 흘러들고 강의 규모도 큰 편에 속해 삼각주 형성에 꽤 유리한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삼각주의 크기는 대략 9㎢ 정도로 포항시내 일부(3분의 1 정도)가 해당되어 현재 포항시민의 삶의 터전을 만들어준 셈.
- 옛날 지명에서 알 수 있듯 상도, 죽도, 해도, 송도는 과거 바다였던 곳에 형산강이 실어날은 토사로 형성된 삼각주 도시이다. 현재는 칠성천, 송림천 복개 및 일부 매립 등으로 모두 육지가 되었으나 포항운하 개통으로 송도는 유일하게 현존하는 형산강 삼각주가 되었다.
- 죽도동의 동빈내항은 형산강의 구하도로, 삼각주가 만들어 지던 당시 형산강에 형성된 두 물줄기 중 본류에 해당하였으나 형산강을 지금의 포항제철소 방향으로 물길을 돌리는 공사를 진행하여 사실상 샛강으로 전락하고 그마저도 칠성천 복개 및 샛강 매립 등으로 물길이 단절되고 고립된 하천이 되었다. 이를 살리기 위한 일환으로 포항운하를 개통하여 형산강과 상통하는 샛강으로 되살아났다.
- 해병대 수색교육 지옥주 기간때 교육생들이 이 강 하류에 속하는 신형산교에서 직립다이빙을 한다고 한다.
[1] 포항시 49만 명+경주시 25만 명. 특히 포항은 경북에서 인구가 가장 많으며, 경주도 경북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다.[2] 당시 가장 많은 취수량을 기록한 동진강(85%)바로 다음이다.[3] 일본서기에서는 아리나례하(阿利那禮河)라고 하였고, 황복사 금동사리함기에서는 알천(軋川)이라고도 썼다.[4] 일각에서는 사천은 '몰개내'라는 고유어를 표현한 것인데 이 말이 '모기내'로 와전되어 '문천'이라는 표현이 해프닝에 가깝게 생겨났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정작 삼국사기에서부터 나오는 가장 이른 명칭은 문천이다.[5] 오히려 동천이라는 명칭이 파편화되어 동천동 등의 지명에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6] 때문에 18세기 초반까지도 형산포 일대를 '형호(兄湖)'라고 해서 아예 호수와 같이 인식한 사례도 보인다.[7] 눈치챘겠지만, 마찬가지로 이때 발달한 지명이 옛 지명을 잡아먹어버린 것이 영일현이라는 이름을 잡아먹은 포항이다.[8] 그래서 옛 7번 국도의 경주-포항 경계 도로도 제산로인 것.[9] 후술하겠지만 아들이 등장하는 경우 이름이 김충이라고도 하고, 마의태자라고도 한다.[10] 이런 경향은 무속까지 갈 것도 없이 양반가에서도 흔했다. 경주 김씨 족보 자체가 경순왕의 몇 번째 아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모임에 가깝고 족보 사칭이 막 벌어지던 조선 후기 당대에는 더 심했기 때문에, 18세기 중엽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한 경주 김씨의 무리한 왕릉 지정에 대해 반발한 유의건이 「나릉진안설(羅陵眞贗說)」을 쓰면서 맨 마지막에 "아니 족보 보니까 다들 경순왕 후손이라는데 다른 김씨 왕 후손은 어떻게 하나도 없냐? 애초에 전국 경주 김씨가 죄다 경순왕 후손이라는 게 말이 되냐?"고 뼈 아픈 지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지적을 한 결과 그는 경주 김씨 집안의 원수가 되어 그의 문집인 『화계집』의 여러 판본에서 「나릉진안설」이 삭제당하는 웃지 못할 결과를 낳게 된다.[11] 덧붙여 유금리라는 지명 또한 경주시에서는 완전히 다른 전승을 기원으로 전하고 있다.[12] 1950~1960년대까지 포항에 염전이 있었다.[13] 총 53개의 보가 있다. 이는 유로연장이 비슷한 하천 중에서는 현저히 많은 편이다.[14] 관련 보도 1: # 관련 보도 2: # 요즘이야 대놓고 배출하는건 드물어졌지만 20년 전까지만 해도 걸핏하면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하거나 강변 곳곳의 공업용 오폐수관으로 온갖 기름이 뒤섞인 폐수를 무단 방류한 사례가 보도된적 있었다. 문제는 이런 일이 공론화가 안됐을뿐 지역 사회에선 철강 산업이 한창 번성하던 1980년대부터 이미 형산강의 수질 문제를 꾸준히 제기하고 있었다. 정작 환경 오염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포스코는 이런 문제만 터지면 늘 쉬쉬하며 다른 공업단지의 탓으로 돌리기만 하고 지자체와 시민들조차 무관심으로 일관하니 문제이다.[15] 시간이 지난 현재는 그런 현수막조차 찾아볼 수 없으며 낚시객들은 별 신경안쓴다. 하지만 하류쪽은 수질이 끔찍하게 더럽다는걸 주민들도 잘알기에 잡고 방생해줄뿐 잡은 생선을 식용하는 사람은 없다. 또한 2000년대까지 형산강 하구에서 목선을 타고 어패류를 잡는 어민들을 자주 볼 수 있었으나 환경 문제가 심해진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다.[16] 2021년 12월 28일 선로 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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