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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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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
본관 | |
재임기간 | 제7대 건설교통부장관 |
1947년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면(현 삽교읍)에서 태어났다. 예산농업고등학교(현 국립공주대학교 예산캠퍼스),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대산건설을 경영하였다. 한편 대한청년회의소 등의 단체에 몸담았으며 오성장학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88년 민주정의당 중앙위원에 임명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충청남도 예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통일국민당 박병선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같은 해 민주자유당 부대변인에 임명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연합 조종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조종석의 당선 무효로 치러진 1997년 재보궐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 1998년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였다. 당시 상황변화론이라는 논리를 꺼냈는데, (1997년 재보궐 당시에는) 3김정치 타파의 대의명분하에 자민련을 공격했지만, (3김 중 하나인)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오장섭은 후일 인터뷰에서 당시 자민련은 DJ가 아니라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기로 하고 JP와 오장섭 의원 사이에서 이야기가 끝난 상황이었는데, 한나라당 내부에서 이를 반대하였고 이로 인해 JP가 낙동강 오리알이 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여 이에 책임을 지는 모습으로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자민련으로 간 것이라고 변명했으나, 대선 전이 아니라 대선을 치른 후 당적을 변경한만큼 궁색한 변명에 불과하다. 오장섭이 당선된 1997년 7.24 재보궐선거 당시 이미 DJP연합은 가시권에 들어선 상태로 새정치국민회의와 자민련이 비공식적인 연합공천을 하고 있었기에, JP와 오장섭 사이에 이야기가 끝난 상황이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오장섭이 자민련으로 간 진짜 이유는 그가 운영하던 대산건설이 1997년 말 부도가 나서 회사의 파산을 면하기 위해 갔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회창은 훗날 발간한 회고록에서 당시 탈당한 의원들의 명단을 덤덤히 적어나가면서도 오장섭에 대해서는 특히 충격이 컸다고 따로 언급하였는데, 그 이유는 오장섭이 자민련 본진인 충남 한복판 예산에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상 이회창 버프 덕분이었기 때문이다.[5]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01년 초까지 자유민주연합 원내총무를 역임하였다. 2001년 3월부터 8월까지는 DJP 연합의 몫으로 건설교통부장관을 역임하였다. 이후 같은 해부터 2002년까지 자유민주연합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유민주연합을 탈당하여 한나라당에 복당하려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같이 탈당한 자민련 의원들은 모두 복당이 허용된 것을 보면 이회창의 원한이 매우 컸다고밖에...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남도 홍성군-예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예산에서는 1위를 차지했지만 홍성에서 겨우 3.78%의 득표율에 그치면서 한나라당 홍문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철새의 말로
이 후 소리소문없이 정치를 은퇴했고,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충청향우회 총재를 지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충청남도 예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통일국민당 박병선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같은 해 민주자유당 부대변인에 임명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연합 조종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조종석의 당선 무효로 치러진 1997년 재보궐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 1998년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였다. 당시 상황변화론이라는 논리를 꺼냈는데, (1997년 재보궐 당시에는) 3김정치 타파의 대의명분하에 자민련을 공격했지만, (3김 중 하나인)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오장섭은 후일 인터뷰에서 당시 자민련은 DJ가 아니라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기로 하고 JP와 오장섭 의원 사이에서 이야기가 끝난 상황이었는데, 한나라당 내부에서 이를 반대하였고 이로 인해 JP가 낙동강 오리알이 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여 이에 책임을 지는 모습으로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자민련으로 간 것이라고 변명했으나, 대선 전이 아니라 대선을 치른 후 당적을 변경한만큼 궁색한 변명에 불과하다. 오장섭이 당선된 1997년 7.24 재보궐선거 당시 이미 DJP연합은 가시권에 들어선 상태로 새정치국민회의와 자민련이 비공식적인 연합공천을 하고 있었기에, JP와 오장섭 사이에 이야기가 끝난 상황이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오장섭이 자민련으로 간 진짜 이유는 그가 운영하던 대산건설이 1997년 말 부도가 나서 회사의 파산을 면하기 위해 갔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회창은 훗날 발간한 회고록에서 당시 탈당한 의원들의 명단을 덤덤히 적어나가면서도 오장섭에 대해서는 특히 충격이 컸다고 따로 언급하였는데, 그 이유는 오장섭이 자민련 본진인 충남 한복판 예산에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상 이회창 버프 덕분이었기 때문이다.[5]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01년 초까지 자유민주연합 원내총무를 역임하였다. 2001년 3월부터 8월까지는 DJP 연합의 몫으로 건설교통부장관을 역임하였다. 이후 같은 해부터 2002년까지 자유민주연합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유민주연합을 탈당하여 한나라당에 복당하려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같이 탈당한 자민련 의원들은 모두 복당이 허용된 것을 보면 이회창의 원한이 매우 컸다고밖에...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남도 홍성군-예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예산에서는 1위를 차지했지만 홍성에서 겨우 3.78%의 득표율에 그치면서 한나라당 홍문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 후 소리소문없이 정치를 은퇴했고,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충청향우회 총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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