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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왕국 제3대 국왕 솔로몬 שְׁלֹמֹה | |
늙은 솔로몬 왕. 구스타브 도어. 1866년 작(作) | |
이름 | |
출생 | 기원전 990년 |
사망 | 기원전 931년 (향년 58 ~ 59세) |
묘소 | 예루살렘 다윗성 |
재위 기간 | 이스라엘 국왕 |
기원전 970년 ~ 기원전 931년 (40년) | |
젊은 시절의 솔로몬 |
야훼께서 그 날 밤 기브온에 와 있던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셨다. 하느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중략)...
"그러하오니 소인에게 명석한 머리를 주시어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수 있고 흑백을 잘 가려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감히 그 누가 당신의 이 큰 백성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솔로몬의 청이 야훼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가 장수나 부귀나 원수 갚는 것을 청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옳은 것을 가려내는 머리를 달라고 하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주리라. 이제 너는 슬기롭고 명석하게 되었다. 너 같은 사람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으리라. 뿐만 아니라 네가 청하지 않은 것, 부귀와 명예도 주리라. 네 평생에 너와 비교될 만한 왕을 보지 못할 것이다.
전도자[3]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성전, 지혜 등으로 성경 내에서 최고의 번영을 구가했으며, 그 자체가 유대교나 그리스도교, 이슬람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지혜로운 사람의 대명사로 쓰이는 인물이다.[4] 그의 치세 아래 이스라엘은 최대의 번영을 구가했으나 실책도 적지 않아 쇠퇴와 분열의 징조가 보였다.
지혜의 왕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성경에 등장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의미의 예디드야(여디디야).[5]
구약성경 중 시편의 시 중 상당수, 잠언 구절 중 상당수를 집필했고 코헬렛(전도서), 아가의 작자로 알려졌다. 부왕이 지으려고 했으나 짓지 못한 예루살렘 성전을 완성시키기도 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수많은 잠언과 시를 남겼다고 하는데, 엄청나게 많은 시편을 남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도 시에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작 시편 중에서 솔로몬 왕이 썼다고 명확하게 나와있는 구절은 별로 없다.
세계사에서 솔로몬과 유사한 인물으로는 당나라의 현종이 있다.
그 유명한 다윗 왕의 아들로, 어머니는 장군 우리아의 아내였던 밧세바다.
본래 그가 다음 왕의 자리를 이을 가능성은 희박했는데, 비록 다윗의 총애를 받는 밧세바의 소생이었지만 왕위 계승 서열은 낮았기 때문이었다.[6] 당시 다윗의 아들 중 계승 서열이 가장 높았던 이는 넷째였던 아도니야였는데, 첫째 아들이었던 암논은 셋째 압살롬의 칼에 살해당했고[7], 둘째인 길르압은 요절했으며, 압살롬은 무리하게 왕위 계승을 시도하다가 요압의 창에 살해당했다. 게다가 아도니야의 배후에는 이스라엘의 군대 사령관 요압과 대제사장 아비아달이 지원하고 있었다.[8] 특히 요압은 다윗의 전성기를 이끈 불세출의 명장이자, 부왕의 정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유다 지파 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어 다윗조차 그를 제거하려다가 실패한 전적이 있던 희대의 권신이었다.[9] 솔로몬을 지지하던 제사장 사독과 근위대장 브나야가 있었지만, 아도니야 쪽의 대제사장 아비아달이 비록 사울 왕에게 일족이 학살당하기는 했어도 판관 시절부터 쭉 이어져 오고 있던 엘리 계열의 지체높은 명문 제사장 가문이었던 것[10]에 반해, 솔로몬 쪽의 사독은 아비아달만큼 그 가문의 입지가 빵빵하지 못했고, 브나야 역시 군부의 수장인 요압과 정면으로 대치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밧세바와 선지자 나탄이 다윗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다윗은 전에 밧세바와 한 약속도 있었기 때문에 또 다른 대제사장 사독과 브나야를 불러들인 뒤 아도니야 일파가 손을 쓸 틈도 주지 않고 직접 왕위를 넘겨줘버렸다.[11] 이로 인해 아도니야 일파는 한 순간에 역적으로 몰려서 공중분해되었다.[12] 역사적으로 왕에게 사랑받는 아내가 기존의 후계자를 몰아내고 자기 아들을 세우려 한 경우는 많았는데, 그 시도가 성공한 예 중 하나. 만일 솔로몬이 암군이었다면 다윗은 '애처의 꾐에 홀려 띨띨한 후계자를 정해 나라를 망쳤다'라는 평을 들었겠지만 솔로몬이 명군이라서 다윗의 선견지명이 발휘된 것으로 남게 되었다. 허나 솔로몬은 이스라엘 왕국 최대 전성기를 이룩하긴 하지만 동시에 쇠퇴의 원인도 제공하기도 했다.
본래 그가 다음 왕의 자리를 이을 가능성은 희박했는데, 비록 다윗의 총애를 받는 밧세바의 소생이었지만 왕위 계승 서열은 낮았기 때문이었다.[6] 당시 다윗의 아들 중 계승 서열이 가장 높았던 이는 넷째였던 아도니야였는데, 첫째 아들이었던 암논은 셋째 압살롬의 칼에 살해당했고[7], 둘째인 길르압은 요절했으며, 압살롬은 무리하게 왕위 계승을 시도하다가 요압의 창에 살해당했다. 게다가 아도니야의 배후에는 이스라엘의 군대 사령관 요압과 대제사장 아비아달이 지원하고 있었다.[8] 특히 요압은 다윗의 전성기를 이끈 불세출의 명장이자, 부왕의 정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유다 지파 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어 다윗조차 그를 제거하려다가 실패한 전적이 있던 희대의 권신이었다.[9] 솔로몬을 지지하던 제사장 사독과 근위대장 브나야가 있었지만, 아도니야 쪽의 대제사장 아비아달이 비록 사울 왕에게 일족이 학살당하기는 했어도 판관 시절부터 쭉 이어져 오고 있던 엘리 계열의 지체높은 명문 제사장 가문이었던 것[10]에 반해, 솔로몬 쪽의 사독은 아비아달만큼 그 가문의 입지가 빵빵하지 못했고, 브나야 역시 군부의 수장인 요압과 정면으로 대치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밧세바와 선지자 나탄이 다윗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다윗은 전에 밧세바와 한 약속도 있었기 때문에 또 다른 대제사장 사독과 브나야를 불러들인 뒤 아도니야 일파가 손을 쓸 틈도 주지 않고 직접 왕위를 넘겨줘버렸다.[11] 이로 인해 아도니야 일파는 한 순간에 역적으로 몰려서 공중분해되었다.[12] 역사적으로 왕에게 사랑받는 아내가 기존의 후계자를 몰아내고 자기 아들을 세우려 한 경우는 많았는데, 그 시도가 성공한 예 중 하나. 만일 솔로몬이 암군이었다면 다윗은 '애처의 꾐에 홀려 띨띨한 후계자를 정해 나라를 망쳤다'라는 평을 들었겠지만 솔로몬이 명군이라서 다윗의 선견지명이 발휘된 것으로 남게 되었다. 허나 솔로몬은 이스라엘 왕국 최대 전성기를 이룩하긴 하지만 동시에 쇠퇴의 원인도 제공하기도 했다.
종교를 떠나서, 솔로몬은 지혜로운 왕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창녀 둘이 왕에게 나와 섰다.
그 가운데 한 여자가 말을 꺼냈다. "임금님, 이 여자와 저는 한 집에 살고 있습니다. 제가 아이를 낳을 때에 이 여자도 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해산한 지 사흘째 되던 날 이 여자도 아이를 낳았습니다. 집에는 우리 둘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 이 여자는 자기의 아들을 깔아 뭉개어 죽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여자는 한밤중에 일어나 이 계집종이 잠자는 사이에 제 곁에 있던 제 아들을 가져가 버렸습니다. 제 아들을 가져다 자기 품에 두고 죽은 자기 아들을 제 품에 놓고 간 것입니다.
제가 아침에 일어나 젖을 먹이려다 보니 아이는 죽어 있었습니다. 날이 밝아서야 그 아이가 제 몸에서 난 아이가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다른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느냐? 산 아이는 내 아이이고 죽은 아이가 네 아이야." 하고 우겼다. 첫 번째 여자도 "천만에! 죽은 아이가 네 아이이고 산 아이는 내 아이야." 하고 우겼다. 그렇게 그들은 왕 앞에서 말싸움을 벌였다.
그 때 왕이 입을 열었다. "한 사람은 '산 이 아이가 내 아들이고 네 아들은 죽었다.' 하고 또 한 사람은 '아니다. 네 아들은 죽었고 내 아들이 산 아이다.' 하는구나."
