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 샤넬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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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 샤넬 Coco Chanel | |
본명 | Gabrielle Bonheur Chanel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 |
출생 | |
사망 | |
국적 | |
신체 | 169cm |
직업 | |
수상 | 니먼 마커스 패션 어워드 (1957) |
브랜드 | |
서명 |
그녀는 여성복에 대한 유럽의 전통[3], 코르셋을 많이 이용하던 1900년대~1910년대의 여성복에 대해 왜 여자들은 비실용적인, 쓸모없는 복장을 고수해야 하는지 회의를 느껴[4] 당시 애인이던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고향 영국에서 남성용 정장의 소재를 여성에게 적용하여 현대적 여성복 샤넬 수트로 간단하고 입기 편한 옷을 모토로 하는 디자인 활동을 시작하여 답답한 속옷이나 장식성이 많은 옷으로부터 여성을 해방하는 실마리를 만들었다. 그야말로 현대 여성복의 시초.[5]
이에 대한 설로는 "개인적인 원인도 있는데 원래 마르고 볼륨감이 전혀 없던 샤넬은 자기 몸매를 큰 콤플렉스로 생각하고 이를 커버하기 위한 여성적인 디자인을 많이 만들었다"는 설이 있고 반대로 자유분방한 성격 탓에 상류층의 권유로 승마를 시작했는데 승마에서 여성들은 치마를 입거나 다리를 묶어버려서 사실상 걸쳐 앉는 벤치나 다름 없었으며 말을 바지를 입고 탈 수 없었고 바지를 입고 승마를 시작한 샤넬을 향해 사람들은 '정신이상자'라며 차별했기 때문에 그녀가 '입기 편한 옷'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장식이 생략된 옷의 본체에 브레드나 코드의 테두리를 붙이고 당시에는 보기 드문 크고 작은 색유리나 크리스털 글라스의 액세서리를 붙이기도 하였다. 간단하고 입기 편하며 활동적이고 여성미가 넘치는 샤넬 스타일은 유행의 변천 속에서도 별로 변함없이 오늘날에도 애용된다.
그녀가 선택한 향수인 샤넬 No.5[6]도 유명하다. 마릴린 먼로가 생전에 자기는 이것만 입고(뿌리고) 잔다고 해서 더 유명해졌다.
이에 대한 설로는 "개인적인 원인도 있는데 원래 마르고 볼륨감이 전혀 없던 샤넬은 자기 몸매를 큰 콤플렉스로 생각하고 이를 커버하기 위한 여성적인 디자인을 많이 만들었다"는 설이 있고 반대로 자유분방한 성격 탓에 상류층의 권유로 승마를 시작했는데 승마에서 여성들은 치마를 입거나 다리를 묶어버려서 사실상 걸쳐 앉는 벤치나 다름 없었으며 말을 바지를 입고 탈 수 없었고 바지를 입고 승마를 시작한 샤넬을 향해 사람들은 '정신이상자'라며 차별했기 때문에 그녀가 '입기 편한 옷'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장식이 생략된 옷의 본체에 브레드나 코드의 테두리를 붙이고 당시에는 보기 드문 크고 작은 색유리나 크리스털 글라스의 액세서리를 붙이기도 하였다. 간단하고 입기 편하며 활동적이고 여성미가 넘치는 샤넬 스타일은 유행의 변천 속에서도 별로 변함없이 오늘날에도 애용된다.
그녀가 선택한 향수인 샤넬 No.5[6]도 유명하다. 마릴린 먼로가 생전에 자기는 이것만 입고(뿌리고) 잔다고 해서 더 유명해졌다.
젊었을 적 |
1883년 8월 19일 프랑스의 소뮈르에서 출생하였다. 가난에 시달리던 집안에서는 어린 그녀를 수녀원의 고아원에 맡겼는데 그녀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현대 여성복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자 연인들에게 둘러싸여 독립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삶을 살아간 여인이 되었다.
단순히 여성들의 패션을 바꾼 대단한 사람 수준으로 서술되었으나 12남매와 아내 잔 보뇌르를 두고 외가에서 받은 돈을 유흥가에서 흥청망청 날려먹고 가족을 버린 아버지 때문에 유년기를 수녀원에 버려진 채 보냈고 성인이 된 후에도 자존심이 강하여 평생 남자들에게 도움받기를 매춘에 비유하여 꺼렸으며 패션, 에티엔의 여자들에게 모자를 만들어 주기 전에는 노래와 춤, 승마를 익히는 등 패션의 대모 이전에 대하 소설을 연상케 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 사람이기도 했다.
단순히 여성들의 패션을 바꾼 대단한 사람 수준으로 서술되었으나 12남매와 아내 잔 보뇌르를 두고 외가에서 받은 돈을 유흥가에서 흥청망청 날려먹고 가족을 버린 아버지 때문에 유년기를 수녀원에 버려진 채 보냈고 성인이 된 후에도 자존심이 강하여 평생 남자들에게 도움받기를 매춘에 비유하여 꺼렸으며 패션, 에티엔의 여자들에게 모자를 만들어 주기 전에는 노래와 춤, 승마를 익히는 등 패션의 대모 이전에 대하 소설을 연상케 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 사람이기도 했다.
