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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복음서 - 나무위키

요한의 복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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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그리스어
κατὰ Ἰωάννην εὐαγγέλιον, τὸ εὐαγγέλιον κατὰ Ἰωάννην
라틴어
Evangelium secundum Ioannem
영어
Gospel of John
한자
가톨릭: 요한 福音(書)
개신교: 요한福音
중국어
간체자: 若望福音
정체자: 若望福音
일본어
ヨハネによる福音書 (ヨハネによるふくいんしょ)
기본 정보
전승되는 저자
기록 연대
서기 90–120년경
분량
21장
주요인물

1. 개요2. 저자 및 형성 과정3. 집필 의도4. 특징
4.1. 신학서적 특징
4.1.1. 3장 16절4.1.2. 우주적 예수
4.2. 공관 복음서와의 차이
4.2.1. 역사적 예수 논쟁
5. 주요 내용
5.1. 2장 1-12절(가나의 혼인잔치)5.2. 3장 8절(바람과 성령)5.3. 3장 13절(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5.4. 3장 20절(악을 행하는 자는 빛을 미워한다)5.5. 4장 1-26절(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5.6. 4장 28-39절(비밀 양식)5.7. 5장 39절(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5.8. 6장 25-59절(생명의 빵)5.9. 7장 37-39절(배(belly)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5.10. 7장 53절-8장 11절(간음하다 잡힌 여인)5.11. 8장 15절(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5.12. 8장 32절(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5.13. 9장(시각장애인을 고치다)5.14. 10장 1-16절(양 우리의 비유)5.15. 10장 30절(예수 그리스도의 삼위일체론적 발언)5.16. 10장 31-36절(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신이다)5.17. 11장 35절(예수의 눈물)5.18. 12장 1-11절(향유를 부은 여인)5.19. 13장 1-17절(세족식)5.20. 13장 34절(서로 사랑하라)5.21. 13장 36절(쿠오 바디스)5.22. 14장 16-17절(또 다른 보혜사)5.23. 15장 17절(포도나무 비유)5.24. 16장 5-6절(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다)5.25. 16장 25절(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이르지 않겠다)5.26. 20장 22-23절(죄를 용서할 권한)5.27. 요한의 복음서 21장
5.27.1. 아가페와 필리아?
5.28. 모르고 저지른 것은 죄가 아닌가?5.29. 심판을 하러 온 것인지 아닌지 여부5.30. 유월절 전날에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5.31. 칼빈주의와의 연관성5.32. 반유대주의 관련

1. 개요[편집]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요한의 복음서 1장 1절 (공동번역 성서)[1]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요한의 복음서 3장 16절 (공동번역 성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2(개역개정판)

성경의 50번째/43번째 권.

12사도 중 한 명이며, 가장 사랑받은 제자 요한이 집필하였다고 전승된다.

4복음서 가운데 4번째이다. 집필 시기도 가장 후대이다. 개신교에서는 '요한복음', 가톨릭에서는 '요한 복음서' 또는 '요한 복음'이라고 부른다.

4복음서 중 가장 이질적인 복음서이다. 앞선 세 복음서는 거의 진술이 일치하며, 내용들이 중복되는 부분이 많기에 공통적인 관점에서 기록된 복음, 즉 공관 복음서로 불린다. 그러나 이보다 한 세대 지나 기록된 요한의 복음서는 이들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공관 복음서에 기술된 내용들을 과감히 생략하는 등의 모습도 보인다.

전통적인 복음사가의 상징은 독수리로, 공관 복음서에 비해 더 형이상학적인 차원의 신학과 신성을 다루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4복음서 중 삼위일체론 관점이 가장 잘 나타난다.

신약 정경이 하나로 묶이기 이전 시대 교부들의 글을 보면 복음서 중 대부분 요한의 복음서를 인용한다. 즉 4복음서 중 가장 사랑받은 복음서였다. 지금도 크리스트교 초신자에게 신약 성경에서 첫 번째로 읽을 책으로 권하는 교회가 많다.

저자는 그리스 지역 철학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그리스 철학 용어를 사용하였다. 일례로 요한복음에서 시작부터 사용되는 용어인 '말씀', 즉 그리스어 '로고스'는 그리스 철학용어이다. 그리스인에게 로고스는 비인격적인 것이었으나 저자는 로고스가 인격체인 예수 그리스도라고 설명한다. 이 때문에 요한의 복음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영지주의자가 쓴 글이라고 주장하는 소수 신학자가 있었지만 대부분 신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복음서의 1장 1절부터 18절까지는 그리스어로 된 이다. 한국어 성서도 그 뜻이 온전히 전달되지는 않지만 유심히 읽어 보면 건조하게 사실만을 서술하는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문체가 소설의 도입부처럼 되어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예수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모두 이 복음서에서 등장한다.[2]

2. 저자 및 형성 과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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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집필 의도[편집]

요한의 복음서의 일차적인 집필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하느님의 강생이었다는 사실을 설득하는 데 있다. 이러한 의도는 책 마지막 부분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의 복음서 20장 31절(공동번역 성서)

이는 저자의 관심이 철학적이라기보다는 신학적인 데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또한 이는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아 회당에서 내어쫓기면서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 요한 공동체 성원들의 신앙을 북돋아 주기 위해 쓰여진 복음서다.

