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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택 李亨澤|Lee Hyung-taik | |
출생 | |
국적 | |
거주지 | |
학력 | |
신체 | |
주손 | 오른손 (한 손 백핸드) |
프로 입단 | 1995년 삼성증권 입단 |
소속사 | |
소속 구단 | |
배우자 | 이수안(1976년생, 2004년 결혼)[6] |
자녀 | |
병역 | |
링크 | |
대한민국의 테니스 선수 출신 코치.
강원도 춘천에 위치한 이형택 테니스아카데미의 원장이며, 그리고 KBS N SPORTS, MBC SPORTS+, tvN SPORTS의 테니스 해설 위원이기도 하다. 아시아 선수가 성공하기 힘든 테니스에서 고군분투하며 대한민국 테니스의 자존심으로 활약한 선수였다. 오른손잡이이며 한손 백핸드를 구사하고 하드 코트에 강한 특성을 보였다. 개인 세계 랭킹 최고 순위는 ATP 싱글 랭킹 36위(2007년 8월 6일), 복식 세계 랭킹 95위(2006년 1월 16일)로 단식과 복식에서 모두 세계 100위권 안에 들었던 선수였고 선수 생활 때 온갖 한국 남자 테니스 사상 최초 기록과 최연소 기록을 세우던 선수였다.
한국 테니스계는 2009년 이형택 은퇴 이후 이형택의 공백을 메워줄 후계자 육성에 실패하면서 수년간의 긴 침체기에 빠졌다. 2015년에 들어서야 정현이 맹활약하기 시작하면서 이형택의 후계자가 등장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국 테니스계에 이형택이란 존재는 한국 선수도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존재이면서 한편으로는 뛰어넘기 힘든 높은 기준이기도 했다.
강원도 춘천에 위치한 이형택 테니스아카데미의 원장이며, 그리고 KBS N SPORTS, MBC SPORTS+, tvN SPORTS의 테니스 해설 위원이기도 하다. 아시아 선수가 성공하기 힘든 테니스에서 고군분투하며 대한민국 테니스의 자존심으로 활약한 선수였다. 오른손잡이이며 한손 백핸드를 구사하고 하드 코트에 강한 특성을 보였다. 개인 세계 랭킹 최고 순위는 ATP 싱글 랭킹 36위(2007년 8월 6일), 복식 세계 랭킹 95위(2006년 1월 16일)로 단식과 복식에서 모두 세계 100위권 안에 들었던 선수였고 선수 생활 때 온갖 한국 남자 테니스 사상 최초 기록과 최연소 기록을 세우던 선수였다.
한국 테니스계는 2009년 이형택 은퇴 이후 이형택의 공백을 메워줄 후계자 육성에 실패하면서 수년간의 긴 침체기에 빠졌다. 2015년에 들어서야 정현이 맹활약하기 시작하면서 이형택의 후계자가 등장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국 테니스계에 이형택이란 존재는 한국 선수도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존재이면서 한편으로는 뛰어넘기 힘든 높은 기준이기도 했다.
연도 | 내역 |
2014 | 제17회 인천 아시안 게임 남자 테니스 국가대표 |
2014 | 이형택테니스아카데미재단 이사장 |
2010.11 | 건국대학교 홍보 대사 |
2010.05 | KBS N 해설 위원 |
2010.01 | MBC ESPN 해설 위원 |
2008 | 제29회 베이징 올림픽 남자 테니스 국가대표 |
2007.04 | 해남공룡박물관 홍보 대사 |
2006 | 제15회 도하 아시안 게임 남자 테니스 국가대표 |
2004 | 제28회 아테네 올림픽 남자 테니스 국가대표 |
2002 | 제14회 부산 아시안 게임 남자 테니스 국가대표 |
2000 | 제27회 시드니 올림픽 남자 테니스 국가대표 |
1998 | 제13회 방콕 아시안 게임 남자 테니스 국가대표 |
연도 | 내역 |
2014 | 국제테니스연맹 데이비스컵 공로상 |
2010 | 제91회 전국체육대회 남자 일반부 단체전 금메달 |
2008 | ATP투어 던롭월드챌린저 단식 준우승 |
2008 | ATP투어 게이오챌린저대회 우승 |
2008 | 제89회 전국체육대회 테니스 남자 일반부 단체전 금메달 |
2008 | 삼성증권배 국제남자챌린저대회 단식 우승 |
2006 | ATP투어 챌린저대회 피프스서드뱅크 클래식 단식 우승 |
2006 | ATP투어 챌린저대회 로마노컵 복식 우승 |
2006 | 부산오픈 국제남자 챌린저 테니스대회 단식 우승 |
2006 | 도하 아시안 게임 테니스 남자 단체전 금메달 |
2006 | 도하 아시안 게임 테니스 남자 단식 은메달 |
2005 | 삼성증권배 국제남자 챌린저 테니스대회 단식 우승 |
2004 | 국제남자 챌린저 테니스대회 우승 |
2003 | ATP투어 아디다스 인터내셔널 단식 우승 |
2001 | 미국 클레이코트 남자 챔피언십 준우승 |
2000 | 부산 남자 OPEN 단식 우승 |
2000 | 미국 BRONX 챌린저 단식 우승, 복식 준우승 |
1999 | 일본 요코하마 챌린저 단식 우승 |
1999 | 일본 고베 퓨쳐스 단식 우승, 복식 준우승 |
1999 | 스페인유니버시아드 복식 우승 |
1998 | 방콕아시아경기대회 테니스 남자 단체전 금메달 |
단복식 | 타이틀 | 연도 | 대회 |
단식 | ATP 투어 | 2003.1.6 | 메디뱅크 인터내셔널, 시드니 |
복식 | 2003.2.10 | SAP 오픈, 산 호세[11] | |
단식 | 챌린저 | 1999.11.01 | 일본 요코하마 |
2000.08.14 | 미국 브롱크스 | ||
2000.11 | 대한민국 삼성증권배 챌린저, 서울 | ||
2001.10.22 | |||
2002.11.25 | 일본 요코하마 | ||
