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은 대신 도은 이숭인을 넣는 경우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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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부[1]에서 태어났다.[2] 고려 공민왕 때인 1360년과 1362년 2번에 걸쳐 과거에 급제해 숙옹부의 승[3]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성균관에 소속돼 주로 유학을 연구했다. 원나라 과거 응시자 고려 대표 선발에도 수석을 차지했지만 안 갔으며, 예의산랑, 예문응교, 문하사인 등을 역임하면서 불교 국가인 고려에서 유학 운동의 선두에 섰다. 잘 나가는 권문세가 출신이었지만 권세를 부리지 않았으며, 목은 이색의 수제자로서 당시 조정에 사대부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몇 안되는 인재였다. 공민왕이 시해되고 즉위한 우왕 때 전리총랑으로서 사형사제지간들인 김구용, 정도전, 정몽주 등과 함께 북원의 사신을 쫓아내고 친명 노선을 주장하다가 관직이 삭탈된다.
그러나 곧 풀려나 성균관 사성(부총장)에 올랐고, 우사의대부로서 왕권, 지방관리 문제, 왜구 방어를 위한 인재 발탁, 무분별한 토지 하사 및 권문세족들의 토지겸병[4]에 대한 문제점 등을 지적한 상소를 올렸으며, 밀직제학으로 정몽주와 함께 공민왕실록을 편찬하는 임무를 맡는다. 동지밀직사사로 옮겼다가, 최영에게 밀려 유배간 이인임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곤장을 맞고 통주[5]로 유배됐다. 이색, 권근 등의 사면 청원으로 첨서밀직사사에 재기용됐으며, 이색, 김사안 등과 함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해 예문관 제학에 임명됐다.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폐위되자 이숭인을 비롯한 보수 사대부들은 이색, 조민수, 이인임, 근비 이씨 등과 손잡고 우왕의 어린 아들 창왕을 옹립하여 이성계의 공을 깎았다. 창왕 옹립에 성공하면서 그의 위치도 올라갔으나, 우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조준의 탄핵으로 조민수가 쫓겨난 이후 우왕이 사주한 김저와 정득후의 이성계 암살 미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이색, 변안열, 우현보 등, 이숭인과 같은 일파에 속하던 이들이 싸그리 쫓겨나 버린 것이다. 이숭인은 그들과 달리 연루되지 않아서 자리는 지켜낼 수 있었지만 사실상 이성계 일파에게 고립된 것이나 다름 없는 큰 위기에 빠진다.
일이 안 되려다 보니 이런 사건도 그 때 일어났다. 과거 공민왕 때의 개혁가 신돈이 숙청되면서, 그의 사돈이었던 왕족 영흥군 왕환이 울릉도[6]에 유배된다. 19년 유배 생활 동안 치매까지 오면서 영흥군은 인사불성이 됐는데, 어느날 행방불명됐다. 한참 후인 창왕 때 "영흥군이 표류해 일본에 있다"는 소식이 조정에 알려졌다. 부인인 신씨(辛氏)가 "전 재산을 털어 알아냈다"면서 보고한 것이다. 왕족의 일이다보니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 왕환을 귀국시켰는데, 치매에 얼굴도 많이 상한 상태였다. 영흥군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 이숭인을 비롯한 하륜, 신극공, 판개성부사 박천상 등이 "이 사람은 왕환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부인 신씨는 "내 남편이 맞다. 가족인 내가 가장 잘 알지 않겠느냐?"라고 주장했다. 공교롭게도 영흥군 왕환을 가짜라고 했던 사람들은, 모두 이성계의 반대파들이었다. 이성계의 심복인 대사헌 조준이 사헌부를 동원해 탄핵 상소를 올리자 다른 사람들은 유배형에 처해지고, 이숭인은 달아난다.
옥졸이 아들 이차약을 묶어놓고 등에 채찍질을 하는 핍박이 시작됐지만, 이성계가 사태를 무마하면서 이숭인은 처벌을 면했다. 곧 귀환한 그는 서연에서 어린 임금을 위한 강론을 맡았다. 그러나 사헌부는 굴하지 않고 계속 이숭인을 탄핵하면서 압박을 가했다. 이숭인은 스스로 사직하려 했지만 임금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탄핵 상소가 거듭되자 어린 창왕도 버티지 못했다. 이숭인은 개경에서 체포돼 고향 경산부로 유배됐고, 이색의 제자 권근이 그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무시됐다. 곧 같은 경북 산골인 우봉현으로 옮겨졌다.
