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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 - 나무위키

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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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7월 11일 브라질의 민영 방송사 SBT가 BBC의 BBC 선정 위대한 영국인을 바탕으로 브라질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브라질인 100명’을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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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스트 퐁텐 (프랑스)
12
킬리안 음바페 (프랑스)
펠레 (브라질)
11
10
브라질의 前 축구인
Edson Arantes do...
이름
펠레
Pelé
본명
에드송 아란치스 두나시멘투[3][4]
Edson Arantes do Nascimento
출생
사망
2022년 12월 29일[8] (향년 82세)
브라질 상파울루주 상파울루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이스라엘 병원
묘소
상파울루주 상파울루 산투스 네크로폴레 에쿠멘시아 공원
국적
신체
173cm[9]
포지션
주발
오른발 (양발)[12]
등번호
소속
선수
바우루 AC (1952~1956 / 유스)
산투스 FC (1956~1974)
뉴욕 코스모스 (1975~1977)
행정
뉴욕 코스모스 (2010~2022 / 명예 회장)
국가대표
92경기 77골[14] (브라질 / 1957~1971)
통산 득점
757골
서명
펠레 서명펠레 서명 white
SNS
페이스북 아이콘 | 인스타그램 아이콘 | X Corp 아이콘(블랙)
정보 더 보기 [ 펼치기 · 접기 ]
부모
아버지 돈지뉴[15]
어머니 셀레스치 아란치스[16]
형제자매
남동생 자이르 아란치스 두나시멘투[17]
여동생 마리아 루시아 나시멘투[18]
조카
자이르 아란치스 두나시멘투[19]
배우자
로즈메리 촐비(1966~1982)
아시리아 나시멘투(1994~2008)
마르시아 아오키(2016~2022.12.29)[20]
자녀
장녀 산드라 마차도(1964년~2006년)[21]
차녀 플라비아(1968년생)[22]
삼녀 켈리 크리스티나(1967년생)[23]
장남 에디뉴(1970년생)[24]
사녀 제니퍼 나시멘투(1978년생)[25]
차남 조슈아 나시멘투(1996년생)[26]
오녀 셀레스치 나시멘투(1996년생)[27]
종교
후원사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선수 경력2.3. 은퇴 이후
2.3.1. 투병
2.4. 사망
3. 기록
3.1. 대회 기록3.2. 개인 수상3.3. 수훈3.4. 개인 기록3.5. 통산 기록
3.5.1. 클럽3.5.2. 국가대표
4. 플레이 스타일5. 평가
5.1. 위상5.2. 업적5.3. 관련 논쟁
6. 가정사7. 논란8. 펠레에 대한 헌사9. 어록10. 펠레의 저주11. 여담

1. 개요[편집]

브라질의 前 축구인. 선수 시절 포지션은 공격수다. 본명은 에드송 아란치스 두나시멘투(Edson Arantes do Nascimento)이며, 펠레(Pelé)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FIFA 월드컵 3회 우승[28]을 달성한 유일한 선수이며, 디에고 마라도나FIFA 세기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브라질 정부에서 펠레의 현역 시절 당시 유럽 구단의 영입을 막기 위해 그를 국외 반출 불가의 국보로 지정하기도 했다.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펠레'로 알려진 그의 이름은 별명이다. 브라질 흑인 혈통의 아버지 돈지뉴의 친구였던 골키퍼 "빌레(Bilé)"를 어린 펠레가 제대로 발음을 하지 못하고 "펠레"로 발음해서 생긴 별명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뿐이고 정확한 이유는 불명이다. 1977년에 발간된 펠레의 자서전에서도 펠레라는 별명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고 적혀 있었고, 한참 후인 2010년 10월경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는 펠레 본인이 이와 같이 밝혔다. 참고로 빌레는 포르투갈어가 아니라 히브리어로 기적이라는 뜻이고 펠레는 흑진주라는 뜻으로 붙여진 별명이라는 설도 있다.

어린 시절의 펠레는 자신의 별명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펠레가 살던 골목의 동네 친구들이 그를 펠레라고 부르며 놀려 대기 시작했고, 펠레는 그 때문에 친구들과 싸우기도 했다. 펠레의 원래 이름인 이지송(Edison)은 아버지 돈지뉴가 지어준 이름인데,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의 이름을 따서 붙여준 것이다. 이는 당시엔 유명인 혹은 위인의 이름을 자식의 이름에 넣는 경우가 있었고 돈지뉴가 에디슨을 존경해 그처럼 위대한 인물이 되라고 지어준 이름인데, 이 이름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던 펠레는 이지송이라는 이름을 무지 사랑해서 이상한 별명으로 부르던 주위 사람들과 자주 다툰 것이다. 덧붙여 돈지뉴는 펠레의 이름을 호적에 올릴 때 i자를 빼고 "이드송(Edson)"으로 올리려고 했지만 서류 절차상 실수가 생겨서 기록상으로는 이지송이 되었다.

어찌저찌 펠레란 별명이 굳어져버렸고 학교에서도 그를 펠레라 부르기 시작하자 그는 학교에서도 싸웠고 이틀간 징계를 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버지까지 그를 펠레라 부르게 되자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후에 스타가 된 후 그는 펠레란 이름을 신이 주신 이름이라며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펠레의 가족들은 그냥 이지송의 애칭인 지쿠(Dico)라고 불렀다.

어린 시절의 펠레는 브라질의 흔한 빈민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준프로 선수로 뛰었는데 보잘것 없는 선수 수당 때문에 시간제 근무까지 하면서 생활비를 보탰다. 펠레는 아버지가 자신보다 헤더 실력만큼은 더 뛰어났었다고 회고했다. 아버지는 선수 생활 시절 헤더로 축구 역사상 단일경기 최다 헤더 골 기록인 5골을 넣었던 적도 있지만 자신은 그렇게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상대 팀과의 경기 도중 강한 태클로 무릎이 부서지는 끔찍한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그럼에도 펠레의 아버지답게 기어코 재활에 성공했고 시청에서도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펠레의 가족은 바우루로 이사하였고, 펠레도 축구를 배울 수 있게 됐다. 이때 펠레는 담배에 손대며 흡연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직접 담배 값까지 주며 "담배를 피고 싶다면 돈도 줄테니 담배를 사서 피워라. 대신 그만큼 몸은 빨리 망가질테니 니가 원하는 축구도 그만큼 빨리 끝날 것이다" 라는 말에 담배값을 돌려드리며 담배를 끊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펠레는 공부는 별로 좋아하지 않고 축구를 좋아했으며, 조종사를 비롯한 여러 장래희망을 갖기도 했고, 가끔 무서운 일이 생기면 어머니에게 응석도 부리는 약간 소심할 뿐인 평범한 아이였다. 당시의 펠레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멘토는 아버지 돈지뉴였는데, 아버지는 자신이 못 이루었던 꿈을 아들에게 물려주어 그를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로 만들고자 하였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노하우를 펠레에게 전해주었다. 축구 선수로서 가져야할 기본적인 스킬과 마음 가짐은 물론이고 심지어 관중을 다루는 법까지 가르쳤다.

펠레가 10살이 되던 해에, 브라질 전역을 충격에 빠뜨린 마라카낭의 비극이 일어났다. 당시 펠레는 라디오로 경기 중계를 듣다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으로 보았고, 아버지를 위해서 브라질을 월드컵에서 우승시킬 것을, 그리고 우루과이에 복수할 것을 예수상 앞에서 맹세한다. 자서전에 보면 예수상 앞에서 눈물까지 흘리며 간절히 기도했다고 나와 있다. 펠레는 실제로도 신앙심이 매우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계약펠레
바우루 AC 유소년 팀 계약을 맺는 펠레

그렇게 펠레는 동네에서 축구를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한편 아버지 돈지뉴의 전 소속팀이었던 바우루 AC에서 유소년 팀을 만들면서 그 코치로 위대한 멘토 바우데마르 지브리투를 데려왔다.

그리고 펠레는 바우루 AC의 지브리투의 소개로 상파울루주의 떠오르는 강호, 산투스 유소년팀에 들어가게 된다. 산투스 FC는 당시 지투, 페페 등 젊은 선수들을 바탕으로 스쿼드를 재정비하던 팀이었다.

산투스 유소년팀에서 훈련을 받던 펠레는 2번이나 무단 이탈을 감행한 적이 있었다. 한 번은 자신의 왜소한 체격에 좌절감을 느꼈을 때, 다른 한 번은 4살이나 어린 선수들과의 경기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하였을 때였다. 펠레는 유소년 팀에서 이탈하려고 할 때마다 팀에서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허드렛일을 하던 사부라는 친구에게 걸려서 다시 숙소로 되돌아갔다.
이 사부라는 인물은 멘탈이 완전히 깨진 펠레를 잘 달래서 다시 축구에 전념하게 만들도록 도와준 인물이다. 작은 체격에 좌절감을 느꼈을 때는 "네가 바우루 시골에서 올라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거다. 만약 지금 먹는 속도대로 계속 먹다보면 조만간 너는 산투스 제일의 뚱보도 될 수 있다"라는 식으로 말하며, 펠레의 가방을 빼앗아 다시 방 안에 던져 넣었다.

페널티킥 실축 사건 때 사부는 대뜸 펠레의 방에 쳐들어갔다. 펠레가 울면서 짐을 싸고 있는 모습을 보자 사부는 좋은 구경했다는 식으로 펠레의 속을 긁었다. 펠레가 페널티킥 놓친 걸 말하느냐고 답하자 사부는 "맞다. 그런 식으로 페널티킥 날려 먹는 사람은 처음 봤다" 라고 말했고, 펠레는 엄청나게 화를 냈다. 하지만 사부는 침착하게 "네가 롤모델로 삼고 있을 산투스의 스타 플레이어들도 연습이든 실전이든 페널티킥 엄청나게 실축하던 거 내가 다 봤다. 누구나 다 하는 실수니까 풀 죽을 필요 없다" 라고 말하며 화나 있던 펠레를 달래주었다. 사부는 배움의 혜택을 받지 못해 허드렛일만 많이 했을 뿐이지 매우 지혜롭고 설득도 잘 하는 인물이었는데, 사부의 진심어린 설득 덕분에 축구 황제 펠레가 다시 힘을 얻은 것이다.

