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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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군 Forze Armate Italiane Italian Armed Forces | |
국가 | |
상비군 | 340,147명[1] |
예비군 | 42,000명 |
병역제도 | |
육군력 | |
해군력 | |
공군력 | |
예산 | |
320억 달러 |
이탈리아군은 남유럽에서 스페인군과 쌍벽을 이루는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다. 항공모함을 보유할 정도로 강력한 해군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육군력이 약하다는 느낌이 있으나, 보통 이상의 육군 무기에 대한 군사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육군력 자체도 수준 이상의 전력을 갖춰서 NATO의 대표적 육군 강국인 프랑스와도 대등하고, 지나친 군축으로 인해 군사강국의 위상이 유명무실해진 독일보다는 확실히 강력하다. 공군력 역시 보통 이상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탈리아군은 유사시에 러시아군이 터키군 및 발칸 반도의 그리스군[2]의 나토군 전력을 꺾고 흑해를 벗어나 지중해로 진출하게 되면 이를 저지해야할 주요전력이 되어야 하고, 또 다른 경우로 나토군이 아프리카로 진출할 일이 있을 때에도 이탈리아군이 주축을 맡거나 최소한 적극적이어야하기 때문. 나토군이 리비아에 군사개입했던 오디세이 새벽 작전에서 미군이 발을 빼고 이탈리아군이 소극적으로 나오자 나토군의 작전 효율이 추락한 것을 보면…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탈리아군은 유사시에 러시아군이 터키군 및 발칸 반도의 그리스군[2]의 나토군 전력을 꺾고 흑해를 벗어나 지중해로 진출하게 되면 이를 저지해야할 주요전력이 되어야 하고, 또 다른 경우로 나토군이 아프리카로 진출할 일이 있을 때에도 이탈리아군이 주축을 맡거나 최소한 적극적이어야하기 때문. 나토군이 리비아에 군사개입했던 오디세이 새벽 작전에서 미군이 발을 빼고 이탈리아군이 소극적으로 나오자 나토군의 작전 효율이 추락한 것을 보면…
중세 초기는 암흑기라 불린 시절로서 고대 로마의 빛나는 유산들조차 심심찮게 이민족들에게 털려나가서 이미 옛 로마의 영화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특히 이슬람이 생기면서 무슬림들은 기독교도들을 베어 넘기는 걸 사명으로 여기고 툭하면 침략하곤 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 서방은 정치적 중심점도 없이 각 지방의 영주가 겨우 다스리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조직적인 무슬림들의 해적 행위를 막을 방법은 없었고 가면 갈수록 극성스러운 이슬람 해적들 덕분에 이탈리아 연안지방은 완벽히 진공화 되었다. 지금도 이탈리아 해안가에 가보면 어디서나 수십 개의 감시탑을 볼 수 있는데 전부 해적들을 미리 발견하고 '도망' 가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게 중세나 고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근대까지 저랬다. 북아프리카 해적인 코르세어[11]들은 이탈리아 연안을 19세기 초반까지도 약탈하고 주민들을 잡아가서 노예시장에 팔았다. 해적들에 맞서 방어하기 좋도록 길이 미로처럼 건설되어 현대 이탈리아 도시의 모습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단지 몇십 년이 아니라 수백 년간 이슬람에 탈탈 털리고 교황까지 잡아가려고 로마에 침입한 무슬림들은 그리스도교도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지만 결국 스스로 국가 조직을 만들어 방어하기로 결정하기까지 끔찍한 나날들을 보내게 된다. 빛나던 로마의 유물과 호화찬란한 건물들, 그리고 수많은 재물들이 싹 사라졌으니 암흑기라고 하는 것이 지나친 말이 아니며, 이때 정치적 구심체가 되었던 것이 가장 먼저 이슬람 해적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 도시국가들인 베네치아, 아말피, 피사, 제노바.
중세 초기 암흑기의 이탈리아에는 동로마 세력과 야만족 세력이 항상 자리다툼을 했다. 동로마의 군대는 당연하지만 로마군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니만큼 자세한 논의를 생략하더라도, 고트족이나 롬바르드인은 강력한 군사 세력이었다. 고트족은 강력한 보병 위주의 군대를 구성했고 뒤로 갈수록 중기병의 비중이 늘어났지만 동로마에 의해 리타이어했고 그 뒤에 이탈리아로 밀고 내려온 롬바르드인은 중기병 위주의 군대를 구성하여 유럽에 명성을 떨쳤다. 강력한 이탈리아의 기병 전력은 10~11세기 들어와 노르만인이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세력을 뻗치기 시작하면서 더더욱 명성을 떨쳤다.
중세의 이탈리아군은 전쟁놀이나 하는 용병 집단으로 보통 간주되지만 이건 마음가짐의 문제지 전투력 문제가 아니었다. 이탈리아의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만든 갑주는 유럽 최고급이었고 석궁수[12]나 기사 같은 용병들은 유럽 전역에서 고용되었다.[13] 병사들 뿐 아니라 장군들의 역량도 막강했고 용병대장을 뜻하는 콘도티에리들은 유럽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이들의 우수한 전투력을 입증하는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특히 각 도시의 시민군의 경우는 당시 어떤 도시의 시민군과 비교해봐서도 꿀리지 않는 전력을 구축했다.
중세 초기 암흑기의 이탈리아에는 동로마 세력과 야만족 세력이 항상 자리다툼을 했다. 동로마의 군대는 당연하지만 로마군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니만큼 자세한 논의를 생략하더라도, 고트족이나 롬바르드인은 강력한 군사 세력이었다. 고트족은 강력한 보병 위주의 군대를 구성했고 뒤로 갈수록 중기병의 비중이 늘어났지만 동로마에 의해 리타이어했고 그 뒤에 이탈리아로 밀고 내려온 롬바르드인은 중기병 위주의 군대를 구성하여 유럽에 명성을 떨쳤다. 강력한 이탈리아의 기병 전력은 10~11세기 들어와 노르만인이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세력을 뻗치기 시작하면서 더더욱 명성을 떨쳤다.
중세의 이탈리아군은 전쟁놀이나 하는 용병 집단으로 보통 간주되지만 이건 마음가짐의 문제지 전투력 문제가 아니었다. 이탈리아의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만든 갑주는 유럽 최고급이었고 석궁수[12]나 기사 같은 용병들은 유럽 전역에서 고용되었다.[13] 병사들 뿐 아니라 장군들의 역량도 막강했고 용병대장을 뜻하는 콘도티에리들은 유럽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이들의 우수한 전투력을 입증하는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특히 각 도시의 시민군의 경우는 당시 어떤 도시의 시민군과 비교해봐서도 꿀리지 않는 전력을 구축했다.
- 15~16세기, 이탈리아를 침공한 프랑스나 스페인 국왕들은 총사령관으로 이탈리아인 무장을 앉히는 경우가 허다했다. 또한 프랑스군, 스페인군이라고 해도 보통 병력의 절반 이상은 이탈리아 현지에서 모집한 용병이었다. 특히 스페인군에서 이탈리아인 부대는 두번째로 강한 부대였다. 세번째로 강한 벨기에의 왈롱인과 스페인령 부르고뉴 출신 부대만 해도 웬만한 유럽 국가 최정예 보병대와 동급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무진장 강한 거다.[15] 게다가 이 당시 이탈리아 반도에서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같은 남부 전체는 아예 아라곤과 동군연합으로 스페인 왕실의 땅이었고, 밀라노는 16세기 중반 이후 스페인으로 넘어갔으며, 제노바 공화국은 실질적으로 스페인 제국의 은행 역할, 즉 따지고 보면 진정으로 스페인의 영향력에서 명분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독립해 있다고 할만한 세력은 사보이아 공국과 베네치아 공화국 밖에 없었던지라 스페인 제국 내에서 이탈리아인들의 지분도 굉장히 컸다. 프랑스 국왕이 여흥 삼아 12:12의 마상시합을 개최한 적이 있었는데 이탈리아 기사들이 프랑스 기사들을 12:0으로 발라버렸다.[16] 지휘관 중에서도 해군 지휘관으로는 당대 최고였던 안드레아 도리아, 대포 전문가로 이름이 높았던 페라라 공작 알폰소 데스테, 파비아 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페르난도 다발로스, 스페인 역사상 손꼽히는 명장 가운데 하나인 암브로시오 스피놀라 등 전근대 유럽의 전장을 풍미한 이탈리아인이 많다.
