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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 崔南善 | Choe Nam-seon | |
노년 시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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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육당(六堂)·한샘·남악주인(南嶽主人) 곡교인(曲橋人)·육당학인(六堂學人)·축한생(逐閑生) 대몽(大夢)·백운향도(白雲香徒) |
직업 | 시인, 번역가, 역사가 |
캐리커처. 그는 평생 이런 복장으로 돌아다녔다. |
최남선은 시와 역사서 외에도 신문 관련 활동을 하였고 잡지를 발간하였으며 밝 사상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908년에 발간한 잡지 <소년>은 최초로 소년을 타겟팅하여 만들어진 계몽 잡지이다. 근대 한국어 문제의 확립과 톨스토이 번역을 통한 민족 의식의 고취라는 업적을 남겼는데 이 과정에서 이광수가 번역가에서 소설가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918년까지 5개의 잡지 창간을 주도했으나 모두 일제에 의해 폐간당했고, 1919년 3.1 운동때는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1921년 10월 출소하였다. 1924년에는 시대일보를 창간하였으나 일제에 의한 비판적인 논조 때문에 폐간되었고 이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객원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최남선이 학도병 권유를 한 친일 선전문.[5] |
1928년 일본의 어용 역사 단체인 조선사편수위원회에 참가하였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직을 지내면서 <만몽일보>[6] 편집위원과 경성제국대학에 취업이 안 되자 만주 건국대학[7]에서 교수를 역임하였다. 귀국 후에는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의 학병 권고를 위해서 친히 일본까지 찾아가는 열성을 보였다. 일선동조론에도 참여하여서 아래 소개되는 '일선융화론'까지 가면 답이 없게 된다. 때문에 1925년에 나왔던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 역시 결국 같은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 결론만 다르게 나왔다는 점에서 '불함문화론' 시기까지 최남선의 친일을 소급하기도 한다. 최남선의 이러한 활동과 결과물은 광복 이후 극우 민족주의 사학과 교묘하게 융합해 발전하면서 유사역사학-환빠가 등장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8]
당연히 광복 후에는 완전히 버로우해 우이동에서 칩거하면서 역사 연구만 하고 지내다가 결국 반민특위의 소환장을 받고 투옥되는데 그 과정에서 문제의 자열서(自列書)를 작성했다. 자열서에 대해서는 스스로의 죄를 인정했다는 긍정적 측면을 찾으려는 이도 있지만 '해방이 되자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지나치게 무고하므로 이에 대해 나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썼다'는 글이 반성문이 될 수가 없다. 실제로 최남선은 위에도 언급된 5가지 죄목[10]을 들고 있지만 그 모두에 대해서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학문 연구를 위해서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학문을 연구했다는 것이 주요 논지이다. 실제로 문화계 인사들이 친일 활동에 대해서 가장 많이 주장하는 변명거리인데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아서 해석하자.[11] 최남선에 대한 변명으로는 "일본과 하나가 된다면 우리도 일본인처럼 부강해져서 잘 살게 되겠지"라는 명목으로 친일을 했다는 것이 있다.[12] 또 하나는 "일본 놈들끼리 멋대로 역사를 왜곡하게 놔둘 바에는 그 위원회에 참가하여 정확한 사료라도 확인해 두는 것이 장기적으로 나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조선사편수위원회에 참여하였다는 것이 있다.
다만 스스로 작성한 자열서를 넘어설 만한 근거는 없다고 봐도 된다. 최남선의 장손 최학주가 쓴 <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과 같이 근본적으로 친일을 부정하는 책[13]들도 있기는 하지만 최남선의 친일 자체를 부정하는 평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불교 신자이면서도 김홍섭(1915~1965) 판사에게 가톨릭 개종을 권유한 바 있었다. 1955년 인생 말엽에 윤형중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불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했는데 세례명은 베드로였다.
