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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오카다 다케시의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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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다 다케시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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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前 축구 감독 | ||
이름 | 오카다 다케시 岡田 武史 | Takeshi Okada | |
출생 | ||
국적 | ||
직업 | ||
신체 | 175cm | |
소속 | 선수 | |
감독 | ||
행정가 | ||
국가대표 | 24경기 1골 (일본 / 1980~1985) |
일본의 축구 선수 출신 축구 지도자 및 스포츠 행정가. 과거 1997~1998, 2007~2010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으며 2014년부터 J3리그 FC 이마바리의 구단주를 맡고 있다.
오카다는 선수시절 수비수로 활약했으며 연령별 대표 및 성인 국가대표로도 여러번 출전했다. 이후 선수 인생을 정리한 그는 감독으로서 일본 대표팀을 2번 맡아 일본 축구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 과정에서 부침이 많아서 비난을 많이 받았고 경질 위기에까지 몰리기도 했지만 첫 본선 출전과 16강 진출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후 일본 축구 대표팀이 한동안 부진해서 그의 지도력은 재평가 받었다.
국내에선 국민 MC 유재석을 닮은 외모로 알려져 있다. 실제 안정환도 요코하마 마리노스에서 선수 생활을 할 때 오카다 감독에게 "유재석 닮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안정환에게서 이 말을 들은 오카다 감독은 별로 안 좋아했다고 한다.기사 참조 언제나 학자 같이 두꺼운 안경을 쓰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카다는 선수시절 수비수로 활약했으며 연령별 대표 및 성인 국가대표로도 여러번 출전했다. 이후 선수 인생을 정리한 그는 감독으로서 일본 대표팀을 2번 맡아 일본 축구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 과정에서 부침이 많아서 비난을 많이 받았고 경질 위기에까지 몰리기도 했지만 첫 본선 출전과 16강 진출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후 일본 축구 대표팀이 한동안 부진해서 그의 지도력은 재평가 받었다.
국내에선 국민 MC 유재석을 닮은 외모로 알려져 있다. 실제 안정환도 요코하마 마리노스에서 선수 생활을 할 때 오카다 감독에게 "유재석 닮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안정환에게서 이 말을 들은 오카다 감독은 별로 안 좋아했다고 한다.기사 참조 언제나 학자 같이 두꺼운 안경을 쓰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카다는 1956년 (쇼와 31년) 8월 25일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산부인과 의사였다. 오카다는 초등학교 시절 오사카를 본거지로 하고 있던 프로야구 구단 난카이 호크스[1]가 운영하는 '난카이 호크스 어린이 모임'에 가입[2]하여 투수로 활동했고 호크스 응원을 위해 오사카 구장에 자주 들락거리던 야구 소년이었다. 그러나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야구부의 선후배 관계에 적응하지 못한 그는 자신이 야구 선수로서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당시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훌륭한 활약을 선보인 일본 축구 대표팀에 반해[3] 그때부터 축구로 진로를 변경했다. 그는 이 시기에 축구 선진국인 독일로 가서 축구 선수로 활동하고 싶어해 부모를 졸랐지만 주변의 만류에 결국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4]
오카다는 덴노지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축구를 계속했다. 덴노지 고등학교는 대학 예비학교였고 축구에는 전혀 실적이 없었다.[5] 하지만 그는 여기서 진가를 발휘해 청소년 대표팀에 발탁되었다.(이 시기 고교생으로서 청소년 대표팀에 뽑힌 이는 오카다를 포함한 3명 뿐이었다.) 그는 쿠웨이트에서 열린 선수권 대회에서 출전해 좋은 모습을 보였고 곧 덴노지 고등학교가 자랑하는 축구 선수가 되었다.
이후 오카다는 대학 시험을 봤지만 떨어지자 일년 재수하기로 했다. 이때 와세다 대학 축구부의 부장인 호리에 타다오가 "일년 재수해도 합격하는 것은 무리일 거다. 내가 추천할 테니 체육 전공을 응시해라."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오카다는 오히려 의지를 불태우며 열심히 공부해 마침내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에서 처음에는 축구부에 소속되지 않고 학내 축구 동호회 '이나호 키커즈'에 들어가 축구를 취미로 즐겼다. 그러다가 일본축구협회 관계자들이 축구 기술을 전문적으로 갈고 닦기 위해 축구부에 들어갈 것을 권유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여 6월에 축구부에 들어갔다.