- 이탈리아의 발달한 대포와 축성기술[17]은 유럽 각지로 수출되었고 르네상스 시대의 축성기술은 근세 요새 축성술의 기반이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같은 미술가로 알려진 사람들도 수많은 무기를 개발하고 요새를 건설한 군사기술자로서도 활동했다.[18]
다만 대포가 본격적으로 발달하면서 이탈리아는 점점 대포 기술에서 뒤떨어지게 되었다. 운송 수단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아서 광산 인근에서 직접 대포를 만드는 것이 대세였는데 이탈리아에는 구리나 철 등의 광산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탈리아의 총포 제작 능력은 21세기에도 세계구급 역량을 자랑한다. 16세기부터 총 장사를 해온 베레타, 함포로 먹어주는 오토멜라라가 모두 이탈리아 회사다.
앞에서의 기술은 화려하지만 전투력과 전투의지는 별개라는 점을 분명히 하자. 이렇게 강력했음에도 이탈리아의 군사적 역량이 높이 평가받지 못하는 것은 이탈리아 용병들이 용병으로서의 입장에 너무도 충실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 용병은 고용이 안정되어 있지 않다.[20] 이번 전투가 끝나면 해고될 것이 뻔하므로 가능한 전투를 질질 끌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다. 베네치아의 경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급적이면 장기계약으로 용병을 고용해서 사실상 정규군처럼 운용했다고 한다.
- 이번 전투가 끝나 해고되면 다음에는 혹시 상대편에 고용될지도 모르므로 원한을 살 일을 해선 안 된다. 따라서 가급적 상대편 민간인에 대한 약탈은 피한다. 하지만 적군의 군수품이나 휴대품에 대한 약탈은 기회만 닥치면 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백년전쟁의 사례에서 영국군의 전열을 돌파한 이탈리아 기병들은 흩어진 영국군을 내버려둔 채[21] 영국군의 본진을 털기 시작했다. 벙 쪄서 그 꼴을 보고 있던 프랑스군은 정신을 차린 영국군의 반격으로 또 처발렸고 이탈리아 기병들은 약탈품만 챙긴 채 단 한 사람의 전사자도 내지 않고 유유히 후퇴했다. 한마디로 프랑스군은 다 이긴 전투인데 지고 만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영국, 프랑스 양군에 대한 이탈리아제 갑옷의 판매가 급증했다.[22] - 몸값을 받을 수 있는 적은 절대 죽이지 않는다.[23]
이 때문에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저서 군주론을 통해 군주는 용병을 고용하기보다는 시민군을 꼭 창설하라고 쓸 정도였다. 하지만 마키아벨리가 말한 이탈리아 용병들에 대한 폄하는 과장된 면이 있다. 마키아벨리의 용병에 대한 폄하는 고대 로마의 시민군의 이상에 심취한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측면이 강했으며 이탈리아의 실제 역사는 오히려 시민군이 용병에 밀려 도태되는 과정을 밟았다.[24] 또한 정말로 전투를 피하고 설렁설렁 싸우는 집단이었다면 제대로 된 전투력을 유지할 수 없었겠지만 실제로는 이 시기 이후 16세기를 넘어 17세기에 이르기까지도 이탈리아의 병사와 장군, 무기는 유럽 전역에 인기 있는 수출품이었다. 심지어 나폴레옹의 정복 전쟁에서도 많은 수의 이탈리아인 병사가 포함되어 있었고 러시아 원정에도 많은 수가 참가하여 러시아의 벌판에서 얼어 죽고 굶어 죽었다.[25]
중세 이탈리아의 군사들 1, 중세 이탈리아의 군사들 2
이탈리아군의 전쟁에 대한 관념이 송두리째 무너지기 시작한 계기는 1494년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이었다. 가급적이면 적을 포로로 잡는 문화를 가지고 있던 이탈리아 군인들은 눈앞의 적을 모조리 죽여 없애는 프랑스군의 행동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전투가 벌어진 후 이탈리아 측 지휘관들은 "당연히" 포로를 돌려받으려고 몸값을 가지고 프랑스군 진영을 찾았는데 포로가 되었을 줄 알았던 이탈리아 기사들이 전부 학살당했다는 것을 알고 어이를 상실했을 정도.
이탈리아 용병들의 사고방식은 다른 면에서도 유럽과 차이점을 보이는데 1527년의 로마 약탈(사코 디 로마) 때도 이탈리아인 용병들은 집을 약탈하고 여자를 강간하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독일인 용병들은 약탈과 강간에 그치지 않고 피해자를 꼭 죽이고 집에 불을 지르고 갔다. 이 문제는 루터교회 개신교 신도였던 독일인 용병들의 교황과 가톨릭에 대한 종교적 적대감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16세기 중반 이후 이탈리아 용병들은 이탈리아 내부에서의 전쟁이 강대국들 사이의 세력균형으로 대부분 사그라들면서 이젠 외부로 수출되었다.
이 시기에도 이탈리아군은 여전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으며 덕분에 이탈리아군 역시 수출 시장에서 인기가 있었지만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군사적 역량은 갈수록 낮은 평가를 받았다. 여기에는 두가지 원인이 있다.
첫 번째는 프랑스나 스페인 등의 통일국가들이 전쟁의 주체가 되면서 점차 전쟁의 규모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커졌다. 이 차이는 병력에서 여실하게 드러났다. 프랑스, 스페인 등이 전장에 수만명을 일시에 동원할 때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비용 문제 때문에 많아야 수천, 보통은 수백명의 용병을 고용하는데 그쳤다. 이러니 프랑스와 스페인이 수만의 대군으로 쳐들어왔을 때 이탈리아가 공포에 질릴 수밖에...
두 번째는 당시의 운반 능력의 문제로 대부분의 대포는 광산 근처에서 제조되었는데 이탈리아는 적절한 광산이 없어서 포병 기술 및 전력 면에서 뒤떨어지게 되었다.
이 두가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 위에 언급된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이다. 수만 대군을 몰고온 프랑스군에 이탈리아 반도 전체가 패닉에 빠졌고, 성벽을 한번에 박살내는 프랑스군의 대포에 이탈리아 인들은 또 한번 충격에 빠졌다. 샤를 8세는 유유자적 남진해서 손쉽게 나폴리를 점령해버렸다.
물론 이런 문제는 어디까지나 육군에 해당되는 것으로 오랜 시간 지중해의 무역로를 장악하고 있던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군은 달랐다. 베네치아 해군은 혈혈단신으로 오스만 제국이란 수십배 덩치의 강대국의 물량러쉬를 뛰어난 조선 기술, 기나긴 항해 전통에 따른 숙련된 선원, 경제력, 외교력, 군사력이란 나라의 자산은 총동원해서 피말리는 싸움을 하면서 결국 지중해 전체의 오스만 제국 호수화를 막아 내었다. 갤리선 중심의 근세의 지중해 해전이 별로 인기 많은 주제가 아니라서 그렇지, 대오스만 전선에서 해상에서 베네치아가 보여준 감투 정신과 조직력, 군사적 인프라는 적어도 그 해당분야에서는 따라올 만한 동시대 유럽 열강이 없었다고 극찬해 줄만 하다. 하지만 베네치아 공화국 조차도 오스만 제국과의 오랜 전쟁으로 많은 재정적 피해를 입었고 나폴레옹이 베네치아에 입성한 1797년 무렵에는 갤리선 조차도 몇 척 남지 않은 쇠락한 상태로 전락했다. 이러한 베네치아 해군의 인프라는 나폴레옹 전쟁 종결 후 베네토를 점령한 오스트리아 제국이 1848년 혁명 전까지 잘 써먹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해군의 모태가 되었다.
16세기를 기점으로 대부분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대부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밀라노 공국,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은 스페인 제국의 손아귀에 넘아갔으며 제노바 공화국과 교황령, 피렌체 공화국을 계승한 토스카나 대공국도 사실상 스페인 영향권으로 들어갔다. 동쪽의 베네치아 공화국과 서쪽의 사보이아 공국만이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했는데 이 중 사보이아 공국은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와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의 노력으로 강력한 상비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벌어진 토리노 공방전 끝에 독립을 사수해냈고 사국 동맹 전쟁을 거쳐 1720년 사르데냐 왕국을 선포한 사보이아 가문의 독립 유지에는 다른 이탈리아 국가는 보유하지 못한 강력한 상비 육군이 있었다. 사르데냐 왕국은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 시기에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 합스부르크 제국, 스페인 부르봉 왕조와 견줄 수 있는 국가로 성장했다.
이탈리아 용병들의 사고방식은 다른 면에서도 유럽과 차이점을 보이는데 1527년의 로마 약탈(사코 디 로마) 때도 이탈리아인 용병들은 집을 약탈하고 여자를 강간하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독일인 용병들은 약탈과 강간에 그치지 않고 피해자를 꼭 죽이고 집에 불을 지르고 갔다. 이 문제는 루터교회 개신교 신도였던 독일인 용병들의 교황과 가톨릭에 대한 종교적 적대감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16세기 중반 이후 이탈리아 용병들은 이탈리아 내부에서의 전쟁이 강대국들 사이의 세력균형으로 대부분 사그라들면서 이젠 외부로 수출되었다.
