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굴 제국 제5대 황제 샤 자한 شاه جهان | |
이름 | 샤하브 웃 딘 무함마드 쿠람 شهاب الدین محمد خرم |
출생 | |
사망 | |
재위 기간 | 제5대 황제 |
대관식 | |
전임자 | 자한기르 (제4대) |
후임자 | 아우랑제브 (제6대) |
부모 | |
배우자 | 뭄타즈 마할 (1593 ~ 1631) |
자녀 | |
종교 |
무굴 제국의 제5대 황제. '샤 자한'이라는 왕명은 페르시아어로 '세계의 왕'이란 뜻이다.[4]
무굴 제국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군주였다. 단순히 영토 규모로만 본다면야 후임 아우랑제브가 훨씬 넓은 영토를 다스렸지만 경제적, 사회적으로 정점을 찍은 때는 샤 자한의 재위기였다. 아우랑제브가 무리한 팽창 전쟁을 벌이며 세금을 거두어들이면서 제국의 재정 상태가 경제적으로 파탄나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샤 자한의 시대까지만 해도 인도는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이었고 전세계의 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엄청난 양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군사적으로도 성공한 군주여서 남부의 데칸 술탄국을 굴복시키고 남인도 대부분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는 등 무굴 제국의 강역을 넓히는 데에 성공했다.[5] 외교적으로도 상당히 실리적인 면모를 보여서 인근의 사파비 왕조, 오스만 제국 뿐만 아니라 저 멀리 유럽의 영국,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과도 외교 관계를 지속했다.
하지만 비판도 만만치는 않다. 일단 샤 자한은 선황 악바르 시대보다 종교적으로 훨씬 퇴보적인 모습을 보였다. 관용의 끝판왕 수준이던 악바르 대제와는 달리 샤 자한은 친이슬람적인 성향을 명확히 했고 힌두교도들의 세금 부담은 날로 올라갔다. 덕분에 힌두교와 이슬람의 갈등은 날로 심해져 결국 무굴 제국이 아우랑제브 사후 빠르게 붕괴하는 단초를 제공한 셈이다. 게다가 일부 원정에서 실패하여 물러나는 모습을 보이며 제국의 약점을 외부에 노출했고 타지마할로 대표되는 지나치게 많은 건축물들을 축조하느라 국고를 낭비하는 등 씀씀이가 영 헤픈 군주였기도 하다. 다만 샤 자한은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과보다 공이 훨씬 더 많은 군주였고 그의 재위기에 무굴 제국이 그 국력의 정점을 찍었다는 것에는 대부분 이견이 없다.
일반인들에게는 가장 잘 알려진 인도 출신 황제일 것이다. 뭄타즈 마할과의 로맨스와 '타지마할'을 건축한 명성으로 압도적인 유명세를 쌓았다.
무굴 제국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군주였다. 단순히 영토 규모로만 본다면야 후임 아우랑제브가 훨씬 넓은 영토를 다스렸지만 경제적, 사회적으로 정점을 찍은 때는 샤 자한의 재위기였다. 아우랑제브가 무리한 팽창 전쟁을 벌이며 세금을 거두어들이면서 제국의 재정 상태가 경제적으로 파탄나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샤 자한의 시대까지만 해도 인도는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이었고 전세계의 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엄청난 양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군사적으로도 성공한 군주여서 남부의 데칸 술탄국을 굴복시키고 남인도 대부분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는 등 무굴 제국의 강역을 넓히는 데에 성공했다.[5] 외교적으로도 상당히 실리적인 면모를 보여서 인근의 사파비 왕조, 오스만 제국 뿐만 아니라 저 멀리 유럽의 영국,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과도 외교 관계를 지속했다.
하지만 비판도 만만치는 않다. 일단 샤 자한은 선황 악바르 시대보다 종교적으로 훨씬 퇴보적인 모습을 보였다. 관용의 끝판왕 수준이던 악바르 대제와는 달리 샤 자한은 친이슬람적인 성향을 명확히 했고 힌두교도들의 세금 부담은 날로 올라갔다. 덕분에 힌두교와 이슬람의 갈등은 날로 심해져 결국 무굴 제국이 아우랑제브 사후 빠르게 붕괴하는 단초를 제공한 셈이다. 게다가 일부 원정에서 실패하여 물러나는 모습을 보이며 제국의 약점을 외부에 노출했고 타지마할로 대표되는 지나치게 많은 건축물들을 축조하느라 국고를 낭비하는 등 씀씀이가 영 헤픈 군주였기도 하다. 다만 샤 자한은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과보다 공이 훨씬 더 많은 군주였고 그의 재위기에 무굴 제국이 그 국력의 정점을 찍었다는 것에는 대부분 이견이 없다.
일반인들에게는 가장 잘 알려진 인도 출신 황제일 것이다. 뭄타즈 마할과의 로맨스와 '타지마할'을 건축한 명성으로 압도적인 유명세를 쌓았다.
1592년 1월 5일에 라호르에서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는 '샤 자한'이 아니라 '샤하브 웃 딘 무함마드 쿠람', 줄여서 쿠람 황자라고 불렀다. 쿠람 황자는 자한기르의 7번째 자녀이자 3번째 아들이었다. 자한기르가 당시 가장 총애하던 아내들 중 하나였던 자갓 고사인 황후를 어머니로 두었다. 참고로 '쿠람'이라는 이름은 조부 악바르가 친히 지어준 이름이었다. 자한기르의 회고록에는 악바르가 어린 쿠람 황자를 무척 귀여워해 '내가 너를 내 진정한 아들로 여긴다'라고 종종 말하곤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쿠람 황자가 어릴 적부터 특출난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악바르는 이후에도 쿠람 황자를 불러 시를 논하거나 다과를 드는 등 굉장히 그를 아꼈다고 한다. 쿠람 황자는 어릴 적부터 시와 문학을 접했고 음악에서 무술까지 다양한 분야를 섭렵했다.[6]
악바르의 쿠람 황자에 대한 애정은 끝이 없었다. 게다가 제위를 물려받을 제1황자인 자한기르는 아편과 술에 절어 지냈으며 심지어 말년에는 악바르에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했으니 그에게 실망한 악바르 황제가 더더욱 쿠람 황자를 그의 대체제로 삼았다. 쿠람 황자야말로 진정 그의 제국을 물려받을 후계자라고 생각한 악바르는 쿠람 황자를 따로 빼내어 그의 아내인 라카이야 술탄 베굼에게 양육을 맡겼는데 라카이야 술탄 베굼 역시 영특한 쿠람 황자를 좋아했고 자한기르가 제 친자식보다도 더 아꼈다고 평가할 정도로 쿠람 황자에게 사랑을 퍼부어 주었다. 1605년에 악바르가 죽자[7] 쿠람 황자는 친모인 자갓 고사인에게 돌아왔고 자갓 고사인도 그를 크게 아꼈다. 쿠람 황자는 자갓 고사인 왕비에게 금세 정을 붙였고 1619년에 그녀가 타계하자 몇날며칠을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8]
아버지인 자한기르가 1605년 악바르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올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한기르의 장남 쿠스라우 미르자가 반란을 일으켰다. 악바르가 쿠스라우 미르자를 아꼈기 때문에 아버지가 자신의 제위를 빼앗았다고 생각한 쿠스라우 미르자가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에 반역을 저지른 것이었다. 반면 똑같이 총애받던 쿠람 황자는 조용히 아버지에 충성을 맹세하면서 궁정에서 머물렀다. 능력이 나름 있는 황제였던 자한기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쿠스라우의 군대를 격파했고 쿠스라우는 아그라로 끌려왔다. 쿠람 황자는 쿠스라우 미르자의 처분을 자기가 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청했다. 당시 쿠람 황자를 아끼던 자한기르는 아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었는데 쿠람 황자는 이복형의 눈을 빼 버린 다음 결국 죽여 버렸다. 쿠스라우가 살아있으면 후일 제가 황위에 오르는 데에 걸리적거릴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장남 쿠스라우마저 제거한 쿠람 황자는 누가 뭐라하든 암묵적인 자한기르 황제의 후계자로 여겨지기 시작했지만 1611년 아버지 자한기르가 '누르 자한'이라는 이름의 여인을 새롭게 황후로 맞아들이면서 상황이 서서히 변했다. 누르 자한은 아름다운 미모와 지혜, 재치 등으로 늙은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자한기르가 술과 아편에 쩔어 사는 사이에 누르 자한이 국정 상당수를 쥐어잡게 되었고 권력욕이 강했던 나머지 심지어 제국의 금화에 제 이름을 넣기도 했다. 누르 자한은 제 오빠인 아사프 칸을 재상으로 임명하고 궁정 내에서 제 권력을 굳혀나갔다. 특히 1612년에는 쿠람 황자와 아사프 칸의 딸을 결혼시키기도 했는데 이 딸이 바로 그 유명한 뭄타즈 마할이다. 그러나 하늘에 태양이 2개 있을 수 없듯이 아사프 칸의 딸과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쿠람 황자와 누르 자한 사이의 골은 벌어져만 갔다. 특히 누르 자한이 제 양아들인 샤르야를 다음 황제로 올리려 들면서 쿠람과 누르 자한은 완전히 돌아서게 되었다.
쿠람 황자와 누르 자한 사이의 갈등은 사파비 왕조가 칸다하르 지방을 빼앗으려고 무굴 제국을 침공하면서 수면 위로 터져나왔다. 사실상 황제를 대신해 국정을 다스리던 누르 자한은 쿠람 황자에게 칸다하르를 구원하기 위해 출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이 수도를 떠나 있는 동안 누르 자한이 병든 아버지를 설득해 저 대신 샤르야를 후계자로 만들 것을 두려워한 쿠람 황자는 이를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이같은 불안감이 갈수록 증폭되자 결국 쿠람 황자는 스스로 황위를 얻어내기 위해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1622년에 군대를 일으킨 쿠람 황자였지만 1623년에 빌로치푸르에서 자한기르의 진압군에게 대파당했고 우다이푸르로 도망쳤다.[9] 그렇게 반란이 실패하자 쿠람 황자는 어쩔 수 없이 1626년 3년 만에 자한기르에게 항복했다. 하지만 누르 자한과의 갈등마저 봉합된 것은 아니어서 자한기르가 죽을 때까지 물밑에선 치열한 암투가 일어났다고 한다.
1627년에 마침내 자한기르가 승하하자 누르 자한은 예상대로 양아들 샤르야를 황제로 세우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의 오빠이자 재상이던 아사프 칸이 그녀에게 반대하고 쿠람 황자에 편에 서버리면서 결국 누르 자한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쿠람 황자가 무굴 제국의 제5대 황제로 즉위했다.[10] 쿠람 황자는 '아부 웃-무자파 시하브 웃-딘 모함마드 사히브 웃-퀴란 웃-타니 샤 자한 파드샤 가지'[11], 줄여서 '샤 자한'이라는 휘로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경쟁자였던 샤르야를 죽여 버렸고 장남 쿠스라우 미르자의 자식들마저 모조리 쓸어버렸다.[12] 이렇게 제 친척들을 모두 죽이고 황위에 오른 샤 자한을 방해할 경쟁자는 이제 남아있지 않았고, 본격적으로 무굴 제국의 최고 황금기인 샤 자한의 재위기가 시작된다.
