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굴 제국 제4대 황제 자한기르 جهانگیر | |
이름 | 미르자 누르웃딘 베이그 모함마드 칸 살림 نورالدین محمد سلیم |
출생 | |
사망 | |
재위 기간 | 무굴 제국 황제 |
대관식 | |
전임자 | 악바르 대제 (제3대) |
후임자 | 샤 자한 (제5대) |
부모 | |
자녀 | |
종교 |
무굴 제국의 제4대 황제. 제호인 자한기르는 '세계의 정복자'라는 뜻이다.
1569년 8월 31일 태어난 악바르 대제의 3남으로 두 형이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나이로 사망하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장남이었다. 자한기르는 무굴 제국의 황제들 중 처음으로 인도 출신의 어머니를 둔 황제로 그의 어머니 마리암 웃 자마니는 자이푸르의 공주였다. 당시 자한기르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가 있는데, 5년 전 이미 두 아들을 잃은 악바르 대제는 그가 가장 총애하던 마리암 황후가 또다시 회임했다는 소문을 듣고 엄청나게 기뻐했다고 한다. 악바르는 출산을 위해 수도 파테푸르 시크리에 황후를 위한 궁을 지어주었고 인근의 성자 샤이크 살림을 불러 황후를 위해 기도하도록 명했다. 마리암 황후가 자한기르를 낳자 환희에 찬 악바르는 전국에 대사면령을 내림과 동시에 성자의 이름을 따 '살림'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3]
아버지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나름 능력은 있는 자한기르였는데 1594년에는 아버지의 명으로 오르차의 군주 비르 싱 데오를 공격해 오르차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사이는 그리 좋지 못했다. 1599년 악바르가 아프가니스탄으로 원정을 나간 사이 자한기르는 알라하바드에서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4] 놀란 악바르는 원정을 중지하고 수도 아그라로 돌아와 반란을 진압했고 그 후 3년 동안은 영지인 알라하바드에서 방탕한 생활을 이어가 아버지의 속을 썩였다. 악바르는 주정뱅이에 아편 중독자인 자한기르를 후계자 자리에서 내쫓을 것도 고려하였지만 1604년 아버지와 화해하고 자한기르는 악바르의 임종 때까지 아버지의 곁을 지켰다. 악바르는 죽기 직전 자한기르를 후임 황제로 지명했다고 한다.
아버지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나름 능력은 있는 자한기르였는데 1594년에는 아버지의 명으로 오르차의 군주 비르 싱 데오를 공격해 오르차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사이는 그리 좋지 못했다. 1599년 악바르가 아프가니스탄으로 원정을 나간 사이 자한기르는 알라하바드에서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4] 놀란 악바르는 원정을 중지하고 수도 아그라로 돌아와 반란을 진압했고 그 후 3년 동안은 영지인 알라하바드에서 방탕한 생활을 이어가 아버지의 속을 썩였다. 악바르는 주정뱅이에 아편 중독자인 자한기르를 후계자 자리에서 내쫓을 것도 고려하였지만 1604년 아버지와 화해하고 자한기르는 악바르의 임종 때까지 아버지의 곁을 지켰다. 악바르는 죽기 직전 자한기르를 후임 황제로 지명했다고 한다.
1605년 10월 27일 악바르가 세상을 떠나자 자한기르를 포함한 악바르의 다섯 아들들이 황위 계승을 두고 내전을 벌였으나 악바르가 사망할 때 아버지의 곁을 지킨 자한기르가 먼저 선수를 쳐 황제 자리에 오르면서 정통성을 확보했고 다른 4명의 경쟁자들을 상대로 해 승리하면서 황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1606년에는 자한기르의 아들 쿠스라우 미르자가 반란을 일으켰다. 자한기르가 워낙 술주정뱅이라 인망이 없고 할아버지 악바르도 자한기르보다 쿠스라우 미르자를 총애했기에 제위를 찬탈하고자 한 것. 자한기르는 쿠스라우를 격파하고 제 장남을 가장 총애하던 아들인 3남 쿠람 황자에게 넘겨주었다. 쿠람 황자는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형의 눈을 뽑아버린 뒤 1622년 1월에 아그라에서 죽여버렸다. 이로써 자한기르의 제위는 확고해졌다.