1913년에 드뷜에 2호점을 개설한 그녀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인 1915년에 <메종 드 꾸뛰르>를 오픈했다. 1916년 콜렉션을 발표해 대성공을 거둔 그녀는 새로운 디자인과 소재로 화제가 되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아서 카펠과 얼마 동안 동거했던 그녀는 1919년에 카펠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다시 혼자가 되었다.[7]
1921년 그녀는 파리 깡봉가 27, 29, 31번지 전체를 자신의 매장으로 채웠다. 본점을 깡봉가 31번지로 확장한 그녀는 조향사 에른스트 보와 함께 샤넬의 첫 향수인 <No.5>, <No. 22>를 발표했다. 이때 극작가였던 장 콕토, 화가인 피카소,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 등이 주최한 살롱에 출연한 그녀는 사교계의 거물이 되었다. 당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여성 화가였던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8]이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녀는 로랑생의 부드럽고 몽환적인 화풍으로 묘사된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인지 인수를 거부하고 수정을 요구했다고 한다. 로랑생 쪽에서도 자존심이 상했는지 수정을 거부하고샤넬을 촌x이라고 디스한 것은 덤 그대로 그림을 자신의 집에 보관했는데 로랑생 사후 초상화는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넘어가서 전시 중이다.#
1924년 이후 6년간 교제하던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보석 애호 취미로부터 영향을 받아 모조 보석을 사용한 쥬얼리를 발표했다. 원래 그녀는 편한 옷을 위한 실용주의자였기 때문에 과한 보석과 장신구를 싫어해서 '목에 거는 수표'라며 비아냥댔지만 진주를 발견한 뒤 인조진주를 섞어 패션의 일부, 악세사리의 일부로 편입시켰다. 이전까진 '부모가 물려준 보석'이나 '남편이 준 과한 보석'을 목에 걸었는데 여성이 주도적으로 목걸이를 패션 아이템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으며 무게도 훨씬 가벼워졌다.
이때 샤넬 슈트도 발표해 1934년부터 양산되기 시작했다. 이후 그녀는 공작과 헤어져 여러 디자이너 및 유력자들과 사귀었는데 그녀와 사귄 남자들은 모두 급사하거나 파산했다.
1921년 그녀는 파리 깡봉가 27, 29, 31번지 전체를 자신의 매장으로 채웠다. 본점을 깡봉가 31번지로 확장한 그녀는 조향사 에른스트 보와 함께 샤넬의 첫 향수인 <No.5>, <No. 22>를 발표했다. 이때 극작가였던 장 콕토, 화가인 피카소,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 등이 주최한 살롱에 출연한 그녀는 사교계의 거물이 되었다. 당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여성 화가였던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8]이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녀는 로랑생의 부드럽고 몽환적인 화풍으로 묘사된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인지 인수를 거부하고 수정을 요구했다고 한다. 로랑생 쪽에서도 자존심이 상했는지 수정을 거부하고
1924년 이후 6년간 교제하던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보석 애호 취미로부터 영향을 받아 모조 보석을 사용한 쥬얼리를 발표했다. 원래 그녀는 편한 옷을 위한 실용주의자였기 때문에 과한 보석과 장신구를 싫어해서 '목에 거는 수표'라며 비아냥댔지만 진주를 발견한 뒤 인조진주를 섞어 패션의 일부, 악세사리의 일부로 편입시켰다. 이전까진 '부모가 물려준 보석'이나 '남편이 준 과한 보석'을 목에 걸었는데 여성이 주도적으로 목걸이를 패션 아이템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으며 무게도 훨씬 가벼워졌다.
이때 샤넬 슈트도 발표해 1934년부터 양산되기 시작했다. 이후 그녀는 공작과 헤어져 여러 디자이너 및 유력자들과 사귀었는데 그녀와 사귄 남자들은 모두 급사하거나 파산했다.
1934년에 기업으로서 순탄한 성장을 한 샤넬 브랜드는 액세서리 부문의 공장도 개설했으며 이듬해엔 양장 전문점도 오픈했다. 1939년엔 약 4천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으나 노동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노동조건에 항의한 노동자들이 파업 투쟁을 벌였다. 요즘과 비교해 가혹했던 노동 조건이었던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사회적 기준으로도 처우가 가혹해서 벌어진 일인데 코코 샤넬은 이에 충격을 받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향상시키는 대신 직장을 폐쇄하고 노동자들을 모두 해고해 버리고 일부 점포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사업을 접기로 하면서 일시적으로 은퇴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15년간 프랑스의 패션계를 떠났다. 그 때 코코 샤넬은 샤넬 향수라인에만 집중했는데 이는 연락이 닿는 유일한 가족 때문이었다.
코코 샤넬은 3남 3녀 중 첫째였는데 그리도 싫어하는 아빠는 외도를 일삼았고 엄마와 만날 때마다 강제로 임신을 시켜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했다. 결국 코코 샤넬의 엄마는 어린 나이에 사망했고 아이들은 수도원에 맡겨졌다. 이 때 남은 자매들과 형제들 중 연락이 유일하게 닿던 형제가 있었는데[9] 그가 죽으면서 30년간 코코 샤넬은 조카의 후견인을 해줬다. 그런데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향수 라인만 남긴 채 조카가 있는 곳으로 피신을 간 순간 조카의 연락이 닿지 않았고 프랑스군으로 징집된 것이 아니라 나치독일군에 의해 포로로 잡혔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더군다나 포로로 잡히기 직전 결핵에 걸려 생사를 오가는 위독한 상태였고 코코 샤넬은 자신의 뮤즈이자 유일하게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자 '보이 드 샤넬'의 카펠이 사망한 트라우마로 인해 어떻게든 조카를 살리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그 조카는 자살한 여동생의 아들로 알려져 있고 코코 샤넬은 제 자식처럼 여겼으며 나중에는 그 자살한 여동생의 딸까지 거두었다. 코코 샤넬의 종손녀이자 대녀(goddaughter)인 이 아이의 이름도 가브리엘이다.
