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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견씨 족보》에서 등장한 주장. 견훤과 아자개가 신라 왕실 후손설뿐 아니라 백제 왕실인 부여씨의 후손으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의 직계 8대손이라는 다른 기록도 있는데, 이는 견훤이 백제를 다시 세운 후 한 조작일 가능성이 크다. 밑의 진흥왕 및 사벌국 관련설에서 보듯 처음에는 먼 조상할머니가 소비 부여씨일 개연성이 높은 백숭부인이었음을 강조하다가, 본인들이 생각하기에도 이게 영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여 내세웠을 것으로 보인다.
견훤과 아자개의 집안이 정말로 백제인이 조상이었을 개연성도 아주 없진 않으나 가능성은 높지 못하다. 나당전쟁을 전후로 신라가 백제의 심장부나 다름없던 웅진도독부의 크고 작은 성읍 82성(城)을 취해 일대의 백제 지배층과 백성들을 신라 내지(內地)로 이주시켰다곤 하지만 전근대에 지배지에 거주하는 인구 전체를 그렇게 모조리 옮기는 건 불가능했다. 신라보다 압도적으로 상황이 유리했던 아시리아도 실제로는 이스라엘에게 그렇게는 못했던 게 단적인 예다. 그리고 원신라 지역으로 이주된 백제 유민이 아무리 많다고한들 원신라 지역 주민보다 많을 수는 없었고, 시간이 지나 결국은 동화되었을 개연성이 크다.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서라벌에 옛 고구려 유민, 백제 유민이 가장 많이 사민되었으나 훗날 신라의 지배력이 무너진 상황에서 들불처럼 반란이 일어나 백제부흥운동, 고구려부흥운동으로까지 번질 때도 서라벌은 조용했기 때문이다.
신라인이 옛날 적국이었던 나라를 부흥시키는 발상을 하기 어렵다는 건 동서고금 지배국의 핵심 지배층이었는데도 자신한테 유리하면 얼마든지 망한 나라의 유민들을 선동해서 복국 운동했던 사례들에서 부정된다. 훗날 고려시대에 일어난 신라부흥운동은 아예 당대 집권자인 이의민과 내통하기까지 했다. 구 백제 영토에서 봉기한 김헌창이 국호로 장안국을 내세웠던 건 역적 주제에 충성심이 강해 반란하는 와중에도 양심을 지킨 게 아니라, 김헌창이 구 백제 영토만 다스리고 끝낼 생각이 없었고 실제로도 가야는 물론 원신라 지역까지 손을 뻗는 와중에 삼국 중 어느 한 나라의 국호를 채택해버리면 그 바깥에서는 호응을 사기 어려울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3]
견훤과 아자개의 집안이 정말로 백제인이 조상이었을 개연성도 아주 없진 않으나 가능성은 높지 못하다. 나당전쟁을 전후로 신라가 백제의 심장부나 다름없던 웅진도독부의 크고 작은 성읍 82성(城)을 취해 일대의 백제 지배층과 백성들을 신라 내지(內地)로 이주시켰다곤 하지만 전근대에 지배지에 거주하는 인구 전체를 그렇게 모조리 옮기는 건 불가능했다. 신라보다 압도적으로 상황이 유리했던 아시리아도 실제로는 이스라엘에게 그렇게는 못했던 게 단적인 예다. 그리고 원신라 지역으로 이주된 백제 유민이 아무리 많다고한들 원신라 지역 주민보다 많을 수는 없었고, 시간이 지나 결국은 동화되었을 개연성이 크다.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서라벌에 옛 고구려 유민, 백제 유민이 가장 많이 사민되었으나 훗날 신라의 지배력이 무너진 상황에서 들불처럼 반란이 일어나 백제부흥운동, 고구려부흥운동으로까지 번질 때도 서라벌은 조용했기 때문이다.
신라인이 옛날 적국이었던 나라를 부흥시키는 발상을 하기 어렵다는 건 동서고금 지배국의 핵심 지배층이었는데도 자신한테 유리하면 얼마든지 망한 나라의 유민들을 선동해서 복국 운동했던 사례들에서 부정된다. 훗날 고려시대에 일어난 신라부흥운동은 아예 당대 집권자인 이의민과 내통하기까지 했다. 구 백제 영토에서 봉기한 김헌창이 국호로 장안국을 내세웠던 건 역적 주제에 충성심이 강해 반란하는 와중에도 양심을 지킨 게 아니라, 김헌창이 구 백제 영토만 다스리고 끝낼 생각이 없었고 실제로도 가야는 물론 원신라 지역까지 손을 뻗는 와중에 삼국 중 어느 한 나라의 국호를 채택해버리면 그 바깥에서는 호응을 사기 어려울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3]
견훤의 후손이 지었다는 《이제가기》(李磾家記)에서는 신라의 위대한 정복군주였던 진흥왕의 후손이라고 전한다. 정확히는 진흥왕이 백숭부인에게서 낳은 3남 김구륜(仇輪)이 아자개의 증조부라고 한다. 진흥왕 & 백숭부인 → 김구륜 → 김선품(문무왕의 장인) → 작진 & 왕교파리 → 각간 원선(元善) = 아자개라고 되어 있다. 《이제가기》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 책이지만 《삼국유사》 <견훤조>가 이를 인용해 내용이 알려져 있다.