참고로 탄핵 상소의 이유가 불효죄였다. 모친상 중 과거를 주관(시험감독)했다는 것과 상 중 육식을 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숙청을 위한 억지였다. 하지만 스승 이색이 3년상을 강조한 적이 있어 빌미를 제공했다고 쳐도, 어차피 정몽주도 죽는 마당에 무슨 누명으로든 죽었을 것이다.
이성계를 도모하려 옹립했던 창왕도 곧 폐위되고,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이 즉위했다. 공양왕 즉위 이후 정몽주가 고려를 지키기 위해 이성계 일파인 정도전과 조준 등을 도모하면서 잠시나마 살 길이 열리는 듯 보였으나,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숭인은 다시 죽은 거나 다름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당시 이성계의 심복이였던 정도전 등은 "이숭인은 이인임의 인척으로서 이색의 간계에 호응해 우왕 복위를 기도했다"는 죄까지 씌웠다. 또 명태조 주원장에게 "이성계가 명나라를 공격한다"는 무고를 한 윤이, 이초 등의 옥사가 일어나자 그 배후로 의심됐다. 수감 중 물난리가 일어나 다시 옮겨 이감됐지만, 어차피 사형수 신세나 다름없었다. 결국 폐서인되었다가 황거정에게 엉덩이가 아닌 등에 장 100대를 맞고 사망했다.[7] 엉덩이도 100대면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등에 치는 것은 당연히 죽이려고 치는 것이었다. 등에다 치면 장기가 압착되어 압사와 비슷하게 죽게 된다. 이는 정도전의 명령이었다.[8]
그러나 곧 풀려나 성균관 사성(부총장)에 올랐고, 우사의대부로서 왕권, 지방관리 문제, 왜구 방어를 위한 인재 발탁, 무분별한 토지 하사 및 권문세족들의 토지겸병[4]에 대한 문제점 등을 지적한 상소를 올렸으며, 밀직제학으로 정몽주와 함께 공민왕실록을 편찬하는 임무를 맡는다. 동지밀직사사로 옮겼다가, 최영에게 밀려 유배간 이인임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곤장을 맞고 통주[5]로 유배됐다. 이색, 권근 등의 사면 청원으로 첨서밀직사사에 재기용됐으며, 이색, 김사안 등과 함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해 예문관 제학에 임명됐다.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폐위되자 이숭인을 비롯한 보수 사대부들은 이색, 조민수, 이인임, 근비 이씨 등과 손잡고 우왕의 어린 아들 창왕을 옹립하여 이성계의 공을 깎았다. 창왕 옹립에 성공하면서 그의 위치도 올라갔으나, 우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조준의 탄핵으로 조민수가 쫓겨난 이후 우왕이 사주한 김저와 정득후의 이성계 암살 미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이색, 변안열, 우현보 등, 이숭인과 같은 일파에 속하던 이들이 싸그리 쫓겨나 버린 것이다. 이숭인은 그들과 달리 연루되지 않아서 자리는 지켜낼 수 있었지만 사실상 이성계 일파에게 고립된 것이나 다름 없는 큰 위기에 빠진다.
일이 안 되려다 보니 이런 사건도 그 때 일어났다. 과거 공민왕 때의 개혁가 신돈이 숙청되면서, 그의 사돈이었던 왕족 영흥군 왕환이 울릉도[6]에 유배된다. 19년 유배 생활 동안 치매까지 오면서 영흥군은 인사불성이 됐는데, 어느날 행방불명됐다. 한참 후인 창왕 때 "영흥군이 표류해 일본에 있다"는 소식이 조정에 알려졌다. 부인인 신씨(辛氏)가 "전 재산을 털어 알아냈다"면서 보고한 것이다. 왕족의 일이다보니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 왕환을 귀국시켰는데, 치매에 얼굴도 많이 상한 상태였다. 영흥군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 이숭인을 비롯한 하륜, 신극공, 판개성부사 박천상 등이 "이 사람은 왕환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부인 신씨는 "내 남편이 맞다. 가족인 내가 가장 잘 알지 않겠느냐?"라고 주장했다. 공교롭게도 영흥군 왕환을 가짜라고 했던 사람들은, 모두 이성계의 반대파들이었다. 이성계의 심복인 대사헌 조준이 사헌부를 동원해 탄핵 상소를 올리자 다른 사람들은 유배형에 처해지고, 이숭인은 달아난다.
