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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상 두 번째 고시 3과 합격자[1]이자 최초로 고시 사법, 행정, 외무 3과를 합격한 공무원 출신 정치인. 제30대 농수산부장관과 제31-32대 대한축구협회장을 지냈다.
골프보다도 축구를 더 좋아한 그는 재무부 이재국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이재국에 구단을 만들어 4년 동안 공격수로 활약하고 대한축구협회 이사로도 활동했다. 특히 당시까지 한국에 프로 축구는 커녕 실업 축구도 제일모직, 대한중석, 금성방직 정도가 실업 구단이 전부여서 선수들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해 군 구단에 들어가거나 알아서 부업을 뛰며 기다려야 해 축구 선수가 축구에 집중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는데, 그가 직접 나서 금융권 축구단 창단에 속도를 붙여 1969년 3월 조흥은행, 산업은행, 신탁은행, 제일은행 축구단 등을 연이어 창단하는 등 총 13개 축구단을 탄생시켰다. 약 200여 명의 선수들이 축구를 하면서 돈을 벌 수 있게 되었고, 1983년 프로 축구 리그가 출범하기 전까지 한국 축구를 이끄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1969년에는 재무부 재정차관보로 승진하였다. 재무부 사무관으로 들어온 후 7년 만에 이재국장을 거쳐 재정차관보까지 승진한 셈이다.
1970년 대한축구협회장이 되어 한 달 만에 축구발전기금 1억 원을 모았다.[4]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상비군으로 1진 ‘청룡’과 2진 ‘백호’를 구성했다.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 코치도 초빙하고, 국가대표 상비군 전용 숙소를 건설해 대표팀 경기력 향상에 집중했다.[5] 대표 선수들에게 상해 보험을 들게 하여, 대표팀 상비군과 청소년 대표 53명이 동방해상 보험사와 상해 보험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한국 스포츠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축구 원로 중 생계가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해 ‘축구인원호연금제’를 실시했다. 1년에 12만 원씩 세 명에게 36만 원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점차 그 대상과 지급액을 확대하였다. 1970년 4월에는 ‘월간축구’를 발행했다.[6]
축구 저변과 축구 붐 조성에도 앞장섰다. 어린이 축구를 장려하기 위해 학교는 물론, 시군구 단위로 어린이 축구부를 만들었다. 1970년 한 해 동안 무려 368개 초등학교 축구부가 생기고 마을 단위로는 321개 구단이 생겨났다. 주말 축구 교실도 28개 학교에서 시행하기 시작했다. 전국의 초등학교에 축구공 3만 개 보내기 캠페인을 벌여 큰 호응을 얻었다. 1972년에는 지금의 조기 축구 대회에 해당하는 새마을축구대회를 시도 대항전으로 처음 열었다.
축구장 건립 등 공약이 추진되지 못한 부분도 있었지만, 장 회장이 이룬 성과는 한국 축구의 토양을 바꿀 정도로 큰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당시 한 일본 축구 기자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은 크라머 코치의 충고를 보수적인 협회가 받아들이지 않아서 큰 문제다. 하지만 한국은 젊은 협회장이 신진대사 역할을 확실히 하고 있다. 부럽다.” 그 후 아시아 축구 연맹(AFC) 부회장에 선출되면서 아시아 전체가 주목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가 취임하자마자 축구 국가대표 상비군은 1970년 메르데카컵 우승, 킹스컵 우승, 아시안 게임 금메달[7] 등의 성과를 달성했다. 1971년에는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를 처음으로 개최하였다.[8] 제1회 박스컵에서 한국은 버마와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1971년에는 정계로 진출하여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 뛰어들었다. 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갑 지역구[9]에 출마하여 신민당 박정훈 후보를 꺾고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서울에서 당선된 유일한 여당 국회의원이었다.
국회의원이 된 후, 1972년 10월 국회에서 국민체육진흥기금법을 입법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국민체육진흥재단 설립도 이뤄냈다. 국민체육진흥기금은 선수와 지도자를 발굴하고 키우는데 쓰이기 시작했고 은퇴한 경기인의 생활 보조금으로도 지급됐다.