그러면서 왕은 칼 하나를 가져오라고 하였다. 신하들이 왕 앞으로 칼을 내오자
왕은 명령을 내렸다. "그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쪽은 이 여자에게 또 반쪽은 저 여자에게 주어라."
그러자 산 아이의 어머니는 제 자식을 생각하여 가슴이 메어지는 듯하여 왕에게 아뢰었다. "임금님, 산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시고 아이를 죽이지만은 마십시오." 그러나 다른 여자는 "어차피 내 아이도 네 아이도 아니니 나누어갖자." 하였다.
그러자 왕의 분부가 떨어졌다. "산 아이를 죽이지 말고 처음 여자에게 내주어라. 그가 참 어머니다."
온 이스라엘이 왕의 이 판결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왕에게 하느님의 슬기가 있어 정의를 베푼다는 것을 알고는 모두들 왕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한 명의 아이를 가지고 다투는 두 여인 앞에서 아이를 반으로 나누자고 함으로써 진짜 어머니를 찾아 내고 거짓말을 한 여인을 처벌을 내리는 이야기가 유명하다.[14]
성서는 아니지만 탈무드에 수록된 안식일에 돈을 도둑맞은 세 명의 상인 예화도 매우 유명하다. 세명의 상인이 함께 일을 하며 돈을 모았고, 그 돈을 셋만 아는 장소에 숨겨두었다. 하지만 어느 날 그 돈이 사라지고, 셋은 장소를 아는건 자신들 뿐이니 이 안에 도둑이 있다고 생각하며 솔로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솔로몬은 세 사람의 상인들 중에서 누가 친구들의 돈을 훔친 범인인지 가려달라는 요구에 무척 골치 아픈 송사가 있다면서 한 남자와 약혼을 파기한 사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15] 이야기를 마치고 솔로몬은 세 상인에게 "누가 가장 칭찬받아 마땅한가?"라고 물었다. 두 명의 상인은 각각 파혼을 흔쾌히 받아준 남자에 대해, 용기를 내어 진정한 사랑을 선택한데다가 전 연인에게 위자료까지 주려고 한 여인에 대해 칭찬했으나, 나머지 한 사람은 돈도 안받고 사람을 풀어주는 건 너무 말이 안된다고 황당해하는 답을 했다. 그러자 솔로몬은 "이놈! 네가 친구들의 돈을 훔친 범인이다. 다른 두 사람은 이야기 속의 복잡한 감정과 긴장을 알아챘는데, 너는 처음부터 돈밖에 생각하지 않았다."라며 단박에 범인을 찾아냈다.
이슬람교의 쿠란에도 등장하며, 특히 사람과 진(마신), 모든 동물들을 마음대로 다스리는 능력과 반지가 유명하다.[16] 아랍어로는 술라이만(سليمان). 마찬가지로 이슬람권인 튀르키예어로는 쉴레이만(Süleyman)이다. 버튼이 번역한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진이 등장하는 에피소드에는 정말 한 번도 안 빠지고 이 이름이 나온다. 특히 이슬람교의 경우, 선지자 이전의 예언자 중 하나이며, 신에게 인정받은 왕으로서, 부친 다윗과 둘 카르나인(Dhul Qarnayn)과 함께 항상, 가장 훌륭한 세 명군 중 하나로 존경받는다.[17] 덧붙여, 이슬람교에서는 후술할 솔로몬의 타락이나 우상 숭배 같은 것은 인정하고 있지 않으며, 사망 시의 묘사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서서 잠들었으며, 신이 그가 짚은 지팡이를 서서히 약하게 하여 천천히 잠들듯 뉘였다고 한다. 여러모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이상적인 왕" 유형의 인물로 묘사된 듯. 또 성경에서는 그냥 단역에 지나지 않는 시바의 여왕과 관련된 많은 전승이 아랍에 내려오고 있다. 또한, 같은 아브라함 계통 종교로 분류되는 바하이 교에서도 예언자로서 대우받는다.
정교회에서는 "올바른 예언자이자 왕"으로서 성인으로 인정받는다. 그 외로, 기독교권 성경 인물 중 지혜와 번영, 그리고 성전 헌당으로 가장 유명한 "왕"인 만큼, 후대의 (다분히 세속적이던) 중세 교황이나 왕들의 모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펠리페 2세는 솔로몬을 모방하여 그의 성전을 따라 스페인에 엘 에스코리알(El Escorial) 을 만들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하기아 소피아의 헌당식에서 "솔로몬이여, 나는 그대를 이겼노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바티칸에 있는 시스티나 경당의 도안(치수) 또한 솔로몬 신전의 치수를 본떴으며, 내부 프레스코에서는 르네상스식으로 해석한 성전이 그려져 있다. 그 유명한 샤를마뉴 또한 앨퀸의 기록에 따르면, 스스로를 다윗이자 솔로몬으로 여기고, 또 그러한 찬사를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지배층의 인식 이외로도, 14세기의 주교 Jacobus de Teramo가 법률을 설명하기 위해 집필한 책 <Liber Belial>에서는 모세가 변호하는 예수와 악마 벨리알의 재판의 판관으로 놓여지는 등 중세 서양에서는 아버지 다윗과 함께 존경(혹은 좋은 이미지)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의 지혜는 야훼에게서 받았다고 한다. 성경을 찾아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다윗 말기에 그의 아들로서 왕위를 받게 된 솔로몬은 일천번제라는 걸 신께 드렸다고. 이는 소 1,000마리를 번제(燔祭)라는 형식의 제사로 드린 것을 말한다.[18][19] 여기까지만 해도 경악할 지경인데, 문제는 번제라는 게 그냥 태우기만 해서는 안되고, 소를 도살하는 방법부터 나누는 방법에까지 꽤나 품이 들어가는 제사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렇게 잡은 제물이 제사 율례에 따라 제사장과 그 휘하 성직자들(레위 지파)에게 나뉘어졌음을 생각하면, 성직자들로서는 고된 일이 아니라 좋은 선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레위 지파라는 거대한 지파는 성직자 계층으로 묶여 있어 재산도 없고 사회 활동이 제한된 상황이었기에,[20] 소 1,000마리를 처리하는 것은 그들로서는 오히려 반가운 일이었다. 딸린 식솔도 많았고, 일단 제사장에게 주고 나면 제사장이 그것을 일반 백성들에게 나눠줘서 같이 먹는 것도 가능하니, 1,000마리 분량의 쇠고기 처리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솔로몬이 좋은 왕이 되길 바라는 백성들의 기도를 들은 건지, 솔로몬이 소를 1,000마리나 태운 정성이 갸륵해서인지[21] 신이 솔로몬의 제사에 답하여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었다. 그는 다른 것도 아니고 그저 나라를 잘 다스리고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했다.
'나라를 잘 다스릴 지혜'는 누구나 수긍하겠지만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에는 조금 의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구약에서의 관점을 보면 선악의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솔로몬이 말한 선악은 단순히 옳고 그름을 뜻하는 게 아니라, 야훼를 잘 섬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구약, 신약, 쿠란 가리지 않고 아브라함 계통 종교는 하나같이 야훼/하나님/알라가 최고존엄이기에 그를 잘 섬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다. (애초에 이 계통 종교에서는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신의 뜻이다.) 예시로 후세의 연구로는 괜히 아시리아에게 시비걸었다가 남유다 전체가 초토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던 걸로 추정되는 히즈키야는 야훼를 잘 모셨다는 이유만으로 선하다고 평가받은 반면, 박살난 남유다를 되살린 것뿐만 아니라 중흥기를 가져온 므나쎄는 아시리아에 굽실거리고 그들의 신을 받아들였다며 악하다고 평가받는다. 또 성경에서 최초의 남녀인 아담과 이브는 신이 직접 창조한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선악과를 먹어 죄악을 저질렀고 이스라엘, 유다 가리지 않고 최고의 평가를 받는 그 다윗마저 소소한 잘못을 저지르고 그 후손들 중에서 악하다는 평을 받는 왕이 여럿 나왔을 뿐더러 북이스라엘은 아예 재위했던 모든 왕들이 악하다고 평가받는다.
신은 그의 바람에 만족했고, 지혜롭다고 칭찬하며 그에게 더한 지혜와 함께 솔로몬 이후로 그와 같은 지혜를 가진 자는 없을 것이라고 복을 내렸고, 솔로몬이 청하지 않았던 부귀영화, 그리고 장수까지 덤으로 줬다. "깨어나 보니 꿈이었다"라는 구절이 있다. 오해 하면 안되는 것이 얼굴을 직접 본자는 성경에 아무도 없다. 모세같은 큰 주의종도 하나님께서 등만 보여주셨다. 사유는 하나님의 실제모습을 보면 교만해져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 하게 여길까봐였다.
