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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왕희지의 난정서로 행서 작품의 대표라 할 만하다. 서성(書聖) 왕희지의 작품 중에서도 단연 제일로 꼽힌다.
한자나 그와 겸용되어 사용되었던 문자들을 사용한 서예. 한자는 중국 대륙에서 현대까지 수천 년간 쓰인 문자로, 서예의 역사도 이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서예가로 손꼽히는 사람은 4세기 동진(東晉)의 왕희지이다. 왕희지는 해서, 행서, 초서, 예서, 전서까지 다섯 가지 서체를 두루 섭렵하였지만, 그중에서도 행서가 뛰어났다. 물론 객관적으로 왕희지가 고금의 모든 서예가보다 뛰어나다고 할 순 없다. 그러나 그가 후대의 서예가들에게 모범이 되어 큰 영향을 끼쳤기에 서성(書聖)이라고 부른다
왕희지 이후 당대(唐代)에 이르러서 유명한 서예가 4명이 나타났으니 구양순, 안진경, 우세남, 저수량이다. 이들은 대부분 해서에 능통했다. 구양순의 대표작에는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안진경은 안근례비(顔勤禮碑), 우세남은 공자묘당비(孔子廟堂碑), 저수량은 안탑성교서(雁塔聖敎序) 등이 있다.
한자만이 아니라 한글, 가나, 심지어 꾸옥응으도 종종 서예의 대상이 된다. 동아시아, 그 중에서도 한자문화권인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 등지에서 발달하였다. 과거 사대부들의 필수 소양이던 시서화 중 서가 서예를 말한다. 한국에서는 書藝(서예), 중국과 베트남은 書法(서법). 일본에서는 書道(서도)라고 쓴다. 서예라는 단어는 현대의 대표적인 서예가인 손재형이 만들었다.
서예를 하는 데 쓰이는 4가지 도구인 종이(화선지 같은 한지나 갱지), 붓(筆), 먹(墨), 벼루(硯)를 지필묵연, 또는 문방사우(文房四友)라 한다. 기타 필요한 도구로는 종이를 누르는 데 쓰이는 서진(書鎭)[3], 물을 담아 두는 연적(硯滴) 들이 있다. 작은 글자는 붓펜 하나만으로 해결된다.
점과 선, 획의 굵거나 가는 정도, 붓누름의 강하거나 약함 또는 가볍거나 무거움, 붓놀림의 빠르거나 느림, 먹의 짙거나 묽음, 문자의 비례 균형 등이 서예의 주요 요소다.
일본에서는 학생들에게 서예를 장려한다. 학생뿐 아니라 성인들의 취미로도 인지도가 있다.[4] 연하장이나 혼례 예물 봉투, 전별금 등 봉투 같은 데에는 되도록 붓으로 써야 예의라 생각한다. 일회성 행사나 안내판에도 붓글씨는 여전히 유효하다. 드라마 춤추는 대수사선에서도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항상 3아미고스가 수사본부 명칭을 종이에 붓글씨로 써서 붙이는 장면이 나온다. 가게, 전통 음식점이나 뭔가 전통 있는 가게의 이름 따위도 대부분 붓글씨로 쓴다. 천에다 가게 이름을 쓴 것을 가게의 상징으로 삼고 수제자에게만 쓸 수 있게 할 정도. 물론 젊은 세대는 그런 거 없고 컴퓨터 워드프로세서나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프린트 해서 쓴다.
베트남에서도 원래 한자문화권이었던 만큼 투 팝(thư pháp)[5]이라 불리는 동아시아권 전통적인 서예를 한다. 대한민국에서 한자서예 이외에도 한글서예를 하듯이, 베트남에서도 한자서예를 가끔 하기도 하지만 현재 사용하는 문자인 로마자로 서예를 한다. 같은 로마자로 쓰는 서양의 캘리그래피와는 다르게 베트남의 서예는 멀리서 얼핏 보면 한자서예같이 보이기도 하는, 한자 필체의 영향이 남은 로마자 서예라는 것이 특징이다. 좀 멋들어지게 써놓은 투팝 작품은 분명히 로마자인데 부적같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미술의 한 단원으로 다룬다. 주로 차분함과 집중력을 기르거나, 예술적인 이유로, 아니면 악필을 교정하기 위하여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6] 국내 대학에도 서예학과가 있긴 하지만 굉장히 수가 적은 데다가 그나마도 통폐합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주로 한문학과와 함께 운영하는데 원광대학교 한문서예학과가 그 예. 미술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하면 서예 강의를 들을 기회가 오기도 한다.