프랑스 사교계를 총동원해서 독일에 아는 연줄을 찾기 시작했고 이 때 조카를 풀어주기 위하여 독일에 방문해 결국 어떠한 조건을 수락하고 그 조카를 풀려나게 했다. 그 조카는 프랑스군으로 징집된 상황에서 나치 독일에 포로로 잡혀 있었으니 이를 풀어주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 그녀를 프랑스인들이 좋게 볼 리가 만무했다. 이후 프랑스에 돌아왔을 땐 히틀러의 부하와 연애했다는 사실이 프랑스 언론에 오르내렸고 코코 샤넬은 반 강제로 칩거하게 되었다. 40이 넘는 나이에 아이를 낳고 싶어 수 차례 시도했음에도 실패했던 그녀에게는 유일한 자식이나 다름 없었던다.코코 샤넬의 조카는 1981년 사망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크리스티앙 디오르로 대표되는 남성 디자이너들이 화려하고 사치스런 디자인으로 패션계를 장악한 모습을 비판하며 다시금 자신의 실용주의 철학을 내세우며 패션계에 복귀하겠다는 생각을 품었지만 프랑스에서는 철저히 실패했다. 이후 예전 동업자였던 피에르 베르트하이머의 자금과 사업 지원을 받아 드디어 1954년에 샤넬 컬렉션을 선보이며 패션계에 돌아왔지만 프랑스 언론들은 진부하고 고루하다며 그녀의 컬렉션에 혹평을 쏟았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반대로 '패션의 혁명'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할리우드의 스타들도 그녀의 옷들을 애용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패션은 다시금 유행의 중심이 되었으며 그녀도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고 트위드라는 현재까지도 사랑받는 패션을 미국에서 유행시켰다.
이 역시 사실 불편한 사실이 숨어 있는데 미국은 그녀의 옷을 가장 많이 헐값에 복제해 간 전과가 있었다. 무단으로 디자인을 도용해 3~6달러의 헐값에 팔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바지를 착용하지 못하게 했던 상류층들의 4년간의 괴롭힘을 알았기 때문에 미국 여성들의 '편안한 옷'을 위해 저작권 소송 등을 일체 포기하고 여성의 자유로운 의복을 위하여 아예 신문에 대놓고 헐값에 카피 옷을 광고하는 것도 눈감아주고 40년대 후반 미국 여성들의 사회 진출로 샤넬의 옷을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아예 샤넬 옷 따라 만들기 키트까지 집집마다 팔았다고 한다. 당시 잡지를 보면 미국에서도 샤넬이 있는 집과 없는 집으로 나뉘었고 집집마다 옷을 따라서 만들어 입으면서 샤넬 덕분에 미국에서 여성들이 직업을 가질 때 '편한 복장'을 입을 수 있었다.
코코 샤넬은 3남 3녀 중 첫째였는데 그리도 싫어하는 아빠는 외도를 일삼았고 엄마와 만날 때마다 강제로 임신을 시켜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했다. 결국 코코 샤넬의 엄마는 어린 나이에 사망했고 아이들은 수도원에 맡겨졌다. 이 때 남은 자매들과 형제들 중 연락이 유일하게 닿던 형제가 있었는데[9] 그가 죽으면서 30년간 코코 샤넬은 조카의 후견인을 해줬다. 그런데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향수 라인만 남긴 채 조카가 있는 곳으로 피신을 간 순간 조카의 연락이 닿지 않았고 프랑스군으로 징집된 것이 아니라 나치독일군에 의해 포로로 잡혔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더군다나 포로로 잡히기 직전 결핵에 걸려 생사를 오가는 위독한 상태였고 코코 샤넬은 자신의 뮤즈이자 유일하게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자 '보이 드 샤넬'의 카펠이 사망한 트라우마로 인해 어떻게든 조카를 살리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그 조카는 자살한 여동생의 아들로 알려져 있고 코코 샤넬은 제 자식처럼 여겼으며 나중에는 그 자살한 여동생의 딸까지 거두었다. 코코 샤넬의 종손녀이자 대녀(goddaughter)인 이 아이의 이름도 가브리엘이다.
프랑스 사교계를 총동원해서 독일에 아는 연줄을 찾기 시작했고 이 때 조카를 풀어주기 위하여 독일에 방문해 결국 어떠한 조건을 수락하고 그 조카를 풀려나게 했다. 그 조카는 프랑스군으로 징집된 상황에서 나치 독일에 포로로 잡혀 있었으니 이를 풀어주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 그녀를 프랑스인들이 좋게 볼 리가 만무했다. 이후 프랑스에 돌아왔을 땐 히틀러의 부하와 연애했다는 사실이 프랑스 언론에 오르내렸고 코코 샤넬은 반 강제로 칩거하게 되었다. 40이 넘는 나이에 아이를 낳고 싶어 수 차례 시도했음에도 실패했던 그녀에게는 유일한 자식이나 다름 없었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크리스티앙 디오르로 대표되는 남성 디자이너들이 화려하고 사치스런 디자인으로 패션계를 장악한 모습을 비판하며 다시금 자신의 실용주의 철학을 내세우며 패션계에 복귀하겠다는 생각을 품었지만 프랑스에서는 철저히 실패했다. 이후 예전 동업자였던 피에르 베르트하이머의 자금과 사업 지원을 받아 드디어 1954년에 샤넬 컬렉션을 선보이며 패션계에 돌아왔지만 프랑스 언론들은 진부하고 고루하다며 그녀의 컬렉션에 혹평을 쏟았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반대로 '패션의 혁명'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할리우드의 스타들도 그녀의 옷들을 애용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패션은 다시금 유행의 중심이 되었으며 그녀도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고 트위드라는 현재까지도 사랑받는 패션을 미국에서 유행시켰다.
