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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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지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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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화 | |
출생 | |
사망 | |
재임기간 | 제24대 영의정부사 |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 |
문성(文成) | |
하동 정씨 (중시조) | |
백저(伯雎) | |
학역재(學易齋) | |
학력 | |
부모 | 부친 - 정흥인(鄭興仁, 1363 ~ 1436) 모친 - 흥덕 진씨(興德 陳氏) 진천의(陳千義)의 딸 |
부인 | |
자녀 | |
서명 |
아버지는 석성현감(현재의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을 지낸 정흥인(鄭興仁, 1363 ~ 1436). 정흥인이 내직별감에 있을 때 도교의 신을 제사지내는 사당인 소격전에 들어가 "집안을 일으킬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었다. 얼마 뒤에 아내 진씨가 낳은 아들이 바로 정인지. 총명했는지 기록에 의하면 5세 때 이미 글을 깨우쳐 서책에 눈길만 스쳐도 줄줄 외울 수 있었고 1번만 보면 읽고 쓸 줄 알아 천재라는 소문이 이웃에 자자하였다고 한다. 고전을 암송하고 작문에도 재능을 보였는데 7살에 《소학》을 깨우쳤고 13살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선비들 앞에서 강론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했다.
1411년(태종 11) 식년시 생원시에 급제했고# 1414년(태종 14) 식년시 문과에 응시했는데 일화를 하나 남겼다. 시험 감독관을 맡았던 하륜 등이 태종에게 3개의 시험 답안을 가져와서 장원을 뽑아달라고 청했다. 감독관들의 평가는 '두 답안은 엇비슷하고 하나는 조금 처집니다'였다. 태종이 "내가 집는 것이 장원이다"라고 말한 다음 두 시권을 바치도록 하여 능숙한 솜씨로 하나를 잡으니 바로 정인지였다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신하들이 조금 처지는 하나의 답안은 미리 배제해뒀을 가능성도 있는데 정인지의 답안이 조금 더 훌륭했던 것이다.( "압권"이라는 단어의 어원 참고). 한마디로 태종은 답안지들을 읽어보지도 않고 하나 집어 장원으로 삼아버렸는데 답안지의 주인공이 바로 정인지였던 것.(태종실록, 태종 14년(1414년) 3월 11일). 태종 본인도 고려 말기에 과거를 보아 합격한 경력이 있다. 조선 왕조 유일의 행정고시 합격 경험이 있는 국왕인 셈. 정인지는 을과 1등 1위의 장원으로 결정된 후 예빈시주부에 임명되었다. 나머지 1명으로 추정되는 조서강은 이조참판에 도승지를 지내는 등 정인지 못지 않게 관직이 높았다.
이후 사헌부 감찰, 예조좌랑, 병조좌랑 등의 관직을 거쳤는데 행정 미숙이나 일 처리를 잘못해서 의금부에 투옥되기도 했고 비상 동원 훈련 중에 술을 먹는 짓 등 부적절한 행동으로 탄핵된 경력도 있다. 정인지가 투옥되거나 벌을 받는 기록을 보면 그 원인은 주로 도장을 잘못 찍거나 의례에 필요한 의장을 빼먹는 이유가 대부분이다. 병조좌랑 때는 의장을 빼먹은 죄로 태형 40대까지 맞은 기록도 보인다. 이런 것을 보면 똑똑하면서도 덜렁대는 인물이었던 듯.
하지만 세종이 즉위할 즈음 관직 운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는데 상왕으로 있던 태종도 세종에게 "크게 쓸 인물이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그 후 예조판서, 이조판서, 예문관 대제학 등의 여러 요직을 거치며 천문, 역법 사업에 뛰어들어 세종 시대 과학 발전의 중심 인물로 부상했다. 천문과 산술에 뛰어난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세종은 정인지를 두고 "간의, 규표, 흠경각, 보루각 등의 제작에 있어 다른 신하들은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나 정인지만이 이를 함께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정인지를 앞에 두고 원나라 대의 산학서(지금의 수학책)인 <산학계몽(算學啓夢)>을 공부하면서 궁금한 점을 정인지에게 직접 물어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1411년(태종 11) 식년시 생원시에 급제했고# 1414년(태종 14) 식년시 문과에 응시했는데 일화를 하나 남겼다. 시험 감독관을 맡았던 하륜 등이 태종에게 3개의 시험 답안을 가져와서 장원을 뽑아달라고 청했다. 감독관들의 평가는 '두 답안은 엇비슷하고 하나는 조금 처집니다'였다. 태종이 "내가 집는 것이 장원이다"라고 말한 다음 두 시권을 바치도록 하여 능숙한 솜씨로 하나를 잡으니 바로 정인지였다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신하들이 조금 처지는 하나의 답안은 미리 배제해뒀을 가능성도 있는데 정인지의 답안이 조금 더 훌륭했던 것이다.( "압권"이라는 단어의 어원 참고). 한마디로 태종은 답안지들을 읽어보지도 않고 하나 집어 장원으로 삼아버렸는데 답안지의 주인공이 바로 정인지였던 것.(태종실록, 태종 14년(1414년) 3월 11일). 태종 본인도 고려 말기에 과거를 보아 합격한 경력이 있다. 조선 왕조 유일의 행정고시 합격 경험이 있는 국왕인 셈. 정인지는 을과 1등 1위의 장원으로 결정된 후 예빈시주부에 임명되었다. 나머지 1명으로 추정되는 조서강은 이조참판에 도승지를 지내는 등 정인지 못지 않게 관직이 높았다.