자한기르가 황위에 올랐을 무렵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아직 혈기왕성했던 자한기르는 황태자 시절부터 계속했던 수많은 정복 활동을 꾸준히 이어나갔다. 특히 즉위하자마자 그의 아버지 악바르가 미처 정복하지 못해 남아있었던 메와르 지방에 대한 원정을 단행했다. 그러나 원정을 시작하기 직전 장남 쿠스라우 미르자가 반란을 일으켰고, 자한기르는 일단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 쿠스라우 미르자에 대한 반격에 들어가며 메와르 원정을 보류했다. 얼마 후 쿠스라우 미르자의 반란이 허무하게 진압되고 메와르 지방이 물밑에서 쿠스라우를 도와주었다는 물증이 나오자 자한기르는 바로 재원정에 착수했다. 쿠람 황자가 이끈 원정은 성공적이었고 메와르의 군주 라나 아마르 싱[5]은 무굴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6] 메와르 지방을 정복한 자한기르는 남인도 지방으로 눈길을 돌렸다.[7]
그의 관심을 끈 곳은 요새 도시 아메드나가르였다. 자한기르는 수만 대군을 거느리고 아메드나가르, 그리고 그 뒤엔 비자푸르와 골콘다 등 다양한 적들과 전쟁을 벌였지만 완벽히 이들을 제압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특히 아메드나가르의 경우 비자푸르의 왕이었던 말리크 암바르의 중재를 받아 일부 요새와 무역 요충지 정도만을 얻어내는 데에 만족하고 물러나야만 했다. 자한기르의 재위 기간 동안 무굴 제국의 영토가 이전보다 남하한 것은 맞지만, 완벽하게 점령한 것은 아니라 거미줄처럼 점점이 이어진 소수의 영토만을 얻어낸 것이었고 자한기르가 죽을 때까지 무굴 제국이 남인도 지방에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일은 없었다. 사실상 악바르가 죽을 때보다 나아진 것은 없었고 자한기르의 남인도 원정은 실패했다고 평가받는다. 남인도 지방이 무굴 제국 아래 무릎 꿇는 것은 이후 샤 자한과 아우랑제브 황제 시대의 일이다.
아버지 악바르는 웬만한 전쟁에서는 모조리 승리를 거두었지만 안타깝게도 자한기르는 아버지만한 군재를 물려받지 못했던지 황제라는 이름에 걸맞은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물론 메와르 지방을 평정하고 남인도 진출을 시도한 것은 어느 정도 업적으로 평가받지만, 재위 초중반부에 페르시아에게 칸다하르 지방을 잃어버리고야 만다. 당시 사파비 왕조는 악바르 시절 빼앗긴 칸다하르 지방을 되찾고 싶어했는데 자한기르가 즉위하자마자 바로 칸다하르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굴 군대의 반격이 생각보다 거세자 화해 무드를 조성하면서 군사를 물렸고, 자한기르가 이에 방심해 칸다하르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하자 다시 칸다하르를 공격해 페르시아의 영토로 편입해 버렸다. 결국 1622년 칸다하르 지방이 페르시아에게 빼앗기면서 무굴 제국은 제국 서부의 가장 풍요로운 지방들 중 하나를 빼앗기고야 만다. 이후에도 자한기르는 소소한 원정들을 단행했지만 큰 업적은 없었다고 한다.
자한기르가 황위에 올랐을 무렵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아직 혈기왕성했던 자한기르는 황태자 시절부터 계속했던 수많은 정복 활동을 꾸준히 이어나갔다. 특히 즉위하자마자 그의 아버지 악바르가 미처 정복하지 못해 남아있었던 메와르 지방에 대한 원정을 단행했다. 그러나 원정을 시작하기 직전 장남 쿠스라우 미르자가 반란을 일으켰고, 자한기르는 일단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 쿠스라우 미르자에 대한 반격에 들어가며 메와르 원정을 보류했다. 얼마 후 쿠스라우 미르자의 반란이 허무하게 진압되고 메와르 지방이 물밑에서 쿠스라우를 도와주었다는 물증이 나오자 자한기르는 바로 재원정에 착수했다. 쿠람 황자가 이끈 원정은 성공적이었고 메와르의 군주 라나 아마르 싱[5]은 무굴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6] 메와르 지방을 정복한 자한기르는 남인도 지방으로 눈길을 돌렸다.[7]
그의 관심을 끈 곳은 요새 도시 아메드나가르였다. 자한기르는 수만 대군을 거느리고 아메드나가르, 그리고 그 뒤엔 비자푸르와 골콘다 등 다양한 적들과 전쟁을 벌였지만 완벽히 이들을 제압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특히 아메드나가르의 경우 비자푸르의 왕이었던 말리크 암바르의 중재를 받아 일부 요새와 무역 요충지 정도만을 얻어내는 데에 만족하고 물러나야만 했다. 자한기르의 재위 기간 동안 무굴 제국의 영토가 이전보다 남하한 것은 맞지만, 완벽하게 점령한 것은 아니라 거미줄처럼 점점이 이어진 소수의 영토만을 얻어낸 것이었고 자한기르가 죽을 때까지 무굴 제국이 남인도 지방에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일은 없었다. 사실상 악바르가 죽을 때보다 나아진 것은 없었고 자한기르의 남인도 원정은 실패했다고 평가받는다. 남인도 지방이 무굴 제국 아래 무릎 꿇는 것은 이후 샤 자한과 아우랑제브 황제 시대의 일이다.