이 역시 사실 불편한 사실이 숨어 있는데 미국은 그녀의 옷을 가장 많이 헐값에 복제해 간 전과가 있었다. 무단으로 디자인을 도용해 3~6달러의 헐값에 팔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바지를 착용하지 못하게 했던 상류층들의 4년간의 괴롭힘을 알았기 때문에 미국 여성들의 '편안한 옷'을 위해 저작권 소송 등을 일체 포기하고 여성의 자유로운 의복을 위하여 아예 신문에 대놓고 헐값에 카피 옷을 광고하는 것도 눈감아주고 40년대 후반 미국 여성들의 사회 진출로 샤넬의 옷을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아예 샤넬 옷 따라 만들기 키트까지 집집마다 팔았다고 한다. 당시 잡지를 보면 미국에서도 샤넬이 있는 집과 없는 집으로 나뉘었고 집집마다 옷을 따라서 만들어 입으면서 샤넬 덕분에 미국에서 여성들이 직업을 가질 때 '편한 복장'을 입을 수 있었다.
1920년 때 사진 |
샤넬은 자신의 생활 방식을 아이디어의 원천으로 삼아 현대 여성의 모습, 행동, 옷 입는 방식 등을 제시했다. 소년 같이 슬림한 몸매와 짧은 헤어스타일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그의 그을린 피부와 활동적인 생활 방식, 경제적 자립 또한 이상적인 것으로 여겼다. 샤넬은 자기 삶의 태도와 스타일을 마케팅하며 자신의 경력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20세기 여성들의 취향을 형성했다.2004년 10월,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나치를 열성적으로 지지하고 히틀러를 지지한다고도 밝혔기 때문에 이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나치를 이용해 유대인이었던 자신의 동업자를 사업에서 퇴출시키려고 했을 만큼 전쟁 기간 동안 나치 고위층과 친분을 유지하며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결국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1급 부역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미 프랑스는 수많은 나치 정권의 협력자들을 만 명 단위로 사형시켰던 만큼 당연히 그녀도 부역 혐의로 처형당하기 일보직전의 위기에 처했지만 교차검증되고 확실한 것은 1940년 독일이 프랑스 파리를 점령했을 때 한스 귄터 폰 딩크라게와 사귄 덕분에 고급 호텔 리츠에 안전하게 머물 수 있었고 이는 그녀의 조카(사실상 양자)가 나치 수용소에 갇히자 조카의 석방을 조건으로 아프베어에 협조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 이 친분 및 연애도 프랑스 사교계를 모두 뒤져 제 조카를 살리기 위해 수소문한 것인데 여러 번 강조하지만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애인이었던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가까운 친구인 윈스턴 처칠 총리는 이미 코코 샤넬의 친한 지인이었고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독일인과 사귀었다는 이유로 프랑스 여성들은 말 그대로 공개처형 형태의 삭발 및 폭력에 시달렸지만 그녀는 면책되었다.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공작이 그녀가 임신을 못 한다는 이유로 6년간 교제하다가 이별을 통보했고 웨스트민스터 공작이 23살 연하 여성과 결혼하고 상실감에 빠졌을 때 처칠의 도움을 받아 스위스로 도피한 뒤 10년 가까이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했으며 그 동안 그녀는 숨어 지내며 패션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노동자들의 처우와 인권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가 제2차 세계 대전 후 미국에서 마릴린 먼로 덕에 얻은 갑작스런 인기와 페미니즘 운동의 이미지 덧입히기의 혜택을 크게 봤다고 볼 수 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코르셋 해방이 없었다면, 처음 승마를 할 때 여성 중 최초로 바지를 입지 않았다면, 엉덩이를 부각시키기 위해 양 발을 묶는 디자인의 옷에서 해방시키지 못했다면 지금의 리틀 블랙 드레스는 없다. 리틀 블랙 드레스가 없었다면 아무도 다리를 내놓은 채 간단한 디자인으로 옷을 입지 못했을 것이다. 참고로 여성을 코르셋에서 해방시킨 것이 코코 샤넬로 한국에는 잘못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당시 세계 패션 트렌드의 최정점이자 패션계의 피카소라고 불리던 폴 푸아레였다.
사생활도 좋게 말하면 세기의 연인들에 둘러싸인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매우 복잡하였다. 스스로의 삶을 개척한 신여성처럼 포장되지만 실제 그녀의 삶은 재벌급 상속자, 귀족, 정치장교들을 스폰서로 삼아 그들의 자금과 인맥을 활용해 사업을 키우고 성공시키는 식이었다. 전술한 것처럼 나치 부역 혐의로 위기에 처했을 때도 전 애인의 도움으로 빠져나왔다. 물론 그 전 애인을 밀어내다가 왕세자까지 대동해서 그녀를 설득했고 자신은 돈보다 사랑이라며 그가 주는 값비싼 보석을 보내면 그녀가 그 보석에 똑같은 비용의 돈을 얹어 반송할 정도로 남자를 믿지 않았으며 돈으로 내 마음을 살 수 없다고 거절해 왔다. 유부남과 사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연애가 유부남과의 부적절한 관계였다.[10]
당시 같이 활동했던 대부분의 패션 디자이너들하고 사이도 안 좋았는데 동시대에 활동하던 디자이너들의 물건을 보고 진부하고 한심하다며 공개적으로 어그로를 끌고 다녔고 특히 당시 세계 패션의 정점이던 폴 푸아레와 사이가 안 좋았다.[11] 엘자 스키아파렐리[12][13]하고도 라이벌이 되어 그녀를 싫어했으며 파코 라반[14]을 보고 금속공이나 다를 바 없다고 비하했다. 반대로 이브 생 로랑을 두고 자신의 정신적 후계자라며 칭찬했다. 후에 엘자 스키아파렐리가 은퇴하자 그제서야 인정하는 말[15]을 했다.
