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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커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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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제1계 입법원장 | |
중화민국 제2대 행정원장 쑨커 孫科(손과) | Sun Ke | |
자 | 철생(哲生) |
출생 | |
사망 | |
국적 | |
학력 | |
가족 | |
종교 | |
재임기간 | 광저우 국민정부 정부위원 |
제3대 행정원장 (훈정시기) | |
제4대 입법원장 (훈정시기) | |
제1대 입법원장 (헌정시기) | |
제2대 행정원장 (헌정시기) | |
제4대 고시원장 | |
1895년 10월 21일 광동성에서 출생했다. 1911년 잠시 부친 쑨원과 지낸 것을 제외하면 유년 시기의 양육은 어머니 루무전(盧慕貞)이 책임졌었다.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신문학과 언론학 석사를 마친 뒤 1917년 8월에 귀국하여 쑨원 아래에서 대원수부 비서 겸 외교부 비서로 임명되었으며, 1919년 중국국민당에 입당하였다.
1922년 8월 중국 국민당 개진안 기초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1923년 10월에는 당 임시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이 되어 1회 전국 대표 회의를 준비했으며 이후에는 중국국민당을 근대형 정당으로 개조하는 역할을 맡았다. 1924년에는 광저우 시장을 역임하며 광저우 특별당부 집행위원이 되었고 초기부터 우파의 입장을 취해 1차 국공합작을 반대하며 공산당을 제어할 것을 중앙당부에 요청하기도 했다. 1925년 8월,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이 있은 후 국민당 중정회 1기 52차 회의에서 장제스, 담평산과 함께 중앙정치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되었다.
이러한 활동을 기반으로 쑨원 사후에는 태자파의 영수로 불리며 국민당의 차기 계승자 중 하나로 꼽혔지만, 세력의 미약함으로 인해 후보에서 탈락한다. 이후 국민당 우파로서 반공활동을 하였으며 서산회의파와도 접촉이 있었다. 하지만 서산회의파가 자신의 경쟁자인 장제스와 접촉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서산회의파와 단절했다. 4.12 상하이 쿠데타, 마일사변 등으로 국공합작이 결렬된 직후에는 탄옌카이와 함께 4중전회 참가를 거부하는 서산회의파를 설득하는 등 분열된 국민당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1931년 탕산 사건으로 국민당 내부에 갈등이 생기자 쉬충즈, 왕징웨이, 천유런 등과 함께 반장파에 가담, 광저우 국민정부의 수장으로 추대되었으며 1차 양광사변에 참여했다. 12월 15일 장제스가 광저우 국민정부과 난징 국민정부를 통합하는 조건으로 사퇴하자 행정원장으로 취임하여 정부를 이끌었으나 재정 문제와 군대의 통솔 문제로 1개월만에 제1차 상하이 사변 중 사퇴했다.[2] 이후에는 입법원장으로 16년 11개월 동안 재임하면서 중화민국 헌법 초안을 작성하였다. 1937년에는 중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47년에는 장제스의 지지를 받아 제1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에 부총통 후보로 출마하지만 200표 차이로 리쭝런에게 패배한다. 이후 웡원하오 내각이 사퇴하자 신임 행정원장이 되지만 장제스가 1949년 1월에 하야하자 그도 1949년 3월에 행정원장직을 사퇴했다.
이후 국공내전으로 중국이 공산화되자 홍콩과 유럽을 거쳐서 미국으로 망명하여 채소밭을 직접 가꾸는 생활을 했다고 한다. 1965년 쑨원 탄생 100주년 기념 대회에 출석하기 위해 타이완을 방문했다가 장제스의 제안으로 대만에 계속 머물렀으며, 1966년 고시원장으로 취임하여 재직하던 중 1973년 9월 13일 타이베이에서 사망했다.
1922년 8월 중국 국민당 개진안 기초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1923년 10월에는 당 임시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이 되어 1회 전국 대표 회의를 준비했으며 이후에는 중국국민당을 근대형 정당으로 개조하는 역할을 맡았다. 1924년에는 광저우 시장을 역임하며 광저우 특별당부 집행위원이 되었고 초기부터 우파의 입장을 취해 1차 국공합작을 반대하며 공산당을 제어할 것을 중앙당부에 요청하기도 했다. 1925년 8월,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이 있은 후 국민당 중정회 1기 52차 회의에서 장제스, 담평산과 함께 중앙정치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되었다.
이러한 활동을 기반으로 쑨원 사후에는 태자파의 영수로 불리며 국민당의 차기 계승자 중 하나로 꼽혔지만, 세력의 미약함으로 인해 후보에서 탈락한다. 이후 국민당 우파로서 반공활동을 하였으며 서산회의파와도 접촉이 있었다. 하지만 서산회의파가 자신의 경쟁자인 장제스와 접촉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서산회의파와 단절했다. 4.12 상하이 쿠데타, 마일사변 등으로 국공합작이 결렬된 직후에는 탄옌카이와 함께 4중전회 참가를 거부하는 서산회의파를 설득하는 등 분열된 국민당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1931년 탕산 사건으로 국민당 내부에 갈등이 생기자 쉬충즈, 왕징웨이, 천유런 등과 함께 반장파에 가담, 광저우 국민정부의 수장으로 추대되었으며 1차 양광사변에 참여했다. 12월 15일 장제스가 광저우 국민정부과 난징 국민정부를 통합하는 조건으로 사퇴하자 행정원장으로 취임하여 정부를 이끌었으나 재정 문제와 군대의 통솔 문제로 1개월만에 제1차 상하이 사변 중 사퇴했다.[2] 이후에는 입법원장으로 16년 11개월 동안 재임하면서 중화민국 헌법 초안을 작성하였다. 1937년에는 중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47년에는 장제스의 지지를 받아 제1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에 부총통 후보로 출마하지만 200표 차이로 리쭝런에게 패배한다. 이후 웡원하오 내각이 사퇴하자 신임 행정원장이 되지만 장제스가 1949년 1월에 하야하자 그도 1949년 3월에 행정원장직을 사퇴했다.
이후 국공내전으로 중국이 공산화되자 홍콩과 유럽을 거쳐서 미국으로 망명하여 채소밭을 직접 가꾸는 생활을 했다고 한다. 1965년 쑨원 탄생 100주년 기념 대회에 출석하기 위해 타이완을 방문했다가 장제스의 제안으로 대만에 계속 머물렀으며, 1966년 고시원장으로 취임하여 재직하던 중 1973년 9월 13일 타이베이에서 사망했다.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만주사변기 중일외교사, 유신순,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2,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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