그는 와세다 대학에서 1976년부터 1979년까지 재학하며 유니버시아드 일본 대표로 선정될 정도로 우수한 축구 선수로 각광받았고 2살 연상인 야에코와 대학 4학년 때 결혼하여 2남 1녀를 낳았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 오카다는 축구가 아닌 언론 쪽으로 취업하고 싶었지만 실현되지 않았고 1980년 후루카와 전기공업에 입사해 사원으로 일하는 한편 후루카와 축구부[6]에 입단했다. 그는 대학시절과 변함없이 축구 지능이 뛰어난 수비수로서 일본 리그에서 맹활약했다. 소속팀은 그의 활약을 앞세워 1985년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1986년 일본 팀 최초로 아시아 클럽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달성했다. 그는 JSL 리그에서 1980년부터 1990년까지 10년간 활동하며 통산 189경기에 출전해 9골을 기록했다.
한편, 오카다는 1980년 6월 1일 제펜컵 RCD 에스파뇰과의 경기에서 일본 대표 선수로 데뷔했다. 그후 그는 1982년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된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게 되었다. 당초 발표된 대표팀 명단에는 오카다의 이름은 없었다. 하지만 당시 대표팀 주장이었던 마에다 히데키가 부상을 당해 경기에 뛰지 못하게 되면서 오카다가 추가로 소집되었다. 대표팀은 이 대회에서 준결승까지 진출했지만 준결승전에서 이라크에 1:0으로 패배했다. 이때 오카다는 2경기에 기용되었다. 이후 1982년 11월 25일 한일전에서 골을 기록했는데, 이 골은 그의 대표팀 경력에서 그가 기록한 유일한 골이기도 하다.
1984년 LA 올림픽 최종 예선에서는 센터백으로서 활동할 예정이었지만 첫 경기를 치르기 사흘 전에 근육 경련을 겪는 바람에 경기에 뛰지 못했다. 이후 그는 종종 대표팀에 뽑히긴 했지만 주로 벤치를 달구기만 했다. 오카다는 대표팀에 뽑혀봐야 벤치나 달구는 상황에 질려 대표팀에서 활동할 동기를 잃고 1985년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일본 대표팀에서 24경기에 출전해 1골을 기록했다.
1990 시즌이 끝난 후 선수 인생을 은퇴한 오카다는 이듬해 후루카와 축구단의 코치로 취임하면서 지도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1992년 독일로 가서 코치 연수를 받았으며, 1993년 귀국 후 당시 J리그 열풍에 힘입어 프로 구단으로 변모한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의 코치로 선임되었다. 이 시기 그는 NHK 방송국의 BS1 채널에서 1994 FIFA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의 해설을 맡았다.
그러다가 1993년 10월 28일 이라크와의 최종 예선전에서 이른바 도하의 기적을 목도한 후 "이제서야 일본이 아시아 축구로서 어느 정도 수준이 비슷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본선 진출에 실패해서 너무나도 슬프다." 라는 발언을 했고, 해설 도중 슬픔의 눈물을 흘리면서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3년 10월 28일 이라크와의 최종 예선전에서 이른바 도하의 기적을 목도한 후 "이제서야 일본이 아시아 축구로서 어느 정도 수준이 비슷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본선 진출에 실패해서 너무나도 슬프다." 라는 발언을 했고, 해설 도중 슬픔의 눈물을 흘리면서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1995년, 오카다는 일본 축구 대표팀의 코치로 발탁되었다. 당초 오카다는 당시 대표팀 감독인 가모 슈와 안면이 없었고 지도자로서의 경험도 부족하다는 이유로 고사했지만 주변의 권유[7]에 결국 대표팀 코치를 맡기로 했다. 그런데 1997년 10월, 프랑스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일본 대표팀이 탈락 위기에 빠지자 가모 슈 감독이 경질되었다.[8] 일본 축구 협회는 가모 슈 감독을 경질한 후 '2년간 대표팀과 함께 하면서 대표팀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오카다를 감독 대행으로 임명했다. 갑작스럽게 감독으로 부임한 오카다는 자신이 감독을 잘 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감독 부임 후 치른 첫번째 경기인 우즈베키스탄전에서 패배 직전에 몰리던 도중 극적인 동점골로 무승부를 거두게 되자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후 축구 협회는 대회가 얼마 안남은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감독을 맡기는 것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그가 계속해서 감독을 맡게 했다.