4. 특징[편집]

4.1. 신학서적 특징[편집]

공관 복음서들이 예수의 행적을 역사적인 순서에 따라 서술하고 있는 데 비해, 요한의 복음서는 신학 체계에 따라 쓰여진 복음서로서, 이는 신학서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신성(神性)을 중시하고 인성(人性)을 부정하는 가현설단성론적 학파에 대항하기 위해, 예수의 몸을 찔렀더니 이 나왔다는 내용을 서술하여,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4.1.1. 3장 16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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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 우주적 예수[편집]

요한의 복음서가 묘사하는 예수는 다른 세 복음서의 예수보다 더욱 스케일이 크다. 마르코의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데에서, 마태오의 복음서와 루가의 복음서는 예수의 탄생부터 시작하지만, 요한의 복음서는 아예 예수의 탄생 자체를 그리지 않는다.

요한의 복음서에서 말하는 예수는 이미 천지창조 전부터 존재했던 분이다. 그는 말씀, 즉 로고스로 불리는데 이 로고스는 천지창조 전에 하느님과 함께 존재''하였다. 신성의 3가지 조건 1. 이미 존재하여야 하고 2. 함께 공존해야 하며 3. 스스로 존재해야하는 조건을 만족하기때문에 예수는 성부와 같이 실체로는 하느님'''이라는 것이다.[3] 때문에 다음 구절들에서 보듯이, 요한 복음 안에서는 예수가 "나다(I AM)"(원어: ἐγώ εἰμι)라고 말하는 장면이 강조된다.[4]
καὶ ἔλεγεν αὐτοῖς, Ὑμεῖς ἐκ τῶν κάτω ἐστέ, ἐγὼ ἐκ τῶν ἄνω εἰμί: ὑμεῖς ἐκ τούτου τοῦ κόσμου ἐστέ, ἐγὼ οὐκ εἰμὶ ἐκ τοῦ κόσμου τούτου. εἶπον οὖν ὑμῖν ὅτι ἀποθανεῖσθε ἐν ταῖς ἁμαρτίαις ὑμῶν: ἐὰν γὰρ μὴ πιστεύσητε ὅτι ἐγώ εἰμι, ἀποθανεῖσθε ἐν ταῖς ἁμαρτίαις ὑμῶν. ἔλεγον οὖν αὐτῷ, Σὺ τίς εἶ; εἶπεν αὐτοῖς ὁ Ἰησοῦς, Τὴν ἀρχὴν ὅ τι καὶ λαλῶ ὑμῖν; πολλὰ ἔχω περὶ ὑμῶν λαλεῖν καὶ κρίνειν: ἀλλ' ὁ πέμψας με ἀληθής ἐστιν, κἀγὼ ἃ ἤκουσα παρ' αὐτοῦ ταῦτα λαλῶ εἰς τὸν κόσμον. οὐκ ἔγνωσαν ὅτι τὸν πατέρα αὐτοῖς ἔλεγεν. εἶπεν οὖν [αὐτοῖς] ὁ Ἰησοῦς, Οταν ὑψώσητε τὸν 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 τότε γνώσεσθε ὅτι ἐγώ εἰμι, καὶ ἀπ' ἐμαυτοῦ ποιῶ οὐδέν, ἀλλὰ καθὼς ἐδίδαξέν με ὁ πατὴρ ταῦτα λαλῶ. καὶ ὁ πέμψας με μετ' ἐμοῦ ἐστιν: οὐκ ἀφῆκέν με μόνον, ὅτι ἐγὼ τὰ ἀρεστὰ αὐτῷ ποιῶ πάντοτε. Ταῦτα αὐτοῦ λαλοῦντος πολλοὶ ἐπίστευσαν εἰς αὐτόν.
et dicebat eis vos de deorsum estis ego de supernis sum vos de mundo hoc estis ego non sum de hoc mundo dixi ergo vobis quia moriemini in peccatis vestris si enim non credideritis quia ego sum moriemini in peccato vestro dicebant ergo ei tu quis es dixit eis Iesus principium quia et loquor vobis multa habeo de vobis loqui et iudicare sed qui misit me verax est et ego quae audivi ab eo haec loquor in mundo et non cognoverunt quia Patrem eis dicebat dixit ergo eis Iesus cum exaltaveritis Filium hominis tunc cognoscetis quia ego sum et a me ipso facio nihil sed sicut docuit me Pater haec loquor et qui me misit mecum est non reliquit me solum quia ego quae placita sunt ei facio semper haec illo loquente multi crediderunt in eum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지만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너희가 자기 죄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죽으리라고 한 것이다. 만일 너희가 내가 그이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 그와 같이 죄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죽고 말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요?" 하고 그들이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처음부터 내가 누구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너희에 대해서 할 말도 많고 판단할 것도 많지만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기에 나도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그대로 이 세상에서 말할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높이 들어올린 뒤에야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것만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은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시지는 않는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He said to them, “You belong to what is below, I belong to what is above. You belong to this world, but I do not belong to this world. That is why I told you that you will die in your sins. For if you do not believe that I AM, you will die in your sins.” So they said to him, “Who are you?” Jesus said to them, “What I told you from the beginning. I have much to say about you in condemnation. But the one who sent me is true, and what I heard from him I tell the world.” They did not realize that he was speaking to them of the Father. So Jesus said (to them), “When you lift up the Son of Man, then you will realize that I AM, and that I do nothing on my own, but I say only what the Father taught me. The one who sent me is with me. He has not left me alone, because I always do what is pleasing to him.” Because he spoke this way, many came to believe in him.
(요한의 복음서 8장 23-30절)

