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석린 관련 틀 | ||||||||||||||||||||||||||||||||||||||||||||||||||||||||||||||||||||||||||||||||||||||||||||||||||||||||||||||||||||||||||||||||||||||||||||||||||||||||||||||||||||||||||||||||||||||||||||||||||||||||||||||||||||||||||||||||||||||||||||||||||||||||||||||||||||||||||||||||||||||||||||||||||||||||||||||||||||||||||||||||||||||||||||||||||||||||||||||||||||||||||||||||||||||||||||||||||||||||||||||||||||||||||||||||||||||||||||||||||||||||||||||||||||||||||||||||||||||||||||||||||||||||||||||||||||||||||||||||||||||||||||||||||||||||||||||
|
출생 | |
사망 | |
재임기간 | 제3대 영의정부사 |
제6대 영의정부사 | |
제11대 영의정부사 | |
제13대 영의정부사 | |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 |
문경(文景) | |
자수(自修) | |
독곡(獨谷) | |
부모 | 부친 - 성여완(成汝完) 모친 - 나주 나씨 나천부(羅天富)의 딸 |
부인 | 순흥 안씨 안원숭(安元崇)의 딸 |
자녀 | 장남 - 성지도(成志道) 차남 - 성발도(成發道) 장녀 - 송석동(宋石同)의 처 |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성여완(成汝完, 1309~1397)[10]의 맏아들로 태어나 1357년(공민왕 6) 4월 정당문학 이인복과, 첨서추밀원사 김희조(김취려의 현손)가 주관한 문과에 급제했다. 당시 성석린과 함께 급제한 인물들 가운데 염흥방(장원 급제함), 민제(이방원의 장인 어른), 강시(공양왕의 사위인 강회계의 아버지), 허금(민대생과 혼인한 허금의 딸이 한명회의 장모임) 등이 있다.
고려 말의 대학자 이제현에게도 재능을 인정받았고, 공민왕에게도 중용되는 등 학자 및 관리로서의 재능도 출중했다. 신돈의 모함으로 해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3개월 만에 조정에 복귀한 적이 있다. 그렇다고 문(文)에 완전히 치중되어 있던 것도 아니라서, 1380년(우왕 6) 왜구가 침입한 위기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막아낸 일화도 있다.
고려 말의 대학자 이제현에게도 재능을 인정받았고, 공민왕에게도 중용되는 등 학자 및 관리로서의 재능도 출중했다. 신돈의 모함으로 해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3개월 만에 조정에 복귀한 적이 있다. 그렇다고 문(文)에 완전히 치중되어 있던 것도 아니라서, 1380년(우왕 6) 왜구가 침입한 위기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막아낸 일화도 있다.
경신년 여름에 왜적이 승천부(昇天府)에 들어와서 서울(개경)을 거의 함락시킬 뻔하였는데, 이 때 석린은 원수(元帥)가 되고, 양백연(楊伯淵)은 편장(褊將)이 되었다. 여러 장수들은 적의 선봉(先鋒)이 매우 날랜 것을 보고는 물러가서 다리를 건너고자 하였으나, 석린이 홀로 계책을 결정하여 말하기를,"만약 이 다리를 지나간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이반(離叛)될 것이니, 다리를 등지고 한번 싸우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니, 여러 장수들이 그 말에 따라, 사람이 모두 죽을 힘을 내어 싸우니, 적이 과연 이기지 못하고 도망하였다.
학유, 전리총랑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양광도 관찰사 시절에는 의창을 설치하고 국가적으로 시행할 것을 건의해 받아들여졌다.
