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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태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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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사망 | |
묘소 | 경기도 부천시 수주로 64-1 |
본관 | |
호 | 일석(逸石) |
재임기간 | |
제5대 국무총리 | |
대한민국의 외교관 출신 정치인. 제3대 외무부장관, 제5대 국무총리 등을 역임했다. 정부 관료로서의 주요 활동은 주로 1950년대에 집중되었다.
변영태 장관 인터뷰 |
재동소학교를 졸업하고 교동고등소학교를 거쳐 계산 보통학교로 전학하였다. 그러다가 15살에 고등소학교 과정을 마치고,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애국지사이며 목사인 전덕기의 상동교회에 나가면서 이회영의 지도를 받았다.
이회영이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이주해 가자 19살에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만주로 갔다. 1912년 만주 통화현(通化縣)의 신흥무관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고, 1916년 북경 부근에 있는 협화대학 1년을 수료하였다. 이후 신흥무관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1920년 고국에 돌아와 1943년까지 24년 동안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고려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였다.
이회영이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이주해 가자 19살에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만주로 갔다. 1912년 만주 통화현(通化縣)의 신흥무관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고, 1916년 북경 부근에 있는 협화대학 1년을 수료하였다. 이후 신흥무관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1920년 고국에 돌아와 1943년까지 24년 동안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고려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였다.
1949년에는 대통령 특사로 정부 승인을 교섭하기 위하여 필리핀에 다녀왔다. 그 당시 달러가 정말 귀하고 나라의 재정이 어려울때였다. 1949년 대통령 특사로 필리핀에 갔다 돌아온 그가 여비 사용 명세서와 함께 남은 돈 10달러를 대통령에게 반납한 일화는 유명하다.
공무 여행중 그는 세탁비를 아껴야 한다며 옷을 직접 빨아 입었다. 끼니때마다 싸구려 중국집을 찾아 다니며 밥값을 아꼈다.
그의 신분을 알아 차린 식당 주인이 일국의 특사가 이런 데서 식사를 하느냐고 묻는 바람에 나라의 체통을 생각해서 비싼 요리를 시켜 먹었다는 수행보좌관이던 김용식(金溶植)전 외무장관의 술회도 있다.
그는 해외 출장에서 돌아오며 수백 달러에서 많게는 3천달러에 이르는 여비를 국고에 반납했다. 출장 가방에는 옷 한 벌 외에 반드시 아령을 넣었던 일 등 일화도 무성하다.
그는 어린 시절 허약한 체질에다 불치병으로 고생했는데 아령을 열심히 해 ‘아령 전도사’를 자처했고 경보대회에 나가 우승한 일도 있다. 형 변영만과 다르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퇴근후에도 자정까지 혹시나 이 대통령의 호출이 있을까봐 정장차림을 유지했고 이는 해외출장때도 마찬가지로 대통령이 전화를 해오면 차렷자세로 받곤했다.
이 대통령에 대한 충성은 아첨과 자리얻기 위함이 아니라 대통령이 국정을 원만히 운영하도록 성실하게 보좌해야 한다는 진정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6.25전쟁 때에는 그는 전쟁 당사국임에도 전쟁지원을 나온 연합국을 향해 할 말을 했다.
전쟁 포로와 관련하여 민족적 자존심과 함께 통일을 생각했다.
일본의 독도 침탈야욕에는 의연하게 맞섰다. 그는 대한민국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갖고 있으며 한국이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권리를 증명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라고 하는 내용을 첫 공식 정리해서 일본에 전달했다.
1951년부터 1955년까지 제3대 외무부장관으로 활약하였다. 한편 1952년부터 1953년까지는 국제연합 수석대표, 1953년에 국무총리가 되어 외무부장관 직을 겸임하였다.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한 후, 존 덜레스 미 국무장관과 악수하는 변영태)
그의 외무장관 재직 기간인 1953년, 휴전 직후 미국과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이 성사되었다. 이듬해인 1954년에는 제네바 정치협상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14개 항의 통일 방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1954년 10월 28일에는 일본에 외교 서한을 보내어 '독도 문제의 국제사법재판소(ICJ) 회부 요구'를 반박했다. 여기서 그는 독도가 일본에 의한 한반도 식민 지배, 침탈의 첫 대상이었음을 지적하면서,[3] "한국 국민에게 독도는 일본과 상대한 한국 주권의 상징이며, 또 한국 주권의 보전을 시험하는 실례"라고 역설했다.[4] 독도학회 회장이기도 한 서울대 신용하 교수는 당시 변영태 외무장관의 대일 서한이 '독도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을 정립한 기준'이 되었다고 평가했다.[5]
사사오입 개헌으로 국무총리직이 폐지되고 신설된 수석국무위원직에도 외무부장관으로서 자동 유임되었다.