조흐르바루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둔 후 기뻐하고 있는 일본 선수들
이후 오카다는 "초보 감독이 뭘 할 수 있겠냐"는 언론의 비웃음을 뒤로 한 채[9] 대표팀을 제대로 구성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특히 그는 가모 슈 감독에 의해 대표팀에서 제외된 나카야마 마사시 등을 다시 소집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그 결과 일본 대표팀은 살아났고 아시아 지역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후 1997년 11월 16일, 일본 대표팀은 말레이시아 조호르바루에서 이란과 맞붙었다. 연장전까지 치른 이 승부는 일본의 3:2 승리. 이로서 일본은 역사상 최초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이후 일본인들은 이날의 경기를 조호르바루의 환희라고 부르고 있다.
일본 대표팀을 극적으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시킨 오카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정식으로 대표팀 감독에 부임했다. 그러나 1998 프랑스 월드컵 본선 직전에 치른 평가전에서 대표팀 주전 선수인 미우라 카즈요시와 키타자와 츠요시가 부진하자,[10] 오카다는 이들을 스쿼드에서 제외시킴으로서 거센 비판을 받았다. 오카다는 월드컵 본선에서 1승 1무 1패로 승점 4점을 획득해 16강에 진출하겠다고 표명했으나 오히려 3전 전패를 당하고 조별 예선에서 탈락하며 일본의 통산 첫 번째 월드컵을 마무리했다.[11] 대회 종료 후, 오카다는 월드컵 본선에서의 부진에 책임을 지고 감독직을 사임했다.
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려난 후, 오카다는 반년 동안 위성 방송 WOWOW에서 이탈리아 세리에A 중계 해설을 맡았고 당시 유벤투스를 지휘했던 마르셀로 리피를 취재해 그로부터 축구관 및 축구 전술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던 1999년 J2리그로 강등된 콘사도레 삿포로의 감독에 취임했다. 전년도에 월드컵에서 일본 대표팀을 이끌었던 그의 부임해 주목도 및 기대치가 높았으나 취임 첫해엔 J1리그 승격 경쟁에 가세하였으나 승격에 실패하고 5위를 거두는 선에 머물렸다. 그후 오카다는 심기일전을 위해 경기를 지휘할 때 항상 착용했던 정장을 벗고 팀 유니폼을 착용했으며 팀의 전술, 선수들의 프로 의식 등을 개선하기 위해 과감한 개혁을 착수했다. 그 결과 취임 2년째인 2000년, 그는 2위 우라와 레즈와 승점 12점차 1위를 질주하며 J2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J1리그에 당당히 입성했다.
2001시즌, 콘사도레 삿포로는 오카다의 지휘하에 전기 리그 8위(6승 3무 6패로 승점 21점), 후기 리그 14위(4승 2무 9패 승점 13점)의 성적을 거둬 최종 순위 11위를 기록, J1리그 잔류에 성공했다. 또한 오카다는 에메르손, 반도 류지, 야마세 코지, 곤노 야스유키 등 젊은 인재들을 발굴해 삿포로의 미래를 밝게 했다. 하지만 오카다는 시즌이 끝난 후 감독직에서 물러나 해설자가 되어 해외 축구 경기 중계를 도맡았다.
오카다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NHK 방송국의 축구 해설위원을 맡았다. 월드컵이 끝난 후 일본 축구 대표팀을 이끌었던 필립 트루시에 감독이 사임하자, 세간에서는 오카다가 차기 대표팀 감독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그는 대표팀 감독에 부임하지 않았고 2003년 요코하마 F. 마리노스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취임 1년차에 전기 리그에서 우승하고 여세를 몰아 후기 리그도 우승하면서 전후기 리그 통합 우승이라는 대업을 이루었다. 또한 2004년에도 안정환의 활약을 앞세워 전기 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J리그 역사상 최초의 3단계 리그 연패의 위업을 이루었다.