미국 타임지에서는 20세기 100대 인물로도 선정될 정도로 크게 인정받았다.
프랑스 출신의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지만 2차대전 기간동안 나치 스파이 활동, 히틀러 측근과의 교제 등으로 인해 프랑스인들은 자랑스러워 하지도 않고 프랑스 땅에 묻히지도 못했다. 여성 근로자들의 패션을 획기적으로 바꿔줬기 때문에 긍정적인 평가를 평가를 받으면서도 실제로 그녀가 고용했던 고장의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그 시대 기준으로도 가혹했던 인권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즉 알려진 이미지와 실제가 너무나도 다른 역설적인 인물이다.
이미 프랑스는 수많은 나치 정권의 협력자들을 만 명 단위로 사형시켰던 만큼 당연히 그녀도 부역 혐의로 처형당하기 일보직전의 위기에 처했지만 교차검증되고 확실한 것은 1940년 독일이 프랑스 파리를 점령했을 때 한스 귄터 폰 딩크라게와 사귄 덕분에 고급 호텔 리츠에 안전하게 머물 수 있었고 이는 그녀의 조카(사실상 양자)가 나치 수용소에 갇히자 조카의 석방을 조건으로 아프베어에 협조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 이 친분 및 연애도 프랑스 사교계를 모두 뒤져 제 조카를 살리기 위해 수소문한 것인데 여러 번 강조하지만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애인이었던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가까운 친구인 윈스턴 처칠 총리는 이미 코코 샤넬의 친한 지인이었고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독일인과 사귀었다는 이유로 프랑스 여성들은 말 그대로 공개처형 형태의 삭발 및 폭력에 시달렸지만 그녀는 면책되었다.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공작이 그녀가 임신을 못 한다는 이유로 6년간 교제하다가 이별을 통보했고 웨스트민스터 공작이 23살 연하 여성과 결혼하고 상실감에 빠졌을 때 처칠의 도움을 받아 스위스로 도피한 뒤 10년 가까이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했으며 그 동안 그녀는 숨어 지내며 패션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노동자들의 처우와 인권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가 제2차 세계 대전 후 미국에서 마릴린 먼로 덕에 얻은 갑작스런 인기와 페미니즘 운동의 이미지 덧입히기의 혜택을 크게 봤다고 볼 수 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코르셋 해방이 없었다면, 처음 승마를 할 때 여성 중 최초로 바지를 입지 않았다면, 엉덩이를 부각시키기 위해 양 발을 묶는 디자인의 옷에서 해방시키지 못했다면 지금의 리틀 블랙 드레스는 없다. 리틀 블랙 드레스가 없었다면 아무도 다리를 내놓은 채 간단한 디자인으로 옷을 입지 못했을 것이다. 참고로 여성을 코르셋에서 해방시킨 것이 코코 샤넬로 한국에는 잘못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당시 세계 패션 트렌드의 최정점이자 패션계의 피카소라고 불리던 폴 푸아레였다.
사생활도 좋게 말하면 세기의 연인들에 둘러싸인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매우 복잡하였다. 스스로의 삶을 개척한 신여성처럼 포장되지만 실제 그녀의 삶은 재벌급 상속자, 귀족, 정치장교들을 스폰서로 삼아 그들의 자금과 인맥을 활용해 사업을 키우고 성공시키는 식이었다. 전술한 것처럼 나치 부역 혐의로 위기에 처했을 때도 전 애인의 도움으로 빠져나왔다. 물론 그 전 애인을 밀어내다가 왕세자까지 대동해서 그녀를 설득했고 자신은 돈보다 사랑이라며 그가 주는 값비싼 보석을 보내면 그녀가 그 보석에 똑같은 비용의 돈을 얹어 반송할 정도로 남자를 믿지 않았으며 돈으로 내 마음을 살 수 없다고 거절해 왔다. 유부남과 사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연애가 유부남과의 부적절한 관계였다.[10]
당시 같이 활동했던 대부분의 패션 디자이너들하고 사이도 안 좋았는데 동시대에 활동하던 디자이너들의 물건을 보고 진부하고 한심하다며 공개적으로 어그로를 끌고 다녔고 특히 당시 세계 패션의 정점이던 폴 푸아레와 사이가 안 좋았다.[11] 엘자 스키아파렐리[12][13]하고도 라이벌이 되어 그녀를 싫어했으며 파코 라반[14]을 보고 금속공이나 다를 바 없다고 비하했다. 반대로 이브 생 로랑을 두고 자신의 정신적 후계자라며 칭찬했다. 후에 엘자 스키아파렐리가 은퇴하자 그제서야 인정하는 말[15]을 했다.
미국 타임지에서는 20세기 100대 인물로도 선정될 정도로 크게 인정받았다.
프랑스 출신의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지만 2차대전 기간동안 나치 스파이 활동, 히틀러 측근과의 교제 등으로 인해 프랑스인들은 자랑스러워 하지도 않고 프랑스 땅에 묻히지도 못했다. 여성 근로자들의 패션을 획기적으로 바꿔줬기 때문에 긍정적인 평가를 평가를 받으면서도 실제로 그녀가 고용했던 고장의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그 시대 기준으로도 가혹했던 인권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즉 알려진 이미지와 실제가 너무나도 다른 역설적인 인물이다.