이때, 솔로몬이 신에게 부탁한 지혜는 히브리어 원문으로는 לֵ֤ב שֹׁמֵ֙עַ֙ 즉, 이해력이므로 지혜가 아닌 지식습득능력으로 파악하는 것도 가능하다.[22]
성서는 아니지만 탈무드에 수록된 안식일에 돈을 도둑맞은 세 명의 상인 예화도 매우 유명하다. 세명의 상인이 함께 일을 하며 돈을 모았고, 그 돈을 셋만 아는 장소에 숨겨두었다. 하지만 어느 날 그 돈이 사라지고, 셋은 장소를 아는건 자신들 뿐이니 이 안에 도둑이 있다고 생각하며 솔로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솔로몬은 세 사람의 상인들 중에서 누가 친구들의 돈을 훔친 범인인지 가려달라는 요구에 무척 골치 아픈 송사가 있다면서 한 남자와 약혼을 파기한 사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15] 이야기를 마치고 솔로몬은 세 상인에게 "누가 가장 칭찬받아 마땅한가?"라고 물었다. 두 명의 상인은 각각 파혼을 흔쾌히 받아준 남자에 대해, 용기를 내어 진정한 사랑을 선택한데다가 전 연인에게 위자료까지 주려고 한 여인에 대해 칭찬했으나, 나머지 한 사람은 돈도 안받고 사람을 풀어주는 건 너무 말이 안된다고 황당해하는 답을 했다. 그러자 솔로몬은 "이놈! 네가 친구들의 돈을 훔친 범인이다. 다른 두 사람은 이야기 속의 복잡한 감정과 긴장을 알아챘는데, 너는 처음부터 돈밖에 생각하지 않았다."라며 단박에 범인을 찾아냈다.
이슬람교의 쿠란에도 등장하며, 특히 사람과 진(마신), 모든 동물들을 마음대로 다스리는 능력과 반지가 유명하다.[16] 아랍어로는 술라이만(سليمان). 마찬가지로 이슬람권인 튀르키예어로는 쉴레이만(Süleyman)이다. 버튼이 번역한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진이 등장하는 에피소드에는 정말 한 번도 안 빠지고 이 이름이 나온다. 특히 이슬람교의 경우, 선지자 이전의 예언자 중 하나이며, 신에게 인정받은 왕으로서, 부친 다윗과 둘 카르나인(Dhul Qarnayn)과 함께 항상, 가장 훌륭한 세 명군 중 하나로 존경받는다.[17] 덧붙여, 이슬람교에서는 후술할 솔로몬의 타락이나 우상 숭배 같은 것은 인정하고 있지 않으며, 사망 시의 묘사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서서 잠들었으며, 신이 그가 짚은 지팡이를 서서히 약하게 하여 천천히 잠들듯 뉘였다고 한다. 여러모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이상적인 왕" 유형의 인물로 묘사된 듯. 또 성경에서는 그냥 단역에 지나지 않는 시바의 여왕과 관련된 많은 전승이 아랍에 내려오고 있다. 또한, 같은 아브라함 계통 종교로 분류되는 바하이 교에서도 예언자로서 대우받는다.
정교회에서는 "올바른 예언자이자 왕"으로서 성인으로 인정받는다. 그 외로, 기독교권 성경 인물 중 지혜와 번영, 그리고 성전 헌당으로 가장 유명한 "왕"인 만큼, 후대의 (다분히 세속적이던) 중세 교황이나 왕들의 모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펠리페 2세는 솔로몬을 모방하여 그의 성전을 따라 스페인에 엘 에스코리알(El Escorial) 을 만들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하기아 소피아의 헌당식에서 "솔로몬이여, 나는 그대를 이겼노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바티칸에 있는 시스티나 경당의 도안(치수) 또한 솔로몬 신전의 치수를 본떴으며, 내부 프레스코에서는 르네상스식으로 해석한 성전이 그려져 있다. 그 유명한 샤를마뉴 또한 앨퀸의 기록에 따르면, 스스로를 다윗이자 솔로몬으로 여기고, 또 그러한 찬사를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지배층의 인식 이외로도, 14세기의 주교 Jacobus de Teramo가 법률을 설명하기 위해 집필한 책 <Liber Belial>에서는 모세가 변호하는 예수와 악마 벨리알의 재판의 판관으로 놓여지는 등 중세 서양에서는 아버지 다윗과 함께 존경(혹은 좋은 이미지)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의 지혜는 야훼에게서 받았다고 한다. 성경을 찾아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다윗 말기에 그의 아들로서 왕위를 받게 된 솔로몬은 일천번제라는 걸 신께 드렸다고. 이는 소 1,000마리를 번제(燔祭)라는 형식의 제사로 드린 것을 말한다.[18][19] 여기까지만 해도 경악할 지경인데, 문제는 번제라는 게 그냥 태우기만 해서는 안되고, 소를 도살하는 방법부터 나누는 방법에까지 꽤나 품이 들어가는 제사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렇게 잡은 제물이 제사 율례에 따라 제사장과 그 휘하 성직자들(레위 지파)에게 나뉘어졌음을 생각하면, 성직자들로서는 고된 일이 아니라 좋은 선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레위 지파라는 거대한 지파는 성직자 계층으로 묶여 있어 재산도 없고 사회 활동이 제한된 상황이었기에,[20] 소 1,000마리를 처리하는 것은 그들로서는 오히려 반가운 일이었다. 딸린 식솔도 많았고, 일단 제사장에게 주고 나면 제사장이 그것을 일반 백성들에게 나눠줘서 같이 먹는 것도 가능하니, 1,000마리 분량의 쇠고기 처리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솔로몬이 좋은 왕이 되길 바라는 백성들의 기도를 들은 건지, 솔로몬이 소를 1,000마리나 태운 정성이 갸륵해서인지[21] 신이 솔로몬의 제사에 답하여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었다. 그는 다른 것도 아니고 그저 나라를 잘 다스리고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했다.
'나라를 잘 다스릴 지혜'는 누구나 수긍하겠지만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에는 조금 의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구약에서의 관점을 보면 선악의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솔로몬이 말한 선악은 단순히 옳고 그름을 뜻하는 게 아니라, 야훼를 잘 섬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구약, 신약, 쿠란 가리지 않고 아브라함 계통 종교는 하나같이 야훼/하나님/알라가 최고존엄이기에 그를 잘 섬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다. (애초에 이 계통 종교에서는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신의 뜻이다.) 예시로 후세의 연구로는 괜히 아시리아에게 시비걸었다가 남유다 전체가 초토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던 걸로 추정되는 히즈키야는 야훼를 잘 모셨다는 이유만으로 선하다고 평가받은 반면, 박살난 남유다를 되살린 것뿐만 아니라 중흥기를 가져온 므나쎄는 아시리아에 굽실거리고 그들의 신을 받아들였다며 악하다고 평가받는다. 또 성경에서 최초의 남녀인 아담과 이브는 신이 직접 창조한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선악과를 먹어 죄악을 저질렀고 이스라엘, 유다 가리지 않고 최고의 평가를 받는 그 다윗마저 소소한 잘못을 저지르고 그 후손들 중에서 악하다는 평을 받는 왕이 여럿 나왔을 뿐더러 북이스라엘은 아예 재위했던 모든 왕들이 악하다고 평가받는다.
신은 그의 바람에 만족했고, 지혜롭다고 칭찬하며 그에게 더한 지혜와 함께 솔로몬 이후로 그와 같은 지혜를 가진 자는 없을 것이라고 복을 내렸고, 솔로몬이 청하지 않았던 부귀영화, 그리고 장수까지 덤으로 줬다. "깨어나 보니 꿈이었다"라는 구절이 있다. 오해 하면 안되는 것이 얼굴을 직접 본자는 성경에 아무도 없다. 모세같은 큰 주의종도 하나님께서 등만 보여주셨다. 사유는 하나님의 실제모습을 보면 교만해져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 하게 여길까봐였다.