아버지 악바르는 웬만한 전쟁에서는 모조리 승리를 거두었지만 안타깝게도 자한기르는 아버지만한 군재를 물려받지 못했던지 황제라는 이름에 걸맞은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물론 메와르 지방을 평정하고 남인도 진출을 시도한 것은 어느 정도 업적으로 평가받지만, 재위 초중반부에 페르시아에게 칸다하르 지방을 잃어버리고야 만다. 당시 사파비 왕조는 악바르 시절 빼앗긴 칸다하르 지방을 되찾고 싶어했는데 자한기르가 즉위하자마자 바로 칸다하르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굴 군대의 반격이 생각보다 거세자 화해 무드를 조성하면서 군사를 물렸고, 자한기르가 이에 방심해 칸다하르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하자 다시 칸다하르를 공격해 페르시아의 영토로 편입해 버렸다. 결국 1622년 칸다하르 지방이 페르시아에게 빼앗기면서 무굴 제국은 제국 서부의 가장 풍요로운 지방들 중 하나를 빼앗기고야 만다. 이후에도 자한기르는 소소한 원정들을 단행했지만 큰 업적은 없었다고 한다.
영국 대사 토머스 로 경[8] 을 접견하는 자한기르 황제
자한기르의 시대부터 본격적인 서양인들과의 교류가 시작된다. 이전 악바르는 서양인들의 침입을 경계했지만 자한기르는 아버지만큼 서양인들을 경계하지는 않았다. 특히 그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대사였던 토마스 로 경을 좋아했다고 한다. 로 경은 아그라의 궁궐에서 3년 동안 머물렀는데, 자한기르는 그를 크게 총애하여 틈이 날때마다 그를 불러놓고 술을 즐겼다고. 로 경은 황제에게 보답하기 위해 여러 포도주와 고급 술들을 가져왔고 자한기르는 그럴 때마다 크게 관심을 보이며 술들의 원산지와 품질을 물어보곤 했다고 한다. 로 경은 이후 영국으로 돌아가 자한기르 시대의 무굴 제국을 다룬 회고록을 작성했고, 이 회고록에서 자한기르를 선대 악바르에 비해 무능하고 유약한 황제로 묘사하면서 서양에서 자한기르에 대한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굳어지게 된다.[9]
토마스 로 경의 주요 목적은 동인도회사의 거점을 인도에 마련해 놓는 것이었다. 토마스 로 경은 3년 가까운 세월 동안 아그라에 머물면서 황제를 끊임없이 설득했고 결국 자한기르의 허락을 받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자한기르는 영국 동인도회사에게 몇몇 항구도시들을 할양했고 무역 특권을 부여했다. 사족으로 당시 토마스 로 경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자한기르는 그에게 인도 화가들이 그린 모작과 서양 화가가 만든 원작을 동시에 보여주고 진품을 가려내라고 문제를 내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로 경이 맞히지 못하면 마치 어린 아이처럼 좋아했고, 그 모작을 그에게 선물로 내렸다고. 워낙 자한기르가 이 놀이를 좋아했기 때문에 아직도 영국에는 당시 자한기르가 그에게 하사한 20여 점의 작품들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파비 왕조와는 불편하지만 어느 정도의 외교적 관계를 유지했다. 사파비 왕조가 칸다하르 지방을 다시 빼앗아갔음에도 불구하고 표면상으로는 친화적인 가면을 쓰고 있었던 것. 자한기르는 800명의 수행원을 딸린 거대한 사신단을 사파비 왕조에 파견하기도 했다. 당시 사파비 왕조의 황제였던 아바스 1세 역시 굳이 무굴 제국과 정면으로 충돌할 이유도 여유도 없었기 때문에 선물을 주고받거나 황족을 델리에 보내는 등 나름대로 화답을 해주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칸다하르를 뺏긴 이후부터는 잠재적 적국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오스만 제국과 반-사파비 동맹을 맺었으며, 무라트 4세에게 친서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죽을 때끼지 사파비 왕조와 대대적인 충돌이나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고 위태위태한 평화를 유지했다.