악바르의 쿠람 황자에 대한 애정은 끝이 없었다. 게다가 제위를 물려받을 제1황자인 자한기르는 아편과 술에 절어 지냈으며 심지어 말년에는 악바르에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했으니 그에게 실망한 악바르 황제가 더더욱 쿠람 황자를 그의 대체제로 삼았다. 쿠람 황자야말로 진정 그의 제국을 물려받을 후계자라고 생각한 악바르는 쿠람 황자를 따로 빼내어 그의 아내인 라카이야 술탄 베굼에게 양육을 맡겼는데 라카이야 술탄 베굼 역시 영특한 쿠람 황자를 좋아했고 자한기르가 제 친자식보다도 더 아꼈다고 평가할 정도로 쿠람 황자에게 사랑을 퍼부어 주었다. 1605년에 악바르가 죽자[7] 쿠람 황자는 친모인 자갓 고사인에게 돌아왔고 자갓 고사인도 그를 크게 아꼈다. 쿠람 황자는 자갓 고사인 왕비에게 금세 정을 붙였고 1619년에 그녀가 타계하자 몇날며칠을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8]
아버지인 자한기르가 1605년 악바르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올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한기르의 장남 쿠스라우 미르자가 반란을 일으켰다. 악바르가 쿠스라우 미르자를 아꼈기 때문에 아버지가 자신의 제위를 빼앗았다고 생각한 쿠스라우 미르자가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에 반역을 저지른 것이었다. 반면 똑같이 총애받던 쿠람 황자는 조용히 아버지에 충성을 맹세하면서 궁정에서 머물렀다. 능력이 나름 있는 황제였던 자한기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쿠스라우의 군대를 격파했고 쿠스라우는 아그라로 끌려왔다. 쿠람 황자는 쿠스라우 미르자의 처분을 자기가 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청했다. 당시 쿠람 황자를 아끼던 자한기르는 아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었는데 쿠람 황자는 이복형의 눈을 빼 버린 다음 결국 죽여 버렸다. 쿠스라우가 살아있으면 후일 제가 황위에 오르는 데에 걸리적거릴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장남 쿠스라우마저 제거한 쿠람 황자는 누가 뭐라하든 암묵적인 자한기르 황제의 후계자로 여겨지기 시작했지만 1611년 아버지 자한기르가 '누르 자한'이라는 이름의 여인을 새롭게 황후로 맞아들이면서 상황이 서서히 변했다. 누르 자한은 아름다운 미모와 지혜, 재치 등으로 늙은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자한기르가 술과 아편에 쩔어 사는 사이에 누르 자한이 국정 상당수를 쥐어잡게 되었고 권력욕이 강했던 나머지 심지어 제국의 금화에 제 이름을 넣기도 했다. 누르 자한은 제 오빠인 아사프 칸을 재상으로 임명하고 궁정 내에서 제 권력을 굳혀나갔다. 특히 1612년에는 쿠람 황자와 아사프 칸의 딸을 결혼시키기도 했는데 이 딸이 바로 그 유명한 뭄타즈 마할이다. 그러나 하늘에 태양이 2개 있을 수 없듯이 아사프 칸의 딸과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쿠람 황자와 누르 자한 사이의 골은 벌어져만 갔다. 특히 누르 자한이 제 양아들인 샤르야를 다음 황제로 올리려 들면서 쿠람과 누르 자한은 완전히 돌아서게 되었다.
쿠람 황자와 누르 자한 사이의 갈등은 사파비 왕조가 칸다하르 지방을 빼앗으려고 무굴 제국을 침공하면서 수면 위로 터져나왔다. 사실상 황제를 대신해 국정을 다스리던 누르 자한은 쿠람 황자에게 칸다하르를 구원하기 위해 출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이 수도를 떠나 있는 동안 누르 자한이 병든 아버지를 설득해 저 대신 샤르야를 후계자로 만들 것을 두려워한 쿠람 황자는 이를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이같은 불안감이 갈수록 증폭되자 결국 쿠람 황자는 스스로 황위를 얻어내기 위해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1622년에 군대를 일으킨 쿠람 황자였지만 1623년에 빌로치푸르에서 자한기르의 진압군에게 대파당했고 우다이푸르로 도망쳤다.[9] 그렇게 반란이 실패하자 쿠람 황자는 어쩔 수 없이 1626년 3년 만에 자한기르에게 항복했다. 하지만 누르 자한과의 갈등마저 봉합된 것은 아니어서 자한기르가 죽을 때까지 물밑에선 치열한 암투가 일어났다고 한다.
1627년에 마침내 자한기르가 승하하자 누르 자한은 예상대로 양아들 샤르야를 황제로 세우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의 오빠이자 재상이던 아사프 칸이 그녀에게 반대하고 쿠람 황자에 편에 서버리면서 결국 누르 자한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쿠람 황자가 무굴 제국의 제5대 황제로 즉위했다.[10] 쿠람 황자는 '아부 웃-무자파 시하브 웃-딘 모함마드 사히브 웃-퀴란 웃-타니 샤 자한 파드샤 가지'[11], 줄여서 '샤 자한'이라는 휘로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경쟁자였던 샤르야를 죽여 버렸고 장남 쿠스라우 미르자의 자식들마저 모조리 쓸어버렸다.[12] 이렇게 제 친척들을 모두 죽이고 황위에 오른 샤 자한을 방해할 경쟁자는 이제 남아있지 않았고, 본격적으로 무굴 제국의 최고 황금기인 샤 자한의 재위기가 시작된다.
샤 자한 역시 할아버지 악바르 대제, 아버지 자한기르의 뒤를 이은 활발한 정복군주였다. 특히 당시 북인도 전체를 점령한 무굴 제국의 다음 목표가 바로 남인도 지방과 데칸 고원 일대를 평정하는 것이었다. 북인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토후들이 얼핏하면 무굴 제국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남인도 지방으로 도망쳤다가 힘을 길러 다시 쳐들어오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에 이 지방들을 정복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었다. 선황 자한기르 역시 여러 차례 남인도 평정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아마드나가르 일대를 넘지 못하고 일부 요새들과 교역로에 대한 특권을 얻어내는 것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무굴 제국이 남인도에 진군하려고만 하면 남인도의 왕국들이 하나같이 힘을 합쳐 연합군을 꾸렸기 때문에 시간을 더 지체하면 영원히 남인도 지방을 합병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갈수록 무굴 궁정 내부에 팽배해졌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샤 자한은 남인도의 수많은 소왕국들과 전쟁을 벌이고 이들을 모두 격파하고자 대군을 조직했다.
샤 자한의 첫 번째 목표는 아마드나가르 요새였다. 아마드나가르를 칠 명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무굴 제국의 봉신들 중 하나였던 자한 로디가 샤 자한이 즉위하기 직전 발라가트 지방을 아마드나가르에게 팔아치우고 그들에게 받은 지원으로 제국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무굴 제국은 1629년에 즉각 대군을 보내 자한 로디를 때렸고, 아마드나가르는 어쩔 수 없이 자한 로디에 대한 지원을 철회했지만 항복하지는 않았다. 이 기회에 아마드나가르를 먹어 보고자 했던 무굴 제국으로서는 절반의 성공만을 이룬 셈이었다. 하지만 아마드나가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굴 제국에 굴복했다. 당시 아마드나가르의 왕이었던 니잠 샤는 파테 칸을 재상으로 임명했는데, 파테 칸은 이기적이고 사악하기 짝이 없던 인간이라 니잠 샤를 죽이고 10살에 불과했던 후세인을 새 왕으로 추대했다. 파테 칸은 자리 보전을 위해 무굴 제국과 외교적으로 갈등을 해결하고자 했고,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는 동시에 값비싼 조공을 보냈다. 샤 자한은 당시 뭄타즈 마할이 죽어서 전쟁 따위에 신경을 쓸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정도에 만족하고 물러갔다.
1632년에 무굴 제국군은 아마드나가르와 데칸 고원에서 물러났으며 파테 칸이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그를 감시하기 위하여 1633년 마하바트 칸을 데칸 고원의 총독으로 파견했다. 하지만 파테 칸이 뒤에서 호박씨를 까면서 무굴 제국에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본 마하바트 칸은 결국 파테 칸과 독자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마하바트 칸은 3개월 반에 걸친 공성전 끝에 다울라바트 요새를 함락하고 그 안에 있던 파테 칸과 후세인을 포로로 잡아 무굴 제국으로 압송했다.[13] 이로써 아마드나가르 지방은 완전히 무굴 제국에 흡수되었다. 물론 이후에도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 일부 귀족들이 무르타자 3세를 왕으로 내세우고 샤 자한에게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마저도 얼마 가지 않아 분쇄되었고 1636년에는 무르타자 3세마저 무굴 제국에게 넘겨졌다.[14] 이로써 오랫동안 제국의 골치를 썩였던 아마드나가르 지방이 마침내 무굴 제국의 완전한 행정구역들 중 하나로 편입되었다.
샤 자한의 첫 번째 목표는 아마드나가르 요새였다. 아마드나가르를 칠 명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무굴 제국의 봉신들 중 하나였던 자한 로디가 샤 자한이 즉위하기 직전 발라가트 지방을 아마드나가르에게 팔아치우고 그들에게 받은 지원으로 제국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무굴 제국은 1629년에 즉각 대군을 보내 자한 로디를 때렸고, 아마드나가르는 어쩔 수 없이 자한 로디에 대한 지원을 철회했지만 항복하지는 않았다. 이 기회에 아마드나가르를 먹어 보고자 했던 무굴 제국으로서는 절반의 성공만을 이룬 셈이었다. 하지만 아마드나가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굴 제국에 굴복했다. 당시 아마드나가르의 왕이었던 니잠 샤는 파테 칸을 재상으로 임명했는데, 파테 칸은 이기적이고 사악하기 짝이 없던 인간이라 니잠 샤를 죽이고 10살에 불과했던 후세인을 새 왕으로 추대했다. 파테 칸은 자리 보전을 위해 무굴 제국과 외교적으로 갈등을 해결하고자 했고,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는 동시에 값비싼 조공을 보냈다. 샤 자한은 당시 뭄타즈 마할이 죽어서 전쟁 따위에 신경을 쓸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정도에 만족하고 물러갔다.
1632년에 무굴 제국군은 아마드나가르와 데칸 고원에서 물러났으며 파테 칸이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그를 감시하기 위하여 1633년 마하바트 칸을 데칸 고원의 총독으로 파견했다. 하지만 파테 칸이 뒤에서 호박씨를 까면서 무굴 제국에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본 마하바트 칸은 결국 파테 칸과 독자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마하바트 칸은 3개월 반에 걸친 공성전 끝에 다울라바트 요새를 함락하고 그 안에 있던 파테 칸과 후세인을 포로로 잡아 무굴 제국으로 압송했다.[13] 이로써 아마드나가르 지방은 완전히 무굴 제국에 흡수되었다. 물론 이후에도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 일부 귀족들이 무르타자 3세를 왕으로 내세우고 샤 자한에게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마저도 얼마 가지 않아 분쇄되었고 1636년에는 무르타자 3세마저 무굴 제국에게 넘겨졌다.[14] 이로써 오랫동안 제국의 골치를 썩였던 아마드나가르 지방이 마침내 무굴 제국의 완전한 행정구역들 중 하나로 편입되었다.