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와 공모하여 우왕,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옹립해 찬화공신에 올랐다. 조선이 개국되자 이색과 우현보의 일파로 몰려 추방되었다가 돌아와 한성부 판사, 좌의정 등을 역임했으며 특히 태종 때에는 4번에 걸쳐 영의정을 나누어 역임하는 등 상당한 거물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잠저에 있을 때부터 큰 총애를 받았는데, 태조가 기쁘지 않은 일이 있더라도 성석린을 보내면 화가 풀릴 정도로 그를 신임했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권력을 모두 잃어버린 채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된 말년의 태조를 모시고 잔치를 여는 등 그의 마음을 돌리는 데 힘썼으며, 이성계가 동북면으로 훌쩍 떠나 머물 무렵에는 태종의 명을 받아 이성계를 설득해 도성으로 돌아오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때 태종이 '부왕께서 믿고 중히 여기는 이로 경 같은 사람이 없다'고 당부하는 등, 태종으로서도 아버지 상대로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카드였던 모양. 그러나 태조와 태종의 대립이 가장 극렬하게 드러난 사건이었던 조사의의 난 때는 민제 등과 도성 수비를 맡았다.
세는나이로 86세까지 장수했으며, 말년에는 궤장을 하사받는 등 원로대신으로 대우받았다. 참고로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한동안 중지되었던 궤장 하사가 세종 2년 1420년에 예조의 건의로 부활함에 따라 1421년, 조선왕조에서 하사한 제1호 궤장을 받는 영광을 누리는 기록을 세웠다. 이에 감격한 성석린은 "자애하심은 부모보다도 더하시고 보호하시기를 어린 아이와 같이 하시니, 마땅히 크시옵신 은혜를 우러러 받잡고 고질된 노병을 엎드려 잊어버리고, 가을을 바라만 보아도 쇠잔해지는 창포 같은 체질로서, 혹시라도 해를 바라보는 해바라기의 정성을 바칠까 하와, 아침 저녁 한줌의 향을 피워 하늘에 빌겠사오니, 어찌 보응이 없사오리까. 개와 말 같은 하찮은 마음일지라도 주인을 사모함이 죽고 살고에 다름이 있사오리까."라고 사의를 표했고 세종은 자신은 그저 옛일을 따랐을 뿐이라고 위로했다.
이후 1423년에 사망하였다. 세종이 슬퍼하며 3일간 조회를 폐하고 문경(文景)이란 시호를 내렸다. 졸기에서 "용의(容儀)가 청수(淸秀) 괴위(魁偉)하고, 자성(資性)이 탁월하였다. 네 임금을[11] 섬기매 영정(寧靜)함을 힘쓰고, 어수선하게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오랫동안 재상으로 있으면서 재능을 발휘한 정승이었고 그의 형제들 역시 고관의 자리에 오르는 등 현달한 인물이었으나, 하륜이나 이숙번처럼 기책을 발휘해 태종의 즉위에 공헌한 타입은 아니었기에 이들 측근 세력에 비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성공적인 관료의 삶을 살았으나 직계 자손들의 영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두 아들로 성지도(成志道)와 성발도(成發道)를 두었는데, 성지도는 맹인이었기에 후사를 잇거나 관직에 나갈 수도 없던데다가 동생인 성발도의 사위들[12]에게 부동산을 빼앗기고 모멸을 당하는 등 모진 고통을 당했다. 성발도는 형조판서, 의정부 참찬을 지내는 등 아버지를 따라 출세하였으나 아들 없이 성석린보다 조금 먼저 죽었다. 유전적인 요인이 있었는지 성지도의 아들 성귀수마저 맹인이었으므로 성석린이 죽고 나서도 후사를 이을 사람이 없었다. 1438년(세종 20) 성귀수가 아들을 낳자 이야기를 듣고 딱하게 여긴 세종이 부사직을 마련해 준 덕에 다행히도 경제적인 부족함은 없던 모양이다.[13] 결론적으로 성석린은 후사가 끊어진 셈인데 뒷날 동생의 증손인 성삼문의 일가가[14] 화를 당한 것을 생각하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 <연려실기술>에서는 태종의 밀명을 받고 함흥에 있던 이성계를 만나러 가는데 우연히 지나가는 척 하면서 이성계 주위를 얼쩡거리다가 이성계가 성석린을 알아보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성석린이 슬그머니 도성에 돌아오라는 얘기를 꺼내자 이성계가 노해 칼을 꺼내 들고 "너 아들이 시켜서 왔지?"라고 하자 성석린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제 자손들이 눈이 멀 거예요."라고 둘러대 위기를 넘긴다. 결국 성석린이 한 맹세가 그의 자손들에게 미치면서 눈이 멀게 되었다고 한다. 당사자들이 들으면 억울할 소리임에 틀림없지만 어쩌면 당대 사람들도 명신이던 성석린의 아들인 성지도와 손자인 성귀수가 줄줄이 맹인이 된 것이 기구한 운명이라고 생각했기에 이 같은 야사가 등장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 맹사성의 집이 성석린의 집 바로 밑에 있었는데 맹사성은 성석린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갈 때마다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고 한다. 맹사성의 온후한 일품을 보여주는 일화.
