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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 제4대 회장 정몽헌 鄭夢憲|Chung Mong-hu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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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9월 14일,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정주영과 변중석의 5남으로 태어났다.[5]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문과대학에 입학해 국어국문학과 학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당시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원래는 문학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가업을 잇길 바랬던 정주영의 뜻에 따라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미국 페어레이디킨스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각각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6년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한 현정은과 결혼하였다.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현대그룹의 경영에 뛰어들어 1981년 현대상선 대표이사, 1992년 현대전자 대표이사를 지냈다. 아버지의 정치자금 문제로 이 시기에 검찰조사를 받으며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98년 현대그룹 해외담당 회장이 되면서 아버지의 뜻을 이어 대북사업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외환위기로 인한 현대그룹 전체의 경영 위기, 결정적으로 2000년 둘째 형 정몽구와의 왕자의 난 이후 현대그룹 해외담당 회장직은 사퇴하고 현대아산 이사회 의장, 회장을 지냈다. 이 과정에서 하필 물려받기로 한 현대건설, 엔지니어링 등은 이라크 공사대금 문제와 엄청난 손실을 덮었던것이 드러나 와해되고, LG반도체와의 빅딜로 몸집을 키운 현대반도체와 현대전자 또한 나름대로 괜찮은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단기 유동성 위기를 넘기지 못해 정몽헌 회장이 넘겨받은 회사의 8할 이상이 날아가는 초유의 악재를 맞았다. 그리고 현대그룹은 급격히 쇠락했으며 이때 사재를 모두 털었기에 죽기 전까지 자금난에 시달렸으며, 자택을 제외하고는 사재도 사실상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더불어 대북사업에 대한 의지가 가장 강했던 자녀였으며, 이 때문에 정주영의 많은 총애를 받았다.[6] 2000년 왕자의 난에서 최종 승리자가 되며, 정주영이 승인한 정식 후계자가 된다. 2001년 정주영의 사망 이후 본격적으로 현대그룹의 최고 경영권자가 된 그는 대북사업에 엄청난 여력을 다했다. 2002년 정몽헌은 북한과 금강산 육로관광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여 이듬 해 2월 동해선 육로 시범운행을 실시하였다. 다만 본격적인 관광은 정몽헌 사후 1달 뒤인 9월부터 시작되었다.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현대그룹의 경영에 뛰어들어 1981년 현대상선 대표이사, 1992년 현대전자 대표이사를 지냈다. 아버지의 정치자금 문제로 이 시기에 검찰조사를 받으며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98년 현대그룹 해외담당 회장이 되면서 아버지의 뜻을 이어 대북사업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외환위기로 인한 현대그룹 전체의 경영 위기, 결정적으로 2000년 둘째 형 정몽구와의 왕자의 난 이후 현대그룹 해외담당 회장직은 사퇴하고 현대아산 이사회 의장, 회장을 지냈다. 이 과정에서 하필 물려받기로 한 현대건설, 엔지니어링 등은 이라크 공사대금 문제와 엄청난 손실을 덮었던것이 드러나 와해되고, LG반도체와의 빅딜로 몸집을 키운 현대반도체와 현대전자 또한 나름대로 괜찮은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단기 유동성 위기를 넘기지 못해 정몽헌 회장이 넘겨받은 회사의 8할 이상이 날아가는 초유의 악재를 맞았다. 그리고 현대그룹은 급격히 쇠락했으며 이때 사재를 모두 털었기에 죽기 전까지 자금난에 시달렸으며, 자택을 제외하고는 사재도 사실상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더불어 대북사업에 대한 의지가 가장 강했던 자녀였으며, 이 때문에 정주영의 많은 총애를 받았다.[6] 2000년 왕자의 난에서 최종 승리자가 되며, 정주영이 승인한 정식 후계자가 된다. 2001년 정주영의 사망 이후 본격적으로 현대그룹의 최고 경영권자가 된 그는 대북사업에 엄청난 여력을 다했다. 2002년 정몽헌은 북한과 금강산 육로관광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여 이듬 해 2월 동해선 육로 시범운행을 실시하였다. 다만 본격적인 관광은 정몽헌 사후 1달 뒤인 9월부터 시작되었다.
