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부 시절 자유당에 의해 원외에서 조직된 정치깡패 집단.
제2대 총선에서 전체 의원 중 3분의 2인 126명이 무소속일 정도로 신진 정치세력 중심으로 물갈이가 이뤄지자 간선제로 대통령이 되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승만 대통령이 내각책임제 개헌을 반대하는 관제데모를 일으키고 이 과정에서 동원한 정치깡패 집단 중 하나가 백골단이었다. 당시 이 깡패집단들은 백골단 말고도 '땃벌떼'[1]나 '민중자결단(民衆自決團)' 등의 용어를 사용했다.
백골단을 비롯한 폭력단체들이 국회해산을 요구하면서 국회를 포위하기도 하는 등 폭력이 난무하자 이를 빌미로 이승만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일부 국회의원들이 강제로 의사당에 연행되는 등의 황당한 일이 일어난 끝에 1952년 7월 4일 심야국회에서 직선제 개헌안이 의결되었는데 이른바 발췌 개헌이다.
그러나 백골단 등의 명칭은 이승만 정부 이후 더이상 쓰이지 않아 노태우 정부 이후에는 보통 2번 문단의 의미로 많이 기억한다.
제2대 총선에서 전체 의원 중 3분의 2인 126명이 무소속일 정도로 신진 정치세력 중심으로 물갈이가 이뤄지자 간선제로 대통령이 되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승만 대통령이 내각책임제 개헌을 반대하는 관제데모를 일으키고 이 과정에서 동원한 정치깡패 집단 중 하나가 백골단이었다. 당시 이 깡패집단들은 백골단 말고도 '땃벌떼'[1]나 '민중자결단(民衆自決團)' 등의 용어를 사용했다.
백골단을 비롯한 폭력단체들이 국회해산을 요구하면서 국회를 포위하기도 하는 등 폭력이 난무하자 이를 빌미로 이승만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일부 국회의원들이 강제로 의사당에 연행되는 등의 황당한 일이 일어난 끝에 1952년 7월 4일 심야국회에서 직선제 개헌안이 의결되었는데 이른바 발췌 개헌이다.
그러나 백골단 등의 명칭은 이승만 정부 이후 더이상 쓰이지 않아 노태우 정부 이후에는 보통 2번 문단의 의미로 많이 기억한다.
원래는 서울특별시 경찰국(약칭 서울시경, 현재 서울특별시경찰청) 소속 5150제대. 이 사진은 소드마스터 시리즈에서도 쓴 적이 있다.
깨방(타지)과 편곤[2]으로 무장한 사진. 사진 속 중대는 전남특수기동3중대로 의경들로 이루어진 중대였다. 인터넷에 흘러다니는 백골단 사진들은 대부분 전의경 중대들로 그중에서도 서울, 전남 쪽 중대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시위에 참여한 인원이 많아지면 백골단도 어쩔 수 없다. 사진은 1991년 '백골단 해체의 날'[3] 시위 때 시위대에게 둘러싸인 모습.
(출처: 유튜브 대한뉴스)[4] 백골단의 출동 장면.[5] 여기 사용된 버스는 기아 콤비(아시아자동차)다.
청카바와 청바지를 입고 흰색 하이바를 쓴 전의경, 직원 기동대원을 통틀어서 일컫는 별칭.
80, 90년대에 방석복을 입고 열을 맞추어 진압하는 일반적인 전의경들과는 다르게 가벼운 복장으로 시위대에게 달려들어 대오를 헤집고 검거하던 것으로 악명 높았다.
이들은 일반 전의경, 사업장 구사대와 함께 권위의 상징이자 시민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사실 백골단이라는 말은 경찰측이 아닌 시위대측에서 만들어져서 대중에 퍼졌기 때문에 대중들이 가진 백골단의 이미지와 문서에서 주로 설명하는 사복체포조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6] 사복체포조가 백골단의 이미지에 가장 부합하지만 대중과 시위대가 알고 있는 백골단은 여러 시기의 여러 진압부대의 모습과 과장되거나 사실무근인 정보도 섞여 있기 때문에 사실과 다른 면도 있고 사람마다 백골단에 대해 기억하는 모습이 서로 다르기도 하다.
