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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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국 于山國 | Usanguk | ||
? ~ 서기 1022년 | ||
별칭 | ||
위치 | ||
정치 체제 | ||
국가 원수 | ||
수도 | ||
종족 | ||
종교 | ||
주요 군주 | ||
주요 사건 | ||
멸망 이후 | ||
현재 국가 |
울릉도의 역사와 우산국의 역사를 따로 나눠 분류했으니 각각 문서를 참고.
건국 시기는 알 수 없으며, 우산국을 구성했던 주민들은 우산국에 정착해있던 우산 토착민과 동예 또는 옥저에서 건너온 예맥계 유민이나 삼한계 유민들로 추정된다. 빙하기때 바다가 얼어서 한중일이 연결되었기에 이때 유입된 걸로 보인다. 일본삼대실록 기록에 의하면 일본인들과는 간단한 한자 필담을 제외하면 말과 글이 통하지 않았다. 탐라국이 가까운 백제에게 복속됐던 것처럼 우산국 또한 512년 6월 하슬라주 군주 이사부의 개척으로 가까운 신라에 복속되었다. 그 후에도 신라와 고려에 종속된 속국으로서 육지에 토산물을 바치고 불교 도입이나 무덤양식 등 육지의 영향을 받으면서 느슨한 자치를 유지하였다.[11] 그리고 신라에서 금관을 하사하였고, 그 파편이 나와, 우산국박물관에서 이를 복원/재현하여 만들어 전시했다.
그러다 1018년 여진족 해적들의 약탈로 궤멸적인 타격을 받은 후에 1022년 남아있던 주민들 대다수가 고려로 귀부하며 완전히 멸망한다. 다만, 이후로도 고려로의 귀부를 거부한 일부 우산국 주민이나 섬에 정착한 여진족 해적, 고려 본토에서 도망쳐온 사람들이 소수나마 섞여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나 이전처럼 국가로 볼 정도는 아니었다.[12] 그런데 그마저도 조선 초 공도 정책으로 인해 모두 쇄환되어, 사실상 무인도인 상태로 있다가 20세기 초 대한제국이 울도군을 설치함과 동시에 주민을 재식민하였다. 만약 이런 사건들이 없이 울릉도에 우산인들의 후손들이 대대로 지금까지 살았다면 제주어/제주 방언처럼 한반도 본토 방언과 의사 소통이 거의 어려운 독자적인 언어/방언이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13]
조선 시대 때 공도 정책을 펼친 이유는 울릉도에 관리를 보내 관리하는 것보다는 그냥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섬을 비우는게 낫다고 판단하였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거주민을 없앤 것 뿐이지 섬에 대한 관리를 완전히 손 뗀 것은 아니고, 숨어들어간 백성이 없는지 확인하거나[14] 왜구들을 토벌하기 위해 몇년 마다 섬의 상태를 확인할 관리를 파견하였다고 한다. 점차 느슨해져 중종이후로는 파견 기록이 없으며, 때문에 한동안 거주하는 백성들이 늘어났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무인도로 배타고 가서 자연인 생활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그러다 안용복과 일본의 외교적 충돌로 인해 장한상이 울릉도에 파견되고, 이후 다시 정기적 사찰을 하다 고종 때 개척정책이 실시된다.
그래서 그런지 한반도 남부에 영향력을 어느정도 준 가야나 삼한들의 속국으로 살아남아 인지도가 있는 탐라국에 비해 인지도는 물론 기록 조차 거의 없다시피한 실정이다. 그나마 언급되는 기록은 신라 지증왕 대 펼쳐진 이사부의 공격과 여진족 해적들의 침탈로 인해 멸망한 후 우산국의 유민들이 고려에 귀화한 것뿐이며, 그 외에 약간의 고고학적 단서만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조선 시대 때 공도 정책을 펼친 이유는 울릉도에 관리를 보내 관리하는 것보다는 그냥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섬을 비우는게 낫다고 판단하였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거주민을 없앤 것 뿐이지 섬에 대한 관리를 완전히 손 뗀 것은 아니고, 숨어들어간 백성이 없는지 확인하거나[14] 왜구들을 토벌하기 위해 몇년 마다 섬의 상태를 확인할 관리를 파견하였다고 한다. 점차 느슨해져 중종이후로는 파견 기록이 없으며, 때문에 한동안 거주하는 백성들이 늘어났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무인도로 배타고 가서 자연인 생활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그러다 안용복과 일본의 외교적 충돌로 인해 장한상이 울릉도에 파견되고, 이후 다시 정기적 사찰을 하다 고종 때 개척정책이 실시된다.
