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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택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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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본관 | |||||||||||
재임기간 | 제18대 충청북도지사 (관선) | ||||||||||
제8대 노동청장 | |||||||||||
제33·34대 농수산부장관 | |||||||||||
초대 정무제1장관 | |||||||||||
제9대 정무제1장관 | |||||||||||
제2대 환경부장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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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충청북도 청주군 오창면 여천리(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여천리)에서 아버지 정운흥(鄭雲興)과 어머니 연안 김씨 김영기(金榮基)의 딸 사이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청주오창초등학교, 증평중학교, 청주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교사, 내무부 임시직 말단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1971년 대통령 정무비서관 및 새마을담당비서관으로 발탁돼 3년 4개월 동안 보직을 맡았고, 새마을운동을 전담하기도 했다. 당시 새마을운동이 확산되는 시점에 기업들로부터 새마을 성금을 걷었고,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에게 새마을운동의 지도층 솔선수범 필요성을 설명하고 새마을교육을 시킬 것을 요청하였고 이후에는 영부인을 새마을 현장으로 내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육영수가 정종택을 "새마을운동에 미치신 비서관"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또한 새마을운동 예산 확보 과정에서 에피소드가 여러개가 있었는데, 한번은 정종택이 남덕우 재무부장관과 김보현 농수산장관에게 은행, 농협 임원들의 판공비, 정보비를 아껴 새마을운동의 성금으로 유도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얼마후 전국 농협 임직원들이 새마을 성금을 강제로 공제하게 되었다. 결국 정종택은 순수한 새마을운동의 저해요인이 될까 두렵다며 정중히 임직원들의 강제모금 철회를 요청했고, 곧바로 새마을운동 모금이 중단됐다. 또 한번은 양탁식 당시 서울시장이 강감찬 장군 사당을 짓는데 2억 5000만 원이 필요하다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해서 새마을 예산을 빼앗아갔다. 이후에 양택식이 이 사실을 정종택의 사무실에서 자랑하자 정종택이 발끈했는데, 정종택은 "서울시는 주민세가 신설돼 많은 재원이 추가로 들어오는데도 새마을운동에 예산을 보태주는 못할망정 그 많은 돈을 빼앗아 갈수 있는가? 내년 서울시 예산에서 그 열 배가량을 청와대에서 묶겠다"라고 했는데 정작 양탁식은 이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후에 정종택 본인이 대통령 결재를 받아 서울시 예산 중 20억 원(현 3000억 가량)을 묶어 전에 양탁식에게 했던 말을 실제로 직접 실천하였고, 결국 서울시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서울시 공무원들에게 까지 미움을 사게 된 것은 덤.
이후 1976년부터 1980년까지 4년간 충청북도지사를 역임하였다. 본래 경기도지사로 임명되려 했으나 당시 장기간 재임한 시·도지사 교체 방침에 따라 3년 이상 재임한 오용운 충북도지사가 교체대상이 되어 충북도지사 자리에 공백이 생기는 바람에 최종적으론 충청북도지사에 임명되었다. 도지사 재임 기간동안 새마을운동 담당비서관 시절의 경험으로 충북에서 새마을 운동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1980년 1월부터 같은 해 5월까지 노동청장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5월부터 1981년 3월까지 농수산부장관을 역임하였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육진성 대신 민주정의당 후보로 충청북도 청주시-청원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한국국민당 윤석민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같은 해 4월부터 1982년 5월까지 정무제1장관에 부임하였다가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에 따른 민심 수습 차원에서 경질되어 같은 당의 오세응 국회의원으로 후임자가 교체되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한민주당 김현수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뒤이어서 민주정의당 충청북도지부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한국4H연맹 총재를 역임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충청북도 청주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통일민주당 김현수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같은 해 12월부터 1989년까지 정무제1장관을 역임하였다. 이 시기에 경부고속선 오송역 신설을 위해 깽판치던 청사모의 배후에 있었다고 한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통일국민당 김진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5년 초 민주자유당 교육연수원장을 역임하였다. 