εἶπεν αὐτοῖς Ἰησοῦς, Ἀμὴν ἀμὴν λέγω ὑμῖν, πρὶν Ἀβραὰμ γενέσθαι ἐγὼ εἰμί.
dixit eis Iesus amen amen dico vobis antequam Abraham fieret ego sum.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두어라.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하고 대답하셨다.
Jesus said to them, “Amen, amen, I say to you, before Abraham came to be, I AM.”
(요한의 복음서 8장 58절)
Ἰησοῦς οὖν εἰδὼς πάντα τὰ ἐρχόμενα ἐπ' αὐτὸν ἐξῆλθεν καὶ λέγει αὐτοῖς, Τίνα ζητεῖτε; ἀπεκρίθησαν αὐτῷ, Ἰησοῦν τὸν Ναζωραῖον. λέγει αὐτοῖς, Ἐγώ εἰμι. εἱστήκει δὲ καὶ Ἰούδας ὁ παραδιδοὺς αὐτὸν μετ' αὐτῶν. 6ὡς οὖν εἶπεν αὐτοῖς,
Ἐγώ εἰμι, ἀπῆλθον εἰς τὰ ὀπίσω καὶ ἔπεσαν χαμαί. 7πάλιν οὖν ἐπηρώτησεν αὐτούς, Τίνα ζητεῖτε; οἱ δὲ εἶπαν, Ἰησοῦν τὸν Ναζωραῖον. 8ἀπεκρίθη Ἰησοῦς, Εἶπον ὑμῖν ὅτι ἐγώ εἰμι: εἰ οὖν ἐμὲ ζητεῖτε, ἄφετε τούτους ὑπάγειν:
Iesus itaque sciens omnia quae ventura erant super eum processit et dicit eis quem quaeritis responderunt ei Iesum Nazarenum dicit eis Iesus ego sum stabat autem et Iudas qui tradebat eum cum ipsis ut ergo dixit eis ego sum abierunt retrorsum et ceciderunt in terram iterum ergo eos interrogavit quem quaeritis illi autem dixerunt Iesum Nazarenum respondit Iesus dixi vobis quia ego sum si ergo me quaeritis sinite hos abire
예수께서는 신상에 닥쳐올 일을 모두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며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소." 하자 "내가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를 잡아줄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예수께서 "내가 그 사람이다."하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졌다. 예수께서 다시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소." 하고 대답하였다. "내가 그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고 있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두어라" 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Jesus, knowing everything that was going to happen to him, went out and said to them, “Whom are you looking for?” They answered him, “Jesus the Nazorean.” He said to them, “I AM.” Judas his betrayer was also with them. When he said to them, “I AM,” they turned away and fell to the ground. So he again asked them, “Whom are you looking for?” They said, “Jesus the Nazorean.” Jesus answered, “I told you that I AM. So if you are looking for me, let these men go.”
(요한의 복음서 18장 4-8절)

로고스는 기원전 500년경 에페소의 철학자 헤라클리투스가 우주를 지배하는 궁극적인 이성적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다. 기원 1세기 초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론은 궁극적 원리 - 즉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이성 - 으로서의 로고스를 부정하고 인격적으로 초월하여 존재하는 하느님이 그의 뜻으로 이 세계를 창조하고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곧 필론은 헤라클리투스의 '이성적 원리'라는 뜻과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느님의 뜻이라는 의미를 합한 것으로서 '로고스'라는 말을 응용하였다. 저자는 이같은 로고스 개념을 차용함으로서 예수의 신성에 관한 신앙을 그리스-로마 세계에 뚜렷하게 밝힐 수 있다고 인식한 것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요한의 복음서 1장 14절)"는 곧 예수가 로고스의 강생이었다는 뜻이다.

이런 우주적인 예수관은 요한 공동체가 가진 독특한 측면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전까지는 유대적 관점에서 예수를 바라보았고 예수의 탄생을 유태적 관점에서 규정하는 게 일반적이었다면, 요한 복음서에서는 그리스적 관점에서 예수를 바라보았다는 차이가 있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로고스라는 그리스 철학 용어를 사용한 것이 그리스 철학에 익숙한 예상 독자들에게 요한의 사상을 설득시키려는 의도라고 본다.

다만 로고스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에만 쓰인 것이 아니고 공관복음부터 서신서까지 신약성경 전반에 굉장히 많이 쓰였는데, 문맥 상 철학적인 이야기 하려는 게 아니라 단순히 말씀이라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 쓰였다. 예를 들면 "너희 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골로새서 4장 6절)"에서 말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로고스라는 단어를 썼다. 로고스가 원래는 그리스 철학용어라고 해도, 요한복음이 단순히 창세기 1장에 하느님이 "있어라"라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의미하기 위하여 로고스라는 단어를 썼을 확률이 높다.

선교사들이 성경을 한문으로 번역할 때, 로고스를 도교 등 동양 종교에서 만물의 이치를 뜻하는 로 번역했다. 道라는 한자에는 '말하다'라는 뜻도 있으므로[5] 이를 감안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4.2. 공관 복음서와의 차이[편집]

대체적으로 공관 복음의 경우, 예수의 행적과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초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며, 비신자들이 해당 복음을 보고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는 의도로 집필되었다. 반면에 요한의 복음의 경우, 초반부터 '예수는 어떤 분이신가?'에 초점을 맞추었고, 이미 믿음을 가진 교우들이 신앙의 지침으로 삼을 수 있도록 복음서가 집필되었다[6].

