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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였으며
1610년의 실록 기사에는,
1610년의 실록 기사에는,
"당초 류영경의 당(黨)을 소북이라고 호칭하였는데, 소북 중에 또 청북(淸北)과 탁북(濁北)이 있었다. 대개 그 중에서 다소 강직하여 스스로 염치가 있다고 하는 자를 사람들이 청북이라고 칭하고, 그 나머지 무리를 탁북이라 이르니 김대래와 같은 무리였다."(『광해군일기(중초본)』 2년 3월 9일)
고 하여, 비록 수장 류영경은 1608년 사망하였으나 그의 영향력으로 탁북의 형성 이유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실록에는 "소북 중에는 또 청북과 탁북이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연려실기술』에는
"임인년(1602년)에 류영경이 정승으로 들어와서 등용한 것은 모두 소북이었다. 정권을 잡은 7년 동안 남이공 등은 다시 기용되지 못하다가 영경이 패하게 되자 이공 일파가 미리 그 기미를 알고 대립하는 형상을 취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공의 무리를 청소북(淸小北)이라 하고 영경의 무리를 탁소북(濁小北)이라 지목하였다."
고 하여 남이공과 류영경의 정치적 대립이 소북 분당, 즉 청소북과 탁소북 분당의 주요 원인임을 기록하고 있다.
결국 선조 후기에만 아주 잠깐 정권을 잡았다가 광해군 즉위와 동시에 멸문을 당했고 살아남은 이들은 청소북으로 전향했다. 사실 영수인 류영경이 영창대군을 선조의 후계로 밀며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과 노골적으로 대립하고, 그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선조의 교지까지 숨겨버릴 정도였으니 목숨을 구하길 바란 것 자체가 무리수였다.[2][3] 결국 류영경의 부관참시 이후 남아있는 탁소북은 대부분 광해군을 지지했지만, 류영경의 행태가 워낙에 도를 넘었던지라 영향력은 땅에 떨어졌고 대북의 눈치만 보는 신세로 전락했다.
인조반정 이후 류영경이 서인들에 의해 복권됐으니[4]그걸 위안으로 삼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탁소북은 그때 거의 없어지고 지방의 일부 유림, 유생들이나 중앙의 말단 관리들 모두 남인으로의 흡수, 혹은 서인으로의 전향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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