종교 면에서는 일단 무슬림이었지만 독실하지는 않았다. 타 종교에서도 아버지의 관용 정책을 계승해 힌두교도들에게 나름 관대한 면모를 보였다. 무슬림은 이슬람 법으로, 힌두교도는 힌두교 법으로 다스렸으며 범죄와 관련된 경우 공통의 법으로 다스렸다. 때문에 자한기르는 무굴 제국을 이루는 두 기둥인 무슬림과 힌도교도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다. 하지만 힌두교도가 무슬림 소녀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벌을 내리는 등 악바르 대제보다는 아무래도 친이슬람적인 정책들을 보였는데, 간단히 말하면 악바르 대제보다는 덜, 그리고 샤 자한이나 아우랑제브보다는 훨씬 더 자유주의적인 종교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힌두교 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포함한 여러 종교들에게도 관용적인 모습을 보였고 그의 재위 내내 심각한 종교갈등이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시크교를 지원한 악바르 대제와 달리 자한기르는 시크교에 대해서는 부정적 태도를 취할 때가 있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시크교의 구루 아르준이 장남 미르자 쿠스라우의 반란 당시 그를 축복했다는 까닭에서였다. 그러나 아르준이 그의 반란을 축복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고, 다만 수사적으로 예의상 "앞으로 일이 잘 될 것"이라고 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자한기르는 아르준이 반란에 직접 관여했다고 생각한 듯하다. 또한 자한기르가 남긴 기록을 보면 이미 그 전부터 아르준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부분이 남아 있다. 다만 자한기르가 시크교 자체에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누가 무슨 종교를 믿는지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시크교라는 종교 자체를 탄압했다기보다는 구루 아르준을 포함한 시크교도들의 정치적 행위를 탄압했다고 보는 게 훨씬 합리적이다.
그러나 시크교를 지원한 악바르 대제와 달리 자한기르는 시크교에 대해서는 부정적 태도를 취할 때가 있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시크교의 구루 아르준이 장남 미르자 쿠스라우의 반란 당시 그를 축복했다는 까닭에서였다. 그러나 아르준이 그의 반란을 축복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고, 다만 수사적으로 예의상 "앞으로 일이 잘 될 것"이라고 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자한기르는 아르준이 반란에 직접 관여했다고 생각한 듯하다. 또한 자한기르가 남긴 기록을 보면 이미 그 전부터 아르준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부분이 남아 있다. 다만 자한기르가 시크교 자체에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누가 무슨 종교를 믿는지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시크교라는 종교 자체를 탄압했다기보다는 구루 아르준을 포함한 시크교도들의 정치적 행위를 탄압했다고 보는 게 훨씬 합리적이다.
몇 년간 저절로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내가 [구루 아르준의] 이 헛된 짓거리에 마침표를 찍거나 아니면 구루 아르준이 이슬람의 무리로 귀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 Memoirs of Jahangir(자한기르 회고록, Tuzuk-i-Jehangiri)
자한기르가 후대 황제들에 비하면 훨씬 종교적으로 깨어있었다는 증거는 상당히 많다. 대표적으로 그의 기도실에는 예수의 성화가 놓여 있었다는 걸 보면 그가 이슬람교도치고는 종교적으로 전혀 배타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자한기르는 서양인들과 교류하면서 특히 그들이 믿는 기독교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포르투갈 선교사와 상인들을 직접 불러 이야기를 나누거나 영국 대사 토머스 로를 만나 접견하기도 했다. 자한기르가 워낙 서양인들과 만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무굴 궁정에서는 자한기르가 몰래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헛소문이 떠돌 정도였다. 다만 영국 대사인 토마스 로가 자한기르를 만나 그가 '유약하고 무능한 황제'라고 평가하면서 정작 서양 세계에는 그가 무능한 이미지로 알려지게 된다.
보통 주정뱅이, 무신론자, 쾌락주의자, 아편 중독자 등 온갖 안좋은 타이틀에 유약한 황제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는 서양인들의 관점에 의한 묘사일 뿐이며, 실제로는 나름 능력있는 군주이자 유능한 행정가였고 예술을 사랑하여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후원을 해주는 등 문화 발전에도 관심이 많은 군주였다. 애초에 무능한 황제였다면 22년 동안 대제국을 유지하지도 못했을 것이다.[10] 군사적으로는 큰 업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아버지 악바르로부터 물려받은 제국의 영토를 대부분 지켜내었으며, 칸다하르 지방을 페르시아에 빼앗긴 것을 제외하면 큰 실책도 남기지 않았고 오히려 남인도 일대로 영토를 넓히기까지 했다.
종교적으로도 악바르 대제의 관용 정책을 그대로 이었다. 물론 악바르 대제의 극도로 포용적인 정책을 차용한 것은 아니었고 다소 친-이슬람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자한기르는 종교 따위로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거리를 두지는 않았다고 한다.[11] 자한기르가 시크교 교인들을 차별했다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이는 시크 종교 자체를 탄압했다기보다는 시크 교도들 중 일부가 벌인 정치적 행위에 대한 처벌을 내린 것에 더 가깝다. 후세의 샤 자한이나 아우랑제브의 폭압적인 종교 억압 정책에 비하면 선녀로 보일 정도로 유화적인 종교 정책을 폈던 군주였던 것. 자한기르의 재위기 동안 무굴 제국은 여전히 평화 속에 번영을 구가했고 시민들 역시 풍요로운 삶을 누렸다. 후계자 샤 자한이나 아우랑제브 시대에 비하면 확실히 평화로운 시대였다.