요한의 복음서에는 공관 복음서에 있는 많은 사건들이 생략되어 있다. 예수의 탄생, 세례, 시험, 변화산 사건, 최후의 만찬 등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이미 그러한 사건들이 요한의 복음서가 집필될 당시에는 잘 알려져 있었기에 생략하였다는 학설이 있다. 하지만, 요한 공동체라는 공관 복음서의 전승과는 다른 전승을 가지고 있는 신앙 공동체에서 집필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는 저자가 사건이나 사실보다는 신학 사상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자기 계시에 대한 해명이 될 수 있는 예수의 전기 대신 강생에 대한 신비적이고 철학적인 견해가 실려 있다. 따라서 요한의 "예수의 인물과 가르침에 대한 표현"은 공관 복음서의 표현과 아주 다르다. 저자는 예수의 가르침보다는 예수의 본성 및 하느님과 예수의 관계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또한 병을 고치는 기적을 소개할 때에도, 인간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조하는 공관복음과 달리 신성의 '표적'으로서의 기적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또한 짧게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 많은 공관복음서와 달리, 강의에 가까운 긴 어록이 많이 실려있다는 것도 특징이다. 사실 대부분의 요한 복음서의 내용은 이러한 예수의 강의를 소개하고 설명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공관 복음서에 생략된 부분이 요한의 복음서에는 길게 실려있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유명한 포도주로 변하게 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 니고데모(3장 1 - 21절, 7장 50 - 52절, 19장 39절)
바리사이이자 최고 대의회 의원이었다. 당대 유대인 사회의 인텔리. 예수를 시험하고자 몸소 예수를 찾아가서 질문을 던지는데, 이 때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는 '거듭남(중생)'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대화 이후 니고데모는 예수를 변호하고자 한다. 그러나 사제들은 그를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토라를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하고 디스한다. 예수가 죽고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가져온 것도 그다. 가톨릭의 전승에서 그는 개종하고 순교했으며, 순교자 성 니코데모(축일 8월 3일)로 공경받아 왔다.[7]
  • 사마리아의 여인과의 대화
가톨릭에서는 이 사마리아 여인이 훗날 예수의 제자가 되어 카르타고에서 순교한 성녀 포시나(Photina, 축일 3월 20일)라고 가르치고 있다.
성 라자로는 이 사건 이후 예수의 제자가 되었으며, 가톨릭 전승에서는 여동생 마르타 및 마리아[8]와 함께 프랑스 마르세유 지역으로 가서 주교로 순교했다고 한다. 축일은 12월 17일.

공관 복음서에서 한 번 이상 언급되었지만 요한의 복음서에서 언급하지 않은 사항은 다음과 같다.

이렇게 설명을 하다 보면 여타 공관 복음서들보다 훨씬 읽기 어려운 복음서로 느끼기 쉬우나, 막상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읽기 좋은 편이다. 다른 복음서들은 아직 기독교가 소아시아 구석의 지역 종교이던 시절 예수가 얼마나 짱짱맨인지를 여러 에피소드에 걸쳐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모르는 사람들에게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쓰여진 측면이 크다. 그러나 요한의 복음서는 예수의 미리 신성을 전제해 두고 선별한 소수의 에피소드를 통해 예수께서 어떤 생각을 했으며 어떤 방식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는지를 압축적이고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때문에, 예수의 구체적인 행적에 대해서는 지나가면서라도 대충 들어보았을 현대인들이 그 일화들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하고 이해하기에 편하다. 특유의 헬레니즘적 배경 덕에 그리스식의 다듬어진 문장력이 돋보이고 읽기에 좋다는 점 또한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4.2.1. 역사적 예수 논쟁[편집]

요한의 복음서는 공관 복음서와의 차이 때문에 역사적 예수 논쟁에서 많은 문제가 대두되어왔다. 이 문제를 거슬러 올라가면, 초기 교부인 오리게네스마저도 요한 복음사가는 사건을 정확하게 전달하는데는 다른 복음사가보다 서툴렀을 것이라고 언급했을 정도이다. 때문에 19세기 초부터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어, 한때는 역사적 예수 논쟁에서 요한의 복음서가 사실 기록으로서 가치가 없다는 취급도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것 아니면 저것' 곧 '역사 아니면 신학'이라는 근대적 양자택일은 비판을 받게 되며, 이 복음서의 역사성에 대한 해답이 과거 생각하였던 것보다 훨씬 더 복합적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우선 공관 복음서 저자들이 이야기하는 많은 사실을 요한 복음서 저자도 전한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특히 세례자 요한의 활동, 예수가 받은 세례, 여러 기적, 특히 빵의 기적이 이러한 부분에 속한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이야기도 전체적으로는 마찬가지다. 해당 구절들을 비교해 보면, 요한 복음서 저자 역시 교회 전통으로 알려진 사실들을 전하고자 하였으며, 또 그 일을 성실히 수행했다는 결론이 나게 된다.

여러 사항과 관련해서, 역사성을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독창적 요소들이 요한의 복음서에만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곧 지리와 연대에 관한 자료들, 그리고 유대 지방이나 로마 제국의 제도와 관계되는 사항 등이다. 이 모든 것은 저자가 AD 1세기 팔레스티나에서 벌어지는 생활상을 잘 알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게다가 그러한 상황은 AD 66-72년에 벌어진 유대 독립 전쟁 이후에는 없어져, 저자와는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지게 된 것들이다.

또한 저자는 자신을 사실의 목격자 곧 증인으로 여기며, 적어도 다른 이들에게 증인으로 인정을 받는다.(19,35; 21,24)[10] 아무튼 이러한 면모 때문에, 요한의 복음서의 예수 증언이 가지는 역사성에 대하여, 역사 혹은 신학이라는 양자택일적 태도에는 경계가 필요하다. 사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역사적 예수 연구가 현대에는 다 식어버린 떡밥이 되어버린 감도 있고.