2003년 7월 27일, 공식석상에서의 마지막 모습 |
2003년 불법 대북송금 사건과 관련해서 검찰의 조사를 받다가 그 해 8월 4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현대그룹 사옥에서 "유분을 금강산에 뿌려달라, 김윤규 등 가신들과 가족, 친인척들에게 미안하다." 등의 내용이 담긴 유서를 남긴 후 12층 회장실에서 투신자살하였다. 한때는 여러 의문점들 때문에 타살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경찰 조사 결과 자살로 밝혀졌다. 시신 수습 및 장례는 그의 둘째 형인 정몽구, 숙부 정세영, 조카 정의선과 김윤규 등 그의 가신들이 맡았다.[7]기사 장례식 당시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에서 조전을 보냈으며, 북한 강원도 금강산관광지구에서 분향소가 열리기도 하였다. 그의 사후 아내 현정은이 현대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다.
자세한 내용은 범현대가 문서 참고하십시오.
- 유난히 축빠가 많은 현대가(家)에서[8] 동생 정몽윤 현대해상 회장과 함께 야빠였다.[9] 현대 유니콘스도 정몽헌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던 덕에[10] 팀 성적이 매우 좋았었다.[11] 당장 해태 이후 KBO 역사상 두 번째로 왕조 소리를 들었던 팀이 바로 현대 유니콘스다. 하지만 그의 사망 이후 구단주를 잃은 현대 유니콘스는 비참한 말로를 겪고 만다. 구단의 모기업인 하이닉스반도체의 경영난이 심해지면서 하이닉스와 범현대가 형제 기업들의 구단 운영 지원이 끊어졌고[12] 서울특별시 연고지 입성을 위해 기존 서울 연고 구단에 줬어야 할 연고지 이전 비용 54억원을 모기업 하이닉스(舊 현대전자)가 가로챘으며[13] 26년간 적립해 온 KBO의 야구발전기금마저도 홀라당 써버리는 난리통 끝에 결국 해체되었다.
- 현대엘리베이터 이천공장 안에 있는 테스트타워인 현대아산타워 안에 자신의 이름을 딴 정몽헌 R&D센터가 있다.
[1] 음력 1948년 8월 12일[2] 지예부사공파(知禮部事公派) 25세손 상(相)○, ○채(采), ○문(文), ○림(林) 항렬이나 이를 따르지 않고 범현대가만의 돌림자를 사용하였다.[3] 68학번으로, 수석 입학하였다.[4] 석사 학위 논문: 上場法人의 收益性이 株價에 미치는 영향에 關한 硏究 : 鐵鋼會社를 中心으로(1980)[5] 정몽구부터 정몽헌까지 5명의 자녀들은 변중석이 낳았으며, 6남 정몽준부터 나머지 자식들은 생모가 따로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다만 변중석은 자신이 낳지 않은 의붓자녀들도 친자식처럼 양육하였고, 때문에 9명의 자식들 모두 변중석을 친어머니로 여기고 성장하였다.[6] 정주영은 자신과 외모와 성격도 꼭 닮고, 영어 실력도 좋은데다 자신이 가보지 못한 명문대학교를 졸업한 정몽헌을 생전 매우 극진히 여겼다고 한다.[7] 정몽헌의 장남인 정영선이 85년생으로 당시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큰형인 정몽구와 장조카인 정의선이 상주노릇을 도맡았다고 한다. 비록 말년에 후계 분쟁과 계열분리 등으로 갈등을 일으켰지만 형제간의 우애는 끝까지 지켰던 모양인지 검찰 조사를 받을 때 탄원서를 써줬던 것도, 사망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달려와서 시신 수습을 했던 것도 큰형인 정몽구였다고 한다.[8] 바로 아랫동생인 정몽준은 대한축구협회 회장과 국제축구연맹 부회장을 지낸 축구계 거물이고 사촌동생인 정몽규는 사촌형에 이어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됐을 정도로 현대가는 축구와 인연이 깊다. 아버지 정주영도 현대중공업 사내 축구대회에 직접 출전할 정도로 축구를 좋아했지만 원래 씨름을 제일 좋아했고 농구와 배구에도 관심이 많아서 현대 남자 농구단과 현대 여자 배구단 창단에도 관여하는 등 스포츠 전 종목에 큰 관심을 보였다. 아울러 대한체육회 회장을 맡으면서 1988 서울 올림픽 유치에도 공을 쌓았다. 다만 유니콘스 야구단이 창단될 시절에는 기력이 쇠하기 시작한 인생 말년이었다.[9] 정몽윤 회장은 범현대가 기업들이 현대 유니콘스에 대한 지원을 하나둘씩 끊었을 때도 헬멧, 유니폼, 그리고 홈 구장에 현대해상 브랜드 광고를 집행하는 방식을 통해 유니콘스 구단을 끝까지 지원했으며, 현대 해체 후 키움 히어로즈(당시에는 우리 히어로즈)로 재창단된 뒤에도 2015년까지 하이카 브랜드를 통해 현대해상이 꾸준히 스폰서를 맡아왔던 이유도 바로 정몽윤 회장 덕분이다. 