골콘다 지방의 지배자들은 전통적으로 시아파 무슬림이었고 수니파였던 무굴 황실의 지배를 거부했다. 1631년에 골콘다의 왕 무함마드 쿠타프 샤가 샤 자한의 공물 요구를 거절하는 등 대놓고 무굴 제국에 반기를 들자 샤 자한은 골콘다 지방을 정복하기로 결심했다. 1636년에 무함마드 쿠타프 샤가 사망하자 그의 11살짜리 어린 아들 압둘라 쿠트브 샤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지나치게 어리다 보니 궁정 내부에서도 싸움박질이 일어나면서 골콘다는 심각하게 세력이 줄어들었다. 이를 간파한 샤 자한은 1636년에 비자푸르와 마라타를 제압한 다음 골콘다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힘이 약했던 압둘라 쿠트브 샤는 울며 겨자먹기로 샤 자한의 항복 요구를 받아들였고[15] 골콘다 지방은 무굴 제국의 봉신국으로 전락했다.
이렇게 골콘다를 봉신국으로 삼은 샤 자한은 아들 아우랑제브를 1636년에 데칸의 나와브로 임명해 새롭게 정복한 지역들을 통제하도록 했다. 특히 무굴 제국의 데칸 영향력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태위태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황자를 직접 파견해야 겨우 통제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우랑제브는 무굴 제국의 데칸 영토를 크게 4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관리했는데 첫째가 아시르가르 요새를 포함한 칸데시 구역, 둘째가 엘리크푸르를 주도로 삼은 베라르 지역, 셋째가 난데르를 주도로 한 텔랑가나 지역, 마지막이 아마드나가르를 주도로 삼은 아마드나가르 지역이었다. 참고로 아우랑제브는 1644년에 궁정으로 복귀했다가 1652년에 다시 데칸 나와브로 부임했다. 그러나 데칸 지방은 그가 궁정에 갔다 온 사이에 썩어빠진 행정구조, 봉신국들의 공물 불납, 막대한 군비 지출 때문에 거의 파탄난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봉신국들이 유지비나 주둔비는 거의 4분의 1 수준으로 바쳤고 그마저도 중간에서 다 떼어먹으니 엄청난 출혈이 발생하고 있었다.
상황에 경악한 아우랑제브는 바로 행정 개혁과 재정 개혁을 동시에 실시했다. 그는 유능한 관료였던 무르시드 쿠리 칸 쿠라사니를 데칸으로 데려와 세수 개혁을 진행하도록 했다. 쿠라사니는 데칸 지방의 세수 구분을 위해 일단 데칸을 크게 칸데시와 베라르 지방, 그리고 나머지 지방을 포함한 발라가트 지방으로 나누었다. 그는 지방 곳곳에 관리들을 파견해 농토의 면적과 비옥도를 한꺼번에 측정하여 세율과 세수를 다시 조정하도록 만들었고 온갖 곳에서 인재들을 끌어모아 최대한 부정부패 척결에 나섰다. 특히 빈농에게는 세율을 낮추어 25% 정도로 세금을 감면해 받기도 했다. 쿠라사니의 개혁은 성공적이었고 1658년 즈음에는 데칸 지방의 경제 효율과 세수가 비약적일 정도로 증가했다. 쿠라사니의 경제 개혁에 흡족해한 아우랑제브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군사 개혁, 정치 구조 개혁, 행정 개혁 등 웬만한 분야는 모조리 뜯어고쳤고 이 모든 개혁들이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데칸은 평화를 되찾았다.
하지만 아우랑제브는 단순히 데칸을 평화롭게 만드는 정도에 그칠 생각이 없었는데 그가 중앙아시아와 칸다하르 지방의 원정 (샤 자한의 중앙아시아 원정)에서 실패하며 잃어버린 영향력을 되찾기 위해선 데칸을 평화롭게 만들 뿐만 아니라 원정을 치러 영토를 넓히는 방법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골콘다 지방은 1636년에 샤 자한에게 한 서약 내용들 중 공물을 바치겠다는 내용을 거의 이행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명분도 충분했으며 워낙 부유하고 많은 보물들을 쌓아놓은 곳이었기 때문에 만약 이를 정복한다면 아우랑제브의 금고도 훨씬 두둑해질 것이 훤한 일이었다. 그러나 골콘다가 명목상으로는 무굴 제국의 봉신국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고 아우랑제브는 호시탐탐 때만을 노리면서 골콘다를 칠 명분을 찾기 위해 골몰했다. 그리고 그 명분은 1656년 골콘다의 재상이던 미르 줌라가 무굴 제국에 망명을 요청하면서 생겨났다.
미르 줌라는 25년 전에 골콘다 지방으로 들어온 인물로, 골콘다의 왕 압둘라 쿠트브 샤의 총애를 입어 막대한 부를 거머쥔 대귀족으로 급부상했는데 카르나타카 지방을 정복해 제 영지로 삼고 이 곳에서 엄청난 수입을 걷어들이며 심지어 프랑스 여행가의 여행록에 등장할 정도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16] 미르 줌라가 지나치게 강해지자 위협을 느낀 건 압둘라 쿠트브 샤였다. 그는 미르 줌라에게 카르나타카를 내놓으라고 다그쳤지만 미르 줌라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내놓을 리가 없었다. 분노한 압둘라 쿠트브 샤는 미르 줌라를 가두었고, 미르 줌라는 무굴 제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샤 자한은 미르 줌라에 대한 보호를 승인했지만 그 전에 압둘라 쿠트브 샤가 미르 줌라를 옥에 가두고 재산을 압수했고, 샤 자한은 이를 빌미로 아우랑제브더러 골콘다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아우랑제브는 골콘다 정복에 성공했고[17] 엄청난 양의 배상금을 뜯어냈다.[18] 참고로 미르 줌라는 제 영토를 돌려받았다.
이렇게 골콘다를 봉신국으로 삼은 샤 자한은 아들 아우랑제브를 1636년에 데칸의 나와브로 임명해 새롭게 정복한 지역들을 통제하도록 했다. 특히 무굴 제국의 데칸 영향력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태위태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황자를 직접 파견해야 겨우 통제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우랑제브는 무굴 제국의 데칸 영토를 크게 4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관리했는데 첫째가 아시르가르 요새를 포함한 칸데시 구역, 둘째가 엘리크푸르를 주도로 삼은 베라르 지역, 셋째가 난데르를 주도로 한 텔랑가나 지역, 마지막이 아마드나가르를 주도로 삼은 아마드나가르 지역이었다. 참고로 아우랑제브는 1644년에 궁정으로 복귀했다가 1652년에 다시 데칸 나와브로 부임했다. 그러나 데칸 지방은 그가 궁정에 갔다 온 사이에 썩어빠진 행정구조, 봉신국들의 공물 불납, 막대한 군비 지출 때문에 거의 파탄난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봉신국들이 유지비나 주둔비는 거의 4분의 1 수준으로 바쳤고 그마저도 중간에서 다 떼어먹으니 엄청난 출혈이 발생하고 있었다.
상황에 경악한 아우랑제브는 바로 행정 개혁과 재정 개혁을 동시에 실시했다. 그는 유능한 관료였던 무르시드 쿠리 칸 쿠라사니를 데칸으로 데려와 세수 개혁을 진행하도록 했다. 쿠라사니는 데칸 지방의 세수 구분을 위해 일단 데칸을 크게 칸데시와 베라르 지방, 그리고 나머지 지방을 포함한 발라가트 지방으로 나누었다. 그는 지방 곳곳에 관리들을 파견해 농토의 면적과 비옥도를 한꺼번에 측정하여 세율과 세수를 다시 조정하도록 만들었고 온갖 곳에서 인재들을 끌어모아 최대한 부정부패 척결에 나섰다. 특히 빈농에게는 세율을 낮추어 25% 정도로 세금을 감면해 받기도 했다. 쿠라사니의 개혁은 성공적이었고 1658년 즈음에는 데칸 지방의 경제 효율과 세수가 비약적일 정도로 증가했다. 쿠라사니의 경제 개혁에 흡족해한 아우랑제브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군사 개혁, 정치 구조 개혁, 행정 개혁 등 웬만한 분야는 모조리 뜯어고쳤고 이 모든 개혁들이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데칸은 평화를 되찾았다.
하지만 아우랑제브는 단순히 데칸을 평화롭게 만드는 정도에 그칠 생각이 없었는데 그가 중앙아시아와 칸다하르 지방의 원정 (샤 자한의 중앙아시아 원정)에서 실패하며 잃어버린 영향력을 되찾기 위해선 데칸을 평화롭게 만들 뿐만 아니라 원정을 치러 영토를 넓히는 방법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골콘다 지방은 1636년에 샤 자한에게 한 서약 내용들 중 공물을 바치겠다는 내용을 거의 이행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명분도 충분했으며 워낙 부유하고 많은 보물들을 쌓아놓은 곳이었기 때문에 만약 이를 정복한다면 아우랑제브의 금고도 훨씬 두둑해질 것이 훤한 일이었다. 그러나 골콘다가 명목상으로는 무굴 제국의 봉신국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고 아우랑제브는 호시탐탐 때만을 노리면서 골콘다를 칠 명분을 찾기 위해 골몰했다. 그리고 그 명분은 1656년 골콘다의 재상이던 미르 줌라가 무굴 제국에 망명을 요청하면서 생겨났다.
미르 줌라는 25년 전에 골콘다 지방으로 들어온 인물로, 골콘다의 왕 압둘라 쿠트브 샤의 총애를 입어 막대한 부를 거머쥔 대귀족으로 급부상했는데 카르나타카 지방을 정복해 제 영지로 삼고 이 곳에서 엄청난 수입을 걷어들이며 심지어 프랑스 여행가의 여행록에 등장할 정도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16] 미르 줌라가 지나치게 강해지자 위협을 느낀 건 압둘라 쿠트브 샤였다. 그는 미르 줌라에게 카르나타카를 내놓으라고 다그쳤지만 미르 줌라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내놓을 리가 없었다. 분노한 압둘라 쿠트브 샤는 미르 줌라를 가두었고, 미르 줌라는 무굴 제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샤 자한은 미르 줌라에 대한 보호를 승인했지만 그 전에 압둘라 쿠트브 샤가 미르 줌라를 옥에 가두고 재산을 압수했고, 샤 자한은 이를 빌미로 아우랑제브더러 골콘다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아우랑제브는 골콘다 정복에 성공했고[17] 엄청난 양의 배상금을 뜯어냈다.[18] 참고로 미르 줌라는 제 영토를 돌려받았다.
