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魏[1] | ||
존속기간 | 기원전 403년~기원전 225년 | |
별칭 | 양(梁)[2] | |
위치 | ||
국가원수 | ||
주요 군주 | ||
주요 실권자 | ||
전서 (대전체) | ||
종족 | 화하족 | |
통화 | 포폐 | |
성립 이전 | 진(晉)나라, 필나라 | |
멸망 이후 | ||
현재 국가 |
고대 춘추시대 필나라의 후신으로 본래 북방의 강국인 진(晉)나라의 일부였지만 진문공때 공신인 위주[6]의 후손인 위씨(魏氏)가 조씨(趙氏), 한씨(韓氏) 등과 함께 동주 왕실로부터 제후로 공인받으면서 진(晉)나라의 영토를 분할해 세운 나라로 전국칠웅의 하나이다. 전국시대 초기 주요 강대국들 중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였고, 이를 바탕으로 자하, 오기, 서문표 등의 유능한 인재들을 적극 기용하여 하서 지방을 빼앗고, 중산국(中山國)을 멸망시켜 영토를 확장하는 등 국력이 가장 강성했다. 군사적으로도 오기가 훈련시킨 정예 중장보병 무졸(武卒)이 유명했다.[7]
전성기에는 음진 전투에서 50,000명의 무졸로 500,000명에 달하는 진(秦)나라의 대군을 격파하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오기가 위나라를 떠나 초나라로 가고 나서부터는 상앙의 변법을 시행한 진나라에게 우위를 상실하는 면을 보이면서 야금야금 하서 전역의 땅을 갉아먹히던 위나라는 결국 서쪽에 치우쳤던 수도인 안읍을 동쪽의 대량으로 천도하기에 이르렀다. 하서 땅에서 황하를 건너면 바로 안읍이 위치해 방어에 불리했기 때문이다. 황하의 평야지대에 나라가 위치하여 인구가 많고 부국강병의 제반 조건들이 마련되었지만, 또한 평야지대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가 많았고, 따라서 외침에 불리했다. 게다가 국력이 왕성할 때 점령했던 중산국은 애초에 위나라가 직접 통치하기에도 애매한 땅이었던 것이 위치상으로 조나라와 연나라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었던 땅이었다. 월경지로 남았을 땅을 무리해서 점령했다가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날려먹은 셈이었다.
제1대 국군인 위문후 위사 이후 패권이 그나마 유지되던 제2대 국군 위무후 위격의 시대에도 본격적으로 발호하기 시작한 진나라의 기세를 제어하지도 못했거니와 위무후 사후에 일어난 군위쟁탈전으로 주위 강국들에게 허점만 보인 꼴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3대 국군이자 초대 왕이었던 위혜왕(양혜왕) 위앵의 치세때 벌어진 잇따른 패전으로 하서 지역 등 방위에 필요한 지역들을 상실했는데, 특히 기원전 341년에 일어난 마릉 전투[8]에서 결정타를 얻어맞아 완전히 몰락했으며, 반대로 상앙의 변법에 힘입은 진나라는 하서뿐만 아니라 옛 수도인 안읍을 포함한 위나라의 서쪽 영토를 완전히 정복했다.[9][10]
문후 시절 그렇게 공을 들이던 인재 기용에서도 실책이 잇달았는데 진, 제, 연의 주변국에서 재상 혹은 대장으로 중용되어 부국강병의 주역이 되었던 상앙, 손빈, 범수, 악의 등은 본래 위나라에 몸을 담았음에도 끝내 쓰이지 못했던 바 있었다.[11] 기원전 3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수십만 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국력을 보유했으나 진나라에게 족족 패배하면서 위나라는 농업에 종사하며 군역을 질 장정과 물자를 막대하게 상실해 국력이 쇠퇴했다. 최후기에는 위나라 최후의 불꽃 공자 신릉군 위무기가 명성을 기반으로, 진나라를 상대로 한 합종 연합군을 결성하고, 두 번의 전역에서 모두 격파했지만, 안희왕(제4대)의 견제와 진나라가 뇌물을 이용한 여론조작에 중용되지 못한다. 곧 분통과 울분에 과음이 잦아 알코올 중독으로 신릉군은 사망했다. 이후에도 위나라는 진나라 다음가는 인구와 옥토를 가진 것에 변함없지만, 막대한 양의 로비를 활용한 진나라의 친진파 양성과 암울한 정세 탓에 위나라 내부 엘리트 층이 가망을 잃고 진나라로 이반해 자리를 구하거나 적극적인 항전의지를 잃는다. 국가를 지탱할 유능한 엘리트 층의 부재와 이반 현상은 전국 말기의 진나라를 제외한 6국 모두 겪은 현상이기도 하다. 나서서 위기를 막을 인재가 나타나지 않고 신릉군 사후 하동 지역의 국토가 잠식당하며 마침내 기원전 225년에 진나라의 명장 왕분에게 수도 대량이 수공으로 함락당하고, 저항의 본보기를 시황제가 명령해 도시가 파괴되어 멸망한다.