2003.09.15 | 대한민국 삼성증권배 챌린저, 서울 | ||
2004.09.06 | |||
2005.10.24 | |||
2006.05.29 | 대한민국 부산 오픈, 부산 | ||
2006.07.24 | 미국 렉싱턴 | ||
2006.10.30 | 대한민국 삼성증권배 챌린저 대회, 서울 | ||
2008.10.20 | |||
2008.11.17 | 일본 요코하마 |
1995년 프로 전향 이후 1995년 4월에 한국의 서울에서 열린 ATP 투어 KAL컵 코리아 오픈 남자 단식에 주최 측이 초청한 본선 와일드카드를 받고 처음으로 ATP 투어 남자 단식 본선에 출전하여 본선 32강전(1회전)에서 국내 최강자이던 3년 선배 윤용일을 2-0(7-6<9-7>, 6-3)으로 꺾고 역시 처음으로 ATP 투어 남자 단식에서 16강에 진출하였다. 하지만 16강전에선 세계 랭킹 82위로 대회 8번 시드를 받은 그렉 루세드스키[12](캐나다)에게 세트 스코어 0-2(4-6, 4-6)로 완패하여 탈락하였다.
1995년 5월에 한국 테니스 서킷(퓨처스 대회 전신) 1차 대회 남자 단식에서 만 19세 4개월의 나이로 퓨처스급 대회 첫 우승을 달성했다. 1995년 10월엔 한국의 서울에서 개최된 서울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에 출전해서 4강에 진출하면서 이형택 자신의 세계 랭킹 최고 순위 기록인 280위를 돌파하여 세계 랭킹 244위까지 세계 랭킹 순위를 상승시켰다.
이형택은 1995년에 테니스 서킷 대회 남자 단식 우승은 1번이었으나 4강에도 여러 번 올라갔고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에서도 1번 4강에 진출하면서 1995년 연말 세계 랭킹 순위는 241위로 프로로 전향한 지 1년도 안 되어 국내 선수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다. 물론 이형택이 국내 선수들 중에서 독주한 것은 아니며 1999년까지는 3년 선배인 윤용일과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였다.
1996년 4월에 이형택은 한국의 서울에서 열린 ATP 투어 KAL컵 코리아 오픈 남자 단식에 주최측이 초청한 본선 와일드카드를 받고 본선에 출전하였으나 본선 32강전(1회전)에서 세계 랭킹 111위인 알렉스 라둘레스쿠(독일)에게 세트 스코어 1-2(3-6, 6-3, 1-6)로 패하여 탈락하였다. 그리고 1996년 9월에 이형택은 중국의 베이징에서 개최된 베이징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에 출전하여 4강에 올랐다.
이형택은 1998년 5월 말에서 한국에서 열린 한국 1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 우승하였고 연이어 6월 초에 열린 한국 2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도 우승하였다. 그리고 이형택은 캐나다로 출국하여 6월 말에 캐나다의 퀘벡에서 개최된 캐나다 2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도 우승하고, 연이어 7월 초에 역시 캐나다의 퀘벡에서 열린 캐나다 3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도 우승을 달성했다.
이렇게 이형택은 2달 동안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 4연속 우승을 거두었고 1998년 8월엔 미국 켄터키 주 렉싱턴에서 개최된 FTB 클래식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에 출전하여 처음으로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에 결승전에 올라 준우승하였다. 1998년 8월 말엔 그랜드슬램 대회인 US 오픈 남자 단식 예선전에 출전했으나 예선전에서 탈락했다. 그리고 1998년 10월에 이형택은 일본에서 열린 일본 4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도 우승하였다. 여기에 이형택은 1998년 12월에는 태국의 방콕에서 개최된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남자 테니스 단체전에서 한국팀의 일원으로 출전하여 금메달을 받음으로서 군면제 혜택을 받게 되었다.
1999년 3월에 이형택은 일본의 이사와에서 열린 일본 1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 우승하였고 1999년 5월초에는 중국의 베이징에서 개최된 중국 1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 우승하였으며 5월 중순에 중국의 톈진에서 열린 중국 2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도 우승하였다. 1999년 5월 말에 한국의 서울에서 개최된 코리아 2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선 준우승하였다. 이렇게 이형택은 3개월 동안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 우승 3회와 준우승 1회를 거두면서 1999년 6월 초엔 세계 랭킹 199위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세계 랭킹 200위 안에 진입하였다.
