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출생 | |||||||||||
사망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946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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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7월 3일 경상북도 대구군 동상면 남성리(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에서 태어났다. 이후 대구부 명치정2정목(現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88번지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다.
1909년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안희제, 이수영(李遂榮), 배천택(裵天澤), 남형우, 김동삼, 김사용(金思容), 윤세복(尹世復), 김홍량 등과 함께 비밀리에 항일투쟁을 벌였다. 1916년 중화민국 베이징시로 망명하여 독립단 소속 배천택 등과 함께 만났고, 이어 윈난성 육군강무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가을에 졸업하였다. 이후 윈난성 신군(新軍) 장교로 임관하여 윈난성 다리현(大理縣)[6]에 주둔한 제2사단 본부에서 복무하여 중위에까지 올랐다.[7]
1919년 3.1 운동 직후, 그해 5월 독립운동에 가담하고자 군대에서 퇴역하였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 같은 해 9월 임시정부로부터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8]에 파견되어 군무국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김응섭(金應燮) 등과 함께 독립운동 방안에 대해 논의하다가 그해 10월경 군자금 모금을 위해 경기도 경성부로 입국하였다. 이때 이수영·이동하(李東廈)·박중화·이경희·이원혁(李源赫) 등과 여러 차례 만나 조선 내 각지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모의를 하던 중 체포되어, 약 1개월간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그해 12월경에 풀려났다.
그후 위 동지들과 조선 내지 및 국외의 연락을 취하기로 약속한 뒤 고향 경상북도 대구부를 들렀다가 다시 중화민국으로 돌아가 신흥무관학교 교관에 취임하였다. 1920년 청산리 대첩 때 김좌진 장군 휘하 지대장으로서 전공을 세웠고, 만주지역에서 최진(崔震)이라는 이름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대한독립군 의용단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1921년 5월에는 동료 배천택의 권유로 다시 베이징시로 갔고, 6월에 베이징시에서 개최된 해외 소재 조선인 독립운동단체의 대표자 회의격인 군사통일책진회(軍事統一策進會)에 참석하였다.#
1909년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안희제, 이수영(李遂榮), 배천택(裵天澤), 남형우, 김동삼, 김사용(金思容), 윤세복(尹世復), 김홍량 등과 함께 비밀리에 항일투쟁을 벌였다. 1916년 중화민국 베이징시로 망명하여 독립단 소속 배천택 등과 함께 만났고, 이어 윈난성 육군강무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가을에 졸업하였다. 이후 윈난성 신군(新軍) 장교로 임관하여 윈난성 다리현(大理縣)[6]에 주둔한 제2사단 본부에서 복무하여 중위에까지 올랐다.[7]
1919년 3.1 운동 직후, 그해 5월 독립운동에 가담하고자 군대에서 퇴역하였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 같은 해 9월 임시정부로부터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8]에 파견되어 군무국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김응섭(金應燮) 등과 함께 독립운동 방안에 대해 논의하다가 그해 10월경 군자금 모금을 위해 경기도 경성부로 입국하였다. 이때 이수영·이동하(李東廈)·박중화·이경희·이원혁(李源赫) 등과 여러 차례 만나 조선 내 각지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모의를 하던 중 체포되어, 약 1개월간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그해 12월경에 풀려났다.
그후 위 동지들과 조선 내지 및 국외의 연락을 취하기로 약속한 뒤 고향 경상북도 대구부를 들렀다가 다시 중화민국으로 돌아가 신흥무관학교 교관에 취임하였다. 1920년 청산리 대첩 때 김좌진 장군 휘하 지대장으로서 전공을 세웠고, 만주지역에서 최진(崔震)이라는 이름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대한독립군 의용단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1921년 5월에는 동료 배천택의 권유로 다시 베이징시로 갔고, 6월에 베이징시에서 개최된 해외 소재 조선인 독립운동단체의 대표자 회의격인 군사통일책진회(軍事統一策進會)에 참석하였다.#
1924년 5월 18일 조선일보 기사에 삽입된 사진. |
1921년 9월 귀국하여 대구부에 곡물상을 열어 겉으로는 상업에 종사하였다. 한편, 1922년 9월부터 경성부 인사동 장안여관에서 이곳에 기거하던 이수영 및 여러 동지들과 회합하여 군자금 모금에 대한 모의를 계속하던 중 군위군 부계면 대율동의 홍정수(洪禎修, 1878 ~ 1964. 1. 17)[9]를 목표로 삼게 되었다. 이에 1923년 12월 3일 홍정수의 자택으로 가던 중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 송림사 근처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고, 그해 12월 관련자인 송두환(宋斗煥)·이수영·노기용·정동석·정두규(鄭斗奎)·정두은(鄭斗殷)·정내영(鄭騋永)·김봉규(金鳳奎) 등과 함께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며, 이듬해인 1924년 11월 6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폭발물취체벌칙 및 총포화약류 취체령 시행규칙 위반·강도 예비 등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미결구류 90일 산입)을 선고받아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1926년 9월 29일 가출옥하였다.
