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et uBet web content aggregator. Adding the entire web to your favor.
iBet uBet web content aggregator. Adding the entire web to your favor.



Link to original content: http://namu.wiki/w/성석린
성석린 - 나무위키

성석린

최근 수정 시각:
조선 영의정
태조 ~ 연산군
성석린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 펼치기 · 접기 ]
고려 초기
(918~981)
[내의성] 평장사
문벌귀족기
(981~1170)
[내사문하성] 평장사
최승로 서희 최량 왕융 한인경 유방헌 위수여 진적 유진 최사위 최사위 김심언 진적 이예균 왕동영 최항 최항 강감찬 강감찬 유방 장영 최항 채충순 유방 이공 이공 서눌 서눌 류소 이단 이단 이단 황보유의 이단 류소 황보유의 박충숙 유징필 황주량 황주량 최충 최제안 황보영 이작충 최충 황보영 김영기 김원충 김원충 이자연 이자연 왕총지 김정준 박성걸 김정준 김원정
[중서문하성] 평장사
김원정 최유선 임종일 김의진 왕무숭 이정 문정 김약진 이정공 최석 이정공 김양감 최석 김양감 류홍 왕석 김행겸 류홍 최사제 정유산 이안 소태보 소태보 이자위 김상기 류석 김상기 임개 최사추 김선석 황영 최사추 위계정 김선석 임간 임간 이오 이오 위계정 오수증 최홍사 최홍사 이오 윤관 김경용 임의 임의 김경용 오연총 허경 오연총 이위 임간 허경 이자겸 김연 이자겸 김연 조중장 강증 김연 오수증 조중장 김준 임유문 김준 한안인 이자량 김고 임유문 최홍재 김약온 김약온 척준경 척준경 이수 이수 박승중 척준경 김부일 김향 최홍재 최사전 김향 문공인 최자성 최자성 김부식 이준양 임원애 최유 임원준 이자덕 최유 이중 이중 최진 최진 한유충 왕충 임원숙 이인실 이인실 고조기 김영관 최유청 문공원 유필 최관 유필 김영석 최자영 최윤의 이지무 양원준 최함 최유청 박순충 김영부 이지무 최유칭 김영윤 허홍재 허홍재
무신정권
(1170~1270)
임극충 서공 임규 양숙 정중부 윤인첨 윤인첨 한취 이광진 기탁성 민영모 송유인 최충렬 이공승 문극겸 한문준 최세보 이의민 박순필 이혁유 임민비 이광정 조영인 기홍수 임유 최당 최당 우술유 기홍수 이문충 최선 임유 기홍수 김준 차약송 최충헌 최충헌 김봉모 노효돈 이극서 조충 류광식 이연수 김의원 최보돈 최보순 왕규 김취려 최홍윤 금의 이규보 이자성 채송년 최린 기윤숙 김창 최자 김태서 류소 최자 김기손 송순 김기손 김기손 이세재 김기손 이세재 이장용 김순 최온 김지대 류경
원 간섭기
(1270~1356)
류경 김전 채정 김방경 김방경 원부 장길 유천우 황보기
(도)첨의찬성사·도첨의중호
유천우 류경 원부 박항 송송례 홍자번 홍자번 한강 한강 조인규 인후 강수형 박구 신사전 홍문계 김련 정가신 강수사 송분 인후 정가신 인후 김혼 차신 송분 한희유 정인경 최유엄 한희유 김지숙 최유엄 임익 이덕손 최수황 류비 김혼 차신 채모 김부윤 김혼 안향 최유엄 류비 오윤부 이지저 민훤 정해 왕유소 설영임 조윤통 류비 이혼 김흔 최충소 이혼 김심 김문연 인후 김심 류청신 이진 류청신 배정 박의 권부 이호 권단 홍선 설영임 설경성 민종유 정지연 최비일 오형 권한공 최성지 김사원 이설 김이용 김이 조연수 오잠 오잠 박허중 오잠 박허중 조련 허유전 박전지 윤보 이호 민종유 송영 권준 김이 한악 임중연 전영보 원충 정방길 강융 임중연 전영보 임자송 원충 전언 채홍철 임중연 조적 채하중 민상정 조위 안문개 홍빈 김인연 정천기 오계유 강윤성 윤환 김륜 권겸 박충좌 유방세 김영후 강윤성 전사의 손수경 안축 윤계종 이군해 류돈 이군해 윤신계 손홍량 윤안숙 염제신 허백 윤신계 이곡 류탁 김인호 조일신 조익청 전윤장 윤시우 김자 류탁 정을보 조유 홍언박 김승택 홍언박 류탁 이공수 강윤충 원호 기륜 강순룡 박새안불화 홍언박 윤환 김경직 김인호 김보 최천택 박수년 허백 황석기 강윤충 권적
여말선초
(1356~1392)
[중서문하성] 평장사·평장정사
류탁 허백 황석기 김용 황석기 김용 전보문 김일봉 김승택 이승경 정자후 이겸 안우 이공수 김용 경천흥 류탁 정세운 정세운 이방실
도첨의찬성사
유인우 김용 이공수 경천흥 황상 이성서 송경 안우경 최영 이인복 이구수 이인복 송경 안우경 최영 이구수 김보 이춘부 이인임 권적 이성서 윤택 안우상 우제
문하찬성사
한방신 황상 안우경 최영 강인유 안사기 목인길 지용기 정몽주 지용기 정몽주 배극렴 설장수 조준 권중화 조준 류만수 권중화 윤호 성석린