진말 초한쟁패기 진승·오광의 난 때 재건되었으나,~ 진승의 난을 토벌한 진나라의 마지막 명장 장한의 공격으로 다시 멸망했다. 그리고 위표가 재차 위나라를 재건해 항우에게 복속하여 제후국이 되었다가 안읍 전투에서 한나라의 명장인 한신에게 패배하고 위표가 살해되면서 완전히 멸망했다.
전성기에는 음진 전투에서 50,000명의 무졸로 500,000명에 달하는 진(秦)나라의 대군을 격파하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오기가 위나라를 떠나 초나라로 가고 나서부터는 상앙의 변법을 시행한 진나라에게 우위를 상실하는 면을 보이면서 야금야금 하서 전역의 땅을 갉아먹히던 위나라는 결국 서쪽에 치우쳤던 수도인 안읍을 동쪽의 대량으로 천도하기에 이르렀다. 하서 땅에서 황하를 건너면 바로 안읍이 위치해 방어에 불리했기 때문이다. 황하의 평야지대에 나라가 위치하여 인구가 많고 부국강병의 제반 조건들이 마련되었지만, 또한 평야지대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가 많았고, 따라서 외침에 불리했다. 게다가 국력이 왕성할 때 점령했던 중산국은 애초에 위나라가 직접 통치하기에도 애매한 땅이었던 것이 위치상으로 조나라와 연나라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었던 땅이었다. 월경지로 남았을 땅을 무리해서 점령했다가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날려먹은 셈이었다.
제1대 국군인 위문후 위사 이후 패권이 그나마 유지되던 제2대 국군 위무후 위격의 시대에도 본격적으로 발호하기 시작한 진나라의 기세를 제어하지도 못했거니와 위무후 사후에 일어난 군위쟁탈전으로 주위 강국들에게 허점만 보인 꼴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3대 국군이자 초대 왕이었던 위혜왕(양혜왕) 위앵의 치세때 벌어진 잇따른 패전으로 하서 지역 등 방위에 필요한 지역들을 상실했는데, 특히 기원전 341년에 일어난 마릉 전투[8]에서 결정타를 얻어맞아 완전히 몰락했으며, 반대로 상앙의 변법에 힘입은 진나라는 하서뿐만 아니라 옛 수도인 안읍을 포함한 위나라의 서쪽 영토를 완전히 정복했다.[9][10]
문후 시절 그렇게 공을 들이던 인재 기용에서도 실책이 잇달았는데 진, 제, 연의 주변국에서 재상 혹은 대장으로 중용되어 부국강병의 주역이 되었던 상앙, 손빈, 범수, 악의 등은 본래 위나라에 몸을 담았음에도 끝내 쓰이지 못했던 바 있었다.[11] 기원전 3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수십만 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국력을 보유했으나 진나라에게 족족 패배하면서 위나라는 농업에 종사하며 군역을 질 장정과 물자를 막대하게 상실해 국력이 쇠퇴했다. 최후기에는 위나라 최후의 불꽃 공자 신릉군 위무기가 명성을 기반으로, 진나라를 상대로 한 합종 연합군을 결성하고, 두 번의 전역에서 모두 격파했지만, 안희왕(제4대)의 견제와 진나라가 뇌물을 이용한 여론조작에 중용되지 못한다. 곧 분통과 울분에 과음이 잦아 알코올 중독으로 신릉군은 사망했다. 이후에도 위나라는 진나라 다음가는 인구와 옥토를 가진 것에 변함없지만, 막대한 양의 로비를 활용한 진나라의 친진파 양성과 암울한 정세 탓에 위나라 내부 엘리트 층이 가망을 잃고 진나라로 이반해 자리를 구하거나 적극적인 항전의지를 잃는다. 국가를 지탱할 유능한 엘리트 층의 부재와 이반 현상은 전국 말기의 진나라를 제외한 6국 모두 겪은 현상이기도 하다. 나서서 위기를 막을 인재가 나타나지 않고 신릉군 사후 하동 지역의 국토가 잠식당하며 마침내 기원전 225년에 진나라의 명장 왕분에게 수도 대량이 수공으로 함락당하고, 저항의 본보기를 시황제가 명령해 도시가 파괴되어 멸망한다.
