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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위왕(武陵威王) 司馬晞 | 사마희 | |
위(威) | |
무릉군왕(武陵郡王) | |
사마(司馬) | |
이름 | 희(晞) |
도숙(道叔) | |
부모 | 친부: 원제 사마예 / 친모: 재인 왕씨 양부: 사마철 |
생몰기간 | 316년 ~ 381년 |
재위 | 동진의 무릉왕 |
318년 ~ 371년 |
동진의 황족으로 자는 도숙(道叔)이다.
316년 낭야왕(琅邪王) 사마예와 재인 왕씨(王氏)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명제 사마소, 간문제 사마욱과는 이복형제였다.
317년, 오호의 침공으로 중원이 혼란에 빠진 가운데 강남에서 사마예가 진왕(晉王)이 되었고 다음 해인 318년 정식으로 제위에 올라 간신히 진나라의 명맥을 이었으니 이가 원제였다. 같은 해에 사마희는 영가의 난 때 석륵에게 살해당한 무릉애왕(武陵哀王) 사마철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사마희는 함화(咸和) 연간에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상동군(湘東郡)을 무릉국(武陵國)에 더하고 좌장군(左將軍)에 제수되었다. 뒤이어 진군장군(鎭軍將軍)을 역임하고 다시 산기상시가 더해졌다. 342년, 성제 사마악이 붕어할 때 회계왕(會稽王) 사마욱, 중서감(中書監) 유빙, 중서령(中書令) 하충, 상서령(尙書令) 제갈회와 함께 고명을 받들었다.
사마악의 동생 강제 사마담이 즉위한 뒤 시중(侍中), 특진(特進)이 더해졌다. 343년, 비서감(秘書監)을 겸임하였다.
목제 사마담이 즉위한 뒤 345년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다. 352년, 태재(太宰)가 되었다.
태화 연간, 폐제 사마혁이 사마희에게 의장과 고취, 검리상전(劍履上殿), 입조불추(入朝不趨), 찬배불명(贊拜不名)의 특권을 내리려고 했지만 사마희는 이를 고사하였다.
371년, 권신 환온이 사마혁을 폐위하고 낭야왕 사마욱을 제위에 올렸다. 사마희는 학식이 없었지만 무술을 연마했기 때문에 환온은 사마희를 꺼려서 그를 내쫓을 방법을 강구하다가 결국 간문제에게 사마희에 대해 참소하였다.
317년, 오호의 침공으로 중원이 혼란에 빠진 가운데 강남에서 사마예가 진왕(晉王)이 되었고 다음 해인 318년 정식으로 제위에 올라 간신히 진나라의 명맥을 이었으니 이가 원제였다. 같은 해에 사마희는 영가의 난 때 석륵에게 살해당한 무릉애왕(武陵哀王) 사마철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사마희는 함화(咸和) 연간에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상동군(湘東郡)을 무릉국(武陵國)에 더하고 좌장군(左將軍)에 제수되었다. 뒤이어 진군장군(鎭軍將軍)을 역임하고 다시 산기상시가 더해졌다. 342년, 성제 사마악이 붕어할 때 회계왕(會稽王) 사마욱, 중서감(中書監) 유빙, 중서령(中書令) 하충, 상서령(尙書令) 제갈회와 함께 고명을 받들었다.
사마악의 동생 강제 사마담이 즉위한 뒤 시중(侍中), 특진(特進)이 더해졌다. 343년, 비서감(秘書監)을 겸임하였다.
목제 사마담이 즉위한 뒤 345년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다. 352년, 태재(太宰)가 되었다.
태화 연간, 폐제 사마혁이 사마희에게 의장과 고취, 검리상전(劍履上殿), 입조불추(入朝不趨), 찬배불명(贊拜不名)의 특권을 내리려고 했지만 사마희는 이를 고사하였다.
371년, 권신 환온이 사마혁을 폐위하고 낭야왕 사마욱을 제위에 올렸다. 사마희는 학식이 없었지만 무술을 연마했기 때문에 환온은 사마희를 꺼려서 그를 내쫓을 방법을 강구하다가 결국 간문제에게 사마희에 대해 참소하였다.
이후 사마희는 폐서인되어 말 85마리와 300명의 병사와 무기들이 모두 환온에게 돌아갔다. 환온은 또한 신채왕(新蔡王) 사마황(司馬晃)를 협박하여 사마황이 사마희, 사마종, 저작랑(著作郞) 은연(殷涓), 태재장사(太宰長史) 유천(庾倩), 태재연(太宰掾) 조수(曹秀), 사인(舍人) 유강(劉彊), 산기상시 유유(庾柔) 등과 함께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하였다. 이들이 정위(廷尉)로 압송된 뒤 환온은 이들에 대한 처벌을 간문제에게 요구했으나 간문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환온은 다시 이들을 신안군(新安郡)으로 유배를 보내도록 상주했다. 결국 사마희는 가족들과 함께 신안군으로 유배되었고, 은연 등은 삼족이 멸해졌으며, 사마황은 폐서인되어 충양군(沖陽郡)으로 유배되었다.
사마희는 결국 381년 신안군에서 죽었다. 사후 효무제 사마요가 사마희를 신녕군왕(新寧郡王)으로 추봉하고 위(威)라는 시호를 내렸다가 387년에 다시 무릉왕으로 추봉하였다.
사마희는 슬하에 3명의 아들로 사마종(司馬綜), 사마봉(司馬㻱), 사마준(司馬遵)이 있었으며, 효무제 때 복권되었다. 사마희의 작위는 사마준이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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