물론 이 계보는 김선품까지는 맞지만, 576년에 사망한 진흥왕의 손자 김선품과 900년경 활동한 아자개의 생몰 연대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에 당연히 김선품부터 아자개 사이 계보에는 생략된 인물이 꽤 많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견훤이 892년도부터 독자 세력화를 모색하면서 내세운 내용이었음이 유력하다. 당장 고려 태조 왕건도 당 숙종의 후손이라고 하는 신빙성 없는 주장을 펼쳤듯이 후삼국시대에는 일단 권력을 얻은 이후에 사실 자기가 대단한 가문 출신이었다고 윤색하는 경우가 흔했다. 진흥왕은 신라의 영토를 몇 배로 늘리고 전성기를 열어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정복 군주로서, 통일신라 말기를 살아간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 이름이 잘 알려졌을 것이다. 즉 견훤이 진흥왕의 명성을 이용하기 위해 그 후손을 사칭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긴 어렵다. 실제로 아자개가 이제가기에 이씨로 기록된 점을 들어 바로 사민된 경주 이씨 출신이자 신라 외척의 후손이라고 해석하는 설도 있다.[4]
하지만 법흥왕~진흥왕 시대에 신라 왕실이 다름 아닌 서라벌의 진골들을 찍어 누르기 위해 의도적으로 옛 사벌국 일대에 집중적인 투자와 환대를 하여 왕실 직할령화하였고, 그 일대 호족들이 무려 삼백 년 넘게 신라 왕 및 신라 왕의 직계 가족들 얼굴을 늘 보는 왕궁 근위대 및 정예 부대에 독점적으로 장병들을 공급한 건 사실이다. 그러므로 진흥왕 이후의 신라 왕가와 상주, 문경 일대 호족들이 어떤 식으로든 인척 관계에 있었을 개연성은 부정하기 어렵다. 즉 이 계보는 나름 사실일 개연성이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계보에 비록 백숭부인이 있다 한들 사도부인 운운하는 내용으로 봐선 견훤과 이제가기의 작성자 등이 그것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것 같지도 않고, 전반적인 내용은 누가봐도 알 수 있듯 원신라 지역 주민인 사람들한테나 좀 먹히지 백제 부흥이 목표인 옛 백제 호족들에게 호소력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는 부계 쪽으로도, 부계 쪽 조상 할머니 중 하나 쪽으로도[5] 빼박 고구려 유민이 확실한 왕건에 비해서는 혈통적 선전이 상당히 불리한 계보였다. 아주 대놓고 작정하여 만든 계보라기엔 웃프도록 어설픈 이 상황이 오히려 신빙성을 높이고 있다.
물론 이 계보는 김선품까지는 맞지만, 576년에 사망한 진흥왕의 손자 김선품과 900년경 활동한 아자개의 생몰 연대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에 당연히 김선품부터 아자개 사이 계보에는 생략된 인물이 꽤 많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견훤이 892년도부터 독자 세력화를 모색하면서 내세운 내용이었음이 유력하다. 당장 고려 태조 왕건도 당 숙종의 후손이라고 하는 신빙성 없는 주장을 펼쳤듯이 후삼국시대에는 일단 권력을 얻은 이후에 사실 자기가 대단한 가문 출신이었다고 윤색하는 경우가 흔했다. 진흥왕은 신라의 영토를 몇 배로 늘리고 전성기를 열어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정복 군주로서, 통일신라 말기를 살아간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 이름이 잘 알려졌을 것이다. 즉 견훤이 진흥왕의 명성을 이용하기 위해 그 후손을 사칭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긴 어렵다. 실제로 아자개가 이제가기에 이씨로 기록된 점을 들어 바로 사민된 경주 이씨 출신이자 신라 외척의 후손이라고 해석하는 설도 있다.[4]
하지만 법흥왕~진흥왕 시대에 신라 왕실이 다름 아닌 서라벌의 진골들을 찍어 누르기 위해 의도적으로 옛 사벌국 일대에 집중적인 투자와 환대를 하여 왕실 직할령화하였고, 그 일대 호족들이 무려 삼백 년 넘게 신라 왕 및 신라 왕의 직계 가족들 얼굴을 늘 보는 왕궁 근위대 및 정예 부대에 독점적으로 장병들을 공급한 건 사실이다. 그러므로 진흥왕 이후의 신라 왕가와 상주, 문경 일대 호족들이 어떤 식으로든 인척 관계에 있었을 개연성은 부정하기 어렵다. 즉 이 계보는 나름 사실일 개연성이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계보에 비록 백숭부인이 있다 한들 사도부인 운운하는 내용으로 봐선 견훤과 이제가기의 작성자 등이 그것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것 같지도 않고, 전반적인 내용은 누가봐도 알 수 있듯 원신라 지역 주민인 사람들한테나 좀 먹히지 백제 부흥이 목표인 옛 백제 호족들에게 호소력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는 부계 쪽으로도, 부계 쪽 조상 할머니 중 하나 쪽으로도[5] 빼박 고구려 유민이 확실한 왕건에 비해서는 혈통적 선전이 상당히 불리한 계보였다. 아주 대놓고 작정하여 만든 계보라기엔 웃프도록 어설픈 이 상황이 오히려 신빙성을 높이고 있다.
일단 상주 지역에서 힘과 재력을 갖추고, 따르는 자들이 많았던 걸로 보아 보통 가문이 아니었던 건 확실한 듯하다. 그리고 이 설이 현재로서는 가장 신빙성과 개연성이 높고, 진흥왕이 연계된 연유와도 잘 연결된다.