1999년 9월에 이형택은 영국의 본머스에서 개최된 ATP 투어 브라이턴 오픈 남자 단식에 주최 측이 제공한 와일드카드를 받고 본선에 출전하였으나 본선 32강전(1회전)에서 세계 랭킹 48위로 대회 5번 시드를 받은 스테판 쿠벡(오스트리아)에게 세트 스코어 0-2(4-6, 6-7<4-7>)로 완패하였다.
1999년 10월초에는 중국의 상하이에서 열린 ATP 투어 하이네켄 오픈 남자 단식에 출전한 이형택은 세계 랭킹이 288위였기에 예선전부터 출전하였는데 예선 3라운드를 모두 통과하며 본선에 진출하였다. ATP 투어 하이네켄 오픈 남자 단식 본선 32강전(1회전)에선 세계 랭킹 100위인 라몬 델가도(파라과이)를 2-1(3-6, 6-4, 6-2)로 꺾고 16강에 진출했다. 하지만 16강전에선 세계 랭킹 153위인 토드 우드브리지(호주)와 풀세트 접전을 벌였으나 결국 세트 스코어 1-2(7-5, 2-6, 6-7<8-10>)로 아깝게 역전패하여 탈락하고 말았다.
1999년 10월말에 이형택은 일본의 오사카에서 개최된 일본 5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 우승하였다. 그리고 이형택은 1999년 11월에는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열린 요코하마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에서 우승함으로서 이형택에게 있어 통산 첫 챌린저 대회 남자 단식 우승을 만 23세 10개월의 나이로 해냈다. 그리고 이 우승으로 이형택은 세계 랭킹 190위까지 올라서며 자신의 세계 랭킹 최고 순위 기록도 경신하였다.
1995년 5월에 한국 테니스 서킷(퓨처스 대회 전신) 1차 대회 남자 단식에서 만 19세 4개월의 나이로 퓨처스급 대회 첫 우승을 달성했다. 1995년 10월엔 한국의 서울에서 개최된 서울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에 출전해서 4강에 진출하면서 이형택 자신의 세계 랭킹 최고 순위 기록인 280위를 돌파하여 세계 랭킹 244위까지 세계 랭킹 순위를 상승시켰다.
이형택은 1995년에 테니스 서킷 대회 남자 단식 우승은 1번이었으나 4강에도 여러 번 올라갔고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에서도 1번 4강에 진출하면서 1995년 연말 세계 랭킹 순위는 241위로 프로로 전향한 지 1년도 안 되어 국내 선수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다. 물론 이형택이 국내 선수들 중에서 독주한 것은 아니며 1999년까지는 3년 선배인 윤용일과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였다.
1996년 4월에 이형택은 한국의 서울에서 열린 ATP 투어 KAL컵 코리아 오픈 남자 단식에 주최측이 초청한 본선 와일드카드를 받고 본선에 출전하였으나 본선 32강전(1회전)에서 세계 랭킹 111위인 알렉스 라둘레스쿠(독일)에게 세트 스코어 1-2(3-6, 6-3, 1-6)로 패하여 탈락하였다. 그리고 1996년 9월에 이형택은 중국의 베이징에서 개최된 베이징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에 출전하여 4강에 올랐다.
이형택은 1998년 5월 말에서 한국에서 열린 한국 1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 우승하였고 연이어 6월 초에 열린 한국 2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도 우승하였다. 그리고 이형택은 캐나다로 출국하여 6월 말에 캐나다의 퀘벡에서 개최된 캐나다 2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도 우승하고, 연이어 7월 초에 역시 캐나다의 퀘벡에서 열린 캐나다 3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도 우승을 달성했다.
이렇게 이형택은 2달 동안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 4연속 우승을 거두었고 1998년 8월엔 미국 켄터키 주 렉싱턴에서 개최된 FTB 클래식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에 출전하여 처음으로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에 결승전에 올라 준우승하였다. 1998년 8월 말엔 그랜드슬램 대회인 US 오픈 남자 단식 예선전에 출전했으나 예선전에서 탈락했다. 그리고 1998년 10월에 이형택은 일본에서 열린 일본 4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도 우승하였다. 여기에 이형택은 1998년 12월에는 태국의 방콕에서 개최된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남자 테니스 단체전에서 한국팀의 일원으로 출전하여 금메달을 받음으로서 군면제 혜택을 받게 되었다.
1999년 3월에 이형택은 일본의 이사와에서 열린 일본 1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 우승하였고 1999년 5월초에는 중국의 베이징에서 개최된 중국 1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 우승하였으며 5월 중순에 중국의 톈진에서 열린 중국 2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도 우승하였다. 1999년 5월 말에 한국의 서울에서 개최된 코리아 2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선 준우승하였다. 이렇게 이형택은 3개월 동안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 우승 3회와 준우승 1회를 거두면서 1999년 6월 초엔 세계 랭킹 199위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세계 랭킹 200위 안에 진입하였다.
1999년 9월에 이형택은 영국의 본머스에서 개최된 ATP 투어 브라이턴 오픈 남자 단식에 주최 측이 제공한 와일드카드를 받고 본선에 출전하였으나 본선 32강전(1회전)에서 세계 랭킹 48위로 대회 5번 시드를 받은 스테판 쿠벡(오스트리아)에게 세트 스코어 0-2(4-6, 6-7<4-7>)로 완패하였다.