이후 사헌부 감찰, 예조좌랑, 병조좌랑 등의 관직을 거쳤는데 행정 미숙이나 일 처리를 잘못해서 의금부에 투옥되기도 했고 비상 동원 훈련 중에 술을 먹는 짓 등 부적절한 행동으로 탄핵된 경력도 있다. 정인지가 투옥되거나 벌을 받는 기록을 보면 그 원인은 주로 도장을 잘못 찍거나 의례에 필요한 의장을 빼먹는 이유가 대부분이다. 병조좌랑 때는 의장을 빼먹은 죄로 태형 40대까지 맞은 기록도 보인다. 이런 것을 보면 똑똑하면서도 덜렁대는 인물이었던 듯.
하지만 세종이 즉위할 즈음 관직 운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는데 상왕으로 있던 태종도 세종에게 "크게 쓸 인물이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그 후 예조판서, 이조판서, 예문관 대제학 등의 여러 요직을 거치며 천문, 역법 사업에 뛰어들어 세종 시대 과학 발전의 중심 인물로 부상했다. 천문과 산술에 뛰어난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세종은 정인지를 두고 "간의, 규표, 흠경각, 보루각 등의 제작에 있어 다른 신하들은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나 정인지만이 이를 함께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정인지를 앞에 두고 원나라 대의 산학서(지금의 수학책)인 <산학계몽(算學啓夢)>을 공부하면서 궁금한 점을 정인지에게 직접 물어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上, 學 <啓蒙算>, 副提學鄭麟趾入侍待問, 上曰: “算數在人主無所用, 然此亦聖人所制, 予欲知之.(상, 학<계몽산>, 부제학정인지입시특문, 상왈: 산수재인주무소용 열차역성인소제 예욕지지)”
- 세종실록 12년(1430년) 10월 23일
해석하면, “임금이 계몽산(啓蒙算)을 배우는데, 부제학 정인지(鄭麟趾)가 들어와서 모시고 질문을 기다리고 있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산수(算數)를 배우는 것이 임금에게는 필요가 없을 듯하나, 이것도 성인이 제정한 것이므로 나는 이것을 알고자 한다.’”
또한 역대 역법의 같고 다른 점과 천체의 움직임 같은 천문 현상들의 관계를 종합하여 <칠정산> 내편을 편찬하기도 했는데 워낙 셈이 정밀해서 아무리 노련한 일관도 정인지의 계산을 따라잡을 수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혼천의(천체 관측 기구)와 앙부일구(해시계) 등의 기기를 정초와 함께 설계하였고 이 설계를 바탕으로 이천이 최종 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인지는 삼남 지방의 모든 토지를 심사하여 토지의 등급을 정한 어마어마한 일을 실행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는 기존의 조세법인 답험손실법의 폐단을 막기 위한 새로운 공법을 위해서였다. 정인지는 공법 논의를 부활시킨 관료로서 이미 세종이 과거 시험(중시)에서 공법에 관한 문제를 내었을 때 이에 대한 적극적인 옹호 의견을 피력하여 세종과 그 뜻을 함께 한 인물이었다. 이로서 정인지는 공법 시행의 실무 책임자가 되었고 삼남 지방에 대한 공법의 시범 실시를 위해 해당 지역의 토지 등급을 모두 정하는 막중한 일을 수행한 것이다.
결국 공법 시행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기존의 답험손실법보다 훨씬 더 예측 가능하고 효율적인 조세 징수 체계를 갖출 수 있었고 백성들의 실질적인 세부담 역시 획기적으로 줄어들었다.더욱 자세한 내용은 기사를 참조.
역사에도 조예가 깊어 <자치통감> 훈의의 편찬이나 김종서 등과 함께 <고려사> 등의 편찬을 맡기도 했다. 김종서가 계유정난으로 역신으로 전락했으므로 현재 <고려사>와 <세종실록>은 모두 편찬 주관자 명의가 정인지로 기록되어 있다.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의 보급에도 크게 기여했다. <훈민정음>의 공식 설명서인 해례본의 서문을 쓰고 해례본 편찬과 <용비어천가> 제작에 적극 참여한 사람도 바로 정인지다. <훈민정음>의 광범위한 보급은 물론이고 창제 원리에 대한 서술을 담은 해례본의 서문을 정인지에게 손수 맡겼다는 사실은 세종이 정인지를 깊이 신뢰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세종은 생전에 정인지를 깊이 신뢰해 그에게 자신의 실록인 <세종실록> 편찬을 직접 수행하도록 하였다. 자신의 실록을 맡겼다는 것은 그의 능력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그를 깊이 신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한글날이 10월 9일이 된 것은 정인지 때문이다. 바로 정인지의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이 음력 9월 상순(음력 9월 10일)에 쓰였기 때문. 이를 양력으로 바꾸면 10월 9일이 된다. 이를 기념하여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제정하였다.