비자푸르는 남인도의 소왕국들 중에서도 가장 무굴 제국을 적대하기로 이름난 지역이라 아마드나가르나 골콘다가 무굴 제국과 전투를 벌일 때는 항상 물밑에서 이들을 지원했으며, 무굴 제국도 이를 모를 리가 없었으니 언제 한 번 손을 봐주기 위해 이를 갈고 있던 참이었다. 비자푸르의 술탄 이브라힘 샤가 자한기르보다 약 1개월 정도 먼저 사망하고 무함마드 아딜 샤가 새로운 술탄이 되자 샤 자한은 1631년 왕위 교체기의 혼란을 이용해 바로 비자푸르를 침공했다. 그는 재상 아사프 칸을 시켜 비자푸르를 정복하도록 했으나 비자푸르의 격렬한 저항에 밀려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1634년에도 데칸 총독 마하바트 칸이 비자푸르를 공격해 다울라타바드를 공략해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복에는 실패했다.[19] 이후 샤 자한은 각지의 반란을 억누르느라 저 멀리 비자푸르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한동안은 비자푸르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2년 후 1636년에 반란을 제압한 샤 자한은 다시 비자푸르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비자푸르가 내부 귀족들의 분열로 국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던 터라 무함마드 아딜 샤는 사실상의 항복을 선언하고 샤 자한과 평화 협정을 체결한다. 비자푸르는 이 협정으로 매년 무굴 제국에 20만 루피를 공물로 바치고 무굴 제국의 봉신국으로 들어왔다. 시하지 본슬레[20]의 반란으로 파괴된 무굴 제국의 요새를 복구하는 데 동참하고, 같은 봉신인 골콘다와 관계를 개선하며 더이상의 분쟁을 만들지 않겠다는 것 등이 조약의 핵심이었다. 같은 해에 시바지 본슬레와 골콘다가 모두 무굴 제국에 굴복하고 평화 협정에 서명하면서 무굴 제국의 데칸 영향력은 이전과 비교하기도 힘들 정도로 강력해졌다. 골콘다, 시하지 본슬레, 비자푸르 등이 한꺼번에 무굴 제국에 굴복했기 때문에 일부 인도 학자들은 1636년을 무굴 제국의 데칸 원정에 기념비적인 연도로 보기도 한다.
1636년에 무굴 제국과 비자푸르 술탄국 간에 평화 조약이 맺어진 이래 약 20년 동안 양국은 별다른 분쟁 없이 매우 평화롭게 지냈다. 무함마드 아딜 샤는 능력있는 군주였고 1656년에 죽을 때까지 비자푸르 술탄국을 훌륭히 다스렸으며 무굴 제국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아딜 샤가 세상을 떠나자 18살의 아딜 샤 2세가 새로운 비자푸르의 술탄으로 즉위했다. 아우랑제브는 아딜 샤 2세가 무함마드 아딜 샤의 친아들이 아니란 점을 이용해 비자푸르를 침략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아버지 샤 자한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고, 샤 자한은 비자푸르가 매년 보내기로 약속한 공물들을 모두 보내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골콘다 군대 강화에 전비를 지원했다는 점, 미르 줌라의 카르나타카 영지를 무단으로 합병했다는 점 등 다양한 핑계를 들어 바로 비자푸르 침공을 허가한다. 아우랑제브는 물만난 고기처럼 비자푸르로 쳐들어갔다. 아우랑제브는 비다르 요새와 칼야니 요새를 함락했고 비자푸르는 천문학적 배상금과 함께 무굴 제국에 항복했다.
다만 아우랑제브의 데칸 원정이 완벽하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 무렵 샤 자한이 병에 걸려 몸져눕자 자식들 간에 계승 경쟁이 치열해졌고, 아딜 샤 2세는 이 틈을 타서 배상금 일부 지급을 철회하고 군대를 다시 키우는 등 무굴 제국에 독립적인 행보를 슬슬 보였다. 게다가 시하지 본슬레의 아들 시바지 본슬레가 아버지를 이어 독립적인 왕국을 세우기 위해 무굴 제국에 전쟁을 걸어왔고, 무굴 제국은 본슬레를 꺾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데칸 지방의 민심은 여전히 흉흉했다. 하지만 성과 역시 상당했다. 사실 샤 자한이 마음만 먹었다면 아마드나가르, 골콘다, 비자푸르는 모두 합병할 수 있었겠지만 지나친 확장으로 제국 전체가 붕괴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안한것 뿐이었다.[21] 명목상으로는 무굴의 황제에게 충성했지만 데칸의 술탄국들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남인도의 데칸 술탄국들은 무굴 군대와의 전쟁을 통해 국력이 현저히 약화되었고 샤 자한의 재위기 동안 무굴 제국은 데칸 일대 전체에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샤 자한은 데칸 일대 외에도 여러 지역으로 원정대를 파견했다. 말와 지방과 곤다 지방을 복속시켰으며, 북인도 내에서 무굴 제국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샤 자한도 정복하는 데 실패한 지역이 있었으니 바로 중앙아시아 일대였다. 티무르 가문의 본거지와도 같은 중앙아시아를 정복하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던 샤 자한은 우즈베크인들 사이에서의 내분을 틈타 무라드 황자, 아우랑제브 등 황자들을 보내 중앙아시아를 점령하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자한기르 시절에 빼앗긴 칸다하르는 1638년에 수복했지만 중앙아시아 원정 실패 이후 기운이 떨어진 틈을 타 다시 사파비 왕조가 빼앗아갔다. 샤 자한은 1649년과 1652년에 아우랑제브를, 1653년에는 다라 시코 황자를 시켜 칸다하르를 회복하고자 했지만 끝끝내 실패했고 칸다하르는 샤 자한이 죽을 때까지 페르시아 영토로 남았다.
2년 후 1636년에 반란을 제압한 샤 자한은 다시 비자푸르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비자푸르가 내부 귀족들의 분열로 국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던 터라 무함마드 아딜 샤는 사실상의 항복을 선언하고 샤 자한과 평화 협정을 체결한다. 비자푸르는 이 협정으로 매년 무굴 제국에 20만 루피를 공물로 바치고 무굴 제국의 봉신국으로 들어왔다. 시하지 본슬레[20]의 반란으로 파괴된 무굴 제국의 요새를 복구하는 데 동참하고, 같은 봉신인 골콘다와 관계를 개선하며 더이상의 분쟁을 만들지 않겠다는 것 등이 조약의 핵심이었다. 같은 해에 시바지 본슬레와 골콘다가 모두 무굴 제국에 굴복하고 평화 협정에 서명하면서 무굴 제국의 데칸 영향력은 이전과 비교하기도 힘들 정도로 강력해졌다. 골콘다, 시하지 본슬레, 비자푸르 등이 한꺼번에 무굴 제국에 굴복했기 때문에 일부 인도 학자들은 1636년을 무굴 제국의 데칸 원정에 기념비적인 연도로 보기도 한다.
1636년에 무굴 제국과 비자푸르 술탄국 간에 평화 조약이 맺어진 이래 약 20년 동안 양국은 별다른 분쟁 없이 매우 평화롭게 지냈다. 무함마드 아딜 샤는 능력있는 군주였고 1656년에 죽을 때까지 비자푸르 술탄국을 훌륭히 다스렸으며 무굴 제국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아딜 샤가 세상을 떠나자 18살의 아딜 샤 2세가 새로운 비자푸르의 술탄으로 즉위했다. 아우랑제브는 아딜 샤 2세가 무함마드 아딜 샤의 친아들이 아니란 점을 이용해 비자푸르를 침략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아버지 샤 자한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고, 샤 자한은 비자푸르가 매년 보내기로 약속한 공물들을 모두 보내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골콘다 군대 강화에 전비를 지원했다는 점, 미르 줌라의 카르나타카 영지를 무단으로 합병했다는 점 등 다양한 핑계를 들어 바로 비자푸르 침공을 허가한다. 아우랑제브는 물만난 고기처럼 비자푸르로 쳐들어갔다. 아우랑제브는 비다르 요새와 칼야니 요새를 함락했고 비자푸르는 천문학적 배상금과 함께 무굴 제국에 항복했다.
다만 아우랑제브의 데칸 원정이 완벽하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 무렵 샤 자한이 병에 걸려 몸져눕자 자식들 간에 계승 경쟁이 치열해졌고, 아딜 샤 2세는 이 틈을 타서 배상금 일부 지급을 철회하고 군대를 다시 키우는 등 무굴 제국에 독립적인 행보를 슬슬 보였다. 게다가 시하지 본슬레의 아들 시바지 본슬레가 아버지를 이어 독립적인 왕국을 세우기 위해 무굴 제국에 전쟁을 걸어왔고, 무굴 제국은 본슬레를 꺾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데칸 지방의 민심은 여전히 흉흉했다. 하지만 성과 역시 상당했다. 사실 샤 자한이 마음만 먹었다면 아마드나가르, 골콘다, 비자푸르는 모두 합병할 수 있었겠지만 지나친 확장으로 제국 전체가 붕괴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안한것 뿐이었다.[21] 명목상으로는 무굴의 황제에게 충성했지만 데칸의 술탄국들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남인도의 데칸 술탄국들은 무굴 군대와의 전쟁을 통해 국력이 현저히 약화되었고 샤 자한의 재위기 동안 무굴 제국은 데칸 일대 전체에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샤 자한은 데칸 일대 외에도 여러 지역으로 원정대를 파견했다. 말와 지방과 곤다 지방을 복속시켰으며, 북인도 내에서 무굴 제국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샤 자한도 정복하는 데 실패한 지역이 있었으니 바로 중앙아시아 일대였다. 티무르 가문의 본거지와도 같은 중앙아시아를 정복하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던 샤 자한은 우즈베크인들 사이에서의 내분을 틈타 무라드 황자, 아우랑제브 등 황자들을 보내 중앙아시아를 점령하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자한기르 시절에 빼앗긴 칸다하르는 1638년에 수복했지만 중앙아시아 원정 실패 이후 기운이 떨어진 틈을 타 다시 사파비 왕조가 빼앗아갔다. 샤 자한은 1649년과 1652년에 아우랑제브를, 1653년에는 다라 시코 황자를 시켜 칸다하르를 회복하고자 했지만 끝끝내 실패했고 칸다하르는 샤 자한이 죽을 때까지 페르시아 영토로 남았다.
일반적으로 샤 자한의 시대는 무굴 제국의 절정이자 황금기로 평가받는다. 단순히 영토 크기로만 따지면야 후임 아우랑제브 시대가 훨씬 큰 건 맞지만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더 번영을 누렸던 때는 샤 자한의 재위기였다. 아우랑제브가 무리한 확장 전쟁을 벌이느라 세금을 지나치게 많이 걷어 사회가 흉흉해지고 농민 경제가 파탄났기 때문이다. 샤 자한은 굉장히 능력있는 군주였고, 문학과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계몽군주였을 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부를 쌓았다. 참고로 샤 자한은 당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이었다.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고 세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황제의 금고에도 막대한 양의 보물들이 쌓였다. 무굴 제국이 중국의 청나라를 제치고 세계 1위의 경제 대국이라는 타이틀을 쥐었던 것도 바로 샤 자한의 시대다.[22] 당시 무굴 제국은 악바르 - 자한기르 - 샤 자한으로 이어지는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대제국이기도 했다.