또 다른 일설에 의하면 펠레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집으로 도망쳐왔는데, 지브리투 코치가 집까지 찾아와서 끌고 갔다고 한다.

2.2. 선수 경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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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은퇴 이후[편집]

펠레는 축구 선수 은퇴 이후 부패로 얼룩진 브라질 축구계와 대립했다. 이후 브라질의 체육부 장관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브라질 축구계를 정화하는 대규모 개혁을 시도하는 등 축구 협회와 클럽들의 회계를 투명화하려 노력했으며, 선수들의 권익 보호에도 힘을 썼다. 관련 네이버캐스트 그러나 여기에 대해선 반박의 여지가 있다. 펠레가 만든 이른바 '펠레법'이 오히려 브라질 리그를 망친 원흉이라는 비판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2021년 12월 기준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역대 최다 득점자(1283골)' 문구가 있는데 이는 기네스 등재 기록이지만 친선경기 득점 등이 포함된 비공식적 기록이다.
2015년에는 노환이 찾아왔고, 각종 수술 후유증으로 휠체어 신세를 질 정도로 건강이 나빠졌다. 이 때문에 우울장애가 찾아왔다.# 지금은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현재 상황을 덤덤하게 받아들인다고 한다.

2020년에 대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으며, 이후 폐와 간에도 종양이 발견되어 항암 치료 중이었다. 2022년 들어서 요로감염으로 입원했다.

2022년 12월 3일, 브라질 언론사 FOLHA에선 펠레는 더 이상 항암치료에 반응하지 않으며 고통을 줄이는 것에 집중하는 임종치료를 받고 있다고 전해졌으나# 후에 가족이 일반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하였다.#

80세를 넘은 고령임을 고려한다면 그의 생애가 막바지를 달려가고 있는 것이 확실시되기에 2022 카타르 월드컵을 치르는 중인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겐 월드컵 3회 우승의 전설을 위한 우승 동기부여가 매우 클 것으로 보인다. 전 세계의 축구 팬들은 축구 황제와 이별할 준비를 해야 한다며 슬퍼하고 있다. 킬리안 음바페 역시 트위터에 응원의 글을 남겼다. 이에 대해 본인은 "나는 신에 대한 믿음이 있다. 내가 에너지로 가득 찰 수 있게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준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난 카타르 월드컵 브라질의 경기도 볼 것이다.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라며 아직 희망을 잃지 않고 있음을 피력했다.#

카타르 월드컵 16강 한국전에서 브라질이 승리를 거두고 펠레를 응원하는 현수막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끝내 브라질이 8강전에서 크로아티아에게 승부차기 패배를 당하면서 펠레는 생전 마지막으로 지켜본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우승을 보고 싶다는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경기 후 인스타그램네이마르 주니오르를 격려하는 글을 남겼다.#

이후, 8강에서 탈락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인스타그램에서 격려하는 댓글을 남겼다.

2022년 12월 19일, 인스타그램 피드를 통해 리오넬 메시의 월드컵 우승을 축하하였다.# 이후 이는 펠레 자신이 생전에 한 마지막 인스타그램 활동이 되었다.

2022년 12월 24일, 가족들이 병원으로 급히 이동하고 있다고 밝혀졌다. # 현지 언론들은 가족들이 펠레와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가족들이 공개한 영상에서 펠레는 전형적인 임종 단계 환자들의 증상을 보여주었는데, 스페인의 마르카는 이 영상에 대해 "지금 펠레의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있는 영상이다. 우리는 펠레가 암과 싸우는 마지막 순간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영상에서 펠레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복용하고 있는 약의 영향인지, 마취제의 영향인지 알 수 없다. 가족들은 펠레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며 펠레가 암과의 싸움에서 살아남는 것에 큰 기대를 가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2022년 12월 27일, 스페인 스포츠 매체 메디오 티엠포는 산투스의 홈구장에 장례식을 위한 구조물이 들어섰다고 보도했다.#
Amor, amor e amor, para sempre.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영원히.

펠레의 유언
결국 2년 간의 투병 끝에 한국 시각 2022년 12월 30일 3시 27분, 현지 시간으로 2022년 12월 29일 15시 27분에 그가 치료받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이스라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2세.## 2023년 새해를 고작 3일 남겨 놓은 시점이었다.

펠레의 건강 상태에 관한 말들은 이미 2015년부터 나왔다. 노환과 각종 수술의 후유증으로 몸이 매우 좋지 않았고, 2020년에는 대장암 진단도 받았다. 이후 통원치료를 통해 항암치료를 받으며 건강을 회복하고 있었으나, 2021년 11월 심부전증과 전신부종, 정신착란 증세 등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자 재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이후 건강을 다소 회복하는 듯했으나, 2022 카타르 월드컵 이후 항암치료에 반응이 없으며 임종이 임박했다는 소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많은 축구팬들은 펠레가 기적적으로 다시 회복하기를 바랐으나, 이전부터 쌓여 온 수술 등 여러 가지 후유증과 82세라는 고령까지 겹치며 결국 세상을 떠났다.

또다른 세계 축구의 전설 중 하나였던 디에고 마라도나가 사망한 지 2년 만에 펠레마저 그를 따라가면서 전 세계 많은 축구 선수들과 팬들에게 안타까움을 전하고 있다.

펠레의 데뷔팀이자 펠레의 전성기를 함께한 산투스는 공식 계정을 통해 펠레의 추모글과 영상을 올렸다.# 뉴욕 코스모스도 추모글을 올렸다.#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등 빅클럽들도 펠레의 죽음을 애도했다.

펠레 사망 직전 카타르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아르헨티나의 전설 리오넬 메시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Descansa en paz (평안히 쉬십시오), Pele"란 글귀와 함께 고인을 추모했다.# 또한 준우승을 차지한 프랑스의 킬리안 음바페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The king of football has left us but his legacy will never be forgotten. RIP KING (축구의 왕이 우리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축구의 왕에게 명복을 빕니다.)"이라는 문장과 함께 고인을 추모하였다. 그 외에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엘링 홀란드, 네이마르 레반도프스키 웨인 루니 등 많은 축구계 인사들이 그의 죽음을 추모하였다.

FIFA에서도 공식 SNS를 통해 고인의 별명 'King of Football'을 인용해 그의 평안한 안식을 기원했다.

브라질 정부는 펠레의 타계 후 3일의 국가 애도 기간을 지정하여 축구 황제의 마지막 길을 추모하였으며, 그가 전성기 동안 머물렀고 동시에 일생을 마무리한 곳인 상파울루는 7일의 애도 기간을 지정했다. 장지는 산토스 외곽에 위치한 아파트 형태를 띈 공원묘지 메모리얼 네크로폴레 에쿠멘시아 공원(Memorial Necrópole Ecumênica) 9층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공동묘지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곳이기도 하다. 19년 전 펠레는 묘지 구매 사실을 공개하며 도심 한복판에 있는 수직 묘지를 택한 이유로 "묘처럼 보이지 않았다. 영적인 평화와 평온을 준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라고 밝혔고 1층 묘역에 안장되었다.#
1940-∞

피파의 펠레 헌정 영상. 펠레 사후 산투스창단 111년 이래 첫 강등을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또한 조국 브라질 대표팀2004 아테네 올림픽 본선 탈락 이후 2024 파리 올림픽에서 20년 만에 올림픽 축구 본선 진출에 실패하였다. 펠레 본인이 이것을 직접 보지 않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이다.[29]

3. 기록[편집]

3.1. 대회 기록[편집]

3.2. 개인 수상[편집]

3.4. 개인 기록[편집]

  • 한 해 최다 득점: 127골 (1959)
  • 최다 해트트릭: 92회
  • FIFA 월드컵 통산 최다 우승: 3회 (1958, 1962, 1970)[39]
  • FIFA 월드컵 역대 최연소 득점 (1958, 17세 239일)
  • FIFA 월드컵 역대 최연소 멀티골 (1958, 17세 244일)
  • FIFA 월드컵 역대 최연소 해트트릭 (1958, 17세 244일)
  • FIFA 월드컵 역대 최연소 우승 (1958, 17세 249일)
  • FIFA 월드컵 역대 최연소 신인상 (1958, 17세 249일)
  • FIFA 월드컵 통산 최다 도움: 8도움[40][41]
  • FIFA 월드컵 단일 대회 최다 도움: 6도움 (1970)
  • FIFA 월드컵 단일 토너먼트 최다 도움: 4도움 (1970)
  • FIFA 월드컵 단일 토너먼트 최다 공격 포인트: 7개[42] (1958)
  • FIFA 월드컵 토너먼트 최다 공격 포인트: 12개[43]
  • FIFA 월드컵 단일 결승전 최다 도움: 2도움 (1970)
  • FIFA 월드컵 단일 결승전 최다 공격 포인트: 3개 (1958년: 2골 1도움, 1970년: 1골 2도움)[44]
  • FIFA 월드컵 결승전 최다 도움: 3도움
  • FIFA 월드컵 결승전 최다 공격 포인트: 6개 (3골 3도움)[45]
  • FIFA 월드컵 역대 최연소 결승전 출전 (1958, 17세 249일)
  • FIFA 월드컵 역대 최연소 결승전 득점 (1958, 17세 249일)
  • FIFA 월드컵 역대 최연소 결승전 도움 (1958, 17세 249일)
  • FIFA 월드컵 역대 최연소 단일 경기 득점, 도움 동시 기록 (1958 결승전, 17세 249일)
  • FIFA 월드컵에서 두 대회 연속 프리킥 득점을 기록한 유이한 선수[46] (1966, 1970)
  • 코파 아메리카 역대 최연소 득점왕 (1959, 18세 6개월, 8골)
  • 코파 아메리카 역대 최연소 MVP (1959, 18세 6개월)
  • 인터컨티넨탈컵 통산 최다 득점: 7골 (1962, 1963)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통산 최다 득점왕: 11회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통산 최다 연속 득점왕: 9연속

3.5. 통산 기록[편집]