이때, 솔로몬이 신에게 부탁한 지혜는 히브리어 원문으로는 לֵ֤ב שֹׁמֵ֙עַ֙ 즉, 이해력이므로 지혜가 아닌 지식습득능력으로 파악하는 것도 가능하다.[22]
솔로몬의 통치하에 통일 이스라엘은 최대 번영기를 구가하였는데, 예루살렘에서는 하도 은이 많아 마치 돌 같이 여기며 귀하게 보지도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조공으로 받는 금만 해도 매해 666 달란트(39,960 파운드 = 약 18,000 kg)였다고. 금 666달란트 정도면 지금 기준으로 약 "1.3조 원"에 해당한다. 또한 시대마저 잘 만났는지, 당대 중동의 맹주 위치에 있던 이집트 제 21왕조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며 솔로몬 통치하의 이스라엘은 보다 더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3]
성전 건축을 할 당시에는 페니키아(레바논에 있던 고대 국가)의 중심이었던 티레에서 히람 왕이 보낸 기술자가 와서 도왔는데, 목재로 쓸 엄청난 양의 백향목[24]들을 벌목하여 여러 개의 뗏목으로 엮어 공수했다고 한다. 티레는 히람 시절 때 번영했는데, 솔로몬은 그와 결혼동맹을 맺고 서로 같이 무역을 하기도 하는 등 경제적 교류가 활발했다고 한다. 이 덕분에 페니키아인들과 함께 동방진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때 아프리카를 넘어 인도, 멀리는 중국까지 갔다는 설이 있다.
또한 성경의 묘사에 따르면 성전 이외에도 호화로운 궁을 건축하였으며, 전성기 이스라엘의 넓은 강역을 여러 개의 지역으로 구분하고 총독을 보내어 통치했다고 한다.[25] 또한 홍해로 통하는 에시온게벨 등 여러 곳에 항구를 지어 무역을 활성화했으며,[26] 동시에 국방에도 신경을 써 전략적 위치에 있는 므깃도 등지에 병거를 정비하고 성을 세워 일종의 요새 도시, 혹은 성새 도시로 만들었다.[27]
성전 건축을 할 당시에는 페니키아(레바논에 있던 고대 국가)의 중심이었던 티레에서 히람 왕이 보낸 기술자가 와서 도왔는데, 목재로 쓸 엄청난 양의 백향목[24]들을 벌목하여 여러 개의 뗏목으로 엮어 공수했다고 한다. 티레는 히람 시절 때 번영했는데, 솔로몬은 그와 결혼동맹을 맺고 서로 같이 무역을 하기도 하는 등 경제적 교류가 활발했다고 한다. 이 덕분에 페니키아인들과 함께 동방진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때 아프리카를 넘어 인도, 멀리는 중국까지 갔다는 설이 있다.
또한 성경의 묘사에 따르면 성전 이외에도 호화로운 궁을 건축하였으며, 전성기 이스라엘의 넓은 강역을 여러 개의 지역으로 구분하고 총독을 보내어 통치했다고 한다.[25] 또한 홍해로 통하는 에시온게벨 등 여러 곳에 항구를 지어 무역을 활성화했으며,[26] 동시에 국방에도 신경을 써 전략적 위치에 있는 므깃도 등지에 병거를 정비하고 성을 세워 일종의 요새 도시, 혹은 성새 도시로 만들었다.[27]
그러나 왕이라고 해도 군마를 많이 기르는 일만은 하지 못한다. 백성을 이집트로 다시 보내어 군마를 많이 얻어오게 해도 안 된다. 너희가 그리로 되돌아가지 못하리라고 야훼께서 너희에게 일러두시지 않았느냐?
왕은 또 많은 후궁을 거느리지 못한다. 그러면 마음이 다른 데로 쏠릴 것이다. 은과 금을 너무 많이 모아도 안 된다.신명기 17:16~17
나는 그들을 꾸짖고 욕하였다. 더러는 때리며 머리를 뽑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게 하였다. "너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민족을 사위나 며느리 또는 아내로 맞아들이지 않겠다고 맹세하여라.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죄를 지은 것도 이런 여인들 때문이 아니었더냐? 세상에 많은 민족이 있었지만 그만한 임금이 어디 있었느냐? 하느님께서 그를 사랑하시어 온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워주셨지만, 그분도 다른 나라 여인들 때문에 죄를 지었다.느헤미야 13:25~26
하나 이런 영광과 풍요를 구가했던 그도, 늙으면서 몸이 쇠약해져갔고, 나이를 먹은 후에 점점 향락에 빠져 처첩들과 놀고먹는데 열중하기 시직하여 조금씩 지혜도 쇠락해간다. 결국 젊은 첩들이 그에게 강한 힘을 행사[28], 그가 젊을 때 강성했던 나라는 노년기부터 조금씩 쇠락해 간다.
야훼의 사랑을 그렇게 많이 받은 솔로몬이 말년에 왜 그렇게 타락하고 다른 신을 섬기게 되었는지에 대해, 성경에서는 자세하고도 분명하게 나온다.(열왕기상 11장)[29] 솔로몬이 타락한 이유가 여자 때문이라고 한다. 너무나 많은 이교도 여자들을 첩으로 두게 되어서 그들의 문화에 동화되었고 따라서 그들의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기 때문에 신의 길로부터 멀어졌다고 한다.[30]
일찍이 모세의 율법에서도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을 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방인들과의 혼인을 금하고 있다. 실제로 민수기에서 발람이 이스라엘이 죄를 짓게 하기 위해 발락에게 첫 번째로 조언했던 것도 모압인과의 혼인이었다. 모세도 이방여인과 혼인하여 형인 아론과 누나인 미리암에게 책망을 받는다.[31] 솔로몬의 이러한 행적은 훗날 예언서 화자들에 의해 죄를 지은 자로서 부각되고 만다.
그래도 결국 말년에 잠언과 전도서 등을 쓰며 회개하는 모습을 보인다. 야훼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너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내 명령을 계속해서 어기는 큰 죄를 지었으니 이 나라를 빼앗아 네 신하에게 줄 것이다. 그러나 네 아버지 다윗을 생각해서라도 지금 당장은 아니고 네가 죽고 난 후 네 아들 대에 그렇게 하되, 내가 택한 다윗과 예루살렘을 위해서 전부 빼앗지도 않고 한 지파는 네 아들에게 남겨 주겠다."이라고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단에 후술) 이건 신이 다윗 생전에 다윗에게 자손들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다윗이 사고는 많이 쳤어도 신만을 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그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르호보암 즉위 직후 이스라엘은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갈라진다.[32]
신명기 17:16-17에도 왕이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고(백성을 애굽의 길로 인도할 것), 아내를 많이 두지 말고(마음이 미혹됨), 은금(스스로를 위함)을 많이 두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열왕기상엔 은을 돌같이 할 정도로 과도한 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병거가 1,400대, 마병이 12,000명에 왕후가 칠백, 후궁이 삼백이라할 정도로 많이 두었다. 신명기에서 왕이 된 자가 하지 말아야 할 모든 계명을 어긴 셈이다. 이후에는 이교도 여성의 문물로 인한 우상숭배로 인해 계명을 어긴 댓가로 나라를 빼앗아 신하에게 줄 것이 예언된다. 다만 아비인 다윗을 생각해서 솔로몬 대엔 하지 않고 그 아들대에 나라를 빼앗길 것이라 한다.이건 르호보암 입장에서 할아버지 되는 다윗이 하나님 말씀에 잘 순종하였고 우리아의 아내였던 밧세바를 탐하는 죄를 지었으나 이내 회개하고 바른길을 따르며 일생을 살았던 영향인 것이다.
결국 솔로몬은 말년에 전도서를 쓰면서, 일생 동안 엄청난 지혜와 많은 부로 온갖 것을 다 해보고도 모든 것이 헛되더라라는 명언을 남기며 그러니 너는 젊었을 때 네 신을 찾으라는 말을 남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분열과 몰락의 징조는 그의 치세 중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솔로몬 치세에 이미 남쪽 에돔의 하닷과 북쪽 아람의 르손이 거병하여 다윗이 이루어놓은 강역의 절반이 날아간 상태였다. 이들은 본래 다윗에게 나라가 망하고 쫓겨다니던 인물이었는데 다윗이 죽고 요압까지 숙청당해 이스라엘에 이렇다할 군지휘관이 없어진 상황을 틈타 다시 돌아와 나라를 다시 일으킨 것이다. 이로인해 솔로몬 치세에 사울왕 시절의 이스라엘 본연의 영토밖에 남지않은 상태였고 남북으로 지속적으로 공격당해 국가가 지속적으로 쇠퇴하던 상태였다. 고대에는 군사적 실적이 정권의 존속에 차지하는 비중에 절대적이었던 만큼 이스라엘 몰락에 요압 숙청으로 인한 군사력 저하도 큰 요인이었다. 국방부터 무너지던 상태였기에 이스라엘 내부의 동요도 커질 수 밖에 없어 각 지파들이 솔로몬 왕가의 지배력에 의심을 품을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셰숑크 1세[33]가 제 22왕조를 열면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며, 그의 사후 왕위를 이은 르호보암은 폭군으로 묘사된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올랐을 때, 이집트에서 귀국한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한 백성들이 "솔로몬 부왕께선 너무 가혹하셨는데 르호보암 왕께서 저희 세금과 노역 좀 줄여 주세요"라고 한 걸 보면 솔로몬은 의외로 백성들을 꽤 쥐어짰던걸로 보인다.[34] 물론 르호보암은 "내 새끼손가락은 울 아버지 허리보다 굵고, 울 아버지가 너희를 채찍으로 다스렸으니 난 전갈로 너희를 다스리겠다"[35]며 깔끔하게 묵살했고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은 이에 반발하여 독자적인 나라를 세워 버린다.[36] 이후의 이스라엘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남(南) 유다 왕국과 에브라임 지파를 필두로 한 10지파의 북(北) 이스라엘로 갈라지게 되었으며,[37] 각각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에 정복당하기 전까지[38] 한 번도 다시 통일되지 못하였다.