이 시기에도 이탈리아군은 여전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으며 덕분에 이탈리아군 역시 수출 시장에서 인기가 있었지만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군사적 역량은 갈수록 낮은 평가를 받았다. 여기에는 두가지 원인이 있다.
첫 번째는 프랑스나 스페인 등의 통일국가들이 전쟁의 주체가 되면서 점차 전쟁의 규모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커졌다. 이 차이는 병력에서 여실하게 드러났다. 프랑스, 스페인 등이 전장에 수만명을 일시에 동원할 때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비용 문제 때문에 많아야 수천, 보통은 수백명의 용병을 고용하는데 그쳤다. 이러니 프랑스와 스페인이 수만의 대군으로 쳐들어왔을 때 이탈리아가 공포에 질릴 수밖에...
두 번째는 당시의 운반 능력의 문제로 대부분의 대포는 광산 근처에서 제조되었는데 이탈리아는 적절한 광산이 없어서 포병 기술 및 전력 면에서 뒤떨어지게 되었다.
이 두가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 위에 언급된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이다. 수만 대군을 몰고온 프랑스군에 이탈리아 반도 전체가 패닉에 빠졌고, 성벽을 한번에 박살내는 프랑스군의 대포에 이탈리아 인들은 또 한번 충격에 빠졌다. 샤를 8세는 유유자적 남진해서 손쉽게 나폴리를 점령해버렸다.
물론 이런 문제는 어디까지나 육군에 해당되는 것으로 오랜 시간 지중해의 무역로를 장악하고 있던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군은 달랐다. 베네치아 해군은 혈혈단신으로 오스만 제국이란 수십배 덩치의 강대국의 물량러쉬를 뛰어난 조선 기술, 기나긴 항해 전통에 따른 숙련된 선원, 경제력, 외교력, 군사력이란 나라의 자산은 총동원해서 피말리는 싸움을 하면서 결국 지중해 전체의 오스만 제국 호수화를 막아 내었다. 갤리선 중심의 근세의 지중해 해전이 별로 인기 많은 주제가 아니라서 그렇지, 대오스만 전선에서 해상에서 베네치아가 보여준 감투 정신과 조직력, 군사적 인프라는 적어도 그 해당분야에서는 따라올 만한 동시대 유럽 열강이 없었다고 극찬해 줄만 하다. 하지만 베네치아 공화국 조차도 오스만 제국과의 오랜 전쟁으로 많은 재정적 피해를 입었고 나폴레옹이 베네치아에 입성한 1797년 무렵에는 갤리선 조차도 몇 척 남지 않은 쇠락한 상태로 전락했다. 이러한 베네치아 해군의 인프라는 나폴레옹 전쟁 종결 후 베네토를 점령한 오스트리아 제국이 1848년 혁명 전까지 잘 써먹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해군의 모태가 되었다.
16세기를 기점으로 대부분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대부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밀라노 공국,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은 스페인 제국의 손아귀에 넘아갔으며 제노바 공화국과 교황령, 피렌체 공화국을 계승한 토스카나 대공국도 사실상 스페인 영향권으로 들어갔다. 동쪽의 베네치아 공화국과 서쪽의 사보이아 공국만이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했는데 이 중 사보이아 공국은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와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의 노력으로 강력한 상비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벌어진 토리노 공방전 끝에 독립을 사수해냈고 사국 동맹 전쟁을 거쳐 1720년 사르데냐 왕국을 선포한 사보이아 가문의 독립 유지에는 다른 이탈리아 국가는 보유하지 못한 강력한 상비 육군이 있었다. 사르데냐 왕국은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 시기에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 합스부르크 제국, 스페인 부르봉 왕조와 견줄 수 있는 국가로 성장했다.
자세한 내용은 이탈리아 왕국군 문서 참고하십시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이후 19세기 이후 20세기까지의 이탈리아군은 행군이나 사열 등 뽀대를 중시하는 데 반해 전투력이 약하다는 점 때문에 별로 평이 좋지 않은데, 이는 통일 과정의 후유증으로 볼 수 있다.
일단 통일국가 이탈리아라는 것이 생겨난 게 겨우 1861년의 일이고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즉 북부 이탈리아가 주도한 통일이며 국가의 통합이 충분히 진행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정복당한 거나 마찬가지인 남부인들로서는 이 나라에 충성할 이유가 없었다.
이것은 근대화의 과정과도 맞물려 있다. 북부지방은 공업화를 통한 체제구조 변화를 일찌감치 받아들여 근대적 정부 형태무늬만 를 갖춘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였지만, 남부는 통일전쟁 시기에도 귀족들이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고 가난한 소작농들을 지배하는 전근대적인 봉건체제를 지니고 있었다. 부유하고 공업화된 북부와 가난한 농업지대 남부의 대립은 현재도 극심한 지역감정을 유발하며, 아예 북부의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지역주의 정당 "북부동맹"이 연립정권에 참여할 정도의 세력을 얻은 적도 있을 정도인데 그 당시에는 어땠겠는가? 남부인들은 이런 체제와 구속이 기본으로 배어있는 근대적 군사체제에 적응하기 힘들었고 반강제적인 통합으로 인한 불만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런 문제로 이탈리아 군대는 실질적인 전투 훈련보다 단일한 감정을 공유하기 위한 집체 훈련이나 분열 훈련 같은 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군대의식을 통해 이탈리아인이라는 개념이 성립된 것이 그나마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그보다 중요한 문제는 각 지역별로 기득권에 집착하면서 조직에 지역적 요소가 들어가다보니[26] 효율적인 조직 체계가 자리잡지 못했던 것. 예컨대 2차 세계대전에서는 자주포포대가 전차중대를 지원하기 위해 배속되었지만 지휘권은 개편하지 못해서 자주포포대와 전차중대는 단지 물리적으로만 가까웠을 뿐 각각 서로 다른 연대에 속해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지경이었다. 당연히 상호 협력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일단 통일국가 이탈리아라는 것이 생겨난 게 겨우 1861년의 일이고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즉 북부 이탈리아가 주도한 통일이며 국가의 통합이 충분히 진행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정복당한 거나 마찬가지인 남부인들로서는 이 나라에 충성할 이유가 없었다.
이것은 근대화의 과정과도 맞물려 있다. 북부지방은 공업화를 통한 체제구조 변화를 일찌감치 받아들여 근대적 정부 형태
결국 이런 문제로 이탈리아 군대는 실질적인 전투 훈련보다 단일한 감정을 공유하기 위한 집체 훈련이나 분열 훈련 같은 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군대의식을 통해 이탈리아인이라는 개념이 성립된 것이 그나마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그보다 중요한 문제는 각 지역별로 기득권에 집착하면서 조직에 지역적 요소가 들어가다보니[26] 효율적인 조직 체계가 자리잡지 못했던 것. 예컨대 2차 세계대전에서는 자주포포대가 전차중대를 지원하기 위해 배속되었지만 지휘권은 개편하지 못해서 자주포포대와 전차중대는 단지 물리적으로만 가까웠을 뿐 각각 서로 다른 연대에 속해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지경이었다. 당연히 상호 협력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전차 중대장이 바로 옆의 자주포 포대장한테 "지원 포격 좀!!" 이라고 직접 요청하면 절대 안 된다. 전차중대장이 대대장한테 "바로 옆의 자주포 포대에게 지원포격 좀 해달라고 해주세염!" 이라고 보고 때리면 대대장이 연대장한테 "우리 전차중대한테 바로 옆에 있는 자주포 포대가 지원포격 좀 해달라고 해주세염!" 전차연대장은 사단장에게 "자주포 포대에게 전차 중대 지원포격하라고 해주세요" 사단장이 자주포 연대장한테 "당신네 자주포 포대한테 전차중대에게 지원포격 좀 하라고 하시게" 자주포 연대장은 대대장한테 "지원포격 해줘라" 대대장은 포대장한테 "지원포격 해" 포대장이 "포격 개시!!"(...) |
이런 상태다보니 개별 부대가 아무리 열심히 싸우더라도 군 전체로서의 전투력은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현대 한국군도 보병사단에 배속된 포병은 포병연대장 지휘 하에 있지만, 포병대대/포대와 보병연대/대대가 확실히 짝지어져 있으며 관측장교라는 편리한
구태의연하고 관료주의에 절어있으며 자기의 특권만을 강조하는 장교들이 지휘하는 군대가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쪽이 더 놀라운 일일 것이다. 물론 장교들이 이런 꼴이니 안 그래도 부족한 병사들의 충성심은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전차나 자주포, 전투기 등의 물질적 요소라도 잘 갖추고 있었던 것도 (당연히) 아니다. 무기의 성능과 수량 모두 심각하게 부족했으며 무솔리니가 자존심 때문에 독일제 수랭식 엔진을 수입하(여 그걸 보면서 개발하)지 말고 독자개발을 고집하지 않나, 기껏 경쟁입찰로 그나마 나은 전투기를 골랐더니 피아트가 로비로 입찰에서 패배한 자사 시제품을 군이 정식 채택하게 만들지를 않나. G.50 프레치아가 대표적 사례.