샤 자한은 악바르에 비해서는 훨씬 힌두교나 타 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힌두교도들의 행사에 주기적으로 참석하고 그들의 풍습을 인정하는 등 후일 아우랑제브처럼 극단주의적인 친이슬람 행보는 자제했다. 애초에 샤 자한이 기존에 후계자로 점찍어둔 다라 시코 황자가 악바르처럼 자유주의적인 성격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가 어떤 자세로 종교 갈등을 대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샤 자한이 악바르에 비해서 뒤로 후퇴한 입장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하고, 결과적으로는 이념적으로 열린 제국을 유지하는 데 실패하면서 무굴 제국의 몰락의 시발점을 만들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는 오르차에 있던 힌두 사원들을 모조리 부숴버렸고 76개에 달하는 대사원들을 철폐했다. 반대로 메카나 메디나에는 수백만 루피에 달하는 선물들을 연달아 실어보내며 이슬람에 대한 선호를 분명히 했다. 게다가 카슈미르 지방에서 힌두교도들과 무슬림이 혼인하는 것마저 막았고 힌두교도들에 대한 세금을 이전보다 1.5배 이상 가중하는 등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100여 년간 이어진 무굴 제국의 경제 발전이 정점을 찍은 게 바로 이 시기다. 상업에 신경을 많이 썼던 샤 자한은 인도의 최고 인기품목이자 특산물이던 직물업에 많은 투자를 퍼부었다. 무굴 제국 시기의 인도는 주로 아프리카, 아라비아, 유럽, 중국 등 세계 각지로 해상 교류를 진행했는데 주요 수출 품목은 비단이나 솜이었다. 특히 벵골 지방에서 직물업이 가장 번성했고 네덜란드와 영국 상인들은 인도산 비단이나 직물을 못 구해서 야단이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수출하는 품목들은 넘쳐났다. 소금, 마약, 향신료, 향수, 아편, 설탕 등 가지각색의 화물들이 항구들을 들락날락했고 무굴 제국은 유럽 상인들로부터 걷어들이는 관세 하나로 엄청난 수입을 벌어들였다. 이 시기의 무굴 제국은 거의 전세계의 은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비슷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영국의 특임대사였던 토머스 로 경은 '인도가 유럽의 피를 빨아 제 배를 채우고 있다'라고 불평하기까지 했다. 불과 100년 후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샤 자한은 악바르에 비해서는 훨씬 힌두교나 타 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힌두교도들의 행사에 주기적으로 참석하고 그들의 풍습을 인정하는 등 후일 아우랑제브처럼 극단주의적인 친이슬람 행보는 자제했다. 애초에 샤 자한이 기존에 후계자로 점찍어둔 다라 시코 황자가 악바르처럼 자유주의적인 성격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가 어떤 자세로 종교 갈등을 대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샤 자한이 악바르에 비해서 뒤로 후퇴한 입장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하고, 결과적으로는 이념적으로 열린 제국을 유지하는 데 실패하면서 무굴 제국의 몰락의 시발점을 만들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는 오르차에 있던 힌두 사원들을 모조리 부숴버렸고 76개에 달하는 대사원들을 철폐했다. 반대로 메카나 메디나에는 수백만 루피에 달하는 선물들을 연달아 실어보내며 이슬람에 대한 선호를 분명히 했다. 게다가 카슈미르 지방에서 힌두교도들과 무슬림이 혼인하는 것마저 막았고 힌두교도들에 대한 세금을 이전보다 1.5배 이상 가중하는 등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100여 년간 이어진 무굴 제국의 경제 발전이 정점을 찍은 게 바로 이 시기다. 상업에 신경을 많이 썼던 샤 자한은 인도의 최고 인기품목이자 특산물이던 직물업에 많은 투자를 퍼부었다. 무굴 제국 시기의 인도는 주로 아프리카, 아라비아, 유럽, 중국 등 세계 각지로 해상 교류를 진행했는데 주요 수출 품목은 비단이나 솜이었다. 특히 벵골 지방에서 직물업이 가장 번성했고 네덜란드와 영국 상인들은 인도산 비단이나 직물을 못 구해서 야단이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수출하는 품목들은 넘쳐났다. 소금, 마약, 향신료, 향수, 아편, 설탕 등 가지각색의 화물들이 항구들을 들락날락했고 무굴 제국은 유럽 상인들로부터 걷어들이는 관세 하나로 엄청난 수입을 벌어들였다. 이 시기의 무굴 제국은 거의 전세계의 은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비슷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영국의 특임대사였던 토머스 로 경은 '인도가 유럽의 피를 빨아 제 배를 채우고 있다'라고 불평하기까지 했다. 불과 100년 후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샤 자한은 살아있는 동안 아들들의 후계 전쟁을 지켜봐야만 했다. 전쟁의 전개는 다음과 같다. 샤 자한은 1657년 9월부터 노쇠하여 병석에 들어갔다. 워낙 오랫동안 황제가 제 얼굴을 비추지 않고 심지어는 궁정 회의에마저 불참하자 점차 사람들 사이에서는 샤 자한이 죽은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고 한다. 무굴 제국은 황제가 바뀔 때마다 황자들 사이에서 난이 벌어지고 계승 전쟁이 일어나는 게 거의 관례(...) 수준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황제가 구심점을 잡아 주어야 하는데 죽었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샤 자한이 죽었다는 발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샤 자한이 칩거를 계속하자 황자들은 서로 파벌을 구축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굴 제국은 당장 칼부림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흉흉한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힌두교도들은 선대 악바르 대제처럼 온화한 통합형 군주를 선호했고, 반대로 무슬림들은 더 친이슬람적인 군주를 선호했다.
상황이 갈수록 심각해져서 내전이 터지기 직전 분위기까지 가자 샤 자한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던 것인지 칩거 생활을 깨고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내전을 예방하기 위해 미리 가장 총애하던 황자인 다라 시코를 계승자로 발표하고 궁정 회의에도 데리고 참석했다. 하지만 샤 자한이 다라 시코를 후계자로 정한 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일단 티무르 왕조는 전통적으로 '능력 있는 자가 황위를 차지한다'라는 주의여서 전쟁으로 황제에 오르는 게 당연한 일이었고, 하다못해 그 샤 자한마저 승계 전쟁에서 승리해 황제에 오른 이였으니 딱히 설득력이 없었다.[24] 파벌은 계속해서 발전했고 나중에는 크게 다라 시코, 샤 슈자, 아우랑제브, 무라드 바크쉬 황자를 각각 지지하는 4개의 파벌로 나뉜다. 공주들도 서로 파벌에 동참했다. 자하나라 공주는 다라 시코를 지지했고 로사나라는 아우랑제브, 가우하나라 공주는 무라드 바크쉬 황자를 지지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귀족들과 신하들 역시 4개 파벌로 나뉘었고 제국은 사분오열된다.
당시 파벌 싸움에서 가장 우위를 점했던 인물은 당연히 아버지가 후계자로 공식 인정한 다라 시코 황자였는데 기본적으로 품성이 온화했으며 성격도 좋아 많은 이들이 따랐다. 특히 악바르에 비견될 정도로 자유주의적인 이념을 가지고 있었고, 종교에 구애받지 않고 널리 인재를 구했기 때문에 힌두교도들이 다라 시코 황자를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지혜면 지혜, 지식이면 지식, 예술이면 예술 등 웬만한 분야는 전부 섭렵했던지라 그린 듯한 황태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25] 아버지 샤 자한이 굳이 다라 시코를 후계자로 지정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라 시코에게는 정복 왕조인 무굴 제국의 군주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호전적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다라 시코는 용감하기는 했지만 전사로서의 기질은 아우랑제브보다 부족했고 전술이나 용병술도 못봐줄 정도는 아니지만 특출난 것도 아니었다. 제위 계승에 전사들의 지지가 필수적인 무굴 제국에서 이는 큰 약점이었다.
두 번째 경쟁자는 샤 슈자 황자였다. 그는 벵골 지방의 총독으로 능력있는 군인이었고 나름대로 성격도 좋았으며 특히 시아파였기 때문에 시아파 무슬림들이 그를 많이 지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샤 슈자는 무굴 내에서도 가장 풍요로운 벵골 지방에 머물면서 점차 나태해졌고, 제위 계승에도 그다지 큰 관심은 없었다.
세 번째 경쟁자는 그 유명한 아우랑제브다. 추진력과 용기 하나만큼은 끝내주는 황자로 이름이 높았고 중앙아시아, 칸다하르 원정을 통해 경험을 쌓은 베테랑 지휘관이기도 했다. 게다가 외교나 군사 분야에서는 천재에 가까웠고, 독실한 수니파 무슬림이었기 때문에 수니파 무슬림들이 그를 많이 지지했다. 특히 자한기르와 샤 자한의 시대를 거치면서 무굴 제국 내에도 강경파 무슬림들이 득세하게 되면서 이들의 세력이 매우 커진 상황이었는데, 이들이 관용을 주장했던 다라 시코가 아니라 아우랑제브를 지지하면서 아우랑제브의 세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불어났다.[26]
마지막으로 가장 어린 무라드 바크쉬 황자는 용맹하긴 했지만 지나치게 감정에 휩쓸리는 경향이 있었는데 지혜도 부족했고 멧돼지처럼 달려들 줄만 알았다. 당시 구자라트 주의 총독이긴 했지만 따르는 인물도 지지 파벌도 크게 없어 4명의 경쟁 황자들 중 가장 세력이 약했다.
샤 자한이 병석에 눕자 다라 시코를 제외한 3명의 황자들은 각자 대군을 이끌고 샤 자한과 다라 시코가 있는 수도로 진군했다. 다라 시코는 이미 오래 전부터 후계자 준비를 위해 샤 자한 곁에서 정무를 보좌했기에 사실상 다라 시코와 샤 자한 둘 다에게 도전한다는 의미였다. 경악한 샤 자한은 직접 친필로 군대를 해체하고 경호원만 데리고 수도로 입성할 것을 권유했지만 당연히 3명 모두 거부했다. 샤 슈자는 1658년에 벵골에서 스스로 황제임을 선언했고, 무라드 바크쉬 황자도 구자라트에서 칭제했다. 한편 아우랑제브는 바로 칭제를 선포하진 않았지만 텃밭인 데칸 지방에서 최대한 많은 부를 뜯어내 경제 기반을 다진 뒤 군대를 모아 수도 아그라로 진격했다.
아우랑제브는 일단 무라드와 힘을 합쳤다. 이 두 형제의 근본적인 상대는 어쨌든 현임 황제였던 샤 자한이었지만 아무리 골육상쟁이 만연했던 인도였을지라도 대놓고 아버지에 대고 반란을 선포하는 건 무리가 있었기 때문에 표면상으로는 다라 시코 황자를 적으로 삼았다. 아우랑제브가 다라 시코에게 붙힌 죄목은 '신실하지 못함'이었다. 그는 다라 시코를 쫒아내고 나면 무라드에게 아프가니스탄, 펀자브, 카슈미르 일대를 주기로 약속했고, 아우랑제브는 그 나머지 제국을 차지하기로 했다.[27] 극노한 샤 자한은 황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대군을 파견했다. 다라 시코의 아들인 술라이만 슈코를 시켜 동쪽의 샤 슈자를 진압하게 했고, 라자 자스완 싱과 카심 칸을 시켜 서쪽의 무라드를 치도록 만들었다.
