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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오나라의 문관이며 자는 숙사(叔嗣)로 장소의 3남, 장승의 동생. 위키백과에서 서주 팽성국 출신으로 서술되었지만 이는 본관으로 장휴의 기록된 나이에 대한 추측된 년도(205? ~ 245?)과 아버지인 장소가 황건적의 난 시기 때 강남으로 이주된 상태에 장휴가 태어난 시기에는 서주를 조조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서주 팽성국 출신은 아니다.양주에 있는 장소가 서주까지 가버리는 원정 출산도 아니고
장소가 상당히 늦은 나이에 장휴를 낳았는지, 41세에 죽었는데 정확한 생년은 알 수 없지만(201~205년 추정) 아버지인 장소(생년 157)와 형 장승(생년 178)간의 나이 차보다 형제 간의 나이 차이가 더 크다. 같은 동오사우인 고담의 할아버지 고옹과 장휴의 형 장승과의 나이차는 고작 10살이다.
장소가 상당히 늦은 나이에 장휴를 낳았는지, 41세에 죽었는데 정확한 생년은 알 수 없지만(201~205년 추정) 아버지인 장소(생년 157)와 형 장승(생년 178)간의 나이 차보다 형제 간의 나이 차이가 더 크다. 같은 동오사우인 고담의 할아버지 고옹과 장휴의 형 장승과의 나이차는 고작 10살이다.
221년, 손등을 세워 손오의 태자로 삼을 때 사부를 선정해 우수한 인재를 선정해서 그의 빈객과 친구가 되도록 했는데, 이 때 제갈각, 고담, 진표와 함께 태자 손등을 모시면서 사서를 학습하게 했다. 말타기와 활쏘기를 함께 하게 하면서 도리나 육예에 관해 강론해 나란히 태자의 빈우가 되는데, 손권은 손등에게 한서를 숙지하도록 명하자 장휴가 장소에게 한서를 배워 손등에게 전했다.
장휴가 수업할 때는 문의를 지적하고 사물을 분별하되 조장이 있었으며, 매번 연회 자리에 참석할 때 술이 무르익으면 음악을 지었다. 손등도 번번이 자신을 낮추어 같이 음악을 즐거워했는데, 장휴의 사람됨이 남들보다 해박하고 통달해 손등이 그를 심히 사랑해 항상 좌우에 두어 같은 수레를 타고 같은 침대에서 잘 정도로 친했다.
손권이 사냥을 나갔을 때 장휴가 상소를 올려 경계하는 간언을 하자 손권이 이 글을 좋아해 장소에게도 보여주었을 정도이며, 229년에 손권이 황제를 칭하자 장휴를 우필로 삼아 제갈각, 고담, 진표와 함께 사우(四友)라 칭하게 된다.
241년, 손등이 33세의 나이로 요절했는데, 죽기 직전에 이 사우들을 칭찬하면서 중용할 것을 권해 그의 유언에 따라 시중, 우림도독이 되어 양무장군으로 승진한다.
241년, 고담의 아우 고승과 함께 수춘을 정벌하러 갔다가 전종이 왕릉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위나라의 군대가 승세를 타 오영장과 진황의 군대를 격파하자 고승과 함께 분전해 위군을 멈추게 했으며, 이를 보고 전서와 전단 등이 공격하자 왕릉의 군대가 물러났다. 당시 논공행상을 할 때 적을 멈추게 한 것이 적을 퇴각시킨 것보다 큰 공이라 여겨 전서와 전단이 편장군과 비장군이 될 때 장휴와 고승은 잡호장군이 되었는데, 권력 다툼으로 사이가 나빴던 손패파인 전종 일족과 손화파인 장소 일족의 사이는 이 일로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이궁지쟁 당시 손권이 병으로 눕자 손화가 종묘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손화의 본처 장비(張妃)의 숙부인 장휴가 종묘 근처에 살고 있었으므로 손화는 장휴의 집에 가서 머물게 된다. 손노반은 이 사실을 이용해 태자가 종묘로 가지 않고 아내의 집으로만 가서 놀고 있다고 참소하자 이 일로 손화는 손권의 미움을 사게 된다.
또한 전종 일족이 241년의 작피 전투의 일을 얘기해 장휴, 고승이 진순과 내통해 거짓으로 그 공훈을 늘렸다고 하자 장휴는 고승과 함께 교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으며, 아첨과 위선으로 음흉한 짓을 꾸며서 장휴가 영 싫어하던 손홍이라는 자도 장휴를 참소하자 조서를 내려 결국 장휴는 41세의 나이로 죽는다.
장휴가 수업할 때는 문의를 지적하고 사물을 분별하되 조장이 있었으며, 매번 연회 자리에 참석할 때 술이 무르익으면 음악을 지었다. 손등도 번번이 자신을 낮추어 같이 음악을 즐거워했는데, 장휴의 사람됨이 남들보다 해박하고 통달해 손등이 그를 심히 사랑해 항상 좌우에 두어 같은 수레를 타고 같은 침대에서 잘 정도로 친했다.