게다가 최근 역사학계에서 1930년대 유럽 각지의 정치적, 사회적 흐름과 제2차 세계 대전 각국의 경험을 통합적으로 분석하려는 학자들의 연구를 조합해서 보면 개전 당시 이탈리아 나라 꼴이 전쟁에 얼마나 준비가 안 돼있었는지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당장 2차대전 본판이 터지기 전에 추축국의 국제적 어그로 행위들을 비교 분석하자면, 나치 독일에게 있어서 오스트리아 합병과 뮌헨 협정을 통한 주데텐란트, 나아가 체코슬로바키아 합병은 결국 해당 국가, 지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하고 나치스의 위신은 올려주며 실리적으로도 수준 높은 체코 군수 산업을 그대로 접수해 쏠쏠하게 써먹은 일석삼조의 효과를 본 반면, 이탈리아의 경우는 생각보다 출혈이 큰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의 손실을 복구하지도 못한 채 바로 스페인 내전에 뛰어들었고, 지원은 해 줘도 생색도 많이 내고, 독일 자체의 전쟁 준비력에는 결코 손실이 되지 않도록 퍼주었던 히틀러와 달리 무솔리니는 차후 프랑코 정권 아래 스페인에게 누가 지중해의 큰 형님인지 보여주기 위해 무려 9만명에 가까운 정규군을 파견하며, 당시 나라 예산의 20%에 가까웠던 8백만 리라라는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27]
에티오피아 전쟁에서만 하더라도 전사자 2만명을 포함한 이탈리아측 사상자도 20만에 가까웠던 생각보다 큰 희생이었고, 무엇보다 에티오피아 전쟁은 무솔리니 본인의 로마 제국 부활 드립이라는 프로파간다적인 측면만 빼고 이탈리아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그나마 스페인 내전에서의 개입은 제2 세계 차대전 때 보여줄 졸전의 전주곡을 그대로 보여주면서[28] 국력과 군대를 보전하며 이 시기 나날히 발전하고 있었던 첨단 군사 기술과 군사적 인프라에 꾸준히 투자하면서 역량을 키워도 부족할 바인데 저런 아무런 이득도 없는 정치적 모험에 소중한 자원과 병력을 낭비했으니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그 헛일을 짐작하긴 어렵지 않다. 같은 파시스트 동맹인 나치 독일에 의해 이탈리아는 1940년 추축군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때부터 좌익, 반파시스트 성향이 강했던 토리노, 피렌체, 볼로냐 같은 북부와 중부의 공업도시들 위주로 대규모의 반전 여론과 전쟁 피로감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무솔리니가 히틀러의 나치당처럼 이탈리아의 모든 체제를 장악하고 볼멘 소리가 한마디도 나오지 못하게 찍어 누르는 상태였다면 겉으로나마 일치단결할 수도 있겠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당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은 생각보다 기반이 취약했고, 이 때문에 반대파는 물론이고 정권 내의 계파 싸움도 제대로 정리하기 힘들었다. 위에 언급된 계파별, 지역별 기득권으로 인한 분열 양상도 이로 인해 벌어진 사례이다.
한마디로 전쟁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장성들도 어떻게 싸우란 말이냐!!' 라고 쌍욕을 하는데도 무솔리니가 억지로 밀어붙여서 전쟁을 벌이다 보니 졸전이 많은 거지 착실한 준비만 했으면 비웃음 당할 정도는 아니었을 거다. 다만, 인구도 적고 산업능력상 한계도 뚜렷했다.
가끔 일뽕들이 일본보다 더하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일본군은 이탈리아군과 비교할 거리가 많긴 하다. 두 나라 모두 통합되지 않은 조직력을 가지고 전쟁에 뛰어 들어갔다가 전쟁 치르는 국가 내부에서 손발이 안 맞아 말아먹은 게 심각했다는 것도 비슷하고. 차이점이 있다면 일본군의 내부 분열은 육해군간 부서간 갈등이 심각한 반면 이탈리아는 부서간 마찰 차원 정도가 아니라 아예 졸전이 계속되면 될수록 파시스트 정권 자체에서 민간 사회와 국론이 이탈하는, 내부 분열의 정도가 전쟁 지도층 내부 수준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이건 양쪽이 어느 쪽이 좋다 나쁘다 병림픽거리가 아니라 일제나 이탈리아나 사실 진지하게 국내 생산량, 경제력, 산업 규모 등을 냉엄하게 따지고 보면 영불독소미 당대 진짜 1티어 최강급 강대국들에 비해 현격하게 딸리는 객관적인 실력을 국민들에겐 어디 고위층 본인들도 안 믿는 천황 숭배, 파시즘 따위 이념으로 가려놓고 전쟁광 짓거리나 하다가 사이좋게 파멸한 도긴개긴으로 봐야 할 것이다. 굳이 이런 병림픽에서 우열을 가리자면 적어도 전체주의적 세뇌교육의 효과는 확실하게 본 일본이 아예 탈영, 항복, 가라전투를 밥 먹듯이 저지른 이탈리아보단 객관적으로 나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나마 이 군인 개개인 차원의 정신력 차원에서 당시 일본의 우위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선 도저히 제정신으로 옹호할 수 없는 가치관의 전체주의적 국민 세뇌로 인한 것이었기 때문에 멀쩡한 일반적인 가치관에서 이걸 두고 더 긍정적이라 보긴 힘들다.
분야별로 따진다면 우선 규모는 일본군이 더 컸다. 감투정신은 따지고 보면 일본군이 더 나았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제국은 사실 상대가 압도적인 수적, 질적 우위를 지닌 미군, 소련군, 중국군(양에 한정한다.)이 상대인 경우가 많았다. 후반에는 그랬고 전쟁 초반에도 그랬다. 그런데도 최소한 서전에서 이긴 적은 있다. 반면 이탈리아는 초반에 영국에 선전포고하여 북아프리카 전역을 열었을 때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지니고도 오히려 독일군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리비아를 상실할 뻔 했다.
군사 과학기술 측면에서 보면 총기는 두드러지는 격차는 찾기 어렵다. 전차는 이탈리아가 좀 더 나았고 항공기는 기초적인 기술은 이탈리아가 나았지만 실제로는 복엽기나 소량 생산하고 있었다. 나중에 가면 일본 제국이 역전하다시피 했다. 결정적으로 양이 적었다. 해군은 이탈리아, 일본 제국은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다만 일본 해군이 전함의 보유 톤수, 항공모함의 보유 톤수 등 양적으로 우위였고 질적으로도 미국 해군력보다 낮았으면 낮았지 이탈리아 해군력에 비해 떨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이탈리아 해군은 지중해에서 주로 작전을 펼쳤기 때문에 육지에서 출격하면 되었으므로 항모 수요가 떨어지는 점이다. 잠수함의 활약상이 더 괜찮았다는데 우위가 있다.
그런데 이탈리아, 일본 제국은 둘 다 전시 상층부의 능력이 매우 무능하다. 가령 무솔리니의 대책 없는 전쟁 도발, 전선 확대나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이나 전쟁범죄가 거의 없다는 점[29] , 무솔리니가 전쟁 이전까지는 그럭저럭 개념 지도자로 통한 점이나 시칠리아 함락 직후 재빠른 항복 정도가 그나마 쳐줄만할 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자국민을 의미없이 적군 앞에 고기 방패로 던져주는 것보단. 그리고 사실 이건 그래봤자 파시스트 전쟁광인 무솔리니를 그나마 개념 있다 없다로 치켜 세워줄 게 아니라, 파시스트 정권 자체가 이탈리아 국민의 마음을 빠르게 사로잡을만큼 깊게 파고들지도 못했으며, 따라서 1930년대 부터 쭈욱 이탈리아에는 활발한 반파시스트 운동이 벌어졌고, 그게 연합군 진주 이후로는 빨치산 투쟁이라는 이탈리아인들 자체의 독립적인 무장투쟁으로 결실을 본 반파시스트 이탈리아인들에게 공로를 돌려야한다.
