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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의 명장 농서위정공(隴西威定公) 王德 | 왕덕 | |
위정(威定) | |
농서군공(隴西郡公) | |
최종직위 | 태보(太保)추증 |
이름 | 왕덕(王德) |
자 | 자화(子華) |
출신 | 북송(北宋) 통원군(通遠軍) 숙양채(熟羊砦) |
생몰 | 1087년 ~ 1154년 |
남송(南宋) |
남송의 명장으로 자는 자화(子華). 시호는 위정(威定)이다.
통원군(通遠軍) 숙양채(熟羊砦) 출신의 왕덕은 자신의 무용으로 북송 군대에 들어가 요고(姚古)의 부하가 되었다.
1125년, 북송과 금나라의 협공으로 요나라가 무너진 이후, 북송이 요나라를 정벌할 때 금나라와 맺었던 맹약을 제대로 지키지 않자, 금나라는 북송 조정의 행태에 분노하여 본격적으로 북송을 침공하기 시작한다. 당시 왕덕은 요고와 함께 회택(懷澤)에 주둔하였다가 요고의 명으로 정찰에 나서면서 금나라의 장군을 1명 죽이는 성과를 달성하였다. 요고가 다시 “다시 갈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왕덕은 16명의 기병을 이끌고 융덕부(隆德府)의 치소로 침입하여 금나라가 임명한 수장 요태사(姚太師)를 사로잡았으며, 좌우에서 왕덕의 길목을 가로막자 직접 수십 명을 죽였다. 요태사는 사로잡힌 후 조정에 압송되어 왕덕의 모습이 마치 야차와 같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왕덕은 이후 왕야차(王夜叉)라는 별명이 붙게 된다.
1127년, 북송의 수도인 개봉부가 함락당하고 태상황인 휘종과 황제 흠종은 물론 북송의 황족과 수많은 관료들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 끌려간다. 당시 휘종의 서자였던 강왕 조구는 강남에 있었기에 무사할 수 있었고, 신료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한 뒤 간신히 송나라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왕덕은 근왕병으로 유광세의 부하가 되어, 남송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욱(李昱)과 장우(張遇)를 토벌하는데 앞장선다.
이욱과 장우의 반란을 평정한 뒤 이성(李成)이라는 인물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덕은 유광세 휘하에서 이성을 토벌하는 임무를 맡았다. 왕덕은 이성의 반란 토벌에 앞서 1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채주(蔡州) 상채역(上蔡驛) 구교(口橋)에 이르러 이성의 형세를 살폈다. 때마침 이성과 조우하자, 이성은 왕덕의 군대를 보고 자신을 유인하는 것이라 판단하여 서진하려고 했지만, 왕덕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들을 추격한다. 이후 이성이 산병들을 수습하여 다시 유광세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는데, 이때는 유광세가 포위되어 거의 죽을 뻔했으나, 왕덕은 재빨리 유광세를 구출하여 귀환하였고, 군대를 다시 수습하여 이성에게 반격을 가하여 이성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이때 세운 공적으로 무략대부(武略大夫)로 제수되었다.
1129년, 천장(天長)에 주둔하고 있던 왕덕은 금나라가 다시 양주(揚州)를 침공해오자 선화(宣化)로 달아난다. 마침 반란을 일으킨 장욱(張昱)과 장언(張彦)이 화주(和州)를 포위하고 태수 장적(張績)이 왕덕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왕덕은 군대를 이끌고 장욱과 장언을 쳐부순다. 한편 묘부와 유정언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패배하고 복건 지역으로 달아나자, 왕덕은 한세충의 휘하에 들어가 반란을 일으킨 묘부와 유정언을 추격한다.
그런데 왕덕은 한세충의 휘하에 있는 것보다는 스스로 공명을 떨치고 싶어했고, 한세충은 왕덕을 휘하로 두고 싶어했다. 그래서 한세충은 진언장(陳彦章)을 파견하여 신주(信州)에서 왕덕을 가로막았으나, 진언장이 왕덕을 공격하자 왕덕은 곧장 진언장을 살해한다. 왕덕이 포성(浦城)에 이르러 묘우(苗瑀)를 죽이고 마유길(馬柔吉)을 사로잡아 행재로 압송한 이후, 한세충은 자신의 부하가 왕덕에 의해 살해되자 왕덕이 자신의 부하를 제멋대로 죽였다고 호소하였다. 시어사(侍御史) 조정(趙鼎)은 왕덕에게 마땅히 사형을 내려야한다고 건의했지만, 고종은 왕덕을 사면하고 대신 침주(郴州)로 유배시켰다.