1973년 8월 농수산부차관[10], 1975년 12월 경제기획원차관에 임명되었고 1977년 12월부터 1978년 12월까지는 농수산부장관을 역임하였다. 겨우 44세의 젊은 나이에 장관이 된 것이다.
1969년에는 재무부 재정차관보로 승진하였다. 재무부 사무관으로 들어온 후 7년 만에 이재국장을 거쳐 재정차관보까지 승진한 셈이다.
1970년 대한축구협회장이 되어 한 달 만에 축구발전기금 1억 원을 모았다.[4]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상비군으로 1진 ‘청룡’과 2진 ‘백호’를 구성했다.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 코치도 초빙하고, 국가대표 상비군 전용 숙소를 건설해 대표팀 경기력 향상에 집중했다.[5] 대표 선수들에게 상해 보험을 들게 하여, 대표팀 상비군과 청소년 대표 53명이 동방해상 보험사와 상해 보험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한국 스포츠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축구 원로 중 생계가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해 ‘축구인원호연금제’를 실시했다. 1년에 12만 원씩 세 명에게 36만 원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점차 그 대상과 지급액을 확대하였다. 1970년 4월에는 ‘월간축구’를 발행했다.[6]
축구 저변과 축구 붐 조성에도 앞장섰다. 어린이 축구를 장려하기 위해 학교는 물론, 시군구 단위로 어린이 축구부를 만들었다. 1970년 한 해 동안 무려 368개 초등학교 축구부가 생기고 마을 단위로는 321개 구단이 생겨났다. 주말 축구 교실도 28개 학교에서 시행하기 시작했다. 전국의 초등학교에 축구공 3만 개 보내기 캠페인을 벌여 큰 호응을 얻었다. 1972년에는 지금의 조기 축구 대회에 해당하는 새마을축구대회를 시도 대항전으로 처음 열었다.
축구장 건립 등 공약이 추진되지 못한 부분도 있었지만, 장 회장이 이룬 성과는 한국 축구의 토양을 바꿀 정도로 큰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당시 한 일본 축구 기자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은 크라머 코치의 충고를 보수적인 협회가 받아들이지 않아서 큰 문제다. 하지만 한국은 젊은 협회장이 신진대사 역할을 확실히 하고 있다. 부럽다.” 그 후 아시아 축구 연맹(AFC) 부회장에 선출되면서 아시아 전체가 주목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가 취임하자마자 축구 국가대표 상비군은 1970년 메르데카컵 우승, 킹스컵 우승, 아시안 게임 금메달[7] 등의 성과를 달성했다. 1971년에는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를 처음으로 개최하였다.[8] 제1회 박스컵에서 한국은 버마와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1971년에는 정계로 진출하여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 뛰어들었다. 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갑 지역구[9]에 출마하여 신민당 박정훈 후보를 꺾고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서울에서 당선된 유일한 여당 국회의원이었다.
국회의원이 된 후, 1972년 10월 국회에서 국민체육진흥기금법을 입법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국민체육진흥재단 설립도 이뤄냈다. 국민체육진흥기금은 선수와 지도자를 발굴하고 키우는데 쓰이기 시작했고 은퇴한 경기인의 생활 보조금으로도 지급됐다.
1973년 8월 농수산부차관[10], 1975년 12월 경제기획원차관에 임명되었고 1977년 12월부터 1978년 12월까지는 농수산부장관을 역임하였다. 겨우 44세의 젊은 나이에 장관이 된 것이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한동안 야인 생활을 하다가, 1984년부터 농업진흥공사 이사장을 역임했다. 1985년부터 1989년까지는 고려대학교 교우회장직도 함께 맡았다. 교우회장으로서 워낙 억척이었기 때문에, 김준엽 고대 총장에게서 '미스터 고려대학교'라는 별명을 얻었다.
