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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영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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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사망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제2충혼당 1층-519실-412호 |
본관 | |
가족 | 배우자 곽춘근, 슬하 2남 2녀 |
호 | 만호(晩湖) |
종교 | 천주교 (세례명 : 안토니오) |
학력 | |
군사 경력 | |
임관 | 육군사관학교 (7기) |
복무 | 대한민국 육군[3] |
최종 계급 | |
최종 보직 | 제3야전군사령관 |
주요 보직 | |
참전 | |
의원 경력 | |
의원 선수 | 1 |
의원 대수 | |
최종 당적 | |
주요 경력 |
1926년 9월 2일 강원도 영월군에서 아버지 이성행(李星行)과 어머니 진주 강씨[5]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아들 없이 요절한 큰아버지 이시행(李旹行, 1895. 9. 19 ~ 1924. 5. 6)[6]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제천군 송학공립보통학교, 원산부 난곡고등농림학교, 육군사관학교 제7기 과정을 졸업했다.
육군 장교 임관 후에는 제6보병사단 사단장, 제5군단 군단장을 거쳐 1969년 주월한국군사령부 부사령관, 1976년 국방부 관리차관보, 1977년 중앙정보부 차장 등을 지냈으며, 1979년 2월 제3야전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해 12월 12.12 군사반란을 막으려다 실패하고, 이듬해인 1980년 1월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육군 중장[7]으로 예편당했다. 예편 후 국군보안사령부에 연행되어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등과 연락하며 병력 동원 등 조직적인 저항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수사받기도 했으며, 1982년 1월 한국마사회 회장[8]에 취임해 9년간 재임했다. 이후에는 한국마사회 고문을 역임했다.[9]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국민당 전국구 국회의원(제6번)에 당선되었으며, 통일국민당에서 안보위원장, 당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치러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주영 통일국민당 후보가 패하자 이듬해인 1993년 통일국민당을 탈당하고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다. 민주자유당 입당 시 반란군 유학성과 같은 당에 몸담게 되면서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고[10], 결국 12.12 관련 사법처리 때 증인으로 나서며 유학성을 비롯한 옛 5공 신군부(하나회) 인사들을 감옥으로 보내는데 일조한다. 하지만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불출마하였다.
2023년 3월 11일 오전 8시 45분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96세. 유해는 2023년 3월 14일 국립서울현충원 제1충혼당 1층 519실에 안장되었다.
육군 장교 임관 후에는 제6보병사단 사단장, 제5군단 군단장을 거쳐 1969년 주월한국군사령부 부사령관, 1976년 국방부 관리차관보, 1977년 중앙정보부 차장 등을 지냈으며, 1979년 2월 제3야전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해 12월 12.12 군사반란을 막으려다 실패하고, 이듬해인 1980년 1월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육군 중장[7]으로 예편당했다. 예편 후 국군보안사령부에 연행되어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등과 연락하며 병력 동원 등 조직적인 저항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수사받기도 했으며, 1982년 1월 한국마사회 회장[8]에 취임해 9년간 재임했다. 이후에는 한국마사회 고문을 역임했다.[9]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국민당 전국구 국회의원(제6번)에 당선되었으며, 통일국민당에서 안보위원장, 당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치러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주영 통일국민당 후보가 패하자 이듬해인 1993년 통일국민당을 탈당하고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다. 민주자유당 입당 시 반란군 유학성과 같은 당에 몸담게 되면서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고[10], 결국 12.12 관련 사법처리 때 증인으로 나서며 유학성을 비롯한 옛 5공 신군부(하나회) 인사들을 감옥으로 보내는데 일조한다. 하지만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불출마하였다.
2023년 3월 11일 오전 8시 45분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96세. 유해는 2023년 3월 14일 국립서울현충원 제1충혼당 1층 519실에 안장되었다.