5. 주요 내용[편집]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요한복음 2장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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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3장 8절(바람과 성령)[편집]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한복음 3장 8절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이 말에 놀라지 말라고 말한 후에 나온 말인데, 이 구절은 성령으로 거듭난 적이 없어 성령에 대한 감각이 없는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성령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바람의 존재를 소리로는 느껴도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도 성령에 대한 감각은 있으나 성령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역사하여 왔고 장차 어떻게 역사할지에 대한 것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성령의 존재를 바람과 같이 느끼는 사람이라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것이다.

5.3. 3장 13절(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편집]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3장 13절

이 구절 때문에 일반적으로 구약 성도들은 천국에 바로 가지는 못했고, 천국도 지옥도 아니지만 천국에 가까운 임시거처에 머물렀다고 본다.

5.4. 3장 20절(악을 행하는 자는 빛을 미워한다)[편집]

과연 악한 일을 일삼는 자는 누구나 자기 죄상이 드러날까봐 빛을 미워하고 멀리한다.

요한의 복음서 3장 20절 (공동번역성서)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죄상을 낱낱이 드러내는 진리를 미워한다는 뜻이다.

5.5. 4장 1-26절(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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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4장 28-39절(비밀 양식)[편집]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돌아가 사람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다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같이 가서 봅시다. 그분이 그리스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고 알렸다.
그 말을 듣고 그들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 모여들었다.
그러는 동안에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 무엇을 좀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다.
예수께서는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누가 선생님께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을까?" 하고 수군거렸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 너희는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추수 때가 온다.' 하지 않느냐? 그러나 내 말을 잘 들어라.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이미 다 익어서 추수하게 되었다. 거두는 사람은 이미 삯을 받고 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알곡을 모아들인다. 그래서 심는 사람도 거두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게 될 것이다. 과연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은 거둔다는 속담이 맞다. 남들이 수고하여 지은 곡식을 거두라고 나는 너희를 보냈다. 수고는 다른 사람들이 하였지만 그 수고의 열매는 너희가 거두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동네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 여자가 자기의 지난 일을 예수께서 다 알아맞히셨다고 한 증언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요한의 복음서 4장 28-39절(공동번역 성서)

이 비유는, 진리를 선포하는 것을 씨를 뿌리는 것에, 그것을 듣고 마음의 문이 열려 예수를 믿을 준비가 된 상황을 곡식이 익은 것에, 예수를 믿으라고 하여 사람들로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을 추수하는 것에[11], 구원받는 영혼을 지켜보는 것으로 얻는 기쁨을 추수하는 사람이 받는 삯에 비유하고 있다. 즉 이 본문에서는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여 얻는 기쁨이 예수 그리스도가 말하고 있는 비밀 양식임이 드러난다.

5.7. 5장 39절(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편집]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5장 39절 (개역개정)

이 구절에서 말하는 성경은 구약성경을 말하는데, 기독교에서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의 많은 부분들이 사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이고,[12] 구약의 예언서들도 영적인 의미로는 하나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고 본다. 즉, 구약성경은 하느님이 십자가 사건 이전의 사람들을 구원시키려고 했던 노력의 결과물인 동시에, 그 구약성경을 구성하는 사건들과 예언들이 영적인 의미로 하나로 통일될 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이 이 구절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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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7장 37-39절(배(belly)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편집]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한복음 7장 37-39절

구약성경에 명시적으로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온다는 내용은 없다. 이사야 44장 3절[13]을 변형하여 인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7장 39절은 십자가 사건 이전에는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했던 것은 아님을 알려주고 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로 대표되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잘 알고 있는 매우 유명한 에피소드인데 이 에피소드는 요한의 복음서 원저자가 쓴 것이 아니라 후대에 가필된 것이라는 논란이 있다. 현재는 각종 문헌비평 수법을 적용하여 이 에피소드가 후대에 가필되었다는 쪽으로 의견이 굳어지고 있다. 그러나 후대에 삽입된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있던 일이 전승으로 내려오다가 후대에 삽입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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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 8장 15절(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편집]

15.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만 나는 결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
16. 혹시 내가 무슨 판단을 하더라도 내 판단은 공정하다. 그것은 나 혼자서 판단하지 아니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와 함께 판단하기 때문이다.
17. 너희의 율법에도 두 사람이 증언하면 그 증언은 참되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18. 내가 바로 나 자신을 증언하고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증언해 주신다."
28.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높이 들어올린 뒤에야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것만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44. 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쪽에 서본 적이 없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정녕 거짓말쟁이이며 거짓말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요한의 복음서 8장 (공동번역성서)

요한의 복음서 8장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은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면서 바리새인들을 판단하는 것 같은 장면이 나오는데, 전체 문맥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은 사람들을 판단하는 데에 참여하지 않으나 성부 하느님께서 내리신 판단의 경우 그것은 수용한다는 뜻이다. 반면 심판의 경우 그 반대라고 한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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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 9장(시각장애인을 고치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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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 10장 1-16절(양 우리의 비유)[편집]

요한의 복음서 10장 (공동번역성서)
1.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딴 데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며 강도이다.
2. 양 치는 목자는 문으로 버젓이 들어간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 목자는 자기 양들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4. 이렇게 양떼를 불러낸 다음에 목자는 앞장서 간다. 양떼는 그의 음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뒤따라간다.
5. 양들은 낯선 사람을 결코 따라가지 않는다. 그 사람의 음성이 귀에 익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를 피하여 달아난다."
6.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해 주셨지만 그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모두 다 도둑이며 강도이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오면 안전할 뿐더러 마음대로 드나들며 좋은 풀을 먹을 수 있다.
10. 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
11.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12. 목자가 아닌 삯꾼은 양들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도망쳐 버린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가고 양떼는 뿔뿔이 흩어져버린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14.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15.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16.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 양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러면 그들도 내 음성을 알아듣고 마침내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될 것이다."