[ 펼치기 · 접기 ]
공양왕을 옹립한 흥국사 구공신
화령군 개국충의백
이성계
청성군 충의백
심덕부
익양군 충의백
정몽주
충의군
지용기
충의군
설장수
창성군 충의군
성석린
충의군
박위
조선군 충의군
조준
봉화군 충의군
정도전

[ 세가(世家) ]
1·2권
3권
4·5권
태조 · 혜종 · 정종定宗 · 광종 · 경종
6권
7·8·9권
10권
정종靖宗
11·12·13·14권
15·16·17·18·19·20권
21권
22·23·24권
25·26·27권
28·29·30·31·32권
33·34·35권
36권
37권
38·39·40·41·42·43·44권
133·134·135·136·137권열전
45·46권
[ 지(志) ]
47·48·49권 「천문(天文)」 / 50·51·52권 「역(曆)」 / 53·54·55권 「오행(五行)」 / 56·57·58권 「지리(地理)」 / 59·60·61·62·63·64·65·66·67·68·69권 「예(禮)」 / 70·71권 「악(樂)」 / 72권 「여복(輿服)」 / 73·74·75권 「선거(選擧)」 / 76·77권 「백관(百官)」 / 78·79·80권 「식화(食貨)」 / 81·82·83권 「병(兵)」 / 84·85권 「형법(刑法)」
[ 후비·종실·공주 열전(列傳) ]
원정왕후 김씨 · 원화왕후 최씨 · 원성태후 김씨 · 원혜태후 김씨 · 원용왕후 유씨 · 원목왕후 서씨 · 원평왕후 김씨 · 원순숙비 김씨 · 원질귀비 왕씨 · 귀비 유씨 · 궁인 한씨 · 궁인 이씨 · 궁인 박씨
경성왕후 김씨 · 경목현비 왕씨 · 효사왕후 김씨 · 이씨 · 유씨
용신왕후 한씨 · 용의왕후 한씨 · 용목왕후 이씨 · 용절덕비 김씨 · 연창궁주 노씨
상회공주 · (유씨 소생 공주)
애상군 왕방 · 낙랑후 왕경 · 개성후 왕개 · 도애공주
인평왕후 김씨 · 인예순덕태후 이씨 · 인경현비 이씨 · 인절현비 이씨 · 인목덕비 김씨
대각국사 왕후 · 상안공 왕수 · 도생승통 왕탱 · 금관후 왕비 · 변한후 왕음 · 낙랑후 왕침 · 총혜수좌 왕경 · 조선공 왕도 · 부여후 왕수 · 진한후 왕유 · 적경궁주 · 보령궁주
정의왕후 왕씨 · 선희왕후 김씨 · 장경궁주 이씨
정신현비 이씨 · 사숙태후 이씨 · 원신궁주 이씨
-
한산후 왕윤 · 경화왕후 · (사숙태후 소생 공주) · 수안택주
경화왕후 이씨 · 문경태후 이씨 · 문정왕후 왕씨 · 숙비 최씨
상당후 왕필 · 원명국사 징엄 · 대방공 왕보 · 대원공 왕효 · 제안후 왕서 · 통의후 왕교 · 대령궁주 · 흥수궁주 · 안수궁주 · 복령궁주
[ 열전(列傳) ]
92권
93권
94권
95권
96권
97권
98권
99권
100권
101권
102권
103권
104권
105권
106권
107권
108권
109권
110권
111권
112권
113권
114권
121권
「양리(良吏)」
「효우(孝友)」
122권
133·134·135·136·137권

