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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강 전당 사람으로 1420년에 진사가 되었고 강서 순무로 부임하기도 했으며, 성미가 강직해 왕진의 미움을 사서 감옥에 갇힌 적도 있지만 관리들의 탄원으로 풀려났다. 1446년에 병부시랑이 되었으며, 1449년에 오이라트의 추장 에센 타이시가 변경을 침입하자 정통제가 왕진의 권고로 인해 싸우러 나갔다가 정통제가 사로잡히는 토목의 변이 일어난다.
집단 패닉에 빠져 최소 황하, 최대 장강 도하를 결행할 것을 재촉하는 북경의 뭇 대신들을 상대로 당시 병부시랑[1]이었던 우겸은,
집단 패닉에 빠져 최소 황하, 최대 장강 도하를 결행할 것을 재촉하는 북경의 뭇 대신들을 상대로 당시 병부시랑[1]이었던 우겸은,
"수도는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을 버리고 어찌 살길 바라는가? 북송이 어찌 망했는지 잊었는가?"
라 일갈하여 여론을 잠재웠다. 그리고 포로가 된 황제를 태황제로 올리고 황제의 동생 주기옥을 새로이 천자로 등극시키는, 후일 대역(大逆)의 죄를 뒤집어 쓸 수도 있는 일련의 수습 과정을 추진한 뒤 방어군을 지휘, 북경성 주변의 성읍들과 연계하여 강력한 방어진을 구축한 뒤 군령을 내렸다.
"북경성 문을 걸어 잠가 퇴로를 차단하라. 선봉이 물러서면 후위가 선봉을 참할 것이고, 사졸이 장군의 명을 듣지 않고 퇴각하면 그 역시 참할 것이며, 장수가 사졸을 돌보지 않고 도망하는 것 또한 참할 것이다."
그리고 몸소 성밖에 나가 야전군을 지휘하여, 토목보에서 승리를 거둔 뒤 파죽지세로 명나라를 들이치려 했던 에센의 오이라트군의 진격을 일차적으로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점차적으로 전황이 교착되던 와중에 명군측에 남쪽에서 징발된 근왕병과 물자들이 속속히 공급되기 시작했고, 결국 에센은 정통제를 지렛대 삼아 협상을 시도하나 명 측에서 '그분은 이미 태상황이 되셨고 우리는 새로이 천자를 세웠다' 라며 무시해버리는 상황까지 이른다. 격노한 에센은 북경으로 진공했으나 이미 명군은 22만의 대군과 막강한 화력으로 철옹성을 구축해 놓은 상황이었고, 에센의 오이라트군 역시 토목보에서 명군에게 빼앗거나 명군이 버려놓고 간 화기들을 획득하여 상당량의 화기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그 사용법을 몰랐던 건지 아니면 쓸 줄은 알았어도 화약이 없었던 건지는 모르지만 전투 내내 발포가 불가능했다.
결국 창의문과 덕승문 일대의 공성전에서 명군 측의 불쇼에 처절히 농락당한 끝에 에센은 동생까지 잃고 카라코룸을 향해 퇴각하게 된다. 오이라트 입장에선 데리고 있어봐야 쌀 도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버린 정통제는 이후 무사하게 송환되어 태상황이 된다.
경태제는 정통제를 태상황으로 하고 남궁에 안치했다. 이후 복건, 절강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우겸이 모두 진압한다.
허나 1457년에 석형, 조길상, 서유정 등이 탈문의 변을 일으켜 정통제를 복위시켰는데, 사실상 이것으로 우겸의 비참한 최후는 결정되었다. 아무래도 뒤가 구렸던 쿠데타 세력은 희생양으로 우겸과 대학사(황제의 고문) 왕문을 내세우는데, 사실 우겸은 성품이 강직하고 고지식하여 아무리 공을 많이 세운 사람이라 할 지라도 법을 어기면 죄를 주는 인물이었고, 그때문에 당시 관료 사회에 정적이 많았으며 이로 인해 쿠데타의 핵심 인물인 석형과 서유정 역시 우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결국 우겸은 외번을 끌어들여 모반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가 처형되었다.
