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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에 의해서 상제왕(上齊王)에 봉해지고 제나라의 북쪽을 다스리게 되었다. 한신(韓信)이 군대를 이끌고 기원전 204년 제를 공격했을때, 임치성을 방어하지 못하고 자신은 박양성으로, 제왕 전광은 고밀성으로 도피했다. 전횡은 전광이 죽었다는 소식에 스스로 제나라 왕이 되어 관영을 공격했다. 그러나 영(嬴)땅에서 관영에게 패배하고 양나라로 도망가서 팽월에게 귀순한다.
1년 뒤, 유방이 항우를 죽이고 황제에 올라 팽월을 양나라 왕으로 삼았다. 전횡은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자신의 수하 500여 명과 함께 바다 건너 등주의 해도라는 섬으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이 섬의 이름이 오호도(嗚呼島)였다고도 한다.
유방은 이들 삼형제가 번갈아 왕이 되었던 전적이 있어서 반란의 구심이 될까 봐 우려하여 사신을 보내 "지금이라도 나오면 죄를 면해 주고 제후로 삼아 줄 테니 입궐하라. 끝까지 싸우겠다면 병력을 보내 몰살시켜 버리겠다"고 최후통첩을 한다. 전횡은 유방의 사자에게 자신이 역이기를 죽였는데 어떻게 그의 동생과 한 줄에 서겠냐며 그냥 섬에 은둔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지만, 유방은 역이기의 동생에게 "허튼 짓을 하면 멸족하겠다"고 협박하고 전횡에게 "그에게는 내가 당부를 해 놨으니 걱정 말고 오라"고 하였다.
이를 받아들여 한나라 수도 근처까지 온 전횡은 자신을 보좌하던 부하 두 명에게
1년 뒤, 유방이 항우를 죽이고 황제에 올라 팽월을 양나라 왕으로 삼았다. 전횡은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자신의 수하 500여 명과 함께 바다 건너 등주의 해도라는 섬으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이 섬의 이름이 오호도(嗚呼島)였다고도 한다.
유방은 이들 삼형제가 번갈아 왕이 되었던 전적이 있어서 반란의 구심이 될까 봐 우려하여 사신을 보내 "지금이라도 나오면 죄를 면해 주고 제후로 삼아 줄 테니 입궐하라. 끝까지 싸우겠다면 병력을 보내 몰살시켜 버리겠다"고 최후통첩을 한다. 전횡은 유방의 사자에게 자신이 역이기를 죽였는데 어떻게 그의 동생과 한 줄에 서겠냐며 그냥 섬에 은둔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지만, 유방은 역이기의 동생에게 "허튼 짓을 하면 멸족하겠다"고 협박하고 전횡에게 "그에게는 내가 당부를 해 놨으니 걱정 말고 오라"고 하였다.
이를 받아들여 한나라 수도 근처까지 온 전횡은 자신을 보좌하던 부하 두 명에게
"옛날 나와 한왕(유방)은 함께 남면하는 왕이었는데 이제 한왕은 천자가 되고 나는 그의 신하가 된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움이 심하다. 그리고 나는 역이기를 죽였는데 한왕이 당부했다 한들 그 동생과 한 줄에 서는 것은 맞지 않다. 한왕이 나를 오게 하는 것은 그저 내가 어떻게 생겼나 궁금하기 때문이다. 여기라면 함양까지 가는데 썩지는 않겠지."
하고는 그 자리에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부하들은 전횡의 명령에 따라 그의 머리를 가지고 유방을 알현했고, 유방은 놀라고 또 슬퍼하며 왕의 예로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 주게 명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전횡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더니, 부하 두 사람은 전횡의 시신 옆에 굴을 파고 자결해 있었고, 섬에 남아있던 나머지 부하들도 전횡의 죽음을 듣고 모두 자결해 있었더란다. 유방은 전횡의 형제를 "한낱 평민에서 몸을 일으켜 삼형제가 번갈아 왕위에 오르다니 비범한 자들이다."라고 평했다.
이런 설도 있다. 제왕 전광이 고밀성에서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자 한군이 박양성으로 밀어닥쳤는데, 전횡은 성을 버리고 등주의 영성으로 도피했으나 쫓아온 한장 관영에게 죽음을 당했다 한다.