아래는 정인지의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의 마지막 문장이다.
"정통 11년(1446년) 9월 상한, 자헌대부· 예조판서· 집현전 대제학· 지춘추관사· 세자우빈객, 신 정인지는 두 손 모아 절하고 머리 조아려 삼가 씀."
(세상에) 천지 자연의 (이치에 맞는) 소리가 있다면 반드시 천지 자연의 (이치에 맞는) 글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 (중략) …
그러나 세계는 기후와 토질이 (서로) 나누어져 있으며, 말소리의 기운도 또한 (이에) 따라서 서로 다르다. … (중략) …
(그런데) 대개 중국 이외의 나라 말은 그 말소리는 있으나, 그 글자는 없다.
중국의 글자를 빌어서, 그리하여 그 사용을 같이하고 있으니,
이는 마치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낀 것과 같이 서로 어긋나는 일이매
어찌 능히 통달해서 막힘이 없을 수 있겠는가?
요컨대 (글자란) 모두 각자가 살고 있는 곳에 따라서 정해질 것이지,
그것을 강요하여 같이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 중 일부
세종 사후 문종, 단종의 시대를 거치면서 그의 인생은 변하기 시작한다. 정인지는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을 지지하기는 했으나 계유정난에 적극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런 그를 1등 공신에 넣은 것은 원로를 포섭하기 위한 수양대군의 정치적 안배였다. 반역을 일으켜 김종서 등을 위시한 조정의 원로 대신들을 죽인 수양대군으로서는 세종 시대부터 인정을 받아 권위를 갖춘 데다 정통 관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인지 같은 자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런 이유로 성삼문 역시 3등 공신에 올라 있다. 정인지도 여기에 화답하듯 조정에서 전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을 정치적으로 지원했다.
정인지는 고명대신으로 황보인이나 김종서가 전권을 행사한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같은 고명대신으로 계유정난 당시 우의정이였던 정분은 정인지의 자형이기도 하고 김종서가 너무 독단적인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만 기본적으로 김종서와 뜻을 같이 했고 세종 시기까지는 앞서던 정인지가 문종 시기에 정분에게 순서가 뒤집히면서 이에 대한 반감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래도 자형이라고 유배 가있던 정분을 살리기 위해 정인지가 회유를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정인지는 1등 공신이 되면서 좌의정이 되어 정승의 반열에 올랐고 하동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하자 마침내 영의정이 되었다. 또한 금성대군의 모반 기도가 실패로 돌아간 직후 양녕대군, 신숙주 등과 함께 단종의 목숨을 끊을 것을 적극적으로 요청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로 유배간 단종의 궁녀들이 따라가서 모시려고 하자 궁녀를 단 1명도 보내줘서는 안된다며 적극적으로 반대하기까지 했다.
야사에 의하면 꿈에 세종이 나타나 저주를 내렸다고 한다. 그렇게 중용하고 아낀데다 세종 생전에 단종을 부탁했는데 그걸 저버린 것으로도 모자라 적극적으로 핍박했다. 정인지의 스승인 권우는 세종의 스승이기도 해서 군신지간일뿐 아니라 사사롭게는 사형제지간인데도 저랬다. 정인지의 스승 권우는 정몽주의 제자다. 정인지는 정몽주의 사손인데 둘의 행보는 극과 극. 정몽주의 손자 정보는 단종과 사육신을 옹호하여 귀양갔다.[9]
하지만 세조 측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단종에게 궁녀를 보내준다면 단종의 아들이 생겨버릴 위험성이 생긴다. 아들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반란 세력이 단종의 아들로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 즉 세조의 결정을 원로인 정인지가 총대 메고 발언한 것으로 봐야 한다.
원로로서 대접받으며 평안하게 사는 듯 했으나 노년에는 다른 의미로 온갖 트러블을 일으켰는데 바로 술자리에서의 말실수 때문. 한 번은 세조가 불경을 간행하는 것 을 두고 취중에 "이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했다가 세조의 노여움을 사서 의금부에 투옥되기도 했다. (세조실록, 세조 4년(1458년) 2월 12일). 세조는 조선 역대 임금들 중에서 이성계나 말년의 세종처럼 불교에 우호적인 정책을 펼친 임금이다. 세조 때는 한글로 된 불경이 간행되는 등 불교 문화가 크게 융성했다.