서양인들은 자한기르를 쾌락을 추구하는 무신론자에 무능한 인물로 여겼다. 보통 서양의 책들을 통해 인도 역사를 접한 한국 대중들도 이같은 견해를 그대로 따라갔고 일반적으로 자한기르의 이미지는 악바르와 샤 자한 사이의 유약한 황제 정도로 남아있다. 하지만 정작 인도 학계의 평가는 꽤나 다른 편이다. 자한기르는 상당히 유능한 행정가였고 아버지 악바르가 만들어놓은 체계를 그대로 이어나가면서 무굴 제국의 전성기를 지속했다. 애초에 황제가 능력이 없었다면 그 거대한 제국을 23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유지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자한기르는 물론 자기 기준이긴 했지만 정의를 사랑하는 군주로 알려져 있었고, 농민들의 세금을 일부러 낮추어 주는 등 민생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무굴 제국의 경제는 끝없이 성장했고 웬만한 사람들은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자한기르가 아버지 악바르처럼 흠이 없는 완전무결한 군주였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기분에 따라 행동이 확확 바뀌는 경향이 있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등 측근들조차 함부로 짐작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인간이었다. 하지만 서양 학계가 퍼뜨려놓은 이미지처럼 무능하거나 폭군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다만 아무래도 아버지인 악바르와 아들 샤 자한이 워낙 특출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약해보였을 뿐, 실제 자한기르 정도면 꽤나 준수한 편이었다. 아우랑제브가 죽고 난 이후의 무굴 황제들이 끝없는 반란들을 진압하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져내린 것을 생각해보면 자한기르가 나름 능력있는 군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한기르는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는 군주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제왕교육을 받으며 페르시아어, 힌두어, 고대 산스크리트어 등 여러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자한기르는 시와 예술을 좋아해 시인들과 예술가들에게 막대한 후원을 퍼부었고, 무굴 제국의 문화는 그의 재위기에도 악바르 시절처럼 활발히 발달을 이룩했다. 이 시대에 인도 최고의 시성들 중 하나인 툴시다스가 활동했고 수많은 산스크리트어, 페르시아어 시집들이 출간됐다. 건축에도 나름 관심이 많아 150만 루피를 들여 악바르의 영묘를 당시 인도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수준으로 거대한 규모로 지었고, 황궁을 개축하고 대규모 모스크들을 인도 곳곳에 건립하는 등 여러 건축 관련 치적들을 남기기도 했다.
보통 자한기르는 주정뱅이의 이미지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도 술을 지나치게 좋아해 평생을 알코올 중독으로 살았다. 게다가 20명에 달하는 아내를 두어 향락적인 이미지가 있기도 하다. 다만 가정적으로는 상당히 좋은 사람이었다는 후문이 있으며, 심지어 첫째 아내가 죽었을 때에는 너무나도 슬퍼해 며칠 동안 물과 음식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측근들에게 휘둘리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단점이었다. 그는 가장 총애하던 황후 누르자한에게 국가대소사에 관여하도록 허락하기까지 했다.[12] 권력욕이 대단했던 누르자한은 국정에 개입하며 후계자인 3황자 쿠람, 즉 미래의 샤 자한과 대립각을 세우며 분쟁을 만들었다. 즉 전반적으로 좋은 사람이자 나름 능력있는 군주였긴 했지만 대단히 복잡한 인물로 딱 하나로 단정짓기는 어려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적으로도 악바르 대제의 관용 정책을 그대로 이었다. 물론 악바르 대제의 극도로 포용적인 정책을 차용한 것은 아니었고 다소 친-이슬람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자한기르는 종교 따위로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거리를 두지는 않았다고 한다.[11] 자한기르가 시크교 교인들을 차별했다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이는 시크 종교 자체를 탄압했다기보다는 시크 교도들 중 일부가 벌인 정치적 행위에 대한 처벌을 내린 것에 더 가깝다. 후세의 샤 자한이나 아우랑제브의 폭압적인 종교 억압 정책에 비하면 선녀로 보일 정도로 유화적인 종교 정책을 폈던 군주였던 것. 자한기르의 재위기 동안 무굴 제국은 여전히 평화 속에 번영을 구가했고 시민들 역시 풍요로운 삶을 누렸다. 후계자 샤 자한이나 아우랑제브 시대에 비하면 확실히 평화로운 시대였다.