아자개의 계보에 진흥왕이 등장하는 건 고고학적인 근거도 있다. 법흥왕~진흥왕 대인 6세기경에, 이전까지는 두드러질게 없었던 상주 지역이 크게 개발되고 떠오르게 되는데 학계에서는 법흥왕과 진흥왕의 신라가 백제를 상대하기 위해 주요 거점인 상주 지역에 대한 지배를 확대하면서 상주 지역 호족들을 우대한 것으로 해석 중이며 고고학적으로는 해당 시기에 상주 지역의 유력층이 쓰는 무덤의 규모가 더욱 커지고 부장품 또한 더욱 화려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원삼국시대 상주 지역에는 진한의 사벌국이 위치해 있었고, 이 시기에 진흥왕에게 협조한 대가로 크게 우대 받아 모종의 이익을 얻은 사벌국 지배층 후손 중 하나가 아자개였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원삼국시대 소국들로부터 비롯된 지역 공동체들은 길게는 고려 중기까지도 상당히 이어져 내려왔으며 옛 사벌국 일대는 특별히 전란에 휩싸인 적도 없었음을 고려하면 아자개가 사벌국 지배층의 후손이었을지 모른다는 설이 개연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게다가 문경, 상주를 비롯한 사벌주 지역은 법흥왕계인 습보계 왕가 이전에 이미 눌지-자비-소지 마립간들, 즉 눌지계 왕가가 사실상 왕실 직할지로서 개척한 추풍령 지역의 일부였다. 눌지계 왕가를 누르고 등장한 습보계 왕가는 이와 별도로 죽령 일대, 즉 경북 서북부 영주 일대를 다른 왕실 직할지로 개척했지만 눌지계 왕가의 아성인 추풍령 지역을 그냥 내버려두거나 홀대한다면 당연히 반란이 일어날 게 뻔했기에, 눌지계 왕가의 옛 왕실 직할령을 마찰 없이 승계하고 백제도 견제할 겸 추풍령 지역 중 옛 사벌국 일대에 특별히 더욱 주의를 들여 투자하고 지역 호족들도 파격적으로 대우하여 회유한 것이다. 아자개와 견훤은 이렇게 눌지계 왕가와 습보계 왕가가 연달아서 근위대 인원 및 정예 부대 인원을 배타적으로 모집 받은, 신라 정예군의 핵심 중추를 삼백 년 동안 형성한 추풍령 지역 출신이었던 것이다. 대대로 근위대 일을 한다는 것은 신라의 왕족들과 긴 세월 동안 늘 대면하며 살았다는 뜻이기도 하므로, 이 과정에서 신라 왕실의 방계와 인척 관계를 맺는 건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아자개의 계보에 진흥왕이 등장하는 건 고고학적인 근거도 있다. 법흥왕~진흥왕 대인 6세기경에, 이전까지는 두드러질게 없었던 상주 지역이 크게 개발되고 떠오르게 되는데 학계에서는 법흥왕과 진흥왕의 신라가 백제를 상대하기 위해 주요 거점인 상주 지역에 대한 지배를 확대하면서 상주 지역 호족들을 우대한 것으로 해석 중이며 고고학적으로는 해당 시기에 상주 지역의 유력층이 쓰는 무덤의 규모가 더욱 커지고 부장품 또한 더욱 화려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원삼국시대 상주 지역에는 진한의 사벌국이 위치해 있었고, 이 시기에 진흥왕에게 협조한 대가로 크게 우대 받아 모종의 이익을 얻은 사벌국 지배층 후손 중 하나가 아자개였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원삼국시대 소국들로부터 비롯된 지역 공동체들은 길게는 고려 중기까지도 상당히 이어져 내려왔으며 옛 사벌국 일대는 특별히 전란에 휩싸인 적도 없었음을 고려하면 아자개가 사벌국 지배층의 후손이었을지 모른다는 설이 개연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게다가 문경, 상주를 비롯한 사벌주 지역은 법흥왕계인 습보계 왕가 이전에 이미 눌지-자비-소지 마립간들, 즉 눌지계 왕가가 사실상 왕실 직할지로서 개척한 추풍령 지역의 일부였다. 눌지계 왕가를 누르고 등장한 습보계 왕가는 이와 별도로 죽령 일대, 즉 경북 서북부 영주 일대를 다른 왕실 직할지로 개척했지만 눌지계 왕가의 아성인 추풍령 지역을 그냥 내버려두거나 홀대한다면 당연히 반란이 일어날 게 뻔했기에, 눌지계 왕가의 옛 왕실 직할령을 마찰 없이 승계하고 백제도 견제할 겸 추풍령 지역 중 옛 사벌국 일대에 특별히 더욱 주의를 들여 투자하고 지역 호족들도 파격적으로 대우하여 회유한 것이다. 아자개와 견훤은 이렇게 눌지계 왕가와 습보계 왕가가 연달아서 근위대 인원 및 정예 부대 인원을 배타적으로 모집 받은, 신라 정예군의 핵심 중추를 삼백 년 동안 형성한 추풍령 지역 출신이었던 것이다. 대대로 근위대 일을 한다는 것은 신라의 왕족들과 긴 세월 동안 늘 대면하며 살았다는 뜻이기도 하므로, 이 과정에서 신라 왕실의 방계와 인척 관계를 맺는 건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견훤의 출생지가 문경 일대인 이상 아자개가 오늘날 상주 출신으로서 해당 지역의 호족으로 활동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견훤의 출생지가 문경이고 아자개의 세력권이 상주였으며 오히려 궁예같이 자기 근거지에서 먼 곳에서 세력을 모아 자립한 사례가 대단히 드문 케이스기 때문에[6], 아자개의 출신지가 상주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이 내러티브를 부인하는 것도 개연성이 꽤 부족한 추측이 된다. 게다가 신라 왕실이 근위대를 모집한 지역은 문경-상주-보은 일대 추풍령 지역, 즉 사벌주 거의 전체와 거기서 별로 멀지도 않은 영주 근방 조령 일대였으니 아자개가 상주시 토박이가 아닌 근처에서 온 자라고 해도 이 가능성은 그다지 떨어지지 않는다.