한 번은 평안도를 시찰하고 돌아오는 길의 술 잔치에서 풍수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는데 정인지는 풍수에 대한 이론을 늘어놓다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풍수의 심오한 것까지 들어가면 전하께서 아마 잘 모르실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만다. 세조는 수양대군 시절부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했던 인물이었다. 자뻑 수준이 아니라 문무 겸비에 잡학까지 두루 갖추어서 세종이 평소 여러 일을 맡겼을 정도였다. 때문에 세조는 세종, 소헌왕후, 문종, 의경세자 등의 장례에 두루 관여해서 스스로 풍수의 전문가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정인지가 "풍수의 심오한 것을 모르실 것"이라고 무시하는 듯이 말했으니 세조의 갈굼을 먹는 것은 당연지사. 세조는 "넌 뭐 그리 잘나서 남을 그리 깔보냐? 진짜 경박하구만! 죄를 주고 싶지만 취중 실수에 원로니까 참아주지!"라고 정인지를 꾸짖었다.
세조 면전에서 불경을 간행한다고 세조를 까대다가 격노한 세조가 잔치를 뒤엎어버린 일도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에 "어제 무슨 생각으로 그 따위 말을 했냐?"라고 세조가 묻자 "취해서 헛소리를 했사옵니다."라고 빌었고 세조는 "그럼 공자의 도와 부처의 도가 어떻게 다른지 한번 말해봐라."라고 했는데 정인지가 대답을 못하자 "임금이 묻는데 대답도 안하다니 이런 싸가지 없는 놈!"하면서 국문해버렸다. 며칠 후에 연로한 대신이니 봐준다고 풀어주자 국문을 더 해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다고 한다.
그래놓고도 정인지는 다시 얼큰하게 취한 나머지 세조한테 "너"라고 부르며 "네가 그리 하는 것을 나는 그리 하지 않겠다"고 반말을 하고 말았다. 당시 왕의 이름조차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시대에 왕에게 "너"라니 남효온이 쓴 소설 <육신전>에서는 성삼문이 세조를 "나리"라고 부르자 세조가 빡쳐하는 장면이 등장하니(물론 정사가 아닌 야사로 실제로 이런 발언을 했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 그야말로 사육신처럼 사실상 자신의 목숨을 포기한 사람들에게서나 보일 장면이다. 사육신조차 너가 아니라 나리라고 부른걸 생각해보면 진짜 간이 배 밖에 나온거다.
단, 이 때 정인지가 한 말은 생각없이 야자를 깐 것이 아니라 세조의 호불(好佛) 정책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것이라고 한다. 정인지도 유학자였던만큼 세조의 호불 정책에 대해 불만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은 세조실록 세조 4년(1458년) 9월 17일에 실려 있다.
세조 말년에는 세조를 '태상(상왕)'이라고 불렀다가 분노를 사기도 했으며 신하들도 이번에는 정인지를 벌하자고 간언했으나 세조는 "원래 그 영감탱이가 그랬는데 뭘 새삼스레 그러냐"며 넘어갔다. 그야말로 술자리 말실수 종결자인 셈. 이런 실수에도 불구하고 83세까지 장수했다.
그래도 저 막말 사건을 일으키기 2년 전만 해도 세조의 비위를 잘 맞추는 신하였다. 1456년 9월 19일의 <세조실록>을 보면 어느 날 세조가 정인지에게 "정승은 어진 사람을 발굴해 내는 직책인데 나는 사람을 알아보는 재주가 별로 없어. 경은 신숙주처럼 뛰어난 인재를 찾아서 천거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다. 그러자 정인지는 자리를 피하며 이렇게 말했다. "신은 원래 용렬하고 어두워서 사람 보는 재주가 없습니다. 옛날 사람이 '사람을 잘 알아보는 것을 두고 철(哲)이라 한다'고 말했으니 사람 잘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세조 왈, "내가 신숙주의 어짊을 알아보고 뽑아 써서 이렇게 되었으니 나는 사람을 알아보는 밝음(哲)이 있다 하겠다" 첫 질문부터 '난 신숙주를 뽑았는데 사람 발굴하는 정승인 너는 신숙주 정도의 인재를 뽑을 수 있겠는가?' 이라는 속뜻이 담겨 있는 바 겸손은 없었다. 그런데 세조 성격이 원래 이랬다.
물론 세조는 칭찬을 많이 해서 한명회 보고는 "내가 뭐, (계유정난에서) 한게 있나 다 이사람이 했지" 라고 말했고 양성지에게는 "그대는 나의 제갈량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조는 칭찬만큼이나 자기 자랑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봄에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5할 이상의 이자를 덧붙여 받는 장리(長利)로 부를 축적했는데 일국의 재상이 백성들을 상대로 고리대 놀이를 한 셈. 이 때문에 말년에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한다.