2005년에도 우승할 것이라는 전망이 대세였지만 AFC 챔피언스 리그와 A3 챔피언스컵을 동시에 치러야 하는 등 빽빽한 일정에 시달린 데다 A매치에서 주전 선수들이 여려 명 부상을 당하면서 순위가 떨어져 결국 9위에 그치고 말았다. 시즌이 끝난 뒤 사람들은 그가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임할 것이라고 관측했지만 요코하마 보드진은 그를 계속 신임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오카다는 2006 시즌에 개막 4연승을 달렸지만 그후 팀 컨디션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18라운드 종료 시점에서 자력 우승의 가능성이 소멸되고 말자 19라운드 오미야 전을 치른 후 사의를 표명했다. 결국 2006년 8월 24일, 그는 3년 반에 걸친 요코하마의 지휘를 끝마치고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오카다는 자신이 사임하게 된 이유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가족을 잃은 것과 성적 부진에 따랐다고 밝혔지만 그 이면엔 팀 전력 강화 정책을 둘러싼 프런트와의 불화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나는 지도자로서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고 밝히며 자신의 사임엔 성적 부진 이외에 다른 원인도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그 후 일본축구협회의 특별이사로 활동 중이던 오카다는 2007년 11월에 일본 대표팀을 이끌고 있던 이비차 오심 감독이 급성 뇌경색으로 입원하면서 대표팀을 이끄는 것이 어렵게 되자 오노 츠요시 일본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의 선택을 받아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할 것을 권유받았다. 그 무렵 우라와의 홀거 오지크 감독도 적임자로 거론되었지만 오노는 오카다를 선택했다. 훗날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이비차 오심 감독이 쌓아온 토대 위에 새로운 개성을 쌓아야 하고 강렬한 리더십과 구심력,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런 인물은 오카다 뿐이었다."고 설명했다.
2007년 12월 7일,[12] 오카다는 일본 축구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해 2008년부터 대표팀을 이끌게 되었다. 월드컵 통산 성적이 0승 3패인 감독이 다시 같은 국가대표팀 감독을 하게 된 것은 세계 축구 역사상 최초였다. 그는 옛날에 대표팀 감독을 맡았을 때는 팀 트레이닝복을 입어 세간의 화제를 끌었지만 2기 임기부터는 축구협회장의 권고에 따라 정장을 착용한 채 대표팀을 이끄는 경우가 많아졌다. 물론 악천후 때는 저지 도는 그라운드 코트 차림으로 지휘했지만 말이다.[13]
2009년 6월 6일 2010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6차전인 우즈베키스탄 원정에서 일본 대표팀은 1:0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서 일본 대표팀은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어 조 2위를 기록, 4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달성했다. 하지만 그는 이 경기에서 종료 직전에 심판에게 이의를 제기하다가 퇴장당했는데, 이 퇴장은 그의 감독 인생 사상 최초였다.