백골단의 명칭에 대해서는 후술하듯이 복장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제일 유명하지만 청와대 경비대인 백일단(101경비단)에서 왔다는 주장도 있다. 경찰 정예 부대라는 점에서 풍문상의 백골단과 현실의 백일단은 유사점이 있다. 80~90년대 만들어진 악명이 그대로 이어져 시위대에게 공포로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80, 90년대에 방석복을 입고 열을 맞추어 진압하는 일반적인 전의경들과는 다르게 가벼운 복장으로 시위대에게 달려들어 대오를 헤집고 검거하던 것으로 악명 높았다.
이들은 일반 전의경, 사업장 구사대와 함께 권위의 상징이자 시민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사실 백골단이라는 말은 경찰측이 아닌 시위대측에서 만들어져서 대중에 퍼졌기 때문에 대중들이 가진 백골단의 이미지와 문서에서 주로 설명하는 사복체포조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6] 사복체포조가 백골단의 이미지에 가장 부합하지만 대중과 시위대가 알고 있는 백골단은 여러 시기의 여러 진압부대의 모습과 과장되거나 사실무근인 정보도 섞여 있기 때문에 사실과 다른 면도 있고 사람마다 백골단에 대해 기억하는 모습이 서로 다르기도 하다.
백골단의 명칭에 대해서는 후술하듯이 복장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제일 유명하지만 청와대 경비대인 백일단(101경비단)에서 왔다는 주장도 있다. 경찰 정예 부대라는 점에서 풍문상의 백골단과 현실의 백일단은 유사점이 있다. 80~90년대 만들어진 악명이 그대로 이어져 시위대에게 공포로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일반적으로는 1985년 8월 1일 서울시장 명의로 모집된 사복체포조는 대부분 무술 유단자 및 특전사와 해병대 출신들이 특채되어 주류를 이루었으며 시위자들을 진압하는 모습이 흰색 헬멧에 일반 전투경찰들과 구분되는 청색자켓 복장 때문에 백골단이란 별칭이 붙었다고 알려졌다.
다만 남아있 는 사진, 영상들이나 당시 전, 의경 출신들의 증언 등을 보면 실제로는 1985년 하반기쯤부터 전투경찰들이나 직업경찰관(일명 직원)들로 구성된 사복체포조 부대, 즉 사복중대들이 서울시경 산하에 창설되어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7]1985년 민정당 연수원 점거 농성 당시 모습
1986년까지 서울기동대 산하에 전경사복중대, 직원사복중대들이 증설되고 전국적으로 형사기동대(일명 형기대)가 창설되면서 이들 역시 사복체포조 역할을 맡게 되었다. 서울을 제외한 지역의 전경사복중대들도 이 시기에 발족한 것으로 보인다.
형기대를 제외하고는 창설 초기인 1985년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는 직원중대나 전경중대 모두 81, 87같이 80단위 중대가 사복중대였다.
그러다 80년대 후반에 91~98중대의 전경사복중대[8]와 81~90중대의 직원사복중대[9]로 개편되어 1992년경까지 운영되었다.
이외에도 비슷한 시기에 일반진압중대 내에서도 따로 한 개 소 혹은 분대 정도나 소대 내 고참급들이 청바지 청자켓 등 사복을 입고 사복체포조 역할을 하거나 일부 경찰서에서는 순수 의경들로 이루어진 경찰서 직속의 사복제대[10]를 운영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복체포조가 운영되었다.
그러다 1991년 강경대 치사 사건이 일어나면서 사복중대는 여론의 질타를 받았고 1992년쯤에 서울 전경사복중대들은 모두 직원중대로 교체되어[11] 1994년 말까지는 직원사복중대만 운영되었다.[12] 단, 중대단위로 운용하지는 않았지만 사건 이후에도 몇몇 정복중대 내에서는 분대급 인원으로 사복조를 운용하기도 했다.
그러다 1994년 11월경 의경진압중대 중에서 각 기동대당 2, 3개 정도의 중대를 사복중대로 전환시켰다.[13]
1994년에 전환된 사복중대는 처음에는 모두 "진사복중대"라고 하여[14] 경우에 따라서 진압복과 사복 차림을 번갈아 입히며젼서 운영하다가 24[15], 37중대를 제외하고 모두 사복중대로 개편되었다.