신라는 진한 거수국들을 신라 아래로 병합하는 과정에서 진한 거수국들의 지배층들을 5두품으로 대우하는 푸대접을 했기 때문에[7] 5두품에 속하는 아자개의 이씨 가문은 속한 지역도 그렇고 사벌국 지배층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6두품의 대명사인 6부 6성 중에서도 가장 큰 세를 가지고 있던 이씨(李氏)의 성을 사용하고 있던 것으로 보아 6두품 이씨 가문과 모종의 연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사회에서 성씨 제도가 자리잡은 건 진흥왕 이후부터인데, 사벌국의 신라 병합 시기(4세기 초반)를 고려하면[8] 사벌국 지배층이 성씨를 제대로 사용한 시기도 진흥왕 이후였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추풍령 5두품 가문들은 이미 왕실 친위대로 편입된 지 100년이 지난 상태였기 때문에 진흥왕이 6부 6두품에게 6성을 일괄적으로 하사하는 과정에서 친위대 가문이었던 아자개의 조상도 6부 이씨와 모종의 연이 생겨 이씨를 사용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9]
신라는 진한 거수국들을 신라 아래로 병합하는 과정에서 진한 거수국들의 지배층들을 5두품으로 대우하는 푸대접을 했기 때문에[7] 5두품에 속하는 아자개의 이씨 가문은 속한 지역도 그렇고 사벌국 지배층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6두품의 대명사인 6부 6성 중에서도 가장 큰 세를 가지고 있던 이씨(李氏)의 성을 사용하고 있던 것으로 보아 6두품 이씨 가문과 모종의 연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사회에서 성씨 제도가 자리잡은 건 진흥왕 이후부터인데, 사벌국의 신라 병합 시기(4세기 초반)를 고려하면[8] 사벌국 지배층이 성씨를 제대로 사용한 시기도 진흥왕 이후였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추풍령 5두품 가문들은 이미 왕실 친위대로 편입된 지 100년이 지난 상태였기 때문에 진흥왕이 6부 6두품에게 6성을 일괄적으로 하사하는 과정에서 친위대 가문이었던 아자개의 조상도 6부 이씨와 모종의 연이 생겨 이씨를 사용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9]
본래는 장군이 아닌 농부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 두 해석이 있는데, 첫째로는 훗날 집안을 일으켜서 성주가 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일반 농민이라기보다는 막강한 재력을 갖추고, 지방 토호 노릇을 하던 대지주였던걸로 보인다. 전근대 시절에는 가문의 뼈대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근본없는 출신이라면 사람들이 따르지를 않았다. 잘 살펴보면 몇백년쯤 뒤 조선에서 발호한 의병장들도 최소 몰락한 양반 가문이었다.
<견훤 열전>에서는 아자개가 들에서 농사를 짓고 있으면 견훤의 어머니가 그에게 식사를 날라다 주었다는 대목이 있기에 말 그대로 농부, 즉 소규모 자영농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역사 속에서 찾아보면 전한 태조 고황제 유방,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처럼 낮은 신분으로 시작해 한 세력을 쥐는 사례가 분명히 있으므로 아자개 역시 밑바닥부터 시작해 세력을 형성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10] 그러나 이는 5~10세기 서라벌 주둔 부대들의 편제와 기원이 2000년대 후반에 밝혀지기 전 학설로서 아자개 가문이 생각보다 지위가 높았을 개연성이 높다. 아들을 서라벌 왕궁 근위대로 보낼 정도면 상당한 지위와 전통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주라고 하더라도 소작농들에게 일만 시키는 지주가 있는 게 아니라, 일손을 거들기 위해 자신도 일을 하기도 한다. 자작농이라고 해서 자기 논밭만 경작하는 건 아니며, 지주라고 해서 농사는 안 짓고 다른 일만 하는 대지주만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이후 9세기 말엽 신라가 서서히 몰락하며 지방에 도적이 늘어나고 통제력이 무너질 조짐을 보이자 경상북도 상주 지방인 사벌주에서 세력을 일으켜 스스로를 장군이라 칭했다.[11]
2명의 부인에게서 5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얻었다고 전하는데 장남이 견훤이었다. 견훤과는 사이가 좋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부자가 세력을 키우는 과정에서 국경이 맞닿는 바람에 분쟁이 일어나 사이가 크게 벌어졌다고도 한다. 견훤이 고려가 사벌주를 집어삼키려는 속셈을 알고 자신이 먼저 사벌주를 무력으로 삼키려다 아자개와 동생들의 반대가 완강하여 포기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사이가 얼마나 좋지 않았는지 유추할 수 있다. 심지어 신라 주변의 패권을 두고 후백제와 고려가 싸울 때 인근의 예천군이나 안동시의 일부가 견훤의 세력권으로 들어갔을 때조차도 견훤 입장에서는 고향이었을 사벌주는 끝끝내 왕건의 편으로 남았으니 아들 견훤의 대업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훼방을 놓은 수준이다.
이는 아마 부활한 백제의 왕으로서 한참 건국 신화를 구축하던 견훤에게, 아자개가 상당한 걸림돌이었던 이유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자개가 그야말로 진짜로 흙수저에서 출세한 듣보잡이었으면 그냥 아버지를 부정하면 그만이었겠지만, 견훤에게는 안타깝게도 상황이 그렇지 못했다.