1999년 10월초에는 중국의 상하이에서 열린 ATP 투어 하이네켄 오픈 남자 단식에 출전한 이형택은 세계 랭킹이 288위였기에 예선전부터 출전하였는데 예선 3라운드를 모두 통과하며 본선에 진출하였다. ATP 투어 하이네켄 오픈 남자 단식 본선 32강전(1회전)에선 세계 랭킹 100위인 라몬 델가도(파라과이)를 2-1(3-6, 6-4, 6-2)로 꺾고 16강에 진출했다. 하지만 16강전에선 세계 랭킹 153위인 토드 우드브리지(호주)와 풀세트 접전을 벌였으나 결국 세트 스코어 1-2(7-5, 2-6, 6-7<8-10>)로 아깝게 역전패하여 탈락하고 말았다.
1999년 10월말에 이형택은 일본의 오사카에서 개최된 일본 5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 우승하였다. 그리고 이형택은 1999년 11월에는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열린 요코하마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에서 우승함으로서 이형택에게 있어 통산 첫 챌린저 대회 남자 단식 우승을 만 23세 10개월의 나이로 해냈다. 그리고 이 우승으로 이형택은 세계 랭킹 190위까지 올라서며 자신의 세계 랭킹 최고 순위 기록도 경신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이형택/2000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이형택/2001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이형택/2002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이형택/2003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이형택/2004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이형택/2005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이형택/2006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이형택/2007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이형택/2008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2009년 1월 첫째주에 인도의 첸나이에서 열린 ATP 투어 첸나이 오픈 남자 단식에 출전한 이형택은 본선 자동 출전권을 받아서 본선에 출전하였으나 본선 32강전(1회전)에서 세계 랭킹 55위로 대회 8번 시드를 받은 마르셀 그라노예르스(스페인)에게 세트 스코어 0-2(4-6, 5-7)로 완패하여 탈락하고 말았다.
2009년 1월 세째주에 호주 오픈 남자 단식에 출전 신청할 때의 이형택의 세계 랭킹이 107위여서 본선 자동 출전권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형택은 예선전부터 나섰으나 예선 1라운드에서 패하여 탈락하였다.
2009년 투어 초반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왼쪽 무릎 부상 여파로 좋지 못한 컨디션이었던 이형택은 최악의 부진에 빠지면서 2009년을 마지막 시즌으로 은퇴를 결심하는데 2009년 5월에 열린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과 2009년 6월에 열린 윔블던 남자 단식에 출전하기 위해 치료에 전념하였으나 결국 왼쪽 무릎 부상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손목 통증까지 겹치자 예선전 출전을 포기했다.
부상 여파가 지속되면서 결국 이형택은 상당수 대회 출전을 포기하고 2009년 7월에 열린 데이비스컵, 2009년 10월에 열린 삼성증권배 챌린저 투어 남자 대회에만 출전한 후 2009년 11월 공식 은퇴하게 되었는데 이형택이 현역 선수로 달성한 커리어는 세계 랭킹 최고 36위,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16강(4회전) 진출 2회,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32강(3회전) 진출 4회, 마스터스 시리즈 남자 단식 16강 진출 3회, ATP 투어 남자 단식 우승 1회, ATP 투어 남자 단식 준우승 1회, ATP 투어 남자 단식 4강 진출 5회[13],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 우승 13회[14]를 기록하였다. 현역 선수로 달성한 커리어로 보면 레전드였던 한국 테니스 선수라고 할 수 있다.
2009년 1월 세째주에 호주 오픈 남자 단식에 출전 신청할 때의 이형택의 세계 랭킹이 107위여서 본선 자동 출전권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형택은 예선전부터 나섰으나 예선 1라운드에서 패하여 탈락하였다.
2009년 투어 초반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왼쪽 무릎 부상 여파로 좋지 못한 컨디션이었던 이형택은 최악의 부진에 빠지면서 2009년을 마지막 시즌으로 은퇴를 결심하는데 2009년 5월에 열린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과 2009년 6월에 열린 윔블던 남자 단식에 출전하기 위해 치료에 전념하였으나 결국 왼쪽 무릎 부상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손목 통증까지 겹치자 예선전 출전을 포기했다.
부상 여파가 지속되면서 결국 이형택은 상당수 대회 출전을 포기하고 2009년 7월에 열린 데이비스컵, 2009년 10월에 열린 삼성증권배 챌린저 투어 남자 대회에만 출전한 후 2009년 11월 공식 은퇴하게 되었는데 이형택이 현역 선수로 달성한 커리어는 세계 랭킹 최고 36위,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16강(4회전) 진출 2회,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32강(3회전) 진출 4회, 마스터스 시리즈 남자 단식 16강 진출 3회, ATP 투어 남자 단식 우승 1회, ATP 투어 남자 단식 준우승 1회, ATP 투어 남자 단식 4강 진출 5회[13],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 우승 13회[14]를 기록하였다. 현역 선수로 달성한 커리어로 보면 레전드였던 한국 테니스 선수라고 할 수 있다.
