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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목공(九原穆公) 王嶠 | 왕교 | |
시호 | 목(穆) |
작위 | 구원현공(九原縣公) |
성 | 왕(王) |
휘 | 교(嶠) |
자 | 개산(開山) |
생몰 | 불명 |
출신 | 태원군(太原郡) 진양현(晉陽縣) |
부모 | 부친 - 왕우(王佑) |
자녀 | 왕담(王淡) |
어릴 적부터 기풍이 있어 병주, 사주 두 주에서 왕교를 징소하려 했으나, 왕교는 관직에 나아가길 거부했다. 영가 말년에 천하가 혼란해지자, 왕교는 두 동생들을 데리고 장강을 건너 강동으로 피난갔다. 당시 건업(建鄴)을 진수하던 낭야왕 사마예가 그들을 맞이하며 말하길,
"왕우의 세 아들들이 마침 도착하였는데, 이들은 명덕한 자의 후예이고 품행도 갖추고 있으니 마땅히 관직을 주어야 한다. 또, 이들에게 돈 300,000만 전, 비단 300필, 쌀 500석, 친병(親兵) 20명을 주려 한다."
라 하고, 왕교를 세자의 동중랑 군사로 삼으려 했으나, 왕교는 관직을 이번에도 사양했다. 이후 민제 사마업, 우승상 남양왕 사마보의 부름도 받았지만, 왕교는 길이 험해 갈 수 없다며 이를 모두 거절했다.
건흥 3년(315년) 2월, 다시 낭야왕 사마예의 부름을 받고 수조속(水曹屬)에 임명되었다가 장산현령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태자중사인으로 승진했으나 왕교는 병을 핑계로 사양했다. 이후 대장군 왕돈의 요청에 의해 그의 참군으로 배속되었고, 구원현공(九原縣公)에 봉해졌다.
영창 원년(322년) 2월, 무창(武昌)에서 거병한 왕돈은 원제 사마예의 친위군을 모조리 격파하고 석두성(石頭城)에 주둔했다. 왕돈은 백성들이 사사로이 채주(蔡洲)의 쑥을 캐는 것을 막고자 휘하 관원들에게 그 의견을 물었는데, 당시 관리들은 반란에 막 성공한 왕돈이 두려워 감히 반대 의견을 내놓을 생각조차 못했다. 그때 왕교가 홀로 나서서 말했다.
건흥 3년(315년) 2월, 다시 낭야왕 사마예의 부름을 받고 수조속(水曹屬)에 임명되었다가 장산현령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태자중사인으로 승진했으나 왕교는 병을 핑계로 사양했다. 이후 대장군 왕돈의 요청에 의해 그의 참군으로 배속되었고, 구원현공(九原縣公)에 봉해졌다.
영창 원년(322년) 2월, 무창(武昌)에서 거병한 왕돈은 원제 사마예의 친위군을 모조리 격파하고 석두성(石頭城)에 주둔했다. 왕돈은 백성들이 사사로이 채주(蔡洲)의 쑥을 캐는 것을 막고자 휘하 관원들에게 그 의견을 물었는데, 당시 관리들은 반란에 막 성공한 왕돈이 두려워 감히 반대 의견을 내놓을 생각조차 못했다. 그때 왕교가 홀로 나서서 말했다.
"백성은 중원의 양식을 채집할 뿐입니다. 백성이 풍족하지 않으면 그 어느 군주가 풍족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의 벌목과 채집을 금함으로써 어떤 좋은 점이 있을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왕돈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왕교의 말을 듣고 기뻐하지 않았다.
영창 원년(322년) 3월, 왕돈이 주의, 대연의 명성과 인망이 높음을 꺼려, 결국 그들을 붙잡아 참살했다. 이에 왕교가 자리에 앉아 왕돈에게 간했다.
영창 원년(322년) 3월, 왕돈이 주의, 대연의 명성과 인망이 높음을 꺼려, 결국 그들을 붙잡아 참살했다. 이에 왕교가 자리에 앉아 왕돈에게 간했다.
"문왕이 평안할 수 있었던 것은 인재가 넘쳐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여러 명사들을 죽이면 어찌 스스로를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이를 듣고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왕돈은 당장 왕교를 죽이려 들었다. 왕돈이 무서워 아무도 제지하려 하지 않을 때, 왕돈의 오랜 친구인 사곤이 그를 겨우 뜯어말린 덕에 왕교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왕돈은 왕교를 영군장사에 임명하고, 자신의 휘하에서 쫓아내버렸다.
태녕 원년(323년) 4월, 명제 사마소가 왕돈을 평정하고, 왕교를 불러 중서시랑, 저작랑에 삼으려 했지만 왕교가 굳게 사양했다. 이후 월기교위, 이부랑, 어사중승, 비서감, 영본주대중정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함화(326년 ~ 334년) 초, 조정에서 왕교를 단양윤에 삼기 위해 의논했다. 이때 왕교가 병이 있어 직무에 적합하지 않다며 차라리 여릉군(廬陵)에 부임하길 청하니, 조정에서도 그의 청에 따라 여릉태수로 삼았다. 그러나 왕교의 집이 무척 가난하여 자력으로 노잣돈조차 마련하지 못하자, 조정은 왕교에게 비단 100필과 돈 100,000전을 하사하였다. 왕교는 여릉에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시호는 '목(穆)'. 아들 왕담(王淡)이 후사를 이었다.
그의 후손들은 동진에서 꽤 출세하여 왕담은 우위장군, 시중, 중호군, 상서, 광주자사를 역임했고, 손자 왕도세(王度世)도 표기장군을 지냈다고 한다.
태녕 원년(323년) 4월, 명제 사마소가 왕돈을 평정하고, 왕교를 불러 중서시랑, 저작랑에 삼으려 했지만 왕교가 굳게 사양했다. 이후 월기교위, 이부랑, 어사중승, 비서감, 영본주대중정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함화(326년 ~ 334년) 초, 조정에서 왕교를 단양윤에 삼기 위해 의논했다. 이때 왕교가 병이 있어 직무에 적합하지 않다며 차라리 여릉군(廬陵)에 부임하길 청하니, 조정에서도 그의 청에 따라 여릉태수로 삼았다. 그러나 왕교의 집이 무척 가난하여 자력으로 노잣돈조차 마련하지 못하자, 조정은 왕교에게 비단 100필과 돈 100,000전을 하사하였다. 왕교는 여릉에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시호는 '목(穆)'. 아들 왕담(王淡)이 후사를 이었다.
그의 후손들은 동진에서 꽤 출세하여 왕담은 우위장군, 시중, 중호군, 상서, 광주자사를 역임했고, 손자 왕도세(王度世)도 표기장군을 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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