-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안형식[15]이 연기하였다. 본 작품이 야사가 폭넓게 활용된 만큼 함흥차사 이야기가 그대로 나오며 위의 맹인 일화도 약간 각색되어 묘사되었다.고려 말 시기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조선 왕실이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의 시점에 설장수, 이거이 등과 함께 처음 등장한다. 조정에서 꾸준히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는 신하들 중 한 명으로 묘사되며, 1차 왕자의 난 당시 소집령을 받아 삼군부에 갔다가 쓰러져 있는 시신들을 보고 경악하며 놀란다.
하지만 그는 이방원의 '살생부'에 올라있지 않았고 무사하게 이방원 옆 민제, 설장수, 권근 옆으로 가서 선다. 드라마 상에서 장지화, 노석주, 이직(이직은 후일 다시 부활한다), 변중량 등이 철퇴에 맞아 즉사한다. 성석린, 조준, 심덕부 등은 삼군부 문을 무사하게 통과한다.
태종 즉위 후 정승의 반열에 오른다. 1410년 시점인 131회 태종이 처남 민무구, 민무질 형제 자결을 명하는 자리에 하륜, 조영무 등과 함께 배석하며 그 자리에서 이제 그만 쉬라는 태종의 말을 듣는다. 성석린 역시 몸이 좋지 않아 사직을 청하려고 했다고 아뢰는 것으로 이후 등장하지 않는다.
[1] 율리우스력 2월 22일[2] 율리우스력 12월 11일[3] 율리우스력 4월 24일[4] 율리우스력 8월 4일[5] 율리우스력 8월 6일[6] 율리우스력 9월 26일[7] 율리우스력 5월 6일[8] 율리우스력 11월 19일[9] 율리우스력 6월 20일[10] 고려 말에 재신(宰臣)인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다. 창녕 성씨는 조선 초기에 이름을 날린 명문가로 성여완의 세 아들인 맏아들 성석린, 둘째 아들 성석용(成石瑢), 막내 아들 성석인(成石因)은 모두 과거에 급제한 뒤 고위직을 역임했다.[11] 당연히 조선 한정해서 (그리고 문제의 정종도 어쨌든 포함해서) 4명이다. 고려 시절은 조선의 군신 모두에게 불편한 진실인 만큼...[12] 김연지, 김수지, 송석동. 김연지는 세조 대에 당상관이 되고 송석동은 사육신에게 동조했다가 함께 처형된다.[13] 1466년(세조 12) 성귀수의 집 종이 세조에게 온천 위치를 알려주는 기사가 있는데 이 때 성귀수가 첨지중추부사로 소개되는 것에서 명예 부사직이 이 때까지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14] 정확히는 연좌제의 범위는 친가(성씨 가문) 기준으로 성삼문의 조부의 자손들, 즉 부모형제+3·4·5촌 등이었다. 그 너머의 성씨 일가붙이들은 연좌를 당하지 않았다.[15] 사극에 많이 출연했으며 태조 왕건에서는 경명왕, 제국의 아침에서 준홍, 불멸의 이순신에서 김억추 등을 연기하였다. 2011년 작고.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