샤 슈자는 패배해 달아났지만 라자 자스완 싱은 반란을 진압하는 데 실패했다. 황제가 그에게 딸려보낸 카심 칸은 딱히 믿을 만한 인물이 아니었고, 그와 정보조차 제대로 소통이 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라자 자스완 싱은 무라드가 아우랑제브와 힘을 합쳤다는 사실을 몰랐다. 1658년에 아우랑제브는 무라드의 군대와 접선해 거대한 대군을 이루었고, 이를 몰랐던 라자 자스완 싱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2명의 황자가 거느리는 압도적인 물량의 대군과 맞서야 했다. 당연히 라자 자스완 싱은 패배했다. 아우랑제브가 승승장구하며 아버지 샤 자한이 있는 아그라로 향하자 이번에는 황태자 다라 시코가 직접 나와 싸웠다. 그러나 아우랑제브보다 확연히 군재가 부족했던 다라 시코는 1658년 6월 사무가르 전투에서 그대로 패배했고[28] 다라 시코는 치욕감에 아버지가 있는 아그라에 들르지도 않고 제 가족들을 빼내어 델리로 도망쳤다. 아그라에 당도한 아우랑제브는 아버지가 머무르는 아그라 요새를 봉쇄했고, 결국 샤 자한은 아우랑제브에게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샤 자한은 1666년 1월 31일에 죽을 때까지 사실상 아우랑제브의 포로로 잡혀 갇혀 살았다.[29]
상황이 갈수록 심각해져서 내전이 터지기 직전 분위기까지 가자 샤 자한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던 것인지 칩거 생활을 깨고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내전을 예방하기 위해 미리 가장 총애하던 황자인 다라 시코를 계승자로 발표하고 궁정 회의에도 데리고 참석했다. 하지만 샤 자한이 다라 시코를 후계자로 정한 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일단 티무르 왕조는 전통적으로 '능력 있는 자가 황위를 차지한다'라는 주의여서 전쟁으로 황제에 오르는 게 당연한 일이었고, 하다못해 그 샤 자한마저 승계 전쟁에서 승리해 황제에 오른 이였으니 딱히 설득력이 없었다.[24] 파벌은 계속해서 발전했고 나중에는 크게 다라 시코, 샤 슈자, 아우랑제브, 무라드 바크쉬 황자를 각각 지지하는 4개의 파벌로 나뉜다. 공주들도 서로 파벌에 동참했다. 자하나라 공주는 다라 시코를 지지했고 로사나라는 아우랑제브, 가우하나라 공주는 무라드 바크쉬 황자를 지지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귀족들과 신하들 역시 4개 파벌로 나뉘었고 제국은 사분오열된다.
당시 파벌 싸움에서 가장 우위를 점했던 인물은 당연히 아버지가 후계자로 공식 인정한 다라 시코 황자였는데 기본적으로 품성이 온화했으며 성격도 좋아 많은 이들이 따랐다. 특히 악바르에 비견될 정도로 자유주의적인 이념을 가지고 있었고, 종교에 구애받지 않고 널리 인재를 구했기 때문에 힌두교도들이 다라 시코 황자를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지혜면 지혜, 지식이면 지식, 예술이면 예술 등 웬만한 분야는 전부 섭렵했던지라 그린 듯한 황태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25] 아버지 샤 자한이 굳이 다라 시코를 후계자로 지정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라 시코에게는 정복 왕조인 무굴 제국의 군주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호전적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다라 시코는 용감하기는 했지만 전사로서의 기질은 아우랑제브보다 부족했고 전술이나 용병술도 못봐줄 정도는 아니지만 특출난 것도 아니었다. 제위 계승에 전사들의 지지가 필수적인 무굴 제국에서 이는 큰 약점이었다.
두 번째 경쟁자는 샤 슈자 황자였다. 그는 벵골 지방의 총독으로 능력있는 군인이었고 나름대로 성격도 좋았으며 특히 시아파였기 때문에 시아파 무슬림들이 그를 많이 지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샤 슈자는 무굴 내에서도 가장 풍요로운 벵골 지방에 머물면서 점차 나태해졌고, 제위 계승에도 그다지 큰 관심은 없었다.
세 번째 경쟁자는 그 유명한 아우랑제브다. 추진력과 용기 하나만큼은 끝내주는 황자로 이름이 높았고 중앙아시아, 칸다하르 원정을 통해 경험을 쌓은 베테랑 지휘관이기도 했다. 게다가 외교나 군사 분야에서는 천재에 가까웠고, 독실한 수니파 무슬림이었기 때문에 수니파 무슬림들이 그를 많이 지지했다. 특히 자한기르와 샤 자한의 시대를 거치면서 무굴 제국 내에도 강경파 무슬림들이 득세하게 되면서 이들의 세력이 매우 커진 상황이었는데, 이들이 관용을 주장했던 다라 시코가 아니라 아우랑제브를 지지하면서 아우랑제브의 세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불어났다.[26]
마지막으로 가장 어린 무라드 바크쉬 황자는 용맹하긴 했지만 지나치게 감정에 휩쓸리는 경향이 있었는데 지혜도 부족했고 멧돼지처럼 달려들 줄만 알았다. 당시 구자라트 주의 총독이긴 했지만 따르는 인물도 지지 파벌도 크게 없어 4명의 경쟁 황자들 중 가장 세력이 약했다.
샤 자한이 병석에 눕자 다라 시코를 제외한 3명의 황자들은 각자 대군을 이끌고 샤 자한과 다라 시코가 있는 수도로 진군했다. 다라 시코는 이미 오래 전부터 후계자 준비를 위해 샤 자한 곁에서 정무를 보좌했기에 사실상 다라 시코와 샤 자한 둘 다에게 도전한다는 의미였다. 경악한 샤 자한은 직접 친필로 군대를 해체하고 경호원만 데리고 수도로 입성할 것을 권유했지만 당연히 3명 모두 거부했다. 샤 슈자는 1658년에 벵골에서 스스로 황제임을 선언했고, 무라드 바크쉬 황자도 구자라트에서 칭제했다. 한편 아우랑제브는 바로 칭제를 선포하진 않았지만 텃밭인 데칸 지방에서 최대한 많은 부를 뜯어내 경제 기반을 다진 뒤 군대를 모아 수도 아그라로 진격했다.
아우랑제브는 일단 무라드와 힘을 합쳤다. 이 두 형제의 근본적인 상대는 어쨌든 현임 황제였던 샤 자한이었지만 아무리 골육상쟁이 만연했던 인도였을지라도 대놓고 아버지에 대고 반란을 선포하는 건 무리가 있었기 때문에 표면상으로는 다라 시코 황자를 적으로 삼았다. 아우랑제브가 다라 시코에게 붙힌 죄목은 '신실하지 못함'이었다. 그는 다라 시코를 쫒아내고 나면 무라드에게 아프가니스탄, 펀자브, 카슈미르 일대를 주기로 약속했고, 아우랑제브는 그 나머지 제국을 차지하기로 했다.[27] 극노한 샤 자한은 황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대군을 파견했다. 다라 시코의 아들인 술라이만 슈코를 시켜 동쪽의 샤 슈자를 진압하게 했고, 라자 자스완 싱과 카심 칸을 시켜 서쪽의 무라드를 치도록 만들었다.
샤 슈자는 패배해 달아났지만 라자 자스완 싱은 반란을 진압하는 데 실패했다. 황제가 그에게 딸려보낸 카심 칸은 딱히 믿을 만한 인물이 아니었고, 그와 정보조차 제대로 소통이 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라자 자스완 싱은 무라드가 아우랑제브와 힘을 합쳤다는 사실을 몰랐다. 1658년에 아우랑제브는 무라드의 군대와 접선해 거대한 대군을 이루었고, 이를 몰랐던 라자 자스완 싱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2명의 황자가 거느리는 압도적인 물량의 대군과 맞서야 했다. 당연히 라자 자스완 싱은 패배했다. 아우랑제브가 승승장구하며 아버지 샤 자한이 있는 아그라로 향하자 이번에는 황태자 다라 시코가 직접 나와 싸웠다. 그러나 아우랑제브보다 확연히 군재가 부족했던 다라 시코는 1658년 6월 사무가르 전투에서 그대로 패배했고[28] 다라 시코는 치욕감에 아버지가 있는 아그라에 들르지도 않고 제 가족들을 빼내어 델리로 도망쳤다. 아그라에 당도한 아우랑제브는 아버지가 머무르는 아그라 요새를 봉쇄했고, 결국 샤 자한은 아우랑제브에게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샤 자한은 1666년 1월 31일에 죽을 때까지 사실상 아우랑제브의 포로로 잡혀 갇혀 살았다.[29]
아우랑제브가 아그라 요새를 함락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샤 자한의 병은 완쾌되었지만 이미 상황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틀어졌다. 샤 자한은 1658년 7월에 황위에서 강제적으로 쫒겨난 후 8년 동안 아그라 요새에 그대로 갇혀 살았다. 아버지에게 별 호감이 없었던 아우랑제브는 샤 자한이 가지고 있던 보물과 재화들을 모조리 박탈하고 굉장히 야멸차게 대우했다. 그나마 친누나였던 자하나라 공주를 그 곁에 두어 아버지를 시중들게 했지만 자신의 아버지이자 한때 황제였던 사람에게 하는 대우치고는 각박하기 그지없었다고 한다.[32]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린 샤 자한은 매일매일을 아그라 요새의 발코니에서 사랑하던 아내 뭄타즈 마할의 무덤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세월을 보냈다.
아우랑제브는 아버지를 유폐시키고 나서 매우 박대했는데 샤 자한이 아우랑제브에게 보낸 편지를 봐도 "먹을 건 짜고 가둬둔 별궁은 난방도 안 돼 춥구나, 이제 황제가 아니라고 해도 이렇게 애비를 박대하느냐?"라고 원망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우랑제브는 그 편지를 읽고는 샤 자한이 사적인 연락을 하지 못하도록 종이와 필기구까지 몰수해 버렸다. 자하나라 공주가 바로 곁에서 헌신적으로 시중들며 수발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궁전에 갇힌 샤 자한은 하루하루 빠르게 쇠약해졌고 죽기 직전에는 침상에 누워 조용히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샤 자한은 유폐된 지 8년 만인 1666년 1월 31일에 자하나라의 곁에서 샤하다의 구절을 암송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74세. 한 대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성군의 죽음치고는 너무나 쓸쓸한 죽음이었다. 아우랑제브가 샤 자한을 죽을 때까지도 박대했기 때문에 샤 자한의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졌다. 그의 시신은 타지마할의 뭄타즈 마할의 묘 바로 옆에 묻혔다.
아우랑제브는 아버지를 유폐시키고 나서 매우 박대했는데 샤 자한이 아우랑제브에게 보낸 편지를 봐도 "먹을 건 짜고 가둬둔 별궁은 난방도 안 돼 춥구나, 이제 황제가 아니라고 해도 이렇게 애비를 박대하느냐?"라고 원망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우랑제브는 그 편지를 읽고는 샤 자한이 사적인 연락을 하지 못하도록 종이와 필기구까지 몰수해 버렸다. 자하나라 공주가 바로 곁에서 헌신적으로 시중들며 수발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궁전에 갇힌 샤 자한은 하루하루 빠르게 쇠약해졌고 죽기 직전에는 침상에 누워 조용히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샤 자한은 유폐된 지 8년 만인 1666년 1월 31일에 자하나라의 곁에서 샤하다의 구절을 암송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74세. 한 대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성군의 죽음치고는 너무나 쓸쓸한 죽음이었다. 아우랑제브가 샤 자한을 죽을 때까지도 박대했기 때문에 샤 자한의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졌다. 그의 시신은 타지마할의 뭄타즈 마할의 묘 바로 옆에 묻혔다.