그래도 병사 개개인이 여자라든지 자존심 등의 "싸워야만 할 이유"가 있을 때, 유능한 지휘관이 있을 때라면 꽤 괜찮게 싸운 편이다. 독일군이 이탈리아군에 비해서 허접쓰레기로 취급받는 시절도 잠시지만 존재하기는 했다. 독일군의 확장이 시작된 지 겨우 3년차였던 오스트리아 합병 때가 좋은 예로 이때 독일군의 오스트리아 진주는 갑작스레 이뤄졌기 때문에 행군계획 수립부터 시작해서 장비 정비 상태, 병참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다. 이 광경을 본 이탈리아군 주재무관이 "우리보다도 형편없다"고 비판한 것이다.(특히 병사들의 행군 군기에 비판이 집중됐는데 이탈리아군도 어지간히 행군 군기 나쁜 것으로 유명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시 프랑스, 영국에서 위험한 인물로 평가받는 인물은 베니토 무솔리니였다!!! 이탈리아 파시즘이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할 정도였다. 아돌프 히틀러도 무솔리니와 연대를 생각했을 정도였으며 심지어는 지구 반대편의 마오쩌둥조차도 무솔리니를 '이 시대의 진정한 마키아벨리스트'라며 히틀러나 히로히토 같은 다른 추축국의 지도자들보다 고평가하기도 하였다. 물론 베르사유 조약 때문에 군대가 축소된 후유증이었고 얼마 안 가서 이탈리아군과의 사이에 비교가 불가능해진다.[30]
전체적으로 체계가 안 잡혀있어서 말아먹은 거지 개개인이 약한 병사인 것은 아니었고 정예부대는 매우 잘 전투를 벌였다. 대표적인 것이 폴고레 공수사단, 베르살리에리 연대, 아리에테 기갑사단, 알피니 산악사단 등이다. 그리고 동부전선에 파병된 조반니 메세 휘하[31]의 러시아 원정군단은 이탈리아군 제대 중에서는 잘싸운 이탈리아군 제대 중 가장 대규모로 평가받는다. 600명의 사보이아 근위기병연대는 2천 명의 소련군을 상대로 기병도를 들고 기병 돌격하여 소련군을 격파하는 대단한 기록을 세웠다. 북아프리카 전역이 개전되었을 때 이탈리아 해군 특수부대가 마이알레라는 특수 어뢰를 타고 영국 지중해 함대의 모항인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잠입, 폭탄을 설치해서 전함 발리언트와 퀸 엘리자베스를 대파시키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 때 파손이 좀 더 컸다면 영국 해군은 지중해의 제해권을 상실할 뻔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이탈리아군은 일부 특수전 부대를 제외하고는 평범한 군대로 별 화제가 되지 않는 듯하다. 지중해 주변 국가 중 스페인과 더불어 항모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 정도이다.(정규 항공모함은 아니고 수직이착륙기를 운용하는 경항공모함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전통은 못 버렸는지 탈레반에게서 돈을 주고 평화를 샀다가 애먼 국가가 피박을 쓰게 만드는 사고를 치기도 했다.
냉전 시기엔 NATO 회원국으로 표면적으로는 동서 대립의 한 축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으나 실제 이탈리아군은 유사시 즉각 전선에서 대응하기 보다는 유럽의 내부 체제를 안정시키고 2선에서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32] 이는 이탈리아군 자체의 전투력 문제보다는 이탈리아의 대내외 정치 상황에서 기인한다. 냉전 당시 이탈리아와 인접한 공산 국가인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는 공산주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따로 노는 국가들이라 전시 상황에도 직접 이탈리아군이 접경 지대에서 교전에 참가할 가능성은 낮은 편이었다.
반대로 이들 국가들이 이탈리아군과 군사적으로 충돌할 경우를 가정할 때도 이탈리아군이 직접 국경 지역에 배치될 가능성은 낮은 편이었다.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 그리고 이탈리아와 사이에 있는 아드리아 해의 폭은 200km 내외라서 지리적으로 상당히 가까운 편이었고 만일 이들이 침공한다고 하면 당연하게도 아드리아 해의 넓은 해안선 때문에 이탈리아 본토 내에 주력 부대들이 있어야 방어가 가능하였다. 게다가 이탈리아는 의회 민주주의 국가였지만 사회당, 공산당 등 좌파 정당의 힘이 강한 편이었고 특히 이탈리아 공산당은 냉전 시절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좌파 정당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탈리아군을 함부로 동원했다간 자칫 이탈리아의 정세가 안드로메다로 빠질 수도 있었다.
2004년에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되었다.
이탈리아 군부 내에는 수십 명의 유대인 장성들이 있었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많은 유대인들이 이탈리아인으로서 독일 제국군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과 싸우다 죽었다. 이탈리아인들은 저렇게 독일인이 유대인 학살에 환장하는 걸 미개하다고 생각했다.[33]
하지만 독일이 강력해짐에 따라 이탈리아 측의 입장은 약해졌고 반유대정책을 실시하라는 독일의 요구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무솔리니는 전쟁 직전부터 유대계 재무장관이였던 구이도 융을 좌천시키는 등 반유대주의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으나 어떤 이탈리아 유태인도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자발적으로 아우슈비츠에 보내지지 않았다.
이탈리아 유대인이 아우슈비츠와 같은 절멸수용소로 보내진 것은 이탈리아 왕국의 무솔리니 정권의 붕괴로 파시스트 잔당들이 북부에 독일의 괴뢰정권을 수립한 이후의 일이다. 물론 이 시점에서도 적지 않은 이탈리아 정규군이 친위대를 중심으로 한 독일군의 유대인 박해를 실력으로 저지하기도 했다. 그 결과 홀로코스트로 인한 이탈리아 유대인 희생은 총인구의 20% 선에서 억제되었으며 이는 추축 가담국 중에서는 핀란드와 덴마크, 불가리아를 제외하면 제일 낮은 수치였다. 그나마 핀란드는 단 22명만이 1944년 핀란드의 대독 선전포고 때 라플란드에서 탈출하던 독일군에게 보복으로 학살당했을 뿐이고 덴마크와 불가리아는 당시 지배층들의 기지와 계책으로 수 많은 유대계 주민들이 나치에 의해 사망하지 않고 생존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이탈리아가 최저다. 헝가리도 비슷한 방식으로 유대인을 수호했으나 본래 민중 차원의 반유대주의가 존재했던 국가라 막판에 나치즘 성향의 화살십자당에 의해 대량학살이 벌어져 단 1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무려 60~70%가 희생당했다.
그와 별개로 이탈리아군이 대단한 것은 이탈리아 유대인뿐 아니라 자기들이 주둔한 점령지에서도 유대인을 보호했다는 것이다. 프랑스, 크로아티아, 그리스,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북아프리카 등지의 이탈리아 점령지에서는 독일 점령지에서와 같은 유대인 색출이나 박해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 이탈리아가 연합군에게 항복하면서 점령지를 독일군에게 인계하고 이탈리아군이 본국으로 철수하게 되자 그 지역에 독일군이 들어왔을 때 유대인들이 처하게 될 운명을 걱정한 나머지 자기들의 철수 열차에 현지 유대인들을 태워 이탈리아 본국으로 함께 데리고 갈 정도였다.
또한 독일군이 많은 경우 점령지를 공포로 지배한 것에 비해 이탈리아군은 어디까지나 대체로는 주민들과 어울려 산 편이였다.[34] 이탈리아군은 온갖 전쟁 범죄로 악명이 자자한 독일군 및 일본군과 달리 대전기간 내내 민간인 학살 등 별다른 중한 전쟁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며 점령지의 현지인이나 연합군 포로를 비교적 정중히 대했다.[35] 이는 이탈리아가 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이라는 불명예를 독일과 일본보다 덜 짊어지게 하는데 확실히 기여했다. 당장 이탈리아 영화 《지중해》나 니컬러스 케이지가 주연한 영화 《코렐리의 만돌린》을 보면 그리스를 독일과 분할 점령한 이탈리아군이 어떻게 지냈는지 잘 나와 있다.
독일군들과의 마찰로 이탈리아군이 학살당한 전적도 있는데 1943년 이탈리아가 연합군에게 항복한 후 그리스 케팔로니아 섬에 주둔중이던 이탈리아군 마키 사단이 현지 주민들과 함께 독일군에게 저항한 후 항복했으나 사단장을 비롯한 5,000명이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연합군에게 포로가 된 이탈리아군은 대단히 협조적이어서 포로수용소에서 여친을 사귄 사례도 있다.[36] 그래서 전후 전선에서 돌아온 연합군 장병들이 '우리들이 전선에서 싸우는 동안 포로 녀석들은 편하게 여자나 꼬시고 있었다'[37]면서 불평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 밖에도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과 전공을 살려 자신들이 먹을 빵도 직접 만들고 옷도 수선하는 등, 연합군의 시각에서 본 이탈리아군 포로들은 정말 행복해 보일 지경이었다고...