서양인들은 자한기르를 쾌락을 추구하는 무신론자에 무능한 인물로 여겼다. 보통 서양의 책들을 통해 인도 역사를 접한 한국 대중들도 이같은 견해를 그대로 따라갔고 일반적으로 자한기르의 이미지는 악바르와 샤 자한 사이의 유약한 황제 정도로 남아있다. 하지만 정작 인도 학계의 평가는 꽤나 다른 편이다. 자한기르는 상당히 유능한 행정가였고 아버지 악바르가 만들어놓은 체계를 그대로 이어나가면서 무굴 제국의 전성기를 지속했다. 애초에 황제가 능력이 없었다면 그 거대한 제국을 23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유지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자한기르는 물론 자기 기준이긴 했지만 정의를 사랑하는 군주로 알려져 있었고, 농민들의 세금을 일부러 낮추어 주는 등 민생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무굴 제국의 경제는 끝없이 성장했고 웬만한 사람들은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자한기르가 아버지 악바르처럼 흠이 없는 완전무결한 군주였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기분에 따라 행동이 확확 바뀌는 경향이 있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등 측근들조차 함부로 짐작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인간이었다. 하지만 서양 학계가 퍼뜨려놓은 이미지처럼 무능하거나 폭군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다만 아무래도 아버지인 악바르와 아들 샤 자한이 워낙 특출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약해보였을 뿐, 실제 자한기르 정도면 꽤나 준수한 편이었다. 아우랑제브가 죽고 난 이후의 무굴 황제들이 끝없는 반란들을 진압하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져내린 것을 생각해보면 자한기르가 나름 능력있는 군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한기르는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는 군주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제왕교육을 받으며 페르시아어, 힌두어, 고대 산스크리트어 등 여러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자한기르는 시와 예술을 좋아해 시인들과 예술가들에게 막대한 후원을 퍼부었고, 무굴 제국의 문화는 그의 재위기에도 악바르 시절처럼 활발히 발달을 이룩했다. 이 시대에 인도 최고의 시성들 중 하나인 툴시다스가 활동했고 수많은 산스크리트어, 페르시아어 시집들이 출간됐다. 건축에도 나름 관심이 많아 150만 루피를 들여 악바르의 영묘를 당시 인도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수준으로 거대한 규모로 지었고, 황궁을 개축하고 대규모 모스크들을 인도 곳곳에 건립하는 등 여러 건축 관련 치적들을 남기기도 했다.
보통 자한기르는 주정뱅이의 이미지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도 술을 지나치게 좋아해 평생을 알코올 중독으로 살았다. 게다가 20명에 달하는 아내를 두어 향락적인 이미지가 있기도 하다. 다만 가정적으로는 상당히 좋은 사람이었다는 후문이 있으며, 심지어 첫째 아내가 죽었을 때에는 너무나도 슬퍼해 며칠 동안 물과 음식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측근들에게 휘둘리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단점이었다. 그는 가장 총애하던 황후 누르자한에게 국가대소사에 관여하도록 허락하기까지 했다.[12] 권력욕이 대단했던 누르자한은 국정에 개입하며 후계자인 3황자 쿠람, 즉 미래의 샤 자한과 대립각을 세우며 분쟁을 만들었다. 즉 전반적으로 좋은 사람이자 나름 능력있는 군주였긴 했지만 대단히 복잡한 인물로 딱 하나로 단정짓기는 어려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이슬람답게 자한기르는 20명에 달하는 황후와 후궁들을 두었다. 다만 상당수는 정치적인 이유로 대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정략결혼이었다고 한다. 자한기르는 16살에 자신의 친척이자 라지푸트족의 공주였던 마이 바이와 1585년에 처음으로 혼례를 올렸고 이후에도 수많은 여인들과 결혼식을 치렀다. 특히 주목할 만한 아내에는 1586년 1월 26일에 우다이 싱의 딸인 자갓 고사인이 있다. 우다이 싱은 한때 악바르와 대립각을 세웠던 인물이었지만 결국 무굴 제국에 굴복했고, 자신의 딸을 보내 자한기르와 결혼시켰다. 자갓 고사인은 아름다운 미모와 톡톡 튀는 재치로 자한기르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아내였다. 자갓 고사인은 3명의 아이를 잉태했지만 그중 2명의 딸들은 영유아기에 죽었고 오직 1명의 아들만이 살아남았다. 이 황자가 바로 쿠람 황자, 후일의 샤 자한이다.
자한기르가 가장 총애했던 아내는 1611년 5월에 혼례를 올린 20번째 아내이자 메르 운 니사였다. '누르 자한'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메르 운 니사는 자한기르와 결혼하기 전 이미 전투 중 전사한 귀족의 아내였지만[13] 그녀의 미모에 반한 자한기르가 직접 그녀를 왕궁에 데려왔다. 메르 운 니사는 엄청난 미모와 재치, 그리고 지혜 등으로 유명했다. 얼굴도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옷을 디자인하거나 심지어는 사냥까지 온갖 곳에 다재다능했기 때문에 자한기르는 그녀에게 푹 빠져서 살았다. 자한기르는 처음에는 그녀를 '왕궁의 빛'이라는 뜻의 '누르 마할'이라고 불렀고 나중에는 심지어 '세계의 빛'이라는 뜻의 '누르 자한'으로 불렀다고 한다.