아내 뭄타즈 마할과의 로맨스가 매우 유명하다. 샤 자한과 뭄타즈 마할은 각각 15살과 14살에 처음 만났는데 그 후부터 서서히 연정이 싹트기 시작하더니 결국 1612년 5월에 19살의 나이로 샤 자한과 결혼식을 올렸다. 원래 샤 자한과 뭄타즈 마할은 결혼하기 어려운 사이였는데 샤 자한의 정적인 계모 누르 자한이 뭄타즈 마할의 이모였기 때문이다. 가히 인도판 로미오와 줄리엣인 셈. 샤 자한은 그녀와의 결혼이 어려워 페르시아의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이기도 했으나 결국 뭄타즈 마할을 잊지 못하고 그녀와 결혼했다. 그리고 그녀와 결혼한 이후 정치적 목적으로 아내를 7명 더 들이기도 했다. 뭄타즈 마할을 제외한 아내들 중 처음 결혼한 아내와 뭄타즈 마할 이후 결혼한 세번째 아내에게서 각각 딸 1명, 아들 1명을 낳기도 했다. 뭄타즈 마할은 황후로서의 책무를 잘 이행하며 황제인 남편을 충실하게 보좌해서 샤 자한은 황후를 매우 사랑했고 전쟁터에까지 대동할 정도였다.
뭄타즈 마할은 단순히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굉장히 지혜로웠다. 페르시아어, 아랍어 등 다양한 언어에 유창했고 시도 잘 지었으며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게다가 정무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으며 조용히 뒤에서 내조만 해 주었으니 샤 자한이 끔찍할 정도로 아껴주었던 것이다. 샤 자한은 뭄타즈 마할 외에도 여러 아내가 있었지만 그녀들에게는 거의 마음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33] 그러나 1631년에 부르한푸르에서 뭄타즈 마할이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자[34] 샤 자한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릴 정도로 크게 상심했는데 그간 심혈을 기울여 준비하던 데칸 지방으로의 원정마저 그만둘 정도였다. 샤 자한은 무려 1년 가까이 애도의 시간을 가지고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길 꺼렸으며, 1년 만에 사람들이 샤 자한을 다시 보았을 때에는 검던 머리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고 한다. 그나마 그의 가장 사랑하던 딸인 자하나라 베굼이 샤 자한을 위로하며 곁에서 보좌해 주었다.
타지마할 내부 뭄타즈 마할과 샤 자한의 묘.[35]
그 무엇보다 아내를 사랑했던 샤 자한은 뭄타즈 마할과의 영원한 사랑을 기념하기 위한 묘당을 짓기 시작했다.[36] 그녀와의 사랑을 영원히 세상에 남기고 싶어했던 샤 자한의 염원이 반영되었던 결정이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그 유명한 타지마할이다. 1622년 야무나 강가의 자리좋은 터를 골라 공사를 시작했고 무려 22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마침내 1648년 무덤을 완공했다. 완공 후 "이보다 더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동원된 사람들의 손가락을 잘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녀의 무덤에는 신의 99가지 이름을 새겨 장식했고 그녀의 머리 쪽은 성스러운 땅 메카를 향해 놓였다. 샤 자한은 힘들 때마다 타지마할을 찾아 조용히 위안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아우랑제브가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아그라 요새에 유폐하자 샤 자한은 하염없이 발코니에서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8년 후 샤 자한이 사망하자 아우랑제브는 간소한 장례식을 치러준 다음 타지마할 뭄타즈 마할의 묘 바로 옆에 그의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죽어서 그녀 곁에 묻히는 건 샤 자한의 마지막 소원이기도 했다.
이 로맨틱한 이야기에도 뒷이야기는 있다. 지금이야 타지마할이 인도 제국 시절 싹 보석들이 털려나가 대리석만 남아있지만 완공 당시에는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건물이었기 때문에 건축 사업에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 제국의 재정을 압박했다. 그래서 보다 못한 신하들이 묘당 건축을 중지하거나 공사 규모를 축소해 달라고 간언하는데도 샤 자한은 무시하고 강행해 버렸다. 그 결과 재정이 파탄 난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가 남긴 빚 때문에 아우랑제브는 그걸 갚느라 인두세를 부활시켜야 했고[37] 이는 결국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로 대표되는 비이슬람 교도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술했듯 아들인 아우랑제브가 벌인 짓은 더 엄청난 삽질이었는데 아우랑제브 당시 연세입은 약 3억 900만 루피에 달했고 그가 죽을 당시 아그라의 중앙 은행에는 2억 4,000만 루피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타지마할을 지을 때 들어간 총 비용이 3,200만 루피였다.
오히려 아우랑제브가 인두세를 부활한 것은 재위한 지 무려 21년이나 지나서다. 샤 자한보단 아우랑제브가 시크교나 힌두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38] 시크교 지도자인 구루를 생매장하는 짓을 벌여 분노한 이들 신도들의 엄청난 반란을 당해 이들과 기나긴 전쟁을 벌이면서 엄청난 국고 낭비가 이어진 것이다. 샤 자한이 벌인 것 이상으로 아들이 낭비하고 기나긴 내전에 휩쓸려 결국 이러한 애비 아우랑제브에게 똑같이 아들인 악바르가 할아버지보다 더한 재정 파탄자인 암군을 처벌한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샤 자한도 타지마할 건축 이후 암군으로 나라 말아먹은 짓을 벌인 것은 맞다. 사실 시크교 탄압은 아우랑제브 이전에 샤 자한도 벌였고 샤 자한의 아버지인 자한기르도 벌이던 일이었다.
뭄타즈 마할은 단순히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굉장히 지혜로웠다. 페르시아어, 아랍어 등 다양한 언어에 유창했고 시도 잘 지었으며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게다가 정무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으며 조용히 뒤에서 내조만 해 주었으니 샤 자한이 끔찍할 정도로 아껴주었던 것이다. 샤 자한은 뭄타즈 마할 외에도 여러 아내가 있었지만 그녀들에게는 거의 마음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33] 그러나 1631년에 부르한푸르에서 뭄타즈 마할이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자[34] 샤 자한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릴 정도로 크게 상심했는데 그간 심혈을 기울여 준비하던 데칸 지방으로의 원정마저 그만둘 정도였다. 샤 자한은 무려 1년 가까이 애도의 시간을 가지고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길 꺼렸으며, 1년 만에 사람들이 샤 자한을 다시 보았을 때에는 검던 머리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고 한다. 그나마 그의 가장 사랑하던 딸인 자하나라 베굼이 샤 자한을 위로하며 곁에서 보좌해 주었다.
타지마할 내부 뭄타즈 마할과 샤 자한의 묘.[35]
그 무엇보다 아내를 사랑했던 샤 자한은 뭄타즈 마할과의 영원한 사랑을 기념하기 위한 묘당을 짓기 시작했다.[36] 그녀와의 사랑을 영원히 세상에 남기고 싶어했던 샤 자한의 염원이 반영되었던 결정이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그 유명한 타지마할이다. 1622년 야무나 강가의 자리좋은 터를 골라 공사를 시작했고 무려 22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마침내 1648년 무덤을 완공했다. 완공 후 "이보다 더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동원된 사람들의 손가락을 잘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녀의 무덤에는 신의 99가지 이름을 새겨 장식했고 그녀의 머리 쪽은 성스러운 땅 메카를 향해 놓였다. 샤 자한은 힘들 때마다 타지마할을 찾아 조용히 위안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아우랑제브가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아그라 요새에 유폐하자 샤 자한은 하염없이 발코니에서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8년 후 샤 자한이 사망하자 아우랑제브는 간소한 장례식을 치러준 다음 타지마할 뭄타즈 마할의 묘 바로 옆에 그의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죽어서 그녀 곁에 묻히는 건 샤 자한의 마지막 소원이기도 했다.
이 로맨틱한 이야기에도 뒷이야기는 있다. 지금이야 타지마할이 인도 제국 시절 싹 보석들이 털려나가 대리석만 남아있지만 완공 당시에는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건물이었기 때문에 건축 사업에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 제국의 재정을 압박했다. 그래서 보다 못한 신하들이 묘당 건축을 중지하거나 공사 규모를 축소해 달라고 간언하는데도 샤 자한은 무시하고 강행해 버렸다. 그 결과 재정이 파탄 난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가 남긴 빚 때문에 아우랑제브는 그걸 갚느라 인두세를 부활시켜야 했고[37] 이는 결국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로 대표되는 비이슬람 교도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술했듯 아들인 아우랑제브가 벌인 짓은 더 엄청난 삽질이었는데 아우랑제브 당시 연세입은 약 3억 900만 루피에 달했고 그가 죽을 당시 아그라의 중앙 은행에는 2억 4,000만 루피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타지마할을 지을 때 들어간 총 비용이 3,200만 루피였다.
오히려 아우랑제브가 인두세를 부활한 것은 재위한 지 무려 21년이나 지나서다. 샤 자한보단 아우랑제브가 시크교나 힌두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38] 시크교 지도자인 구루를 생매장하는 짓을 벌여 분노한 이들 신도들의 엄청난 반란을 당해 이들과 기나긴 전쟁을 벌이면서 엄청난 국고 낭비가 이어진 것이다. 샤 자한이 벌인 것 이상으로 아들이 낭비하고 기나긴 내전에 휩쓸려 결국 이러한 애비 아우랑제브에게 똑같이 아들인 악바르가 할아버지보다 더한 재정 파탄자인 암군을 처벌한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샤 자한도 타지마할 건축 이후 암군으로 나라 말아먹은 짓을 벌인 것은 맞다. 사실 시크교 탄압은 아우랑제브 이전에 샤 자한도 벌였고 샤 자한의 아버지인 자한기르도 벌이던 일이었다.
- 첫 아내 칸다하리 베굼 (1593 ~ ?)
- 장녀 파르헤즈 바누 베굼 (1611 ~ 1675): 독신
- 차녀 푸라나라 베굼 (1611 ~ 1666)
- 후처 뭄타즈 마할 (1593 ~ 1631)
- 장녀 후르 울 니사 베굼 (1613 ~ 1616): 요절
- 차녀 자나하라 베굼 (1614 ~ 1681): 평생 독신으로 노년에 폐위된 아버지를 병간호했다.
- 장남 다라 시코 (1615 ~ 1659)
- 차남 샤 슈자 (1616 ~ 1661)
- 3남 아우랑제브 (1618 ~ 1707)
- 4남 이자드 바퀴시 (1619 ~ 1621): 요절
- 3녀 이자야 바누 베굼 (1621 ~ 1628): 요절
- 5남 (1622) 요절
- 6남 무라트 바퀴시 (1624 ~ 1661)
- 7남 루트프 알라 (1626 ~ 1628): 요절
- 8남 다울라트 아프자 (1628 ~ 1629): 요절
- 4녀 후스나라 베굼 (1629 ~ 1630): 요절
- 5녀 가우하라 베굼 (1631 ~ 1706): 독신. 뭄타즈 마할의 마지막 자녀.