명주의 왕순식, 평주의 류천궁, 충주의 유긍달, 승평의 박영규 등이 오랜 세월 신라 조정의 영향력 밖에서 성씨와 관련해 족보 술작을 해올 만한[12] 힘을 키울 수 있는 A급 호족이라면 당대 최고의 세력가인 왕건이나 견훤에게 잘 붙어 전공을 세우거나 해서 성과 본관을 하사받은 신숭겸과 같은 호족들은 B급이었고, 죽주의 기훤 등의 별 비중이 없었던 미약한 호족들은 C급이라 볼 수 있었는데, 적어도 아자개 정도라면 B급 이상 위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아자개의 근거지가 신라 근왕세력의 총본산, 그러니까 신라 내에서 왕실에 가장 많은 충성을 바쳐오기도 했거니와 상술했듯 무려 삼백 년 동안 정예병을 배출해온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아자개와 견훤이 어쩐지 자수성가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적어도 이들은 신라 사회에서 5두품 정도는 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6두품도 무시당하는데 5두품이 뭐 별 거 있겠냐고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옛 백제인들은 그마저도 제대로 할 수가 없어서 후삼국시대에 울분이 폭발했던 상황을 고려해보면 결코 만만한 신분은 아니었다. 이는 견훤이 상당히 어린 나이인 만15세 때부터 무려 서라벌에서 정규군 병사로서 군생활을 시작한 것에서 드러나는데, 서라벌에 있는 정규군 부대라봐야 서라벌을 방어하는 육기정 부대와 서라벌 왕궁을 경비하는 왕실 직속 근위대뿐이기에 이 정도면 어떻게 봐도 흙수저는 아니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신라는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기에 신라 중앙군 병사 또한 아무나 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자개와 견훤의 고향인 문경 및 상주 일대는 무려 5세기 중반부터 견훤의 성장기인 9세기 후반까지 무려 400여 년 동안 신라 왕실에 왕실 직속 근위대 및 최정예부대에 병력자원을 공급해왔다.[13]
게다가 서라벌 방어 육기정 부대는 서라벌 및 그 근처 출신 젊은이들의 입대를 주로 받았으니, 서라벌 출신이 아닌 추풍령 일대 출신 견훤이 가문과 아버지 아자개 빽으로 처음 배속된 부대는 신라군 근위대였을 가능성이 현재로선 매우 높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처럼 견훤이 근위대 장교로 등장하는 모습은, 지금 시점에선 상당히 고증이 잘 된 경우라는 얘기다. 게다가 견훤 외에도 4명의 아들인 능애, 용개, 소개, 보개 등이 역시 당대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고 하니, 아자개의 가문은 대대로 내려오는 상당한 유지 가문이었을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적어도 지역 유지 이상은 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사벌국의 지배층 출신 혹은 진짜로 서라벌 6부의 그 이씨 출신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그렇게 가문과 아버지 빽으로 출발을 유리하게 한 신라 지배층의 기대주인 장남 견훤이 갑자기 용의 자식이라든가 백제 부여씨 왕통 운운하면서 부계 혈통을 부정하고 신라에 거역하며 백제왕을 자처하는 행태는, 아버지 아자개 입장에선 꽤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 아자개는 918년 아들인 견훤이 아닌 왕건에게 귀부하게 된다.
이에 왕건은 크게 기뻐하여 고려로 오는 아자개를 맞이할 적에 마치 아버지를 모시듯이 우대하였으며, 아자개의 환영식을 열 때는 상석의 자리를 놓고 다투던 두 대신들을 크게 꾸짖었다는 기록도 남아있을 정도로 정성을 들였다. 왕건은 본인이 대호족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변변한 성과 본관도 없던 듣보잡인 아자개를 당대의 내로라하는 대호족들 이상으로 띄워 올려줌으로써 아자개의 환심을 크게 사고 결과적으로 어떠한 유혈 사태도 없이 사벌주를 흡수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견훤의 평판과 정통성을 크게 떨어뜨려 강타를 먹인건 덤이다. 왕건을 띄우고 적이었던 궁예와 견훤을 깎아내리는 기술이 많은 책들에서도 아주 좋은 소재인 견훤의 아버지라는걸 특별히 강조하지 않고 '아자개가 귀순해왔다.'는 식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 때문에 견훤의 아버지와 이 때 항복해온 인물이 동명이인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견훤 열전>에서는 아자개가 들에서 농사를 짓고 있으면 견훤의 어머니가 그에게 식사를 날라다 주었다는 대목이 있기에 말 그대로 농부, 즉 소규모 자영농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역사 속에서 찾아보면 전한 태조 고황제 유방,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처럼 낮은 신분으로 시작해 한 세력을 쥐는 사례가 분명히 있으므로 아자개 역시 밑바닥부터 시작해 세력을 형성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10] 그러나 이는 5~10세기 서라벌 주둔 부대들의 편제와 기원이 2000년대 후반에 밝혀지기 전 학설로서 아자개 가문이 생각보다 지위가 높았을 개연성이 높다. 아들을 서라벌 왕궁 근위대로 보낼 정도면 상당한 지위와 전통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주라고 하더라도 소작농들에게 일만 시키는 지주가 있는 게 아니라, 일손을 거들기 위해 자신도 일을 하기도 한다. 자작농이라고 해서 자기 논밭만 경작하는 건 아니며, 지주라고 해서 농사는 안 짓고 다른 일만 하는 대지주만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이후 9세기 말엽 신라가 서서히 몰락하며 지방에 도적이 늘어나고 통제력이 무너질 조짐을 보이자 경상북도 상주 지방인 사벌주에서 세력을 일으켜 스스로를 장군이라 칭했다.[11]
2명의 부인에게서 5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얻었다고 전하는데 장남이 견훤이었다. 견훤과는 사이가 좋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부자가 세력을 키우는 과정에서 국경이 맞닿는 바람에 분쟁이 일어나 사이가 크게 벌어졌다고도 한다. 견훤이 고려가 사벌주를 집어삼키려는 속셈을 알고 자신이 먼저 사벌주를 무력으로 삼키려다 아자개와 동생들의 반대가 완강하여 포기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사이가 얼마나 좋지 않았는지 유추할 수 있다. 심지어 신라 주변의 패권을 두고 후백제와 고려가 싸울 때 인근의 예천군이나 안동시의 일부가 견훤의 세력권으로 들어갔을 때조차도 견훤 입장에서는 고향이었을 사벌주는 끝끝내 왕건의 편으로 남았으니 아들 견훤의 대업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훼방을 놓은 수준이다.