의외로 한국에 전횡과 관련된 흥미로운 설화가 남아있는데 전횡이 자결하지 않고 500명의 무리를 이끌고 서해안을 거쳐 한반도로 망명했다는 설화다.서해의 신이 된 중국 장군 전횡(田橫)
설화 내용은 이렇다. BC 202년경 한 고조가 초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한 후 항우가 자결하자 전횡이 군사 500명을 거느리고 망명길에 올랐다. 일행은 돛단배를 이용하여 서해를 목적지 없이 떠다니던 중 중국을 떠난 지 3개월만에 어청도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날은 쾌청한 날씨였으나 바다 위에 안개가 끼어 있었는데 갑자기 푸른 산 하나가 우뚝 나타났다고 한다. 전횡은 이곳에 배를 멈추도록 명령하고 푸를 청(靑)자를 따서 어청도(於靑島)라 이름지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전라북도 군산 어청도에 전횡의 사당인 치동묘가 존재한다. 충청남도 보령시 외연도에도 전횡과 그 부인, 딸을 신으로 모신 사당이 있으며, 매년 음력 2월 14일에 풍어(豊魚)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린다. 현재는 어청도 쪽 동제는 전승이 끊겼고, 외연도 쪽에만 전횡에 대한 동제를 올리는 전승이 남아 있다고 한다.
외연도의 전횡장군제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당제에 쓸 제물을 사러 가는 장배가 떠나면 어청도 쪽으로 마파람이 불고, 당제를 모두 마치고 나면 하늬바람이 부는데, 전횡의 두 동생이 마파람을 타고 남쪽에서 왔다가, 제향을 흠향하고 나면 다시 하늬바람을 타고 어청도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어청도 당산신을 전횡의 두 동생으로 표현한 것으로, 외연도 쪽이 어청도 쪽보다 신의 격이 높았음을 암시한다.
그동안은 단순 설화 정도로 정도로 봤으나 최근 들어서는 전횡의 망명 설화와 엮어 중원에서 요동을 거치지 않고 제나라 유민들을 통해 산둥반도에서 바로 한반도 남부로 제철 기술이 전파되는 과정을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진행 중이다.‘아이언 로드, 철기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문헌과 고고학으로 본 전북가야>(호남고고학보 특집호), 호남고고학회, 2020
설화 내용은 이렇다. BC 202년경 한 고조가 초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한 후 항우가 자결하자 전횡이 군사 500명을 거느리고 망명길에 올랐다. 일행은 돛단배를 이용하여 서해를 목적지 없이 떠다니던 중 중국을 떠난 지 3개월만에 어청도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날은 쾌청한 날씨였으나 바다 위에 안개가 끼어 있었는데 갑자기 푸른 산 하나가 우뚝 나타났다고 한다. 전횡은 이곳에 배를 멈추도록 명령하고 푸를 청(靑)자를 따서 어청도(於靑島)라 이름지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전라북도 군산 어청도에 전횡의 사당인 치동묘가 존재한다. 충청남도 보령시 외연도에도 전횡과 그 부인, 딸을 신으로 모신 사당이 있으며, 매년 음력 2월 14일에 풍어(豊魚)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린다. 현재는 어청도 쪽 동제는 전승이 끊겼고, 외연도 쪽에만 전횡에 대한 동제를 올리는 전승이 남아 있다고 한다.
외연도의 전횡장군제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당제에 쓸 제물을 사러 가는 장배가 떠나면 어청도 쪽으로 마파람이 불고, 당제를 모두 마치고 나면 하늬바람이 부는데, 전횡의 두 동생이 마파람을 타고 남쪽에서 왔다가, 제향을 흠향하고 나면 다시 하늬바람을 타고 어청도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어청도 당산신을 전횡의 두 동생으로 표현한 것으로, 외연도 쪽이 어청도 쪽보다 신의 격이 높았음을 암시한다.