그러나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러한 면모는 부풀려진 감이 없잖아 않다.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이후 에티오피아가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되자 이탈리아는 매우 억압적으로 통치했으며, 에티오피아인들이 학살당했다. 그밖에 리비아에서도 리비아 저항군에게 20년 넘는 게릴라전에 시달리자 그야말로 학살로 대응하던 것도 이탈리아군이다. 또한 유고슬라비아 침공 이후 점령한 슬로베니아와 몬테네그로 지역의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그리스 침공시기 이탈리아군에게 죽은 그리스인 주민들도 꽤 많다. 또한 2차 대전 직후 이탈리아 왕국이 항복하고 친독 파시즘 인사들이 세운 살로 공화국에서는 수천명의 유대인과 저항군이 학살당한 전적도 있다.[38]
하지만 독일이 강력해짐에 따라 이탈리아 측의 입장은 약해졌고 반유대정책을 실시하라는 독일의 요구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무솔리니는 전쟁 직전부터 유대계 재무장관이였던 구이도 융을 좌천시키는 등 반유대주의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으나 어떤 이탈리아 유태인도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자발적으로 아우슈비츠에 보내지지 않았다.
이탈리아 유대인이 아우슈비츠와 같은 절멸수용소로 보내진 것은 이탈리아 왕국의 무솔리니 정권의 붕괴로 파시스트 잔당들이 북부에 독일의 괴뢰정권을 수립한 이후의 일이다. 물론 이 시점에서도 적지 않은 이탈리아 정규군이 친위대를 중심으로 한 독일군의 유대인 박해를 실력으로 저지하기도 했다. 그 결과 홀로코스트로 인한 이탈리아 유대인 희생은 총인구의 20% 선에서 억제되었으며 이는 추축 가담국 중에서는 핀란드와 덴마크, 불가리아를 제외하면 제일 낮은 수치였다. 그나마 핀란드는 단 22명만이 1944년 핀란드의 대독 선전포고 때 라플란드에서 탈출하던 독일군에게 보복으로 학살당했을 뿐이고 덴마크와 불가리아는 당시 지배층들의 기지와 계책으로 수 많은 유대계 주민들이 나치에 의해 사망하지 않고 생존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이탈리아가 최저다. 헝가리도 비슷한 방식으로 유대인을 수호했으나 본래 민중 차원의 반유대주의가 존재했던 국가라 막판에 나치즘 성향의 화살십자당에 의해 대량학살이 벌어져 단 1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무려 60~70%가 희생당했다.
그와 별개로 이탈리아군이 대단한 것은 이탈리아 유대인뿐 아니라 자기들이 주둔한 점령지에서도 유대인을 보호했다는 것이다. 프랑스, 크로아티아, 그리스,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북아프리카 등지의 이탈리아 점령지에서는 독일 점령지에서와 같은 유대인 색출이나 박해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 이탈리아가 연합군에게 항복하면서 점령지를 독일군에게 인계하고 이탈리아군이 본국으로 철수하게 되자 그 지역에 독일군이 들어왔을 때 유대인들이 처하게 될 운명을 걱정한 나머지 자기들의 철수 열차에 현지 유대인들을 태워 이탈리아 본국으로 함께 데리고 갈 정도였다.
또한 독일군이 많은 경우 점령지를 공포로 지배한 것에 비해 이탈리아군은 어디까지나 대체로는 주민들과 어울려 산 편이였다.[34] 이탈리아군은 온갖 전쟁 범죄로 악명이 자자한 독일군 및 일본군과 달리 대전기간 내내 민간인 학살 등 별다른 중한 전쟁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며 점령지의 현지인이나 연합군 포로를 비교적 정중히 대했다.[35] 이는 이탈리아가 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이라는 불명예를 독일과 일본보다 덜 짊어지게 하는데 확실히 기여했다. 당장 이탈리아 영화 《지중해》나 니컬러스 케이지가 주연한 영화 《코렐리의 만돌린》을 보면 그리스를 독일과 분할 점령한 이탈리아군이 어떻게 지냈는지 잘 나와 있다.
독일군들과의 마찰로 이탈리아군이 학살당한 전적도 있는데 1943년 이탈리아가 연합군에게 항복한 후 그리스 케팔로니아 섬에 주둔중이던 이탈리아군 마키 사단이 현지 주민들과 함께 독일군에게 저항한 후 항복했으나 사단장을 비롯한 5,000명이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연합군에게 포로가 된 이탈리아군은 대단히 협조적이어서 포로수용소에서 여친을 사귄 사례도 있다.[36] 그래서 전후 전선에서 돌아온 연합군 장병들이 '우리들이 전선에서 싸우는 동안 포로 녀석들은 편하게 여자나 꼬시고 있었다'[37]면서 불평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 밖에도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과 전공을 살려 자신들이 먹을 빵도 직접 만들고 옷도 수선하는 등, 연합군의 시각에서 본 이탈리아군 포로들은 정말 행복해 보일 지경이었다고...
그러나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러한 면모는 부풀려진 감이 없잖아 않다.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이후 에티오피아가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되자 이탈리아는 매우 억압적으로 통치했으며, 에티오피아인들이 학살당했다. 그밖에 리비아에서도 리비아 저항군에게 20년 넘는 게릴라전에 시달리자 그야말로 학살로 대응하던 것도 이탈리아군이다. 또한 유고슬라비아 침공 이후 점령한 슬로베니아와 몬테네그로 지역의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그리스 침공시기 이탈리아군에게 죽은 그리스인 주민들도 꽤 많다. 또한 2차 대전 직후 이탈리아 왕국이 항복하고 친독 파시즘 인사들이 세운 살로 공화국에서는 수천명의 유대인과 저항군이 학살당한 전적도 있다.[38]
일반적인 인지도는 낮은 편이지만 6.25 전쟁에 이탈리아군 의료부대가 파견된 적이 있다. 당시 이탈리아는 서독(現 독일)과 함께 참전국 중 유일한 유엔 비회원국으로 조속하게 국제사회에 복귀하고자 하고 있었다. 의료부대 참가 6개국(다른 5개국은 인도,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서독. 순서는 파견 의료진 수) 중에서는 가장 소규모였으나 1951년 11월에 한국에 도착하여 바로 경인 지역에 병원을 설치하고 1955년 1월 2일 임무를 종료하기 전까지 유엔군뿐 아니라 한국 민간인들을 상대로도 많은 활동을 했다.
해당 기간 동안 이탈리아 의료진이 치료한 환자의 수는 처음 파송 후 6개월간 진료한 환자만 쳐도 외래진료가 58,800명에 이르며 활동 전 기간에 걸친 외래환자는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19만 명에 달한다. 입원 환자의 수만 해도 7,041명, 입원 기간의 총합은 13만 1천 513일이다.
당시의 병원 운영 방침을 보면 정말 이탈리아군 다운 점이 있다.
해당 기간 동안 이탈리아 의료진이 치료한 환자의 수는 처음 파송 후 6개월간 진료한 환자만 쳐도 외래진료가 58,800명에 이르며 활동 전 기간에 걸친 외래환자는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19만 명에 달한다. 입원 환자의 수만 해도 7,041명, 입원 기간의 총합은 13만 1천 513일이다.
당시의 병원 운영 방침을 보면 정말 이탈리아군 다운 점이 있다.
환자의 식사는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으며 매일 충분한 양의 백반, 어류, 채소 및 과실을 제공하고 있다. 이 환자 식사는 특히 위생에 대한 여러 사항에 유의하면서 환자 본국의 양식에 따라 조리하고 있다.
사실 모든 병원도 전자의 경우도 최대한 충족하기 위해 노력하긴 하나 웬만한 고급 병원이 아닌 이상에야 후자는 충족하지 않는다.
허당으로 유명한 군의 명성과는 달리 군수산업은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했다. 무솔리니 시절에 대외팽창을 한답시고 중공업도 별로 없는 이탈리아에서 여러가지 군수산업을 육성했는데 그것들이 전후에도 남아서 패션 못지않게 이탈리아의 수출품이 되고 있다. 이탈리아군의 전투력을 생각하면 의외지만 2차대전 때 이들은 소총부터 전차, 비행기까지 자급하고 있었다. 물론 군 장비들의 성능이 들쑥날쑥한 게 문제였지만 잘 만든 물건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유로파이터 유한회사의 일원으로도 유명한 레오나르도는 이탈리아 2위의 대기업이며,[39] 세계 1위 크루즈 건조 업체이자 유럽 1위 조선업체인 핀칸티에리는 이탈리아 해군의 주요 함선 건조를 도맡고 있으며 해외 사업도 여러 건 수주했다. 베레타사의 베레타 92는 베레타 M9라는 제식명으로 1985년부터 미군의 M1911을 대체했고, 2017년부터 SIG P320이 SIG M17 MHS라는 제식명으로 M9를 대체하고 있다. 또한 베넬리 사의 반자동 산탄총 시리즈인 베넬리 시리즈 중 베넬리 M4는 1999년부터 베넬리 M1014 JSCS라는 제식명으로 미 육군과 미 해병대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T-50 골든이글을 번번히 물먹인 M-346의 알레리아 아에르마키사가 바로 이탈리아 회사이다. 이 회사[40]는 제1차 세계 대전 때부터 전투기를 생산했고 2차대전에서도 C.200과 같은 유명한 전투기들을 생산했다. 헬리콥터로 유명한 아구스타 웨스트랜드의 아구스타 역시 이탈리아 기업이다.