펠레의 골 기록은 특정 대회를 포함시키느냐 안시키느냐에 따라 다르다. 인터컨티넨탈 슈퍼컵, 브라질 주별 대항전[47] 등을 공식 대회로 보냐 마냐에 따라 골 기록이 달라지곤 한다.
  • x표는 참가 자체가 불가능했던 경우
시즌
클럽
소속리그
주립 리그
히우
상파울루

[48]
전국 대회
[49]
총계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56
0
0
x
x
x
x
x
x
x
x
0
1957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9
9
5
x
x
x
x
x
x
38
41
1958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8
58
8
8
x
x
x
x
x
x
46
66
1959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2
45
7
6
4
2
x
x
x
x
43
53
1960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0
33
3
0
0
0
0
0
0
33
33
1961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6
47
7
8
5
0
0
0
0
38
64
1962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6
37
0
0
5
4
4
2
5
37
49
1963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9
22
8
14
4
4
5
1
2
36
48
1964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1
34
4
3
6
7
0
0
0
31
44
1965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0
49
7
5
4
2
7
8
0
0
48
64
1966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4
13
0
0
5
2
x
0
0
19
15
1967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8
17
x
14
x
0
0
32
26
1968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1
17
x
x
18
0
0
0
43
29
1969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5
26
x
x
12
x
0
40
40
1970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5
7
x
x
13
x
0
0
28
11
1971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9
8
x
x
21
0
0
0
0
40
9
1972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0
9
x
x
16
5
0
0
0
0
36
14
1973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9
11
x
x
30
19
0
0
0
0
49
30
1974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0
1
x
x
17
9
0
0
0
0
27
10
19시즌
합계
412
470
53
49
174
[69]
101
15
17
3
7
657
644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포스트 시즌
총계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75
북미 축구 리그
9
5
x
x
9
5
1976
뉴욕 코스모스
북미 축구 리그
22
13
2
2
24
15
1977
뉴욕 코스모스
북미 축구 리그
25
13
6
4
31
17
3시즌
합계
56
31
8
6
64
22시즌
클럽 커리어 통산
-
721
[71]
681
[72]

3.5.2. 국가대표[편집]

소속 대표팀
연도
경기
득점
1957
2
2
1958
7
9
1959
9
11
1960
6
2
1961
0
0
1962
8
8
1963
7
7
1964
3
2
1965
8
9
1966
9
5
1967
0
0
1968
4
1969
9
7
1970
15
8
1971
2
1
통산
91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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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평가[편집]

1970년 펠레는 존 레논, 교황 바오로 6세, 폴 매카트니, 무하마드 알리, 폴 뉴먼,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닐 암스트롱, 엘비스 프레슬리, 클린트 이스트우드, 엘리자베스 테일러, 존 웨인,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를 제치고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 명명되었다.

몇 년 후, 지구상 브랜드 인기도를 조사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펠레’가 지구상에서 인지도가 두 번째로 큰 것으로 밝혀졌다. 오일 및 가스 재벌기업, 은행, 자동차 제조회사, 항공회사, 유명 이동통신 회사 등도 펠레에 못 미쳤다. 펠레를 유일하게 능가한 브랜드는 코카콜라였다.

1위 펠레 (축구)
2위 무하마드 알리 (복싱)
3위 칼 루이스 (육상)
4위 마이클 조던 (농구)
5위 제시 오언스 (육상)

1999년 로이터 스포츠부 선정 20세기 최고의 스포츠인
1위 펠레 (축구)
2위 무하마드 알리 (복싱)
3위 칼 루이스 (육상)
4위 마이클 조던 (농구)
5위 마크 스피츠 (수영)

1999년 IOC 선정 20세기 최고의 스포츠인
1위 펠레 (축구)
2위 알렉산드르 카렐린 (레슬링)
3위 무하마드 알리 (복싱)
4위 레프 야신 (축구)
5위 마이클 조던 (농구)

1999년 Sport-Express(Russia) 선정 20세기 최고의 스포츠인
무하마드 알리 (복싱), 펠레 (축구), 재키 로빈슨 (야구)

1999년 타임 선정 20세기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 중 3인의 스포츠인
1위 무하마드 알리 (복싱)
2위 펠레 (축구)
3위 도널드 브래드먼 (크리켓)
4위 잭 니클라우스 (골프)

1999년 BBC 선정 20세기 최고의 스포츠인
1위 펠레 (축구)
2위 세레나 윌리엄스 (테니스)
3위 미하엘 슈마허 (F1)
4위 나디아 코마네치 (기계체조)
5위 마이클 조던 (농구)

2013년 BBC 선정 역대 최고의 스포츠인
1위 펠레 (축구)
2위 무하마드 알리(복싱)
3위 마이클 조던 (농구)

뉴욕 타임스 선정 역대 최고의 스포츠인
펠레와 1970년 브라질 대표팀의 지구정복

AP통신 선정 20세기 최고의 스포츠 사건
1위 로저 페더러 (테니스)
2위 무하마드 알리 (복싱)
3위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테니스)
4위 펠레 (축구)
5위 아이르통 세나 (F1)
6위 세레나 윌리엄스 (테니스)
7위 마이클 펠프스 (수영)
8위 미아 햄 (축구)
9위 마이클 조던 (농구)
10위 우사인 볼트 (육상)

2017년 ABC 선정 역대 최고의 스포츠인

20세기 기준으로 다수의 매체에서 역대 축구 선수 중에서 1위로 꼽혀왔으며, 21세기인 현재도 각종 축구 매체들이 선정하는 역대 선수 랭킹에서 리오넬 메시, 디에고 마라도나와 더불어 TOP 3에 거의 고정적으로 포함된다.[74] 현 피파 회장인 잔니 인판티노부터가 1970년생이고 펠레가 너무 오래전 선수라 그의 플레이를 직접 본 사람들은 고령으로 사회에서 은퇴하거나 점점 사망하고 있다는 점[75]이 마이너스 요인이지만 축구가 세계 최고 인기종목으로 올라가는데 큰 공헌을 한 선수이자 선구자라는 점, 월드컵 커리어면에서 다른 선수들보다 압도적인 점 등으로 인해 펠레는 여전히 상징성, 업적, 실력 모두 빠지지 않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반열에 드는 대선수라고 할 수 있다.

수십년이 넘는 세월 동안 펠레가 역대 최고의 축구 선수 중 하나로 꼽혀왔던 이유는 펠레와 비슷한 급이라 평가받는 극소수의 선수들조차 '확실히 펠레의 위상을 뛰어넘었다'라고 대다수에게 인정받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즉 커리어가 평가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펠레는 국가대표팀과 클럽 양쪽에서 축구 선수로서 이룰 수 있는 사실상의 모든 것을 이룬 인물이다.

펠레는 20세기 전세계 스포츠의 아이콘 중 하나로, 펠레를 단순히 축구 선수로 한정하지 않고 전체 운동 선수로 평가를 해도 펠레가 축구 대표로 뽑혀온 만큼 그는 전체 스포츠계의 상징 중 하나였던 선수다. 이는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의 거의 모든 축구 관계자들이 동의하는 바이다. 또한, 축구라는 스포츠를 상징하는 인물답게 브라질 내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로 칭송받으며, 실제로 브라질 역사상 가장 세계적 인지도가 높은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은퇴한 지 얼마 안 된 1981년에 플라카르에서 세계 각국의 축구 전문가 70인에 의뢰하여 역대 베스트 11을 뽑았을 때에는 단 한 명을 제외하면 모두 펠레를 자신의 팀에 집어 넣었고, 20세기 말 각종 세기말 조사에서 펠레가 축구 선수 랭킹에서 1위를 차지하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76] 그도 그럴 것이 20세기 시절 펠레는 축구를 넘어서 스포츠 전체를 대표하는 선수였다. 1999년에 IOC는 농구마이클 조던, 복싱무하마드 알리를 두고 펠레를 20세기 최고의 스포츠인으로 선정했다. 특히 당시 조던은 두 번째 쓰리핏을 성공시켜 이미 업적으로 봐도 농구 1인자로 굳혀진데다 현역이기까지 했기 때문에 위상이 어마어마했음에도 펠레가 뽑혔다.[77] 타임지에서 뽑은 20세기의 인물 100에도 축구계 인물로는 유일하게 들어갔고 무하마드 알리, 재키 로빈슨과 함께 스포츠 분야의 3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다만 펠레의 활동 시기가 워낙 과거의 일이라 펠레의 플레이를 담은 영상은 거의 소실된 상태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부족하니 펠레는 실력 논쟁이 펼쳐질 때마다 언제나 불리한 위치에 설 수밖에 없었다. 또한 1960년대 남미 리그 수준과 무관하게 유럽에서 뛰지 않았던 점도 펠레에 대한 저평가 요인 중 하나였다.[78]

그래도 2004년의 펠레의 다큐멘터리 영상 '펠레 에테르노'를 시작으로 펠레의 영상 자료가 과거에 비해 많이 발굴되었다.[79] 또한 적은 표본이긴 하지만 옵타 등 스포츠 통계 사이트에서 골 기록 외에도 도움 기록과 키패스 등 다른 스탯에서도 현재의 슈퍼스타들에 모자를 것 없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더욱이 옵타의 월드컵 기록은 1966년 대회부터 기록되었는데 1966년 대회는 펠레가 계속 부상에 시달리다가 주앙 모라이스의 더블 백태클로 신체적 전성기가 끝난 대회임을 감안하면 이 기록은 펠레의 진면목을 전부 보여주지 못하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골 기록만 존재하고 영상 자료는 없던 과거에는 펠레가 단순히 골만 많이 삽입하던 전형적인 스트라이커란 폄하도 있었지만, 현재는 영상 자료들로 인해 축구팬들에게 인사이드 포워드적인 부분과 축구 전반에 뛰어난 컴플리트 포워드로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펠레는 축구 역사상 유일한 월드컵 3회 우승 선수이며, 이 중 두 개의 대회에서 팀의 에이스급 활약을 하며 우승을 이끌었다. 여기서 괄목할만한 점은 1958, 1970 월드컵 모두 펠레의 전성기와 겹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펠레가 펼친 퍼포먼스의 정점은 1960년도 초중반으로 귀결되는 편이며, 클럽 레벨에선 리그, 인터컨티넨탈컵,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모두 가릴 것 없이 폭격하던 시기다. 축구를 넘어 최고의 스포츠 대회라 할 수 있는 월드컵에서 최고의 업적을 남긴 것이 펠레가 축구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FIFA 클럽 월드컵의 전신인 인터컨티넨탈컵코파 리베르타도레스는 각각 2회 우승했다.[80] 소속팀 산투스는 남미 클럽 대항전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4번 밖에 참가하지 못했는데 그 4번 중 2번을 우승했다. 브라질 전국대회 우승, 준우승팀의 자격으로 2번 더 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지만, 소속팀의 기권이나 브라질 축구협회의 반대 등의 이유로 불참했다.[81]