2.1. 12.12 군사반란 진압 시도[편집]
1995년 8월, 12.12 군사반란 당시 이건영을 중심으로 한 전화통화 육성 녹음 약 1시간 15분 가량이 조선일보사에 의해 공개되었다. 이 녹음본은 당시 보안사령부에서 감청한 것인데, 비화기[11]로 통화한 내용까지도 모두 감청되었다.[12] 이 녹음본은 시간이 지난 뒤 한 기무사 직원이 녹음 내용을 듣던 중 12.12 사태 당시 이건영 3군 사령관이 신군부에 저항하여 '병력을 출동시키지 말라'고 말한 것을 듣고 감복하여 이건영 장군에게 녹음 테이프를 넘겼고, 이를 한 일간지 기자를 통해 1995년에 월간조선이 공개한 것이다.#
당시 이건영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납치 소식을 듣고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하나회의 불순한 장난(또는 움직임)"이라며 분명하게 반란으로 규정하여 어떻게든 이를 막으려 했고,[13]보안사가 그 와중에 혹시나 생길지 모를 아군간의 교전과 유혈사태, 그를 틈타 남침할 수 있는 북한군 등에 대해 대비하면서, 전방 부대의 병력 동원에 대해서는 철저한 전방 경계 태세 유지와 상명하복의 원칙[14]에 의해 움직이는 등 FM 군인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반란군을 막기 위해 자신으로써는 나름대로 성의를 다 했던 이건영에게는 이미 반란 개시 전에 보안사로부터 체포 명령이 떨어져 있었다.[15]
사실 이건영의 행동은 FM이었지만, 이때 전방 부대 병력을 이동시키지 않은 것에 대해서 융통성이 없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는 등 찬반 양론이 있다. 전방 9사단 예하 29여단 병력이 이미 전부대 일체 출동하지 말라는 자기 명령을 어기고 서울로 오는게 확인되고 있는 마당에도[16] 육본과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부탁한 사단급 충정부대 투입을 사실상 거절했기 때문. 물론 이건영 입장에서 보면 저쪽이 저런다고 이쪽까지 전방 부대를 빼는건 국가안보 해악 행위인데다[17], 가뜩이나 연락도 잘 안되던 국방부 장관이 마지막으로 지시한 내용 역시 병력 출동을 금했던 것이라 유혈 사태 등을 고려해 상관의 명령에 복종했다고 볼 수는 있으나, 그 결과가 쿠데타군의 서울 진입 허용과 군권 장악, 이후의 군부독재 연장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역사적으로 볼땐 너무 단기적인 시각으로만 접근한 거 아니냐는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반란군 서울 진입을 놔둔 결과 하루도 안지나 본인부터 반란군에게 끌려가게 된다. 그러나 이건영이 국방장관과 계엄사령관의 명령을 무시한 채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병력을 출동시켰다면 이는 하나회와 다를 게 없는 정치군인, 군벌이 되는 셈이었고 또한 제3야전군사령관이라는 수도권 전방부대 최고책임자로서 군사반란을 틈타 북한의 남침 가능성도 고려해야했다. 이렇듯 본인의 안위보다도 국가 안보를 우선시했던 것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반란군 세력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결국 모든 노력이 실패하고 반란군에 가담한 부하들의 배신 등에 의해 군복을 벗게 된 이건영은, 강제 예편 후 54일간에 걸쳐 보안사의 강압 수사를 받게 된다. 수사 중인 12월 24일 국방부에 의해 발표된 이건영의 혐의는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과 연락하면서 병력동원 등 조직적인 저항을 기도했다."는 것이었다. 허나 위의 육성녹음을 들으면 알겠지만, 아군간에 교전이 생기면 안 된다면서 반란군의 진압을 위해 병력이동을 요청하는 장태완의 의견에 반대하면서까지 병력이동을 막은 사람이 이건영이다. 한마디로 하나회가 이건영을 숙청하기 위해 없는 혐의를 만들어낸 것. 물론 하나회는 정승화, 장태완, 정병주 등에게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없는 혐의를 만들어 숙청했다.
이건영은 이 당시의 일에 대해서 스스로 완전히 정리하지 못했는지 군사정권이 종식되고 민주화가 된 이후에 다른 이들과 달리, 당시 사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평하거나 회상하는 일을 극도로 꺼려왔다. 1995년 보안사 감청 녹음 기록이 공개되었을 때도, 각 언론사의 취재와 인터뷰 요청이 빗발쳤으나 "책임자로서 12.12 군사반란을 막지 못 해 국민들에게 죄송하다."는 사과를 한 것이 전부[18]이다. 그렇다고 해서 쿠데타 단죄에 소극적으로 행동하고 침묵한 것은 아니다. 1993년 정승화 전 육참총장,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 등 장성 22명이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를 내란 혐의로 고소할 당시 고소인 중 한명으로 이름을 올린 적이 있다.
참고로 이 녹음본 중 당시 제9보병사단장 노태우의 불법 군사행동을 막기 위해 제9보병사단 참모장 구창회[19] 대령의 거짓 보고를 받는 통화 내용은 MBC 드라마 제4공화국과 제5공화국의 해당 에피소드에도 등장한다.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92 | 3,574,419 (17.37%) | 당선 (6번) | 초선[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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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연히도 그가 사망한 해에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했다. 영화는 그가 사망하고 8개월 뒤 즈음에 개봉했기에 그는 영화를 보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2] 판관공파(判官公派) 31세 건(建) 항렬. 