1988년 중국 등소평의 아들 등업방과 만나 만주 삼강평원 일대[11]에 대규모 농장을 만들기로 하고, 옛 고구려, 발해의 고토를 재개발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1988년 12월에는 중국 헤이룽장성 정부와 삼강평원 개발 관련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당시 중국은 미수교국이었으므로, 한국의 공기업이 중국의 토지를 개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장덕진은 농업진흥공사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1990년 1월 대륙종합개발을 설립하였고, 오로지 삼강평원의 개발에 자기 모든 것을 걸기 시작했다. 개인 자격으로 헤이룽장성 정부와 각각 31억 1647만 원씩을 출자해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중국 하얼빈시 삼강평원 일대 3만 8000 ㏊를 임대하여 개발하기 시작한 것이다.[12] 1991년 중국 국가계획위원회와 한국은행은 대륙 개발의 삼강평원 개발 투자를 승인했다.
그러나 토지에서 물이 잘 빠지지 않아 추가로 대수로를 만들어야 하게 되는 등 개발 사업은 매년 어려움을 겪었다. 거기에다 1996년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의 결과로 대한민국의 쌀 시장이 개방되고 미국 등지의 값싼 쌀이 우리나라에 밀려들어올 것으로 예상되자, 삼강평원개발의 경제성이 의문시되었다. 당시 대학 교수들은 삼강평원 땅이 동토(凍土)라면서 한여름에도 30cm만 파면 얼음이 나온다고 일본 고문서까지 동원하여 삼강평원개발에 반대하였다.
1988년 중국 등소평의 아들 등업방과 만나 만주 삼강평원 일대[11]에 대규모 농장을 만들기로 하고, 옛 고구려, 발해의 고토를 재개발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1988년 12월에는 중국 헤이룽장성 정부와 삼강평원 개발 관련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당시 중국은 미수교국이었으므로, 한국의 공기업이 중국의 토지를 개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장덕진은 농업진흥공사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1990년 1월 대륙종합개발을 설립하였고, 오로지 삼강평원의 개발에 자기 모든 것을 걸기 시작했다. 개인 자격으로 헤이룽장성 정부와 각각 31억 1647만 원씩을 출자해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중국 하얼빈시 삼강평원 일대 3만 8000 ㏊를 임대하여 개발하기 시작한 것이다.[12] 1991년 중국 국가계획위원회와 한국은행은 대륙 개발의 삼강평원 개발 투자를 승인했다.
그러나 토지에서 물이 잘 빠지지 않아 추가로 대수로를 만들어야 하게 되는 등 개발 사업은 매년 어려움을 겪었다. 거기에다 1996년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의 결과로 대한민국의 쌀 시장이 개방되고 미국 등지의 값싼 쌀이 우리나라에 밀려들어올 것으로 예상되자, 삼강평원개발의 경제성이 의문시되었다. 당시 대학 교수들은 삼강평원 땅이 동토(凍土)라면서 한여름에도 30cm만 파면 얼음이 나온다고 일본 고문서까지 동원하여 삼강평원개발에 반대하였다.
육영수 여사의 언니인 육인순의 첫째 사위, 즉 박정희의 처조카사위이다. 홍종욱 전 국회의원의 조카사위(그러니까 홍종욱이 장덕진에게 처삼촌)이기도 하다.
그의 손아랫동서는 한승수 전 국무총리, 윤석민 전 대한선주 회장[13]이고, 처남은 홍세표 외환은행장이다.[14]
TV조선 경제산업부장(부국장)인 장원준(1967년생)이 그의 아들이다. 장원준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하였으며, 그의 아내는 SBS 선임기자 한수진이다.
또한 전 3선 의원이자 20대 국회 후반기 보건복지위원장을 맡은 김세연 전 의원은 그의 처조카사위이다.
그의 손아랫동서는 한승수 전 국무총리, 윤석민 전 대한선주 회장[13]이고, 처남은 홍세표 외환은행장이다.[14]
TV조선 경제산업부장(부국장)인 장원준(1967년생)이 그의 아들이다. 장원준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하였으며, 그의 아내는 SBS 선임기자 한수진이다.