서예에는 인품이 드러난다거나 인격 수양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많이 한다.[7] 그러나 이런 말들이 대부분 그렇듯, 예술의 수준과 인간의 성품은 별개라 귀담아 들을 말이 못 된다. 명나라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은 당대 최고의 명필이었지만 인격은 쓰레기라 백성들이 그가 살던 집을 불태워버렸을 정도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이완용이 글씨를 잘 써 당대에 명필이란 평을 받았지만 인품은 모두들 알다시피 매국노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형편없었다. 다만 서예의 수준은 인성에 비례한다고 보는 이 기준 때문에 작품의 가치를 평가할 때 쓴 사람의 인성을 크게 따져 값을 매기는 경향이 크다. 순수 예술의 시선에서 볼 땐 큰 의의나 독창성이 없더라도 안중근이나 김구의 글씨가 억 소리가 나올 정도로 비싼 것은 이 때문이다.
역대 대통령을 포함한 한국의 정치인들을 보면, 전후세대의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친필 휘호의 수준은 이전 역임자들에게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과거에는 김구가 '답설야중거 불수호란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8]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를 쓰는 등 민족운동가 또는 정치인 중에 달필(達筆)들이 많았고, 서예가 교양인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또한 명필로 소문 났고[9] 심지어는 군사정권 시절 대통령들도 집권 후 뒤늦게라도 애써 서예를 배웠는데, 이것은 붓글씨를 잘 쓰는 것이 교양인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소양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가면서 그러한 인식이 많이 퇴색되었다.
취미가 서예인 사람들은 디스크에 걸리는 빈도가 매우 높다. 몸을 기울이고 붓과 종이에 집중하기 때문으로, 서예가들은 작업실에 허리에 부담을 덜 주는 높은 탁자와 높이 조절이 가능한 의자를 설치해두는 경우가 많다.
서예의 최대 금기는 개칠, 즉 한 번 쓴 글씨를 고쳐 쓰거나 덧쓰는 것이다. 서예 선생님들이 어린 학생들에게 개칠하지 말라고 가르치면 학생들은 '개같이 칠한다.'의 줄임말로 알아듣기도 하지만 개칠(改漆)은 한자어이다. 물론 승정원일기 같은 문서는 격무에 시달리던 승정원 공무원들이 남긴 일종의 공문서이지, 정신적인 가치나 미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서예가 아니기 때문에 개칠이 넘쳐난다.
아주 가끔 연필로 글씨의 윤곽을 그리고 안에 먹으로 색칠을 하는 학생이 있어 서예 교사들로 하여금 어이를 상실하게 만든다.
사실 한글 서예는 오랫동안 한자 서예에 비해 연구가 되어 오지 않았다. 당장 한글 창제만 해도 한자에 비해 훨씬 훗날의 일이다. 또 서예는 오로지 한문만을 취급하던 시절이 있어 용어나 서체의 정의도 비교적 최근에 이루어진 경우다.
최초로 나타난 형태는 고체로, 흔히 이야기하는 판본체이다. 고체의 고는 옛 고(古)를 사용하는데 말 그대로 한글 서체 중 가장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한글 서예가 일중 김충현(金忠顯, 1921-2006)[10]의 정의는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의 원본을 본받은 글씨. 조선 전기 이후 활자, 현대에는 비석과 각종 현판에 주로 사용되는 상당히 실용적인 서체다. 실제로 배우는 데에도 다른 서체에 비하여 어려움이 비교적 적다. 그러나 한글의 원형이기 때문에 한글 서예를 심도 있게 익히고자 한다면 반드시 고체를 배워야 한다고 한다. 고체를 배운 사람과 안 배운 사람의 한글 서예에서는 느껴지는 내공이 다르다나.