이 비유에서 우리에 있는 양들은 문으로 비유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을 의미하고, 목자는 성도들을 올바른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을 의미하며, 도둑은 잘못된 구원 방법을 퍼뜨리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비유는 자신에게 불이익이 올 때 사람들의 구원보다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 하는 자는 목자가 아니라 삯꾼이라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와 반대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므로 선한 목자라고 하고 있다. 또한 이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메시아이기 때문에 그 이전까지의 자칭 메시아들은 전부 도둑이며, 목자의 음성을 아는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에 이전의 목자의 음성을 아는 양들은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구약 시대에 있었던 목자를 통해 올바른 구원 방법으로 불완전하게나마 구원받았던 성도들을 의미한다.

5.15. 10장 30절(예수 그리스도의 삼위일체론적 발언)[편집]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요한의 복음서 10장 30절 (공동번역성서)

5.16. 10장 31-36절(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신이다)[편집]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자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요한복음 10장 31-36절

이 구절은 시편 82편을 인용하고 있다.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셀라)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시편 82편 1-7절

시편 82편에는 유대인 재판관들을 신[15]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심판은 본래 하느님의 권한이지만 재판관들이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그 권한을 이양받았으므로 재판관들을 향해 이와 같은 표현을 쓴 것이다. 즉 요한복음 10장 35-36절은 시편 82편에서 일개 재판관들을 향해서도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어떻게 신성모독이냐며 성경을 이용하여 유대인들에게 반문하는 장면이다.

5.17. 11장 35절(예수의 눈물)[편집]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한복음 11장 35절
라자로를 살리는 에피소드에서 예수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 라자로 문서에 나오는 대로 여러 가지에 슬픔을 표시하는 눈물로 해석할 수 있고, 또 예수가 눈물을 흘릴 줄 아므로 인간임을 증명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킹제임스 성경 기준으로 요한복음 11장 35절은 "Jesus wept"로,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짧은 절로 유명하다. 물론 역본에 따라 가장 짧은 절은 다를 수도 있다. 왜인지 영어권에서는 Jesus wept가 비속어로도 쓰인다. "세상에!" 정도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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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 13장 1-17절(세족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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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 13장 34절(서로 사랑하라)[편집]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복음 13장 34절 (공동번역성서)
그때 시몬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지금은 내가 가는 곳으로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요한복음 13장 36절 (공동번역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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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2. 14장 16-17절(또 다른 보혜사)[편집]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중략)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4장 16-17,27절 (개역한글)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에서는 또 다른 보혜사이만희라고 주장하나, 전체 문맥을 볼 때 또 다른 보혜사는 보혜사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의미한다. 그리고 또 다른 보혜사에 대한 언급 이후에 나오는 16장 27절에 그 또 다른 보혜사에 대한 추가 설명이 나오며, 그것은 바로 성령을 의미한다고 명시적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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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 16장 5-6절(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다)[편집]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요한복음 13장 36절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요한복음 16장 5-6절

문맥 상 이어지는 이 두 구절은 모순되어 보이지만, 14장 31절[16]을 보면 중간에 장소의 이동이 있었고, 제자들을 떠나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고 제자들이 의아해 하다가 그 후에 이어지는 긴 설교를 듣고 제자들이 근심하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을 것을 생각해보면, 16장 5절은 더 이상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다는 뜻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5.25. 16장 25절(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이르지 않겠다)[편집]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요한복음 16장 25절

4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천국과 구원 등에 대하여 비유를 들고 그 비유를 풀이하는 식으로 가르침을 많이 베푸는데, 이것은 십자가 사건 이전에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내주하지 않았고 제자들은 성령과 관련된 영적 체험을 통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기에, 제자들은 현실에서 일어날법한 일들의 비유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 이후에 성도 개개인에게 성령이 내주하게 된 이후로는 그런 비유들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니게 되었기에 이와 같은 말이 나오게 되었다.

5.26. 20장 22-23절(죄를 용서할 권한)[편집]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의 복음서 20장 22-23절

가톨릭에서는 이 성경구절을 고해성사의 근거로 삼는다.

고해성사를 인정하지 않는 개신교 측에서는, 제자들이 공생애 시기부터 죄 사함의 예식으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기 때문에, 제자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려는 사람에게 세례를 주면 그 사람은 죄 사함을 받게 된다는 뜻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5.27. 요한의 복음서 21장[편집]

요한의 복음서 21장은 후대에 덧붙인 것이라는 의혹이 있다. 일단 요한 복음서의 사본 중 21장이 생략된 사본이 발견된 적은 없다. 기원후 2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P66 사본에서도 21장이 포함되며, 만약 21장이 후대에 덧붙여진 것이라면 매우 이른 시기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현존하는 모든 메이저 번역본에서도 21장은 온전히 복음서에 포함된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이 21장이 덧붙여진 것이라는 데 동의하는데(성서와 기독교, 연세대학교 출판부 인용), 20장 30-31절에서 이미 이 복음서의 목적과 결론이 적절하게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21장 25절에서 복음서를 마무리하는 부분은 20장 30-31절과 겹치는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 문제 때문에, 요한 복음서는 2명 이상의 집필자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21장에 대한 다른 이론으로는, 요한 공동체와 베드로에게서 정통성을 이어받은 걸로 보이는 주류 사도전승 교회가 화해한 증거라는 시각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문서 참조. 21장에서는 예수는 그를 3번 부인한 전례가 있는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3번 묻는다. 그리고 "내 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3번 말한다. 특히 ‘양들을 잘 돌보라’는 대목은 사실상 베드로의 수위권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 이론에 따르면, 요한 공동체가 분열되어 한쪽은 영지주의와 결합하고 다른 쪽은 주류 사도전승 교회에 편입되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요한의 복음서가 정경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주류 사도전승 교회와의 연합의 결과라는 추측도 있다.