2009년 11월 1일 은퇴식을 갖고 선수 생활에서 물러났다. 이후 춘천에 이형택 테니스 아카데미를 열고 테니스 유망주들을 길러내고 있으며, KBS N 스포츠의 해설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런데 2013년 5월 현역 복귀를 선언하며 코트로 돌아왔다! 9월 한국선수권대회를 정식 복귀 무대로 보고 있다고. 이번 복귀는 이형택이 만37살의 나이에 복귀를 선언할 때까지도 이형택 이상의 선수를 키워내지 못한 한국 테니스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올 것 으로 보인다. 경향신문 인터뷰 테니스 코리아 인터뷰
이후엔 주로 코치에 전념하면서 복식경기를 병행중. 2015년 3월엔, 유망주 홍성찬 선수의 전담 코치를 하며 홍성찬 선수와 퓨처스대회에 나가 1회전에서 톱시드 복식조를 꺾기도 했다.
2015년 MBC SPORTS+에서 중계 방송된 국제 프리미어 테니스리그 대회에서 해설을 맡았으며, 2016년 대회에서도 해설을 맡았다.
2016년에 다시 KBS N SPORTS의 해설 위원으로 복귀했다.
2019년 8월 13일부터 아프리카TV에서 개인 방송을 시작했다. 닉네임은 머드Lee형택. 첫 방송은 간단한 토크 방송으로 캐스터안의 도움으로 진행되었으며 캐스터안의 팬들이 이형택의 방송 런칭을 축하하며 별풍선을 많이 쏴주기도 했다. 본인은 차후 테니스 방송 및 유튜브도 할 예정이라고 한다.
2021년 5월 22일 기준 [머드Lee] 이형택 TV 유튜브# 구독자 4.52만명이고, 테니스, 농구 등의 콘텐츠로 운영하고 있다. 특히 동호회 레벨 혹은 중고교급 유망주 선수들과 진지하게 테니스 친선전을 갖는 경우가 많은데 은퇴한 지 한참 지났는데도 아마추어급 선수는 1~2세트 내외 경기라면 가볍게 압살하는 대단한 기량을 선보이고 있다. 이와 더불어 경기 후 약점이나 부족한 부분을 언급하며 개선할 방향을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는데, 한국 테니스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정말 존경스럽고 대단하다는 댓글이 무수히 달리고 있다.
그런데 2013년 5월 현역 복귀를 선언하며 코트로 돌아왔다! 9월 한국선수권대회를 정식 복귀 무대로 보고 있다고. 이번 복귀는 이형택이 만37살의 나이에 복귀를 선언할 때까지도 이형택 이상의 선수를 키워내지 못한 한국 테니스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올 것 으로 보인다. 경향신문 인터뷰 테니스 코리아 인터뷰
이후엔 주로 코치에 전념하면서 복식경기를 병행중. 2015년 3월엔, 유망주 홍성찬 선수의 전담 코치를 하며 홍성찬 선수와 퓨처스대회에 나가 1회전에서 톱시드 복식조를 꺾기도 했다.
2015년 MBC SPORTS+에서 중계 방송된 국제 프리미어 테니스리그 대회에서 해설을 맡았으며, 2016년 대회에서도 해설을 맡았다.
2016년에 다시 KBS N SPORTS의 해설 위원으로 복귀했다.
2019년 8월 13일부터 아프리카TV에서 개인 방송을 시작했다. 닉네임은 머드Lee형택. 첫 방송은 간단한 토크 방송으로 캐스터안의 도움으로 진행되었으며 캐스터안의 팬들이 이형택의 방송 런칭을 축하하며 별풍선을 많이 쏴주기도 했다. 본인은 차후 테니스 방송 및 유튜브도 할 예정이라고 한다.
2021년 5월 22일 기준 [머드Lee] 이형택 TV 유튜브# 구독자 4.52만명이고, 테니스, 농구 등의 콘텐츠로 운영하고 있다. 특히 동호회 레벨 혹은 중고교급 유망주 선수들과 진지하게 테니스 친선전을 갖는 경우가 많은데 은퇴한 지 한참 지났는데도 아마추어급 선수는 1~2세트 내외 경기라면 가볍게 압살하는 대단한 기량을 선보이고 있다. 이와 더불어 경기 후 약점이나 부족한 부분을 언급하며 개선할 방향을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는데, 한국 테니스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정말 존경스럽고 대단하다는 댓글이 무수히 달리고 있다.
2022년 7월 창단한 오리온 테니스단 초대 감독을 맡았다.
아시아, 특히 테니스 불모지 출신으로 세계 랭킹 40~100위대를 유지했던 투어 중견급 선수였다. 꾸준히 해외 무대에서 뛰었다면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겠지만 데이비스 컵, 아시안 게임, 올림픽 등 국가대표로 대회 출전하는 것을 종목불문 중요시하는 한국 스포츠계의 풍토 때문에 실제 선수 커리어에 도움이 안되는 종합 대회, 단체전에 매번 차출되어 나갔고, 국내의 낮은 저변 확대를 위해 국내 대회에 강제로 출전해야 했던 것 등 때문에 세계 랭킹 순위 관리가 힘들어 더 올라갈 기회를 놓치고 아쉽게 커리어를 마감한 경우다.