육당 최남선이 사망한 해 독립운동가 장준하는 그가 발행하던 《사상계》 1957년 12월호를 "육당 기념호"로 발간하며 그 권두언을 이렇게 썼다. "육당 선생은 이 민족이 가장 암담한 절망의 골짜기에 처해 있을 때에도 항상 우리와 더불어 있었고, 우리의 가장 친근한 벗이요, 경애하는 스승이었다. 그로 인하여 민족의 생명은 싹을 부지하고, 겨레는 위안을 받고 희망을 갖추어 광복에 이른 것은 만인이 다 아는 사실이다. 한 때 선생의 지조에 대한 세간의 오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의 본의가 어디까지나 이 민족의 운명과 이 나라 문화의 소장에 있었음은 오늘날 이미 사실로서 밝혀진 바요, 항간에 떠도는 요동부녀(妖童浮女)들의 억설과는 전면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14] 사람을 사(赦)하는 법이 없고 인재를 자기 눈동자 같이 아낄 줄 모르고 사물을 널리 생각하지 못하는 옳지 못한 풍조 때문에 우리는 해방된 후에도 선생에게 영광을 돌린 일이 없고 그 노고를 치하한 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욕된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실로 온 민족의 이름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이 말인 즉슨 최남선의 친일 행적은 민족 문화 보호를 위한 것이니까 비판하면 안 된다라는 것인데 장준하의 말과는 달리 최남선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장준하가 죽고 한참이 지나서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이다.[15] 그래서 이 글은 최남선을 통해서 장준하가 비판 받는 계기가 되는데 독립기념관 관장을 역임했고 <장준하 평전>을 지은 김삼웅은 이걸 장준하 유일의 오점이라고 평가했을 정도였다. 역시 친일 문학가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김동인을 기리는 '동인문학상'을 <사상계>에서 만든 것과 함께 장준하가 비판 받는 대목이다.[16]
장준하 사후 장준하를 평가하는 좌담회에서 김준엽과 양호민 [17]은 이러한 장준하의 흑역사를 회고하기도 했는데 자신들이 지켜본 바에 의하면 장준하는 최남선과 이광수가 비록 친일을 했다는 오점은 있지만 한국 근대 문학 발전에 공을 세웠다는 점에서 경외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 때문에 이런 권두언을 실고 <육당.춘원의 밤>이라는 문학 행사까지 열었다는 것이다. 다만 <사상계>가 한참 출판되고 있을 당시인 1950년대에도 이광수와 최남선은 친일 행적으로 평가가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처음에 <사상계>에서 이광수와 최남선을 추모하는 <육당.춘원의 밤> 행사를 개최한다고 했을 때 집필진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괜히 친일파로 몰릴까봐 다들 도망가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독립운동가 경력을 가지고 있던 장준하가 직접 총대를 매서 개최했다고 하는데 김준엽은 이 당시 일을 회고하면서 "자신과 장준하가 그나마 독립운동에 가담했으니 망정이지 독립운동 경력도 없이 이런 행사를 개최했으면 친일파로 몰렸을거 같다"고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 오직 친일 역사학만 판 것은 아니고 일단은 역사학자라 오랫동안 정체가 잊혀져 있던 신라 진흥왕의 마운령 순수비를 고증해내기도 했다. 또한 "19세기 조선 최고의 백과사전"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덕무의 손자 이규경(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게 했다. 사연은 다음과 같은데 1920년대 중반 어느 겨울밤 국문연구소 위원으로 국어 운동에 기여했던 권보상[18]은 군밤을 사먹는데 군밤장수가 싸주는 종이가 이상해서 보니 고서였다고 한다. 이를 뭉치째로 사 조선광문회로 가져가서 검토를 한 결과 책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로 판명났는데 조선광문회가 해산되면서 <장전산고>는 최남선의 장서가 되었다. 한국 전쟁 때에도 보따리에 싸들고 피난왔지만 최남선이 소장한 원본은 영인하지 못한채 6.25 전쟁으로 불타버리고 대신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던 필사본만 남아 전해지게 되었으며 1~4권은 낙질되어 나머지 56권만 남았다.