얼마 안 있어, 왕덕은 다시 유광세에 의해 전군통제로 임명되고 신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왕염경(王念經)을 평정하는 임무에 파견된다. 왕덕은 임무를 맡던 도중에 유문순(劉文舜)이 요주성(饒州城)을 포위하는 것을 목격하자 곧장 이를 토벌하여, 유문순을 참형에 처하고 나머지는 모두 책임을 묻지 않았다. 왕덕은 자신이 요주에 있다는 것을 알고 왕염경이 대비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 판단하여 재빨리 왕염경의 반란을 평정한다. 이후 왕덕은 무현대부(武顯大夫), 영주(榮州) 자사가 더해졌다.
1130년, 유광세 휘하에서 도통제가 된 왕덕은 금나라의 침공에 맞서 단양으로 퇴각하자는 유광세를 설득하여 장강을 사수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1131년에는 수주(秀州)에서 반란을 일으킨 소청(邵靑)을 평정하고 중량대부(中亮大夫), 동주(同州) 관찰사로 승진하였다.
1133년, 강회를 선무하던 유광세가 건강으로 임지를 옮기면서 왕덕은 한세충의 지휘를 받았다. 왕덕은 이전에 한세충의 부하인 진언장을 제멋대로 죽인 일 때문에 한세충과 복잡한 관계에 있었다. 하지만 한세충은 오히려 왕덕의 손을 잡고 “공이 의협심이 많은 인물임을 알고 있으니, 지나간 사소한 일은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며 술자리를 열어주며 환대한 뒤에 헤어진다. 한세충은 이 해 겨울에 지공주(知鞏州), 희하난곽로(熙河蘭廓路) 병마검할(兵馬鈐轄)이 되었다.
1134년, 금나라 군대가 저주(滁州)를 함락시키자, 왕덕은 금나라 군대를 습격하고 상근(桑根)까지 추격하여 수많은 군사를 사로잡는다. 1136년, 유제(劉齊)의 황제인 유예가 30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동서로 남송을 침공해오자, 왕덕은 양기중(楊沂中), 장종안(張宗顔), 전사중(田師中) 등과 함께 유예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다. 이때 세운 공적을 통해 왕덕은 상주(相州) 관찰사로 제수되었다.
1137년, 왕덕은 합비에 주둔하면서 유광세가 통솔했던 군대를 맡았는데, 이때 역경(酈瓊)이 왕덕의 부장이 되었다. 하지만 역경은 자신이 왕덕의 지휘를 받는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결국 부하들을 이끌고 유예에게 귀순하였다. 1138년, 왕덕은 장준(張俊)의 지휘를 받게 되었고 예하 군대는 예승군(銳勝軍)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다.
1140년, 왕덕은 장준의 명령을 받고 숙주(宿州) 공격에 나서 전승하였으며 박주(亳州)까지 손에 넣는다. 왕덕은 장준에게 파죽지세를 타서 동도(낙양)을 수복하자고 건의하였지만 장준이 난색을 표했기 때문에 결국 철군한다. 왕덕은 일등공신으로 흥녕군 승선사, 용신위사상도지휘사, 시위친군마보군도우후를 역임하였으며 농서군후(隴西郡侯)로 책봉되었다.