그동안은 단순 설화 정도로 정도로 봤으나 최근 들어서는 전횡의 망명 설화와 엮어 중원에서 요동을 거치지 않고 제나라 유민들을 통해 산둥반도에서 바로 한반도 남부로 제철 기술이 전파되는 과정을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진행 중이다.‘아이언 로드, 철기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문헌과 고고학으로 본 전북가야>(호남고고학보 특집호), 호남고고학회, 2020
설화에 따른 전횡 망명 지도 # |
특히 서해안과 인접한 전북 완주 상림리에서 기원전 3세기 무렵으로 추정되는 초기 철기 시대 중원계 동검이 무더기로 발견됐는데, 형태나 기법상으로 보아 중국식 동검 중에서도 제나라계 동검으로 추정하고 있다.
거푸집이나 재료 모두 한반도에서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중국에서 만들어져서 교역한 물품이 아니라 동검 제작 기술을 가진 제나라 유민이 한반도로 망명와서 제작한 게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완주 상림리 유적으로 본 동아시아 동검문화의 교류와 전개 - 東周式劍의 매납과 청동기 장인의 이주를 중심으로
중국 학계에서도 해당 중국계 동검이 제나라 유민들을 통해 만들어진 제나라식 동검으로 보이며 전횡 혹은 그를 추종했던 제나라 유력자의 한국 망명설에 대한 가능성 역시 어느정도 열어두고 상황이다.#
二十餘年而陳·項起,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
(진(秦)나라의 통일 이후) 20여 년 후 진승과 항우가 일어나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燕) · 제(齊) · 조(趙)의 백성들이 근심하고 괴로워하여 점점 준에게 망명하여 갔는데 준은 이에 그들을 서쪽에 두었다.
실제로 6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12년만에 죽은(기원전 210) 사망해버리고 진(秦)나라는 얼마 못가 멸망하고 초한전쟁이 일어나 중원이 다시 혼란해지니 기원전 3세기를 기점으로로 제(齊)나라를 포함한 한반도와 인접한 중원계 유민들이 한반도로 대거 망명한다. 전횡이 죽었다고 전해지는 시기도(기원전 202) 이때와 겹친다.
아직까지는 근거가 더 필요한 하나의 가설일 뿐이지만 당시 동검 제작 기술은 최고급 기술이었고 지배계급이 아니면 이런 동검 기술자들을 데리고 다닐 수 없었을 다는 것을 감안해 보면 상림리 유적지에서 발견 된 기원전 3세기 제나라계 동검과 어청도에 전해지는 제나라 왕제인 전횡의 한반도 망명 설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3]
이외에도 압록강 하구에 있는 비단섬[4]에는 일제강점기 시기인 1932년 9월 17일, 동아일보 기사에서 전횡의 무덤이 남아있다는 전설이 보도되었다.출처
아직까지는 근거가 더 필요한 하나의 가설일 뿐이지만 당시 동검 제작 기술은 최고급 기술이었고 지배계급이 아니면 이런 동검 기술자들을 데리고 다닐 수 없었을 다는 것을 감안해 보면 상림리 유적지에서 발견 된 기원전 3세기 제나라계 동검과 어청도에 전해지는 제나라 왕제인 전횡의 한반도 망명 설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3]
이외에도 압록강 하구에 있는 비단섬[4]에는 일제강점기 시기인 1932년 9월 17일, 동아일보 기사에서 전횡의 무덤이 남아있다는 전설이 보도되었다.출처
[1] 마음 이름부터가 주검을 의미하고있다.[2] 낙양에서 30리쯤 떨어진 곳이라고 한다. [3] 다만 이게 기자동래설과 같이 중국 쪽에서 신문물을 가진 중국인 지배자가 와서 한반도 토착민을 지배했다는 식으로 흘러갈 수 있는 민감한 부분이기 때문에 근거 부족과 별개로 연구 자체가 진척되기 좋은 주제는 아니다. 게다가 전횡이 전북 일대로 건너왔다고 알려진 비슷한 시기에 고조선 준왕 역시 전북 일대로 망명하기 때문에 한반도 남부 초기 철기시대를 꽃피운 전북 완주 갈동 유적과 겹치는 부분도 있어서 상당히 복잡해진다. 따라서 전북 완주 상림리 유물들 처럼 어쩌다 증거가 발견되는 게 아니고서야 굳이 파헤쳐 중국 쪽에 유리한 명분을 만들어 줄 이유가 없는 게 현실이다.[4] 북한의 행정구역으론 평안북도 신도군에 소속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행정구역상 용천군 신도면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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