여러모로 공과 과가 명확한 사람이다. 이 사람이 만든 결과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아버지 다윗이 물려준 탄탄한 국가를 나름 잘 유지하다가 끝에 가서 사치와 향락으로 망쳐버린 원흉. 즉 솔로몬 시대의 번영은 사실상 "속빈 강정"이였던 셈이다.[39] 그는 분명히 명군의 자질이 있었고 즉위 이후에도 나라를 성실히 이끌어갔다. 그의 통치기는 이스라엘의 절정기였으며 은이 바닥에 굴러다닐 정도로 부강했던 시기였다. 대외적으로도 위상이 높아져서 이집트 제 21왕조와 결혼 동맹을 맺고 주변국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등 입지를 굳혀나갔다. 또한 국방과 행정에도 신경을 써서 군사력을 보강하고 지방에 총독을 파견하는 등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전제 왕권을 구축해나갔다. 성경만 봐서는 이해가 안될 수 있지만 역사책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군사력 보강과 지방관 파견은 왕권을 구축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해가 안된다면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제일 먼저 한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문제는 그가 이렇게 만든 결과물을 가지고 축첩질을 일삼으며 놀아재꼈다는 것. 사실 그의 치세는 겉으로는 부강해 보였으나 속은 썩어가는 기아의 성세, 속빈 강정이었다. 앞서 언급된 신명기 17:16-17은 너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은 두개의 나라로 갈라질 것이나 다만 너의 아버지 다윗을 생각해서 네가 아닌 너의 아들 대에 갈라지리라고 언급한다. 다시 말하면 솔로몬 시대의 번영은 솔로몬이 단독으로 만든 결과가 아니라 아버지 다윗이 신과 함께함으로 인해 만들어진 결과인 것.[40] 즉, 다윗 대에 다져진 것을 바탕으로 솔로몬 대에 전성기를 누린 것이 맞다. 물론 솔로몬이 못하기만 했다는 것은 아니고 명군의 자질은 분명히 드러났으나 아버지 다윗에 비하면 역량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더욱히 그가 막대한 조공을 받고 그것을 바탕으로 축첩질에 골몰하면서 결과적으로 신을 섬기는 선민[41]으로서의 본질을 스스로 버리게 되었고 예전의 보여왔던 지혜와 명군으로서의 자질 역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솔로몬의 타락에 대한 열왕기의 기록의 비판적 평가에 대해서는 견해 차가 있을 수 있다. 왕실 역사가들의 사관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역대기와는 달리 열왕기에는 예언자들의 사관이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예언자들의 사관은 아무래도 왕실 역사가들에 비해서는 왕국에 대해 비판적일 것이다. 가령 역시 예언자들의 사관이 반영되었을 사무엘서에서는 왕정 자체가 신정이 아니기에 신의 뜻에 어긋난다고 비판하면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솔로몬의 정책들에 대해서도 열왕기는 비판적인 관점을 우선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솔로몬이 궁궐을 건축하고 사치와 호화를 누렸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왕실이 정당한 부와 영광을 누리고 드러내는 것을 공연히 문제삼는다고 항변할 수 있다. 사실 사치가 나쁜건 맞지만 전근대에는 사치가 곧 자기과시(=나는 이렇게 사치할 정도로 부유하다)인 경우도 많았고 이런 자기과시는 자신의 권위와도 연관되기에 군주들 중에서는 사치하는 왕도 종종 나오곤 했다.[42]
외국 여인들을 첩실로 삼았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이는 외교의 일환이라고 항변할 수 있다. 다른 나라의 왕족과 귀족의 여인들과 혼인 관계를 맺는 것은 가장 확실한 동맹의 방법이자 효율적인 외교 전략이다. 순혈주의적인 예언자 전통의 관점에서는 문제이겠지만, 왕실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불가피한 외교적 선택이다.[43] 신이 사랑한 왕 다윗도 암몬 왕의 딸이나 헷 사람의 아내 등 외국의 여인들과 결혼하였음은 마찬가지인데, 솔로몬만 비난을 받아야 한다면 부당하다.[44] 하지만 혼인동맹이 확실한 외교적인 안전장치가 되지 않는다는 사례는 역사상 무수히 많고 솔로몬 또한 이집트 파라오의 딸과 결혼한것이 이집트의 왕조교체로 인해 의미가 없는 일이 되어 이집트의 반이스라엘 정책을 막지 못해 이집트가 여로보암의 망명을 받아주고 르호보암 치세때 예루살렘을 침공해오는 지경에 이르렀다.[45]
솔로몬이 우상을 숭배하고 우상을 위해 신전을 건축했다고 비판을 받지만, 솔로몬이 신앙을 버렸다기 보다는 다른 종교를 관용하는 정책을 채택한 것이 배타주의적 예언자들에게 그렇게 인식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예언자들의 입장에서는 솔로몬이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관용하는 것'이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장려하는 것'과 진배 없고, 나아가 그 스스로 '다른 신을 섬기는 것'과도 진배 없다고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세계 각국의 상인들이 교류하는 중심지인 수도의 나라를 통치하는 왕으로서는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하고 존중하는 정책을 채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람 장군 나아만이 신을 믿으면서도 자신이 충성을 바치는 왕이 우상에 절을 할 때 어쩔 수 없이 그 옆에서 부축하는 일을 예언자 엘리사가 허용했던 취지를 고려하여 솔로몬의 행적도 평가해야 할 것이다.
다만 이는 당시 이스라엘 왕국의 내부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설명인데, 다윗 왕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각 지파의 연계성은 상당히 느슨한 편이라, 각 지파간의 내전도 몇번 일어났다.[46] 이 상황에서 왕정 이전시기에는 각 지파를 연결해 주는것이 종교지도자인 (사사/판관)이었듯이, 유대교는 각 지파의 연계성을 강화시켜주는 장치였다.[47] 분열된 북 이스라엘 왕국이 초창기에 유다왕국과의 연계를 끊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한것중 하나가 제사지내는 곳의 위치변경이었던 점에서도 이런 부분이 드러난다. 그런데 타종교를 받아들이는 정책은 이런 연계성을 약화시키는 것이었지, 강화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걸 고려해도 솔로몬이 도를 많이 넘은 것은 맞다. 교류나 외교적 차원에서의 혼인은 그렇다 쳐도, 문제는 지나치게 방탕했다. 교류를 해도 지킬 건 지켜야 되는데, 왕이 앞장서서 놀아재끼고 있으니 나라가 망하는 건 당연하다. 결국 솔로몬은 이스라엘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하는 데 일조하게 되었다. 신생왕조에 불과했던 이스라엘은 솔로몬 사후 절단이 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여로보암의 북 이스라엘이 210년, 다윗 혈통의 남유다가 350년 정도를 유지했다는 점. 비록 성경에 묘사된 다윗-솔로몬 시절만큼 세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간간이 모압, 암몬, 에돔 등을 위압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긴 했다.부잣집은 망해도 3년은 간다더라
정리하자면 여러모로 후대의 군주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만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명군의 모습과 암군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는 입체적인 인물이기 때문. 사실 군주의 자리가 여러모로 초심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은 맞다. 전세계 어느나라를 봐도 군주가 초심을 잃고 타락한 사례는 많고 대놓고 십전노인, 신선이라고 자처한 건륭제 같은 사람도 있었으니 솔로몬 정도면 그나마 얌전했다고 볼 수도 있다.[48] 그러나 솔로몬을 통해 성경이 후대에게 말하고 싶은 바는 바로 겸양과 자아성찰의 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49]
솔로몬이 재위 초반에는 지혜를 구하며 근면하게 왕국을 통치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 이후에 자신의 욕심을 앞세워 다른 나라를 정복하며 영토를 확장하면서부터 안에서부터 서서히 곪아갔던 것은 지도자 한 사람의 교만과 타락이 얼마나 큰 재앙으로 이어지는지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역사가들이 과거에 나라를 크고 아름답게 만든 군주를 이상적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내치와 경제력을 안정시킨 군주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 시각과도 일치한다. 즉 솔로몬이라는 인물은 단순히 "놀아재꼈다"라는 측면보다는 나라를 크고 넓게 만들 능력은 있었으나 발전한 왕국을 다스릴 장기적으로 보는 안목이 부족해 현실에 안주한 것에 가깝다.