그 후 그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했다.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조 편성에서 네덜란드, 덴마크, 카메룬과 한 조에 속하게 된 것이다. 이에 일본 전역은 절망에 휩싸였다. 사실상 네덜란드는 넘어가더라도 덴마크만 보더라도 일본이 쉽사리 16강을 장담할 수 없는 죽음의 조 수준이었다. 전통의 강호 네덜란드는 당시 라파엘 판데르파르트, 로빈 반 페르시, 웨슬리 스네이더, 지오바니 판브롱크호르스트, 마르크 판보멀 등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스타군단이었고, 덴마크도 데니스 롬메달과 욘 달 토마손이라는 베테랑 듀오가 버티고 있었던 데다가 당시에는 아스날 FC의 차기 공격수(...)로 평가받던 니클라스 벤트너가 있었다. 카메룬에는 트레블을 이룩했던 아프리카 최고의 스트라이커 사무엘 에투가 있었다. 반면 애초에 일본은 대등하게 맞설 전력도 없었고 전 세계적으로 위상이 높은 선수도 딱히 없었기 때문에 경우의 수를 바라보기에도 벅찬 상황이었다. 비단 한국 언론들 뿐만 아니라 스기야마 시게키 등의 자국 축구 평론가들도 일본 대표팀은 1승도 하지 못한 채 조별예선을 탈락할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또한 2010년 2월, 일본 대표팀이 자국에서 열린 2010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중국, 홍콩, 대한민국 등과 순위 경쟁을 벌여 3위에 그치는 수모까지 당했다.[14] 수난은 골때리게도 이게 끝이 아니어서 2010년 4월 7일에는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3:0으로 패배하기까지 했다. 이에 1000여 명에 달하는 일본인들은 오카다가 축구 대표팀을 잘못 이끌고 있다며 그를 당장 해임할 것을 요구하는 연명 서명서를 제출했다. 게다가 이후 대한민국, 잉글랜드, 코트디부아르 등에게 패배를 당하는 등 월드컵 본선 경기 전까지 평가전 4연속 패배라는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 이에 일본 축구팬들과 언론사들은 대표팀의 한심한 골결정력과 오카다의 잘못된 선수 기용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야후! JAPAN이 실시한 인터넷 설문조사에서 그를 지지하는 이들의 비율은 불과 16%였다. 심지어 오카다가 월드컵 도중 해임될 가능성도 높다는 예측도 제기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카다는 2010 월드컵의 목표를 4강으로 설정했지만, 이미 조 추첨에서부터 조가 잘못 걸린 것도 안 그래도 억울해 죽겠는데 동아시안컵과 평가전들에서도 하나같이 영 좋지 못한 경기력으로 일관하자 사람들은 그의 목표를 비현실적이라며 당장 꿈 깨라고 혹평을 퍼부었다. 이렇듯 오카다는 자국 축구 팬들과 언론의 불신과 저평가에 시달린 채 결전의 땅 남아공으로 향해야 했다.
그러나 오카다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었다. 2010년 6월 14일에 치러진 카메룬과의 월드컵 예선 1차전에서 일본은 전반전에 넣은 한 골을 끝까지 잘 지켜내며 1:0 신승을 거둔 것이다. 이 승리는 일본의 원정 월드컵 역사상 최초의 승리였다. 그후 6월 19일에 열린 네덜란드 대표팀과의 경기에서는 비록 1:0으로 패했지만 경기력만큼은 네덜란드를 압도했다고 호평을 받았고, 6월 24일에 열린 덴마크와의 3차전에서는 전반전에 2골을 넣은 후 시종일관 리드를 지키며 3:1로 완승했다. 이로서 일본은 조별 예선을 2승 1패, 승점 6점을 확보하며 원정 월드컵 대회에서 최초로 16강에 진출했다. 이로서 오카타 다케시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끌었고,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에 성공(9위)하면서 도하의 비극을 보며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안타까워했던 감정을 어느 정도 털어버렸다.
당시 오카다 감독이 조별리그에서 썼던 전술은 이러했다.
1. 혼다 케이스케가 선제골을 넣는다.
2. 잠근다.
3. 상대팀은 뚫어보려다 지친다.
4. 일본은 엔도나 오카자키가 추가골을 넣으면서 점수를 벌린다.
5. 일본 축구 팬들 외에 나머지 국가들의 축구 팬들은 TV로 경기를 시청하다가 자고 있다(...).