무굴 제국이 칸다하르를 페르시아에게 빼앗긴 이유가 누르 자한과 쿠람 황자 간의 알력 다툼 때문이었다는 말도 있다. 칸다하르가 위험에 빠지자 당시 국정에 깊이 연관되어 있던 누르 자한이 쿠람 황자에게 칸다하르를 구원하라 명령을 내렸지만, 자신이 칸다하르에 원정을 떠나있는 동안 누르 자한이 음모를 꾸밀 것을 두려워한 쿠람 황자가 이를 거절했고 칸다하르는 결국 함락되었다는 것이다. 쿠람 황자는 누르 자한이 자한기르의 총애를 이용해 자신을 쫒아내고 제 아들 샤르야를 황제에 앉힐 것을 두려워했다. 결국 누르 자한이 제 아들을 황위에 올리려 들면서[14] 이는 쿠람 황자가 자한기르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들 중 하나가 되었다. 자한기르의 말년에는 누르 자한이 동전에 자신의 이름을 황제 바로 옆에 함께 새기기도 했으니 누르 자한이 권력욕이 대단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누르 자한의 권력에 대한 집착이 날로 심해지고 자한기르가 그녀의 아들인 샤르야에게 12,000여 명의 대군을 거느릴 수 있는 권한마저 부여하면서 쿠람 황자는 불안이 증폭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사실상의 황태자이자 황위 계승자로 여겨져 오던 판인데 자칫하면 샤르야에게 황위를 그대로 빼앗길 상황이었기 때문. 결국 쿠람 황자는 황제의 귀환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1623년 자한기르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쿠람 황자는 비하르 일대의 요새를 점령하고 농성했지만 황제가 보낸 진압군이 몰려오자 결국 3년 만에 황제에게 자비를 요청하며 항복했다.[15] 1627년에 자한기르가 사망하자 누르 자한은 계획대로 제 아들을 황위에 올리려 들었다. 쿠람 황자의 후견인이자 당시 재상이던 아사프 칸이 이를 거부하면서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쿠람 황자는 바로 델리로 진군해 무굴의 5대 황제인 샤 자한으로 즉위했다.
자한기르가 가장 총애했던 아내는 1611년 5월에 혼례를 올린 20번째 아내이자 메르 운 니사였다. '누르 자한'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메르 운 니사는 자한기르와 결혼하기 전 이미 전투 중 전사한 귀족의 아내였지만[13] 그녀의 미모에 반한 자한기르가 직접 그녀를 왕궁에 데려왔다. 메르 운 니사는 엄청난 미모와 재치, 그리고 지혜 등으로 유명했다. 얼굴도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옷을 디자인하거나 심지어는 사냥까지 온갖 곳에 다재다능했기 때문에 자한기르는 그녀에게 푹 빠져서 살았다. 자한기르는 처음에는 그녀를 '왕궁의 빛'이라는 뜻의 '누르 마할'이라고 불렀고 나중에는 심지어 '세계의 빛'이라는 뜻의 '누르 자한'으로 불렀다고 한다.
무굴 제국이 칸다하르를 페르시아에게 빼앗긴 이유가 누르 자한과 쿠람 황자 간의 알력 다툼 때문이었다는 말도 있다. 칸다하르가 위험에 빠지자 당시 국정에 깊이 연관되어 있던 누르 자한이 쿠람 황자에게 칸다하르를 구원하라 명령을 내렸지만, 자신이 칸다하르에 원정을 떠나있는 동안 누르 자한이 음모를 꾸밀 것을 두려워한 쿠람 황자가 이를 거절했고 칸다하르는 결국 함락되었다는 것이다. 쿠람 황자는 누르 자한이 자한기르의 총애를 이용해 자신을 쫒아내고 제 아들 샤르야를 황제에 앉힐 것을 두려워했다. 결국 누르 자한이 제 아들을 황위에 올리려 들면서[14] 이는 쿠람 황자가 자한기르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들 중 하나가 되었다. 자한기르의 말년에는 누르 자한이 동전에 자신의 이름을 황제 바로 옆에 함께 새기기도 했으니 누르 자한이 권력욕이 대단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누르 자한의 권력에 대한 집착이 날로 심해지고 자한기르가 그녀의 아들인 샤르야에게 12,000여 명의 대군을 거느릴 수 있는 권한마저 부여하면서 쿠람 황자는 불안이 증폭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사실상의 황태자이자 황위 계승자로 여겨져 오던 판인데 자칫하면 샤르야에게 황위를 그대로 빼앗길 상황이었기 때문. 결국 쿠람 황자는 황제의 귀환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1623년 자한기르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쿠람 황자는 비하르 일대의 요새를 점령하고 농성했지만 황제가 보낸 진압군이 몰려오자 결국 3년 만에 황제에게 자비를 요청하며 항복했다.[15] 1627년에 자한기르가 사망하자 누르 자한은 계획대로 제 아들을 황위에 올리려 들었다. 쿠람 황자의 후견인이자 당시 재상이던 아사프 칸이 이를 거부하면서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쿠람 황자는 바로 델리로 진군해 무굴의 5대 황제인 샤 자한으로 즉위했다.