게다가 이형택의 본격적인 해외 원정 투어 여행도 외국 선수들과 비교해선 늦은 편이었다. 이형택의 프로 전향은 1995년에 했다고 나와있지만 이형택이 실제 해외 원정 투어 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것은 이형택 본인이 2016년에 테니스코리아 잡지에 기고한 칼럼에 따르면 대학 졸업 후에서야 본격적으로 해외 원정 투어를 시작했다고 한다. 다른 나라 프로 테니스 선수들이 빠르면 주니어 연령 막바지 시기나 늦어도 시니어 연령 초창기에 본격적으로 해외 투어를 도는 활동을 시작하는 것과 비교하면 이형택은 거의 5년 정도 늦게 해외 원정 투어를 다니기 시작한 것으로 이형택이 보다 빨리 해외 원정 투어를 시작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커리어를 쌓고 은퇴했을 수도 있다.
이런저런 면에서 한국 테니스 환경에서 나오기엔 굉장히 뛰어난 테니스 선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1998년에 자신이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테니스 단체전 금메달로 병역혜택을 받은 뒤,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테니스 단체전에서 한국팀의 주역으로 맹활약해 금메달을 따내며 전웅선, 김선용 등 후배 테니스 선수들의 합법적 병역 브로커 역할을 해준 건 천만 다행(...). 이형택이 은퇴한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은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이후 처음으로 테니스 종목에서 노골드에 그쳤다.아시아 끝판왕이었던 이형택의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15]
이형택 선수가 아시아에서 최상급(3손가락)에 들었던 건 맞지만 태국의 테니스 영웅인 파라돈 스리차판을 넘진 못했다. 이형택이 스리차판에게 상대 전적도 밀리고, 아시안 게임 남자 단식 결승에서도 이형택이 스리차판에게 패배를 기록했다. 그리고 스리차판 외에 대만의 루옌쉰이나 일본의 마츠오카 슈조 등도 투어 대회에서 거뒀던 실적으론 이형택과 맞먹는다.[16]
그리고 2010년대에 등장한 새로운 세대인 니시코리 케이는 2014년 시즌 절정의 기량을 보여주면서 스리차판의 커리어를 넘어섰다고 평가받는다.[17] 다만 스리차판은 전성기 시절에 포스가 굉장했으나 전성기가 굉장히 짧았고 은퇴후엔 연예계 활동이나 타종목 외도(레이싱이나 골프 등)에 힘쓰고 있어서 자국내 테니스계에 남기는 업적으론 이형택 선수가 더 높은게 사실이다. 이형택급의 실적을 기록한 선수가 대만과 일본에도 있다곤 하나 그 나라에서 테니스 영웅으로 대접받는 극소수기도 하고. 한국 테니스계에 있어서 이형택이 전무후무한 존재란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한국 남자 테니스계는 이형택이 은퇴한 후 5년이 넘게 이형택의 뒤를 이을 선수들을 육성하지 못하다가 2015년에야 정현이 등장하여 이형택 이후 한국 테니스 남자 선수로는 처음으로 세계 랭킹 100위 안에 진입하였고 정현은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에도 한국 테니스 선수로는 이형택 이후 처음으로 출전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형택이 쌓은 커리어를 정현이 따라잡으려면 상당한 기간 동안 정현이 꾸준한 기량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현은 2018년 1월 그랜드슬램인 호주 오픈에서 노박 조코비치를 3-0으로 이기며 이형택이 이룬 그랜드슬램 16강을 넘어선 8강 진출을 이뤄냈고, 이어 8강에서 테니스 샌드그렌까지 격파하고 4강에 오르며 이형택의 최고 랭킹이었던 36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렸다. 다만 이후 정현은 끝없이 침몰 중이기에.. 이형택의 아성을 넘지는 못할 듯하다. 권순우가 그의 뒤를 이어서 2021년 18년만에 투어 우승을 하였다.
게다가 이형택의 본격적인 해외 원정 투어 여행도 외국 선수들과 비교해선 늦은 편이었다. 이형택의 프로 전향은 1995년에 했다고 나와있지만 이형택이 실제 해외 원정 투어 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것은 이형택 본인이 2016년에 테니스코리아 잡지에 기고한 칼럼에 따르면 대학 졸업 후에서야 본격적으로 해외 원정 투어를 시작했다고 한다. 다른 나라 프로 테니스 선수들이 빠르면 주니어 연령 막바지 시기나 늦어도 시니어 연령 초창기에 본격적으로 해외 투어를 도는 활동을 시작하는 것과 비교하면 이형택은 거의 5년 정도 늦게 해외 원정 투어를 다니기 시작한 것으로 이형택이 보다 빨리 해외 원정 투어를 시작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커리어를 쌓고 은퇴했을 수도 있다.
이런저런 면에서 한국 테니스 환경에서 나오기엔 굉장히 뛰어난 테니스 선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1998년에 자신이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테니스 단체전 금메달로 병역혜택을 받은 뒤,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테니스 단체전에서 한국팀의 주역으로 맹활약해 금메달을 따내며 전웅선, 김선용 등 후배 테니스 선수들의 합법적 병역 브로커 역할을 해준 건 천만 다행(...). 이형택이 은퇴한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은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이후 처음으로 테니스 종목에서 노골드에 그쳤다.