이는 아마 부활한 백제의 왕으로서 한참 건국 신화를 구축하던 견훤에게, 아자개가 상당한 걸림돌이었던 이유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자개가 그야말로 진짜로 흙수저에서 출세한 듣보잡이었으면 그냥 아버지를 부정하면 그만이었겠지만, 견훤에게는 안타깝게도 상황이 그렇지 못했다.
명주의 왕순식, 평주의 류천궁, 충주의 유긍달, 승평의 박영규 등이 오랜 세월 신라 조정의 영향력 밖에서 성씨와 관련해 족보 술작을 해올 만한[12] 힘을 키울 수 있는 A급 호족이라면 당대 최고의 세력가인 왕건이나 견훤에게 잘 붙어 전공을 세우거나 해서 성과 본관을 하사받은 신숭겸과 같은 호족들은 B급이었고, 죽주의 기훤 등의 별 비중이 없었던 미약한 호족들은 C급이라 볼 수 있었는데, 적어도 아자개 정도라면 B급 이상 위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아자개의 근거지가 신라 근왕세력의 총본산, 그러니까 신라 내에서 왕실에 가장 많은 충성을 바쳐오기도 했거니와 상술했듯 무려 삼백 년 동안 정예병을 배출해온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아자개와 견훤이 어쩐지 자수성가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적어도 이들은 신라 사회에서 5두품 정도는 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6두품도 무시당하는데 5두품이 뭐 별 거 있겠냐고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옛 백제인들은 그마저도 제대로 할 수가 없어서 후삼국시대에 울분이 폭발했던 상황을 고려해보면 결코 만만한 신분은 아니었다. 이는 견훤이 상당히 어린 나이인 만15세 때부터 무려 서라벌에서 정규군 병사로서 군생활을 시작한 것에서 드러나는데, 서라벌에 있는 정규군 부대라봐야 서라벌을 방어하는 육기정 부대와 서라벌 왕궁을 경비하는 왕실 직속 근위대뿐이기에 이 정도면 어떻게 봐도 흙수저는 아니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신라는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기에 신라 중앙군 병사 또한 아무나 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자개와 견훤의 고향인 문경 및 상주 일대는 무려 5세기 중반부터 견훤의 성장기인 9세기 후반까지 무려 400여 년 동안 신라 왕실에 왕실 직속 근위대 및 최정예부대에 병력자원을 공급해왔다.[13]
게다가 서라벌 방어 육기정 부대는 서라벌 및 그 근처 출신 젊은이들의 입대를 주로 받았으니, 서라벌 출신이 아닌 추풍령 일대 출신 견훤이 가문과 아버지 아자개 빽으로 처음 배속된 부대는 신라군 근위대였을 가능성이 현재로선 매우 높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처럼 견훤이 근위대 장교로 등장하는 모습은, 지금 시점에선 상당히 고증이 잘 된 경우라는 얘기다. 게다가 견훤 외에도 4명의 아들인 능애, 용개, 소개, 보개 등이 역시 당대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고 하니, 아자개의 가문은 대대로 내려오는 상당한 유지 가문이었을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적어도 지역 유지 이상은 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사벌국의 지배층 출신 혹은 진짜로 서라벌 6부의 그 이씨 출신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그렇게 가문과 아버지 빽으로 출발을 유리하게 한 신라 지배층의 기대주인 장남 견훤이 갑자기 용의 자식이라든가 백제 부여씨 왕통 운운하면서 부계 혈통을 부정하고 신라에 거역하며 백제왕을 자처하는 행태는, 아버지 아자개 입장에선 꽤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 아자개는 918년 아들인 견훤이 아닌 왕건에게 귀부하게 된다.
이에 왕건은 크게 기뻐하여 고려로 오는 아자개를 맞이할 적에 마치 아버지를 모시듯이 우대하였으며, 아자개의 환영식을 열 때는 상석의 자리를 놓고 다투던 두 대신들을 크게 꾸짖었다는 기록도 남아있을 정도로 정성을 들였다. 왕건은 본인이 대호족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변변한 성과 본관도 없던 듣보잡인 아자개를 당대의 내로라하는 대호족들 이상으로 띄워 올려줌으로써 아자개의 환심을 크게 사고 결과적으로 어떠한 유혈 사태도 없이 사벌주를 흡수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견훤의 평판과 정통성을 크게 떨어뜨려 강타를 먹인건 덤이다. 왕건을 띄우고 적이었던 궁예와 견훤을 깎아내리는 기술이 많은 책들에서도 아주 좋은 소재인 견훤의 아버지라는걸 특별히 강조하지 않고 '아자개가 귀순해왔다.'는 식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 때문에 견훤의 아버지와 이 때 항복해온 인물이 동명이인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상주(尙州)의 적수(賊帥) 아자개(阿慈蓋)가 사람을 보내어 내부(來附)하였다 하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견훤(甄萱)의 아비 아자개는 상주 가은현(加恩縣) 사람이라 하였다. 이때 견훤의 형세가 몹시 강하였으니 그의 아비가 투항할 이치가 없다. 아마 아자개가 두 사람이 있는가 보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상주의 사벌고성(沙伐古城)이 고을 동쪽 10리에 있는데, 견훤의 아비 아자개가 이 성(城)에 웅거하였다.” 하였으니, 《여지승람》의 기록은 고려에 내항(來降)한 것을 가리켜 잘못 견훤의 아비라 한 것이다.