공무 여행중 그는 세탁비를 아껴야 한다며 옷을 직접 빨아 입었다. 끼니때마다 싸구려 중국집을 찾아 다니며 밥값을 아꼈다.
그의 신분을 알아 차린 식당 주인이 일국의 특사가 이런 데서 식사를 하느냐고 묻는 바람에 나라의 체통을 생각해서 비싼 요리를 시켜 먹었다는 수행보좌관이던 김용식(金溶植)전 외무장관의 술회도 있다.
그는 해외 출장에서 돌아오며 수백 달러에서 많게는 3천달러에 이르는 여비를 국고에 반납했다. 출장 가방에는 옷 한 벌 외에 반드시 아령을 넣었던 일 등 일화도 무성하다.
그는 어린 시절 허약한 체질에다 불치병으로 고생했는데 아령을 열심히 해 ‘아령 전도사’를 자처했고 경보대회에 나가 우승한 일도 있다. 형 변영만과 다르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퇴근후에도 자정까지 혹시나 이 대통령의 호출이 있을까봐 정장차림을 유지했고 이는 해외출장때도 마찬가지로 대통령이 전화를 해오면 차렷자세로 받곤했다.
이 대통령에 대한 충성은 아첨과 자리얻기 위함이 아니라 대통령이 국정을 원만히 운영하도록 성실하게 보좌해야 한다는 진정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6.25전쟁 때에는 그는 전쟁 당사국임에도 전쟁지원을 나온 연합국을 향해 할 말을 했다.
전쟁 포로와 관련하여 민족적 자존심과 함께 통일을 생각했다.
일본의 독도 침탈야욕에는 의연하게 맞섰다. 그는 대한민국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갖고 있으며 한국이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권리를 증명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라고 하는 내용을 첫 공식 정리해서 일본에 전달했다.
1951년부터 1955년까지 제3대 외무부장관으로 활약하였다. 한편 1952년부터 1953년까지는 국제연합 수석대표, 1953년에 국무총리가 되어 외무부장관 직을 겸임하였다.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한 후, 존 덜레스 미 국무장관과 악수하는 변영태)
그의 외무장관 재직 기간인 1953년, 휴전 직후 미국과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이 성사되었다. 이듬해인 1954년에는 제네바 정치협상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14개 항의 통일 방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1954년 10월 28일에는 일본에 외교 서한을 보내어 '독도 문제의 국제사법재판소(ICJ) 회부 요구'를 반박했다. 여기서 그는 독도가 일본에 의한 한반도 식민 지배, 침탈의 첫 대상이었음을 지적하면서,[3] "한국 국민에게 독도는 일본과 상대한 한국 주권의 상징이며, 또 한국 주권의 보전을 시험하는 실례"라고 역설했다.[4] 독도학회 회장이기도 한 서울대 신용하 교수는 당시 변영태 외무장관의 대일 서한이 '독도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을 정립한 기준'이 되었다고 평가했다.[5]
사사오입 개헌으로 국무총리직이 폐지되고 신설된 수석국무위원직에도 외무부장관으로서 자동 유임되었다.
1956년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및 고려대학교 교수 등을 거치면서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말년인 1963년에는 정민회(正民會)를 조직하여,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말년인 1963년에는 정민회(正民會)를 조직하여,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60 | 3 (1.14%) | 낙선 (3위) | ||||
1963 | 224,443 (2.22%) | 낙선 (4위) |
역대 선거 벽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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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후보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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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석국무위원 겸임,(1954년 11월 30일 ~ 1955년 7월 28일) 사사오입 개헌으로 잠정 폐지된 국무총리직을 대체한 수석국무위원에 그대로 유임되었다.[2] <논개> , <사벽송> 등으로 유명한 시인 ,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지냈다.[3] 러일전쟁 중인 1905년 2월 22일 일본이 러시아 해군을 감시하기 위한 측량 시설을 설치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독도를 편입시킨 것을 가리킨다. 일본 시마네현이 2005년부터 주장하는 소위 '다케시마의 날'의 기원.[4] 52년 후인 2006년 4월 일본의 독도 인근 해역 측량 시도를 놓고 한일 양국이 물리적 충돌 위기를 겪은 후, 노무현 당시 대통령도 대국민 담화를 통해 동일한 논리를 근거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반박했다.[5] 동영상1,동영상2[6] 의원 내각제 의회에서의 간접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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