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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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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 추존 황제 | |
후한 제3대 황제 장제 | 章帝 | |
출생 | |
즉위 | |
사망 | |
능묘 | 경릉(敬陵) |
재위기간 | 후한의 황태자 |
후한의 황제 | |
명제의 5남으로 태어났으며, 3세에 황태자가 되었다. 75년에 아버지인 명제가 붕어하여 19세에 즉위했다. 동시에 마황후를 황태후로 세워 후견하도록 했다. 마태후는 보기 드물게 몸을 사려 친가인 마씨 일족이 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못하게 하였기에 그녀가 생존했던 장제의 시대에는 아직 후한의 악폐가 된 외척의 전권이 겉으로 나타난 것은 없었다.
어릴 적부터 유학을 좋아했다고 하는 장제는 유학에 능통했고 관대한 성격으로 유학의 덕목에 필적한 너그러운 덕치를 이끌었다. 장제의 치세에는 큰 내우외환도 없었기 때문에 후한은 명제의 시대부터 인계된 안정기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또한 유학이 정치적, 사회적, 학술적으로 중요하고, 확고하게 뿌리내린 시기로도 평가받는데, 《백호통의》가 장제의 주도하에 여러 유명 학자들과의 토론을 거쳐 편찬되기에 이른다.[1]
역사가들은 이를 마태후의 업적이라 평하고 있다. 마황후의 능력과 덕을 잘 알고 있었던 명제는 장제를 마황후의 교육 아래 자라도록 조치했고, 이로 인해 장제가 올바른 가치관과 능력을 가진 군주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마태후 본인의 혈족(장제의 외척)인 마씨에 대한 어떠한 혜택도 금지했기에 장제는 궁내 정치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장제의 치세는 또한 규벌 세력이 후한의 역사에 처음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황후 두씨는 마태후가 죽으면서 후궁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태자 유경의 생모 송귀인과 태자 유조를 낳은 양귀인을 죽음으로 몰고 또 태자를 폐위하여 자신의 아들인 유조를 황태자로 세웠다.
그리고 장제가 추진한 흉노 원정도 결과가 신통치 않아서 서역에 대한 흉노의 공격이 거듭되자 일단은 서역 지역에서 철수했고, 서역은 다시 흉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다행히도 그 후 아들인 화제의 치세에 반초의 활약에 의해 일시적으로 영향력을 회복하여 서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외척 문제와 좋지 못한 원정 등 장제의 시대는 후한의 쇠락의 조짐이 보인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골머리를 앓다가 88년 장제가 3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면서 10세 유조가 즉위했다. 이 사람이 환관을 중용해서 나라를 망하는 길을 터준 화제였다.[2]
장제 이후의 후한 황제들은 모두 장제의 후손들이었다. 그의 뒤를 이은 화제의 후손들은 상제를 끝으로 황제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제가 즉위했을 때 나이인 19세, 만 18세를 성인으로 한다면, 장제는 후한에서 성인 나이로 즉위한 마지막 황제가 된다.[3]
장제의 능인 경릉은 구체적인 위치가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낙양의 M1052호 고분으로 비정하는 의견이 있다.
어릴 적부터 유학을 좋아했다고 하는 장제는 유학에 능통했고 관대한 성격으로 유학의 덕목에 필적한 너그러운 덕치를 이끌었다. 장제의 치세에는 큰 내우외환도 없었기 때문에 후한은 명제의 시대부터 인계된 안정기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또한 유학이 정치적, 사회적, 학술적으로 중요하고, 확고하게 뿌리내린 시기로도 평가받는데, 《백호통의》가 장제의 주도하에 여러 유명 학자들과의 토론을 거쳐 편찬되기에 이른다.[1]
역사가들은 이를 마태후의 업적이라 평하고 있다. 마황후의 능력과 덕을 잘 알고 있었던 명제는 장제를 마황후의 교육 아래 자라도록 조치했고, 이로 인해 장제가 올바른 가치관과 능력을 가진 군주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마태후 본인의 혈족(장제의 외척)인 마씨에 대한 어떠한 혜택도 금지했기에 장제는 궁내 정치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장제의 치세는 또한 규벌 세력이 후한의 역사에 처음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황후 두씨는 마태후가 죽으면서 후궁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태자 유경의 생모 송귀인과 태자 유조를 낳은 양귀인을 죽음으로 몰고 또 태자를 폐위하여 자신의 아들인 유조를 황태자로 세웠다.
그리고 장제가 추진한 흉노 원정도 결과가 신통치 않아서 서역에 대한 흉노의 공격이 거듭되자 일단은 서역 지역에서 철수했고, 서역은 다시 흉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다행히도 그 후 아들인 화제의 치세에 반초의 활약에 의해 일시적으로 영향력을 회복하여 서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외척 문제와 좋지 못한 원정 등 장제의 시대는 후한의 쇠락의 조짐이 보인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골머리를 앓다가 88년 장제가 3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면서 10세 유조가 즉위했다. 이 사람이 환관을 중용해서 나라를 망하는 길을 터준 화제였다.[2]
장제 이후의 후한 황제들은 모두 장제의 후손들이었다. 그의 뒤를 이은 화제의 후손들은 상제를 끝으로 황제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제가 즉위했을 때 나이인 19세, 만 18세를 성인으로 한다면, 장제는 후한에서 성인 나이로 즉위한 마지막 황제가 된다.[3]
장제의 능인 경릉은 구체적인 위치가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낙양의 M1052호 고분으로 비정하는 의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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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편저자는 반고이지만 실질적으로 장제의 개입과 영향이 지대했기에 '어찬'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2] 다만 표면상으로는 화제의 치세까지는 후한의 전성기라 평가할 수 있다. 영원지륭(永元之隆)이라 불리는 후한의 마지막 대외 사업이 진행된 시기가 화제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 이후 중국은 당 태종이 동돌궐을 정벌할 때까지 400여년 동안 서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다.[3] 즉위 당시 나이는 다음과 같다. 4대 화제 만 11세, 5대 상제 생후 약 100일, 6대 안제 만 12세, 7대 전소제 생년미상이나 장제의 손자인 이상 나이를 고려할때 즉위시 미성년자인 것은 확실하다, 8대 순제 만 10세, 9대 충제 만 2세, 10대 질제 만 7세, 11대 환제 만 14세, 12대 영제 만 12세, 13대 소제 만 16세, 14대 헌제 만 9세. 유소년기에 황제가 된 군주들이 모두 허수아비 신세로 치세를 끝마치거나 암군이 되는 것은 아니나 이는 거의 예외적인 것이고, 어린 황제의 계속적인 즉위는 필연적으로 황권의 약화를 불러왔다. 따라서 이는 외척과 환관 세력의 비대화를 가져와 후한의 멸망 원인이 되었다.[4] 안제 때에 화희황후가 사망하면서 추존의 논의가 있어 격상되었다.[5] 아들 유호가 안제로 즉위하게 되어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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