문제는 그가 이렇게 만든 결과물을 가지고 축첩질을 일삼으며 놀아재꼈다는 것. 사실 그의 치세는 겉으로는 부강해 보였으나 속은 썩어가는 기아의 성세, 속빈 강정이었다. 앞서 언급된 신명기 17:16-17은 너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은 두개의 나라로 갈라질 것이나 다만 너의 아버지 다윗을 생각해서 네가 아닌 너의 아들 대에 갈라지리라고 언급한다. 다시 말하면 솔로몬 시대의 번영은 솔로몬이 단독으로 만든 결과가 아니라 아버지 다윗이 신과 함께함으로 인해 만들어진 결과인 것.[40] 즉, 다윗 대에 다져진 것을 바탕으로 솔로몬 대에 전성기를 누린 것이 맞다. 물론 솔로몬이 못하기만 했다는 것은 아니고 명군의 자질은 분명히 드러났으나 아버지 다윗에 비하면 역량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더욱히 그가 막대한 조공을 받고 그것을 바탕으로 축첩질에 골몰하면서 결과적으로 신을 섬기는 선민[41]으로서의 본질을 스스로 버리게 되었고 예전의 보여왔던 지혜와 명군으로서의 자질 역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솔로몬의 타락에 대한 열왕기의 기록의 비판적 평가에 대해서는 견해 차가 있을 수 있다. 왕실 역사가들의 사관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역대기와는 달리 열왕기에는 예언자들의 사관이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예언자들의 사관은 아무래도 왕실 역사가들에 비해서는 왕국에 대해 비판적일 것이다. 가령 역시 예언자들의 사관이 반영되었을 사무엘서에서는 왕정 자체가 신정이 아니기에 신의 뜻에 어긋난다고 비판하면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솔로몬의 정책들에 대해서도 열왕기는 비판적인 관점을 우선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솔로몬이 궁궐을 건축하고 사치와 호화를 누렸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왕실이 정당한 부와 영광을 누리고 드러내는 것을 공연히 문제삼는다고 항변할 수 있다. 사실 사치가 나쁜건 맞지만 전근대에는 사치가 곧 자기과시(=나는 이렇게 사치할 정도로 부유하다)인 경우도 많았고 이런 자기과시는 자신의 권위와도 연관되기에 군주들 중에서는 사치하는 왕도 종종 나오곤 했다.[42]
외국 여인들을 첩실로 삼았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이는 외교의 일환이라고 항변할 수 있다. 다른 나라의 왕족과 귀족의 여인들과 혼인 관계를 맺는 것은 가장 확실한 동맹의 방법이자 효율적인 외교 전략이다. 순혈주의적인 예언자 전통의 관점에서는 문제이겠지만, 왕실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불가피한 외교적 선택이다.[43] 신이 사랑한 왕 다윗도 암몬 왕의 딸이나 헷 사람의 아내 등 외국의 여인들과 결혼하였음은 마찬가지인데, 솔로몬만 비난을 받아야 한다면 부당하다.[44] 하지만 혼인동맹이 확실한 외교적인 안전장치가 되지 않는다는 사례는 역사상 무수히 많고 솔로몬 또한 이집트 파라오의 딸과 결혼한것이 이집트의 왕조교체로 인해 의미가 없는 일이 되어 이집트의 반이스라엘 정책을 막지 못해 이집트가 여로보암의 망명을 받아주고 르호보암 치세때 예루살렘을 침공해오는 지경에 이르렀다.[45]
솔로몬이 우상을 숭배하고 우상을 위해 신전을 건축했다고 비판을 받지만, 솔로몬이 신앙을 버렸다기 보다는 다른 종교를 관용하는 정책을 채택한 것이 배타주의적 예언자들에게 그렇게 인식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예언자들의 입장에서는 솔로몬이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관용하는 것'이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장려하는 것'과 진배 없고, 나아가 그 스스로 '다른 신을 섬기는 것'과도 진배 없다고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세계 각국의 상인들이 교류하는 중심지인 수도의 나라를 통치하는 왕으로서는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하고 존중하는 정책을 채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람 장군 나아만이 신을 믿으면서도 자신이 충성을 바치는 왕이 우상에 절을 할 때 어쩔 수 없이 그 옆에서 부축하는 일을 예언자 엘리사가 허용했던 취지를 고려하여 솔로몬의 행적도 평가해야 할 것이다.
다만 이는 당시 이스라엘 왕국의 내부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설명인데, 다윗 왕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각 지파의 연계성은 상당히 느슨한 편이라, 각 지파간의 내전도 몇번 일어났다.[46] 이 상황에서 왕정 이전시기에는 각 지파를 연결해 주는것이 종교지도자인 (사사/판관)이었듯이, 유대교는 각 지파의 연계성을 강화시켜주는 장치였다.[47] 분열된 북 이스라엘 왕국이 초창기에 유다왕국과의 연계를 끊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한것중 하나가 제사지내는 곳의 위치변경이었던 점에서도 이런 부분이 드러난다. 그런데 타종교를 받아들이는 정책은 이런 연계성을 약화시키는 것이었지, 강화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걸 고려해도 솔로몬이 도를 많이 넘은 것은 맞다. 교류나 외교적 차원에서의 혼인은 그렇다 쳐도, 문제는 지나치게 방탕했다. 교류를 해도 지킬 건 지켜야 되는데, 왕이 앞장서서 놀아재끼고 있으니 나라가 망하는 건 당연하다. 결국 솔로몬은 이스라엘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하는 데 일조하게 되었다. 신생왕조에 불과했던 이스라엘은 솔로몬 사후 절단이 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여로보암의 북 이스라엘이 210년, 다윗 혈통의 남유다가 350년 정도를 유지했다는 점. 비록 성경에 묘사된 다윗-솔로몬 시절만큼 세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간간이 모압, 암몬, 에돔 등을 위압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긴 했다.
정리하자면 여러모로 후대의 군주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만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명군의 모습과 암군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는 입체적인 인물이기 때문. 사실 군주의 자리가 여러모로 초심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은 맞다. 전세계 어느나라를 봐도 군주가 초심을 잃고 타락한 사례는 많고 대놓고 십전노인, 신선이라고 자처한 건륭제 같은 사람도 있었으니 솔로몬 정도면 그나마 얌전했다고 볼 수도 있다.[48] 그러나 솔로몬을 통해 성경이 후대에게 말하고 싶은 바는 바로 겸양과 자아성찰의 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49]
솔로몬이 재위 초반에는 지혜를 구하며 근면하게 왕국을 통치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 이후에 자신의 욕심을 앞세워 다른 나라를 정복하며 영토를 확장하면서부터 안에서부터 서서히 곪아갔던 것은 지도자 한 사람의 교만과 타락이 얼마나 큰 재앙으로 이어지는지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역사가들이 과거에 나라를 크고 아름답게 만든 군주를 이상적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내치와 경제력을 안정시킨 군주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 시각과도 일치한다. 즉 솔로몬이라는 인물은 단순히 "놀아재꼈다"라는 측면보다는 나라를 크고 넓게 만들 능력은 있었으나 발전한 왕국을 다스릴 장기적으로 보는 안목이 부족해 현실에 안주한 것에 가깝다.
자세한 내용은 솔로몬(동음이의어) 문서 참고하십시오.
- 아버지 다윗과 달리, 성경 이외의 기록으로 생존이 확인되지 않은 인물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 시기에 번영했을 광산(부)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린 왕이 있다는 것은 타 기록이나 연구에도 존재하나, 그의 이름이 "솔로몬 혹은 여디디야"란 건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원래 팔레스타인 자체가 기록이 적은 편이고 특히 솔로몬 시대의 기록은 발견된 양이 적어 연구가 쉽지 않다. 다윗 왕가의 실존은 텔 단 비문 발견으로 증명됐고 그로 인해 최소주의자든 최대주의자든 솔로몬이라는 인물 자체는 존재했겠지만 성경에 나온 부에 대한 묘사는 과장됐을 것이라 본다. 솔로몬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적어도 간접적인 증거는 존재하므로 학계에선 솔로몬의 부와 업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 성경에 등장히지는 않지만 솔로몬과 관련해서 돌아다니는 일화가 있는데, 악마에게 '다리를 건설해 주면 가장 먼저 건너는 것의 영혼을 네가 가져가게 해 주겠다'며 다리를 만들게 해 놓고는 염소를 가장 먼저 건너게 하고 "내가 언제 인간의 영혼이랬나? 난 그런 말한 적 없다."고 발뺌하는 등[50] 악마마저도 지혜로 속여서 삥 뜯었다는 일화[51][52]가 유명. 솔로몬의 72 악마, 솔로몬의 반지 등은 오컬트 계에서 상당히 이름 높다. 그가 썼다는 '솔로몬의 열쇠'는 중세 마법의 교본이며 큰 열쇠와 작은 열쇠로 나뉘는데, 작은 열쇠는 흑마법 계열로 통한다. 삼각형 2개가 겹쳐진 육망성은 '솔로몬의 봉인'이다.
