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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다 구도심의 성문(밥 메카)
구도심 예멘 구역의 1881년 건물인 베이트 나시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도시 جدة | 젯다 | ||
지역 | 메카 주 | |
면적 | 1,686km² | |
인구 | 3,976,000 명 | |
인구밀도 | 2,500/km² | |
웹페이지 |
아랍어: جدة
영어: Jeddah
사우디아라비아 서부 메카주의 도시. 메카에서 서쪽으로 50km 떨어진 해안에 있다. 인구는 약 4백만 명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제2의 도시이자 히자즈 지역의 중심 도시다. 이슬람 최대의 성지인 메카의 관문으로, 도심 북부의 킹 압둘아지즈 국제공항을 통해 매년 수백만 명의 무슬림들이 성지순례(핫즈)를 위해 거쳐간다. 대한민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시작된 중동 건설 붐의 영향 덕분에 사우디아라비아 항공 노선의 거점 지역으로 수도 리야드, 성지 메카 다음으로 인지도가 높은 사우디의 도시다. 더군더나 과거 사우디아라비아는 리야드에 해외 대사관 개설을 금지했던 터라 미국, 한국을 비롯한 상당수 국가들의 주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들이 제다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이곳에 한국인도 적지 않으며 과거 주사우디아라비아 대한민국 대사관이었던 대한민국 총영사관이 있다.
제다는 사우디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다. 무려 기원전 6세기 무렵부터 도시가 있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유구하며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구도심 알 발라드는 히자즈 양식의 옛 건축물이 즐비하여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북쪽의 제다 경제 도시에는 향후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축물이 될 마천루인 높이 제다 타워가 건설 중인데 높이는 무려 1,007m에 달한다. 이미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것 중의 하나도 이 도시에 있는데 압둘라 국왕 광장에 있는 국기게양대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기게양대로 높이가 171m에 달한다.
영어: Jeddah
사우디아라비아 서부 메카주의 도시. 메카에서 서쪽으로 50km 떨어진 해안에 있다. 인구는 약 4백만 명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제2의 도시이자 히자즈 지역의 중심 도시다. 이슬람 최대의 성지인 메카의 관문으로, 도심 북부의 킹 압둘아지즈 국제공항을 통해 매년 수백만 명의 무슬림들이 성지순례(핫즈)를 위해 거쳐간다. 대한민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시작된 중동 건설 붐의 영향 덕분에 사우디아라비아 항공 노선의 거점 지역으로 수도 리야드, 성지 메카 다음으로 인지도가 높은 사우디의 도시다. 더군더나 과거 사우디아라비아는 리야드에 해외 대사관 개설을 금지했던 터라 미국, 한국을 비롯한 상당수 국가들의 주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들이 제다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이곳에 한국인도 적지 않으며 과거 주사우디아라비아 대한민국 대사관이었던 대한민국 총영사관이 있다.
제다는 사우디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다. 무려 기원전 6세기 무렵부터 도시가 있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유구하며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구도심 알 발라드는 히자즈 양식의 옛 건축물이 즐비하여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북쪽의 제다 경제 도시에는 향후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축물이 될 마천루인 높이 제다 타워가 건설 중인데 높이는 무려 1,007m에 달한다. 이미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것 중의 하나도 이 도시에 있는데 압둘라 국왕 광장에 있는 국기게양대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기게양대로 높이가 171m에 달한다.
▲ 지명의 유래인 하와(이브)의 무덤. 1928년 사우디의 건국 신념인 와하브파에 의거해 파괴되었다.[4]
기원전 6세기경 동쪽 와디 브리만과 북쪽 와디 오웹에 인류의 흔적이 나타난다. 본격적인 도시의 형성은 기원전 115년 예멘의 마리브 댐이 무너진 후 쿠다아 부족(بني قضاعة)이 이주해 온 것으로 시작되었다. 지명 제다는 아랍어로 할머니란 의미인데 위 그림과 같이 '인류의 할머니' 이브 (하와)가 그곳에 묻혔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슬람 이전, 즉 자힐리야 시대에는 별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메카의 외항이란 지위도 본래 남쪽 70km 지점의 슈아이바가 지니고 있었는데 비록 제다가 메카와 더 가까웠지만 산으로 둘러싸인 메카의 지형으로 인해 슈아이바 방면이 가장 완만하여 교통이 원활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647년 정통 칼리파 우스만이 메카 주민들의 요구대로 친히 일대를 답사하고 길을 정비한 후 슈아이바 대신 제다를 메카의 외항으로 정하였다.