연세대 사태 이후 1997년에는 무술 유단 경찰관으로 70, 71, 72, 73, 74중대를 신규 편성 및 기존 제1, 2, 3, 4기동대에서 의경 사복중대들을 차출해[16] 특수기동대[17]를 창설했고 2008년 촛불집회 등을 거치면서 현재의 경찰기동대가 운영되고 있다.
서울 외의 각 지역에도 사복중대들이 존재했다. 80년대부터 각 지역별로 직원중대인 형기대[18]와 함께 전남의 1중대를 제외하면 경남 80중대, 부산 80중대, 경기 80중대 등 80단위 중대가 전경사복중대로 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중 전경사복중대들은 1991년을 전후로 하여 전경에서 의경으로 인원이 교체되고 서울 지역과 동일하게 92년 이후에 직원으로 교체되었다. 그 밖에 정복중대 속 사복조도 자주 운영되었고 전남의 2중대, 경기도의 3중대와 8중대, 부산의 5중대 등 90년대를 거치면서 많은 전의경 부대들이 사복중대로 창설 또는 해체되는 등의 과정을 겪었다.
각 지역 사복중대들 중에서도 전남 지역 사복중대들[19]이 전국적으로 유명했는데 당시 광주, 전남 지역의 시위가 격렬한 것으로 유명했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82, 83, 84중대와 3중대[20][21]가 유명했다. 그 외에도 정복중대 내에서 사복을 입는 대원들도 많았고 방범순찰대 중에도 사복을 입고 진압하는 중대들도 있었다.[22]
다만 남아있 는 사진, 영상들이나 당시 전, 의경 출신들의 증언 등을 보면 실제로는 1985년 하반기쯤부터 전투경찰들이나 직업경찰관(일명 직원)들로 구성된 사복체포조 부대, 즉 사복중대들이 서울시경 산하에 창설되어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7]1985년 민정당 연수원 점거 농성 당시 모습
1986년까지 서울기동대 산하에 전경사복중대, 직원사복중대들이 증설되고 전국적으로 형사기동대(일명 형기대)가 창설되면서 이들 역시 사복체포조 역할을 맡게 되었다. 서울을 제외한 지역의 전경사복중대들도 이 시기에 발족한 것으로 보인다.
형기대를 제외하고는 창설 초기인 1985년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는 직원중대나 전경중대 모두 81, 87같이 80단위 중대가 사복중대였다.
그러다 80년대 후반에 91~98중대의 전경사복중대[8]와 81~90중대의 직원사복중대[9]로 개편되어 1992년경까지 운영되었다.
이외에도 비슷한 시기에 일반진압중대 내에서도 따로 한 개 소 혹은 분대 정도나 소대 내 고참급들이 청바지 청자켓 등 사복을 입고 사복체포조 역할을 하거나 일부 경찰서에서는 순수 의경들로 이루어진 경찰서 직속의 사복제대[10]를 운영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복체포조가 운영되었다.
그러다 1991년 강경대 치사 사건이 일어나면서 사복중대는 여론의 질타를 받았고 1992년쯤에 서울 전경사복중대들은 모두 직원중대로 교체되어[11] 1994년 말까지는 직원사복중대만 운영되었다.[12] 단, 중대단위로 운용하지는 않았지만 사건 이후에도 몇몇 정복중대 내에서는 분대급 인원으로 사복조를 운용하기도 했다.
그러다 1994년 11월경 의경진압중대 중에서 각 기동대당 2, 3개 정도의 중대를 사복중대로 전환시켰다.[13]
1994년에 전환된 사복중대는 처음에는 모두 "진사복중대"라고 하여[14] 경우에 따라서 진압복과 사복 차림을 번갈아 입히며젼서 운영하다가 24[15], 37중대를 제외하고 모두 사복중대로 개편되었다.
연세대 사태 이후 1997년에는 무술 유단 경찰관으로 70, 71, 72, 73, 74중대를 신규 편성 및 기존 제1, 2, 3, 4기동대에서 의경 사복중대들을 차출해[16] 특수기동대[17]를 창설했고 2008년 촛불집회 등을 거치면서 현재의 경찰기동대가 운영되고 있다.
