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룡정변 5대 공신 박릉문헌왕(博陵文獻王) 崔玄暐 | 최현위 | |
작호 | 박릉군왕(博陵郡王) |
시호 | 문헌(文獻) |
성 | 최(崔) |
이름 | 엽(曄) |
자 | 현위(玄暐) |
부친 | 최신(崔愼)[1] |
조부 | 최종(崔綜) |
출생 | 638년 ~ 706년 |
출신 | 정주(定州) 안평현(安平縣) |
당나라의 재상으로 본명은 최엽(崔曄)이며 자는 현위(玄暐). 신룡정변의 5대 공신 중 한 명이다.
최현위는 호소현령(胡蘇縣令)을 지냈던 최신(崔愼)의 아들로 638년에 태어났다. 본명은 최엽(崔曄)이었지만, 측천무후 시기에 측천무후의 할아버지인 무화(武華)의 휘가 이름에 포함되어 있어서 자를 사용하였다. 최현위는 어릴 적부터 학행으로 유명하였고, 특히 숙부인 최행공(崔行功)으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았다.
최현위는 명경과에 급제하여 부고원외랑(庫部員外郞)으로 관직을 시작하였고, 천관낭중(天宮郎中)과 봉각사인(鳳閣舍人)을 역임하였다. 701년에는 천관시랑(天官侍郞)으로 진위되었는데 사석에서 들어오는 청탁을 모두 거절하여 집권자로부터 시기를 받아 문창좌승(文昌左丞)으로 전임되었다. 하지만 측천무후는 오히려 최현위의 강직한 태도를 마음에 들어하여, 그를 다시 천관시랑으로 삼았다. 703년에는 난대시랑(鸞台侍郞), 동봉각난대평장사(同鳳閣鸞台平章事)으로 임명되고 태자좌서자(太子左庶子)를 겸임하였으며, 다음 해인 704년에는 봉각시랑(鳳閣侍郞)이 되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가 더해졌다. 최현위는 내준신과 주흥 등이 충량한 이들을 무고하고 그들의 재산을 취하려는 모습을 목격하고 무고를 당한 이들의 신원을 측천무후에게 촉구하였다.
최현위는 명경과에 급제하여 부고원외랑(庫部員外郞)으로 관직을 시작하였고, 천관낭중(天宮郎中)과 봉각사인(鳳閣舍人)을 역임하였다. 701년에는 천관시랑(天官侍郞)으로 진위되었는데 사석에서 들어오는 청탁을 모두 거절하여 집권자로부터 시기를 받아 문창좌승(文昌左丞)으로 전임되었다. 하지만 측천무후는 오히려 최현위의 강직한 태도를 마음에 들어하여, 그를 다시 천관시랑으로 삼았다. 703년에는 난대시랑(鸞台侍郞), 동봉각난대평장사(同鳳閣鸞台平章事)으로 임명되고 태자좌서자(太子左庶子)를 겸임하였으며, 다음 해인 704년에는 봉각시랑(鳳閣侍郞)이 되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가 더해졌다. 최현위는 내준신과 주흥 등이 충량한 이들을 무고하고 그들의 재산을 취하려는 모습을 목격하고 무고를 당한 이들의 신원을 측천무후에게 촉구하였다.
송경은 측천무후의 측근인 장역지, 장창종 형제가 법도에 어긋나는 역모를 꾸미려 한다고 탄핵하였는데 최현위는 이때 송경을 도와준다. 측천무후가 병으로 눕게 되자, 최현위는 측천무후의 소생인 황태자 이현과 상왕 이단이 탕약을 맡기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건의하였다. 물론 이는 최현위가 장역지, 장창종 형제를 견제하기 위해서 한 말이었지만, 측천무후는 최현위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705년, 최현위는 장간지, 환언범, 경휘, 원서기와 함께 우림군을 이끌고 궁중 쿠데타를 일으켜 장역지, 장창종 형제를 처형하고 황태자 이현을 옹립하여 제위에 올렸다. 최현위는 중종을 복위한 공적으로 중서령으로 발탁되고 박릉군공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705년, 최현위는 장간지, 환언범, 경휘, 원서기와 함께 우림군을 이끌고 궁중 쿠데타를 일으켜 장역지, 장창종 형제를 처형하고 황태자 이현을 옹립하여 제위에 올렸다. 최현위는 중종을 복위한 공적으로 중서령으로 발탁되고 박릉군공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최현위는 작위가 박릉군왕으로 올라갔지만 지정사에서 파면되었다. 무삼사가 신룡정변 공신들의 집권을 우려하여 중종에게 이들을 참소한 것인데, 무삼사는 겉으로는 신룡정변 공신들에 대해서 존중하였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권력을 빼앗아버렸다. 얼마 안 있어 최현위는 검교 익주 장사가 되고 도독의 직무를 대행하였다.
706년, 무삼사는 최현위 등 5명에 대해 참소하여 최현위를 균주(均州) 자사로 좌천시켰다. 뒤에 왕동교(王同皎)의 역모 미수 사건이 벌어지자 무삼사는 이를 이용하여 최현위 등 5명이 왕동교와 짜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고 모함하였다. 그로 인해 최현위는 백주(白州) 사마로 좌천되었고 나중에는 고주(古州)로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결국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화병으로 분사하였다.
706년, 무삼사는 최현위 등 5명에 대해 참소하여 최현위를 균주(均州) 자사로 좌천시켰다. 뒤에 왕동교(王同皎)의 역모 미수 사건이 벌어지자 무삼사는 이를 이용하여 최현위 등 5명이 왕동교와 짜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고 모함하였다. 그로 인해 최현위는 백주(白州) 사마로 좌천되었고 나중에는 고주(古州)로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결국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화병으로 분사하였다.
- 최현위가 쿠데타를 일으킨 뒤, 측천무후와 최현위가 대면하였고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측천무후: 여러 신하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추천을 받았지만 그대는 내가 직접 발탁하였거늘, 어찌하여 이런 짓을 벌인 것이오?
최현위: 바로 폐하께 보답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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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는 행근(行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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