- 어린이 잡지인 <붉은 저고리>를 창간하였는데 이 잡지는 독특한 것이 4컷 만화를 연재하면서 '만화'를 '다음엇지'라는 순 우리말로 소개했다는 점이다. 즉, 다음엇지란 말은 "다음에 어찌될까"라는 뜻인데 "이것은 차례차례 보아가는 웃음거리 그림이니 첫째 그림을 자세히 보아 그 뜻을 짐작하고 다음을 보시면 설명이 없어도 재미있게 알아보시라" 라고 편집자가 창간호에 밝히고 있었다고 한다.# <붉은 저고리> 외에도 다수의 잡지와 신문 창간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재홍과 함께 <시대일보>를 창간하기도 했는데 안재홍은 후에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기지만[19] 친일파 논쟁과는 별개로 역시 친일파인 윤치호에게 찾아가서 <시대일보>를 설립하도록 돈 내놓으라고 성화인데 돈도 없고 어차피 상황상 망할거[20]라고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윤치호 일기>에 나온다.
- 책에 대한 욕심이 상당하였다는 증언도 있는데 최태영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황해도 지역 절에 보관된 고서들을 많이 가져갔다고 하며 그 외에 다른 사람에게 책을 빌린 후에는 절대로 반환하지 않았다고 한다. 국내에 있던 책들을 많이 수집했다고 하는데 6.25 전쟁 직전까지 모은 책이 무려 17만 권이지만 안타깝게도 6.25 전쟁을 거치면서 전부 불타버렸다고 한다. 부산에서 책을 쓰던 중에 자료 참고차 다시 서울로 갔는데 전부 불타버린 것을 보고 절규했다고 한다. 만약 불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면 한국 역사를 몇 번은 다시 써야 했을 것이다. 6.25 전쟁이 끝난 이후로도 계속 책을 모아서 2만여 권 정도를 모았는데 고려대학교에 기증했다고 한다.
-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 5-1번지에 고택 '소원(素園)'이 있었는데, 1939년 인쇄소 '신문관' 자리에 세워져 최남선이 1941년부터 11년간 거주했다. 한동안 최남선 유가족 소유였으나 2002년 차남 최한웅 교수가 사망한 후 부지가 두온종합건설에 매각됐고 2003년 1월 25일 철거되어 그 자리에 저층 아파트형 빌라가 들어섰다. 서울특별시 문화재위원회 측이 밝힌 철거 사유로는 "1939년 이래 고택은 세월이 흘러 원형을 잃었고 일제 말 최남선이 해당 고택에 살면서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논설 등을 썼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최남선 후손들과 광복회 등이 보존할 필요가 없다고 진정서를 냈던 것도 이에 한몫했으며 고택에 남아 있던 최남선의 서신 등 잔존 유품들은 현대사 연구가, 고서적 수집상, 관련 동호회 회원 등이 전부 가져갔다.[21]
- 백팔번뇌(시조집)
- 단군론
- 쉽고 빠른 조선역사
- 조선역사
- 조선 독립운동사
- 조선상식문답
- 불함문화론
- 만몽문화
[1] 崔獻圭. 1859년(철종 10) 7월 25일생으로 자는 민경(民卿). 1879년(고종 16) 식년시 음양과 지리학 전공에 3등 5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관상감에서 근무하면서 한약방을 경영하며 부를 축적했다.[2] 연주 현씨다.[3] 일본 민간단체가 구한말 한성에 지어 운영한 중등교육기관이다.[4] 3대 천재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홍명회, 이광수, 최남선은 같은 시기에 동경 유학을 하였고 양건식과 신형철 등이 이들을 '동경삼재'라고 불렀다.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는 유학생 중에서 유능한 인재들이라는 이야기였다. 이들이 귀국하면서 잡지 <소년>에 함께 글을 기고하였고 '동경삼재'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하 '조선삼재'로 변했다. 이들은 모두 문인으로 문학계에서 칭찬삼아서 붙여준 별명이었던 것 같다. 다만 명칭이 이런 식이고 모두 뒤끝이 좋지 못해서(최남선과 이광수는 친일, 홍명희는 월북)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5]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보람있게 죽자' 등 직접적이고 전형적인 친일문구를 사용하였다.[6] 만주에서 발간되던 친일 신문. 최남선과 함께 <만몽일보>에 참여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 소설 '삼대'로 유명한 염상섭이다.[7] 일본 관동군이 건설한 학교로 문무의 소양을 겸비한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국립 대학교이다. 