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이씨의 시조에 대한 내용은 이한(신라) 문서 참고하십시오.
전주 이씨 이한이 활동한 시기는 인천 이씨 이한이 활동한 시기보다 훨씬 이전이다. 인종 초에 이자겸의 난이 일어났고, 인종의 아들인 의종 말에 무신정변이 일어났다. 인천 이씨 이한의 증손자가 이자겸인데, 그럼 이의방의 부친 이용부는 인천 이씨 이한의 현손자, 이의방은 내손자 정도 돼야 말이 된다. 궁궐까지 태워먹을 정도로 난리를 일으킨 이자겸의 친족을 왕의 호위를 맡은 지위에 둔다는 것도 억지스럽고 또한 이자겸의 난으로 인종의 왕비였던 이자겸의 딸들도 폐출됐는데, 그 일족과 다시 혼사를 맺는다는 것도 가당치 않다. 혹시 그 일족이 숨어살면서 본관을 바꿨다고 해도 인천 이씨 이자겸이 멸문지화를 당하고, 그 일족이 한세대만에 전주 이씨 이용부로 또는 두세대만에 전주 이씨 이의방으로 본관을 바꾸고 나타나 다시 정변을 일으킨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어떻게 비슷한 시기에 인천 이씨에서 전주 이씨로 본관을 바꾸고 자리를 잡아서 난을 일으키나. 이의방의 아버지 이용부는 이자겸과 비슷한 시기의 인물이다. 또한 인천 이씨 이자겸의 조부 이자연은 세 딸을 왕비로 들일 정도로 왕실의 외척으로 잘 알려진 인물인 까닭에 그 자손들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분파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혹시 이자연의 숨겨진 아들이 있다고 가정해도 굳이 숨어살 동기도 없지만 게다가 본관까지 바꾸고, 그리고 이쯤되면 소설이다. 이자겸과 이의방은 각각 그 시대에 권력을 장악했었고, 왕실과 혼사도 맺은 인물들로 이들과 주변 인물들에 관한 기록들이 꽤 있는데 이 둘을 동일 가계로 보기는 어렵다. 즉 링컨 케네디 평행이론처럼 신기하지만 그 이상은 가능성이 없다.
고려시대 이한, 이자연이 사공(司空) 벼슬을 한 것도 아니여서 관직도 다르지만, 물론 사공(司空) 관직은 공식적으로 고려시대에 있었지만 중국 노나라 공자도 사공(司空) 관직을 했을 정도로 고대에 통용되던 관직명이고, 고려시대 이한의 부인은 김씨(金氏)가 아닌 최씨(崔氏)이며, 고려시대 이한, 이자연은 이후부터는 후손들 이름도 다르다. 또한 이한의 손자 이천상이 지냈다는 복야는 고려의 관직이기도 하지만 신라의 관직이기도 하다. 원래 복야는 당(唐)의 관제인데, 신라 진성여왕 시기에 도입하였다. 또 복야를 지냈다는데 이름이 삼국사기에 없다지만 삼국사기에서 인물들을 다룬 열전은 10권에 불과하며, 이 10권에 69인이 기록되었을 뿐으로 심지어 왕후, 공주 열전도 없다. 비록 복야가 통일신라의 높은 관직이기는 하지만 복야가 도입된 진성여왕 시기는 통일신라가 끝날 무렵으로, 그 짧은 기간 역사적인 큰 사건에 연루되어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한, 단지 복야를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삼국사기 신라본기 12권 중에서 통일신라 시기를 다룬 신라본기 6~12권, 그중에서도 진성여왕 시기를 다룬 신라본기 11권과 그 이후 신라본기 12권 그리고 삼국사기 열전 10권에 기록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물론 실제 사공이나 복야를 지내지 않았을 확률도 있다.
이소현이 혜덕왕사가 되고, 이자연의 손자 이세량, 증손자 이의장까지 출가하여 사원세력을 장악할 정도로 당시에는 승려가 유력한 가문에서 나와 출가하는 경우가 드문 일이 아니고, 이자연의 세딸이 왕실과 혼사를 맺을 정도로 잘나가는 집안에서 굳이 숨어 살면서 본관까지 바꿀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이자겸 때 몰락한 것이지 이자연 때 몰락한게 아니다. 설령 누군가 숨어 살면서 본관을 바꿨다는 가정을 한다해도 현실성이 없다.