커리어의 우열을 가리는데 펠레의 유럽 무대 경험이 없음을 지적하는 것은 오류다. 펠레 시대는 남미와 유럽이 축구계를 양분하던 시대였고 지금처럼 최고 클래스 선수들이 유럽에 쏠린 상황과는 다르다. 자세한 내용은 세부 사항에 후술되어있다. 브라질로 들어가면 전국 대회에서 6회 우승과 득점왕 3회를, 상파울루 주립 리그에서 10회 우승과 득점왕 11회를 달성했다. 산투스의 통산 우승 횟수가 2011년 우승까지 포함하여 19회이니 아직 통산 우승의 반 이상을 펠레 시절에 이룬 것이다. 이렇게 펠레는 국가대표팀 뿐만 아니라 클럽에서도 대부분의 대회를 호령했다. 유일하게 펠레가 우승하지 못한 대회라면 남미의 국가대항전인 코파 아메리카인데, 이 대회 역시도 브라질 축구협회의 반대로 단 한 번 출전했다. 그 유일한 출전에서 팀은 준우승에 그쳤지만, 펠레는 대회 MVP와 득점왕을 모두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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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가정사[편집]

펠레 2003년 가족사진
2003년 가족사진[82]
펠레는 총 3번의 결혼과 여러 번의 외도를 통해 혼외자 2명을 포함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다.[83]
펠레 첫번째 결혼
1966년 결혼식
1966년, 로즈마리 촐비와 결혼하여 1967년 1월에는 장녀인 켈리 크리스티나를, 에디뉴라 불리는 에드손을 1970년에, 제니퍼를 1978년에 낳았다. 장남인 에디뉴는 2014년 5월, 마약 밀매를 통한 돈세탁에 가담했다는 혐의가 인정되어 1심에서는 33년형을, 항소심에서는 12년 10개월을 선고받은 바 있다.

1981년부터 당시 17살이었던 모델 슈샤와 사귀기 시작했다. 상대 여성의 나이가 23살 연하에 굉장히 어렸던 지라 당시 국내 언론에도 보도될 만큼 화제를 모았다. 결국 로즈마리 촐비와는 다음해인 1982년에 이혼했고, 슈샤와는 결혼설까지 나왔으나 1986년에 헤어졌다.
펠레 쌍둥이아들
1996년 쌍둥이 아들 출산 후
1994년 4월, 가스펠 가수인 아시리아 나시멘투와 결혼했고, 1996년 9월에는 쌍둥이 아들 조슈아와 셀레스치를 낳았다. 두 사람은 2008년에 이혼했다.
펠레 세번째 결혼
2016년 결혼식
2016년, 75세의 나이에 25살 연하인 마르시아 아오키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1980년대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로 2008년에 재회하여 2010년부터 연인관계로 발전했다고 한다. 마르시아 아오키는 일본계 브라질인으로 사업가라고 한다.

펠레는 총 2명의 혼외자를 인정한 바 있는데 첫 번째로 아니지아 마샤도라는 하녀와의 사이에서 1964년생인 산드라 마차도를 두었다. 로즈마리 촐비와의 결혼이 1966년이니 결혼 기간 중의 외도는 아닌 셈이다. 다만, 펠레가 DNA 검사마저 거부하며 버티자 법원은 강제로 DNA 검사를 실시하여 딸의 손을 들어주었고, 그 딸은 펠레의 성(姓)인 두나시멘투를 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펠레는 이후에도 그 딸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했고, 딸이 2006년 유방암으로 사망했지만 장례식에도 가지 않아 대내외적으로 큰 비판을 받았다.[84] 그리고 그 딸이 낳은 두 외손주들까지 철저히 존재를 부정했고 그들에게 양육비 청구 소송을 당해 패소했다. 이외에도 또다른 여성인 레니타 쿠르츠와의 사이에서 낳은 혼외자딸 플라비아는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이후 펠레는 자신의 자식이 몇 명인지 자신도 모를 정도라고 고백했다. # 펠레의 자녀는 공식적으로 7명인데 이중에서 2명이 혼외정사로 태어난 자식들이며, 그 이상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을 펠레가 함으로서 펠레와 혼외정사를 벌인 여성이 많았음을 시사했다. 펠레의 말에 따르면 많은 여성들이 자신에게 먼저 접근했다고 한다.

펠레의 어머니인 셀레스치 아란치스(1923년 ~ 2024년)는 1939년에 16살의 나이에 펠레의 아버지인 돈지뉴와 결혼했으며 이듬해 장남 펠레를 낳았다. 셀레스치 아란치스는 살아생전에 펠레가 축구선수가 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다. 펠레의 저주는 모계유전이었다. 셀레스치 아란치스는 엄청 장수했는데 2024년 6월 21일 향년 101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이는 아들보다 2년 늦게 사망한 것이다. 또한 살아생전 고손주(펠레의 증손주)까지 보고 사망했다.#

7. 논란[편집]

축구 황제로서의 자부심이 지나치기 때문인지, 자신과 비교되는 선수들에게는 좋은 소리 안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펠레 자신과의 대척점에 있는 세기의 라이벌인 디에고 마라도나와는 서로 디스를 주고 받던 사이이며, 호마리우호나우두 등의 브라질 출신 후배들도 잘 나갈 때는 펠레에게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리오넬 메시가 그 대상이 되었으며, 특히 메시는 네이마르부터 넘고 오라는 소리는 메시 안티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개드립이었다는 평을 받는데, 그나마 메시와 네이마르가 동료가 된 이후에는 메시를 종종 치켜세우기도 했다. 메시가 바르셀로나의 브라질리언들과 매우 친하게 지내다보니 브라질에서의 평가가 상당히 좋아진 것도 하나의 이유다.

2014 브라질 월드컵을 두고 무조건 닥치고 개최해야 한다며 개최 거부 시위를 비난하면서 엄청나게 욕을 먹기도 했다. 국회의원이 된 호마리우가 월드컵 개최를 놓고 엄청난 비난을 하면서 시위를 옹호하던 것과 비교했을 때 대조적이라서 더 욕을 먹었다. 이 때문인지 아르헨티나 기득권자들에 허구한 날 쓴소리하는 디에고 마라도나와 달리 기득권자들에게 아첨하고 빈민층이던 자신의 과거는 잊었다는 비난도 많다. 그러나 이 부분은 펠레의 저주와 마찬가지로 기자들의 정보 왜곡이 있었다. 당시 인터뷰에서 "브라질 국민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찾으려는 평화적 시위에 피해를 주고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나쁜 사람들이 있다"라는 말도 했으나 이 부분은 방송되지 않았던 것. 결국 시간이 지나서 "과격 시위와 국가대표팀에 대한 야유에 반대한 것이었을 뿐이며 평화롭기만 하다면 브라질 시위를 지지한다"라고 진화 성명을 냈지만 이것 역시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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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어록[편집]

베토벤음악을 위해 태어났고 미켈란젤로미술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나는 축구를 위해 태어났다.
축구는 팀플레이가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스포츠이다.
축구는 가장 아름다운 스포츠이다. 가장 창조적인 방법으로 상대방을 놀라게 만드는 것이 항상 가능하기 때문이다.[85]
나는 미드필드 라인으로 자주 내려가 미드필더들을 돕곤 했다. 그때는 상세하게 기록되지 않았지만, 난 분명히 내가 넣은 골보다도 많은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Q: 당신이 현대에 뛴다면 1,000골을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A: 아니다. 현대의 장비는 나의 현역 시절보다 훨씬 발전해 있다. 또한 스타플레이어들에 대한 보호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만약 현대에 선수생활을 한다면, 두 배 많은 2,000골을 넣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요즘 비행기에서 직접 자신의 짐을 옮기는 축구선수를 상상할 수 있는가? 나는 이제 축구선수들이 더 이상 그런 일을 하지 않고 좋은 환경에서 다닐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
페널티 킥은 골을 넣는 가장 비겁한 방법이다.[86]
머리는 가슴에게 이야기하고, 가슴은 발에게 이야기한다.
브라질은 축구를 통해 먹고 자고 마신다. 브라질은 축구로 살아간다.
모든 것은 열정에 달렸다. 그것은 팽팽한 기타 줄과 같다.
나는 사람들을 좋아하며, 항상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 나는 축구로서 얻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왜냐하면 신께서 나에게 모든 능력을 주었기 때문이다.
상대보다 0.5초 빨라야 한다.
축구를 하는 모든 어린이들은 펠레처럼 되고 싶어한다. 나는 그들에게 축구선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줄 책임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해야 사람답게 되는지를 보여줄 책임이 있다.
아프리카에 갔을 때, 어딜 가든지 저를 신처럼 받들더군요. 아마도 제가 흑인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줬기 때문인거 같아요. 저는 흑인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백인의 나라에서 흑인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들에게 저는 희망의 빛이었습니다. 그 빛이 얼마나 희미하든지 간에 말이죠.
가난에서 어린이를 구해내는 것이 월드컵 결승전에서 골을 넣는 것보다 기분 좋은 일이다.
현재와 미래는 같은 것이다.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이 당신의 미래를 만든다.
나이는 상관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배움을 그만두어서는 안된다.
누구라도 좋은 선수가 되려면, 무의식 속에서도 양 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축구는 하나의 종교이다. 나는 축구공을 숭배하며, 축구공을 신처럼 다룬다. 많은 선수들은 축구가 그저 공을 차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좀 더 공을 예쁘게 다룰 필요가 있으며 공을 찰 때 귀중한 보석을 대하듯 해야 한다.
사람들은 늘 내게 묻곤 해. "제2의 펠레는 누구죠? 언제 나타납니까?" 사견을 밝히자면 '제2의 펠레'같은 건 태어나지 않을 거야.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미 공장 문을 닫으셨거든.
축구는 한두명의 스타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다. 늘 경기 안에 어우러져 있어야 하며, 누군가가 소극적으로 군다면 이길 수 없다. 이것은 팀 게임이므로 누구도 혼자 플레이할 수 없다. 11명이 1명처럼 플레이해야 승리가 찾아온다.
나는 가끔 잠을 자지 않고 그저 누워서 궁금해한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아직도 '펠레'가 그리 유명한 이유가 뭘까? 솔직히 말하면, 나도 모른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나와 함께 외칩시다. 러브-러브-러브!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영원히.