조선 정승
태조 ~ 연산군
[ 좌의정 ]
문하좌시중
문하좌시중 → 문하좌정승
초대

배극렴
제2대

조준
문하좌정승
제2대

조준
제3대

심덕부
제4대

성석린
제5대

민제
문하좌정승
문하좌정승 → 좌정승
좌정승
제6대

이거이
제7대

김사형
제8대

하륜
제9대

조준
좌정승
판의정부사 → 좌의정
제10대

하륜
제11대

성석린
제12대

하륜
제13대

남재
좌의정
제14대

하륜
제15대

류정현
제16대

박은
제16대

박은
제17대

이원
제18대

류정현
제19대

이직
제20대

황희
제21대

맹사성
제22대

최윤덕
제23대

허조
제24대

신개
제25대

하연
제26대

황보인
제26대

황보인
제27대

남지
제27대

남지
제28대

김종서
제29대

정인지
제30대

한확
제31대

이사철
제32대

정창손
제33대

강맹경
제34대

신숙주
제35대

권람
제36대

한명회
제37대

구치관
제38대

황수신
제39대

심회
제40대

최항
제41대

조석문
제42대

홍달손
제43대

박원형
제43대

박원형
제44대

김질
제45대

홍윤성
제46대

윤자운
제46대

윤자운
제47대

김국광
제48대

최항
제49대

한명회
제50대

조석문
제51대

심회
제52대

윤필상
제53대

홍응
제54대

노사신
제55대

신승선
제56대

정괄
제57대

어세겸
제58대

한치형
제59대

성준
제60대

이극균
제61대

류순
제62대

허침
제63대

박숭질
제64대

신수근
[ 우의정 ]
문하우시중
문하우시중 → 문하우정승
초대

조준
제2대

김사형
문하우정승
제2대

김사형
제3대

성석린
제4대

민제
제5대

하륜
문하우정승
우정승
제5대

하륜
제6대

이서
제7대

이무
제8대

성석린
우정승
제9대

이서
제10대

조영무
제11대

이무
제12대

이서
우정승
판의정부사 → 우의정
우의정
제13대

조영무
제14대

남재
제15대

이직
제16대

류량
우의정
제17대

남재
제18대

박은
제19대

한상경
제20대

이원
제20대

이원
제21대

정탁
제22대

류관
제23대

조연
제24대

황희
제25대

맹사성
제26대

권진
제27대

최윤덕
제28대

노한
제29대

허조
제30대

신개
제31대

하연
제32대

황보인
제33대

남지
제33대

남지
제34대

김종서
제34대

김종서
제35대

정분
제36대

한확
제37대

이사철
제38대

정창손
제39대

강맹경
제40대

신숙주
제41대

권람
제42대

한명회
제43대

구치관
제44대

황수신
제45대

박원형
제46대

황수신
제47대

최항
제48대

홍윤성
제49대

강순
제50대

김질
제50대

김질
제51대

윤사분
제52대

윤자운
제53대

김국광
제53대

김국광
제54대

한백륜
제55대

성봉조
제56대

김질
제57대

윤사흔
제58대

윤자운
제59대

윤필상
제60대

홍응
제61대

이극배
제62대

노사신
제63대

허종
제64대

윤호
제65대

신승선
제66대

정괄
제67대

어세겸
제68대

정문형
제69대

한치형
제70대

성준
제71대

이극균
제72대

류순
제73대

허침
제74대

박숭질
제75대

강귀손
제76대

신수근
제77대

김수동

[ 펼치기 · 접기 ]
1401년 1월 15일 태종에 의해 책록
진충좌명공신 (1등)
신극례
이애
익대좌명공신 (2등)
익대좌명공신 (3등)
김영렬
류기
마천목
박석명
윤곤
윤저
이숙
조희민
익대좌명공신 (4등)
김승주
김우
김정경
류량
문빈
서유
서익
송거신
심구령
윤목
윤자당
이승상
이응
조경
조온
한규
홍서
1 1407년 민무구, 민무질의 옥으로 인한 제명
2 1404년 태종의 왕자들을 죽이고 상왕 정종을 섬기려 한 혐의로 제명
3 1409년 민무구, 민무질의 옥으로 인한 제명, 후에 신원
4 1416년 불충, 불경죄로 인한 제명
5 1411년 이숭인, 이종학을 죽임 혐의로 인한 제명
6 1426년 노비 불법 모집 혐의로 인한 제명, 1456년 세조 때 복권