이의방, 이의민 또 고려 이방의라는 인물도 있고, 김은의, 김인위, 김은열, 김은부도 비슷하다. 이자겸이 이씨의 나라를 세우려다 실패하고, 그 운이 이의방 가문으로 왔다는 흥미로운 도시전설 수준을 떠나서, 그 이상을 역사적 실체로 인정시키려면 객관적인 증거도 그 이상이 필요하다. 이한, 이자연 한자는 좀 다르지만 이름 같은 것 빼고는 사돈 이름 발음이 비슷하다는 것 외에는 증거가 부족하다.
무엇보다 전주 이씨 족보와 실록의 기록과 대비된다. 1403년 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의 23대조 이한이 신라에 벼슬했고, 신라가 망하자 이한의 6대손인 이긍휴가 고려에 처음 들어갔으며, 이긍휴의 13대손인 이안사가 원나라에 벼슬했다고 적혀있다.
한 세대 25년을 잡고[5] 1367년생인 23대 이방원으로부터 단순 계산시, 각각의 활동시기는
고려시대 이한, 이자연이 사공(司空) 벼슬을 한 것도 아니여서 관직도 다르지만, 물론 사공(司空) 관직은 공식적으로 고려시대에 있었지만 중국 노나라 공자도 사공(司空) 관직을 했을 정도로 고대에 통용되던 관직명이고, 고려시대 이한의 부인은 김씨(金氏)가 아닌 최씨(崔氏)이며, 고려시대 이한, 이자연은 이후부터는 후손들 이름도 다르다. 또한 이한의 손자 이천상이 지냈다는 복야는 고려의 관직이기도 하지만 신라의 관직이기도 하다. 원래 복야는 당(唐)의 관제인데, 신라 진성여왕 시기에 도입하였다. 또 복야를 지냈다는데 이름이 삼국사기에 없다지만 삼국사기에서 인물들을 다룬 열전은 10권에 불과하며, 이 10권에 69인이 기록되었을 뿐으로 심지어 왕후, 공주 열전도 없다. 비록 복야가 통일신라의 높은 관직이기는 하지만 복야가 도입된 진성여왕 시기는 통일신라가 끝날 무렵으로, 그 짧은 기간 역사적인 큰 사건에 연루되어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한, 단지 복야를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삼국사기 신라본기 12권 중에서 통일신라 시기를 다룬 신라본기 6~12권, 그중에서도 진성여왕 시기를 다룬 신라본기 11권과 그 이후 신라본기 12권 그리고 삼국사기 열전 10권에 기록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물론 실제 사공이나 복야를 지내지 않았을 확률도 있다.
이소현이 혜덕왕사가 되고, 이자연의 손자 이세량, 증손자 이의장까지 출가하여 사원세력을 장악할 정도로 당시에는 승려가 유력한 가문에서 나와 출가하는 경우가 드문 일이 아니고, 이자연의 세딸이 왕실과 혼사를 맺을 정도로 잘나가는 집안에서 굳이 숨어 살면서 본관까지 바꿀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이자겸 때 몰락한 것이지 이자연 때 몰락한게 아니다. 설령 누군가 숨어 살면서 본관을 바꿨다는 가정을 한다해도 현실성이 없다.
이의방, 이의민 또 고려 이방의라는 인물도 있고, 김은의, 김인위, 김은열, 김은부도 비슷하다. 이자겸이 이씨의 나라를 세우려다 실패하고, 그 운이 이의방 가문으로 왔다는 흥미로운 도시전설 수준을 떠나서, 그 이상을 역사적 실체로 인정시키려면 객관적인 증거도 그 이상이 필요하다. 이한, 이자연 한자는 좀 다르지만 이름 같은 것 빼고는 사돈 이름 발음이 비슷하다는 것 외에는 증거가 부족하다.
무엇보다 전주 이씨 족보와 실록의 기록과 대비된다. 1403년 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의 23대조 이한이 신라에 벼슬했고, 신라가 망하자 이한의 6대손인 이긍휴가 고려에 처음 들어갔으며, 이긍휴의 13대손인 이안사가 원나라에 벼슬했다고 적혀있다.