서울 외의 각 지역에도 사복중대들이 존재했다. 80년대부터 각 지역별로 직원중대인 형기대[18]와 함께 전남의 1중대를 제외하면 경남 80중대, 부산 80중대, 경기 80중대 등 80단위 중대가 전경사복중대로 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중 전경사복중대들은 1991년을 전후로 하여 전경에서 의경으로 인원이 교체되고 서울 지역과 동일하게 92년 이후에 직원으로 교체되었다. 그 밖에 정복중대 속 사복조도 자주 운영되었고 전남의 2중대, 경기도의 3중대와 8중대, 부산의 5중대 등 90년대를 거치면서 많은 전의경 부대들이 사복중대로 창설 또는 해체되는 등의 과정을 겪었다.
각 지역 사복중대들 중에서도 전남 지역 사복중대들[19]이 전국적으로 유명했는데 당시 광주, 전남 지역의 시위가 격렬한 것으로 유명했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82, 83, 84중대와 3중대[20][21]가 유명했다. 그 외에도 정복중대 내에서 사복을 입는 대원들도 많았고 방범순찰대 중에도 사복을 입고 진압하는 중대들도 있었다.[22]
백골단은 어느 특정한 시간에 해체돼서 소멸한 게 아니라 환경의 변화로 일반진압 중대와 외형적, 역할적 차이점이 사라지면서 서서히 없어졌다.[23] 그렇기 때문에 사복중대가 따로 해체되거나 하지는 않고 일반 진압중대로 계속 남아있었다.
먼저 1996년 연세대 사태 이후 이듬해에 개선된 진남색에 어깨 보호대를 더한 방탄조끼 형상의 신형 방석복이 지급되기 시작하면서 정복중대와 사복중대 모두 이 신형 방석복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X밴드 형태였던 구형 간이진압복을 착용하는 사복중대는 두껍고 무거운 구형 방석복(속칭 완진)으로 인해서 기동성이 부족한 정복중대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모두 보다 가벼워진 신형 방석복을 착용하게 되면서 사복중대의 의미가 다소 퇴색되었다.
시위환경이 변하면서 시위 진압 방식이 변하고 착용하는 방석복의 차이가 없어지면서 점차 정복중대는 예전보다 유연하고 가벼워지고 사복중대는 예전보다 무거워지는 식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1985년 창설부터 90년대까지 점진적으로 있어왔고 1999년 무최루탄 선언 이후에는 정복, 사복중대의 역할이 거의 비슷해졌다.[24]
진압방식의 변화 외에도 외형의 차이도 사라졌다. 2000년경을 지나면서 기존의 사복중대들이 청자켓과 청바지를 입지 않게 되고 특유의 오토바이 헬멧도 검은색으로 칠해 버리면서 언뜻봐서는 일반적인 방석모랑 구별이 힘들어졌다.[25] 아마 사복중대가 더 이상 백골단으로 불리지 않게 된 건 외형적 이유가 클 것이다.
먼저 1996년 연세대 사태 이후 이듬해에 개선된 진남색에 어깨 보호대를 더한 방탄조끼 형상의 신형 방석복이 지급되기 시작하면서 정복중대와 사복중대 모두 이 신형 방석복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X밴드 형태였던 구형 간이진압복을 착용하는 사복중대는 두껍고 무거운 구형 방석복(속칭 완진)으로 인해서 기동성이 부족한 정복중대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모두 보다 가벼워진 신형 방석복을 착용하게 되면서 사복중대의 의미가 다소 퇴색되었다.
시위환경이 변하면서 시위 진압 방식이 변하고 착용하는 방석복의 차이가 없어지면서 점차 정복중대는 예전보다 유연하고 가벼워지고 사복중대는 예전보다 무거워지는 식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1985년 창설부터 90년대까지 점진적으로 있어왔고 1999년 무최루탄 선언 이후에는 정복, 사복중대의 역할이 거의 비슷해졌다.[24]
진압방식의 변화 외에도 외형의 차이도 사라졌다. 2000년경을 지나면서 기존의 사복중대들이 청자켓과 청바지를 입지 않게 되고 특유의 오토바이 헬멧도 검은색으로 칠해 버리면서 언뜻봐서는 일반적인 방석모랑 구별이 힘들어졌다.[25] 아마 사복중대가 더 이상 백골단으로 불리지 않게 된 건 외형적 이유가 클 것이다.