정인지는 고명대신으로 황보인이나 김종서가 전권을 행사한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같은 고명대신으로 계유정난 당시 우의정이였던 정분은 정인지의 자형이기도 하고 김종서가 너무 독단적인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만 기본적으로 김종서와 뜻을 같이 했고 세종 시기까지는 앞서던 정인지가 문종 시기에 정분에게 순서가 뒤집히면서 이에 대한 반감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래도 자형이라고 유배 가있던 정분을 살리기 위해 정인지가 회유를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정인지는 1등 공신이 되면서 좌의정이 되어 정승의 반열에 올랐고 하동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하자 마침내 영의정이 되었다. 또한 금성대군의 모반 기도가 실패로 돌아간 직후 양녕대군, 신숙주 등과 함께 단종의 목숨을 끊을 것을 적극적으로 요청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로 유배간 단종의 궁녀들이 따라가서 모시려고 하자 궁녀를 단 1명도 보내줘서는 안된다며 적극적으로 반대하기까지 했다.
야사에 의하면 꿈에 세종이 나타나 저주를 내렸다고 한다. 그렇게 중용하고 아낀데다 세종 생전에 단종을 부탁했는데 그걸 저버린 것으로도 모자라 적극적으로 핍박했다. 정인지의 스승인 권우는 세종의 스승이기도 해서 군신지간일뿐 아니라 사사롭게는 사형제지간인데도 저랬다. 정인지의 스승 권우는 정몽주의 제자다. 정인지는 정몽주의 사손인데 둘의 행보는 극과 극. 정몽주의 손자 정보는 단종과 사육신을 옹호하여 귀양갔다.[9]
하지만 세조 측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단종에게 궁녀를 보내준다면 단종의 아들이 생겨버릴 위험성이 생긴다. 아들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반란 세력이 단종의 아들로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 즉 세조의 결정을 원로인 정인지가 총대 메고 발언한 것으로 봐야 한다.
원로로서 대접받으며 평안하게 사는 듯 했으나 노년에는 다른 의미로 온갖 트러블을 일으켰는데 바로 술자리에서의 말실수 때문. 한 번은 세조가 불경을 간행하는 것 을 두고 취중에 "이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했다가 세조의 노여움을 사서 의금부에 투옥되기도 했다. (세조실록, 세조 4년(1458년) 2월 12일). 세조는 조선 역대 임금들 중에서 이성계나 말년의 세종처럼 불교에 우호적인 정책을 펼친 임금이다. 세조 때는 한글로 된 불경이 간행되는 등 불교 문화가 크게 융성했다.
한 번은 평안도를 시찰하고 돌아오는 길의 술 잔치에서 풍수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는데 정인지는 풍수에 대한 이론을 늘어놓다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풍수의 심오한 것까지 들어가면 전하께서 아마 잘 모르실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만다. 세조는 수양대군 시절부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했던 인물이었다. 자뻑 수준이 아니라 문무 겸비에 잡학까지 두루 갖추어서 세종이 평소 여러 일을 맡겼을 정도였다. 때문에 세조는 세종, 소헌왕후, 문종, 의경세자 등의 장례에 두루 관여해서 스스로 풍수의 전문가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정인지가 "풍수의 심오한 것을 모르실 것"이라고 무시하는 듯이 말했으니 세조의 갈굼을 먹는 것은 당연지사. 세조는 "넌 뭐 그리 잘나서 남을 그리 깔보냐? 진짜 경박하구만! 죄를 주고 싶지만 취중 실수에 원로니까 참아주지!"라고 정인지를 꾸짖었다.
세조 면전에서 불경을 간행한다고 세조를 까대다가 격노한 세조가 잔치를 뒤엎어버린 일도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에 "어제 무슨 생각으로 그 따위 말을 했냐?"라고 세조가 묻자 "취해서 헛소리를 했사옵니다."라고 빌었고 세조는 "그럼 공자의 도와 부처의 도가 어떻게 다른지 한번 말해봐라."라고 했는데 정인지가 대답을 못하자 "임금이 묻는데 대답도 안하다니 이런 싸가지 없는 놈!"하면서 국문해버렸다. 며칠 후에 연로한 대신이니 봐준다고 풀어주자 국문을 더 해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다고 한다.
그래놓고도 정인지는 다시 얼큰하게 취한 나머지 세조한테 "너"라고 부르며 "네가 그리 하는 것을 나는 그리 하지 않겠다"고 반말을 하고 말았다. 당시 왕의 이름조차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시대에 왕에게 "너"라니 남효온이 쓴 소설 <육신전>에서는 성삼문이 세조를 "나리"라고 부르자 세조가 빡쳐하는 장면이 등장하니(물론 정사가 아닌 야사로 실제로 이런 발언을 했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 그야말로 사육신처럼 사실상 자신의 목숨을 포기한 사람들에게서나 보일 장면이다. 사육신조차 너가 아니라 나리라고 부른걸 생각해보면 진짜 간이 배 밖에 나온거다.