라인메탈 사와 함께 세계 최고의 화포 생산 기업 특히 해군용 함포쪽에 있어서는 상당히 유명한 오토멜라라사 또한 이탈리아의 대표적 군수 기업 중 하나이다.[41] 그 유명한 피아트도 전차 및 전차엔진을 만들었지만 이탈리아의 전차는 대체로 질이 낮다. 다만 차륜형 장갑차는 우수한 품질을 자랑한다. 한국도 피아트제 KM900을 수입 했었고, 첸타우로는 러시아가 호평할 수준으로 우수한 성능을 자랑한다.[42]
군수 산업, 군사 기술 분야에선 사실 이탈리아는 르네상스 시절부터 전유럽의 선두주자이자 트렌드세터라 할만하다. 당장 보방식 요새의 원형인 이탈리아식 성채, 밀라노산 갑주 같은 면만 봐도 알 수 있다.
유로파이터 유한회사의 일원으로도 유명한 레오나르도는 이탈리아 2위의 대기업이며,[39] 세계 1위 크루즈 건조 업체이자 유럽 1위 조선업체인 핀칸티에리는 이탈리아 해군의 주요 함선 건조를 도맡고 있으며 해외 사업도 여러 건 수주했다. 베레타사의 베레타 92는 베레타 M9라는 제식명으로 1985년부터 미군의 M1911을 대체했고, 2017년부터 SIG P320이 SIG M17 MHS라는 제식명으로 M9를 대체하고 있다. 또한 베넬리 사의 반자동 산탄총 시리즈인 베넬리 시리즈 중 베넬리 M4는 1999년부터 베넬리 M1014 JSCS라는 제식명으로 미 육군과 미 해병대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T-50 골든이글을 번번히 물먹인 M-346의 알레리아 아에르마키사가 바로 이탈리아 회사이다. 이 회사[40]는 제1차 세계 대전 때부터 전투기를 생산했고 2차대전에서도 C.200과 같은 유명한 전투기들을 생산했다. 헬리콥터로 유명한 아구스타 웨스트랜드의 아구스타 역시 이탈리아 기업이다.
라인메탈 사와 함께 세계 최고의 화포 생산 기업 특히 해군용 함포쪽에 있어서는 상당히 유명한 오토멜라라사 또한 이탈리아의 대표적 군수 기업 중 하나이다.[41] 그 유명한 피아트도 전차 및 전차엔진을 만들었지만 이탈리아의 전차는 대체로 질이 낮다. 다만 차륜형 장갑차는 우수한 품질을 자랑한다. 한국도 피아트제 KM900을 수입 했었고, 첸타우로는 러시아가 호평할 수준으로 우수한 성능을 자랑한다.[42]
군수 산업, 군사 기술 분야에선 사실 이탈리아는 르네상스 시절부터 전유럽의 선두주자이자 트렌드세터라 할만하다. 당장 보방식 요새의 원형인 이탈리아식 성채, 밀라노산 갑주 같은 면만 봐도 알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이탈리아 육군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이탈리아 해군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이탈리아 공군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이탈리아 헌병대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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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레타 ARX-160A1/A2
이탈리아 왕국군도 포함. 카라비니에리는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에 수도 없이 등장한다. 하지만 대부분 민간 경찰 임무 수행 중에 출연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문단에서는 서술하지 않는다.
- 사하라(1943, 1995) : 전자는 미국에서 만든 선전 영화고 후자는 호주에서 이를 리메이크 한 것이다. 미군 포로로 잡히는 이탈리아군이 등장하고 어느새 매우 친해져서(...) 같이 잡혀있던 독일군에게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디스하는 패기도 보여준다.
- 사막의 라이온: 1920년대 이탈리아군. 리비아 침공을 주요 이야기로 다루었다.
- 전장의 초상(원제: 숏 컷, 1989): 니컬러스 케이지 주연.
- 엘 알라메인 (2002) - 2차대전중 북아프리카의 사막에서 보급도 제대로 못받고 굶주린채 영국군에게 치여 살아가는 이탈리아군의 모습이 나온다.
- 코렐리의 만돌린(2001) - 니콜라스 케이지가 12년 만에 이탈리아군을 또 연기한다(...) 위에 언급된 이탈리아군의 부실한 면모들이 잘 나온다. 한 예로 그리스의 한 마을을 점령한 이탈리아군이 마을 회관 앞에 와서 항복 의식을 준비하자 마을 촌장이 쪽지 한 장을 내미는데 거기에는 딱 한 줄만 적혀 있었다. 'FUCK OFF(x까)'. 이렇게 '이탈리아 놈들에겐 항복 안 한다!'고 고집을 부려서 인근에 있던 독일군 부대의 장교가 와서야 정식으로 항복한다(...). 게다가 항복할 당시 촌장이 하는 독설도 일품. '당신네 이탈리아군에게 항복하느니 베버 대위(항복을 받는 독일군 장교)의 개에게 항복하는게 더 걸맞겠소.'
- 폴린(2004) - 2차대전 독일군, 미군, 이탈리아군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 북경의 55일 작품 진행중 열강 8개국중 하나로 해군 육전대가 꾸준히 등장하며, 막판엔 베르살리에리 연대가 구보하며 입장한다.
1929년부터 1992년까지 이탈리아군에서 사용된 위장무늬 패턴인 Telo-mimetico(텔로-미메티코)는 세계 최초로 발명된 위장무늬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용된 위장무늬다. 1차대전 당시에도 병사들이 개인적으로 헬멧에 위장무늬를 칠하기도 했지만, 대량생산된 최초의 위장무늬는 Telo mimetico가 시초이다. 다만 초기에는 Telo Tenta라고 하는 1인용 텐트에만 사용되었고, 최초로 군복에 위장무늬를 사용한 군대는 나치 독일의 무장친위대다.[45] 이탈리아군에서 위장복은 1942년에야 공수부대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후로도 개량을 거쳐 사용되다가 1992년에 우드랜드를 기반으로 한 mimetico Roma 90(미메티코 로마 90)으로 대체되었고, 2005년부터 mimetico Vegetata(미메티코-베지타타)가 mimetico Roma 90를 대신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육군사관학교는 모데나, 해군사관학교는 리보르노, 공군사관학교는 포추올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육군사관학교의 경우 과거 모데나 레조 공국의 궁전을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육군사관학교는 모데나, 해군사관학교는 리보르노, 공군사관학교는 포추올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육군사관학교의 경우 과거 모데나 레조 공국의 궁전을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 편제 변천사
- 2차세계대전
- 냉전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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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군대 (지역별 가나다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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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육군, 해군, 공군, 헌병대, 세무경대 총합.[2] 발칸 반도의 나토군은 루마니아군과 불가리아군도 있긴하지만 전력이 미약하므로, 실질적으로 발칸반도의 주력은 그리스군이다.[3] 이탈리아는 현재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대통령에게도 어느 정도 권한이 주어지는 구조이기 때문에 통수권자는 대통령이다.[a] 원수 또는 상급대장에 상응.[5] Capo di stato maggiore dell'Esercito[b] 6.1 6.2 6.3 6.4 대장에 상응[10] 지중해에 걸친 제국인 로마를 이탈리아에 한정된 국가라 하기는 힘들지만, '이탈리아의 도시국가'가 확장하여 형성된 제국이기도 하다.[11] Corsair. 스타크래프트에 등장하는 유닛인 커세어와 미 해군의 2차대전 시절 함재기 F4U 콜세어의 어원이다.[12] 그 당시 이탈리아의 석궁은 유럽에서 최고를 자랑했다. 지금도 이탈리아에서는 석궁 쏘기 대회를 벌인다.[13] 물론 대부분이 석궁수 같은 보병들이다. 이탈리아는 국토 대부분이 산지라서 말을 많이 키울 만한 목초지가 부족해 군마 생산이 저조했다. 그래서 이탈리아는 항상 스위스, 스코틀랜드처럼 보병 중심이었으며 기병인 기사들은 모두 다른 국가에서 모집한 비이탈리아인 용병이다. 이 기사들은 이탈리아의 도시들에서 용병 생활을 하다가 계약이 끝나면 다른 나라로 가서 용병 생활을 하는 것이다. 고대 로마군 병사의 전형적인 이미지가 글라디우스 검과 사각 방패를 착용한 보병의 모습인 건 잘 알려져 있는데, 이도 이런 점과 연관이 깊다.[14] 사실 이탈리아 기사들이 잉글랜드 왕국에도 고용되었기에 괜히 잉글랜드와 감정이 상하면 돈을 벌기가 힘들어 지기 때문에 일부러 추격하지 않았던 것이다.[15] 물론 첫번째로 강한 스페인 본토 출신쯤 되면 괴수다. 