옥졸이 아들 이차약을 묶어놓고 등에 채찍질을 하는 핍박이 시작됐지만, 이성계가 사태를 무마하면서 이숭인은 처벌을 면했다. 곧 귀환한 그는 서연에서 어린 임금을 위한 강론을 맡았다. 그러나 사헌부는 굴하지 않고 계속 이숭인을 탄핵하면서 압박을 가했다. 이숭인은 스스로 사직하려 했지만 임금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탄핵 상소가 거듭되자 어린 창왕도 버티지 못했다. 이숭인은 개경에서 체포돼 고향 경산부로 유배됐고, 이색의 제자 권근이 그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무시됐다. 곧 같은 경북 산골인 우봉현으로 옮겨졌다.
참고로 탄핵 상소의 이유가 불효죄였다. 모친상 중 과거를 주관(시험감독)했다는 것과 상 중 육식을 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숙청을 위한 억지였다. 하지만 스승 이색이 3년상을 강조한 적이 있어 빌미를 제공했다고 쳐도, 어차피 정몽주도 죽는 마당에 무슨 누명으로든 죽었을 것이다.
이성계를 도모하려 옹립했던 창왕도 곧 폐위되고,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이 즉위했다. 공양왕 즉위 이후 정몽주가 고려를 지키기 위해 이성계 일파인 정도전과 조준 등을 도모하면서 잠시나마 살 길이 열리는 듯 보였으나,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숭인은 다시 죽은 거나 다름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당시 이성계의 심복이였던 정도전 등은 "이숭인은 이인임의 인척으로서 이색의 간계에 호응해 우왕 복위를 기도했다"는 죄까지 씌웠다. 또 명태조 주원장에게 "이성계가 명나라를 공격한다"는 무고를 한 윤이, 이초 등의 옥사가 일어나자 그 배후로 의심됐다. 수감 중 물난리가 일어나 다시 옮겨 이감됐지만, 어차피 사형수 신세나 다름없었다. 결국 폐서인되었다가 황거정에게 엉덩이가 아닌 등에 장 100대를 맞고 사망했다.[7] 엉덩이도 100대면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등에 치는 것은 당연히 죽이려고 치는 것이었다. 등에다 치면 장기가 압착되어 압사와 비슷하게 죽게 된다. 이는 정도전의 명령이었다.[8]
흔히 드라마의 영향으로 정도전의 지기지우를 정몽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 정도전과 가장 가까웠던 벗은 신왕조 개창을 놓고 노선이 갈라지는 권근과 이숭인이었다. 또한 원천석, 우현보와 함께 태종 이방원의 스승(이방원이 치른 1382년(우왕 8) 진사시 지공거)으로 온건파 신흥 유신의 학맥을 이은 그의 정치에 영향을 준 인물이다.
이숭인은 문장이 목은 이색의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 심지어 이색이 "중국에서도 이만한 문장은 보기 힘들 것"이라 칭찬했다. 문장력으로 유명하다 보니 고려 말기의 외교문서, 특히 북원, 명나라 등 상국에 올리는 표문을 도맡았다. 명태조 주원장도 이숭인이 지어올린 표문의 글이 참으로 간절하다고 감탄했고 명나라의 사대부들 역시 동의한 바 있다고.
도은집이 성균관대학교에 소장돼 있고#, 한국고전번역원에 의해 현대어로 번역돼 있다.# 그가 지은 한시로 <그대가 보낸 차>, <오호도(嗚呼島)>란 것이 있다. 특히 오호도에서 한나라 고조의 창업에 반대하고 단체로 자살한 전횡(田橫)의 고사를 읊었다.
이숭인은 문장이 목은 이색의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 심지어 이색이 "중국에서도 이만한 문장은 보기 힘들 것"이라 칭찬했다. 문장력으로 유명하다 보니 고려 말기의 외교문서, 특히 북원, 명나라 등 상국에 올리는 표문을 도맡았다. 명태조 주원장도 이숭인이 지어올린 표문의 글이 참으로 간절하다고 감탄했고 명나라의 사대부들 역시 동의한 바 있다고.