1141년, 금나라의 장수인 완안종필이 남송을 침공한다. 완안종필의 침공에 맞서 왕덕은 회수를 사수할 것을 건의하였다. 장준이 유예하면서 결정하지 못하자, 왕덕은 오히려 더욱 굳게 요청하였고 장준이 이를 허락하면서, 왕덕은 선봉으로 출병하여 완안종필의 침공을 물리친다. 당시 완안종필의 침공에 맞섰던 유기(劉錡)는 왕덕을 흠모하여 신과 같은 위신을 듣고 지금 그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공을 형으로 섬기고 싶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왕덕은 농서군공으로 책봉되고 청원군(淸遠軍) 절도사, 건강부 주차어전제군 도통제, 절동복건 총관, 형남 부도통제를 역임하다가 1154년에 사망하였다. 왕덕은 검교소보, 소부로 추증되었다가 최종적으로 소부로 추증되었으며, 위정(威定)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125년, 북송과 금나라의 협공으로 요나라가 무너진 이후, 북송이 요나라를 정벌할 때 금나라와 맺었던 맹약을 제대로 지키지 않자, 금나라는 북송 조정의 행태에 분노하여 본격적으로 북송을 침공하기 시작한다. 당시 왕덕은 요고와 함께 회택(懷澤)에 주둔하였다가 요고의 명으로 정찰에 나서면서 금나라의 장군을 1명 죽이는 성과를 달성하였다. 요고가 다시 “다시 갈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왕덕은 16명의 기병을 이끌고 융덕부(隆德府)의 치소로 침입하여 금나라가 임명한 수장 요태사(姚太師)를 사로잡았으며, 좌우에서 왕덕의 길목을 가로막자 직접 수십 명을 죽였다. 요태사는 사로잡힌 후 조정에 압송되어 왕덕의 모습이 마치 야차와 같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왕덕은 이후 왕야차(王夜叉)라는 별명이 붙게 된다.
1127년, 북송의 수도인 개봉부가 함락당하고 태상황인 휘종과 황제 흠종은 물론 북송의 황족과 수많은 관료들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 끌려간다. 당시 휘종의 서자였던 강왕 조구는 강남에 있었기에 무사할 수 있었고, 신료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한 뒤 간신히 송나라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왕덕은 근왕병으로 유광세의 부하가 되어, 남송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욱(李昱)과 장우(張遇)를 토벌하는데 앞장선다.
이욱과 장우의 반란을 평정한 뒤 이성(李成)이라는 인물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덕은 유광세 휘하에서 이성을 토벌하는 임무를 맡았다. 왕덕은 이성의 반란 토벌에 앞서 1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채주(蔡州) 상채역(上蔡驛) 구교(口橋)에 이르러 이성의 형세를 살폈다. 때마침 이성과 조우하자, 이성은 왕덕의 군대를 보고 자신을 유인하는 것이라 판단하여 서진하려고 했지만, 왕덕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들을 추격한다. 이후 이성이 산병들을 수습하여 다시 유광세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는데, 이때는 유광세가 포위되어 거의 죽을 뻔했으나, 왕덕은 재빨리 유광세를 구출하여 귀환하였고, 군대를 다시 수습하여 이성에게 반격을 가하여 이성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이때 세운 공적으로 무략대부(武略大夫)로 제수되었다.
1129년, 천장(天長)에 주둔하고 있던 왕덕은 금나라가 다시 양주(揚州)를 침공해오자 선화(宣化)로 달아난다. 마침 반란을 일으킨 장욱(張昱)과 장언(張彦)이 화주(和州)를 포위하고 태수 장적(張績)이 왕덕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왕덕은 군대를 이끌고 장욱과 장언을 쳐부순다. 한편 묘부와 유정언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패배하고 복건 지역으로 달아나자, 왕덕은 한세충의 휘하에 들어가 반란을 일으킨 묘부와 유정언을 추격한다.
그런데 왕덕은 한세충의 휘하에 있는 것보다는 스스로 공명을 떨치고 싶어했고, 한세충은 왕덕을 휘하로 두고 싶어했다. 그래서 한세충은 진언장(陳彦章)을 파견하여 신주(信州)에서 왕덕을 가로막았으나, 진언장이 왕덕을 공격하자 왕덕은 곧장 진언장을 살해한다. 왕덕이 포성(浦城)에 이르러 묘우(苗瑀)를 죽이고 마유길(馬柔吉)을 사로잡아 행재로 압송한 이후, 한세충은 자신의 부하가 왕덕에 의해 살해되자 왕덕이 자신의 부하를 제멋대로 죽였다고 호소하였다. 시어사(侍御史) 조정(趙鼎)은 왕덕에게 마땅히 사형을 내려야한다고 건의했지만, 고종은 왕덕을 사면하고 대신 침주(郴州)로 유배시켰다.