복위된 영종 천순제는 우겸을 죽이는데 망설였지만 석형과 서유정은 "우겸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저지른 일에 대한 명분이 없어집니다." 라며 죽일 것을 강력히 요구했고, 특히 서유정은 아예 이런 말까지 했다.
雖無顯迹,意有之。
비록 명백한 증거는 없지만, 그런 뜻은 있었다.
참으로 진회의 막수유(莫須有)에 비견될 만한 망언. 이 때문에 결국 우겸은 사형에 처해진다. 우겸과 함께 갇힌 왕문은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했지만 우겸은 씁쓸히 웃으며
"이건 억울하고 아니고의 문제도 아니고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닐세..."
라며 담담하게 최후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우겸이 죽는 날 하늘도 슬퍼했는지 대낮에도 안개가 자욱해 암흑 천지였다고 하며 그의 재산은 몰수되었지만 값나가는 물건이 하나도 없었고 있는 것이라고는 책 뿐이요, 곳간에도 경태제가 하사한 예복과 검 밖에 없다고 했을 정도로 가난했다. 그래서 천순제도 우겸을 처형한 것을 후회했다고 하며, 이후 성화제가 즉위한 뒤 복권되었다. 홍치제 때 숙민(肅愍)이란 시호를 받았고, 만력제 때 충숙(忠肅)으로 바뀌었다.[2]
그러나 우겸의 외아들 우면은 딸만 6명 있고 그들도 우겸이 파멸한 후 한미한 집안 사람들과 혼인하여 후세에 기록이 없어 대가 끊겼으며, 일족에서 양자를 들여 제사를 잇게 했으나 이후 그의 집안에서 뛰어난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정통의 변 때 최악의 상황에서 우겸이 경태제를 친정을 하게 해 오이라트에게 강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우겸의 대업적이자 현명한 일이었다. 만약 황제와 중앙군이 함락된 상태에서 황하 이남이나 남경으로 수도를 옮겼다면 오이라트 군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은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오이라트는 대대적인 침공을 하여 몽골 제국 - 원나라 때처럼 다시 한번 중원을 공략하였을 것이고, 만주족의 청나라보다 200년 앞서 오이라트의 북경 함락이 일어나 위진남북조 이래 제 3의 북방 민족의 중원 정복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거기다가 오이라트도 몽골계니 몽골 제국에 이어 2번째로 몽골계의 화북정복이 된다. 물론 멀리 보면 청나라도 몽골계와 연이 없는건 아니었지만...[3]
그렇지만 우겸의 사형 건은 천순제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 보라. 전란이 끝난 후, 전시에 큰 공을 세운 공신은 반란을 일으킬 용의자 0순위이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 괜히 생겨난 말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그렇지 않아도 쿠데타로 즉위한 천순제에게 우겸은 참으로 부담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우겸은 경태제를 옹립시킨 1등 공신이다. 다른 걸 떠나서 자기를 공기로 만든 존재를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겸은 황위나 권력에 야심이 없었고, 북경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보여준 그의 능력을 감안하여, 대국적 견지에서 용서했다면, 이후 정통제에게 충성을 다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에서 대뻘짓이었다는 견해가 다수다. 실제로 천순제도 우겸을 사형시키고 가산을 몰수하는 과정에서, 우겸이 청렴결백한 신료였다는 것을 알고 크게 후회했다고 하며, 경태제의 즉위 과정을 다시 조사한 후 우겸을 모함한 자기 측근들을 처형했다.그저 죽은 자만 지못미.
우겸은 조정 대신이었음에도 집이 아주 초라했는데[4] 이것을 알고 경태제가 저택을 하사하겠다 하였으나 우겸은 끝내 고사하며 "나라가 어려운데 신이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하며. 하도 국사에 열중한 나머지 집에 들어와 자는 날이 1년에 며칠밖에 되지 않았고 황제가 하사한 책이나 갑옷, 검을 너무나 소중히 여겨 평소에 감추어 놓다가 1년에 한번씩 꺼내 보았다고 한다.