7 1415년 민무회, 민무휼의 옥으로 인한 제명, 1422년 세종 때 복권
8 1409년 친척의 아들을 정종의 아들로 속인 혐의로 인한 제명
조선 영의정부사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문경공(文景公)
성석린
成石璘
출생
1338년(충숙왕 복위 7)
사망
1423년 3월 3일[1] (향년 84 ~ 85세)
(음력 세종 5년 1월 12일)
재임기간
제3대 영의정부사
1402년 12월 20일[2] ~ 1403년 5월 3일[3]
(음력 태종 2년 11월 17일 ~ 태종 3년 4월 4일)
제6대 영의정부사
1405년 8월 13일[4] ~ 1407년 8월 15일[5]
(음력 태종 5년 7월 10일 ~ 태종 7년 7월 4일)
제11대 영의정부사
1412년 10월 5일[6] ~ 1414년 5월 15일[7]
(음력 태종 12년 8월 21일 ~ 태종 14년 4월 17일)
제13대 영의정부사
1415년 11월 28일[8] ~ 1416년 6월 29일[9]
(음력 태종 15년 10월 18일 ~ 태종 16년 5월 25일)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 펼치기 · 접기 ]
창원군(昌原君) 1380년(우왕 6)
창성군 충의군(昌城郡忠義君) 1389년(공양왕 1)
창녕백(昌寧伯) 1399년(정종 1)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1401년(태종 1)
문경(文景)
자수(自修)
독곡(獨谷)
부모
부친 - 성여완(成汝完)
모친 - 나주 나씨 나천부(羅天富)의 딸
부인
순흥 안씨 안원숭(安元崇)의 딸
자녀
장남 - 성지도(成志道)
차남 - 성발도(成發道)
장녀 - 송석동(宋石同)의 처

1. 개요2. 생애3. 자녀4. 여담5. 대중매체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여말선초의 관료, 조선정승이다.

2. 생애[편집]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성여완(成汝完, 1309~1397)[10]의 맏아들로 태어나 1357년(공민왕 6) 4월 정당문학 이인복과, 첨서추밀원사 김희조(김취려의 현손)가 주관한 문과에 급제했다. 당시 성석린과 함께 급제한 인물들 가운데 염흥방(장원 급제함), 민제(이방원의 장인 어른), 강시(공양왕의 사위인 강회계의 아버지), 허금(민대생과 혼인한 허금의 딸이 한명회의 장모임) 등이 있다.

고려 말의 대학자 이제현에게도 재능을 인정받았고, 공민왕에게도 중용되는 등 학자 및 관리로서의 재능도 출중했다. 신돈의 모함으로 해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3개월 만에 조정에 복귀한 적이 있다. 그렇다고 문(文)에 완전히 치중되어 있던 것도 아니라서, 1380년(우왕 6) 왜구가 침입한 위기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막아낸 일화도 있다.
경신년 여름에 왜적이 승천부(昇天府)에 들어와서 서울(개경)을 거의 함락시킬 뻔하였는데, 이 때 석린은 원수(元帥)가 되고, 양백연(楊伯淵)은 편장(褊將)이 되었다. 여러 장수들은 적의 선봉(先鋒)이 매우 날랜 것을 보고는 물러가서 다리를 건너고자 하였으나, 석린이 홀로 계책을 결정하여 말하기를,

"만약 이 다리를 지나간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이반(離叛)될 것이니, 다리를 등지고 한번 싸우는 것이 좋겠다."

라고 하니, 여러 장수들이 그 말에 따라, 사람이 모두 죽을 힘을 내어 싸우니, 적이 과연 이기지 못하고 도망하였다.

학유, 전리총랑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양광도 관찰사 시절에는 의창을 설치하고 국가적으로 시행할 것을 건의해 받아들여졌다.