[1]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Shalom과 같은 어원을 두는, '평화'라는 의미라고 한다. 예루살렘의 '살렘' 또한 같은 어원이다.[2] 일찍 사망했다.[3] 솔로몬을 일컫는다.[4] 예를 들면, 솔로몬의 심판이란 표현은 굉장히 흔하게 쓰이며 명판결이란 의미로 이해될 것이다. 솔로몬의 선택이라는 방송 프로그램과 아이의 생모를 밝히는 송사는 누구나 들어보았을 것이다.[5] 히브리어: ידידיה, 영어: Jedidiah[6] 태어난 순서에 따르면 낮지만, 성경 속 인물들 사이의 계승 관계를 보면 태어난 순서가 전부는 아니다. 이사악의 장자 계승권은 둘째인 야곱이, 야곱의 장자 계승권은 맏아들 르우벤이 아닌 요셉의 차남 에브라임에게 주어졌으며, 당장 솔로몬의 친부인 다윗만 해도 사울의 아들도 아니었을 뿐더러 이새의 집안에서 막내였다.[7] 권력 다툼의 요소가 아예 없다고 할 순 없겠으나 애초에 암논은 압살롬의 여동생인 다말을 강간한 만행을 저질렸기 때문에 압살롬에게 살해당하는 최후를 맞이했다.[8] 즉, 군부와 교단의 거물들이 뒤를 봐주고 있었다는 얘기다.[9] 압살롬의 반란이 진압된 후, 다윗은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함부로 압살롬을 죽인 요압을 군대 사령관 직에서 쫓아내고 반란군의 사령관이었던 아마사를 대신 기용했지만, 요압은 오히려 아마사를 살해하고 자신의 지위를 되찾았다. 요압 문서 참조.[10] 다만 엘리 계열은 이전에 지위를 이용하여 방약무도한 짓들을 하였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았다.[11] 다만 이전부터 솔로몬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도니야 일파의 행위가 반역일 수 있다. 그래서 아도니야는 신(야훼)가 정한 운명을 거스르려다가 망한 경우로 해석된다.[12] 다만 다윗이 살아있을 때에는 목숨을 부지했지만,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아도니야가 다윗을 노년에 시중들던 소녀를 자신의 첩으로 달라고 하는 바람에 그래도 죽임을 당했다. 또한 아도니야에게 줄을 댔던 대제사장 아비아달은 과거 다윗이 진 빚 때문에 목숨은 건졌지만 파면당해서 고향으로 내쫓겼고 요압 역시 죽임을 당한다.[13] 개역 성경에는 솔로몬의 재판, 가톨릭 성경에는 솔로몬의 판결이라는 소제목이 있다.[14] 재미있는 것은 이 비슷한 이야기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해져 내려온다는 점. 성경 외에도 이슬람권의 슐레만 왕 이야기, 중국 동한시대에 응소(應卲)가 지은 <풍속통의>에 소개된 황패(黃覇)이야기, 북위 시대에 혜각(慧覺)이 번역한 <현우경>에 소개된 고대 인도의 아파라제목거(阿婆羅提目佉) 왕 이야기 등. 일본 쪽 이야기에서는 오오카 다다스케(통칭 오오카 에치젠)라는 명판관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자신의 아이라고 주장하는 두 여자에게 아이로 줄다리기를 하게 시켰다고 한다. 아이가 아파하는 것을 본 어머니가 줄다리기를 포기하자, 포기한 여자가 진짜 어머니임을 찾아내었다고 한다. 중국에도 일본 쪽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서는 갓난아기가 아니라 5살 정도로 어느 정도 자란 아이이며, 여기서도 명판관이 유명인인 건 동일하여 그 유명한 포청천이 등장한다. 14세기에 <포대제지감회란기(包待制智勘灰闌記, 포 대제가 슬기롭게 석회 동그라미로 판결을 내린 이야기)>(약칭 회란기)라는 잡극으로 만들어졌는데 중국 고전 희곡 중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에 번역 및 수출, 상연되었으며,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코카서스의 백묵원>의 원작이기도 하다. 물론 한국에서도 번역 및 공연되었다.[15]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한 남자와 약혼을 한 여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 남자와 함께 있기 위해 자신의 약혼자에게 위자료를 줄태니 파혼을 해달라 부탁했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의 행복을 위해 위자료를 받지 않고 파혼을 해주었다. 이때 여자의 돈을 노린 한 노인이 여자를 납치하게되는데, 여자는 자신의 전 약혼자 이야기를 해주며 "이런 남자도 있는데, 당신은 고작 나를 돈 때문에 납치하냐?"라고 말하고, 그 이야기에 감명 받은 노인은 여자를 풀어주었다.[16] 천일야화 등에 등장하는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의 진"과도 연관이 있다. 그를 그 램프(혹은 호리병)에 가둔 것이 솔로몬 왕. 이를 포함한 수많은 전설에서, 묘하게도 소원을 들어주거나, 조언을 주는 역할로 묘사된다.[17] 출처 영문 위키피디아 Solomon 문서.[18] 열왕기상 3:4. 열왕기상 8:62~63에서는 성전 봉헌식 때 화목제로 소 22,000마리와 양 120,000마리를 바쳤다고 한다.[19] '번제(燔祭)'의 '번(燔)'은 '구울 번'이다. 즉 1,000번(番, 횟수)의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 아니다.[20] 십일조라 하는 것 역시도 원래는 성직자 계층으로 묶여 땅을 분배받지 못한 레위 지파가 먹고 살 수 있게 하기 위해 납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21] 제사 규례에 따르면 재산 형편에 따라 적절한 축생으로 드릴 수 있었다. 소를 도저히 못 드리겠으면 양으로, 양조차 안 되면 비둘기로 드리라고 되어 있다. 비둘기마저 구할 수 없으면 곡물로 대체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소를 1,000마리나 바친건 엄청난 정성을 기울였다는 뜻이었다.[22] 일부 목사들이 원문으로는 "듣는 마음"이라고 혹은 "경청"이라고 주장하나 이는 조어법상 불가능하다. 현대 히브리어에서 שֹׁמֵ֙עַ֙가 "소리"의 뜻을 가지긴 하지만, 이 경우에는 לֵ֤ב와의 결합이 불가능하다.[23] 일례로, 이집트 왕조로선 비교적 드물게도 파라오의 딸이 솔로몬에게 시집온 것과 그 외 중동의 여러 중소규모 왕국과 세력에서 그에게 딸을 바쳐, 소위 말하는 300명의 아내와 700명의 처첩을 가지게 된 것을 들 수 있을 듯. 당시 이집트 왕조는 근친혼으로 유명한 왕조였고, 때문에 다른 나라에 왕족을 보내는 일을 좋지 않게 보았는데도 이게 가능했다는 것이 놀랍다.[24] 지금도 레바논은 백향목 명산지다.[25] 성경의 묘사에는 전성기의 이스라엘 강역이 시나이 반도부터 요르단 강 동편, 페니키아, 그리고 키프로스 섬과 시리아, 먼 유프라테스 강 유역까지라고 나와있으나, 이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 성경에서 솔로몬 시대 이스라엘의 최대 영토 확장의 기반을 닦아 놓은 것은 선왕 다윗인데, 이 당시에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딥사, 가나안 남쪽 부근의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펼쳐졌던 이스라엘 바깥쪽의 세력도는 완전한 정복이 아니라 조공을 받는 것을 조건으로 화친을 맺은 이스라엘의 제후국의 개념에 더 가까웠을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26] 지중해-근동을 넘어 인도와도 교역을 했다는 말도 있다.[27] 참고로 이 므깃도(Meggido)라는 도시는 그 유명한 아마겟돈이라는 말의 원형이라고 한다. 정확히는 하르마겟돈.[28] 성경에서는 첩들이 섬기던 이방 우상들을 솔로몬이 섬기기 시작했다고 나온다.[29] 북이스라엘 입장에서 쓰여진 열왕기에서는 자세히 나온 반면, 남유다의 입장에서 쓰여진 역대기에서는 생략되어 있다. 북이스라엘 자체가 솔로몬 - 르호보암의 실정에 반발해서 독립한 나라이기에 그런 것으로 추측한다. 하지만 북이스라엘도 유일신의 모습을 황금 송아지로 묘사하면서 우상숭배를 행했고 이후 오므리 왕가가 들어서면서 페니키아(베니게) 왕가와 혼인 동맹을 맺고 그 대가로 바알 숭배를 들여오는 등 똑같은 짓을 반복했으며 결과적으론 남유다 왕국보다 더 빨리 망해버렸다.[30] 이를 우상 숭배가 아니라 외부의 문화를 받아들인 일종의 다문화 현상으로 보는 시각 또한 존재한다.