도은집이 성균관대학교에 소장돼 있고#, 한국고전번역원에 의해 현대어로 번역돼 있다.# 그가 지은 한시로 <그대가 보낸 차>, <오호도(嗚呼島)>란 것이 있다. 특히 오호도에서 한나라 고조의 창업에 반대하고 단체로 자살한 전횡(田橫)의 고사를 읊었다.
그대는 보지도 못했는가(君不見)
고금에 많든 적든 경박한 아이를(古今多少輕薄兒)
아침의 동포가 저녁의 원수가 되었다네(朝爲同胞暮仇敵)
정치적으로는 이색,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의 대표적 보수 정치가로서, 이성계, 정도전과 대립했다. 이숭인은 이성계가 친명 노선을 걷고 사대부의 말을 들을 때는 같은 편이 돼 주었으나, 조준 주도로 전면적인 토지개혁을 주장하자 이색과 함께 강하게 반대하였고 정도전이 척불정책을 밀고나가자 절친한 벗이었던 그와 멀어진다. 위화도 회군 뒤 폐위된 우왕을 대신해 창왕을 옹립하면서 형장에서 쓰러졌다.
이인임의 친척이지만 분명 국정을 농단하던 이인임과는 결이 다른 선비였다. 이인임의 권세가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시절에도 당숙 옆에서 권세를 누리지 않았고, 스승 이색과 더불어 사대부로서 유학 운동 최선두에 있었다. 이인임을 비롯한 친원파들에게 반기를 들다 유배도 여러 번 갔었다. 그래서 오히려 조선 개국 뒤, 고려에 대한 충절과 유자로서의 업적을 기려 고려 삼은으로 꼽히는 둥 숭앙됐다.
고향 경상북도 성주군에 그를 기린 사당이 들어섰으며 조선 말 서원 철폐 때 없어졌다가, 1921년 후손들이 뜻을 모아 문충당과 도은재를 다시 지었다. 현재는 2018년 성주군의 주도로 청휘당이란 이름의 사당이 건립돼 관광객을 모으고 있다.
2024년 5월 10일, 문화재청은 도은선생집(전남대도서관 소장)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성주청휘당 위치 및 소개 홈페이지
경상북도 성주군에 위치한 이숭인의 사당으로, 깨끗한 모습의 전통 건물들이 관광객을 반긴다. 운영시간은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로, 매주 월요일과 명절 연휴는 쉬며 관람료는 무료다.
경상북도 성주군에 위치한 이숭인의 사당으로, 깨끗한 모습의 전통 건물들이 관광객을 반긴다. 운영시간은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로, 매주 월요일과 명절 연휴는 쉬며 관람료는 무료다.
[1] 현재 경상북도 성주군[2] 이숭인의 증조부는 이백년이었으며 이백년의 동생인 이조년은 고려의 이름난 청백리였다. 이숭인은 이조년의 손자인 이인임의 당조카였으나 이인임이 고려말 권신으로 성장하면서 이숭인과는 정적의 길을 걷게 되었다.[3] 숙옹부는 공민왕의 아내 노국대장공주의 필요 물목을 감독하고 물건을 대는 관청으로, 공민왕 때 한시적으로 설치됐다. 노국대장공주는 1365년까지 생존했기 때문에, 이숭인은 살아생전의 노국대장공주를 보았다.[4] 하나의 토지를 복수등록해 세금을 포탈하고 관련 백성들을 벗겨먹는 일[5] 평안북도 선천군[6] 당시 이름은 무릉도[7] 그러나 황거정도 나중에 가서 정도전과 남은 등이 고려의 유신들을 가혹히 탄압하였다는 것으로 인해 폐서인되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8]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23일 임신 2번째기사에 따르면 정도전과 남은 등이 몰래 황거정에게 곤장 1백 대를 맞은 사람 중 살아남은 사람이 없어야할 것이라고 명령한 내용이 나온다.[9] 동명이인 개그맨이 아니라 사극에 조역과 단역으로 자주 출연하는 배우.[10] 이 때 최대한 덜 아파라고 볼기를 치는 것도 아니고 볼기는 물론이고 등 허리 칠 수 있는 부분은 사정없이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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