펠레의 마지막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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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고의 축구선수로 명성이 자자한 펠레이지만 또한 악명을 떨치고 있었으니 그것은 그가 말을 하면 언제나 그것이 반대로 이루어지는 펠레의 저주 때문이다. 이놈의 저주 때문에 평생동안 엄청난 정신적 압박에 시달렸다. 그렇지만 그저 이건 농담삼아 하는 얘기니 너무 진지하게 펠레를 까는 건 자제하자. 틀린 것이 부각돼서 그렇지 정확하게 예측한 것도 많기 때문.

어쨌든 펠레의 저주 희생양들에겐 흑마법사라고 왕창 까인다. 이게 펠레의 잘못이라곤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펠레가 무언가를 예측할 때마다 지목당한 선수들의 팬들은 그만좀 하라고 원성이 자자하다. 우리나라 역시도 펠레가 월드컵에서 한국의 승리를 예상하자 펠레를 깠다. 펠레에게 질문을 던진 기자까지 세트로 까였고. 네이마르가 메시보다 낫다는 개드립을 듣고도 기겁한 쪽은 오히려 네이마르의 팬들이었고 메시팬들은 심지어 좋아하는 사람마저 있었다. 실제로 펠레가 네이마르가 낫다는 말을 할 때마다 네이마르는 매 경기마다 부진했고, 메시는 귀신처럼 골을 넣으면서 골든상 수상까지 했다. 여담으로 펠레는 자국 월드컵 직전에 아르헨티나는 팀이 엉망이고 메시를 3류 선수라며 혹평까지 했다. 그런데 월드컵 본선에서 온갖 하드캐리하면서 아르헨티나를 결승전까지 올렸다. 비록 준우승했지만 골든볼까지 수상하였다.
  • 1967년 나이지리아 비아프라 전쟁 당시, 양측 당사자들은 라고스에서 열린 펠레의 시범 경기를 관전하기 위해서 48시간의 휴전에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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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알리와 펠레의 만남
  • 펠레는 1961년 3월 이른바 역사에 남을 만한 골을 기록했다. 플루미넨시 FC를 상대로 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펠레는 상대편 선수 모두를 혼자서 제치고 득점을 기록했다. '마라카낭 사상 가장 아름다운 골'로 극찬을 받은 이 골을 기념하기 위해 상파울루 지역 스포츠 신문인「우 에스포르치」는 기념판을 제작해 마라카낭 스타디움 입구에 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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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타지우 두 마라카낭에 있는 기념판
  • 공격수로서의 펠레의 실력은 모두가 알지만, 펠레의 또 다른 장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골키퍼로서의 능력이었다. 펠레의 선수 시절 당시에는 선수 교체가 없었던지라 주전으로 나왔던 골키퍼가 부상을 입거나 퇴장을 당하면 다른 골키퍼를 교체 투입시킬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필드 플레이어 한 명이 골키퍼로 투입되곤 했는데 그것이 산투스의 경우는 주로 펠레였다. 1000번째 골을 페널티 킥으로 넣기 바로 전 경기에서도 산투스의 골키퍼가 부상을 당하자 펠레는 남은 시간을 골키퍼로 뛰었고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조차 예비 골키퍼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산투스 팀에서도 2군 골키퍼 훈련을 받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실제 경기로는 1964년 1월 19일, 산투스 FC그레미우의 타사 브라지우 4강 2차전에서 경기 86분에 골키퍼 지우마르가 퇴장을 당했다. 산투스는 그 대책으로 펠레를 골키퍼로 뛰게 했다. 펠레는 이 경기에서 이미 해트트릭을 기록했는데, 골키퍼로도 여러 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의 승리를 지켜냈고 결승으로 이끌었다.참고하면 좋은 에펨코리아 글 이런 식으로 펠레가 골키퍼로서 뛴 기록은 놀라운 수준이다. 공식 경기와 비공식 경기를 합쳐 골키퍼 대신 뛴 경기가 7경기나 되는데, 실점은 단 한 개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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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장당한 지우마르의 유니폼을 빌려 입은 펠레
    펠레의 골키핑 능력
  • 펠레는 909경기만에 1000골을 달성했으며 그 대기록은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다. 미국에서는 베이브 루스가 2000회 이상의 홈런을 기록한 것과 마찬가지라 평했으며, 자국 브라질에서는 두 번씩이나 달에 착륙했던 미국인 조종사 콘라드와 빈의 사진이 펠레의 1000번째 득점 사진과 나란히 실렸다. 이 당시 펠레의 득점은 페널티 킥이었는데 한 브라질 언론인은 "세계인들이 모두 함께 집중해서 보려고 시간을 잠시 멈추어야 했기에 하늘이 그러한 상황(페널티킥)을 만들어주었다"라고 썼다.
  • 콜롬비아에서의 일이다. 그 날 따라 수비수들이 펠레에게 거칠게 몸싸움을 걸어왔고 평소에 매너 좋은 펠레도 고개를 흔들 정도였다. 그러다 펠레가 파울을 당했지만 심판이 오히려 펠레에게 파울을 선언했고 펠레는 가만히 넘어가지 않고 심판에게 항의했다. 심판은 이런 펠레에게 퇴장을 주었는데 펠레가 이렇게 퇴장을 당하자 관중들이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결국 오히려 주심이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경기장에서 나가야만 했다. 관중들이 쏟아져 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가 펠레보러 비싼 돈 주고 표 사서 경기보러 왔는데 펠레를 퇴장시켜? 장난하니?" 결국 남은 경기는 부심을 주심으로 임명하여 경기를 진행시켜야만했다. 그리고 펠레는 경기를 끝까지 소화했다.
  • 이란의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은 펠레를 만나기 위해 공항에서 세 시간을 기다렸으며 중국의 국경 수비대는 그와 인사를 하기 위해 초소를 버리고 홍콩으로 들어갔다. 물론 그들은 중징계를 받았다.
  • 펠레가 아프리카로 투어를 갔을 때의 일이다. 펠레는 그 날따라 엄청난 팬들의 환호에 너무 감격한 나머지 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친선 경기를 뛰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기까지는 미담인데 그 이후에 해프닝이 벌어졌다. 펠레는 평소에 잘 쓰지 않던 각종 묘기들을 선보이며 짧은 시간에 엄청나게 골 폭풍을 쏟아부었다. 관중들의 환호성이 커지는 건 당연한 일. 그런데 환호성이 커질수록 상대팀 수비수들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갔다. 급기야 골키퍼는 아예 경기를 포기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그걸 본 펠레는 아차 싶었다고 한다. 저 골키퍼도 가족들이 있고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을텐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있는 힘껏 그를 바보로 만들었다는 생각에 크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고. 게다가 본인의 서브 포지션이 골키퍼였기 때문에 골을 먹었을 때의 고통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경기가 끝난 후 펠레는 골키퍼에게 사과하러 상대팀 라커룸에 방문했지만 골키퍼는 펠레를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 펠레를 주인공으로 하는 아타리 2600의 게임 Pelé's Soccer는 스포츠 스타를 등장시킨 최초의 게임이다.
  • 1962년 펠레가 두 번째로 월드컵에서 우승하고 인터컨티넨탈컵에서 SL 벤피카를 깨박살내자 레알 마드리드, 유벤투스, 인테르 등 유럽의 수많은 축구 클럽들이 펠레를 영입하려고 노력했으나, 브라질 정부는 펠레를 '국보(國寶)'로 선언하고 펠레가 계속 브라질에 남도록 했다. 펠레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 때 이적료로 백지수표를 준비했다는 구단도 있다고 한다. 펠레는 한평생 동안 단 하나의 프로팀에서 활약했는데, 그것은 산투스 팀이었다. 은퇴 후에 미국의 축구 붐 조성을 위해 북아메리카 축구 리그에서 뛰기는 했다.
  • 월드컵에서 3번을 우승하여 월드컵의 대명사같은 선수지만 실제로 부상 또는 부상의 후유증이 없는 풀 컨디션으로 월드컵을 뛰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 1997년 펠레는 영국에서 대영제국 훈장 2등급 명예장(honarary KBE)을 받았다. 명예장이긴 하지만 현재 축구계의 현역 출신 유일한 KBE 수훈자다.
  • 은퇴하고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펠레가 택시를 탔는데 택시강도를 만났었다. 그런데 택시기사의 돈을 빼앗고 펠레의 돈도 뺏으려고 뒷문을 열었을때 놀란 얼굴로 있는 펠레를 보자 그들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죄송합니다 펠레씨,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당신의 돈을 빼앗을 수는 없죠."# 하지만 약 10년 뒤 또 강도를 만난 모양이다.#
  • 펠레가 청소년일 적의 이야기다. 친구들과 축구를 한 뒤 으쓱해져 함께 담배를 피웠는데, 이 장면을 아버지에게 딱 걸리고 만 것. 저녁이 되어 들어온 펠레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오늘 담배 피웠냐?" 펠레는 뜨끔해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야단맞을 줄만 알았던 펠레에게 아버지는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는 축구에 소질이 있으니 장차 크게 성공할 수 있을 거다. 그런데 벌써 담배를 입에 대다니. 흡연은 몸을 망가뜨려 경기에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한다. 나는 아버지로서 네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가르칠 책임이 있고,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갈 때는 그것을 막아야 할 책임도 있다. 하지만 네가 좋은 길로 가느냐 나쁜 길로 가느냐는 어디까지나 네 자신에게 달린 문제다. 너는 담배를 피우고 싶으냐? 아니면 훌륭한 축구 선수가 되고 싶으냐? 네 스스로 선택하거라." 그리곤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펠레에게 건네며 "뛰어난 축구 선수가 되길 원치 않고 굳이 담배를 피우고 싶다면 이 돈도 담배 사는 데 보태거라."라고 말한 뒤 밖으로 나가버렸다. 펠레는 한바탕 울고 난 뒤 아버지에게 가 돈을 돌려주며 당연히 이렇게 말했다. "담배는 피우지 않겠어요. 그리고 꼭 훌륭한 축구 선수가 되겠습니다!" 그의 말처럼 된 것은 물론이다. 이런 일화가 있었기에 그는 평생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 펠레와 술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펠레가 어린 시절 친구와 함께 어른이 즐기는 향긋하면서 마시면 기분 좋아지는 액체를 조금씩 먹다보니 큰 나무통 한 통을 거의 비워버릴 정도로 마셔버렸다. 친구는 술을 조금 즐기던 인물이라서 별 탈이 없었지만 펠레는 취했을 때 어지러운 것이 이대로 죽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결국 술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아버지께 가서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그 애원에 아버지는 몽둥이 찜질로 답을 주었다. 그 이후로 역시 술도 마시지 않았다. 술냄새만 맡아도 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에 토 나올것 같았다고 한다.
  • 펠레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울 노력하는 천재였다. 세계 역사에서 손가락에 꼽을 만한 빛나는 발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펠레는 자신의 발 모양에 심각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이유는 못생겼다고. 축구선수들의 발이 못생긴거야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펠레는 특히 심하다. 발마디의 굳은 살은 기본이고 발톱도 거의 흔적만 남은 수준. 밑의 사진은 현재 일반에 유일하게 공개된 펠레의 맨발 사진이며 이것 역시 펠레 본인이 한사코 촬영을 거부하다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다.
