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제(申慶濟)는 1644년(인조 22)에 태어났으며, 대사헌을 지낸 졸재 신식(申湜)의 증손이다.
1689년(숙종 15) 문과에 급제하여 10월 23일 승문원 부정자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2월 3일 가주서에 제수되어 승문원 저작, 박사를 역임하고, 10월 24일 거창현감으로 나갔다. 1698년(숙종 24) 5월 2일 성균관 직강으로 들어와서 병조좌랑을 역임하고, 10월 28일 강원도 도사(都事)로 나갔다가 이듬해 6월 12일 모친의 병이 위중하여 사직하였다.
1702년(숙종 28) 11월 25일 병조좌랑에 제수되어 병조정랑, 영암군수, 사헌부 장령을 역임하였다. 1710년(숙종 36) 1월 24일 세자시강원 필선을 역임하였고 6월 5일 사직상소를 올리고 낙향하였다. 7월 6일 부호군에 제수되어 군기시정, 사헌부장령, 종부시정, 봉상시정을 역임하고, 1716년(숙종 42) 2월 12일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11월 13일 장례원 판결사를 거쳐 1719년(숙종 45) 11월 10일 한성부 우윤에 제수되었다가 이듬해 1월 27일 부호군으로 개차(改差)되었다.
1722년(경종 2) 7월 10일 신경제는 상소를 올려 토역(討逆)이 엄중하지 못했다며 옥사(獄事)를 다스린 대신들을 비난했는데 이로 인해 삭탈관작(削奪官爵) 문외출송(門外出送) 되었다.
영조가 즉위(1724)하자 12월 15일 다시 한성부 우윤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2월 전라도 유생(儒生) 김택현(金宅賢) 등 1천여 명이 상소하여 신경제가 지난 기사년(1689)에 송시열(宋時烈)을 악역부도(惡逆不道)의 죄로 비난했던 전력을 문제 삼아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풀려났다.
1726년(영조 2) 10월 28일 세상을 떠났으며, 손자가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신천영이다.
1689년(숙종 15) 문과에 급제하여 10월 23일 승문원 부정자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2월 3일 가주서에 제수되어 승문원 저작, 박사를 역임하고, 10월 24일 거창현감으로 나갔다. 1698년(숙종 24) 5월 2일 성균관 직강으로 들어와서 병조좌랑을 역임하고, 10월 28일 강원도 도사(都事)로 나갔다가 이듬해 6월 12일 모친의 병이 위중하여 사직하였다.
1702년(숙종 28) 11월 25일 병조좌랑에 제수되어 병조정랑, 영암군수, 사헌부 장령을 역임하였다. 1710년(숙종 36) 1월 24일 세자시강원 필선을 역임하였고 6월 5일 사직상소를 올리고 낙향하였다. 7월 6일 부호군에 제수되어 군기시정, 사헌부장령, 종부시정, 봉상시정을 역임하고, 1716년(숙종 42) 2월 12일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11월 13일 장례원 판결사를 거쳐 1719년(숙종 45) 11월 10일 한성부 우윤에 제수되었다가 이듬해 1월 27일 부호군으로 개차(改差)되었다.
1722년(경종 2) 7월 10일 신경제는 상소를 올려 토역(討逆)이 엄중하지 못했다며 옥사(獄事)를 다스린 대신들을 비난했는데 이로 인해 삭탈관작(削奪官爵) 문외출송(門外出送) 되었다.
영조가 즉위(1724)하자 12월 15일 다시 한성부 우윤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2월 전라도 유생(儒生) 김택현(金宅賢) 등 1천여 명이 상소하여 신경제가 지난 기사년(1689)에 송시열(宋時烈)을 악역부도(惡逆不道)의 죄로 비난했던 전력을 문제 삼아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풀려났다.
1726년(영조 2) 10월 28일 세상을 떠났으며, 손자가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신천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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