단, 이 때 정인지가 한 말은 생각없이 야자를 깐 것이 아니라 세조의 호불(好佛) 정책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것이라고 한다. 정인지도 유학자였던만큼 세조의 호불 정책에 대해 불만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은 세조실록 세조 4년(1458년) 9월 17일에 실려 있다.
세조 말년에는 세조를 '태상(상왕)'이라고 불렀다가 분노를 사기도 했으며 신하들도 이번에는 정인지를 벌하자고 간언했으나 세조는 "원래 그 영감탱이가 그랬는데 뭘 새삼스레 그러냐"며 넘어갔다. 그야말로 술자리 말실수 종결자인 셈. 이런 실수에도 불구하고 83세까지 장수했다.
그래도 저 막말 사건을 일으키기 2년 전만 해도 세조의 비위를 잘 맞추는 신하였다. 1456년 9월 19일의 <세조실록>을 보면 어느 날 세조가 정인지에게 "정승은 어진 사람을 발굴해 내는 직책인데 나는 사람을 알아보는 재주가 별로 없어. 경은 신숙주처럼 뛰어난 인재를 찾아서 천거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다. 그러자 정인지는 자리를 피하며 이렇게 말했다. "신은 원래 용렬하고 어두워서 사람 보는 재주가 없습니다. 옛날 사람이 '사람을 잘 알아보는 것을 두고 철(哲)이라 한다'고 말했으니 사람 잘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세조 왈, "내가 신숙주의 어짊을 알아보고 뽑아 써서 이렇게 되었으니 나는 사람을 알아보는 밝음(哲)이 있다 하겠다" 첫 질문부터 '난 신숙주를 뽑았는데 사람 발굴하는 정승인 너는 신숙주 정도의 인재를 뽑을 수 있겠는가?' 이라는 속뜻이 담겨 있는 바 겸손은 없었다. 그런데 세조 성격이 원래 이랬다.
물론 세조는 칭찬을 많이 해서 한명회 보고는 "내가 뭐, (계유정난에서) 한게 있나 다 이사람이 했지" 라고 말했고 양성지에게는 "그대는 나의 제갈량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조는 칭찬만큼이나 자기 자랑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봄에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5할 이상의 이자를 덧붙여 받는 장리(長利)로 부를 축적했는데 일국의 재상이 백성들을 상대로 고리대 놀이를 한 셈. 이 때문에 말년에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한다.
성종실록 89권, 9년(1478년 무술) 14년) 2월 19일 임자 1번째 기사.
掌令朴叔達啓曰:今以鄭麟趾爲三老, 麟趾起自寒微,專以殖貨致富. 古云:‘爲富不仁. 麟趾豈無緣致富乎? 三老將以爲王師, 如此人其可爲耶? 成均館儒生聞以麟趾爲三老, 群議藉藉, 欲上疏論之.
이에 대한 정인지의 변명은 장리는 했으나 부는 축적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같은 권, 9년(1478년 무술) 14년) 2월 21일 갑인 5번째 기사. >河城府院君鄭顯祖將其父麟趾封章來啓曰:“臣父欲詣闕親啓,只緣行步之難,使臣啓之.父云:‘近聞上欲行拜老之禮,未知某爲三老,今聞以臣備數.臺諫論臣殖貨 臣雖不殖貨,素乏才德,豈望三老之列?臣之長利則有矣,然殖貨豈長利云乎哉?臺諫必有別樣所聞而言之矣,請問其實,使臣曝白.’”
하성 부원군(河城府院君) 정현조(鄭顯祖)가 그 아버지 정인지의 봉장(封章)(상소)) 을 가지고 와서 아뢰기를,
"신의 아비가 대궐에 나아가 친히 아뢰고자 하였으나, 행보가 어려우므로 신으로 하여금 아뢰게 하였습니다. 아비가 말하기를, ‘근래에 성상께서 배로의 예(禮)를 행하고자 하신다고 들었으나, 누가 삼로(三老)가 되는지는 알지 못하였었는데, 이제 신을 그 수(數)에 갖춘다고 들었습니다. 대간(臺諫)에서 신이 재산을 불리었다고 논하는데, 신이 비록 재산을 불리지 않았더라도 본래 재주와 덕이 없으니, 어찌 삼로에 끼기를 바라겠습니까? 신의 장리(長利)는 있었으나, 재산을 불렸다는 것이 어찌 장리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대간은 반드시 달리 들은 바가 있어서 말하는 것일터이니, 청컨대 그 사실을 물으시어 신으로 하여금 밝히게 하여 주소서.’ 하였습니다."
조선의 4대 부호는 윤사로, 윤사윤(둘은 세조의 처남), 박종우, 정인지를 이르는데 이 사람들 모두 동시대에 치부로 이름이 높았던 인물들이다.