비교적 정의가 명확한 서체는 궁체다. 본래 궁중 여관들과 내명부에서 사용하는 글씨인데 이는 서간 등 글씨가 필요한 상황이 많음에도 그 글씨를 쓴 사람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였다. 자연 궁중에서만 통용되던 글씨였다. 당시 법도에 따르면 궁중의 물건은 여염 사가로 나갈 수 없었으므로, 궁중에서 궁체로 쓴 서간을 밖으로 부치더라도 태워 없애거나 보낸 서간에 바로 답간을 달아 궁중으로 돌려보냄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서민 문화가 발달하고 한글 식자층이 늘어났다. 더불어 한글 소설이 유행을 타면서 궁중 여관들의 서적 필사가 일종의 부업이 되면서 사회 기강이 해이해진 탓에 궁중에서 부친 서간들도 보존되어 현대에 발견되곤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순원왕후의 서간인데, 상당히 글씨가 아름답다.
궁에선 '서사상궁'이라는 여관들이 다른 궁인들이 써야 할 글을 대필해주거나 글씨 교육을 하기도 했다. 상술한 순원왕후의 서간에도 역시 서사상궁이 쓴 글씨가 많은 편인데, 서사상궁의 글은 서간 말미에 '어느 전각 아무개 상궁이 서사하였습니다~' 투로 적었기 때문에 구별할 수 있다. 궁체는 획이 섬세하기 때문에[11] 시나 글귀 등을 작품화할 때 주로 사용된다. 흘림과 진흘림 등 변형성도 뛰어나 편지 등을 작성하는 데에도 사랑받아왔다.
민체는 현대의 캘리그라피와 사실상 같은 영역이다. 원광대학교 한문서예학과의 여태명 교수의 정의에 따르면 궁체와 교섭하지 않은 서체, 즉 서민들이 자유롭게 쓴 모든 글씨체를 민체라고 정의한다. 학자에 따라 '나름체'라는 표현도 쓰며, 막 썼다는 의미에서 '막체'라는 표현도 있다.[12] 한자 서예가나 동양화가도 민체를 익히는 경우가 있는데, 한문에 토를 달거나 동양화 한 귀퉁이에 글귀를 쓰기 위해서다. 전자라면, 한글 서예를 익히지 않은 한자 서예가들이 어려운 한문에 토를 달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이고, 후라면 유려한 미로 작품에 미적 완성을 갖추기 위해서다. 이처럼 민체는 실용적 기능, 미적 기능 모두를 갖추고 있다고 하겠다. 현대 드라마 로고 등 현대에 미적으로 활용되는 글씨의 대다수는 민체라고 할 수 있다.
최초로 나타난 형태는 고체로, 흔히 이야기하는 판본체이다. 고체의 고는 옛 고(古)를 사용하는데 말 그대로 한글 서체 중 가장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한글 서예가 일중 김충현(金忠顯, 1921-2006)[10]의 정의는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의 원본을 본받은 글씨. 조선 전기 이후 활자, 현대에는 비석과 각종 현판에 주로 사용되는 상당히 실용적인 서체다. 실제로 배우는 데에도 다른 서체에 비하여 어려움이 비교적 적다. 그러나 한글의 원형이기 때문에 한글 서예를 심도 있게 익히고자 한다면 반드시 고체를 배워야 한다고 한다. 고체를 배운 사람과 안 배운 사람의 한글 서예에서는 느껴지는 내공이 다르다나.