- 삼처 이즈 운 니사 (? ~ 1678)
- 장남 자한 아프로즈 (1619 ~ 1621): 요절
- 1961년 아서 C. 클라크가 그레이트베이시스리프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다가 침몰선을 보고 거기에서 은주화를 발견했는데 이 배가 샤 자한의 전설의 보물선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이 배는 타지마할을 장식하기 위한 수많은 보석들을 옮기다가 침몰했다고 사람들이 추측했다. 그의 친구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해군이 샤 자한의 보물선을 찾았지만 보석에 손을 대지 않았다며 이 배가 샤 자한의 보물선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3년 동안 발굴한 후 1964년에 자신이 발견한 배가 무굴 제국의 배가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배 안에는 100개의 주화만 있었지 보석이나 금괴는 없었고, 자신이 발견한 배가 샤 자한이 아니고 그의 아들인 아우랑제브의 배였다고 주장했다. 아서 C. 클라크는 뒤에 그레이프리트의 보물이라는 책을 출간해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그가 샤 자한의 보물을 빼돌려 거짓말을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부분은 2015년 9월 20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 고려의 국왕인 공민왕과 비슷한 점이 많다. 둘 다 집권 초기에는 그럭저럭 국가를 잘 다스렸으며, 아내[39]와 금슬이 좋았다. 그러나 아내가 아기를 낳다가 세상을 떠나자, 아내에 대한 추모 사업에 열중하여 국력을 약화시킨 암군이 되었으며, 아내에 대한 집착으로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 결국 두 군주는 폐위 또는 암살당하여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게다가 본인들의 치세가 끝난 이후에 왕조가 몰락하기 시작했다는 공통점 등도 있다. 심지어 둘 다 칭기스칸의 후손이기도 하다.[40] 차이점이라면 샤 자한과 뭄타즈 마할은 13명이나 되는 자녀들을 두었지만[41]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는 어떤 자식도 두지 못했다. 또한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죽은 후 10년 동안 정무를 돌보지 않고 신돈이나 권신에게 위임하였지만 샤 자한은 아내인 뭄타즈 마할이 사망한 뒤에도 정무를 직접 보았다는 차이점이 있다.
-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의 등장인물 자한의 이름의 모티브가 된 걸로 추정된다.
- 타지마할 바로 앞에 완전히 검은 대리석으로 색만 바꾸어 '검은 타지마할'을 지으려고 했다는 소문이 있지만 학자들은 그냥 사람들이 퍼뜨린 소문 정도로 치부하고 있다. 일단 무굴 제국의 경제가 타지마할만한 건물을 하나 더 지을 역량이 못되었고, 그러기엔 시간도 부족했다. 학자들은 프랑스 여행가가 여행록에 적은 소문이 퍼져나가 와전된 것으로 추정한다. 만약 실제로 지어졌다면 대단한 구경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 샤 자한이 '세계의 왕'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이기 때문에 후임 황제들 중에 샤 자한이라는 왕호를 가져다 쓰는 황제들이 많았다. 그래서 샤 자한뿐만 아니라 샤 자한 2세, 샤 자한 3세, 샤 자한 4세까지 총 4명의 무굴 황제들이 샤 자한이라는 이름을 썼는데 샤 자한 1세를 제외하고는 모두 권력이 약한 꼭두각시 황제들이었다. 샤 자한 2세는 허수아비로 옹립되었다가 3개월만에 병에 걸려 죽었고, 샤 자한 3세는 잠시 동안 쿠데타로 옹립되었다가 1년도 안되어 살해당했으며 샤 자한 4세 역시 실권 없는 얼굴마담으로 잠시 재위하다가 2개월만에 바로 쫒겨났다.
[1] 現 파키스탄 라호르.[2] 現 인도 아그라.[3] 그 중 뭄타즈 마할 소생은 8남 6녀다. 사산아를 포함하느냐 마냐에 따라서 8남 5녀로 볼지 8남 6녀로 볼지는 의문이 있으나 뭄타즈 마할이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기 때문에 대체로 8남 6녀라고 사산아도 인정하기도 한다.[4] 부왕의 이름인 자한기르는 '세계의 정복자'. 북인도의 제국인데 페르시아어를 차용한 이유는 무굴 제국이, 페르시아어와 차가타이어가 공용어였던 티무르 제국의 계승 왕조이기 때문이다.[5] 물론 다 성공한 것은 아니다. 중앙아시아 원정이나 칸다하르 수복에는 실패했다.[6] 어린 나이여서 그랬던지 정작 언어들을 배우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7] 악바르는 심지어 죽기 직전까지 쿠람 황자를 제 침상 옆에 두었다. 쿠람 황자의 어머니 자갓 고사인이 그를 데리러 오자 이마저도 물리치고 끝까지 쿠람 황자를 곁에 두었다는 풍문이 있다.[8] 당시 그의 곁에 있던 뭄타즈 마할이 그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9] 우다이푸르의 지배자였던 카란 싱 2세는 쿠람 황자를 환대했다. 쿠람 황자는 이때 자그만디르 궁전에서 머물렀는데 이 곳에서 본 모자이크화에 감명받아 그대로 타지마할에 적용했다는 후문이 있다.[10] 당시 아사프 칸은 오래 전부터 이미 쿠람 황자에게 포섭당해 있었는데 자한기르의 죽음 직후 쿠람 황자의 자식들의 신변을 확보하기도 했다. 아사프 칸이 아니었다면 샤 자한은 즉위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11] '시하브 웃-딘'은 '믿음의 별'이라는 뜻이고 '사히브 알-퀴란 웃-타니'는 '목성과 금성의 경사스러운 결합의 두 번째 군주'라는 뜻이며 '샤 자한'은 '세계의 왕'이라는 뜻이다.[12] 다만 정작 누르 자한은 죽이지 않고 평생 연금형에 그쳤다. 누르 자한이 여성의 몸으로써 더 이상의 위협이 되지 못했던 이유가 가장 크다.[13] 샤 자한은 후세인을 괄리오르 요새에 가두었고 파테 칸에게도 연금을 지급하며 후하게 대접했다.[14] 무르타자 3세 역시 후세인이 갇힌 괄리오르 요새에 함께 갇혔다.[15] 대충 협상 내용은 무굴 제국은 골콘다를 봉신국으로 받아들여 비자푸르나 마라타인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는 대신 골콘다는 무굴 제국의 우위를 인정하고 매년 황제에게 공물을 바친다는 것이었다.[16] 그는 5,000명의 기병, 2만 명의 보병, 그리고 상당수의 총병 등 웬만한 국가에 필적할 만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17] 샤 자한은 압둘라 쿠트브 샤의 간절한 항복 요청을 받고 공격 중지를 명했지만 아우랑제브가 몰래 황제의 명령을 숨기고 끝까지 밀어붙였다.[18] 기존에 골콘다가 무굴 제국에 바쳐야할 공물을 모두 걷고도 2배를 더 걷어들였다는 말이 있다.[19] 마하바트 칸은 원정 실패에 충격을 받고 1634년에 화병으로 죽었다.[20] 후일 마라타 동맹을 세우는 시바지 본슬레의 아버지다.[21] 이 짓을 해버린게 아우랑제브였다. 결국 무굴 제국은 아우랑제브 사후 무리한 확장으로 급격히 무너졌다.[22]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1위 경제 대국 타이틀은 뺏겼다. 당시 중국은 명청교체기로 한창 혼란스러웠던 탓이 컸고, 명청교체기 이후 중국에는 강희제라는 역대급 성군이 들어선 반면 샤 자한 이후 아우랑제브가 국고를 파탄내버리면서 무굴 제국의 경제 규모는 감소했다.[23] 4남 이자드(1619 ~ 1621)과 5남(1622 ~ 1622)은 요절했다. [24] 물론 다라 시코의 파벌이 더 입지가 강해지는 효과는 있었다.[25]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다라 시코가 황제가 되었다면 더 무굴 제국이 오래가지 않았을까 추정하기도 한다.[26] 물론 이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 당시 다라 시코가 거느렸던 만사브들을 보면 딱히 아우랑제브의 세력과 차이가 없었다. 종교는 그저 겉치레일 뿐이고 각자 경제적, 사회적 알력 다툼에 따라 지지하는 황자가 달랐을 거라는 이야기다.[27] 이렇게 되었다면 약 제국의 3분의 1 가량은 무라드에게, 나머지 3분의 2 정도는 아우랑제브에게 갔을 것이다.[28] 다라 시코의 군대가 약한 건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다라 시코의 지휘 능력이 일단 부족했고, 전투 도중 병사들이 그가 코끼리에서 낙마해 죽었다고 생각하면서 그대로 전열이 무너졌다.[29] 샤 자한과 아우랑제브는 이후 거의 절연하다시피 했다. 가끔씩 공무 때문에 서한을 교환하긴 했지만 서로 얼굴을 보고 싶어하진 않았고 실제로도 죽을 때까지 얼굴을 보지 않았다.[30] 샤 자한이 죽기 전까지 가장 많이 본 풍경일 것이다. 샤 자한은 아내 뭄타즈 마할을 그리워하며 매일 발코니에 서서 타지마할을 바라보았다.[31] 샤 자한은 이 발코니를 가장 좋아했고 하루도 빠짐없이 이 발코니에 나왔다.[32] 자하나라 공주는 내전 당시 다라 시코 황자를 지지했기 때문에 사실상 아버지와 함께 아그라 요새에 갇혀 버린 것과 마찬가지였다.[33] 뭄타즈 마할과는 14명에 달하는 아이를 가진 반면 나머지 왕비들 중에는 1명 밖에 아이를 낳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34] 무려 30시간 넘게 난산의 진통을 겪다가 죽었다.[35] 오른쪽의 더 사이즈가 큰 게 샤 자한의 관이다. 후일 뭄타즈 마할의 묘 옆에 추가로 매장했기 때문에 타지마할 영묘 전체에서 유일하게 비대칭을 이루고 있는 부분이다.[36] 뭄타즈 사후 샤 자한이 황후를 맞이하지 않았기에 황후의 역할은 샤 자한이 총애하는 큰딸 자하나라 베굼 공주가 대신했다.[37] 다만 후술하겠지만 인두세 부활은 이슬람 광신도인 아우랑제브가 인도 대륙의 급속한 이슬람화를 목적으로 한 것으로 봐야 한다.[38] 1668년에서 1669년 사이에 아우랑제브는 제국법을 이슬람 율법에 가까이 바꾸고 힌두교 사원 건축 금지 및 음악, 춤, 음주를 규제하는 법을 제정했으며 악바르의 개혁정치 중 하나인 황제가 매일 군중에게 모습을 보이는 제도까지 폐지하면서 더욱 노골적인 이슬람화를 강요했다.[39] 샤 자한은 뭄타즈 마할,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40] 공민왕의 증조할머니는 칭기스칸의 증손녀인 제국대장공주이며, 샤자한의 현조할머니인 쿠틀룩 니가르 카눔은 칭기스칸의 15대손으로, 모굴리스탄 칸국의 칸이었던 유누스 칸의 딸이다.[41] 아버지 샤 자한을 유폐하고 황제로 즉위하는 패륜을 저지른 아우랑제브도 뭄타즈 마할의 소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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