70세가 되던 해 은퇴를 청했지만 세조가 윤허하지 않고 궤장을 내려 주었으며 예종 시대에는 남이의 옥사로 인해 정난공신에 책봉되었고 성종 때에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의 위호를 받았다가 1478년 향년 83세로 사망했다. 시호는 문성(文成)인데 '도덕이 높고 견문이 넓음(道德博聞)'이 문(文)의 의미이고 '임금을 도와 끝맺음이 있음(佐相克終)'이 성(成)의 의미라고 한다. <성종실록>에서 정인지의 사망 기사 뒤에 붙어있는 사관의 논평은 다음과 같다.
사관은 말한다. “정인지는 성품이 검소하여 자신의 생활도 매우 박하게 하였다. 그러나 재산 늘리기를 좋아하여 여러 만석(萬石)이 되었다. 그래도 전원(田園)을 널리 차지했으며, 심지어는 이웃에 사는 사람의 것까지 많이 점유하였으므로, 당시의 의논이 이를 그르다고 하였다. 그의 아들 정숭조는 아비의 그늘을 바탕으로 벼슬이 재상(宰相)에 이르렀으며, 그 재물을 늘림도 그의 아비보다 더하였다."
(史臣曰: 麟趾性儉素, 自奉甚薄.然喜營産,家累巨萬而猶廣置田園,至於隣近人居亦多侵占,時議非之.其子崇祖席父蔭, 位至宰相, 其殖貨勝於乃父)
- 성종 실록 98권, 9년(1478년 무술) 11월 26일 계미 1번째 기사)
첫 부인 한양 조씨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낳았고, 사별 후 경주 이씨와 재혼하여 4남을 더 낳았다.
- 3남 정숭조(鄭崇祖, 1442 ~ 1503)
- 4남 정경조(鄭敬祖, 1455 ~ 1498) 세종과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세종왕자 계양군의 차녀이자 한확의 외손녀로 인수대비한씨의 질녀가 되는 이씨와 혼인. 후배는 이계손의 딸이다.
- 야사에 따르면 소싯적에 용모가 수려하였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가난하게 사는 중에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밤을 새워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옆집의 처녀가 정인지의 글 읽는 모습과 목소리에 반하여 남녀가 유별한 조선 시대에 혈혈단신으로 한밤 중에 담을 넘어 글을 읽는 정인지의 방문을 열고 과감하게 프로포즈를 했다고 한다. 이 처녀 역시 용색이 절륜했다고 하는데 정인지는 이를 과감하게 물리쳤고 낡이 밝는 대로 어머니께 청해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그 처녀는 상사병으로 죽었다고 하는데 정인지 역시 이 비극을 두고두고 슬퍼했다고 한다. 더 관심이 있는 독자는 여기나 여기를 보자.
- 애주가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아기들이 젖으로 생명을 키워 나가듯 막걸리 역시 노인의 젖줄"이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상술했듯이 술만 마시면 말실수를 밥 먹듯이 하는 바람에 여러 번 죽을 뻔했다(...). 그나마 술자리에서의 실수에는 관대한 세조라 넘어갔지만...
- 조선에 사신으로 온 명나라의 학자 예겸은 정인지를 두고 "그대와 하룻밤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글 공부 10년하는 것보다 낫다"고 높이 평가했다. 실제로 서울대 국사학과 문중양 교수는 세종 시대 최고 과학자로 이순지, 이천과 함께 정인지를 꼽았다.
- 생원시(태종 11년 갑오식년문과)와 중시(세종 9년), 두번의 과거시험에서 모두 장원급제한 인물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과거시험 모범답안 모음집인 '동국장원책'에는 정인지의 답안이 두편이나 실려있다.#
-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배우 박웅이 연기했다. 자타를 가리지 않고 디스를 날려대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 만큼 냉소적인 독설가의 면모를 보인다. 성삼문 등 집현전 출신의 젊은 관료들이 세조에 대해 반발하는 태도를 보이자 "선비는 정치를 하면 안 된다"고 일갈. 성삼문이 "당신도 집현전 출신 아니냐"고 반발하자 딱잘라 "그러니 나처럼 되지 말라는 것"이라며 "선비는 공부를 해야지 정치는 (자신처럼 타락한) 정치인들이 하는 것이며 선비가 정치를 하면 몸을 망친다" 는 식으로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좌중의 전원을 디스해버린다. 이는 사육신의 최후를 떠올리게 하는 발언인 셈이다. 다만 단종 사사에 대해서 망설이는 등 어느 정도 양심적인 면도 나온다.