한 세대 25년을 잡고[5] 1367년생인 23대 이방원으로부터 단순 계산시, 각각의 활동시기는
의 결과가 나오며 이는 역사상의 활동시기와 그리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멸문지화를 당한건 이자겸의 직계 후손 뿐이었지 방계의 혈통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당장 장화공 이자연의 6세손인 이장용이나 무신정변의 주역이었던 이의방의 방계 후손이 이성계라는 훌륭한 반례들이 있다. 이자겸이 본관을 바꾼게 아니라 이자연의 방계 후손이 본관을 바꾼 것이라면 상관이 없다. 즉 이용부가 이자겸의 후손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자연 시기에 경원 이씨와 전주 이씨가 분파되어 병존했다고 보면 자연스럽게 설명이 가능하다. 경명왕의 후손을 자처하는 박씨는 아들들의 본관이 무려 8개로 분파되고 경순왕의 후손은 직계로부터 일정 기간이 지나면 경주 김씨에서 다른 본관으로 분적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조선 왕가가 이자연의 후손인거지 이자겸의 후손이 아니라서 상관없다. 위에서 말했듯이 조선왕조실록에 자신의 조상들 중 하나가 이자연으로 나와있다.
요점은 이자연의 아들들 중 본관이 경원 이씨가 된 쪽과 전주 이씨가 된 쪽이 분할되고, 이 중 경원 이씨가 문벌귀족으로서 권세를 누리다가 몰락하자 전주 이씨 계통의 무신정권이 우세를 점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령 전주 이씨의 도래 시기를 늦춰 보더라도 성을 왕씨로 갈아버리는 사례가 고려 초기에 흔했다. 그러므로 고작 본관을 바꾸고 등장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예상할 수 있다.
이자연 묘지명에 나오는 아들 중 한 명인 이소현이 전라북도 김제시에 소재한 금산사로 출가하는 등 전주시와의 연계가 보이기 때문에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않은 아들 중 한 명이 전주에 정착해 토호가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위에서 말했듯 동시대에도 여러가지 분파가 나타나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 인천 이씨는 고려에서는 손꼽히는 문벌귀족이였지만 조선에서는 문과급제자가 통틀어 9명 밖에 안나올만큼 위상이 하락한 가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점은 본관을 바꿨을 가능성을 높이 시사한다.
그렇지만 삼국사기 어디를 뒤져봐도 신라시대 전주 이씨 이한, 이자연이 사공 벼슬을 했다고 나오지도 않는다. 후손들 이름이 다른 것도 역사 전승 과정에서 잘못 전해졌을 가능성도 있고, 태종 무열왕의 후손이 이한의 장인 또는 사돈이 된 것 자체는 동일한 전승으로 볼 수 있다. 또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이한의 증손자 이광희는 신라의 관직인 아찬 벼슬을 한 인물인데 정작 그 아버지인 이천상은 고려의 관직(3성 6부제)인 복야를 지냈다는 것에서 그 신빙성에 의문이 남는다. 신라 진성여왕 시기에 이를 도입하였다...고 하나 이건 그 출처가 불분명하다. 그리고 복야가 현대의 부총리급일 정도로 높은 관등임에도 삼국사기에는 이들의 이름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삼국사기 열전 뿐만이 아니라 신라본기에도 해당 내용이 아예 없다. 그리고 이 당시 임명된 관직들 중 복야 관등에 해당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전주 이씨 이한이 문성왕 시기 활동했다는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만 실린 내용이고, 신격화를 위해 이후의 일을 상대로 투사시키는 일은 흔한 일인데다가, 이한, 이자연이라는 이름이 겹치는 점, 전주 이씨 이한의 장인인 무열왕 10세손 김은의와 경원 이씨 이한의 사돈인 무열왕 11세손 김인위는 중고한어 기준으로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김은의: krim qien ngriEs, 김인위: krim qin yrUeis) 동일인물설에 좀더 힘이 실린다. 이한, 이자연, 김은의-김인위라는 이름에 무열왕 10-11세손이라는 기록까지 4개나 정확히 맞아들어가는데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는 힘들다. 특히 문성왕 시기 활동했던 것은 조선왕조실록 맨 첫머리에나 나오지 다른 문헌과 교차검증이 안된다. 애초에 자료가 없는데 어떻게 더 증거를 찾으란 말인가? 그리고 복야라는 관등이 그 당시에 사용되지 않았음을 인정할 수 있는 근거가 나온만큼 이성계의 선대 가계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수용이 필요하다.