마지막 구절인 21장 25절 "예수께서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셨다. 그 하신 일들을 낱낱이 다 기록하자면 기록된 책은 이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을 것이라고 생각된다."(공동번역성서)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성전(거룩한 전승)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보편교회천주교정교회에서는 이 구절을 근거로 성경에 없는 전승도 교리의 근거로 삼을 수 있다는 성경적 근거로 내세운다.

5.27.1. 아가페와 필리아?[편집]

이 대목의 그리스어 원문에서 예수는 "αγαπας με(agapas me)"라고 묻지만, 베드로의 대답은 "φιλω σε(philo se)"이다. 베드로는 대답에 '주님께서 아십니다.'라는 말을 붙이는데, 이는 헬라어로 '경험해서 알다'인 '기노스크'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17]. 이를 두고 예수는 베드로에게 자신에 대한 아가페적 사랑을 물어봤지만, 베드로는 의역하자면 "주님, 아시다시피 저는 주님을 3번이나 부인한 사람입니다. 저는 필로스의 사랑밖에는 하지못합니다."라고 겸손을 나타냈다는 시각이 있다. 3번째 예수의 질문은 '아가페'가 아닌 '필리아'인데, 이것을 두고 예수가 대인배답게 베드로의 인간적 사고방식에 맞추어준 것이라고 해석한다. 말하자면 '그래, 그럼 필리아 사랑은 할 수 있냐?'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αγαπώ'와 'φιλέω'가 다른 뜻으로 쓰였다고 볼 근거가 충분치는 않다. 오리게네스는 요한의 복음서 21장의 이 두 단어의 뜻을 구분했지만, 요한 크리소스토모[18] 등 당대 그리스어를 사용했던 교부들이나 에라스뮈스 등의 학자들은 이 두 단어의 뜻을 특별하게 구분하지 않았다. 그러다 19세기 영국의 트렌치가 <신약성경의 동의어들>이라는 책에서 이 두 단어의 의미를 구분했는데 이는 성경 이전 시대의 고전 그리스어 문헌들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여러 학자들이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실제 요한의 복음서에서 두 동사의 용례를 보면 위에서 '필로스의 사랑'이라고 해석했던 동사 'φιλέω'가 'αγαπώ'와 특별히 구분 없이 쓰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5:20에서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라는 야훼예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낸 구절에서도 'φιλέω'가 쓰이며,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의 '사랑'도 13:23과 19;26, 21:20에서는 'αγαπώ' 동사를 썼지만 20:2에서는 'φιλέω' 동사를 썼다.#

5.28. 모르고 저지른 것은 죄가 아닌가?[편집]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여 있다면, 세상이 너희를 자기 것으로 여겨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가려 뽑아냈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종이 그의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했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또 그들이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의 말도 지킬 것이다. 그들은 너희가 내 이름을 믿는다고 해서, 이런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해 주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는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자기 죄를 변명할 길이 없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까지도 미워한다. 내가 다른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그들 가운데서 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내가 한 일을 보고 나서도, 나와 내 아버지를 미워하였다."

요한복음 15장 18-24절

굵은 글씨로 표시한 부분을 언뜻 읽으면, 이것을 모르고 저지른 것은 죄가 아니라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레위기 5장 17절[19]은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모르고 저지른 것도 죄라고 말하고 있다.[20] 해당 구절들은 만약 그들이 복음을 듣지 못했다면 죄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애초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 길이 전혀 없는 경우, 예수를 믿는 것은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 예수를 믿지 않는 죄는 없었을 것이나, 복음에 대해 듣고도 그것을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은 큰 죄라는 뜻이다.

5.29. 심판을 하러 온 것인지 아닌지 여부[편집]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요한복음 9장 39절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다.

요한복음 12장 47절

문맥을 자세히 파악하지 않으면 이 구절들은 모순되는 것 같아 보일 수 있다. 문맥 상 심판하러 오지 않았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은 재림 때와 같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고, 심판하러 왔다는 말은 요한복음 3장 18절[21]과 같은 맥락에서 자신을 믿지 않는 자들을 어두움 속에서 살게 하기 위하여 왔다는 말이다.

5.30. 유월절 전날에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편집]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22]라. 빌라도가 유대인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요한복음 19장 14절

준비일이라고 번역된 'παρασκευη'은 주로 안식일의 준비일에 해당하는 금요일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단어이다. 이것을 유월절의 전날이라고 해석하면 다른 복음서들과 모순이 생긴다. 즉 금요일인 유월절에 십자가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다.