우마이야 왕조 들어 이슬람 제국의 중심지가 시리아로 옮겨지면서 아라비아반도는 상대적으로 소외되었으며 2차 피트나의 혼란이 남아 있던 702년 홍해 건너편 악숨 왕국의 해군이 제다를 습격하여 일시 점령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제다는 어업과 (해로를 통한) 성지순례 덕에 히자즈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남았다. 881년에는 아바스 왕조와 경쟁하던 이집트의 툴룬 왕조가 제다를 통해 히자즈에 파병했으나 900년에 철수하기도 하였다. 10세기 카르마트의 침공을 겪은 후 제다는 메카 샤리프국에 속하였고 그 종주국인 파티마 왕조 하에 이집트와 인도양을 잇는 무역 도시로 성장하였다. 1177년 메카 샤리프는 살라흐 앗 딘에 복속하였고 1183년 초엽 르노 드 샤티용의 십자군 함대가 히자즈 해안을 공격하며 제다 부근에서 순례자들을 태운 선박을 침몰시키는 참극도 있었으나 곧 격퇴되었다. 이후 이어진 안정기 속에 도시에는 신드, 스와힐리, 동남아 출신 선원과 상인들이 왕래하였다.
1517년 제다를 공격하는 포르투갈 함대. 그림과 달리 당시 성탑은 있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3세기 아이유브 왕조 ~ 맘루크 왕조기에 제다는 히자즈 총독의 치소이자 인도양 항로의 주요 거점으로써 번영하였다. 이러한 안정기는 15세기까지 이어졌는데 1497년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 가마가 희망봉 항로를 개척하며 인도양에는 전운이 일었다. 서북 인도 구자라트 술탄국과 예멘 타히르 왕조의 구원 요청에 맘루크 술탄 깐수 2세는 제다 총독 후세인 알 쿠르디(미로켐)에게 50척의 함대를 주어 디우로 파견하였으며 동시에 만일을 대비하여 제다에는 현지 노동력을 징발하여 성벽이 둘러졌다. 1513년 아덴 점령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포르투갈 제국은 1515년 홍해를 봉쇄하였고 이로써 경제 위기에 몰린 맘루크 조는 1517년 4월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되었고 제다 총독 후세인 역시 그에 복속하였다.
그해 12월 16일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의 후임인 로포 소아레스 드 알베가리아 휘하의 포르투갈 함대가 제다를 포격하였다. 마침 성지순례 기간이었기 때문에 후세인 총독은 순례자들 중에 자원자를 받아 방어에 나섰고 포르투갈 군이 상륙을 시도할 때마다 반격에 나섰다.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던 때에 셀만 레이스의 이집트 함대가 나타나 포르투갈 함대를 격퇴하며 제다는 구원되었다. 급하게 철수하느라 미처 수습되지 못하고 남겨진 포르투갈 전사자들의 시신은 수습되어 오늘날 기독교 묘지로 남아있다. 1525년 히자즈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한 오스만 조는 제다에 총독부를 두고 도시의 성벽을 석축으로 보강하였다. 6개의 성문과 6개의 성탑을 갖춘 성벽은 오늘날에도 일부 남아 있다.[5]
18-19세기에 형성된 구도심 알 발라드의 거리
오스만 제국 시기에 제다는 홍해 양안에 걸친 하베쉬 에얄레트의 주도로써 중시되었고 이집트 총독 관할 하에 있었다. 1735년 제다 총독 바크르 파샤는 시리아계 이주민들을 위해 샴 구역을 세웠다. 얼마 뒤에는 후일 아크레에서 나폴레옹을 저지하는 제자르 파샤가 이집트에서 맘루크였을 때 제다에서 초기 경력을 시작했는데 1760년경 현지 베두인들이 상관을 죽이자 보복으로 그들을 학살하며 별명인 '알 자자르'(도살자)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1793년에 시작된 메카 샤리프국과 신흥 디리야 토후국(사우드 왕조)과의 전쟁은 후자의 승리로 굳어져 1805년까지 히자즈 전역이 그 수중에 들어갔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 총독 메흐메트 알리 파샤에게 수복을 명하였고 1811년 얀부 상륙을 시작으로 이집트군이 개입하였다. 메흐메트 알리의 장남이자 하베쉬 산작베이(총독)로 봉해진 투순 파샤는 1812년 메디나에 이어 1813년 1월 부친과 합세하여 제다를 점령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며칠 후 메카가 수복되었고 히자즈는 30여년간 이집트 지배 하에 놓였다. 비록 1816년 투순 파샤가 병사했으나 동생 이브라힘 파샤가 네지드 원정에 나서 1818년 디리야 토후국을 멸망시켰고 30여년간 이어지던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후 메흐메트 알리는 오스만 제국에 직접 도전했다가 패하여 1840년 히자즈를 포기하였다. 이로써 제다는 다시 오스만령 하베쉬 에얄레트의 주도로 돌아왔다. 한편 이집트-오스만 전쟁의 개입 및 수에즈 운하 건설과 함께 유럽인들의 홍해 왕래가 잦아졌고 제다에도 유럽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러자 반서방 기류도 팽배해졌고 1858년 6월 15일 군중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로써 영국, 프랑스 공사 및 그 가족과 그리스계 상인 등 25명의 기독교도가 학살되었는데 이에 대한 보복으로 영국 해군의 Cyclops 함이 쿠세이르를 거쳐 제다 항에 정박한 후 이틀간 도시를 포격하였다. 따라서 구도심의 건물들은 대부분 19세기 중반 이후에 세워졌다.