1995년 12월부터 1996년 12월까지 환경부장관을 역임하였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당적을 옮겨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충북 청원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신경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충청대학교 학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교사, 내무부 임시직 말단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1971년 대통령 정무비서관 및 새마을담당비서관으로 발탁돼 3년 4개월 동안 보직을 맡았고, 새마을운동을 전담하기도 했다. 당시 새마을운동이 확산되는 시점에 기업들로부터 새마을 성금을 걷었고,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에게 새마을운동의 지도층 솔선수범 필요성을 설명하고 새마을교육을 시킬 것을 요청하였고 이후에는 영부인을 새마을 현장으로 내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육영수가 정종택을 "새마을운동에 미치신 비서관"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또한 새마을운동 예산 확보 과정에서 에피소드가 여러개가 있었는데, 한번은 정종택이 남덕우 재무부장관과 김보현 농수산장관에게 은행, 농협 임원들의 판공비, 정보비를 아껴 새마을운동의 성금으로 유도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얼마후 전국 농협 임직원들이 새마을 성금을 강제로 공제하게 되었다. 결국 정종택은 순수한 새마을운동의 저해요인이 될까 두렵다며 정중히 임직원들의 강제모금 철회를 요청했고, 곧바로 새마을운동 모금이 중단됐다. 또 한번은 양탁식 당시 서울시장이 강감찬 장군 사당을 짓는데 2억 5000만 원이 필요하다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해서 새마을 예산을 빼앗아갔다. 이후에 양택식이 이 사실을 정종택의 사무실에서 자랑하자 정종택이 발끈했는데, 정종택은 "서울시는 주민세가 신설돼 많은 재원이 추가로 들어오는데도 새마을운동에 예산을 보태주는 못할망정 그 많은 돈을 빼앗아 갈수 있는가? 내년 서울시 예산에서 그 열 배가량을 청와대에서 묶겠다"라고 했는데 정작 양탁식은 이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후에 정종택 본인이 대통령 결재를 받아 서울시 예산 중 20억 원(현 3000억 가량)을 묶어 전에 양탁식에게 했던 말을 실제로 직접 실천하였고, 결국 서울시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서울시 공무원들에게 까지 미움을 사게 된 것은 덤.
이후 1976년부터 1980년까지 4년간 충청북도지사를 역임하였다. 본래 경기도지사로 임명되려 했으나 당시 장기간 재임한 시·도지사 교체 방침에 따라 3년 이상 재임한 오용운 충북도지사가 교체대상이 되어 충북도지사 자리에 공백이 생기는 바람에 최종적으론 충청북도지사에 임명되었다. 도지사 재임 기간동안 새마을운동 담당비서관 시절의 경험으로 충북에서 새마을 운동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1980년 1월부터 같은 해 5월까지 노동청장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5월부터 1981년 3월까지 농수산부장관을 역임하였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육진성 대신 민주정의당 후보로 충청북도 청주시-청원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한국국민당 윤석민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같은 해 4월부터 1982년 5월까지 정무제1장관에 부임하였다가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에 따른 민심 수습 차원에서 경질되어 같은 당의 오세응 국회의원으로 후임자가 교체되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한민주당 김현수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뒤이어서 민주정의당 충청북도지부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한국4H연맹 총재를 역임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충청북도 청주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통일민주당 김현수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같은 해 12월부터 1989년까지 정무제1장관을 역임하였다. 이 시기에 경부고속선 오송역 신설을 위해 깽판치던 청사모의 배후에 있었다고 한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통일국민당 김진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5년 초 민주자유당 교육연수원장을 역임하였다. 1995년 12월부터 1996년 12월까지 환경부장관을 역임하였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당적을 옮겨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충북 청원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신경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충청대학교 학장 등을 역임하였다.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81 | 충북 1[7] | 67,108 (33.57%) | 당선 (1위) | 초선 | ||
1985 | 120,584 (49.67%) | 재선 | ||||
1988 | 충북 청주 갑 | 30,375 (37.03%) | 3선 | |||
1992 | 28,461 (33.16%) | 낙선 (2위) | ||||
2000 | 15,928 (27.39%) | 낙선 (3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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