    펠레 맨발
    펠레의 맨발 사진
  • 아들 에지뉴도 축구선수였으며,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하지만 이 아들내미가 마약이나 팔고 다니는 사고뭉치여서 펠레의 속을 꽤나 썩혔다. 막내아들인 1996년생 조슈아도 산투스 FC에서 축구를 했었는데 2015년 미국의 탬파 대학교에 진학했다가 중퇴하면서 축구도 그만둔 것으로 보인다.
  • 1959년 펠레는 브라질 병역법에 의해 군대에 징집되었고 1년간 군복무를 했다. 펠레는 생전에 이 시절을 매우 환상적인 경험이라 생각했으며 아이들에게 가끔 군대를 가라고 충고하곤 했다. 애초에 펠레의 조국 브라질은 지금도 징병제를 유지하는 국가라 갈 수 밖에 없었다.
  •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브라질은 16강 조별리그에서 디펜딩 챔피언 잉글랜드를 만났다. 당시 물이 올라와 있던 펠레와 브라질 선수들은 자신만만했으나, 브라질은 고작 1골을 넣고 진땀승을 거뒀다. 왜 '고작'이냐하면, 당시 브라질은 지역예선에서 6전 전승을 하고 조별리그 1차전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경기에서 4-1로 이겼던 강팀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경기에서 잉글랜드 골키퍼 고든 뱅크스가 펠레의 골이나 다름없는 헤더를 막아내는 역대급 선방을 보여줬다. 경기가 끝나고 펠레는 "잉글랜드 골문은 은행(Banks)문만큼이나 문턱이 높더군요." 라는 드립을 남겼다.
  •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둔 2002년 4월부터 삼성전자의 HDTV 브랜드 파브 광고모델로 출연, 이 광고는 브라질에서 촬영하여 월드컵 폐막 전까지 방영되었으며 출연료는 6억원 가량으로 알려졌다.# 출연 후 6월 3일에는 삼성전자의 초청을 받아 한국을 방문하여 '파브와 펠레의 특별한 만남' 행사에 나오기도 했다.#
펠레가 출연한 삼성전자 파브(PAVV) 텔레비전 CF
  •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난 이후 펠레는 20세기를 빛낸 세계의 위대한 축구선수 100명을 선택해서 FIFA 100을 만들었다. 아무리 펠레가 빗나가는 예측을 자주하는 위인일 지언정 그래도 세계 축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장본인이니 만큼 그의 축구 안목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며 그 뛰어난 안목에 의해 펠레에게 선택받은 위대한 축구선수들이 FIFA 100인 것이다.
  • 펠레는 승리의 탈출이라는 영화를 찍었고 그 영화는 1981년에 개봉되었다. 여기에는 영화 배우 실베스타 스텔론, 막스 폰 시도우 등이 출연했으며 펠레 외에도 보비 무어등의 유명 축구 선수들이 출연했었다. 스토리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장교들이 선전용으로 연합군 포로수용소의 포로 대표팀과 자신들의 정예 축구팀과의 경기를 주선하였는데 포로 대표팀 선수들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탈출 계획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의 모티브는 데스메치로 알려져 있는 FC start 선수들의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1986년에는 핫샷(Hotshot)이라는 영화를 찍었는데 형편없던 실력의 한 젊은 미국 리그 축구선수가 펠레를 찾아가 수련을 받은 후 리그 우승을 차지한다는 내용의 영화이다. 대한민국에선 SBS에서 방영한 적이 있다.
  • 펠레가 선수 시절에 발롱도르를 수상했으면 7회를 수상했을 거라는 보도가 나왔다. 다름 아닌 프랑스 풋볼[87]에서 내보냈기 때문에 나름 의미가 있는 기사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1958년~1961년까지 4회, 이후 1963, 1964, 1970년 수상이다.
  • 과거 마라도나가 진행하던 토크쇼 '라 노체 델 디에스(10시의 밤)'에 펠레가 첫 초청자이자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이 토크쇼에서 둘은 서로의 이름과 등번호가 마킹된 유니폼을 교환하고 마라도나는 펠레를 칭찬(이라기보다는 까지 않는)하고, 펠레는 마라도나의 마약 끊기 노력을 크게 칭찬하는 등 평소에 축구팬들이 생각하던 이미지와는 다른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마라도나는 쇼 도중에 먼저 헤더 대결(서로에게 헤더해서 공을 넘겨주는 것)을 제안했고, 즉석에서 성사되었는데 길게 가지 않고 결과만 이야기하자면 펠레가 이겼다. 마라도나가 실수를 해서 공을 제대로 보내지 못하고 마라도나에게서 한 30cm 올라갔다가 바닥으로 직행하던 것을 마라도나가 재빨리 캐치해서 펠레와 뜨거운 포옹하는 애드립으로 넘기며 상황은 종료되었지만 제대로 봤다면 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고, 마라도나는 자신이 진행하던 토크쇼에서 굴욕을 당했다.
골닷컴 시대별 최고의 선수
골닷컴 선정 시대별 공격수 5...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선수, 최고의 공격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60년대 최고의 선수와 공격수들 중 1위에 이름을 올렸다.
  • 2015년 삼성전자가 <뉴욕 타임스> 지에 펠레와 비슷한 외모의 모델을 쓴 SUHD TV 광고를 게재했는데, 2016년 3월에 법률대리인 프레드 스털링 변호사(쉬프 하딘 소속)를 통해 삼성전자를 상대로 시카고 연방법원에 3000만달러(한화 약 350억원)의 소송을 걸었다.
  • 카포에라를 익힌 적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 세이부 컵 축구의 최종보스인 GOD 팀의 주장으로 등장한다. 1~7스테이지에서는 부심으로 뛰다 8스테이지에서 선수로 돌변하여 경기장에 난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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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과도 어느 정도 인연이 있는 편이다. 1972년 선수로서 한국을 방문해서 친선 경기를 치렀다.대한뉴스 친선 경기에서 펠레가 속한 산투스 팀이 3:2로 이겼다. 1998년에도 방한했다. 부산에서 열린 2002년 한일 월드컵 조추첨 행사에도 참여했다. 2002년 월드컵때 한국팀에 대해 좋은 멘트를 많이 남겼다. 브라질에 있는 펠레가 만든 팀인 리토라우FC에서 10번을 달고 뛰던 한국 축구 선수 임규혁에게 칭찬을 하기도 했다. 2003년 피스컵 대회 고문 및 홍보대사를 맡아 방한한 적이 있다. 피스컵은 열혈 축빠이기도 했던 문선명이 처음 개최한 것이며, 당시 펠레도 취지에 공감해 여러가지 지원 및 자문을 했었다. 2012년 문선명 사망때는 펠레가 직접 조전을 보내기도 했다.
  • 바비 찰튼도 언급한 바지만,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이 강한 선수기도 했다. 17살때 브라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를 묻는 질문에 나라고 대답했으며, 세계 최고의 윙어를 묻자 그것도 자기라고 대답했다. 다른 선수였다면 농담이라고 웃었겠지만, 펠레는 진정으로 믿고 대답했고, 다른 이들도 그 말을 부정하지 못해 누구도 웃지 않았다고 한다.#
  • 펠레의 등번호는 10번으로 유명하다. 펠레는 1958년 월드컵 개최 당시 17세의 유망주였기 때문에 그가 대회 실버볼을 차지하고 브라질의 우승을 이끌 주축 공격수가 될 것이라고는 거의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발렌티노 마촐라를 닮은 플레이로 인해 유럽에서도 유명해질 조제 알타피니도 있었고 여러모로 펠레가 낄 자리는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당시의 통념상 10번은 다른 선수에게 주어지는 것이 타당해 보였는데, 당시의[88] 팀의 주전 골키퍼 지우마르는 이례적으로 3번을 달고 뛰었고(다른 팀 다 멀쩡한 와중에 브라질만 골키퍼가 3번을 달았다.다행히도 후보 골키퍼였던 카스칠류가 정상적으로 1번을 받았다.), 8번이나 10번을 받을 팀의 플레이메이커 지지는 6번을 받고(지지는 전 대회인 1954년 월드컵에서 8번을 달았었다), 라이트 윙이 아닌 레프트 윙어 마리우 자갈루가 7번을 받고 반대로 라이트 윙인 가린샤가 11번을 받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이 터졌다. 당시에는 페렌츠 푸스카스, 후안 알베르토 스키아피노 같은 스타 선수나 달 수 있었던, 팀의 핵심 인사이드 포워드에게 돌아가야 할 10번의 영광이 뜬금없게도 당시 브라질 대표팀의 유망주에 불과했던 펠레에게 주어진 것이다. 펠레로서는 굉장히 우연한 기회에 받게 된 10번이었지만 이 10번 셔츠를 입고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10대 선수가 되는 바람에 이후에도 그 번호를 계속 달 수 있게 되었다. 이후로도 펠레가 브라질 국가대표팀에 소집되면 누구도 그의 등번호를 달 수 없었고 그의 은퇴 후엔 호베르투 히벨리누, 지쿠, 하이, 히바우두, 카카, 네이마르 주니오르 등으로 계보가 이어지고 있다.
  • 그와 가장 많이 비견되는 축구선수인 마라도나가 사생활 문제로 끊임없는 구설수에 오르는 것과 비교하면 은퇴 이후에도 큰 구설수에 휘말리거나 한 적도 없고 축구 진흥 및 홍보에 계속 힘쓰는 등 좋은 이미지가 강하다. 펠레는 페르난두 카르도주 대통령 시절 브라질의 체육부 장관으로 입각되어 국정에도 참여하였다.
  • 2012년에 브라질의 방송사 SBT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브라질인에서 9위에 이름을 올렸다. 스포츠인 중에는 6위의 아일톤 세나 다음으로 이름을 올렸으며, 축구선주 중에서는 제일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 2016년에 '펠레: 버스 오브 어 레전드'라는 영화가 나왔다. 빈센트 도노프리오 등 유명한 배우도 출연했고, 펠레의 가족들이나 펠레 역할의 배우는 실제로 브라질인을 캐스팅하였다. 펠레의 어린 시절 삶과 1958년 월드컵에서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가린샤가 펠레보다 키가 큰 점 등 잘못된 고증이 조금 있지만, 펠레의 유년기 삶과 브라질 축구계의 분위기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한번쯤 볼 만한 영화이다. 펠레 본인이 직접 마지막 내레이션을 맡았다. 그것도 포르투갈어가 아닌 영어로 했다. 참고로 호텔 로비에 앉아 있는 남자가 잠시 비춰지는 장면이 있는데 펠레 본인이 카메오 출연한 것이다.
  • 명성에 걸맞지 않게 피파 시리즈에서는 키가 작아서 저평가받는다. 나올 때마다 다른 스탯은 좋지만 오직 키때문에 호나우두, 호나우지뉴보다 저평가 받는 수준. 라이벌 마라도나는 라이선스 만료로 게임상에서 사라져서 비교가 불가능하다. 피파 온라인 4에서는 스탯이 사기적이라 성능은 보장되지만 하필 팀 케미스트리 시스템 때문에 비인기 매물이다. 가능한 팀이라곤 산투스 FC와 뉴욕 코스모스 FC, 브라질 국가대표팀 단 셋 뿐인데 브라질 국대를 제외하곤 한국인들에겐 인지도가 낮기 때문이다. 브라질 국가대표팀은 수비쪽이 부실해서 돈을 많이 써야 하는 팀이라 역시 비인기다.
  • 코로나로 시상이 취소된 2020 발롱도르 대신 프랑스 풋볼에서 선정한 올타임 발롱도르 드림팀에 공격형 미드필더로 선정되었다. 스트라이커 대신 미드필더 포지션에 이름이 올랐다는 점이 논란이 되긴 했으나, 선정전에 발표한 후보군의 포지션 배분을 보면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레프 야신, 프란츠 베켄바워,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의 선정은 사실상 기정사실화 되어있었으므로 올타임 드림팀 선정은 당연한 일이라는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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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로 위 상위 문단에 그가 탄생시킨 펠레의 저주라는 한때 월드컵에서 빼놓을 수가 없던 대표적인 징크스로 인하여 한국같은 나라에서 누구의 별명이 "펠레다"라고 한다면, 그건 축구에 천재인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예측하면 무조건 실제로는 정반대로 일어나게 되는 사람을 칭하는 별명이 되어 버리기도 했다.
  • 포르투갈어 사전 '미샤엘리스 사전'은 '펠레'(Pelé)가 "비범한 사람, 또는 그의 자질, 가치 또는 우월성 덕에 펠레와 같이 그 무엇이나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형용사로 사전에 추가됐다.#