이렇게 사복중대가 그 특징을 잃으면서 백골단의 악명은 1기동대 1, 2, 3중대 즉, 단셋에게 넘어갔다.
2006년에 단셋이 해체된 뒤[26] 2008년 촛불시위부터 경찰관기동대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무도유단자를 중심으로 선발한 경찰공무원 1700여 명 규모로 창설, 감축 및 해체 수순을 밟아 가던 전의경 진압중대들을 대신해 시위 진압을 전담하게 되었다.
하지만 201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경찰관기동대의 진압능력은 의경중대보다 저조하다는 게 중론이었다. 실제로 2009년 촛불 1주기 시위 당시 경찰관 기동대가 투입되었는데 상부의 지시가 없다는 이유로 바로 옆에서 전의경 대원들이 시위대에게 고립되어서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었음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당시 뉴스를 찾아보면 전의경중대 중대장들이 직원중대[27] 대원들에게 "좀 도와주라고요 좀!!!"이라며 간절하게 부탁하는 장면이 포착되었다.해당 영상[28]
전/의경 전역자들과 경비부서 경찰관들 사이에서 이러한 평가가 나온 데는 전의경 중대[29]의 어마어마한 훈련량이 한 몫을 했다고 평가된다. 경찰공무원들을 실신할 때까지 혹독하게 훈련시킬 수는 없었다 보니 당시 경험치 면에서 의경 대원 쪽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30] 이후 경찰관기동대를 정책적으로 1선에 우선 배치[31]하면서 그 간극이 점점 줄어들었고 2020년대에 들어와선 경찰관기동대가 집회시위 관리업무를 거의 전담했다.[32] 이후 의무경찰 제도가 폐지되어 현재와 같은 체제가 정착.
백골단의 복장은 하얀색 또는 약간 누런색 오토바이 헬멧(백골단이란 별칭이 붙은 이유)과 청바지(화염병과 유리조각 등으로부터 보호 가능), 작은 방패 깨방, 단봉 그리고 운동화 복장으로 대표된다.
하지만 꼭 복장이 이렇게 일관되지는 않았다. 시기별로, 지역별로, 또 사복중대인지, 정복중대 내 사복조인지, 직원인지 대원인지에 따라서 유형은 많았다.
흰색 헬멧 외에도 2가지 색으로 된 헬멧도 쓰였다. 색이 있는 헬멧은 초기에는 다양한 색상이 있었는데 그 중 은색과 파란색으로 된 것만 끝까지 쓰이게 된다. 헬멧의 모양새는 창설초기에는 챙이 달린 싸이카 헬멧이었지만 1989년경 챙이 제거되고 플라스틱 바이저가 달린 형태의 헬멧으로 교체되었다.
하지만 꼭 복장이 이렇게 일관되지는 않았다. 시기별로, 지역별로, 또 사복중대인지, 정복중대 내 사복조인지, 직원인지 대원인지에 따라서 유형은 많았다.
흰색 헬멧 외에도 2가지 색으로 된 헬멧도 쓰였다. 색이 있는 헬멧은 초기에는 다양한 색상이 있었는데 그 중 은색과 파란색으로 된 것만 끝까지 쓰이게 된다. 헬멧의 모양새는 창설초기에는 챙이 달린 싸이카 헬멧이었지만 1989년경 챙이 제거되고 플라스틱 바이저가 달린 형태의 헬멧으로 교체되었다.
다양한 색깔의 헬멧들 | 가장 흔한 바이저가 달린 모델. 1989년~2000년대 초반까지 계속 쓰였다. |
1996년 이후에는 지방청 차원에서 위의 플라스틱 바이저를 철망으로 교체하기도 했다.[33]
시기에 따라서 헬멧에 페인트칠을 한다던가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34] 이 때문에 녹색으로 칠했던 시기에는 녹골단으로 불리기도 했다.