함평이씨대동보 권13 73쪽에는 누락되어 있다.[3] 군번 11821[4] 당시에는 야전사령관이 대장 전에 달던 보직이어서 계급은 중장이었다. 오늘날로 따지면 대장 계급 정도로 보면 된다.[5] 강성호(姜聲湖)의 딸이다.[6] 자는 여구(汝久).[7] 3군사령관이 원래 대장 계급의 보직으로 이건영도 대장으로 진급 예정이었으나, 하나회에 반대하는 바람에 중장인 상태에서 쫓겨났다. 정확히 말하면 중장 보직을 보임하긴 하되 대장 진급이 확실한 대장(진)이 보임되는 자리였다.[8] 1989년 9월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1가 뚝섬(지금의 서울숲 자리)에 있던 경마장을 경기도 과천시 주암동으로 옮긴 것이 바로 이건영이 한국마사회 회장으로 있을 때 추진한 일이다.[9] 사실 신군부 측이 비하나회 장교들의 불만을 잠재울 겸 해서 진압군 측 장성들에게 공기업 회장/사장 직이나 국무위원 등을 제안했는데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사례로 장태완 수경사령관도 예편 이후 전두환 정부로부터 한국증권전산 회장직을 맡아 꽤 오랜시간 재임했었고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은 반란 이후 오히려 대장으로 진급하여 2군사령관, 합참의장으로 영전했다. 다만 비교적 명예직에 가까웠던 저 둘과 다르게 마사회장 자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각종 이권사업 등에 개입하기 쉽고 업계에서의 영향력도 결코 적지 않은 자리라서 은퇴한 정치인, 장성들이 탐내는 자리이기도 하다.[10] 당시 민자당은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면서 민주계가 군부계를 몰아내는 중이었다. 유학성 역시 공직자 재산 공개 제도가 시행되자 받아쳐먹은게 많은지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11] 말 그대로 비밀스러운 내용을 통화하고자 할 때 쓰는 장치이다.[12] 사실 이 비화기라는게 일종의 폐쇄회로이므로 조선인민군은 들을 수 없지만 아군이라면 선 하나만 따면 들을 수 있는 식이다. 이건영도 이를 몰랐을 리 없으나 휴대폰도 없던 시절 북괴의 위협 가능성을 의식한 상태에서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13] 처음 윤성민 참모차장으로부터 보안사의 총장 체포소식을 들었을 때도 상황을 좀 더 알아보려는 윤성민과 달리 이건영은 "아무리 그래도 장관님 허가도 안 받고 어떻게..."라고 말한다. 신군부 지지세력이 말하는 논거 중 하나가 "보안사의 정승화 체포는 10.26 사건 수사를 위한 것이며 합법이다"라는 건데, 당시 이건영부터 장관 지시 없는 총장 체포는 불법이라 인식하고 있었던 것. [14] 이건영은 계엄사령관이자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가 유고인 상황에서 노재현 국방부장관의 명령 없이는 병력 이동을 일체 할 수 없다고 했고(다만 국방장관도 유고시 국방차관이 대신할 순 있다), 실제로 당시 노재현과 합참의장 및 참모차장도 이건영에게 그렇게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반란 발생 후 노재현은 도망갔다가 국방부로 복귀 후 신군부에 회유당하면서 이건영의 생각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여담으로 녹음본 마지막 부분에 이건영은 노재현과 김용휴 국방부차관의 호출로 국방부로 가게 되는데, 이는 보안사에서 이건영을 체포하기 위해 노재현을 이용한 것이다. 이미 이건영 본인도 자기가 거기 가면 안전할 수 있을까라고 자신의 미래를 짐작하지만 상관의 달램과 명령이니 울며겨자먹기로 가게 되고, 얼마 안가 3군사령관직에서 쫓겨난다.[15] 그나마 하나회 소속임에도 직속상관을 체포하는 것을 꺼린 조명기 대령과 하나회는 아니지만 명령받은 김부연 대령이 보안사의 요구대로 행하지 않으면서 정병주 특전사령관 같은 비극은 면할 수 있었다. 만약 이들도 쿠데타에 가담했다면 김오랑이나 정선엽 같은 희생자가 나왔을 수도 있다.[16] 하나회 구창회가 출동 부대 없다는 거짓 보고를 했지만, 육성녹음을 보면 이미 이건영은 어느정도 눈치채고 있는 상태였다. 심지어 보안사의 본인 체포 명령도 어느 순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7] 최악의 경우 하나회가 북한군과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면, 전방 부대의 병력을 빼 올 경우 그야말로 북한군에게 알아서 길을 터 주는 것이 될 수도 있다.[18] 이것도 KBS가 제주도에서 휴가중이던 이건영을 찾아가 갑자기 인터뷰를 요청해서 이뤄진 것이지 정식 인터뷰 요청은 모두 거절하고 짧은 서면 입장만 냈다. #[19] 구창회는 육사 18기로 하나회 멤버이다. 12.12 군사반란 당시 9사단 30연대장으로부터 삼송리까지 병력을 이동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보고를 받은 이건영이 확인차 구창회에게 연락하자, 구창회는 연대 출동 지시는 없다며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상관에게 거짓 보고를 했다. 참고로 이때 30연대의 이동을 지시한 것은 사단장 노태우였다.[20] 이후 구창회는 노태우 정권에서 자신이 속인 이건영의 마지막 보직인 3군 사령관(대장)까지 지냈다가, 문민정부의 하나회 숙청으로 군복을 벗었다.[20] 제5공화국 에서 장태완이 이건영에게 병력 지원요청을 하며 이렇게 말한다. "형님. 저놈들이 1공수를 이동하는 중입니다..! 노태우가 있는 9사단도 안심할 수 없어요..! 도대체 수기사랑 26사단 출동은 왜 대기하십니까?" 라고 독촉을 하자 이건영은 "야..! 장관 명령 없이는 부대 출동을 못하는 거 잘 알잖아..!" 라고 답하는 장면이 나온다.[21] 93.2.20: 통일국민당 탈당, 93.6.24: 민주자유당 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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