- 2008년 KBS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배우 이진우가 연기했다. 전반적으로 냉정하고 냉철한 캐릭터로 묘사되었지만 실제 인물이 조금 덜렁대는 사람인 것을 감안해서 중간중간에 말실수나 삽질을 하는 부분도 있다. 처음에는 세종과 조금 마찰이 있었으나 이내 그 뜻을 인정하면서 세종을 지지하는 중신으로 자리한다. 마지막 회에서 <훈민정음> 어제서문을 낭독하는 것도 바로 정인지. 실제로 정인지가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할 당시 최만리를 주축으로 한 집현전 학자들의 반발의 반대편에서 <훈민정음>의 반포를 적극 옹호하였던 점, 실제로 <훈민정음>의 보급 및 원리의 해설에 있어 아주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문을 작성한 사실에 비추어 보면 이러한 묘사는 역사적 사실과 잘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항상 같이 다니는 최만리와 함께 덜렁대는 면이 있으나 자신이 믿는 바를 강직하고 올곧게 밀고 나가는 성격으로 묘사된다.
- [ 극중에서 묘사되는 정인지의 성격 ]
- 작중 조말생을 필두로 한 조정 대신들이 한창 세종에게 반기를 들고 있을 무렵 세종은 이를 타파하고자 태종대에 귀양가있던 황희를 다시 천거 하는데, 이때 조말생과의 조정 안정화[15]협상에서 황희의 서경[16]을 조건으로 걸었고, 사태 수습이후 서경을 위한 자료 수집을 집현전의 변계량, 정인지, 최만리, 김문등이 맡게 된다. 이 과정에서 조말생의 집현전 간자였던 김문이 조말생의 명령을 받고 서경 자료에 황희의 수년전 과거 비리 문서를 슬쩍 끼워넣고 이를 발견한 정인지와 최만리는 패닉에 빠지게 된다[17]. 최만리는 어차피 김문을 포함한 자기 셋 말고는 본 사람이 없으니 함구하자 하였으나 정인지는 이에 대해 답을 아니하고 집현전에 하루종일 쳐박혀있는다. 이후 뭔가 결심한 듯 야밤에 집현전을 박차고 나가는데 이를 본 최만리와 김문의 대화가 정인지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김문: (나가는 정인지를 따라가려 한다.)
최만리: 놔둬.
김문: 나리?
최만리: 우린 할 수 있는거 다 했어.
저렇게 박혀있다가 나왔으면... 이제 누구 말도 안들어.
그게 정인지야.
"어찌 그리 하셨습니까. 우린 다 망했습니다!"
"말본새로 소인을 책하실 처지이시옵니까?"
이 말에 최만리는 "지금 농을 해서 나를 어떻게 해 보겠다는 건가?"라며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질적인 집현전의 수장 노릇은 최만리가 하고 있고 정인지는 주로 이도의 가장 가까이에서 세종의 한글 창제 연구를 보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조말생, 이신적 등 세종의 은밀한 일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 조정 중신들의 추궁을 혼자 받고 사과하는 경우가 많다. 세종의 짓궂은 장난이나 히스테리에 무휼과 함께 곤혹스러워하지만 세종이 내리는 임무들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소이가 처음으로 그 사기적인 능력을 보여주는 회상씬에서 세종과 함께 놀라워하며 "전하, 일이 더 수월해지겠습니다"라며 좋아하다가 세종에게 "학자들 1백 명 있는 것보다 이 아이 하나가 더 낫구나"라며 콤보로 "너는 앞으로 소이 봉록의 백분의 일만 받도록 해라"라는 면박을 듣고 표정이 구겨졌다.
여담으로 위에 언급된 것처럼 배우가 육룡이 나르샤에서 길태미/길선미를 맡았는데 길태미는 무휼과 사제이고[18] 길선미는 사제인 무휼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여기서 무휼이 무술 연습을 하는 것을 보고 흐뭇해하는가 하면 무휼이 하는 이방지의 이야기도 잘 듣고 있다(...). 후속편을 생각하면 개그스러운 장면.
[1] 율리우스력 1월 27일[2] 율리우스력 12월 19일[3] 율리우스력 7월 25일[4] 율리우스력 2월 26일[5] 세종의 차녀 정의공주의 사위.[6] 희빈 홍씨의 외조부.[7] 세조의 장녀 의숙공주의 부마.[8] 세종의 차녀 정의공주의 손녀사위.[9] 그나마도 원래는 사형이었는데 정몽주의 사손이라서 유배로 낮춰진거다.[10] 사헌부 정4품 관직,대체로 백관의 비리,탄핵감찰권을 가지고 있었다.[11] 삼로오경의 삼로로 나이가 많은 신하를 예우하던 제도이다.[12] 구차하고 변변하지 못하다.[13] 재산을 모아 부자가 되다.[14] 부자를 예스럽게 말함[15] 조말생을 위시한 의정부 및 6조수장들의 주도하에 모든 관료가 업무를 중단하고 태업중에 있었다.[16] 지금의 인사청문회 개념[17] 당시 세종은 물론 집현전 학자 모두에게도 황희는 집현전의 존속을 위해서 조정에 꼭 필요한 존재였다.[18] 물론 둘의 친분 따위는 없다. 단 잠깐 칼을 섞었을때 길태미가 무휼에게 자신이 홍대홍 제자였다고 밝히며 열심히 배우라고 격려해준 적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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