요점은 이자연의 아들들 중 본관이 경원 이씨가 된 쪽과 전주 이씨가 된 쪽이 분할되고, 이 중 경원 이씨가 문벌귀족으로서 권세를 누리다가 몰락하자 전주 이씨 계통의 무신정권이 우세를 점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령 전주 이씨의 도래 시기를 늦춰 보더라도 성을 왕씨로 갈아버리는 사례가 고려 초기에 흔했다. 그러므로 고작 본관을 바꾸고 등장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예상할 수 있다.
이자연 묘지명에 나오는 아들 중 한 명인 이소현이 전라북도 김제시에 소재한 금산사로 출가하는 등 전주시와의 연계가 보이기 때문에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않은 아들 중 한 명이 전주에 정착해 토호가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위에서 말했듯 동시대에도 여러가지 분파가 나타나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 인천 이씨는 고려에서는 손꼽히는 문벌귀족이였지만 조선에서는 문과급제자가 통틀어 9명 밖에 안나올만큼 위상이 하락한 가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점은 본관을 바꿨을 가능성을 높이 시사한다.
그렇지만 삼국사기 어디를 뒤져봐도 신라시대 전주 이씨 이한, 이자연이 사공 벼슬을 했다고 나오지도 않는다. 후손들 이름이 다른 것도 역사 전승 과정에서 잘못 전해졌을 가능성도 있고, 태종 무열왕의 후손이 이한의 장인 또는 사돈이 된 것 자체는 동일한 전승으로 볼 수 있다. 또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이한의 증손자 이광희는 신라의 관직인 아찬 벼슬을 한 인물인데 정작 그 아버지인 이천상은 고려의 관직(3성 6부제)인 복야를 지냈다는 것에서 그 신빙성에 의문이 남는다. 신라 진성여왕 시기에 이를 도입하였다...고 하나 이건 그 출처가 불분명하다. 그리고 복야가 현대의 부총리급일 정도로 높은 관등임에도 삼국사기에는 이들의 이름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삼국사기 열전 뿐만이 아니라 신라본기에도 해당 내용이 아예 없다. 그리고 이 당시 임명된 관직들 중 복야 관등에 해당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전주 이씨 이한이 문성왕 시기 활동했다는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만 실린 내용이고, 신격화를 위해 이후의 일을 상대로 투사시키는 일은 흔한 일인데다가, 이한, 이자연이라는 이름이 겹치는 점, 전주 이씨 이한의 장인인 무열왕 10세손 김은의와 경원 이씨 이한의 사돈인 무열왕 11세손 김인위는 중고한어 기준으로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김은의: krim qien ngriEs, 김인위: krim qin yrUeis) 동일인물설에 좀더 힘이 실린다. 이한, 이자연, 김은의-김인위라는 이름에 무열왕 10-11세손이라는 기록까지 4개나 정확히 맞아들어가는데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는 힘들다. 특히 문성왕 시기 활동했던 것은 조선왕조실록 맨 첫머리에나 나오지 다른 문헌과 교차검증이 안된다. 애초에 자료가 없는데 어떻게 더 증거를 찾으란 말인가? 그리고 복야라는 관등이 그 당시에 사용되지 않았음을 인정할 수 있는 근거가 나온만큼 이성계의 선대 가계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수용이 필요하다.
전주 이씨 이한이 인천 이씨 이한을 본떠 만든 관념적 시조일 가능성도 있다. 무엇보다 이한-이자연 가계를 인정해도 이의방이 전주에서 거병했다는 사실과 잘 들어맞지 않고, 세종실록지리지에 전주 이씨는 전주의 토착 성씨라는 언급이 있어서 인천 이씨에서 분적했다면 이러한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조선 건국 직후 편찬된 이자춘신도비에는 이한, 이자연, 이천상이 누락되고 아찬 이광희가 시조로 나와있다.