흰색 헬멧도 주로 문서 상단의 5150제대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챙이 달린 싸이카 헬멧이었다. 하키 헬멧 같은 헬멧도 경기도를 중심으로 한때 쓰였다.#1, #2(사진이 꽤나 잔인할 수 있으니 유의하길 바람)[35]
전남에서도 약간 누런 흰색 헬멧이 오랫동안 쓰였는데 특히 90년대 중후반에 이름을 날리던 82중대를 대표하는 헬멧으로 유명하다.#
그 밖에 자체적으로 다른 모델의 헬멧을 쓰거나# 락카칠 등을 해서 꾸미거나 사제 오토바이 헬멧을 구해서 쓰기도 했고 위의 싸이카 헬멧과 모양은 비슷하지만 바이저 형태가 약간 다른 모습의 헬멧을 쓰기도 하는 등#1,#2 중대, 지방별로 다양한 종류의 헬멧이 있었다.
다만 1989년 이후에는 플라스틱 바이저가 달린 은색, 파란색 투톤 헬멧이 가장 보편적이었다.[36]
복장은 초기에는 굳이 청자켓, 청바지가 아니라 완전한 사복을 입는 경우도 많았다. 실제로 위의 4장의 사진을 합쳐놓은 사진을 보면 다양한 옷을 입고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청자켓과 청바지, 일명 청카바도 초창기부터 쓰여 왔다. 청카바는 보급으로 나오기도 하였지만 고참들이나 지방에 따라서는 그냥 추리닝 상의나 바람막이에 사제 청바지 같은 개인 복장을 입기도 했다.
서울 기준으로 청카바의 디자인은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중반 사이에 한 차례 변하였다.
시기에 따라서 헬멧에 페인트칠을 한다던가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34] 이 때문에 녹색으로 칠했던 시기에는 녹골단으로 불리기도 했다.
흰색 헬멧도 주로 문서 상단의 5150제대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챙이 달린 싸이카 헬멧이었다. 하키 헬멧 같은 헬멧도 경기도를 중심으로 한때 쓰였다.#1, #2(사진이 꽤나 잔인할 수 있으니 유의하길 바람)[35]
전남에서도 약간 누런 흰색 헬멧이 오랫동안 쓰였는데 특히 90년대 중후반에 이름을 날리던 82중대를 대표하는 헬멧으로 유명하다.#
그 밖에 자체적으로 다른 모델의 헬멧을 쓰거나# 락카칠 등을 해서 꾸미거나 사제 오토바이 헬멧을 구해서 쓰기도 했고 위의 싸이카 헬멧과 모양은 비슷하지만 바이저 형태가 약간 다른 모습의 헬멧을 쓰기도 하는 등#1,#2 중대, 지방별로 다양한 종류의 헬멧이 있었다.
다만 1989년 이후에는 플라스틱 바이저가 달린 은색, 파란색 투톤 헬멧이 가장 보편적이었다.[36]
복장은 초기에는 굳이 청자켓, 청바지가 아니라 완전한 사복을 입는 경우도 많았다. 실제로 위의 4장의 사진을 합쳐놓은 사진을 보면 다양한 옷을 입고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청자켓과 청바지, 일명 청카바도 초창기부터 쓰여 왔다. 청카바는 보급으로 나오기도 하였지만 고참들이나 지방에 따라서는 그냥 추리닝 상의나 바람막이에 사제 청바지 같은 개인 복장을 입기도 했다.
서울 기준으로 청카바의 디자인은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중반 사이에 한 차례 변하였다.
1986년 사진. 윗부분이 비대칭인 형태의 상의에서... | 1990년 사진. 야전상의와 흡사한 형태로 변하였다. |
전경중대들은 처음에는 어떤 부대는 첫번째 사진 속 복장으로 통일되었는가 하면 또 어떤 부대는 앞에서 말했듯 제각기 다른 개인 사복이 많이 혼용되는 등 여러가지 모습이었는데 뒤로 가면서 일반적인 점퍼 형태의 청자켓 아니면 첫번째 사진의 청자켓 차림으로 좁혀지고 마지막에는 대부분의 대원들이 두번째 사진 속 청자켓으로 통일되었다. 다만 5000단위 부대나 정복중대 속 사복조 등은 다른 복장인 경우도 많았다.