- 압둘 아지즈의 연구에 의하면 자한기르 때 국고에 쌓인 금이 7톤, 은이 1116톤, 다이아몬드가 80파운드(500만캐럿 이상), 루비와 에메랄드가 각 100파운드(각 650만캐럿 이상), 진주가 600파운드, 그 외 각종 보석이 무진장했다고 하니 그 당시 무굴 제국이 굉장히 부유한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종종 무굴 제국의 부유함은 프랑스와 페르시아를 합한 것보다 더 굉장하다고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 앞서도 말했지만 영국 대사 토머스 로와 함께 놀이를 하는 것을 굉장히 즐겼다. 특히 토머스 로 앞에 인도 장인들이 만든 복제품과 서양 화가들이 만든 원본을 늘어놓고 그가 원본을 고르게 하는 놀이를 재미있어했다. 토머스 로 경이 인도산 물건과 서양산 물건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해 답을 맞히지 못하면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고.
- 자한기르는 황태자 시절 아버지인 악바르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을 대단히 후회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 '알라하바드에 있던 소인배들이 나를 모략해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게 만들었다'고 썼고, 자신은 반란을 전혀 일으킬 생각이 없었다고 변호했다. 물론 자한기르가 자의로 반란을 일으킨 건 확실하지만 어쨌든 악바르에 대한 반란은 인생 최악의 실수들 중 하나로 여겼다고.
- 생존 당시 그의 궁정에 도도를 기른 정황이 있으며, 자한기르가 궁정 화가 우스타드 만수르에 궁정에서 사육중인 새들을 그림으로 그릴 때 도도 또한 그려져 있다.관련 링크
[1] 現 인도 우타르프라데시.[2] 現 파키스탄 아자드 카슈미르.[3] 악바르는 바로 아들의 얼굴을 보러가고 싶어했지만 출산직후 산모와 아이를 보면 액운이 낀다는 힌두 속설 때문에 41일이 지나고서야 아들을 볼 수 있었다.[4] 자한기르는 최대한 빨리 제위를 계승하고 싶어했다고 한다.[5] 이전에 악바르에게 격렬하게 저항했던 프라타프 싱의 후계자이자 아들이었다.[6] 이때 라나 아마르 싱이 무굴 제국에 맹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무굴 제국의 우위를 인정하며, 둘째 아마르 싱의 아들을 무굴 궁정으로 보내 살게 하며 셋째 치토르 요새 등을 포함한 모든 메와르 영토를 무굴 제국에 합병한다는 내용이었다.[7] 참고로 자한기르는 라나 아마르 싱에게 후한 대접을 베풀고 그의 아들에게 5,000명의 병사들을 거느릴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8] Sir Thomas Roe(1581~ 1644). 무굴 제국 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 신성 로마 제국 등 다양한 나라들을 돌아다닌 베테랑 외교관이었다. 모험가 기질이 있어서 저 멀리 남미까지 건너가 아마존 우림을 직접 답사하기도 했고 심지어 남극 탐험을 후원하기까지 했다.[9] 자한기르는 자신의 회고록에는 로 경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다.[10] 특히 인도 역사를 훑어보면 알겠지만 인도에선 웬만한 왕국 내부에서도 허구한 날 반란이 터지고 심지어 왕족들 사이에서도 틈이 날 때마다 쿠데타가 일어났다. 중앙집권체제가 강하지 않았던 인도에서 이 모든 걸 제압하고 대제국을 유지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11] 제 손녀손자들의 가정교사에 힌두교도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12] 다만 외교와 핵심적인 업무에는 누르자한의 개입을 허락치 않았다.[13] 워낙 자한기르가 그녀를 아꼈기 때문에 자한기르가 일부러 그녀의 남편을 죽게 만들고 그녀를 취한게 아니냐는 소문마저 돌았다.[14] 누르 자한의 아들 샤르야는 쿠람 황자보다 훨씬 능력도 부족하고 어렸다. 당연히 쿠람 황자가 누르 자한을 곱게 볼 리가 없었다.[15] 일반적인 경우라면 쿠람 황자가 황제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은 불가능했겠지만 당시는 이미 자한기르가 시름시름하며 죽을 날이 머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16] 라히미가 메카로 순례를 떠나기 위해 항해하는 도중 중간에 탈취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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