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무공훈장 수훈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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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군인이다.
경기도 평택군출신으로 고려대학교 진학중 6.25 전쟁이 터졌고 1951년 갑종간부 4기로 입대해 소위로 임관하자마자 제6보병사단 19연대 7중대 소대장으로 배치되어 전투류 치렀다. 한 번은 전투중 소대가 중공군 1개 중대에 의해 포위되었다. 병력은 이미 1/3이 손실되고 남은 인원마저 10여명은 경상자였고, 본인도 좌측 다리에 파편상을 입었으므로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적에게 포로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전투를 벌인 끝에 적 30여명을 사살하면서 포위망을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전후 대위로 진급해 연대 교육장교, 중대장, 보병학교 전술학, 지휘참모학처 교관, 1군사령부 작전처 기획 장교 등을 역임했고 1963년 소령으로 진급했다. 한편 조선대에 입학해 1965년 졸업했다.
1966년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자 비전투 부대 소속 태권도 교관[2]으로 베트남으로 떠나 메콩강 삼각주 칸토에 주둔하고 있던 남베트남군 제4군단 지구대장겸의 태권도 수련을 담당했다. 2만명이 넘는 인원이 그의 손을 거쳐갔고 유단자도 배출했다. 또한 베트남에 파견와있던 40명의 민간 기술자도 보호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1968년 1월 31부터 시작된 구정 공세에서 사이공을 포함한 남베트남의 대부분의 도시에서 교전이 펼쳐졌고 민간 기술자를 보호하기 위해 부사범 윤청길 중사와 함께 20명을 구출하고 부대로 피신시켰다. 하지만 남은 20명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베트콩의 기습으로 교전 중 윤청길이 전사했고 본인도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고 권총으로 2명을 사살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전사했다.
사후 중령으로 추서되었으며 화랑무공훈장,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전후 대위로 진급해 연대 교육장교, 중대장, 보병학교 전술학, 지휘참모학처 교관, 1군사령부 작전처 기획 장교 등을 역임했고 1963년 소령으로 진급했다. 한편 조선대에 입학해 1965년 졸업했다.
1966년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자 비전투 부대 소속 태권도 교관[2]으로 베트남으로 떠나 메콩강 삼각주 칸토에 주둔하고 있던 남베트남군 제4군단 지구대장겸의 태권도 수련을 담당했다. 2만명이 넘는 인원이 그의 손을 거쳐갔고 유단자도 배출했다. 또한 베트남에 파견와있던 40명의 민간 기술자도 보호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1968년 1월 31부터 시작된 구정 공세에서 사이공을 포함한 남베트남의 대부분의 도시에서 교전이 펼쳐졌고 민간 기술자를 보호하기 위해 부사범 윤청길 중사와 함께 20명을 구출하고 부대로 피신시켰다. 하지만 남은 20명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베트콩의 기습으로 교전 중 윤청길이 전사했고 본인도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고 권총으로 2명을 사살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전사했다.
사후 중령으로 추서되었으며 화랑무공훈장,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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