손권이 사냥을 나갔을 때 장휴가 상소를 올려 경계하는 간언을 하자 손권이 이 글을 좋아해 장소에게도 보여주었을 정도이며, 229년에 손권이 황제를 칭하자 장휴를 우필로 삼아 제갈각, 고담, 진표와 함께 사우(四友)라 칭하게 된다.
241년, 손등이 33세의 나이로 요절했는데, 죽기 직전에 이 사우들을 칭찬하면서 중용할 것을 권해 그의 유언에 따라 시중, 우림도독이 되어 양무장군으로 승진한다.
241년, 고담의 아우 고승과 함께 수춘을 정벌하러 갔다가 전종이 왕릉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위나라의 군대가 승세를 타 오영장과 진황의 군대를 격파하자 고승과 함께 분전해 위군을 멈추게 했으며, 이를 보고 전서와 전단 등이 공격하자 왕릉의 군대가 물러났다. 당시 논공행상을 할 때 적을 멈추게 한 것이 적을 퇴각시킨 것보다 큰 공이라 여겨 전서와 전단이 편장군과 비장군이 될 때 장휴와 고승은 잡호장군이 되었는데, 권력 다툼으로 사이가 나빴던 손패파인 전종 일족과 손화파인 장소 일족의 사이는 이 일로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이궁지쟁 당시 손권이 병으로 눕자 손화가 종묘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손화의 본처 장비(張妃)의 숙부인 장휴가 종묘 근처에 살고 있었으므로 손화는 장휴의 집에 가서 머물게 된다. 손노반은 이 사실을 이용해 태자가 종묘로 가지 않고 아내의 집으로만 가서 놀고 있다고 참소하자 이 일로 손화는 손권의 미움을 사게 된다.
또한 전종 일족이 241년의 작피 전투의 일을 얘기해 장휴, 고승이 진순과 내통해 거짓으로 그 공훈을 늘렸다고 하자 장휴는 고승과 함께 교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으며, 아첨과 위선으로 음흉한 짓을 꾸며서 장휴가 영 싫어하던 손홍이라는 자도 장휴를 참소하자 조서를 내려 결국 장휴는 41세의 나이로 죽는다.
삼국지 3 |
삼국지 11 |
삼국지 12, 13, 14 |
삼국지 2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일러스트만 보고는 장소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정치는 70 후반에서 80 초반이므로 내정용으로 쓰자.
삼국지 3에서는 형은 장군이 되지 못하지만, 장휴는 군사가 될 수가 있다. 이상하게 형보다 먼저 임관한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무지정 순으로 58/31/74/78이며 병법으로는 분전, 누선, 정란, 혼란이 있지만 그리 눈에 띄는 병법이 없다. 비록 보병계 병법인 분전을 가지고 있지만 무력이 영 낮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무지정매 순으로 56/28/74/77/73의 문관형에 특기는 기술, 진정, 반목, 명사. 총 4개다. 약간 어설픈 만능형인 형과 비교하면 지력, 매력은 비슷하고 정치에서 우위지만 통솔, 무력에선 많이 밀린다.
삼국지 12에서 삭제되다가 PK에서 복귀한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무지정 순으로 63/27/74/80이며 특기는 상업 3, 설파 2, 수영 1. 전수특기는 상업이며 전법은 기병동요. 생몰년도가 204~244년으로 설정되어 있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54, 무력 27, 지력 74, 정치 77, 매력 73으로 전작과 달리 통솔력이 9, 정치력이 3 하락했다. 개성은 문화, 인맥, 주의는 예교, 정책은 운반개발 Lv 3, 진형은 안행, 정란, 전법은 혼란, 고무, 정란, 친애무장은 고담, 고승, 손등, 제갈각, 진표, 혐오무장은 손홍이다. 전작에 비해 생몰년도가 205~245년으로 변경되었다.
장소의 아들이라 장소를 젊게 한 듯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형 장승과는 달리 근육질 체형인 것도 특징. 처음 등장한 작피 전투 (2)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다.
작피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작피 전투에 참전했으며, 위군에 기세가 밀려 퇴각할 당시 고승과 함께 위군을 막아내 피해를 줄이는 공을 세웠다. 작피 전투 종결 후 이 공로를 인정받아 고승과 함께 잡호장군에 봉해지기도 했다. 또한 태자 손등의 친구인 태자사우 중 한 명이라고도 언급되었다.
전투외편 3편에서 작피에서의 공을 속여 더 높은 직위를 받았다고 전기를 비롯한 손패파들의 모함을 받게 되고, 하옥됐다가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손홍의 지속적인 참소로 인해 유배 직후 자결을 명받고 사망했다.
작피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작피 전투에 참전했으며, 위군에 기세가 밀려 퇴각할 당시 고승과 함께 위군을 막아내 피해를 줄이는 공을 세웠다. 작피 전투 종결 후 이 공로를 인정받아 고승과 함께 잡호장군에 봉해지기도 했다. 또한 태자 손등의 친구인 태자사우 중 한 명이라고도 언급되었다.
전투외편 3편에서 작피에서의 공을 속여 더 높은 직위를 받았다고 전기를 비롯한 손패파들의 모함을 받게 되고, 하옥됐다가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손홍의 지속적인 참소로 인해 유배 직후 자결을 명받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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