군인들이 일본 정계를 주도한 시절에 설립된 학교인만큼 학업과 무술 연마를 병행했지만 전 학년 장학금의 파격적인 재학생 지원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난한 조선인들이 학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많이 선택했다. 젊은 날의 김대중은 장학금 제도가 발달한 건국대학 입학을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 일본은 만주의 자원을 이용해 산업국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그 예가 만주 산업 개발 5개년 계획.[8] 변절 후 한용운을 찾아가자 한용운이 "내가 알던 육당은 예전에 죽었소."라며 냉대했다는 일화가 있다.[9] 위당 정인보 선생도 최남선의 건국대학 교수부임 소식을 듣고서는 그의 집 대문 앞에 술을 부어놓고 “이제 우리 육당이 죽고야 말았다”며 대성통곡을 한 일화도 있다.[9] 그 때 한용운은 최남선의 무덤을 만들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유는 앞에 나와있다.[10] 조선사 편수회, 중추원 참의, 건국대학 교수, 학병운동 독려, 일선동조론 저술 등.[11] 단돈 1원도 아쉬울 정도였던 신채호 레벨의 절개를 강요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선일지도 모르지만 최남선은 변절 이전에도 끼니를 걱정하거나 사료를 걱정할 정도의 가세는 아니었다.[12] 전형적인 민족개조론과 자치론의 논리.[13] 자열서는 최남선이 친일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전문을 기재했으며 학병을 찬성한 것은 어차피 일본이 망할 것이니까 군사적 기술을 배우면 좋지 않느냐라는 이유였다는 이유를 대었다.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지는 알아서 해석하자.[14] 이 말이 거짓인 것은 아닌 게 최남선은 저술에서 항상 조선인들에 대한 연민과 희망을 대놓고 표현하고 있었다. 심지어 친일하고 만선사관을 주장하던 때에도 이 주장을 굽히지는 않았으며 광복 이후에는 아예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잠재력이 충분하기에"라는 말을 해버린다.[15] 게다가 친일 행적 때문에 최남선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이었던 건 장준하가 살아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16] <사상계>의 초기 필진에 친일 경향이 있는 인물들이 많았던 것은 당시 지식인들의 한계라고 봐서 넘어갈 수 있다고 좋게 봐준다고 해도 기껏 꼽은 인물이 대표적인 친일 문학가인 김동인이라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17] 이 둘은 오랫동안 <사상계>의 주간 및 집필을 담당하기도 했다.[18] 당시 최초로 책을 구입한 사람은 최남선이 아니었다. 관련 정보 #, #[19] <시대일보>라는 것도 문제가 많다. 일단 처음 창간한 것은 잡지 <동명>인데 여기에 얽힌 인물이 1급 친일파인 진국주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고문 아베이다. # 때문에 여기 얽힌 인물들인 염상섭, 현진건 등에 대해서 모두 친일파 논란으로 끌어들였을 정도다.(이 중에서 현진건은 이 시기 무명이었고 일장기 말소사건이 이후에 터졌기 때문에 제외다. 안재홍 역시 이후 활동에서 차이를 보였기 때문에 그나마 멀어졌지만 <만선일보>에서도 활동한 염상섭은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는 수준의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위에 언급된 만선일보 등과도 유사한 사례이다. 때문에 <동명>이 조선총독부의 명령으로 폐간되었다거나 자금 조달을 막아서 <시대일보>가 폐간되었다거나 하는 등의 이야기는 신빙성이 낮다. 심지어 조선총독부의 자금 지원에도 불구하고 경영난에 처한 <시대일보>를 증산도의 일파인 보천교에 팔아넘기려는 시도까지 했기 때문에 결국 시대일보는 홍명희에게 넘어갔다가 결국 파산해서 무너진다. 이 때문에 이런 전말을 강하게 평가하는 이들은 최남선이 실질적으로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변절한 시기를 1920년대까지 올려잡는다.[20] 그 이유는 당시 <동아일보>보다 적극적으로 일본을 까면 폐간당할 것이고 일본에 그 정도로 나가지 못하면 <동아일보>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해서 결국 망할거라는 이유였다. 돈 없어 드립은 윤치호가 항상 입에 달고 살던 이야기라고 해도 이 분석은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평가였다.[21] 반면 최남선 유품 중 보존 가치가 있는 것은 이미 1960년대 중반에 대학 박물관 등 전문 기관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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