분신정국 시기에는 사복중대에 대한 이미지가 극도로 나빠져서 청카바 대신 일반 기동복을 입고 다닌 적도 있었다.예시 1,예시 2
전경사복중대 해체 이후 직원사복중대들은 전경사복중대처럼 모든 중대가 청카바로 통일되지는 않았지만 각 중대원들끼리는 통일적이었던 것 같다. 주로 사파리 자켓이나 위의 두번째 사진처럼 야전상의 형태에 색만 다른 상의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1994년 11월경 사복중대로 변경된 의경중대들은 위와 같은 야전상의 형태가 아닌 일반적인 형태의 청자켓을 착용했으며 자켓류 말고도 하늘색 계통 반팔과 긴팔 남방을 보급받아 여름철에 사용하였다.[37] 또 이때의 특징이라면 청카바 외에 일명 흑카바[38]라고 불리는 흑색 데님 소재의 옷이 지급되었다는 점이다.1997년 이후 흑카바[39] 옷의 모양새는 1989년~1992년에 쓰인 청자켓과 거의 같았고 청카바 폐지 이전까지는 사복중대들은 여름에는 청카바, 겨울에는 흑카바를 착용했다.
분신정국 시기에는 사복중대에 대한 이미지가 극도로 나빠져서 청카바 대신 일반 기동복을 입고 다닌 적도 있었다.예시 1,예시 2
전경사복중대 해체 이후 직원사복중대들은 전경사복중대처럼 모든 중대가 청카바로 통일되지는 않았지만 각 중대원들끼리는 통일적이었던 것 같다. 주로 사파리 자켓이나 위의 두번째 사진처럼 야전상의 형태에 색만 다른 상의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1994년 11월경 사복중대로 변경된 의경중대들은 위와 같은 야전상의 형태가 아닌 일반적인 형태의 청자켓을 착용했으며 자켓류 말고도 하늘색 계통 반팔과 긴팔 남방을 보급받아 여름철에 사용하였다.[37] 또 이때의 특징이라면 청카바 외에 일명 흑카바[38]라고 불리는 흑색 데님 소재의 옷이 지급되었다는 점이다.1997년 이후 흑카바[39] 옷의 모양새는 1989년~1992년에 쓰인 청자켓과 거의 같았고 청카바 폐지 이전까지는 사복중대들은 여름에는 청카바, 겨울에는 흑카바를 착용했다.
여름, 반팔남방도 많이 쓰였다. | 겨울, 흑카바. |
청카바는 2000년경부터 더 이상 쓰이지 않았고 그 빈자리는 흑카바가 대신했다. 흑카바는 몇 번의 변화를 거쳐서 2000년대까지 진사복 등으로 불리면서 사용되었지만 현재는 입지 않게 된 지 오래다.
지방중대도 창설 초기에는 사복을 입는 경우가 많았고 서울과 동일하게 90년대 들어 흑카바가 보급되어 사용되었던 것 같다. 또 앞서 말했듯이 2000년대 중반까지도 청카바를 입는 중대들이 존재했다.
무장은 초기에는 헬멧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거나 방탄조끼처럼 생긴 방석복 정도를 걸쳤다. 무릎 아래 정강이를 보호해주는 각반도 있었지만 초기에는 잘 쓰지 않다가 1988년경부터 많이 사용하게 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무릎 부분도 따로 보호장비를 사용하기도 했다.왼쪽에서 3번째와 오른쪽 맨 끝 인물의 무릎에 주목
그러다가 1989~1990년경에는 새로운 형태의 진압복이 보급되었다.일명 간이진압복, 간진. 기존에 사용하던 것과 달리 낭심과 어깨 부분에 보호대가 달리고 각반도 기존의 정강이만 덮는 형태에서 무릎과 발목까지 덮는 형태로 변화하였다.[40]
처음에는 국방색 모델이 보급되다가 이후 회색으로 바뀌었다.[41]
간이진압복은 1997년 진압복 개선 이전까지 전국의 사복중대에서 애용했다.