1938년의 제다
1866년 하베쉬 에얄레트 명칭의 유래이기도 한 홍해 서해안이 이집트에 할양되자 제다 관할에는 히자즈만이 남아 제다 에얄레트라고 불리다가 1871년 제다 무타샤르프를 거쳐 1872년 히자즈 빌라에트로 편성되었다. 다만 마지막 개편으로 총독은 제다가 아닌 메카에 샤리프와 함께 상주하며 히자즈 지역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중앙집권력을 확대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16년 6월 영국의 지원으로 샤리프 후세인은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을 선포하였다. 메카에서 오스만군은 1917년 7월까지 저항했으나 제다는 봉기 직후에 하심 가문에 의해 장악되었고 10여년간 헤자즈 왕국의 주요 항구로 중시되었다. 하지만 1924년 3차 사우디 국가(네지드 술탄국)의 히자즈 정복이 개시되었고 그해 12월 메카가 점령되었다. 샤리프 후세인은 아들 알리에게 양위하고 잔여 병력을 모아 해상 보급이 가능한 제다에서 최후의 저항을 준비하였다. 옛 성벽은 보수되었고 주변에는 지뢰가 매설되었다.
5만에 달하는 네지드군에 비해 헤자즈 왕국군은 5천에 불과했지만 요르단 국왕 압둘라 1세 및 이라크 국왕 파이살 1세의 지원으로 8대의 전투 비행기[6], 40문의 대포, 30정의 기관총, 10여대의 독일제 탱크까지 당대 최신형 무기로 무장한 상태였지만 이미 일대의 부족들이 사우드 왕가로 돌아선 상태라 하심 가문은 도시 내에서도 고립되었고 아카바에서 오는 보급선은 종종 지연되었다. 전세를 바꿀 만한 전투 비행기 역시 넉넉한 물량에 비해 조종사는 겨우 2명인 데다 그마저도 한명이 전투 초반에 사망하자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따라서 10개월 간의 공방전 끝에 더이상은 가망이 없다고 여긴 제다의 유지들은 항복을 결의하였고 샤리프 후세인의 참모 모하메드 아부 젠다의 주도 하에 영국의 중재로 이행하였다. (12월 23일) 사우디 국왕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가 입성하자 샤리프 후세인과 알리는 각각 요르단과 이라크로 망명하였다.
제다 입성 후 히자즈 왕을 칭하던 압둘아지즈는 이듬해 네지드 술탄국을 히자즈-네지드 왕국으로 개편하였고 1928년 구도심 남쪽에 쿠잠 궁[7]을 세웠다. 여담으로 궁의 건설가는 오사마 빈 라덴의 조부인 기업가 모하메드 빈 아와드였다. 1932년 히자즈와 네지드의 왕위가 합쳐지며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이 출범하였고 제다는 수도 리야드 서쪽 메카 주의 일개 도시로 편입되면서 중요성을 잃었다. 1947년 구도심의 성벽이 허물어졌고 1982년에는 구도심에서 화재가 발생해 중심부의 옛 건물 몇몇이 소실되었다. 다만 1979년 조사 당시 등록된 1천여 고택들 중 대부분은 잔존하였고 1990년 제다 역사지구 보존국이 설립되면서 관리되고 있다. 한편 성지순례 수요 및 국제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90년대 들어 시가지는 해안을 따라 확장되었고 제다는 거대한 광역권을 지닌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2020년대 사우디의 관광 장려 정책에 힘입어 제다는 사우디의 주요 관광 도시로 개발될 예정이다.[8]
킹 압둘아지즈 국제공항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란 나라가 사막으로 뒤덮여 있어 육로 교통보다는 이 공항을 통해 전세계의 무슬림이 집결한다.