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와 공모하여 우왕,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옹립해 찬화공신에 올랐다. 조선이 개국되자 이색우현보의 일파로 몰려 추방되었다가 돌아와 한성부 판사, 좌의정 등을 역임했으며 특히 태종 때에는 4번에 걸쳐 영의정을 나누어 역임하는 등 상당한 거물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잠저에 있을 때부터 큰 총애를 받았는데, 태조가 기쁘지 않은 일이 있더라도 성석린을 보내면 화가 풀릴 정도로 그를 신임했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권력을 모두 잃어버린 채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된 말년의 태조를 모시고 잔치를 여는 등 그의 마음을 돌리는 데 힘썼으며, 이성계가 동북면으로 훌쩍 떠나 머물 무렵에는 태종의 명을 받아 이성계를 설득해 도성으로 돌아오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때 태종이 '부왕께서 믿고 중히 여기는 이로 경 같은 사람이 없다'고 당부하는 등, 태종으로서도 아버지 상대로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카드였던 모양. 그러나 태조와 태종의 대립이 가장 극렬하게 드러난 사건이었던 조사의의 난 때는 민제 등과 도성 수비를 맡았다.

세는나이로 86세까지 장수했으며, 말년에는 궤장을 하사받는 등 원로대신으로 대우받았다. 참고로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한동안 중지되었던 궤장 하사가 세종 2년 1420년에 예조의 건의로 부활함에 따라 1421년, 조선왕조에서 하사한 제1호 궤장을 받는 영광을 누리는 기록을 세웠다. 이에 감격한 성석린은 "자애하심은 부모보다도 더하시고 보호하시기를 어린 아이와 같이 하시니, 마땅히 크시옵신 은혜를 우러러 받잡고 고질된 노병을 엎드려 잊어버리고, 가을을 바라만 보아도 쇠잔해지는 창포 같은 체질로서, 혹시라도 해를 바라보는 해바라기의 정성을 바칠까 하와, 아침 저녁 한줌의 향을 피워 하늘에 빌겠사오니, 어찌 보응이 없사오리까. 개와 말 같은 하찮은 마음일지라도 주인을 사모함이 죽고 살고에 다름이 있사오리까."라고 사의를 표했고 세종은 자신은 그저 옛일을 따랐을 뿐이라고 위로했다.

이후 1423년에 사망하였다. 세종이 슬퍼하며 3일간 조회를 폐하고 문경(文景)이란 시호를 내렸다. 졸기에서 "용의(容儀)가 청수(淸秀) 괴위(魁偉)하고, 자성(資性)이 탁월하였다. 네 임금을[11] 섬기매 영정(寧靜)함을 힘쓰고, 어수선하게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오랫동안 재상으로 있으면서 재능을 발휘한 정승이었고 그의 형제들 역시 고관의 자리에 오르는 등 현달한 인물이었으나, 하륜이나 이숙번처럼 기책을 발휘해 태종의 즉위에 공헌한 타입은 아니었기에 이들 측근 세력에 비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3. 자녀[편집]

개인적으로는 매우 성공적인 관료의 삶을 살았으나 직계 자손들의 영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두 아들로 성지도(成志道)와 성발도(成發道)를 두었는데, 성지도는 맹인이었기에 후사를 잇거나 관직에 나갈 수도 없던데다가 동생인 성발도의 사위[12]에게 부동산을 빼앗기고 모멸을 당하는 등 모진 고통을 당했다. 성발도는 형조판서, 의정부 참찬을 지내는 등 아버지를 따라 출세하였으나 아들 없이 성석린보다 조금 먼저 죽었다. 유전적인 요인이 있었는지 성지도의 아들 성귀수마저 맹인이었으므로 성석린이 죽고 나서도 후사를 이을 사람이 없었다. 1438년(세종 20) 성귀수가 아들을 낳자 이야기를 듣고 딱하게 여긴 세종이 부사직을 마련해 준 덕에 다행히도 경제적인 부족함은 없던 모양이다.[13] 결론적으로 성석린은 후사가 끊어진 셈인데 뒷날 동생의 증손인 성삼문의 일가가[14] 화를 당한 것을 생각하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4. 여담[편집]