얼마 안 있어, 왕덕은 다시 유광세에 의해 전군통제로 임명되고 신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왕염경(王念經)을 평정하는 임무에 파견된다. 왕덕은 임무를 맡던 도중에 유문순(劉文舜)이 요주성(饒州城)을 포위하는 것을 목격하자 곧장 이를 토벌하여, 유문순을 참형에 처하고 나머지는 모두 책임을 묻지 않았다. 왕덕은 자신이 요주에 있다는 것을 알고 왕염경이 대비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 판단하여 재빨리 왕염경의 반란을 평정한다. 이후 왕덕은 무현대부(武顯大夫), 영주(榮州) 자사가 더해졌다.
1130년, 유광세 휘하에서 도통제가 된 왕덕은 금나라의 침공에 맞서 단양으로 퇴각하자는 유광세를 설득하여 장강을 사수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1131년에는 수주(秀州)에서 반란을 일으킨 소청(邵靑)을 평정하고 중량대부(中亮大夫), 동주(同州) 관찰사로 승진하였다.
1133년, 강회를 선무하던 유광세가 건강으로 임지를 옮기면서 왕덕은 한세충의 지휘를 받았다. 왕덕은 이전에 한세충의 부하인 진언장을 제멋대로 죽인 일 때문에 한세충과 복잡한 관계에 있었다. 하지만 한세충은 오히려 왕덕의 손을 잡고 “공이 의협심이 많은 인물임을 알고 있으니, 지나간 사소한 일은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며 술자리를 열어주며 환대한 뒤에 헤어진다. 한세충은 이 해 겨울에 지공주(知鞏州), 희하난곽로(熙河蘭廓路) 병마검할(兵馬鈐轄)이 되었다.
1134년, 금나라 군대가 저주(滁州)를 함락시키자, 왕덕은 금나라 군대를 습격하고 상근(桑根)까지 추격하여 수많은 군사를 사로잡는다. 1136년, 유제(劉齊)의 황제인 유예가 30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동서로 남송을 침공해오자, 왕덕은 양기중(楊沂中), 장종안(張宗顔), 전사중(田師中) 등과 함께 유예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다. 이때 세운 공적을 통해 왕덕은 상주(相州) 관찰사로 제수되었다.
1137년, 왕덕은 합비에 주둔하면서 유광세가 통솔했던 군대를 맡았는데, 이때 역경(酈瓊)이 왕덕의 부장이 되었다. 하지만 역경은 자신이 왕덕의 지휘를 받는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결국 부하들을 이끌고 유예에게 귀순하였다. 1138년, 왕덕은 장준(張俊)의 지휘를 받게 되었고 예하 군대는 예승군(銳勝軍)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다.
1140년, 왕덕은 장준의 명령을 받고 숙주(宿州) 공격에 나서 전승하였으며 박주(亳州)까지 손에 넣는다. 왕덕은 장준에게 파죽지세를 타서 동도(낙양)을 수복하자고 건의하였지만 장준이 난색을 표했기 때문에 결국 철군한다. 왕덕은 일등공신으로 흥녕군 승선사, 용신위사상도지휘사, 시위친군마보군도우후를 역임하였으며 농서군후(隴西郡侯)로 책봉되었다.
1141년, 금나라의 장수인 완안종필이 남송을 침공한다. 완안종필의 침공에 맞서 왕덕은 회수를 사수할 것을 건의하였다. 장준이 유예하면서 결정하지 못하자, 왕덕은 오히려 더욱 굳게 요청하였고 장준이 이를 허락하면서, 왕덕은 선봉으로 출병하여 완안종필의 침공을 물리친다. 당시 완안종필의 침공에 맞섰던 유기(劉錡)는 왕덕을 흠모하여 신과 같은 위신을 듣고 지금 그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공을 형으로 섬기고 싶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왕덕은 농서군공으로 책봉되고 청원군(淸遠軍) 절도사, 건강부 주차어전제군 도통제, 절동복건 총관, 형남 부도통제를 역임하다가 1154년에 사망하였다. 왕덕은 검교소보, 소부로 추증되었다가 최종적으로 소부로 추증되었으며, 위정(威定)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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