사실 전주 이씨 이한을 부정해도 조선 세조 이후 모든 국왕은 인천 이씨 이한의 후손이기는 하다. 조선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어머니가 인천 이씨[9]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주장은, 명확한 근거 없이 특정 본관의 성씨를 모욕하는 행위일 수도 있으므로 맹신하거나 전주 이씨 이한은 가짜다 라는 식의 표현은 상당히 부적절할 수 있다. 일단, 전주 이씨의 공식 입장은 시조인 이한이 통일 신라 시대의 사공을 지낸 인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전주 이씨 이한을 부정해도 조선 세조 이후 모든 국왕은 인천 이씨 이한의 후손이기는 하다. 조선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어머니가 인천 이씨[9]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주장은, 명확한 근거 없이 특정 본관의 성씨를 모욕하는 행위일 수도 있으므로 맹신하거나 전주 이씨 이한은 가짜다 라는 식의 표현은 상당히 부적절할 수 있다. 일단, 전주 이씨의 공식 입장은 시조인 이한이 통일 신라 시대의 사공을 지낸 인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 이한(李翰)의 경우를 보면 경주 김씨와 통혼한 것은 이한이 아닌 그 아들 이자연이며, 장인의 이름도 무열왕 10세손 김은의가 아닌 무열왕 11세손 김인위(金因謂)이다. 그렇지만 인천 이씨 시조 이허겸의 사위이자 현종의 장인이기도 한 김은부도 있다. 다만 김은부도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의 동생이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족보마다 몇대손인지 다르고, 또 김은열이 경순왕 넷째 아들인지도 불확실하다. 이름들도 비슷하다. 김은부도 그렇지만 김인위도 무열왕의 몇대손인지는 후대에 족보 제작이 활성화되면서 덧붙여진 것이기 때문에 이들이 실제 몇대손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족보 유행은 양란을 거친 조선 후기에나 활성화되며 김인위가 무열왕 11세손이라는 기록은 당대의 금석문인 이초원 처 김씨묘지명(1154)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올바르다. 김은열 묘지석의 진위 여부로부터 파생된 김은열이 실존 인물이냐 그런 류의 논란은 경주 김씨 내에서 자신들의 뿌리를 정확히 알고자 하면서 불거진 논쟁이다만 무열왕 몇세손이냐는 오랜 세월 탓에 어느 정도 오차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정도이고, 이마저도 아래의 경우처럼 경주 김씨 후손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으며 자신이 몇세손인지 찾으면서 나온 얘기이다.
김지우 묘지명은 신라 원성왕 이후부터 김지우까지 계보를 기록하면서 원성왕의 자손이 '대광'이라는 관직을 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대광'은 고려의 관직이므로, 신라 원성왕에게서 고려의 관직을 한 아들이 나올 수는 없으므로, 이는 원성왕의 자식이라기 보다는 원성왕의 후손이라는 의미로 파악하는게 맞으므로 역시 몇세손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 보인다. 또한 이초원의 처는 김지우의 고모이니 가까운 사이로 게다가 묘지명은 2년 밖에 차이가 안나는데도 조상의 상계가 다르다. 심지어 동일 인물을 두고 한쪽은 내물왕계, 한쪽은 무열왕계이다. 비록 이초원 처 김씨 묘지명에 증조부 대까지의 계보 밖에 안실렸으나 그 시대 친족 사이에서도 각각의 묘지명에서 조상에 대한 기록의 차이가 있으니 역시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물론 원성왕과 김인윤의 나이차를 감안하면 일반적인 조손관계로 보기는 어려우므로 일반적으로는 무열왕의 직계 후손이자 원성왕의 외후손으로 보는 편이다. 사실 원성왕부터가 무열왕의 외후손인지라 원성왕의 후손이면 반드시 무열왕의 후손에도 속한다.
삼국사기에서 무열왕계인 김주원의 증손 김양이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에서는 헌안왕의 동생으로 나온다는 점 때문에 이와 연관이 있지 않느냐는 추측도 있다.