비교적 정의가 명확한 서체는 궁체다. 본래 궁중 여관들과 내명부에서 사용하는 글씨인데 이는 서간 등 글씨가 필요한 상황이 많음에도 그 글씨를 쓴 사람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였다. 자연 궁중에서만 통용되던 글씨였다. 당시 법도에 따르면 궁중의 물건은 여염 사가로 나갈 수 없었으므로, 궁중에서 궁체로 쓴 서간을 밖으로 부치더라도 태워 없애거나 보낸 서간에 바로 답간을 달아 궁중으로 돌려보냄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서민 문화가 발달하고 한글 식자층이 늘어났다. 더불어 한글 소설이 유행을 타면서 궁중 여관들의 서적 필사가 일종의 부업이 되면서 사회 기강이 해이해진 탓에 궁중에서 부친 서간들도 보존되어 현대에 발견되곤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순원왕후의 서간인데, 상당히 글씨가 아름답다.
궁에선 '서사상궁'이라는 여관들이 다른 궁인들이 써야 할 글을 대필해주거나 글씨 교육을 하기도 했다. 상술한 순원왕후의 서간에도 역시 서사상궁이 쓴 글씨가 많은 편인데, 서사상궁의 글은 서간 말미에 '어느 전각 아무개 상궁이 서사하였습니다~' 투로 적었기 때문에 구별할 수 있다. 궁체는 획이 섬세하기 때문에[11] 시나 글귀 등을 작품화할 때 주로 사용된다. 흘림과 진흘림 등 변형성도 뛰어나 편지 등을 작성하는 데에도 사랑받아왔다.
민체는 현대의 캘리그라피와 사실상 같은 영역이다. 원광대학교 한문서예학과의 여태명 교수의 정의에 따르면 궁체와 교섭하지 않은 서체, 즉 서민들이 자유롭게 쓴 모든 글씨체를 민체라고 정의한다. 학자에 따라 '나름체'라는 표현도 쓰며, 막 썼다는 의미에서 '막체'라는 표현도 있다.[12] 한자 서예가나 동양화가도 민체를 익히는 경우가 있는데, 한문에 토를 달거나 동양화 한 귀퉁이에 글귀를 쓰기 위해서다. 전자라면, 한글 서예를 익히지 않은 한자 서예가들이 어려운 한문에 토를 달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이고, 후라면 유려한 미로 작품에 미적 완성을 갖추기 위해서다. 이처럼 민체는 실용적 기능, 미적 기능 모두를 갖추고 있다고 하겠다. 현대 드라마 로고 등 현대에 미적으로 활용되는 글씨의 대다수는 민체라고 할 수 있다.
- 고체(古體)
- 궁체(宮體): 흘릴 경우 흘림과 진흘림으로 나뉜다.
- 민체(民體)
- 박정희
서예에 취미가 있어서 오늘날까지 남은 휘호가 많은데, 본인이 글씨 쓰기를 좋아했을뿐더러 통치기간이 길었기 때문이다. 군인 출신답게 날카로운 판본체에 가까운 서체를 구사했는데,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 살기까지 풍긴다.'는 평과 함께 사령관체로 불리기도 한다. 다만 그의 서예 솜씨에 대해서는 평가가 갈린다. 1968년 광화문 준공식에서 현판이 공개되자 서예가이기도 했던 국회의원 윤제술이 대통령의 글씨인 줄 모르고 큰소리로 "저걸 글씨라고 썼냐."라고 했던 일화나[13], 박 대통령의 글씨를 20여 점이나 새긴 각서장(刻書匠) 오욱진이 훗날 그의 글씨를 두고 "시골 선비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라고 평했단 일화가 있다.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가운데에서 가장 명필은 이승만이지만 시장에서 가장 비싸게 거래되는 작품은 그의 글씨라고 한다.[14] - 선덕제
명필이였으며 그림에도 능숙했다. - 신영복
감옥에서 서예를 배워 자신의 서체를 개발했다. - 옹방강
청나라의 학자 및 서예가, 김정희의 스승. - 왕희지
서예라는 분야를 창시했다. - 전두환
당나라의 안진경체를 당대의 대가로 유명한 일중 김충현(金忠顯) 선생(1921~2006)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다. 실제로도 명필로 평가받는다. - 한석봉
붓 하나만으로 관직까지 오른 사람. 한국에서 명필의 대명사가 되었다. - 상하이조
야인시대의 그 상하이조가 맞는데 말년에 서예가가 되었다고 한다. - 김충현
독립기념관의 현판을 썼다. - 오노노 도후
화투 11월 비광에 그려진 인물로 유명하다. - 아리스가와노미야
일본의 방계 황족 가문이지만 지금은 단절되었다.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은 대대로 서예를 가업으로 삼아 '아리스가와류(有栖川流) 서예'라는 가전(家傳) 서체가 있었다. 가문의 마지막 당주 다케히토(威仁) 친왕의 자녀들 중 미에코(實枝子) 여왕이 딸 도쿠가와 키쿠코에게 아리스가와류 서체를 전수했다. 키쿠코는 다이쇼 덴노의 3남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에게 시집갔으나 자녀를 낳지 못했고, 대신 조카손자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에게 자기 외가의 서체를 전수해 주었다. - 후지와라노 스케마사
헤이안 시대 활동했던 일본의 정치인이자 서예가. - 후지와라노 유키나리
헤이안 시대 활동했던 일본의 정치인이자 서예가로 오노노 도후, 후지와라노 스케마사와 함께 중국식 서예를 벗어나 독자적인 일본식 서예를 개척했다고 알려진 삼적(三跡)으로 평가받고 있다.