이러한 위업을 목도한 국내외 언론은 그때까지 보여주던 비판적인 자세를 탈피하고 오카다의 지휘를 극찬했다. 또한 그들은 조별 예선에서 보여준 일본 대표팀의 탄탄한 수비력에 대해 이탈리아의 카테나치오를 본떠 "오카나찌오"라는 별칭을 부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인터넷 게시판과 트위터 상을 중심으로 오카다에 대해 비난과 불신을 표명했던 사람들의 '사과' 표현이 잇따랐다. 급기야 "오카, 미안해요"라는 말은 2010년 신어, 유행어 대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이후 오카다는 일본 축구 사상 최초의 월드컵 8강 진출을 목표로 삼아 파라과이와 맞붙었다. 이 경기는 경기 종료까지 0:0으로 결판이 나지 않았고 연장전에서도 승부가 나지 않아 결국 승부차기로 승부를 겨루게 되었다. 결과는 일본의 3:5 패배. 이리하여 일본은 8강에 진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그를 명장이라고 칭송했다. 그의 대표팀 감독으로서의 계약은 2010 월드컵이 마지막으로 만료되게 되어 있었고, 오카다는 파라과이와의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계약을 연장할 생각이 없으며 더 이상 대표팀 감독을 맡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에 인터넷 유저들 사이에선 오카다의 두터운 인망과 풍부한 인맥에 주목해 그를 일본축구협회 회장으로 선임시키자는 주장이 일기도 했다.[15]
오카다는 2010년 7월 25일에 열린 일본축구협회 임원 회의에서 일본축구협회 이사에 취임했다. 이는 축구협회 회장으로 새로 부임한 오구라 준지의 천거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이사로 2년 간 일하다가 2012년 6월 퇴임했다. 또한 2010년 8월에는 WOWOW의 축구 해설자가 되어 스페인 라리가 중계 해설을 담당했다. 이 시기에 어느 타국으로부터[16] 대표팀 감독 제의를 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 2010년 11월에는 아시아 축구 연맹으로부터 AFC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했다.
2012년, 오카다는 중국 슈퍼리그의 항저우 뤼청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성적도 12위로 썩 나쁘지만은 않았고 서포터의 지지를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 선수 기용 문제 등으로 구단주와 잦은 마찰을 빚었다.
결국 2013년 11월 6일, 계약을 1년 남기고 감독 자리를 사퇴했다. 이후 그는 당분간 감독을 맡지 않겠다고 밝히고 야인의 삶으로 돌아갔다.
결국 2013년 11월 6일, 계약을 1년 남기고 감독 자리를 사퇴했다. 이후 그는 당분간 감독을 맡지 않겠다고 밝히고 야인의 삶으로 돌아갔다.
미드필드의 세밀한 패스워크와 에이스 플레이메이커에 의한 공격 전개를 선호하는 일본 축구계에서는 이례적으로 피지컬과 좁은 수비 포진을 중시하는 실리주의적인 전술을 펴는 감독이다. 공격진에도 활동량이 많은 선수를 선호하여 첫 월드컵인 1998년에는 나카야마 마사시를 주전으로 기용했으며, 2003년 요코하마에 부임할 때는 당시 일본 공격수 치고는 제공권 장악에 능한 구보 다쓰히코(181cm)를 영입하고 울산 현대에서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재영입한 유상철을 경기 중 수시로 최전방으로 끌어올려 피지컬 싸움을 벌였다.[17]
한편 라커룸을 선수들이 직접 청소하게 하는 등 선수 규율을 중시하는 편이기도 하다.
한편 라커룸을 선수들이 직접 청소하게 하는 등 선수 규율을 중시하는 편이기도 하다.
2014년 2월, 오카다는 딜로이트 토마츠 컨설팅의 특임 수석 고문으로 취임했다. 또한 2014년 일본 내각의 '선택하는 미래' 위원회 산하 그룹에 위촉되어 활동하였다.
2014년 11월에는 당시 시코쿠 축구 리그에 참가하던 FC 이마바리의 운영 회사에 출자하고 클럽 구단주로 취임했다. FC 이마바리는 이후 2017년에 JFL, 2020년에 J3리그로 승격했으며, 오카다는 '오카다 메소드'를 자칭하여 팀 구조를 선전하고 있다.
2016년 3월에는, 일본축구협회 부회장에 취임했다. 이 때 축구협회에 들어가면서 더 이상의 감독 생활은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는데, 마침 바히드 할릴호지치 감독이 협회와 선수단과의 갈등이 심했고, 성적도 신통치 않아 대표팀 감독으로 다시 들어갈 수도 있다는 예상도 나왔다. 결국 2018년 4월 9일 할릴호지치 감독이 전격 경질되었는데 후임은 현 일본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인 니시노 아키라가 들어가면서 예상은 빗나갔다.