  • <연려실기술>에서는 태종의 밀명을 받고 함흥에 있던 이성계를 만나러 가는데 우연히 지나가는 척 하면서 이성계 주위를 얼쩡거리다가 이성계가 성석린을 알아보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성석린이 슬그머니 도성에 돌아오라는 얘기를 꺼내자 이성계가 노해 을 꺼내 들고 "너 아들이 시켜서 왔지?"라고 하자 성석린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제 자손들이 눈이 멀 거예요."라고 둘러대 위기를 넘긴다. 결국 성석린이 한 맹세가 그의 자손들에게 미치면서 눈이 멀게 되었다고 한다. 당사자들이 들으면 억울할 소리임에 틀림없지만 어쩌면 당대 사람들도 명신이던 성석린의 아들인 성지도와 손자인 성귀수가 줄줄이 맹인이 된 것이 기구한 운명이라고 생각했기에 이 같은 야사가 등장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 성석린의 첫째 동생 성석용은 사육신 성삼문생육신 성담수의 증조부이고 둘째 동생 성석인은 <용재총화>의 저자 성현의 증조부이자 선조대 서인의 중진이던 성혼의 현조부이다. 한편 성석린의 누이는 파평 윤씨의 윤승례와 혼인했는데, 윤승례의 손녀가 바로 정희왕후 윤씨이다.
  • 맹사성의 집이 성석린의 집 바로 밑에 있었는데 맹사성은 성석린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갈 때마다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고 한다. 맹사성의 온후한 일품을 보여주는 일화.

5. 대중매체[편집]

  •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안형식[15]이 연기하였다. 본 작품이 야사가 폭넓게 활용된 만큼 함흥차사 이야기가 그대로 나오며 위의 맹인 일화도 약간 각색되어 묘사되었다.
    고려 말 시기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조선 왕실이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의 시점에 설장수, 이거이 등과 함께 처음 등장한다. 조정에서 꾸준히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는 신하들 중 한 명으로 묘사되며, 1차 왕자의 난 당시 소집령을 받아 삼군부에 갔다가 쓰러져 있는 시신들을 보고 경악하며 놀란다.
    하지만 그는 이방원의 '살생부'에 올라있지 않았고 무사하게 이방원 옆 민제, 설장수, 권근 옆으로 가서 선다. 드라마 상에서 장지화, 노석주, 이직(이직은 후일 다시 부활한다), 변중량 등이 철퇴에 맞아 즉사한다. 성석린, 조준, 심덕부 등은 삼군부 문을 무사하게 통과한다.
    태종 즉위 후 정승의 반열에 오른다. 1410년 시점인 131회 태종이 처남 민무구, 민무질 형제 자결을 명하는 자리에 하륜, 조영무 등과 함께 배석하며 그 자리에서 이제 그만 쉬라는 태종의 말을 듣는다. 성석린 역시 몸이 좋지 않아 사직을 청하려고 했다고 아뢰는 것으로 이후 등장하지 않는다.
  •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다. 다만 역사대로 이숙번을 탄핵하던 간관들을 역으로 벌주라는 상소에 이숙번에 강제로 서명을 받아낸 인원 명단에 남재와 함께 그의 이름이 올라와 있다.

6. 관련 문서[편집]

[1] 율리우스력 2월 22일[2] 율리우스력 12월 11일[3] 율리우스력 4월 24일[4] 율리우스력 8월 4일[5] 율리우스력 8월 6일[6] 율리우스력 9월 26일[7] 율리우스력 5월 6일[8] 율리우스력 11월 19일[9] 율리우스력 6월 20일[10] 고려 말에 재신(宰臣)인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다. 창녕 성씨는 조선 초기에 이름을 날린 명문가로 성여완의 세 아들인 맏아들 성석린, 둘째 아들 성석용(成石瑢), 막내 아들 성석인(成石因)은 모두 과거에 급제한 뒤 고위직을 역임했다.[11] 당연히 조선 한정해서 (그리고 문제의 정종도 어쨌든 포함해서) 4명이다. 고려 시절은 조선의 군신 모두에게 불편한 진실인 만큼...[12] 김연지, 김수지, 송석동. 김연지는 세조 대에 당상관이 되고 송석동은 사육신에게 동조했다가 함께 처형된다.[13] 1466년(세조 12) 성귀수의 집 종이 세조에게 온천 위치를 알려주는 기사가 있는데 이 때 성귀수가 첨지중추부사로 소개되는 것에서 명예 부사직이 이 때까지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14] 정확히는 연좌제의 범위는 친가(성씨 가문) 기준으로 성삼문의 조부의 자손들, 즉 부모형제+3·4·5촌 등이었다. 그 너머의 성씨 일가붙이들은 연좌를 당하지 않았다.[15] 사극에 많이 출연했으며 태조 왕건에서는 경명왕, 제국의 아침에서 준홍, 불멸의 이순신에서 김억추 등을 연기하였다. 2011년 작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

  •  
  •  
  •  
  •  
  •  
  •  
  •  
  •  
  •  
  •  
  •  
  •  
  •  
  •  
  •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