이형택 선수가 아시아에서 최상급(3손가락)에 들었던 건 맞지만 태국의 테니스 영웅인 파라돈 스리차판을 넘진 못했다. 이형택이 스리차판에게 상대 전적도 밀리고, 아시안 게임 남자 단식 결승에서도 이형택이 스리차판에게 패배를 기록했다. 그리고 스리차판 외에 대만의 루옌쉰이나 일본의 마츠오카 슈조 등도 투어 대회에서 거뒀던 실적으론 이형택과 맞먹는다.[16]
그리고 2010년대에 등장한 새로운 세대인 니시코리 케이는 2014년 시즌 절정의 기량을 보여주면서 스리차판의 커리어를 넘어섰다고 평가받는다.[17] 다만 스리차판은 전성기 시절에 포스가 굉장했으나 전성기가 굉장히 짧았고 은퇴후엔 연예계 활동이나 타종목 외도(레이싱이나 골프 등)에 힘쓰고 있어서 자국내 테니스계에 남기는 업적으론 이형택 선수가 더 높은게 사실이다. 이형택급의 실적을 기록한 선수가 대만과 일본에도 있다곤 하나 그 나라에서 테니스 영웅으로 대접받는 극소수기도 하고. 한국 테니스계에 있어서 이형택이 전무후무한 존재란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한국 남자 테니스계는 이형택이 은퇴한 후 5년이 넘게 이형택의 뒤를 이을 선수들을 육성하지 못하다가 2015년에야 정현이 등장하여 이형택 이후 한국 테니스 남자 선수로는 처음으로 세계 랭킹 100위 안에 진입하였고 정현은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에도 한국 테니스 선수로는 이형택 이후 처음으로 출전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형택이 쌓은 커리어를 정현이 따라잡으려면 상당한 기간 동안 정현이 꾸준한 기량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현은 2018년 1월 그랜드슬램인 호주 오픈에서 노박 조코비치를 3-0으로 이기며 이형택이 이룬 그랜드슬램 16강을 넘어선 8강 진출을 이뤄냈고, 이어 8강에서 테니스 샌드그렌까지 격파하고 4강에 오르며 이형택의 최고 랭킹이었던 36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렸다. 다만 이후 정현은 끝없이 침몰 중이기에.. 이형택의 아성을 넘지는 못할 듯하다. 권순우가 그의 뒤를 이어서 2021년 18년만에 투어 우승을 하였다.
- 테니스코리아에 투고하는 테니스 칼럼이 네이버 기사로 올라온다. 테니스 세계 랭킹 100위 안에 들면 생기는 특전과 함께 한국의 열악한 선수풀을 이야기하며 '우리나라에는 롤모델로 삼을 만한 인물이 없다'고 했는데, 많은 네티즌들이 '이형택 선수 무시하나?'라고 생각했지만, 글쓴이가 이형택 본인이었다는 걸 알고 할 말을 잃기도 했다.(...)
제목에 누가 썼는지 나와있거늘...곧 정현이 등장하며 옛말이 되었지만.여담으로 정현에게 신경 많이 쓰는걸로 보인다.
- 2021년 2월 7일부터 뭉쳐야 쏜다 - 전설들의 농구대잔치에 출연한다. 등번호는 뭉찬 때의 3번이 아닌 36번을 달았다.
- 체육훈장 맹호장 수훈자다.[19]
- 《뭉쳐야 찬다》 2019년 11월 24일 방영분에서 자신이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빵과 우유를 준다고 해서 였다고 밝혔다.
- 여담으로 비흡연자다.
- 별명은 불편한 형택씨, 머드리 등 꽤 웃긴 별명들을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형택씨라는 호칭을 불편해했으나 별명화된 이후에는 그냥 웃어 넘기는 모양이며 심지어 인스타그램 해시태그에도 사용한다.[20]
- 상술한 코로나 확진 판정 때문에 스포일러가 되긴 했지만 2021년 8월 8일부터 방영된 뭉쳐야 찬다 2에도 고정 출연이 확정되면서 최초 고정 멤버였던 김동현과 더불어 뭉쳐야 스포츠 시리즈 세 개의 시즌 모두 출연하게 된 멤버가 되었다.