또한 전 3선 의원이자 20대 국회 후반기 보건복지위원장을 맡은 김세연 전 의원은 그의 처조카사위이다.
연도 | 선거 종류 | 소속 정당 | 득표 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71 |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16선거구) | 74,617 (57%) | 당선 (1위) | 초선[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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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에 앞서 1958~59년 고등고시 사법과와 함께 고등고시 행정과 제1부(일반행정), 행정과 제2부(재무)의 총 3과를 합격한 신오철 변호사가 있긴 했으나, 당시 고등고시 행정과 내의 일반행정과 재무는 직렬이 비슷했고, 현재의 시점에서 고시 3과 합격은 사법, 행정, 외무로 굳어졌기 때문에 신오철은 흔히 생각하는 이미지의 3과 합격은 아니다.[2] 사법, 행정, 외무 중 하나가 빠지고 3과 합격을 달성한 최초의 인물은 사법과, 행정과 1부(일반행정), 행정과 2부(재무)에 합격한 신오철 변호사이며, 장덕진과 같은 시기에 사법과, 행정과와 함께 CPA(지금은 의미가 많이 줄어들었으나 당시 CPA 합격자 정원과 경쟁률을 고려하면 고시와 동급의 시험으로 인식되었다.)에 합격함으로써 고시 3과를 달성한 사람이 박찬종 전 의원이었다.[3] "만약 대통령도 시험으로 될 수 있다면, 난 대통령도 자신 있다"는 말을 한 것으로 당시에 소문이 자자했으나, 그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다고 한다.[4] 그때까지 생계가 어려울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하던 축구인들에게 1억 원은 정말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그가 정말 1억 원을 모아오자 모두들 놀랐다고 한다. 당시 남서울아파트(반포주공아파트) 분양가가 600만 원(32평형)인 걸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였는데, 항상 쪼들렸던 축구협회가 비로소 어깨를 편 계기가 됐다.[5] 그때 시작된 국가대표 상비군 제도는 1990년대까지 이어져 대표팀 경기력 향상의 뿌리가 됐다.[6] 지금의 ‘베스트 일레븐’이라는 축구 전문 잡지다. 1996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7]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초의 금메달이었다.[8] ‘박스컵’이라고도 불리었다. 1975년까지는 아시아 국가만이 참가하는 대회였지만 1975년부터는 브라질 주 리그 대표들도 대회에 나서는 등 규모는 점차 커졌다. 이 대회는 이후 ‘코리아컵’으로 이름을 바꿔 1999년까지 성대하게 열렸다.[9] 신민당 총재 유진산의 지역구였는데, 유진산이 후보등록 마감 날에 돌연 지역구를 포기하고 전국구 1번으로 등록하면서 진산 파동이 일어났다.[10] 이 때 대한축구협회 회장에서 물러났다.[11] 헤이룽장성 동부에 위치한 우수리강, 송화강, 흑룡강이 만나는 지역을 말한다. 원래 이곳은 척박한 습지로 이루어져 농경에 부적합한 황무지였기에 중국에서 거대한 북쪽 황무지라는 뜻에서 ‘북대황(北大荒)’이라고도 불렸으며 1950년대말 마오쩌둥이 수십만 명의 인민해방군을 동원하여 개간에 성공, 중국에서 손꼽히는 곡창지대가 되었다.[12] 계약 기간은 40년에, 연간 1140만 원(당시 환율 기준)의 토지 임대료를 내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13] 윤석민은 장덕진의 고대 법대 4년 후배이다.[14] 육인순의 맏사위 장덕진과 둘째 사위 한승수, 그리고 장남 홍세표 셋 다 춘천고등학교를 나왔다. 홍세표는 장덕진의 춘천고-고려대 1년 후배이며, 나중에 한미은행장과 외환은행장을 역임했다. 한승수는 장덕진의 춘천고 2년 후배이다.[15] 영등포구 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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