둘 다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알라의 이름으로[16](Bismillāhi r-raḥmāni r-raḥīm)' 라고
링크 참조
이슬람 문화권에서 두드러지게 발달한 몇 안되는 예술 분야 중 하나이다.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교의 전통상 이슬람 지역에서는 전통적으로 서예가 발달했다. 특히 인물 그림을 금기시하였는데 점차 그림을 금기시하는 풍조가 풀리면서, 이렇게 서예로 그림을 그리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이는 '그림이 아니라 글자라서 괜찮다.'고 규제를 회피하는 게 아니라, 그림이라고 인식은 하지만 아랍 문자는 (쿠란을 쓸 때 사용한 문자이므로) 신성하기 때문에 아랍 문자로 그린 그림은 우상숭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여 허용되는 것이다.
이슬람 미술 분야에서 아라베스크나 건축같이 발달할 수 있던 몇 안 되는 물건. 오스만 제국 시대 황제들은 공식 문서나 화폐에 투으라(Tuğra)라는 서명을 했는데 이 또한 서예를 응용한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황제 압뒬하미트 2세의 투으라. 본문에는 Abdulhamit han bin Abdülmecit el-muzaffer daima (항상 승리하는 압뒬메지트의 아들 압뒬하미트 칸), 오른쪽 위에는 el-gazi(신앙의 수호자)라는 별칭이 쓰였다. 투으라는 파디샤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쉴레이만 대제 이후 정형화되었다. 본문 오른쪽에 두 줄로 나 있는 가로선은 '술탄'과 '칼리파'로서의 왕권을, 왼쪽의 고리 두 개 중 작은 고리는 '흑해', 큰 고리는 '지중해', 위쪽의 세로선 세 개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지배함을 상징한다.
그 때문에 서양에서는 다른 서예를 제치고 더더욱 유명해진 물건. 곡선이라는 특징 때문에 예술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그림도 다른 글씨보다 훨씬 더 다양하거니와 다른 지방보다 훨씬 더 의의가 크다는 점 때문인 듯.
자사의 로고에 이슬람 서예를 사용한 예로 알 자지라나 에미레이트 항공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이란의 국기에도 서예가 있다.
흔히 유럽 기독교 문화권에는 서예에 해당하는 예술 자체가 없었다는 편견이 있는데, 그냥 서양 전통문화, 특히 중세 문화가 국내에 제대로 안 알려진 탓이다. 가톨릭과 정교회 모두 시각예술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였고 문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펜 캘리그래피 자체가 바로 깃털펜을 널리 쓰던 시절부터 있던 것이며 흔한 편견과 달리 금속활자가 서양에 보급되기 전까지 성경 등의 필사본을 적는 데 널리 사용되었다. 유럽 박물관에 가서 중세의 성서 필사본들을 보면 매우 정교하고 화려한 예술작품이다.
https://www.kb.nl/en/resources-research-guides/kb-collections/medieval-manuscripts
https://www.fitzmuseum.cam.ac.uk/research/im
또한 블랙 레터도 본질적으로는 유럽식 캘리그래피에서 유래한 글자꼴이다.
https://www.kb.nl/en/resources-research-guides/kb-collections/medieval-manuscripts
https://www.fitzmuseum.cam.ac.uk/research/im
또한 블랙 레터도 본질적으로는 유럽식 캘리그래피에서 유래한 글자꼴이다.