대한항공이 1977년 4월부터 서울발 정기노선을 개설하였다가 1997년 중동건설 붐이 꺼지고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해 운항을 중단했는데 15년만인 2012년에 해당 노선을 복항하여 킹 압둘아지즈 국제공항에 취항했다. 하지만 2017년 2월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제가 안 좋아지면서 운휴했고 이듬해 사우디아라비아 운수권을 반납하면서 단항했다. 리야드를 중간에 경유한 후 인천으로 갔으며 제다 - 리야드 구간은 항공자유화협정 9단계인 사우디의 국내선 구간이 되기 때문에 판매하지 않는다.[9] 사우디아 항공과 코드셰어하는 노선이었으나 2018년 3월 대한항공이 사우디아라비아 운수권을 반납한 후 두바이에서 사우디아 항공과 환승 연계를 하기로 합의했다. 사우디아 항공도 제다에 본사가 있다. 물론 에미레이트 항공을 타고 두바이에서 환승해도 된다. 다만 이쪽은 마일리지가 걸린다.
2022년에 사우디아 항공이 인천에 취항하여 인천 - 리야드 - 제다 노선을 운항 중이다.
대한항공이 1977년 4월부터 서울발 정기노선을 개설하였다가 1997년 중동건설 붐이 꺼지고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해 운항을 중단했는데 15년만인 2012년에 해당 노선을 복항하여 킹 압둘아지즈 국제공항에 취항했다. 하지만 2017년 2월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제가 안 좋아지면서 운휴했고 이듬해 사우디아라비아 운수권을 반납하면서 단항했다. 리야드를 중간에 경유한 후 인천으로 갔으며 제다 - 리야드 구간은 항공자유화협정 9단계인 사우디의 국내선 구간이 되기 때문에 판매하지 않는다.[9] 사우디아 항공과 코드셰어하는 노선이었으나 2018년 3월 대한항공이 사우디아라비아 운수권을 반납한 후 두바이에서 사우디아 항공과 환승 연계를 하기로 합의했다. 사우디아 항공도 제다에 본사가 있다. 물론 에미레이트 항공을 타고 두바이에서 환승해도 된다. 다만 이쪽은 마일리지가 걸린다.
2022년에 사우디아 항공이 인천에 취항하여 인천 - 리야드 - 제다 노선을 운항 중이다.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3]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4] 12세기 알 이드리시와 이븐 주바이르 등의 지리가들에 의해 이브의 무덤이라고 전승되어 왔다. 그래서 정확히는 '전(傳) 하와 무덤'이다. 1900년경 메카 샤리프 아운 알 라피크가 130m나 되는 무덤 길이를 지적하며 '우리들의 어머니'가 이렇게 키가 컸을 리가 없다며 파괴하려고 했으나 여론의 반발로 철회하였다. 사우디령이 된 지 3년이 지난 1928년 무덤에서의 기도를 성인 숭배로 규정해 배격한 와하브파에 의거하여 히자즈 총독 파이살에 의해 파괴되었고 1975년 시멘트로 덮혔다. 다만 현재까지도 '우리들의 어머니' 하와 묘지로 불린다.[5] 성벽과 함께 수비대가 주둔할 성채인 키슐라도 세워졌으나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사우디 국방부 제다 지부 건물 자리다. 1541년 포르투갈의 수에즈 원정 시에 재차 공격받았다고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6] 2대의 노후 비행기에 나머지는 이탈리아에서 신규 구매[7] 1963년 왕실 영빈관이 되었고 1995년 그 일부가 지역 고고인류학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8]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왕세자는 1300만 달러를 들여 구도심의 보수를 지시한 바 있다.[9] 어느 나라든 국내선 구간을 외국항공사에 맡기는 9단계 항공자유화 협정의 사례는 극소수로,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임시방편으로 허용해 주는 예외적인 경우가 잠깐씩 있다. 예를 들어 2001년 호주에서 안셋 오스트레일리아 항공의 파산으로 대한항공이 자사의 브리즈번 경유 시드니행 정기노선에서 브리즈번-시드니 호주 국내선 구간 영업을 호주 정부와 정식으로 항공자유화협정 9단계를 맺고 잠깐 대행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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