흙수저 자수성가의 아이콘으로 상업적 재능이나 디자인 쪽의 천재성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동시대 샤넬에 비견되는 다른 패션 천재들도 많았으며 실제로 많은 돈을 벌게 해 준 것은 자신의 사업 수완 때문이었다. 러시아에서 온 연하 남친이 향수 마니아였는데 그의 동료였던 조향사를 소개받아 서유럽 최초로 알데하이드를 향수에 이용하여 인공 향수를 내놓았다. 패션업계의 최초였고, 조향 시스템도 최초였고, 부케 향기도 최초였다. 그녀의 사업 수완은 다른 곳에서도 알 수 있다. 향수 사업을 적극 추진하면서 샤넬은 입소문 마케팅을 이용해 당신에게만 몰래 주는 선물이라며 고위층에게 은밀히 전달해 입소문이 나게 했다. 당연히 돈이 많아도 구매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제발 사게 해달라며 매장을 찾아오거나, 줄을 서는 손님들에게 ‘선심쓰는 척‘ 대량 생산한 향수를 판매해 높은 수익을 올렸다. 판매 수완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향수 공병을 프랑스의 커다란 궁전의 각진 모습을 형상화 하여 프랑스의 미를 강조했다.
병 속에 담긴 금빛 액체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평행육면체의 단순한 유리병 모양도 혁신적이었다. ‘수리르 다브릴(4월의 미소)’, ‘데지르 프랭시에(봄의 욕망)’ 등과 시적인 향수 이름과는 달리 자신의 이름에 자신의 행운의 숫자라고 생각하는 ’5'를 내세운 것도 획기적이었다.# 가히 현대 여성사를 바꿨다고 할 수 있다. 향수는 현재 가치로 500~700만원에 팔리던 드레스와 달리 5만원 안팎에 팔렸기 때문에 더 많은 소비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병 속에 담긴 금빛 액체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평행육면체의 단순한 유리병 모양도 혁신적이었다. ‘수리르 다브릴(4월의 미소)’, ‘데지르 프랭시에(봄의 욕망)’ 등과 시적인 향수 이름과는 달리 자신의 이름에 자신의 행운의 숫자라고 생각하는 ’5'를 내세운 것도 획기적이었다.# 가히 현대 여성사를 바꿨다고 할 수 있다. 향수는 현재 가치로 500~700만원에 팔리던 드레스와 달리 5만원 안팎에 팔렸기 때문에 더 많은 소비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녀는 명품 중 처음으로 져지 원단을 옷에 활용했다. 당시 남성들의 내의에나 사용하던 져지를 명품에 사용한다는 것을 최초에 옷을 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비싼 돈을 주고 신축성이 있는 소재의 옷을 사면 안 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지만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자 전쟁 지원 생산활동에 투입된 여성들이 구김과 상관없이 신체에 맞는 옷을 입고 기존 남성들의 일자리에 투입되어야 했는데 전쟁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패션에 대한 욕구를 버리지 않았고 거추장스러운 옷을 싫어하는 그녀의 취향이 딱 맞아 떨어졌다.#
트위드 소재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전통 의복에 사용되던 양모사 등을 촘촘하게 짠 옷감긴데 보풀이 일어나기 쉽고 뻣뻣한데다 거친 느낌을 줘 옷에 잘 활용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올드하다는 이미지 때문에 명품과는 거리가 있었던 트위드가 '습기에 강하다'는 사실을 안 그녀는 과감히 트위드 의상을 선보였다. 그녀는 스코틀랜드 여행을 즐기다 트위드 소재를 만났고 거칠고 단단하지만 우아하기에 여성복으로도 만들 수 있겠다고 확신했다. 이후 그녀는 공방의 공예가들에게 스코틀랜드 목초지대의 식물과 아름다움을 품은 컬러에서 영감받은 탁월한 색조를 연출해줄 것을 요청했다. 트위드는 더 이상 야외 활동에 한정되지 않고 샤넬 수트로 거듭나 도시적인 매력을 선사하는 요소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칼 라거펠트는 1983년부터 액세서리를 포함한 컬렉션의 모든 요소에 트위드를 자수 및 프린지 디테일로 사용하며 여성 패션에 예상치 못한 신선한 뉘앙스를 만들어냈다.하퍼스 바자 코리아 참고로 칼 라거펠트의 디자인은 3대 샤넬 수석 디자이너가 된 버지니 비아르가 칼 라거펠트에게 트위드를 사랑하게 만들기 위한 헌신적인 노력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2014년에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France 3에서 방영한 TV 다큐멘터리 《의혹의 그림자》(L'Ombre d'un Doute)에서 그녀가 나치의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문서가 발견됐다고 방송됐다. 요원 번호는 F-7124였으며 무려 스파이 암호명까지 발급받은 최고위급 스파이였는데 암호명은 웨스트민스터였다.[16]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그녀는 1940년에 독일과 프랑스가 휴전한 후 나치의 비밀경찰과 가까워지면서 스파이가 되었고 1943년에는 독일이 영국에 휴전을 제안할 때 비공식 사절로 윈스턴 처칠과 만났다.