1928년 12월 16일, 모 경찰서 형사과에서 촬영된 사진. |
8.15 광복 후에는 우익 정치인으로 정계에 진출하여 한국민주당에 입당, 중앙본부 연락부장 및 중앙상무위원 등에 취임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대구부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제헌국회에서 국방·외무위원장을 맡았다. 여수·순천 10.19 사건이 일어나자 외무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외무국방위원회실에서 내무차관 황희찬과 국방부참모장 채병덕을 초청하여 여순사건 관련 회의를 주도하였으며,[10] 10월 29일에는 직접 사건 현장에가서 국회에 보고를 하였다. 그는 현지조사에서 반란군이 재작년부터 군에 잠복되어 있던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말했고, 반란군에게 대략 2000여명이 희생당했다고 말했다.[11] 11월 외무국방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외무국방위원회에서 회부된 국군조직법을 국회에서 설명, 질의응답하여 국군조직법 제정에 큰 힘을 쏟았다. 한편 그는 국군조직법을 설명하면서 11월 20일 대한민국의 방비 태세가 정비될 때까지 미 주둔군의 남한 주둔이 필요를 인정하는 '미군주둔에 관한 결의안'을 발의하였다. 1949년 7월에는 병역법을 국회에서 설명 질의응답 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경상북도 대구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조경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6.25 전쟁이 터지고 북한군이 대구 코앞까지 밀어닥치자, 발벗고 나서서 독자적으로 학도병 모병 활동을 벌였다. 이렇게 모인 학도병들은 제1 유격대대에 편입되어 장사 상륙작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전후 1957년에는 김준연의 통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이후에는 육해공군 출신 청년 의용단 단장 등을 역임했으며, 1965년 5월 11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도선동 자택에서 병사하였다.#
199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그의 유해는 2001년 10월 19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대구부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제헌국회에서 국방·외무위원장을 맡았다. 여수·순천 10.19 사건이 일어나자 외무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외무국방위원회실에서 내무차관 황희찬과 국방부참모장 채병덕을 초청하여 여순사건 관련 회의를 주도하였으며,[10] 10월 29일에는 직접 사건 현장에가서 국회에 보고를 하였다. 그는 현지조사에서 반란군이 재작년부터 군에 잠복되어 있던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말했고, 반란군에게 대략 2000여명이 희생당했다고 말했다.[11] 11월 외무국방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외무국방위원회에서 회부된 국군조직법을 국회에서 설명, 질의응답하여 국군조직법 제정에 큰 힘을 쏟았다. 한편 그는 국군조직법을 설명하면서 11월 20일 대한민국의 방비 태세가 정비될 때까지 미 주둔군의 남한 주둔이 필요를 인정하는 '미군주둔에 관한 결의안'을 발의하였다. 1949년 7월에는 병역법을 국회에서 설명 질의응답 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경상북도 대구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조경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6.25 전쟁이 터지고 북한군이 대구 코앞까지 밀어닥치자, 발벗고 나서서 독자적으로 학도병 모병 활동을 벌였다. 이렇게 모인 학도병들은 제1 유격대대에 편입되어 장사 상륙작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전후 1957년에는 김준연의 통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이후에는 육해공군 출신 청년 의용단 단장 등을 역임했으며, 1965년 5월 11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도선동 자택에서 병사하였다.#
199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그의 유해는 2001년 10월 19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연도 | 선거종류 | 선거구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48 | 경북 대구 갑[12] | 8,577표 (38.52%) | 당선 (1위) | 초선 | ||
1950 | 2,052표 (5.9%) | 낙선 (5위) |
[1] 이명은 최진(崔震).[2] 1924년 11월 6일 형사사건부에는 崔胤東으로 표기되어 있다.[3] #[4] #[5] 아들인 최세창은 독립운동과 한국전쟁에서 공을 세운 아버지외는 정반대로 휘하 병력을 불법적으로 동원하여 직속상관을 강제 연행하고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기총소사를 지시하는 등 군사반란과 시민학살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6] 현 중화인민공화국 윈난성 다리 바이족 자치주 다리시[7] #[8] 길림군정서(吉林軍政署)라고도 한다.#[9] 부림홍씨세보 권상 994쪽 참조.[10] 당시 국회는 휴회였어서 어쩔수 없이 외무국방위원회실에서 모인것이라고 한다.[11] 출처:제1대 국회 제1회 제94차 국회본회의[12] 제1선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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