[1] 헬무트 란과 공동 득점 2위. 골든슈, 실버슈, 브론즈슈는 1982년부터 수여했으므로 비공식 수상.[2] 최초 수상자이자 최연소 수상자.[3] 영어를 제외한 로망어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4] 펠레의 아버지가 이름을 지을 때 당시 유명인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짓는 유행에 따라 토머스 에디슨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등록하려 했을 때 실수로 i를 빼먹어서 에지송이 아닌 에드송이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5] 펠레의 출생신고10월 21일로 등록되었지만, 펠레는 관청 측의 실수이고 원래는 10월 23일 출생이라고 밝혔다.[6]브라질 미나스제라이스주 트레스코라송이스[7] Três Corações. 한국어로 번역하면 세 개의 심장이란 뜻이다.[8] 15시 27분/브라질 상파울루 시간대(UTC-3).[9] Pelé: A Biography(펠레 자서전) 175 페이지에 펠레의 신장이 5'8''(5피트 8인치. cm로 환산하면 약 173cm)로 기재되어 있다. #[10] 축구선수 커리어를 시작할 때에는 인사이드 포워드였다. 그러나 인사이드 포워드를 사용하는 전술은 1960년대 전반에 걸쳐 축구계에서 비주류 전술이 되어가고 있었고, 결국 1970년대를 지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브라질과 산투스는 1950년대 말부터 4-2-4 포메이션을 자신들의 주요 전술로 채택했고 펠레는 그런 변화에 적응하여 기량을 유지했으며, 1970년대에도 처진 위치의 공격수로 활약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다. 득점 기록만 보면 최전방에서 골에만 집중한 스트라이커로 착각하기 쉽지만, 주로 2선에 머무르며 플레이메이킹을 주도했으며 덤으로 득점력까지 뛰어났던 선수였다. 오늘날로 따지면 프리롤 공격수 역할의 세컨드 스트라이커 및 중앙 컴플리트 포워드 스타일의 선수이다.[11] 본인이 가장 선호하는 포지션이다. 10번이 9번과 함께 최고의 공격수 외에도 훗날 마라도나메시와 같은 공격형 미드필더의 상징 번호가 된 것도 펠레의 영향이다.[12] 원래는 오른발잡이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완벽한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양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해야 한다고 충고해 양발을 쓰게 되었다.[13] 펠레가 10번을 달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 당시에 브라질 축구협회가 등번호를 제출하는 것을 잊었고, 이에 FIFA의 어느 직원이 자기 마음대로 브라질 선수들에게 등번호를 부여했던 것이다. 이 월드컵에서 펠레는 최고의 활약을 보였고, 그때부터 10번은 축구에서 에이스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14]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득점 2위이자, 남미 선수 A매치 득점 랭킹 3위이다.[15] 본명은 주앙 하무스 두나시멘투(João Ramos do Nascimento)로 1917년에 출생하여, 1996년에 항년 79세로 사망하였다.[16] Celeste Arantes. 1922년 출생으로, 2024년 기준 102세며 엄청난 장수를 했고 2024년 6월 21일 세상을 떠났다.[17] Jair Arantes do Nascimento. 형 펠레가 펠레라는 예명으로 불린 것처럼 조카(Zoca)라는 예명으로 불렸으며, 남동생 또한 축구선수였다. 포지션은 공격수. 2020년 3월 25일 전립선암으로 사망했다.[18] Maria Lúcia Nascimento[19] Jair Arantes do Nascimento. 남동생의 자녀.[20] 상파울루 출신의 일본계 브라질인으로 사업가이다.[21] 혼외자. 아니치아 마차도 소생.[22] 혼외자. 레니타 쿠르츠 소생.[23] 첫번째 부인인 로즈메리 촐비 소생.[24] 본명은 에드손 촐비 두나시멘투. 로즈메리 촐비 소생. 2014년, 마약 밀매를 통해 돈세탁에 가담한 혐의로 1심에서 33년형을, 항소심에서 12년 10개월을 선고받았다.[25] 로즈메리 촐비 소생.[26] 두번째 부인인 아시리아 나시멘투 소생. 셀레스치와 쌍둥이이다.[27] 아시리아 나시멘투 소생. 조슈아와 쌍둥이이다.[28] 1958년, 1962년, 1970년.[29] 묘하게 마라도나와는 반대로 마라도나는 본인이 죽고 나서야 본인이 우승시켰던 팀들이 장기 무관을 탈출하고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SSC 나폴리(세리에 A 기준으로 1989-90 시즌 우승 이후로는 2022-23 시즌 우승이 유일하다.)와 아르헨티나 대표팀(월드컵 기준으로 1986 월드컵 우승 이후로 2022 카타르 월드컵 우승이 유일하다.)이 있다.[30] 1968년부터 1970년까지, 브라질의 공식 전국 리그였다.[참고] 공식적인 월드컵 골든볼은 1982년에 제정되어 시상하고 있으며 1978년 이전 골든볼 수상자들은 출처가 확실하지 않다. 피파 공홈에서 1978년 이전 수상으로 인정하는 것은 신인상 하나 뿐이다.# # 위키피디아에서도 역대 골든볼, 실버볼, 브론즈볼과 올스타팀 목록의 출처로 블로그 사이트를 참고하고 있었으며 잘못된 정보라고 보는게 맞다. 그럼에도 목록의 선수들의 은근히 설득력이 있어 이 목록은 전세계적으로 퍼졌으며 실제로 낚인 언론들도 있다. 다만, 1998년 아르헨티나의 최대 언론인 <CLARIN>에서 역대 월드컵 MVP를 뽑는데 1982년 이전 수상자들로 알려진 선수들이 대거 여기에 뽑혔다. 1950년 옵둘리오 바렐라, 1958년 수상자가 펠레인 점만 빼면. 또한 1958년 월드컵 직후 키커지 창립자이자 WM 포메이션이란 용어를 처음 쓴 베커가 매긴 평점에선 펠레가 디디보다 월드컵에서 활약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1970년 월드컵 최고의 선수가 펠레였다는 것은 이미 자타공인이라 정말로 전문가들이 과거 골든볼 수상자들을 선정한다면 1970년은 펠레가 뽑힐 것으로 전망된다. 옵타에서도 이 대회 평점 1위로 펠레가 선정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FIFA 월드컵/수상 참고.[32] 출처.[33] 최초, 최연소 수상 기록.[34] 스포츠계 인물 중에서는 무하마드 알리, 재키 로빈슨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35] 20세기 발롱도르 수상했던 선수들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방식[36] 링크[37] 영국에서 펠레와 같이 외국인이지만 2등급 훈장의 격에 맞다고 평가되는 인물은 영연방 국민이 받는 기사작위 'Knight Bachelor' 대신에 기사작위에 근접한 등급인 2등급의 훈장을 명예장(honorary awards) 형태로 받는 것이 관례다. 2등급으로 받는 이유는 서훈분류상 Knight Bachelor와 가장 가까운 등급으로 분류되는 훈장이 2등급 훈장이기 때문이고, 명예장 형태인 이유는 훈장 등급별 정원에 포함되지 않고 특례로 부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38] 영연방시민권이 없는 외국인이 영국 군주에게 기사로 서임되는 형식을 따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름 앞에 'Sir(경)' 칭호는 붙지 않는다. 표시가 필요한 경우 이름 뒤에 'KBE'만 쓰인다.[39] 3회 우승은 펠레가 유일하다.[40] 피파의 펠레 헌정 연상에서 "Joint record for most FIFA World Cup assists(FIFA 월드컵 공동 최다 도움 기록)"이라는 문구가 나온다.[41] 디에고 마라도나, 리오넬 메시와 타이 기록.[42] 6골 1도움. 1958년 쥐스트 퐁텐(7골), 2022년 리오넬 메시(5골 2도움)와 타이 기록.[43] 7골 5도움.[44] 1966년 제프 허스트, 2022년 킬리안 음바페와 타이 기록. 펠레를 제외한 2명 모두 해트트릭으로 기록했다.[45] 1958년: 2골 1도움, 1970년: 1골 2도움.[46] 나머지 한 명은 호베르투 히벨리누.[47] 정식 명칭은 Campeonato Brasileiro de Seleções Estaduais로 상파울루 주대표, 히우지자네이루 주대표 등 브라질 주들 끼리 대결하는 대회로 1922~1987년까지 열렸다. 이 대회는 펠레가 1959년에 산토스가 아닌 상파울루 주대표로 참가해 6골을 넣었다.[48] 1966년까지 개최하고 개최 중단[49] 1959년 개막. 1968년까지는 타사 브라지우라는 이름의 컵대회가 개최. 1967년~1968년은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과 타사 브라지우를 병행. 