[31] 이건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는데, 개신교인 가정에서는 특히 딸은 제사의 문제로 비개신교인 가정의 아들(특히 장남)에게 시집보내지 않으려는 성향이 강하다. 또한, 개신교 신자였던 배우 이승기가 독실한 불교 신자인 이다인과 결혼하기 위해 아예 불교로 개종한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32]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북쪽 왕국이 그대로 가져다 사용하였다.[33] 개역개정판 성경 기준으로 '시삭'.[34] 건축사업에는 이방인들이 동원되어 사역을 하였는데 문제는 워낙 넘쳐나는 금과 은으로 성경학자들 사이에선 마치 아즈텍의 금과 은으로 엄청난 인플레를 맞이한 스페인과 같이 이스라엘도 심각한 인플레를 맞이한건 아닐까 추측한다. 단, 저 징징댐에 대해서는 다윗 대까지 세력이 강했던 각 지파의 수장들이 그간 솔로몬의 강력한 왕권에 억눌려 있다가 반발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 또한 상당하다. 왕권을 강화하려는 왕과 세력을 유지하려는 귀족(혹은 지방 호족)들의 대립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냥 심플하게 말년의 솔로몬을 두고 가혹했다고 지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성경의 내용만 보면 솔로몬이 벌인 정복전쟁이나 대외원정은 국가재정에 상당한 부담을 주는 일이긴 하다. 당장 건륭제 사후의 청나라라던가 아우랑제브 사후의 무굴제국처럼 지나친 대외원정으로 인해 국가 재정이 거덜나고 나라에 망조가 든 사례는 상당히 많고 저 당시의 이스라엘이 청나라나 오스만 제국처럼 강력한 행정력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체제가 아니라 신정을 기반으로 한 12지파의 연합체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솔로몬 수준의 대외원정은 국가에 상당한 부담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35] 처음에는 나이든 신하들한테 조언을 구했을 땐 백성들의 세금과 노역을 좀 풀어주면 충성을 다할 것이라고 답변이 나왔는데, 젊은 르호보암은 그게 별로 마음에 안들었는지 같이 자란 청년들한테 조언을 구했고 저 따위 답변이 나왔다.[36] 이미 부왕 다윗부터가 유다 지파만의 왕으로 추대되어 7년간의 내전 끝에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될 수 있었고 압살롬의 반란 진압 이후 과정에서 북쪽 지파들이 유다를 상대로 항의하는 사건이 있는 등(사무엘하 19장 후반) 통일 왕국 자체가 애초에 불안정했다. 결국 터질 일이 터진 것이었단다.[37] 르호보암계의 남유다가 왕의 혈통만큼은 잘 이어나갔던 데 반해, 여로보암이 세운 북이스라엘은 왕통이 몇 번이나 바뀌는 등 바람 잘 날 없었다.[38] 시기상으로는 아시리아의 북이스라엘 정복이 먼저다.[39] 이는 먼 훗날 전세계 최강의 절대군주로 평가받던 건륭제에 대한 평가와 유사하다. 건륭제 역시 측근비리를 눈감아주고 자신 역시 생일에 금불상 3만개를 선물받는 등 재산 모으기에 골몰하며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폐단들은 고스란히 후대에 커다란 재앙이 된다.[40] 한 국가가 결정한 정책이 결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된다. 비슷하게 청나라는 강희제 때부터 다져온 기반을 바탕으로 건륭제 때 절정을 누렸으며, 프랑스의 절대 군주 루이 14세 역시 할아버지 때 부터 닦아온 기반으로 번영을 누렸다. 그리고 위의 두 사람은 본인들의 물욕과 과시욕으로 나라를 말아먹는데 일조했다.[41] 선택된 백성, 즉 신의 선택을 받은 성도라는 의미. 이스라엘은 이전부터 선민이라는 것으로 세상과 자신들을 구분지으며 세상과는 다른 존재임을 의식하고 있었다.[42] 현대 아랍권 군주들도 종종 이런 행동을 보이고는 한다.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가 대표적. 사실 이스라엘을 비롯한 중동 아랍권 국가들의 주류 민족이 약탈과 사냥으로 먹고살던 유목민들이기 때문에 자기과시, 군사문화 등을 통해 남성성, 우월성을 강조하는 풍토가 강하다.[43] 특히 호족 중심의 연맹왕국이나 유목 국가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정주 민족과의 동맹을 통해 안정적으로 물자를 공급받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인데 이스라엘과 비슷한 유목국가인 청나라나 오스만제국도 안정적인 정통성 확보를 위해 몽골(청-청의 황제는 몽골 귀족과의 통혼을 통해 몽골 카간자리도 대대손손 해먹었다.), 아랍인(오스만) 등 다 다른 민족과의 통혼은 흔한 일이였다.[44] 다윗 자신도 증조어머니인 룻은 모압인이다.[45] 위에 사례로 나온 청나라나 오스만 제국의 경우만 봐도 답이 나오는데 청나라를 세운 건주여진의 경우 자신들의 풍습을 한족들에게 강요하고 기록 말살까지 자행했음에도 결국은 한족에 대부분 동화되어 정체성을 잃어버렸고 오스만 제국의 경우에도 이슬람을 받아들인 시점부터 아랍인과 서서히 동화되었다. 반면 같은 유목제국임에도 다른 피지배민족과 철저하게 거리를 두었던 몽골인들은 비록 분열되긴 했지만 자신의 언어와 풍습을 현대까지도 유지하고 있다. 결국 당장의 국가 발전에는 혼인동맹이나 융화정책이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나 민족의 정체성 측면에서 보면 손해가 맞다. 즉 국가가 아닌 민족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성경의 관점이 충분히 일리가 있는 셈이다. 특히나 이 시대에는 민족간 정체성 차이가 지금만큼 두드러지는 것은 아니다.[46] 판관기에서 이 지파간의 내전에 대해 나오는데 한번 일어나면 수만명씩 죽어나갔고 특히 베냐민 지파는 나머지 11지파에게 다굴 당해 전멸 직전까지 갔다.[47]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 시대에는 종교가 그 국가나 민족을 엮어주는 중요한 정체성일 수 밖에 없었다. 당시로서는 관료제가 있던 것도 아니고 왕권을 뒷받침해줄 충분한 사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집트 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엄청나게 오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집단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신의 뜻'보다 더 좋은 수단이 없었다. 구약에서 내내 까이는 주제는 '이방신을 섬기는 것'이지 신 자체를 안 믿는 것이 아니다. 즉 야훼를 안 믿더라도 결국은 다른 신을 믿게 되어 있지 신 자체를 안 믿는건 없었다는 것.[48] 그나마 이쪽은 다음 황제인 가경제와 도광제가 방만해진 재정을 바로잡고 이후에도 이홍장과 좌종당 같은 유능한 관료, 군인들이 등장해서 혼란을 수습하고 왕조의 수명을 연장하는데 성공했다.물론 서태후가 등장하면서 헬게이트 크리(...)[49] 이쪽에 비견되는 자세가 바로 백성들이 여유있는 삶을 누리도록 한 앙리 4세나 하늘을 섬기는 신하를 자처했던 강희제, 워커홀릭 수준으로 관리들을 잡아대고 관리, 신사층이 비리를 저질러 백성들을 수탈하는 것을 경계하며 근면하게 제국을 통치한 옹정제의 통치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50] 근데 이마저도 사기다. 당시 고대 중동 종교 관습에서는 동물은 영혼이 없다고 믿었다.[51] '악마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다리는 사실 고대 로마인들이 만든 것이었으나,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중세가 되면서 그 사실을 잊어버린 중세 서유럽인들이 "이렇게 대단한 다리를 인간이 만들 수 있을 리 없다. 악마가 만든 게 틀림없어!"라면서 만들어진 이야기다. The Devil's Bridge라고 검색해 보면 아름다운 다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52] 이후 사바트 같은 데 나오는 하급 악마들은 주로 염소 모습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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