그녀는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에서 피난하거나 나치에 협조하지 않는 걸 물론 사회활동도 하지 않고 칩거한 당시 여러 유명 인사들과 달리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 장교들의 숙소였던 파리의 호텔 리츠에 장기 체류했는데 그 중에는 히틀러의 심복인 헤르만 괴링과 괴벨스 박사도 있었다. 1941년 여름에 그녀는 독일 방첩국에 의해 첩보원으로 발탁되었으며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나서 나치의 요원으로 쓸만할 인물을 탐색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그녀는 독일 스파이로 잘 알려진 바론 한스 귄터 본 딩클라게(Baron Hans Günther von Dincklage)와 사귀었었다. 한편 그녀의 행적을 고발한 <Sleeping with the Enemy, Coco Chanel and the Secret War>라는 책은 애초부터 그녀가 반유대주의자였다고 주장한다.##
나치 스파이였으나 증거 불충분이라며 풀려났는데 그 이유 중에는 물론 그녀가 막대한 피해를 입혔던 게 아니었던 점도 있을 지도 모르지만[17] 그녀가 처칠을 비롯한 영국 및 여러 유럽 상류층과 인맥이 있었고 그들의 비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그녀의 제품은 당시 미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럽에 들어온 미국 군인들을 위해 NO.5(향수)를 푸는 등의 이미지 마케팅을 했다.
그녀가 나치에 협력한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로는 샤넬의 사업 파트너이자 향수 출시를 지원해준 피에르 베르트하이머가 유대인이며 그가 가지고 있었던 샤넬의 코스메틱 지분을 빼앗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실제로 샤넬의 생각대로 베르트하이머는 나치 점령 기간 동안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하여 사업에서 손을 뗄 수 밖에 없었다.[18] 아이러니하게도 피에르는 샤넬이 한 번 배신했음 불구하고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샤넬의 복귀를 지원했다. 이후 샤넬은 샤넬의 브랜드 자체 및 모든 권리를 베르트하이머에게 팔아 버렸고, 샤넬은 프랑스로 복귀하지 못하고 스위스에서 살았지만, 베르트하이머는 프랑스로 복귀해 샤넬 브랜드를 계속해서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현재까지도 샤넬 브랜드는 피에르 베르트하이머의 손자 두 명이 반반씩 실소유하고 있는데 둘 모두 세계 부자 순위에서 항상 이름을 찾을 수 있다.
그녀는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에서 피난하거나 나치에 협조하지 않는 걸 물론 사회활동도 하지 않고 칩거한 당시 여러 유명 인사들과 달리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 장교들의 숙소였던 파리의 호텔 리츠에 장기 체류했는데 그 중에는 히틀러의 심복인 헤르만 괴링과 괴벨스 박사도 있었다. 1941년 여름에 그녀는 독일 방첩국에 의해 첩보원으로 발탁되었으며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나서 나치의 요원으로 쓸만할 인물을 탐색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그녀는 독일 스파이로 잘 알려진 바론 한스 귄터 본 딩클라게(Baron Hans Günther von Dincklage)와 사귀었었다. 한편 그녀의 행적을 고발한 <Sleeping with the Enemy, Coco Chanel and the Secret War>라는 책은 애초부터 그녀가 반유대주의자였다고 주장한다.##
나치 스파이였으나 증거 불충분이라며 풀려났는데 그 이유 중에는 물론 그녀가 막대한 피해를 입혔던 게 아니었던 점도 있을 지도 모르지만[17] 그녀가 처칠을 비롯한 영국 및 여러 유럽 상류층과 인맥이 있었고 그들의 비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그녀의 제품은 당시 미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럽에 들어온 미국 군인들을 위해 NO.5(향수)를 푸는 등의 이미지 마케팅을 했다.
그녀가 나치에 협력한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로는 샤넬의 사업 파트너이자 향수 출시를 지원해준 피에르 베르트하이머가 유대인이며 그가 가지고 있었던 샤넬의 코스메틱 지분을 빼앗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실제로 샤넬의 생각대로 베르트하이머는 나치 점령 기간 동안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하여 사업에서 손을 뗄 수 밖에 없었다.[18] 아이러니하게도 피에르는 샤넬이 한 번 배신했음 불구하고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샤넬의 복귀를 지원했다. 이후 샤넬은 샤넬의 브랜드 자체 및 모든 권리를 베르트하이머에게 팔아 버렸고, 샤넬은 프랑스로 복귀하지 못하고 스위스에서 살았지만, 베르트하이머는 프랑스로 복귀해 샤넬 브랜드를 계속해서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현재까지도 샤넬 브랜드는 피에르 베르트하이머의 손자 두 명이 반반씩 실소유하고 있는데 둘 모두 세계 부자 순위에서 항상 이름을 찾을 수 있다.
My friends, there are no friends.내 친구들이여, 세상에 친구란 없다네.
오랜 사업의 길에서 치열한 경쟁을 누구보다도 많이 치러왔기에 그녀에게 모든 이는 경쟁자로 이 세상에 '친구'란 없음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명언이다.