부르고뉴의 경우 15세기 후반 익히 유명한 용담공 샤를이 덜컥 전사한 이후 수도 디종시 일대는 프랑스가 먹었으나, 남쪽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먹어 '(중앙인 스페인 왕실에게서 자치를 누리는) 자유 백작령'이란 뜻인 오늘날의 프랑슈콩테 지방이 되었고, 많은 수가 스페인군에 지원했다. 여담이지만 당시 네덜란드 전역에서 주로 싸우던 스페인군에는 잉글랜드, 아일랜드 등에서 가톨릭 신앙의 자유를 찾아 망명온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고, 이들도 저렇게 언어별로 구성 된 부대에 편성 되 상당한 이름을 떨쳤다.[16] 사실 이탈리아의 기사들은 모두 용병이라서 싸움이라면 이골이 난 상태였다. 또한 그때 토너먼트에 참가한 프랑스 기사들은 아직까지 전투 경험이 부족했기에 발릴 수밖에.[17] 이탈리아식 성형 요새는 당시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포의 포격을 견딜 수 있는 구조의 요새였다. 유럽에서 이탈리아식 요새가 보급된 것은 대포의 시대에 유럽에서만 대제국이 출연하지 않은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18] 아예 본업이 건축가이자 공학자라고 보는 경우도 많다.[19] 스위스 용병은 다른 일거리가 없어서 되는 것이다. 게다가 지역 단위로 모집되므로 찌질이가 하나 나오면 그 지역 출신 후배들의 취업길을 막아버린다. 하지만 이탈리아 용병은 용병이 안 되어도 농사를 짓든지 취업을 하든지 할 일이 많은 데다 일단 개인 차원으로 움직이므로 자식이나 후배의 용병 취업에 주의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스위스 용병은 그 누구보다도 신용에 목을 매서 사코 디 로마 사건에서도 끝까지 교황을 지켰고 프랑스 대혁명 당시에도 루이 16세는 이들을 위해서 더이상 용병으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끝까지 시민들에게 맞서다가 죽었다.[20] 이것은 중세 유럽의 모든 용병들이 마찬가지였다. 용병들은 전쟁이 끝나면 계약만료가 되어 다시 실업자가 되기 쉬워 도적질까지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따라서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들도 용병 처리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21] 전투에 이기려면 적이 흩어졌을 때 몽땅 잡아죽이는 게 정석이다.[22] 이탈리아 갑주는 방어력에서 최고를 자랑해 유럽에서 인기가 좋았다.[23] 다만 이건 비단 이탈리아만 해당하는 소리는 아니다. 백년전쟁 당시도 영국군은 프랑스 기사들을 가능하면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아 몸값을 짭짤하게 챙긴 경우가 허다했으며, 애초에 백년전쟁 훨씬 이전부터 내려오던 전통(?)이었다. 사실 더 확장해보면 유럽, 이슬람 등은 귀족 출신들은 포로로 잡은 이상 죽이지 않고 몸값을 받고 풀어주기 일쑤였다.[24] 사실 고대 로마도 용병을 고용했다. 특히 기병 부족에 시달리던 로마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용병을 고용하여 부족한 기병을 충원했다.[25] 다만 이탈리아인뿐만 아니라 스위스인, 폴란드인, 오스트리아인도 원정에 참전했다.[26] 비유하자면 이어지는 예에서 자주포포대는 한국인 부대, 전차중대는 일본인 부대에 속한다고 생각해 보자. 과연 효율만을 이유로 이들의 지휘권을 쉽게 통합할 수 있을까?[27] 출처: Ian Walker 2003년작, Iron Hulls, Iron Hearts : Mussolini's elite armoured divisions in North Africa[28] 아이러니하게도 반대편 공화진영에서 싸운 이탈리아 출신 반파시스트 제 12 국제 여단 가리발디 여단의용병들은 마드리드 공방전, 코루나 도로 회전, 아라곤 전선, 과달라하라 전투 등에서 종종 같은 이탈리아 출신 파시스트 CTV를 상대로 큰 전과를 세우며 국제여단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부대들이라 칭송 받았다.[29] 전쟁범죄도 전투에서 승리해야 저지를 수 있지 패배하면 그냥 패주다. 이디오피아 전쟁에서 게다가 국제법상 금지되어 있던 독가스를 쓰던 게 이탈리아군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전쟁범죄를 저지를 의사가 없었던 게 아니라 그럴 능력이 없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거 '선량하고 친절한 이탈리아군' 신화에 심각하게 가려져서 무시당하는 일이 너무 많은데 직접적으로 이탈리아의 영토적, 민족적 야욕이 걸려 있었던 발칸 반도전선에서는 이탈리아도 독일군 못지 않게 막장짓 많이 하고 다녔다.[30] 사실 좀 상태가 나았다는 1938년만 해도 독일군은 구 일본군과 동급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31] 독일군은 이 사람을 이탈리아군 장군 중에서는 가장 쓸만한 사람이라고 평가했고 동부전선에서의 활약을 인정해 철십자 훈장도 수여한 바 있다.[32] 지금은 러시아와 터키를 해상에서 막아내는 탱커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33] 어찌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로 전근대 시기에는 독일어권보다 남유럽 지역이 더 유대인 박해가 심했는데 근현대에 와서는 정반대가 되어버렸다.[34] 주둔지 식단이 맛이 없다면서 현지인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돈을 내고 음식을 사서 먹고 나왔다는 일화도 있다.[35] (물론 어디까지나 유머이지만) 영국군 장교가 이탈리아군에게 포로로 잡힌 이후 상당히 거창한 식사를 받자 처형을 앞둔 최후의 만찬이라며 낙담하는데, 다음 날 이탈리아군 장교가 "어제는 행정 착오로 귀관에게 일반 병사 식단을 제공했다. 앞으로는 장교 계급에 어울리는 식단을 제공하도록 약속하겠다."라며 사과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지경. [36] 호주나 미국에서는 포로수용소 밖 농장에 가서 일도 해주고 그랬는데(전쟁포로는 국제법 상 전쟁과 관련없는 직종에 종사해야 한다.), 복귀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아 탈출했나 싶었는데 뒤늦게 헐레벌떡 뛰어 와서는 문열어 달라고 아우성을 친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즉, 탈출할 생각 같은 건 없었고 그냥 지각(..)[37] 그래서 일본군은 포로로 잡히면 툭하면 자살하려 들고, 독일군은 포로로 잡히면 툭하면 도망치려 하고, 이탈리아군은 포로로 잡히면 툭하면 작업에 열중 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38] 살로 공화국 치하에서 학살당한 유대인은 8천명으로 추정된다. 애초에 살로 공화국은 제대로된 군대조차 없어서 게릴라 소탕도 하기 힘들지경이라 수십만명을 학살할 수준이 못되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는 이탈리아 왕국에 비하면 살로 공화국이 사실상 독일의 보호국, 괴뢰국 수준인 것도 있었다.[39] 1위는 피아트.[40] 원래는 Macchi사인데 후에 여러 회사를 합병해서 현재와 같은 회사가 되었다.[41] 대한민국 해군의 76mm 함포와 광개토대왕급 구축함에 장착된 127mm 함포가 바로 해당 회사 제품.[42] 이 때문에 러시아가 반서방 제스쳐를 취하기 전 시험적으로 첸타우로 장갑차를 도입했다가 대만족한 뒤 진짜로 자국산 BTR들을 첸타우로로 대체하려고 했으나 자국 업체들의 반발이 거세 결국 부메랑 장갑차 도입으로 선회하였다. 한편 이베코 LMV의 경우 정식으로 400여대가 도입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도입된 LMV들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동원되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게 되었다.[43] 세계 최대 규모의 헌병대이다. 카라비니에리 항목 참조[44] 국방부 소속이 아닌 경제재정부 소속의 준군사조직이다. 마피아때문에 생긴 조직으로 보인다.[45] 사실 Telo mimetico가 발명된지 2년후 독일 국방군에서도 Splittertarnmuster(Buntfarbenmuster)라는 위장무늬를 만들었는데, 이것도 초기에는 zeltbahn이라고 하는 1인용 텐트에 사용되었다가 1941년에야 공수부대 군복에 사용되었다.[46] 링크가 너무 많이 들어가서 이렇게 정리한다. Esercito Italiano라고 적힌 문서가 해당 문서이며, 이탈리아군과는 아무 연관 없는 문서도 같이 섞여있으니 열람시 주의할 것[47] 최고사령부 편제[48] 제11헌병대기계화여단[49] 해당 문서 중 sommario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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