인천 이씨(경원 이씨, 인주 이씨) 이한의 조상 연원에 대하여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선조가 신라 대관(大官)이었는데, 사신으로 당나라에 들어가니 천자가 가상하게 여겨 이(李)라는 성씨를 하사하였다.”는 기록을 전한다. 다만 모화사상의 영향으로 시조가 중국에서 왔거나 중국 황제로부터 사성받았다는 이야기는 여러 성씨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일단 이자연의 아들로 나오는 이천상은 실제로는 이자연의 동생인 이자상(李子祥)으로 본다. 관등이 복야로 같고 둘 모두 이름에 祥 자가 포함되기 때문. 그러나 정작 이자상의 현손인 이인로는 무신정변이 일어나자 산중으로 도피하였고, 그 아들이라는 이광희는 관등이 아찬, 이광희의 아들인 이입전은 관등이 삼중대광(고려 초기의 관직)으로 나타나는 등 시열대 왜곡의 흔적이 나타나고 이자연의 아들 세대의 이름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우측부수 頁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의 추론은 어렵다.
한편, 무신정권 시기 쓰여진 보한집에서 이정(頲, 이자연의 장남), 이의(顗, 이자연의 4남), 이오(䫨, 이자연의 조카)의 후손은 당대까지 번창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안사가 이들의 후손 중 하나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상기했듯 이오의 증손자인 이인로는 무신정변에 참여하지 않고 오히려 박해받는 입장이었으므로 결국 이정 - 이의 둘 중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이자연은 그의 묘지명에 따르면 슬하에 8남 3녀를 두었는데 큰 아들은 정(頲)은 검교위위경 행상서우승 지합문사(檢校衛尉卿 行尙書右丞 知閤門事), 둘째 적(頔)은 전중소감(殿中少監), 셋째 석(碩)은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넷째 의(顗)는 합문지후(閤門祗候), 다섯째 소현(韶顯)은 출가하여 대덕(大德)이 되었고, 여섯째 호(顥)는 상식직장동정(尙食直長同正), 일곱째 전(顓)은 일찍 죽었고, 여덟째 안(顔)은 예빈주부동정원(禮賓注簿同正員)이 되었다.
홍주 이씨의 시조인 이유성(李維城)의 아버지인 이한[10]이 있는데#, 홍주 이씨 이한의 경우는 관직이 대장군(大將軍)이라고 적혀 있다. 조선 개국시기에 영의정을 지낸 이서의 10대조가 이한인데, 이서의 출생년도가 1332년인데 1세대 차이는 보통 30년으로 잡으면 홍주 이씨 이한의 출생년도가 1030년대로 추정할 수 있다. 인천 이씨의 이한하고 산술적으로 약 60년 차이로, 홍주 이씨 이한은 인천 이씨 이한의 손자뻘이 되는 셈이다.
김지우 묘지명은 신라 원성왕 이후부터 김지우까지 계보를 기록하면서 원성왕의 자손이 '대광'이라는 관직을 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대광'은 고려의 관직이므로, 신라 원성왕에게서 고려의 관직을 한 아들이 나올 수는 없으므로, 이는 원성왕의 자식이라기 보다는 원성왕의 후손이라는 의미로 파악하는게 맞으므로 역시 몇세손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 보인다. 또한 이초원의 처는 김지우의 고모이니 가까운 사이로 게다가 묘지명은 2년 밖에 차이가 안나는데도 조상의 상계가 다르다. 심지어 동일 인물을 두고 한쪽은 내물왕계, 한쪽은 무열왕계이다. 비록 이초원 처 김씨 묘지명에 증조부 대까지의 계보 밖에 안실렸으나 그 시대 친족 사이에서도 각각의 묘지명에서 조상에 대한 기록의 차이가 있으니 역시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물론 원성왕과 김인윤의 나이차를 감안하면 일반적인 조손관계로 보기는 어려우므로 일반적으로는 무열왕의 직계 후손이자 원성왕의 외후손으로 보는 편이다. 사실 원성왕부터가 무열왕의 외후손인지라 원성왕의 후손이면 반드시 무열왕의 후손에도 속한다.