[1] 상당히 의미가 깊은 모토다. 코코 샤넬이 최초로 여성용 바지를 만들었을 때 여성복에 대한 유럽의 전통은 후술하겠지만 비실용적인 모습에 미를 추구한 복장이었다. 이에 실용성을 담은 여성용 바지를 고안하여 만든 샤넬은 새로운 아름다움의 바탕을 만듬과 동시에 유럽의 비실용적인 전통적 미의 기준에서 벗어나자는 의미와 여성의 아름다움을 비실용적인 전통적 미의 기준에 끼워넣어 폄하하지 말자는 의미를 세상에 던진 셈이다.[2] 흔히 알려진 '코코'라는 이름은 샤넬이 가난하던 시절 변두리 술집에서 노래 부르고 하던 시절에 자주 부르던 <Ko Ko Ri Ko>와 <Qui qu'a vu Coco dans le Trocadero>라는 노래의 가사에서 따 온 예명이다. 본인은 성공한 후에 다른 사람이 자신을 본명 대신 코코 샤넬이라고 부르는 걸 죽을 때까지 아주 싫어했지만 미국에 그렇게 알려져서 결국 이름처럼 정착해 버렸다.[3] 여자아이에게는 무릎 길이의 치마를, 성인 여성이 되면 발등까지 덮는 긴 치마를 입는 것. 이것은 동서남북을 막론한 유럽의 오랜 전통이다.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반에 촬영된 유럽 각국 왕실이나 귀족들이 남긴 전신 사진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역으로 남자는 어린 남자아이 혹은 어린 소년에게만 반바지를 입혔고 그가 노동력과 분별력을 갖춘 성인 남성으로 성장해야 긴 바지를 입는다. 요즘은 많이 없어졌지만 유럽 남성들이 편하다는 이유로 툭하면 반바지를 입는 미국 성인 남성들을 비웃던 시선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담이지만 어린 남자아이에게 반바지를 입히는 전통은 이후 한창 근대화를 추진하던 일본으로 건너가 한겨울에도 반바지를 입는 관습이 생겼다.[4] 사실 이건 샤넬의 독자적인 생각이 아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노동력 부족으로 여성들의 사회 참여와 노동력 제공이 늘어났는데 이렇게 움직임이 많고 기계류가 많은 공장에서 편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자연히 치마는 짧아지고 소매는 폭이 줄거나 짧아졌으며 여기에 헤어스타일도 단발로 바뀌고 모자도 챙이 작아졌다. 당연히 장시간 움직이는 데 불편한 코르셋은 퇴출되었다. 우리가 아는 샤넬 스타일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따지고 보면 근본은 공순이(...) 패션이다. 물론 공장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귀족층 여성들의 스타일은 전혀 그런 트렌드를 따르지 않았다.[5] 실제 그녀가 디자인에 영감을 얻은 것들은 대부분 서민층의 아이템이었는데 그렇게 모티브를 얻어 탄생한 제품들이 오늘날 명품의 최정점에 있다는 게 엄청난 아이러니다.[6] 1920년대 초 가브리엘 샤넬은 자신의 이름을 건 향수를 런칭하려고 했고 당시 유명 조향사였던 Ernest Beaux에게 의뢰하여 몇 가지 샘플을 건네받았는데 그 중 그녀가 선택한 향이 바로 5번이다. 그래서 제품명이 간단하게 5번이 됐다는 이야기.[7] 이때 샤넬은 카펠을 잃은 충격이 컸는지 집의 인테리어를 모두 검은색으로 바꿔 버리고 옷과 악세서리도 검은색 위주로 디자인하기 시작했는데 카펠의 죽음은 샤넬 브랜드 이미지를 검은색으로 만들게 한 결정적인 원인이었던 셈이다.[8] 대한민국에는 1940년 작 '일 드 프랑스'가 중학교 3학년 미술 교과서에 실려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젊은 시절엔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연인이기도 했던 인물로 아폴리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의 주인공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여담으로 로랑생은 샤넬과 동갑이다.[9] 다른 형제도 1920년대 초반에 한 차례 샤넬에게 연락해 깡봉가 31번지에 찾아왔으나 거액의 돈을 요구한 것에 실망해 샤넬이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당시 매장에 다른 사람들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 형제가 있다는 소문이 금세 퍼졌다고 한다.[10] 샤넬이 임신을 하지 못한다는 것도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을 것이다.[11] 폴 푸아레는 우아하고 여성적이지만 덜 실용적인, 파티에 입고 갈 옷을 만들었다. 샤넬과 정반대의 디자인을 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자타공인 세계 패션의 왕이었고 여성복에서 최초로 코르셋을 뺀 장본인이기도 하다. 다들 그것을 샤넬의 공으로 알고 있지만 최초는 그다. 코코 샤넬이 코르셋을 없앴다고 알려진 건 미국에서 잘못 알려진 이미지로 일부러 마케팅적으로 거짓으로 그렇게 이미지를 구축한 면이 있다. 이런 이미지는 미국의 전후 페미니즘 유행과 더불어 사업적으로 상승 효과를 냈다.[12] 초현실적이고 예술적인 옷의 대가. 역시 샤넬의 철학과는 맞지 않았다.[13] 엘자의 손녀 가운데 모델 겸 사진작가로 활동한 베리 베린슨은 영화 싸이코로 유명한 명배우 안소니 퍼킨스와 결혼했는데 안타깝게도 9.11 테러 당시 아메리카 항공 11편에 탑승했다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14] 재질을 초월해 옷을 만드는 전설급 디자이너.[15]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예술로 생각했고, 그녀만한 창의성을 가진 이가 없었다."[16] 당시 만나던 연인이 2대 웨스트민스터 공작인 휴 그로스베너였는데 영국의 국회의원이었으며 유명한 불륜 관계였다.[17] 후술할 것처럼 동업자인 피에르 베르트하이머부터 일단은 도망갔다 돌아와서 다시 회사를 되찾았다. 다만 이는 나치 패망 후의 이야기라 전범 재판의 선후관계를 알아봐야 하며 이것이 참작됐는지는 알아봐야 할 일이다.[18] 그러던 와중 피에르 대신 회사를 대신 맡고 있었던 프랑스 기업가 펠릭스 아미오(Félix Amiot)는 나치 부역 혐의를 받았으나 피에르의 증언 덕분에 당연히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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