안정복, 동사강목 부록 상권 상, 고이(考異), 고려 태조 원년
그런데 동명이인이 맞다면 그럼 도대체 어떤 인물이길래 왕건이 그를 정성들여 예우했는지 설명이 안 된다. 그래서 견훤의 부친인 아자개가 왕건에게 귀순했다는 것이 다수 설이다. 게다가 견훤의 후손 전원은 후백제 멸망 직후엔 견씨를 쓰지 못하고 이씨를 쓰면서 전주에 살고 있었다. 이들이 견씨 성을 대놓고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굳이 이씨를 쓴 상황과, 아자개의 성씨가 '이씨'로 분명히 기재된 상황이 서로 교차검증되는 게 분명하므로 어떻게 보든 아자개는 견훤의 부친이 맞다.[14]
하지만 결국 견훤은 아버지 아자개의 지역인 상주 그리고 출생지인 문경 일대를 무력으로 차지하게 된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아자개는 오늘날 상주시 일대가 주요 세력 무대였고 견훤과 아자개의 고향인 문경은 흥달이 차지하고 있었다. 적어도 문경 일대는 910년대 초반에 해당 지역 실력자인 고사갈이성 성주 흥달을 복속시키면서 이미 판도에 넣은 상태였으나 927년에 흥달이 왕건에게 복속하면서 후백제에게 이탈하고 만다. 918년도 아자개 복속까지 고려해보면 사벌주 동쪽 절반 정도가 고려에게 날아간 상태였다. 그러나 927년 공산 전투 승리 후 한동안 후백제군이 나주까지 제압하며 승승장구하던 시기에 기어코 후백제군은 진격하여 문경과 상주 일대를 차지하게 된다.[15]
이후 적어도 문경-상주 일대는 929년에 다름아닌 문경시 가은읍이 이탈한 사례 외엔, 후백제가 이후 경상도에서 고려에게 크게 패해서 후퇴하는 시점까지도 영토로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16]
만약 그때까지 아자개가 살아있었다면 아들 견훤과 매우 어색한 조우를 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큰데, 안타깝게도 기록은 이에 대해 전하는 게 없다. 하지만 견훤의 후손이 아닌 아자개의 후손들, 즉 견훤의 이복동생들이 남긴 후손들은 훗날 모두 아자개의 성씨가 아닌 큰아버지 견훤의 성씨인 견씨를 자처하게 된 걸로 봐선, 이때 후백제가 견훤의 본가인 아자개 집안을 딱히 탄압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자개가 만약 살아있었다면 심정이 매우 복잡했겠지만, 견훤의 이복동생들은 형과 형이 세운 나라 후백제에게 그럭저럭 협조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견훤의 후손은 황간 견씨와 전주 견씨, 아자개의 후손은 상주 견씨로 남아 있다. 견훤 생전에야 갈등이 있었을 개연성이 크지만, 정작 견훤의 이복조카들은 백제 왕이었던 큰아버지의 존재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사자들 사후에 자손끼리 화해한 격이지만 견훤 생전에 이렇게 일이 진행되었다면 고려와의 쟁패에서 크게 변수가 되었을게 분명하기에 견훤 본인으로서는 땅을 칠 정도로 안타까운 일이다. 왕건이 아자개를 특별히 우대한건 어디까지나 견훤을 물먹이기 위해서라는 정치적 목적 때문이기에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지어진 《고려사》에는 아자개를 성주나 장군이 아닌 도적 괴수라고 기록했다. 후백제가 통일했다면 과거에 섭섭한 일이 있었든 상관없이 창업자의 생부라는 자격으로 묘호까지 받았을 인물이지만 고려는 그를 결국 귀순해온 도적 두령 정도로만 여긴 게 분명하다. 다만 이제가기가 어디까지나 이제가기로 남은 건 견훤의 후손들이 후백제 멸망 후 한동안 전주에서 견씨를 자처하지 못하고 아자개의 성씨인 이씨를 도로 칭하게 된 상황을 나타내는데, 정작 견훤의 이복동생들 후손은 훗날 견씨를 자처했던 게 재미있는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아자개는 견씨가 아니라 이씨임에도 한국 견씨들의 시조인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자개(태조 왕건) 문서 참고하십시오.