그래서 그런지 한반도 남부에 영향력을 어느정도 준 가야나 삼한들의 속국으로 살아남아 인지도가 있는 탐라국에 비해 인지도는 물론 기록 조차 거의 없다시피한 실정이다. 그나마 언급되는 기록은 신라 지증왕 대 펼쳐진 이사부의 공격과 여진족 해적들의 침탈로 인해 멸망한 후 우산국의 유민들이 고려에 귀화한 것뿐이며, 그 외에 약간의 고고학적 단서만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그 밖에 조선 명종대 편찬된 야사집인 '삼한습유기'에는 현씨(玄氏)와 우씨(于氏)가 고구려로 망명했던 우산국의 왕자 하발(賀拔)의 후손이라 전하고 있다. 태원 선우씨의 족보에 의하면 기자의 맏아들인 2대 장혜왕 송(松)은 즉위하면서 동생인 중(仲)을 우산국에 봉하였는데, 이에 기자가 식읍을 하사받았던 땅인 태원(太原)을 본관으로, 조선의 선(鮮) 자와 우산국의 우(于) 자를 따서 선우씨(鮮于氏)를 성씨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의 '춘추대사표열국작성급존멸표선이(春秋大事表列國爵姓及存滅表譔異)'에 따르면 기자의 둘째 아들은 우산국이 아닌 그냥 우[15]에 봉해졌으며 여기서 자손들이 조선의 선(鮮)과 봉지 우(于)를 따서 선우(鮮于)씨라 했다고 되어 있다.
일단 선우씨 족보나 몇몇 중국 기록에 그렇게 적혀있을진 몰라도 현재 한국 학계에선 기자조선의 존재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고, 족보 자체의 신뢰성 역시 숭조사업으로 인한 왜곡으로 인해 매우 낮아 사실상 사료적 가치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일단 선우씨 족보나 몇몇 중국 기록에 그렇게 적혀있을진 몰라도 현재 한국 학계에선 기자조선의 존재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고, 족보 자체의 신뢰성 역시 숭조사업으로 인한 왜곡으로 인해 매우 낮아 사실상 사료적 가치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섬나라라는 동일한 특성을 가진 탐라국과 비교해봐도 남아있는 기록이 거의 없다. 탐라국은 일본 음악에 영향을 주는 등 주변국과의 문화적 교류나 풍습이 기록과 흔적으로 남아있지만 이에 비하면 우산국은 역사적 자료가 없다시피 하다. 우산국의 왕은 설화로 전해지는 우해왕(于海王) 하나 정도 밖에 없지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사서에 기록되어 남아있는 인물은 아니고 지역 설화로 구전되어 오던 인물이기 때문에 실존한 왕이라 말하기도 곤란하다.[16] 그 때문인지 투구바위 같은 자연물에서 문헌사료까지 우해왕 관련 사료가 많다.[17] 일단 설화 내용상으로는 우해왕 시대에 우산국이 신라의 공격에 의해 망하고 말았다고 하므로, 이사부가 나무 사자를 이용한 위협으로 우산국을 정복한 당시에 울릉도를 다스리던 임금으로 비정되는 듯 하다.
[1] 죽도, 독도 등.[2] 기원전 2세기(추정) ~ 512년[3] 512년 ~ 1022년[4] 현포리 일대에 고분군이 밀집되어 있어 수도로 추정된다.[5]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13년조 "伊湌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謂, '于山人愚悍, 難以威來, 可以計服.'" 예맥, 삼한 계통으로 추정. 일본 측 기록인 일본삼대실록에 의하면 일본인과 말도 글도 통하지 않았고, 다른 지방에 표류한 신라인과 같이 귀국시킨만큼 일본어족보다는 한국어족 계통 주민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6] 울릉도 설화에만 등장하고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등의 역사서나 금석문에서는 일체의 언급이 없어서 가공인물일 가능성이 높다.[7] 지증왕 13년[8]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지증 마립간 13년조. 《삼국사기》 권44, 열전(列傳)4, 이사부전(異斯夫傳).[9] 고려사 권1, 세가(世家)1, 930년 8월 15일(음) 병오(丙午) "丙午 芋陵島遣白吉·土豆, 貢方物, 拜白吉爲正位, 土豆爲正朝."[10] 당시 신라 동쪽 해상에 국가가 존재할 법한 섬은 울릉도(+독도 등 부속도서) 뿐이었으므로 세라국은 보편적으로 우산국과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세라'의 어원이 무엇인지는 정설이 없다. 이재석 교수는 세라가 강릉시의 옛 이름인 하슬라, 하서량과 음이 유사하기 때문에 이것과 연관이 있는 이름일 것이라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11] "우릉도에서 백길(白吉)과 토두(土豆)를 보내 토산물을 바치자, 백길을 정위(正位)로, 토두를 정조(正朝)로 임명하였다." 『고려사, 태조 13년 8월 15일 기사』[12] "11월 병자 우릉성주(羽陵城主)가 아들 부어잉다랑(夫於仍多郞)을 보내서 토산물을 바쳤다."『고려사, 덕종 원년 11월 기사』[13] 현대의 울릉 방언은 입주자 대부분이 경상북도와 강원도 출신들이었기에 경북 방언권에 속한다.[14] 군인들이 없기에 매우 위험하다.[15] 于·핑산으로 추정[16] 게다가 역사적 사실과 설화에 나오는 용어들을 교차 검증까지 해보면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설화로 추정된다.[17] 더 자세한 내용은 링크를 참조할 것.[18] 2고분에서 남북국시대의 87기의 문화재가 발굴 되었다. 주 출토품은 토기이며, 그 외에 유리 목걸이, 금동 제품, 철기 제품 등이 있다.[19] 정사가 아닌 우산국을 배경으로한 창작 소설이다.[20] 삼국지 위서 동이전 옥저조[21]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 마립간 13년(서기 512) 여름 6월[22] 삼국유사 지철로 마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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