가장 비슷한 형태로는 타이포그래피가 있으며, 유래는 다르지만 상세히 따져보면 서예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1] 서법(書法)의 베트남어 발음[2] 서예진흥에 관한 법률 제2조 제1호[3] 문진이라고도 한다.[4] 이 덕분에 붓과 물감을 만들고 파는 회사가 100년 넘게 잘 운영되고, 간단하게 붓글씨를 쓸 수 있는 붓펜이 시중에 많다.[5] 그냥 '서법'이라는 뜻이다.[6] 다만 붓과 펜은 특성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서예를 배운다고 해서 악필 교정에 직접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물론 글자의 형태나 비율에 대한 감각을 익히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가장 중요한 손놀림이나 필기구를 컨트롤하는 요령은 방향성이 서로 다르다. 실제로 달필로 유명한 펜크래프트도 붓을 못 다룬다.[7] 벼루에 물을 부어서 먹으로 그어 먹물을 만드는 것 자체가 대단히 번거로운 작업이다. 또한 그렇게 먹물을 만들고 난 후 붓에 먹물을 묻혀 종이에 옮겨다 글씨를 한자 한자 적는 것 역시 정성 들여 천천히 써야한다. 자칫 잘못하단 먹물이 종이에 번져서 글자를 망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예가 대부분 한자를 위주로 쓰니 획 하나하나가 중요하다.[8] '눈 내린 들판 한 가운데를 걸어갈 때는 발걸음을 어지럽게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간 길이 뒷 사람의 발자취가 될 것이다'는 한시(漢詩)이다. 임진왜란의 호국 영웅 서산대사가 지었다고도 하고, 조선 후기의 문신 이양연(李亮淵)의 작품이라고도 한다.[9] 역대 대통령들의 서예 실력을 평할 때 보통은 추종자들이 좋게 평가해주고 글씨를 사주는 경우가 많지만, 이런 정치색을 빼고 봐도 이승만 대통령은 어린 시절 서당에서 정통으로 한학과 서예를 배웠고 과거 준비까지 했었다. 당연히 붓글씨를 쓰는 빈도도 취미삼아 늦게 배운 후대 대통령들보다 높아서 붓글씨를 잘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통령으로서 공과를 떠나 글씨의 심미성 자체는 다른 대통령들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준 높다는 평이 많다.[10] 한글뿐 아니라 한자 서예에도 정통하여 많은 글씨를 남겼고, 한글 서예는 미술 교과서에도 소개되었다. 금석학 분야에서도 괄목할 업적을 남겼으니 최초로 한글 서예로 비석을 제작할 시도를 했다는 점이다. 위당 정인보는 생전에 "나는 일중이 쓰지 않는 글은 짓고 싶지 않다."란 말을 하였을 정도.[11] 달리 표현하자면 큰 글씨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뜻이다.[12] 딱히 비하적인 표현은 아니다. 막사발도 막 만들어서 막사발.[13] 박통의 글씨임을 안 다음에는 "아, 그래도 뼈대 하나는 살아 있는 글이구먼!"(...)이라고 외치는 임기응변으로 화를 모면했다고 한다.[14] 다만 최고가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인용(智仁勇)으로, 1억 5500만 원에 낙찰되었다.[15] 현대에 확인된 건 한중 공방전에서 양평관에 갔을 때 쓴 곤설(衮雪)이라는 두 글자뿐이다. 현판에는 '위왕' 두 글자가 더 씌었지만 당시 조조는 위왕이 아니었으므로 누군가가 덧쓴 것이다.[16] 쿠란의 첫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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