[1] 918년 고려로 귀부했을 당시 최소 70세가 넘는 고령이었고, 929년 7월 견훤이 상주 가은현을 공격했을 때 아자개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으로 보아 918년 ~ 929년 사이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2] 아들이었던 견훤의 성도 이씨였지만 이후 견씨로 개명하였다. 하지만 후백제 멸망 직후 견훤의 후손들은 한동안 아자개의 성씨인 이씨를 쓰게 되었다.[3] 궁예가 '고려'라는 이름으로 건국하고 비슷한 이유 때문에 두 차례에 걸쳐 국호를 변경(마진, 태봉)하였다는 가설이 있다.[4] 위에서 언급된 김선품이 정사에서 문무왕의 장인이라고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5] 왕건에게도 견훤의 조상할머니 백숭부인, 왕교파리 포지션인 인물이 있는데 그것은 작제건의 어머니이자 강보육의 딸 진의다.[6] 사실 그 궁예마저 본디는 청주에서 가까운 기훤 휘하에서 시작했다.[7] 이 푸대접은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백제 대성팔족을 비롯한 대귀족들을 5두품 취급하는 것으로 반복된다. 반독립 세력이었던 고구려계는 간접 통치해서 형식적으로 6두품이라도 준 것과 대조적이다. (왕건의 출신인 고구려계 왕씨 가문이 여기에 속한다) 사실 신라가 동시대의 백제는 물론이고 왜와 비교해도 이민족 차별과 지방 차별이 심해서 결국 후삼국시대의 원인이 되고 만다.[8] 삼국사기에서는 247년에 석우로가 사벌국의 난 때 활약했다고 하는데, 학계에서는 우로가 320년(일본서기 이주갑인상) 사망이 정설이므로 실제로는 4세기 전반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사망 연대를 기점으로 역산하면 314년이 된다.[9] 아자개의 조상 중 한 명이 진흥왕의 후손과 연이 생기는 것도 그렇고 아자개 가문이 진흥왕과 은근히 관련이 있던 모양이다. 진흥왕이 진골을 불신해 왕실 친위대에서 진골을 축출하고 죽령과 추풍령 일대 호족들만 친위대로 유입하게 규정해 통일신라 말기까지 그 제도가 이어졌기 때문에 추풍령 출신 친위대 가문인 아자개 집안이 진흥왕의 이러한 조치로 다소 이익을 봤을 수도 있다. 아자개 조상이 이씨 성을 쓰게 된 것도 그 일환일 수도 있고.[10] 유방은 낮은 신분이 아니었다. # 유방은 패현에서 벼슬(지금으로 말하면 파출소장 같은)을 했고, 한량을 했을 정도로 집안의 재력이 있었으며, 유방의 동생은 글까지 배웠는데 당시에 유방은 집안의 재력이나 벼슬을 한 것을 보면 완전 밑바닥은 아니었다. 그에 반해 먹고 살기 위해 탁발승을 했던 주원장은 빼박 신분이 밑바닥이 맞다.[11] 견훤의 어머니가 정을 나누고 지렁이 등에다 바늘을 꽂아놓았다는 유명한 사나이가 그 집을 떠난 후에 여인의 아버지가 임신한 딸을 아자개에게 주어 보냈다는 설화가 있으나 이 설화는 주로 오늘날의 전남 광주 일대와 연관이 있음이 밝혀졌다. 견훤이 일부러 만들어서 퍼뜨렸거나 혹은 신검 형제의 외가인 광주 일대와 연관이 있는 걸로 해석된다.[12] 박씨면 당시 신라에서 진골인 부류도 꽤 되었고, 류, 유씨 등은 원래부터 중국에서 유명했던 성씨로써 귀화인을 통해 사용된 전례가 있기 때문에 준6두품급은 되었다. 다만 박씨라고 전부가 다 진골이었던 건 아니며 6두품이나 5두품도 분명히 있었을 개연성이 높은 이상, 박영규가 마냥 그저 박씨를 자칭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장 견훤만 보아도 승진 속도나 받은 관품으로 보건대 최소한 5두품 급이다.[13] 백제의 한성 공함 당시 부여문주가 제공받은 신라 정예병들이 바로 이 지역 출신들과 조령 일대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을 정도였다. 사병을 대량 보유하여 국방의 주축이었던 6부 수장들에게 치여살던 신라왕들이 어느 순간 6부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씹고 마음껏 신라를 좌지우지하게 된 건 이 일대에서 유력가문이 아닌 왕실한테만 충성하는 직할부대들을 편성, 육성하여 6부 수장들의 반대를 정면돌파하여 찍어누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신라왕이 6부 수장들이 어떤 군사작전을 반대하면, 그들을 무시하고 그들의 병력들을 제껴놓은 다음 휘하 직할 정예병을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개선하는 상황이 몇 번 보이는데, 자기네 군사력 없이도 만사가 잘 되어가는 걸 본 6부 수장들이 그 후부터 왕 앞에서 언행을 조심하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14] 아자개가 다소 반견훤적 행태를 보였으니 견훤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는 견해는 여기서 또 다시 정면으로 반박된다. 게다가 현대 한국에서도 부친이 모친 사별을 이유로 새 결혼을 한 가정 내에서 부자간 갈등은 얼마든지 있는 현상이다.[15] 흥달이 만약 살아서 백제군을 맞이했다면 비참한 꼴을 면치 못했겠지만 다행인지 문경이 함락되기 직전에 병들어 죽었다.[16] 문안식 교수의 저서 후백제 전쟁사 연구에서는 932년도에 공직이 배반하여 일모산성이 고려로 넘어간 시점에서 상주와 문경이 고려령이 되었다고 보았으나, 그보다 이후에 나온 연구에서는 적어도 문경읍 외엔 상주와 문경이 후백제 멸망 이전까지 영토로 유지되었다고 보고 있다. 고려가 상주-문경 일대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면 일모산성 외에 삼년산성도 장악해야 하지만 당나라와 고구려조차 돌파하지 못한 삼년산성은 후백제가 망하기 전까지도 끝내 함락하지 못했고, 후백제와 견훤의 상주-문경 일대에 대한 신경질적인 집착 또한 입증되므로 이 추측이 더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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