5.31. 칼빈주의와의 연관성[편집]

"그러나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시는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올 것이며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내게 오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내가 살릴 것이다. 예언서에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누구든지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사람은 나에게로 온다." (・・・) 그러나 "너희 가운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누구며 자기를 배반할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 이어서 "그래서 나는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사람이 아니면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6장 37,44-45,64-65절

칼빈주의 예정론에서는 이 구절들을 근거로 들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느님에게 선택받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와는 조금도 상관 없이 하느님의 이해할 수 없는 뜻에 의한 것이며,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애초에 지옥에 가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인간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으나, 하느님은 복음을 듣고 회개하는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끌어주시며, 하느님은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미리 예지하고 계신다고 주장한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맡겨주신 것은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아무도 그것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갈 수 없다. (・・・)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6장 39절, 10장 27-29절, 14장 16절

또한 기독교에서는 성도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도 치열한데,[23] 칼빈주의에서는 이 구절들을 들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이러한 주장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이사야 5장 2절[24] 등을 근거로 들어 하느님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더욱 중요시 할 때도 있으며, 아무도 그들을 손에서 빼앗아갈 수 없다는 구절은 현재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 혹은 이미 천국에 들어간 성도에 대한 말이고, 성령께서 성도들과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이라는 말은 끝까지 믿음을 지킨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라고 하며 이러한 구절들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5.32. 반유대주의 관련[편집]

마태오의 복음서, 마르코의 복음서, 루가의 복음서는 대체적으로 유대적인 기반 위에서 예수를 바라보았다. 물론 시각차가 없는 건 아니라서, 마태오의 복음서는 친유대교적, 마르코의 복음서는 중립적, 루가의 복음서는 비유대교적 성격이 존재한다. 그러나 요한의 복음서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과 유대인들을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다.

또한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25] 예수가 하는 말은 상징적이고 은유적인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여러 군데서 보인다. 예수를 믿지 않으며 심지어는 그를 죽이려고까지 한다. 결국 이런 예수와 유대인들의 긴장은 십자가 사건에서 폭발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요한의 복음서의 예수와 유대인들의 팽팽한 긴장과 갈등은 요한의 복음서의 저자, 혹은 요한 복음서를 형성한 예수의 전승을 간직한 요한 공동체와 유대교 간의 긴장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실제로 로마제국 동방지역에서는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가 긴장되었고, 로마제국의 법에 따르면 불법 종교였던 기독교를 유대교 회당에서 고발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요한 공동체는 유대인과 유대교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 이른바 “로고스 찬가”라고 하는 유명한 부분.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텍스트로 간주되었고, 트리엔트 미사를 거행할 때에는 미사 끝에 “마지막 복음”이라는 표제로 요한복음 1장을 항상 낭독하였다. 아예 제대 위에 요한복음 1장을 액자에 넣어 올려두었을 정도. 이때는 당연히 라틴어로 낭독한다.[2] 6:35 생명의 빵, 8:12 세상의 빛, 10:9 문, 10:11 선한 목자, 11:25 부활·생명, 14:6 길·진리·생명, 15:5 포도나무[3] 차례로 그리스어 성서, 라틴어 노바 불가타, 공동번역성서, 그리고 인용한 영문 성경은, I AM의 뜻을 명확히 하기 위해 New American Bible Revised Edition을 사용하였다. 원문에서도, I AM은 대문자로 강조되어 있다.[4] 야훼는 "I AM WHO I AM,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이다"라는 뜻이다.[5] 예를 들어 도덕경 통행본 1장의 '道可道(도가 말해질 수 있다면)'에서 뒤의 道자가 '말하다'의 뜻으로 쓰였다.[6] 이는 기존의 공관복음이 서술하지 못한 내용을 덧붙임으로써 보충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졌기 때문이다[7] 관련 출처 [8] 성모 마리아,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인물이다.[9] 세례 요한이 증언하는 형태로 자신이 예수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비둘기 모습의 성령이 내려왔다는 내용이 있다.[10] 이 부분은 원 저자가 아닌, 제자들의 마무리 부분으로 추정된다.[11] 이 본문에는 제자들이 추수만 하러 보내졌다고 나오는데, 요한복음에서 이 장면 이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을 선포하고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상황이 나온다. 이와 같은 상황이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은 거두는 상황이다. 참고로 성경에서 추수라는 단어는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로 쓰이므로 문맥을 잘 파악할 필요가 있다.[12] 예를 들자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고 했던 것은 하느님이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것에 대한 예표이고, 모세가 광야에서 뱀에 물린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놋뱀을 든 것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한 십자가 사건에 대한 예표라는 식이다.[13]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14] 또한 아버지께서는 친히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 권한을 모두 아들에게 맡기셔서 (요한의 복음서 5장 22절)[15] 일반적으로 하느님이라고 번역되는 엘로힘(אלהים)이라는 단어가 쓰였다.[16]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17] 독일어의 weissen-kennen나 프랑스어의 savoir-connaître, 스페인어의 saber-conocer처럼 인도유럽어족 언어에서는 '알다'를 '지식/이론적으로 알다'와 '경험해서 알다' 두 가지로 분류하는 경우가 있다.중국어에서도 知道와 认识로 동일한 방식의 구별을 둔다.[18] 언변이 좋고 설교를 잘 했다고 한다. 그래서 '황금의 입'이라는 별칭이 붙었고, 한국 가톨릭에서는 '요한 금구(金口)'라고도 한다.[19] 만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라 벌을 당할 것이니[20]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누가복음 12장 47-48절)

다만 형량에 대한 참작은 있는 것으로 보인다.
[21]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22] 낮 열두시[23] 성경의 다른 부분들에는 성도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 구절들이 많다.[24]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25] 예를 들면 예수가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고 말하자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자기 살을 주어 우리에게 먹이겠는가?"라는 반응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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