진말 초한쟁패기 진승·오광의 난 때 재건되었으나,~ 진승의 난을 토벌한 진나라의 마지막 명장 장한의 공격으로 다시 멸망했다. 그리고 위표가 재차 위나라를 재건해 항우에게 복속하여 제후국이 되었다가 안읍 전투에서 한나라의 명장인 한신에게 패배하고 위표가 살해되면서 완전히 멸망했다.
|
대수 | 시호 | 이름 | 재위 기간 | 비고 |
1 | 사(斯) | 기원전 445년[14] ~ 기원전 396년 | ||
2 | 격(擊) | 기원전 396년 ~ 기원전 370년 | 문후의 아들 | |
3 | 앵(罃) | 기원전 369년 ~ 기원전 319년 | 무후의 아들 양혜왕으로 유명. 기원전 361년에 안읍에서 대량으로 천도 기원전 344년 칭왕. | |
4 | 사(嗣) | 기원전 319년 ~ 기원전 296년 | 혜왕의 아들 | |
5 | 속(遬) | 기원전 296년 ~ 기원전 277년 | 양왕의 아들 | |
6 | 어(圉) | 기원전 277년 ~ 기원전 243년 | 소왕의 아들 전국 4군자 중 한 명인 신릉군 위무기의 이복형 | |
7 | 증(增) | 기원전 243년 ~ 기원전 228년 | 안희왕의 아들 | |
8 | - | 기원전 228년 ~ 기원전 225년 |
[1]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음은 /*N-qʰuj-s/. 현대 발음은 Wèi.[2] 대량 천도 이후[3] 춘추전국시대에는 성과 씨를 구별했는데 위나라 희성은 위씨(魏氏)였다.[4] 기원전 344년부터.[5] 단, 춘추전국시대 사람들은 세속적인 편이었다.[6] 위주의 할아버지인 필만은 원래 희성이었다. 그는 서주 문왕 희창의 15남인 희고가 봉해진 곳으로 서융에게 멸망한 필(畢)나라의 후손이었다. 위(魏)나라를 진나라가 멸망시키고, 필만에게 봉토로 하사해 씨를 위씨로 고쳤다.[7] 《사기》에서 무졸은 진나라의 예사(銳士)에 버금가며, 제나라 및 조나라보다 우위라고 했다. 현대적인 기준으로 봐도 상당히 합리적으로 양성한 정예병이었는데, 군장 구보, 강궁 날리기, 돌 나르기 등은 현재에도 사낭 나르기 등 정예 병력 훈련에 사용되는 커리큘럼과 유사한 점이 있다. 게다가 이들은 땅과 집에다가 퇴직 연금을 받고, 심지어 면세 혜택까지 받아서 노예는 평민이 되고, 평민은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할 정도였다. 때문에 오죽했으면 이렇게 지불되는 연금이 기둥 뿌리를 흔들 정도라는 말까지 나왔다.[8] 같은 스승밑에서 수학했지만 운명이 극적으로 갈린 손빈과 방연의 일화로 유명하다.[9] 대량 천도 이후 50여 년 동안 밀당도 하고는 했지만, 완전히 진나라의 지배하에 떨어진 건 기원전 293년 위•한연합군 240,000명을 백기가 날려버린 이궐 전역 이후였다.[10] 그리고 그 서위 땅에 진나라가 설치한 것이 바로 난공불락의 전설을 써내려간 함곡관인데, 이후 진나라를 견제하려던 중원 제국의 합종군은 함곡관 앞에서 번번히 가로막히게 된다.[11] 특히 진나라로 간 상앙과 범수는 각각 하서 지구 공략과 원교근공 정책을 통해 직접적으로 위나라의 몰락에 기여했다.[12] 도자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13] 손자라는 설도 있다.[14] 제후 자칭은 기원전 424년부터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