또한 그의 시 구절 중 "오로지 청백함을 세상에 남기리니 이 몸이 가루가 된들 두려울 게 있으랴" 의 표현에서 그의 청렴함과 나라를 위한 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쿠데타를 일으켜 영종을 복위시키고 우겸을 죽인 석형과 서유정, 조길상 등 간악한 간신배들은 또 다시 권력 다툼을 벌여 서로를 모함하다가 제각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다. 하지만 사실은 환관 조길상과 석형만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서유정은 파직은 되었지만 평안히 산수를 유람하다 죽었다.
그렇지만 우겸의 사형 건은 천순제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 보라. 전란이 끝난 후, 전시에 큰 공을 세운 공신은 반란을 일으킬 용의자 0순위이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 괜히 생겨난 말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그렇지 않아도 쿠데타로 즉위한 천순제에게 우겸은 참으로 부담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우겸은 경태제를 옹립시킨 1등 공신이다. 다른 걸 떠나서 자기를 공기로 만든 존재를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겸은 황위나 권력에 야심이 없었고, 북경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보여준 그의 능력을 감안하여, 대국적 견지에서 용서했다면, 이후 정통제에게 충성을 다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에서 대뻘짓이었다는 견해가 다수다. 실제로 천순제도 우겸을 사형시키고 가산을 몰수하는 과정에서, 우겸이 청렴결백한 신료였다는 것을 알고 크게 후회했다고 하며, 경태제의 즉위 과정을 다시 조사한 후 우겸을 모함한 자기 측근들을 처형했다.
우겸은 조정 대신이었음에도 집이 아주 초라했는데[4] 이것을 알고 경태제가 저택을 하사하겠다 하였으나 우겸은 끝내 고사하며 "나라가 어려운데 신이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하며. 하도 국사에 열중한 나머지 집에 들어와 자는 날이 1년에 며칠밖에 되지 않았고 황제가 하사한 책이나 갑옷, 검을 너무나 소중히 여겨 평소에 감추어 놓다가 1년에 한번씩 꺼내 보았다고 한다.
또한 그의 시 구절 중 "오로지 청백함을 세상에 남기리니 이 몸이 가루가 된들 두려울 게 있으랴" 의 표현에서 그의 청렴함과 나라를 위한 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쿠데타를 일으켜 영종을 복위시키고 우겸을 죽인 석형과 서유정, 조길상 등 간악한 간신배들은 또 다시 권력 다툼을 벌여 서로를 모함하다가 제각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다. 하지만 사실은 환관 조길상과 석형만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서유정은 파직은 되었지만 평안히 산수를 유람하다 죽었다.
현대중국의 교육과정에서는 소학교에서 석회음을 가르친다.
2019년 드라마 대명풍화에 등장한다. 급제하자마자 영락제에게 간언을 할 정도의 충신으로 표현된다. 영락제는 우겸이 황실이 아니라 국가에 충성하고 있어서 고위관료가 되면 비명횡사당할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주고후의 사생아와 혼인한다. 오이라트가 군사적 움직임을 보여 정통제가 출병하려 할 때 우겸은 오이라트가 군사적으로 움직인 것은 정통제의 할머니인 성효소황후의 동생 장극검이 국경에서 오이라트 사람들에 대한 약탈, 살인, 강간을 일삼았기 때문이므로 오이라트와 평화적으로 해결해야지 출병하는 것은 장극검을 옹호하는 것밖에 안된다며 출병을 반대한다. 에센이 도성을 공격할 때 효공장황후의 명으로 병부상서로서 수성전을 총지휘한다.
홍콩 무협 용문객잔과 신용문객잔에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우겸의 일족(신용문객잔에서는 가상인물)이 용문객잔에서 모두 살육될 예정이었는데 협객들이 그들을 구해 내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우혁의 소설 <쾌자풍>이 토목의 변, 탈문의 변과 그에 얽힌 우겸 일족의 복수를 조선인 입장에서 다룬 소설이다.
양우생의 소설 평종협영록에서는 만고의 충신으로 언급된다. 아예 2부에서는 장단풍에게 무공을 사사한 딸 우승지가 주인공으로 나올 정도.