이 때 본인의 의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으로써 S급 코칭 라이선스[18]의 갱신을 하지 않고 반납하여 감독직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JFA 부회장직은 2018년 3월에 퇴임하고 시니어 어드바이저직으로 옮겨갔다가 2022년 재취임하였다. 2024년 한참 후배인 미야모토 츠네야스가 회장에 취임한 후에도 부회장직을 계속 맡게 되었다.
2021년 9월에는 농구 리그인 B.리그의 이사로 선임되었다. 타종목이긴 하나 B.리그는 전신 bj리그부터 J리그를 모델로 해온 리그이고 통합 리그 창설 때는 J리그 초대 회장 가와부치 사부로를 이사장으로 모시기도 했을 정도로 J리그와 친밀하다.
2014년 11월에는 당시 시코쿠 축구 리그에 참가하던 FC 이마바리의 운영 회사에 출자하고 클럽 구단주로 취임했다. FC 이마바리는 이후 2017년에 JFL, 2020년에 J3리그로 승격했으며, 오카다는 '오카다 메소드'를 자칭하여 팀 구조를 선전하고 있다.
2016년 3월에는, 일본축구협회 부회장에 취임했다. 이 때 축구협회에 들어가면서 더 이상의 감독 생활은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는데, 마침 바히드 할릴호지치 감독이 협회와 선수단과의 갈등이 심했고, 성적도 신통치 않아 대표팀 감독으로 다시 들어갈 수도 있다는 예상도 나왔다. 결국 2018년 4월 9일 할릴호지치 감독이 전격 경질되었는데 후임은 현 일본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인 니시노 아키라가 들어가면서 예상은 빗나갔다.
이 때 본인의 의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으로써 S급 코칭 라이선스[18]의 갱신을 하지 않고 반납하여 감독직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JFA 부회장직은 2018년 3월에 퇴임하고 시니어 어드바이저직으로 옮겨갔다가 2022년 재취임하였다. 2024년 한참 후배인 미야모토 츠네야스가 회장에 취임한 후에도 부회장직을 계속 맡게 되었다.
2021년 9월에는 농구 리그인 B.리그의 이사로 선임되었다. 타종목이긴 하나 B.리그는 전신 bj리그부터 J리그를 모델로 해온 리그이고 통합 리그 창설 때는 J리그 초대 회장 가와부치 사부로를 이사장으로 모시기도 했을 정도로 J리그와 친밀하다.
일본 국가대표팀 2기 감독 재직 시절 워낙에 욕을 많이 먹어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지 월드컵이 마무리 되는대로 은퇴하고 농부가 될거라는 폭탄발언을 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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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전신.[2] 이 당시 함께 어린이 모임 멤버로 뛰던 선수 중 한명이 그와 같은 성씨이자 한신 타이거스의 1985년 첫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한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오카다 아키노부였다. 둘은 와세다대학 동기이기도 하다.[3] 이 대회에서 일본은 동메달 결정전에서 멕시코를 2-0으로 꺾고 아시아 최초로 올림픽 축구 메달을 획득했으며, 가마모토 쿠니시게는 7골을 넣으며 득점왕까지 배출하였다.[4] 1970년대에 일본에는 아직 프로축구가 생겨나기 전이었으며, 기껏 만든 실업축구 일본 사커 리그(JSL)도 바닥을 기던 시기이다.[5] 오카다의 에세이에 의하면 감독은 경기 때만 나타났기 때문에 평소 운동은 주장인 오카다가 지도했다고. 여담으로 일본 고교는 입학성적 순위를 몇몇 입시기관에서 추정 공표하는데 덴노지 고교는 일본 전국에서 10위 내외로 잡힌다.[6] J리그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 지바의 전신이다. 