브라질 세리 A가 출범한 것은 1971년. 타사 브라지우, 브라질 세리 A 모두 우승팀&준우승 팀에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참가 자격이 주어진다는 점은 같음.[50] 영문 위키피디아 등 1경기 1골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곳도 많다.[51] 1957년 상파울루 주립 리그는 세리 아줄과 세리 브랑쿠로 나뉘어 열렸다. 펠레는 세리 브랑쿠에서 14경기 19골, 세리 아줄에서 15경기 17골을 득점했다.[52]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개막[53] 출처:포르투갈어 위키피디아[54] 출처:포르투갈어 위키피디아[55] 출처:포르투갈어 위키피디아[56] 산투스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정상적으로 참가했지만 펠레는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다.[57] 산투스는 1965년 타사 브라지우 챔피언이었고 원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참가해야 했지만 브라질 축구협회가 1966년 대회에 브라질 팀들을 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58] 히우-상파울루 토너먼트 중단, 이후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 개최[59]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타사 브라지우[60] 산투스는 1966년 타사 브라지우 준우승을 하여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의 참가 자격을 충족했지만 자국 대회에 집중하기 위해 소속팀이 기권하면서 출전하지 못했다.[61]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 타사 브라지우에는 불참. 대다수 위키 및 신문에 17경기 11골로 잘못 알려짐. #[62] 인터컨티넨탈 슈퍼컵 3경기 1골[63]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64] 브라질 축구협회에서 1970년 월드컵 예선전을 치르기 위해 브라질 팀들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진출을 제한했고, 이 때문에 산투스는 타사 브라지우에 기권했다 . 따라서 산투스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의 진출 자격을 충족했을지는 알 수 없다.[65] 인터컨티넨탈 슈퍼컵 5경기 2골[66]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67] 월드컵에 집중하기 위해 브라질 축구협회에서 브라질 팀들을 보내주지 않았다. 하지만 산투스는 전국 대회에서 참가 자격을 충족하지 못했기에 어차피 산투스의 참가는 불가능했다.[68]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 A 개막[69] 대다수 위키 및 신문에 1968년 시즌이 17경기 11골로 잘못 기록됨. 18경기 12골임. 따라서 174경기 101골이 정확함.[70] 기타 경기(공식전이었는지 아니었는지 확인이 어려운 경기들) 포함시 107경기 64골[71] 불확실[72] 불확실[73] 2001년 1월, FIFA는 1968년 11월 6일에 열린 브라질과 FIFA 선발팀과의 경기를 A매치로 인정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CBF는 여전히 FIFA 선발팀과의 경기를 A매치로 인정하며, 펠레의 A매치 경기 수를 92경기로 집계하고 있다. 이는 펠레와 함께 FIFA 선발팀과의 경기에서 뛰었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자이르지뉴, 히벨리누, 토스탕 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나무위키에 있는 이 선수들의 A매치 기록은 FIFA가 아닌 FA의 기록에 근거하여 작성되어 있는 것으로, 1968년의 해당 경기를 포함한 기록이다.[74] 메이저 언론사들이 발표한 역대 축구선수 순위를 보면 펠레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3위#, 마르카 3위#, 포포투 2위#, 부트발 4위#, 스포르트1 2위# 등이다. 이외 펠레는 가제타가 무순위로 뽑은 역대 TOP 5에 메시, 마라도나, 디 스테파노, 크루이프와 함께 이름을 올렸다.#[75] 펠레가 1940년 생이므로 펠레의 최전성기인 1957~1966년을 제대로 본 세대라면 거의 1930~40년대 초반 출생일텐데 이 세대면 거의 80~90세이다. 당장 펠레의 현역 시절 모습을 실제로 목격한 알렉스 퍼거슨부터가 1941년생이고, 펠레가 은퇴한 1977년은 젊은 축구팬들에게 웬만큼 익숙한 선수들조차 아예 태어나기 전이다. 펠레 본인도 장수했으나 결국 노환으로 2022년 12월 29일에 사망했다.[76] 다만 이 시기에는 마라도나의 도핑 적발 여파가 남아있어 그가 심하게 저평가받던 상황이었다. 펠레 입장에서는 마라도나가 평가절하를 받는 동안 반사이득을 약간은 본 셈이다.[77] 어찌보면 당연하다. 영향력이나 파급력면에서 전세계적으로 농구축구한테 절대 못비비는게 현실이기 때문. 단순 조던 신발이나 패션업계같은 문화적 요소 포함하면 조던일순 있겠지만 그것들 빼고 세계 스포츠계에 끼친 영향력만으로 펠레 vs 조던에서 조던이 이기는 경우는 미국내에서나 가끔 나오지 거의 대부분 펠레 압승이다.[78] 일례로 남미 올해의 선수상을 3년 연속 수상하고 베켄바워, 펠레로부터 극찬을 받은 센터백인 엘리아스 피게로아와 1960년대 남미 최고의 최전방 공격수인 알베르토 스펜서도 유럽에서 뛴 적이 없다는 이유로 다른 선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기도 한다.[79] 현존하는 펠레의 스페셜 영상 출처 대부분이 여기라고 보면 된다.[80] 당시 인터컨티넨탈컵은 FIFA 산하가 아닌 CONMEBOL과 UEFA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형식이었다.[81] 산투스 뿐만이 아니라 당시에는 불안정한 사회나 행정 등의 다양한 이유로 국제 대항전의 참가 자격을 충족하고도 기권하는 일이 비교적 흔했다. 반대로 기권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대회를 참가한다면 지금보다 특정 대회를 우승하기 수월했다는 의미기도 하다.[82] 펠레 옆에 베이지색 상의와 검은 바지를 입고 앉아있는 흑인 할머니가 펠레의 어머니인 셀레스치 아란치스이다. 어린 나이에 펠레를 낳아서 그런지 펠레와 거의 비슷한 연배로 보인다.[83] 다만 후술하겠지만, 이외에도 혼외자가 많을 것이라는 것은 본인도 인정한 바 있다.[84] 성격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펠레가 직접 장례식에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심지어는 펠레 본인이 밝히기로는 1996년에 아버지 돈지뉴가 사망하였을 때에도 아버지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아마 펠레가 장례식장에 가지 않는 이유는 어린 시절에 동굴이 무너져서 친구를 잃고 친구의 시체를 꺼내는 과정을 지켜보았고 비행기 사고로 죽은 파일럿의 시체를 보고 트라우마에 빠져 파일럿을 포기함은 물론 한참을 고생했었던 과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어린 시절의 펠레는 심약한 소년이어서 10대 초반까지 악몽을 꾸면 어머니 품에 안겨서 응석을 부렸다고 한다.[85] 원문:football is most beautiful sport, because it is always possible to surprise your opponent in the most creative way. 출처:펠레 페이스북 공식 페이지[86] 이 말 그대로 펠레는 국가대표팀에서나 클럽에서나 PK 전담 키커가 아니었다. 실제로는 매우 잘 찼지만 가끔씩 찼고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산투스에 온 후에는 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페널티 킥을 찼다.[87] 발롱도르가 FIFA 발롱도르로 합쳐지기 전에 수상자를 선정하던 기관이다.[88] 앞선 7번 주석에서 브라질이 등번호 작성을 잊어서 FIFA 직원이 랜덤 배정했다는 이야기와 차이가 있다. 둘을 종합해보면 등번호 제출 과정에서 뭔가 문제가 있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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