내가 바로 세종대왕의 아들이다에선 원 역사에서 뛰어난 능력으로 에센의 침공을 막아내 북경을 사수하였던 것과 달리 여기서는 화약 무기를 터득한 에센에 의해 참패하여 북경이 함락된 후 포로가 되었다가 기적적으로 혼란을 틈타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경태제 주기옥을 설득해서 남명을 세워 독립하게 한 후, 경태제의 총애를 받지만 북명에서나 남명에서나 평가가 좋지 못하다. 북명에서는 "우리를 버리고 튄 놈들."이라고 관료부터 시작해 유학자들과 일반 백성들까지도 경태제와 함께 증오의 대상으로 나오며[5] 어느정도냐면 에센의 연기를 하는 배우보다 경태제와 우겸의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분노와 증오를 집중적으로 받을 정도. 심지어 남명에서도 "그 양반이 한 게 대체 뭐 있어?"라고 평가되는 등 맨날 실패만 하는 인간으로 취급되고 있다.
홍콩 무협 용문객잔과 신용문객잔에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우겸의 일족(신용문객잔에서는 가상인물)이 용문객잔에서 모두 살육될 예정이었는데 협객들이 그들을 구해 내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우혁의 소설 <쾌자풍>이 토목의 변, 탈문의 변과 그에 얽힌 우겸 일족의 복수를 조선인 입장에서 다룬 소설이다.
양우생의 소설 평종협영록에서는 만고의 충신으로 언급된다. 아예 2부에서는 장단풍에게 무공을 사사한 딸 우승지가 주인공으로 나올 정도.
내가 바로 세종대왕의 아들이다에선 원 역사에서 뛰어난 능력으로 에센의 침공을 막아내 북경을 사수하였던 것과 달리 여기서는 화약 무기를 터득한 에센에 의해 참패하여 북경이 함락된 후 포로가 되었다가 기적적으로 혼란을 틈타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경태제 주기옥을 설득해서 남명을 세워 독립하게 한 후, 경태제의 총애를 받지만 북명에서나 남명에서나 평가가 좋지 못하다. 북명에서는 "우리를 버리고 튄 놈들."이라고 관료부터 시작해 유학자들과 일반 백성들까지도 경태제와 함께 증오의 대상으로 나오며[5] 어느정도냐면 에센의 연기를 하는 배우보다 경태제와 우겸의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분노와 증오를 집중적으로 받을 정도. 심지어 남명에서도 "그 양반이 한 게 대체 뭐 있어?"라고 평가되는 등 맨날 실패만 하는 인간으로 취급되고 있다.
[1] 조선의 병조 참판, 오늘날의 국방부 차관에 해당한다. 당시 병부상서 광야(鄺埜)는 이미 토목보에서 사망한 상태였다.[2] 참고로 시호에서 충(忠)은 굉장히 격이 높다.[3] 혈연은 없지만 외몽골 지역을 정복한 후 그 당시까지도 이어져오던 대칸의 자리를 이어받았다.[4] 사실 명나라는 관리의 녹봉이 적었던터라 관리들 중에서 가난한 사람이 흔했다. 특히 관리들은 녹봉이 적다보니 주어진 권력을 이용해서 뇌물을 받거나 착취하고 공금을 횡령하여 가외소득을 올리는 사람들이 흔했다. 청나라 시대에도 녹봉이 적은건 마찬가지라 저런 상황은 전혀 개선되지 않아 강희제는 1냥을 걷을 때 1할만 추가로 거둔다면 청렴하다고 말했고 옹정제는 아애 모선귀공이라 하여 정도의 선을 정해두고 이 안에서는 백성을 수탈하는 것을 합법화했다.[5] 북명이 함락되면서 겪은 참화 속에서 제일 먼저 튄 경태제와 포로가 된 후 탈출이었지만 그를 따라서 도주한 우겸과 달리 남아있던 유학자들은 일가족들을 대학살당하는 참극을 경험했으며, 백성들 역시 약탈에 시달리는 등 지옥을 경험했다. 이 때 이향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북경에 들이닥쳐서 오이라트군을 격퇴하면서 수많은 이들을 구출해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었지만, 조선군과 조선왕인 이향이 보기에도 끔찍하여 "내가 명나라를 싫어하긴 해도 이건 아니다!" 라고 분노할 정도로 지옥도가 펼쳐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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