지금은 1-2부를 오가는 그저그런 팀이지만 과거 일본 사커 리그(JSL) 이래의 명문으로, 현 14대 다지마 고조를 포함해 역대 4명의 일본축구협회(JFA) 회장이 선수 또는 클럽스태프로 후루카와를 거쳤다. JFA 회장은 1990년대 이래 묘하게 후루카와 출신자와 미쓰비시 중공업 출신자가 돌아가며 맡고 있다.[7] 원래 가모는 대표팀 전전임 감독인 한스 오프트 밑에서 코치를 맡았던 제프 감독 기요쿠모 에이준을 발탁하려 했다. 그러나 기요쿠모가 고사하면서 자기 밑의 오카다를 추천한 것.[8] 당시 도쿄 대첩에서 충격의 역전패를 당했었고, 이후 카자흐스탄에게 알마티 원정에서 1:1로 무승부를 거두면서 플레이오프 출전권도 위태로운 상태였다.[9] 후일담에 의하면 집 전화번호가 전화번호부에 실려 있는 탓에(한국도 1990년대 초반까지는 개인 번호가 기재된 전화번호가 배포되었다) 온갖 협박을 받고 집앞에 경찰차가 상주해 있을 정도였으며, 예선 마지막 경기(10라운드 카자흐스탄전 혹은 이란과의 플레이오프 3차전)를 앞두고는 심지어 도피 이민을 고민했다고 한다.[10] 사실 미우라는 이미 월드컵 예선전 단계에서 오카다의 신임을 잃고 있었다. 최종예선 우즈베키스탄전에 네 골을 몰아넣은 후 줄곧 침묵한 득점력도 득점력이지만 감독 지시에 절대 복종하지 않는 자세가 지적된 것. 실제 이란과의 플레이오프에서는 오카다 감독이 프리킥을 나카타 히데토시와 나나미 히로시가 전담하도록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후반 7분경 1-1 동점상황에서 얻은 박스 바로 바깥 프리킥을 미우라가 멋대로 차서 그것도 홈런으로 날려버리는 바람에 분노한 오카다가 미우라를 내리고 워밍업도 하지 못한 조 쇼지로 교체했을 정도이다. 다만 하드워커 스타일인 기타자와 츠요시는 재발탁 이후 예선전에서 거의 풀타임을 기용하면서 기회를 줘 봤으며 훗날 오카다가 요코하마에 영입하려 했을 정도로 좋은 인상을 가졌으나, 이 시기에 로페스 바그너나 조 쇼지와는 다르게 지역예선에서 기회를 받을 때마다 지속적으로 부진을 했기 때문에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11] 다만 경기 내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3전 전패이긴 했어도 강호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에게 골을 내주면서 0:1, 크로아티아에게 0:1, 자메이카에 1:2로 패하는 등 모두 한 골차 패배였다. 나카야마 마사시의 1득점에 그친 빈공과 함께 충분히 이길 자메이카에게 패했던 것 때문에 크게 비난을 받았는데, 이후 일본은 1999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 킹스컵 대회에서 자메이카를 4:0으로 완파하고 설욕했다.[12] 여담으로, 우연의 일치인지 이 날은 이웃나라 대한민국도 허정무가 당시 5개월 째 공석이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에 임명되면서 허정무 역시 오랜만에 국대 감독 자리에 복귀하게 되었다.[13] 2010년대 들어와서는 축구감독들이 트레이닝복 등 편안한 복장을 하는 것이 흔해졌으나, 이전에는 특히 유럽과 일본에서 감독은 정장 또는 단복 착용이 기본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연이어 무더운 지역에서 월드컵이 열린 2002년 ~ 2014년 동안에 점차 정장 차림 감독이 줄어드는 시점에 반대로 정장을 입게 되었다는 것.[14] 한일전에서 일본이 패하고 있는데 한국인은 울고 일본인은 웃고 있는 짤방이 나온 게 바로 이 대회이다.[15] 상기한 바와 같이 오카다는 일본축구협회 회장의 반을 배출한 후루카와전공 출신이다. 실제 그 때 회장으로 취임한 오구라 준지 또한 후루카와전공 스태프 출신.[16] 그 자신은 어느 나라인지 밝히지 않았지만, 미디어에서는 카타르일 것이라고 추측했다.[17] 이 시즌 유상철이 받은 등번호는 2번이었다. 그러나 이미 한국에서 득점왕을 차지하고 이전 일본 생활에서 경기당 0.5골 이상 기록했던 유상철을 안 써먹을 이유가 없었다.[18] 프로팀 이상의 감독을 맡을 수 있는 AFC, 대한축구협회의 지도자 최고 라이선스인 P급 자격증과 동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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