삼국사기에서 무열왕계인 김주원의 증손 김양이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에서는 헌안왕의 동생으로 나온다는 점 때문에 이와 연관이 있지 않느냐는 추측도 있다.
인천 이씨(경원 이씨, 인주 이씨) 이한의 조상 연원에 대하여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선조가 신라 대관(大官)이었는데, 사신으로 당나라에 들어가니 천자가 가상하게 여겨 이(李)라는 성씨를 하사하였다.”는 기록을 전한다. 다만 모화사상의 영향으로 시조가 중국에서 왔거나 중국 황제로부터 사성받았다는 이야기는 여러 성씨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일단 이자연의 아들로 나오는 이천상은 실제로는 이자연의 동생인 이자상(李子祥)으로 본다. 관등이 복야로 같고 둘 모두 이름에 祥 자가 포함되기 때문. 그러나 정작 이자상의 현손인 이인로는 무신정변이 일어나자 산중으로 도피하였고, 그 아들이라는 이광희는 관등이 아찬, 이광희의 아들인 이입전은 관등이 삼중대광(고려 초기의 관직)으로 나타나는 등 시열대 왜곡의 흔적이 나타나고 이자연의 아들 세대의 이름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우측부수 頁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의 추론은 어렵다.
한편, 무신정권 시기 쓰여진 보한집에서 이정(頲, 이자연의 장남), 이의(顗, 이자연의 4남), 이오(䫨, 이자연의 조카)의 후손은 당대까지 번창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안사가 이들의 후손 중 하나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상기했듯 이오의 증손자인 이인로는 무신정변에 참여하지 않고 오히려 박해받는 입장이었으므로 결국 이정 - 이의 둘 중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이자연은 그의 묘지명에 따르면 슬하에 8남 3녀를 두었는데 큰 아들은 정(頲)은 검교위위경 행상서우승 지합문사(檢校衛尉卿 行尙書右丞 知閤門事), 둘째 적(頔)은 전중소감(殿中少監), 셋째 석(碩)은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넷째 의(顗)는 합문지후(閤門祗候), 다섯째 소현(韶顯)은 출가하여 대덕(大德)이 되었고, 여섯째 호(顥)는 상식직장동정(尙食直長同正), 일곱째 전(顓)은 일찍 죽었고, 여덟째 안(顔)은 예빈주부동정원(禮賓注簿同正員)이 되었다.
홍주 이씨의 시조인 이유성(李維城)의 아버지인 이한[10]이 있는데#, 홍주 이씨 이한의 경우는 관직이 대장군(大將軍)이라고 적혀 있다. 조선 개국시기에 영의정을 지낸 이서의 10대조가 이한인데, 이서의 출생년도가 1332년인데 1세대 차이는 보통 30년으로 잡으면 홍주 이씨 이한의 출생년도가 1030년대로 추정할 수 있다. 인천 이씨의 이한하고 산술적으로 약 60년 차이로, 홍주 이씨 이한은 인천 이씨 이한의 손자뻘이 되는 셈이다.
[1] 경원 이씨, 인주 이씨 라고도 불렀다. 인천의 과거 지명이 경원(慶源), 인주(仁州)였기 때문이다.[2] 안산 김씨 김은부의 부인[3] 경주 최씨[4] 이한의 장남 이자연의 6남 이호(顥)의 장남이 이자겸이다.[5] 옛사람들이 일찍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것은 맞지만 한 세대를 15~20년차로 보기엔 영아사망이나 차자, 계자 상속 등의 경우도 많았기에 무리가 있다. 실제로 1335년생 이성계는 장남 이방우와는 19년 차이가 나지만 5남 이방원과는 32년 차이고 이방원은 이도와 30년 차이가 난다. 태조(1335)-태종(1367)-세종(1397)의 예처럼 생물학적 적장자가 아닌, 대종 계승을 따져보면 한 세대 30년 이상도 드문 일은 아니다.[6] 생몰년 미상. 나말 사공 역임한 기록만 존재[7] 신라 멸망(935년) 후 처음 고려에 입조[8] 1252~1274년 요동 다루가치 역임. 1274년 사망[9] 정천히는 이자연의 동생 이자상의 현손인 공도공 이문화의 딸[10] 이간(李幹)이라고 적힌 경우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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