그러나 이장석의 전횡이 드러나고 스폰서들의 지원비도 빼돌려 쓴 게 알려진 뒤로는 히어로즈에서 손을 뗐고, 2017년부터는 같은 범 현대가인 KIA 타이거즈를 통해 현대해상 브랜드 광고를 집행하고 있다. 이와 별개로 대한야구협회 회장직을 수행하기도 했으며, 2004년까지는 사내 사회인 야구팀 1루수로 직접 뛸 정도로 야구에 대한 사랑이 엄청나다. 한국실업야구팀이었던 현대해상 야구단이 실업야구리그가 해체되기 직전까지 운영한 것도 정몽윤의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10] 인천고를 막 졸업한 대형 유격수 박진만과 해태 타이거즈 지명을 받았던 연세대학교 출신 내야수(당시 포지션) 박재홍을 데려오는 과정에서 거액이 동원됐다. 두 사람에게 쥐어준 신인 계약금 총액만 해도 7억 1000만 원인데 박진만에게 지불한 신인 계약금 2억 8000만 원은 당시 고졸 야수 역대 최고 대우 수준이었다. 물론 이 당시 현대그룹의 재력이 삼성그룹과 대등했을 정도로 빵빵하기도 했지만, 야구단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투자가 이뤄질 리 없었다.[11] 구단이 서울로 연고지를 옮기려다 실패해서 수원을 임시 연고지로 삼은 2000년부터는 비인기 구단으로 전락하고 만다.[12] 적어도 2005년까지는 십시일반 형태로 현대자동차, 현대백화점 등 범현대가 형제 기업들이 조금씩 지원해줬지만, 2006년부터는 지원을 아예 끊어버렸다. 더 심각한 것은 정몽헌의 부인인 현정은이 2005년을 끝으로 아예 구단 운영 지원을 끊어버렸다는 것이다. 생전에 남편이 열렬한 야구팬이었고, 남편이 유니콘스 구단 운영에 열정을 바쳤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상당한 아이러니다.[13] 2000년 창단한 SK 와이번스가 인천 연고권을 취득하는 조건으로 현대 유니콘스에 54억원을 줬고 현대는 그 54억원을 반으로 쪼개 서울 연고권 분할에 대한 권리 보상 목적으로 LG와 두산에 주기로 했으나, 하이닉스가 이 돈을 가로채면서 서울 연고 입성에 실패하고 만다. 결국 이 때문에 유니콘스 구단은 사실상 무연고 취급받으며 2003년부터 구단이 해체될 때까지 연고지 출신 1차 지명 신인을 뽑지 못하게 된다. 더군다나 현대 유니콘스의 최대주주인 하이닉스는 사명을 바꾼 2001년 이후 해체될 때까지 6년간 지원금을 한 푼도 주지 않고 구단이 해체될 때까지 사실상 방치하다시피 했다. 이 덕분에 현대 시절부터 응원해온 히어로즈 올드팬들 사이에서는 현재까지 하이닉스와 현정은 회장에 대한 이미지가 상당히 나쁜 편이다.[14] 여담으로 정몽준, 정몽헌과 정반대였던 인물이 정몽준, 정몽헌의 둘째형이자 큰형인 정몽필이 사망한 이후 사실상 장남이었던 정몽구였는데 고등학교 때 럭비부 선수로 뛸 만큼 운동을 좋아했었고 대학도 공대를 선택할 정도로 마초적인 스타일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정주영이 정몽구를 밖으로만 싸돌아다닌다며 아주 엄하게 대했다. 그래서 정몽구는 형 정몽필이 사망하기 전까지 정주영에게 인정하지 못했으며, 직접 현장에서 실적을 보이고서야 비로소 어렵사리 정주영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다.[15] 실제로 정몽구는 사석에서 정몽헌을 "우리 막내"라고 칭했다고 한다.[16] 이 때문에 정주영이 정몽헌을 많이 아꼈었다고 하며 갈등을 겪었던 정몽구 역시 사석에서는 계속 "우리 막내"라고 부르며 아꼈었다고 한다.[17] 2011년 OBS의 토크쇼에 출연해 정몽헌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잠시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였다.[18] 일단 정주영 본인은 장남인 정몽필, 막내인 정몽일만 변중석 여사의 소생이 아니라고 했다. 다만 정몽준이나 정몽윤은 변 여사의 소생이 아니라고 기정사실화되고 있다.[19] 장년기 이후의 이야기가 담긴 2부가 조기 종영되면서 길게 출연하지는 못했다. 1회와 2회에 나온 것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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