- 왼쪽 옆구리에 흉터가 있다. 수술 자국인지 부상인지 알려진 바가 없다.[23]
[1] 지금과 달리 당시 체육 특기자는 학과 선택의 자유가 있었기에 굳이 체대가 아닌 다양한 학과를 많이 선택했다. 물론 학교 수업에 대다수는 안 들어갔다고 한다. 체육 특기자의 전공이 체육대학 및 체육교육과로 제한된 것은 00학번부터다.[2] 석사 학위 논문: 엘리트 선수 테니스 서브동작의 운동학적 분석(2007. 8)[3] 2004년 대학원에 진학해 2007년에 졸업했다.[4] 프로필상 179. 뭉쳐야 찬다 2020년 02월 02일 방영 분에서 177로 측정됐다. 단 신장이 준 것이 아니라 운동선수는 거의 신발을 신고 측정을 해서 그런 것이다.[5] 현역 시절에는 81kg이고 뭉쳐야 찬다에서 82kg로 측정됐다. 나이가 들면서 살이 더 쪘다.[6] 캠퍼스 커플이며 동갑이지만 이형택이 빠른년생으로 학번이 빨라서 오빠라고 부른다고 한다. 무용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다.[7] 자기 유튜브 채널에서 딸과 닌텐도 스위치 게임인 마리오 스포츠 테니스 대결에서 여느 아버지가 그렇듯 딸을 봐주지 않고 이겨 특유의 깝죽대는 모습을 보였다. 엄마한테 이를거야 이후 뭉쳐야 쏜다 2021년 5월 2일 방송분, 슈퍼 DNA 피는 못 속여에 출연했다. 여느 또래 아이들보다 남다른 운동 신경을 가지고 있어 테니스는 물론 축구도 잘한다.[8] 기초군사훈련은 27사단 신교대에서 복무했다. 그래서인지 백골 부대 원정 갈 때 군대 얘기를 잘 하는 모습이다.[9] 아디다스 인터내셔널(2003.1, 호주 시드니)[10] 시벨 오픈 남자 복식(2003.2, 미국 산호세)[11] 벨라루스공화국의 블라디미르 볼치코프와 팀을 이루었다. 2022년 현재까지 한국 선수 유일의 ATP 투어 복식 우승이다.[12] 1991년에 프로로 전환하여 2007년에 은퇴하였고 1997년에는 세계 랭킹 최고 순위 4위까지 기록하였으며 전성기는 1997년부터 1999년까지였던 선수로 1995년 ATP 투어 KAL컵 코리아 오픈 남자 단식에 출전할 무렵에는 ATP 투어 남자 단식 우승 1회, 준우승 1회를 기록중인 젊은 선수였다. 특이점으로 1995년 ATP 투어 KAL컵 코리아 오픈 남자 단식 우승 직후인 1995년 5월에 어머니의 모국인 영국 측의 집요한 설득으로 캐나다 국적을 버리고 영국으로 귀화하였다. 은퇴 시의 통산 주요 성적은 1997년 US 오픈 남자 단식 준우승, 1997년 윔블던 남자 단식 8강 진출, 1998년 마스터스 파리 오픈 남자 단식 우승, 마스터즈 시리즈 남자 단식 4강 진출 2회, ATP 투어 남자 단식은 우승 13회, 준우승 10회를 기록한 선수이다.[13] ATP 투어 남자 단식 우승 1번과 ATP 투어 남자 단식 준우승 1번을 포함하면 ATP 투어 남자 단식 4강 이상을 7번 올라간 것이 된다.[14] 이형택이 달성한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 우승 13회 기록도 한국 남자 테니스 선수 사상 역대 최다 우승 기록이다.[15] 다행히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선 한국 선수들이 테니스 남자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냈다.[16] 이들의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최고성적은 모두 8강 진출로 이형택보다 살짝 위지만 대신 이형택은 루옌쉰이 못한 투어 남자 단식 우승을 기록한 점, 물론 마츠오카 슈조의 경우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8강 진출 성적은 물론이고 투어 남자 단식에서 우승 1회, 준우승 2회를 기록하여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16강 진출에 투어 남자 단식 우승 1회, 준우승 1회인 이형택보다 마츠오카 슈조의 성적이 약간 위지만 대신 이형택은 마츠오카 슈조와 달리 투어 대회에 출전한 8년간 꾸준히 투어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며 세계 랭킹 순위를 꾸준히 70위 이내의 위치를 유지하였고 여기다 마츠오카 슈조가 못한 세계 랭킹 순위 40위 안에 들어간 것을 고려하면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17] 니시코리는 사실상 아시아 출신 역대 최고의 선수로 꼽힌다. 빅4가 점령하고 있는 기간에 그랜드슬램 준우승을 기록했다는 것만 봐도.. 이 준우승에 대해 다른 말들이 나오기도 뭣한 것이 2014년 US오픈에서 16강에서 밀로시 라오니치, 8강에서는 그해 라파엘 나달을 꺾고 호주오픈을 우승한 스탠 바브린카 그리고 4강에서 그 노박 조코비치를 꺾고 결승에 올랐다. 결승에서는 마린 칠리치에게 무기력하게 패했지만.. 대부분의 그랜드슬램 대회에서 8강, 16강은 기본으로 진출하는 선수로 꾸준히 10위 언저리를 왔다갔다하는 톱랭커이다. 4위를 기록한 적도 있다. 그 빅3만 아니었어도 1위 한번 했을 법도 한데.. 덕분에 일본에서는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스타로 꾸준히 꼽히는 중이다.[18] 시즌 2에도 주장 선거에 당선되어 주장이 되었다. 여담으로, 4번과 20번을 원했지만 둘 다 잘려 기존 등번호인 3번을 계속 달고 뛴다. 참고로 4번은 이장군, 20번은 허민호의 번호가 되었다.[19] 참고로 어쩌다 시리즈 동료인 이봉주, 진종오, 심권호, 김재엽, 이대훈, 하태권은 최고위 등급인 청룡장, 안정환, 여홍철, 김기훈, 홍성흔은 맹호장, 방신봉, 윤경신, 허재는 기린장, 최병철은 거상장이 있다.[20] 근데 본인말고 그 해시태그를 쓴 사람이 아직까지 없다...[21] 와이프의 증언으로 봤을때 실제 성격도 깐죽대는듯 하다.더 무서운건 뭉찬에서 깐죽대는건 집에서 깐죽대는 거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라고.[22] 여기서 조언을 들었는데 밤에 바로 나가서 들은걸 그대로 연습했다.우연의 일치인지 그냥 편한 곳에서 한 것인지 하필 테니스장(....) 사실 본인에겐 테니스장만큼 편한 곳도 없거든[23] 뭉쳐야 찬다 2에서 전북 현대 모터스의 의무 담당관인 지우반 올리베이라의 체지방 측정 과정에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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