여담으로 간이진압복은 사복중대에만 보급되었지만 정복중대에도 나중에 보급되었다.[42] 하지만 대부분의 정복중대에서는 그 수가 적어서 주로 지휘관들이나 분대장, 전령 같은 몇몇 짬 되는 고참들이 차지했다.[43] 간이진압복이란 이름처럼 비교적 가볍고 활동하기 편했는데 그것 때문에 당시 대나무가 들어간 두꺼운 진압복을 입어야 했던 일반 정복중대 대원들에게는 사복중대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 외의 복장적 특징으로는 크로스 백처럼 생긴 방독면 가방이 있다. 일반적인 방독면 가방보다 더 단순하게 생겼는데 주로 서울, 경기도 지역에서 직원사복중대들이나 1985~1992년까지 있었던 전경사복중대들이 사용하였다. 타 지역이나 1994년 이후 의경사복중대들은 이 가방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일반적인 방독면 가방을 매고 다녔다.빨간색 가방이 해당 방독면 가방이다.[44]
창설 초기에는 진압 시 단봉이나 맨손에 사과탄이라고 부르는 작은 최루탄을 주로 사용했다. 실제로 1986년, 1987년 영상 등을 보면 아무것도 없이 맨손으로 시위자들을 붙잡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당시에는 깨방, 사복방패등으로 불리는 거북이 모양 방패는 없었고 일부 대원들이 일반적인 진압방패를 지참하였다.
그러다가 80년대 후반 이후 사수대들이 조직화되고 쇠파이프등이 시위 현장에서 심심찮게[45] 등장하자 경찰측에서는 기존의 사용하던 경찰봉을 대신하여 죽도를 사용하는 등의 방식으로 이에 대응했다.[46]
사복중대는 더 나아가 죽도에 철근을 박거나 아예 쇠파이프를 진압에 동원하기도 했으며 유명한 거북이 방패가 이 시기에 도입되었고 90년대 중반에는 근접분사기가 도입되었다.
1994년에 전환된 의경중대들도 기본적인 무장은 비슷했다. 진압복도 색만 다르고 동일했으며 진압방패나 거북이 방패, 봉, 근접분사기 등 장비도 유사했다. 다만 진압방패의 길이가 길어졌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47] 전체적으로 후기로 가면서 무장이 더 충실해진다고 볼 수 있다.
지방중대도 창설 초기에는 사복을 입는 경우가 많았고 서울과 동일하게 90년대 들어 흑카바가 보급되어 사용되었던 것 같다. 또 앞서 말했듯이 2000년대 중반까지도 청카바를 입는 중대들이 존재했다.
무장은 초기에는 헬멧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거나 방탄조끼처럼 생긴 방석복 정도를 걸쳤다. 무릎 아래 정강이를 보호해주는 각반도 있었지만 초기에는 잘 쓰지 않다가 1988년경부터 많이 사용하게 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무릎 부분도 따로 보호장비를 사용하기도 했다.왼쪽에서 3번째와 오른쪽 맨 끝 인물의 무릎에 주목
그러다가 1989~1990년경에는 새로운 형태의 진압복이 보급되었다.일명 간이진압복, 간진. 기존에 사용하던 것과 달리 낭심과 어깨 부분에 보호대가 달리고 각반도 기존의 정강이만 덮는 형태에서 무릎과 발목까지 덮는 형태로 변화하였다.[40]
처음에는 국방색 모델이 보급되다가 이후 회색으로 바뀌었다.[41]
간이진압복은 1997년 진압복 개선 이전까지 전국의 사복중대에서 애용했다.
여담으로 간이진압복은 사복중대에만 보급되었지만 정복중대에도 나중에 보급되었다.[42] 하지만 대부분의 정복중대에서는 그 수가 적어서 주로 지휘관들이나 분대장, 전령 같은 몇몇 짬 되는 고참들이 차지했다.[43] 간이진압복이란 이름처럼 비교적 가볍고 활동하기 편했는데 그것 때문에 당시 대나무가 들어간 두꺼운 진압복을 입어야 했던 일반 정복중대 대원들에게는 사복중대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 외의 복장적 특징으로는 크로스 백처럼 생긴 방독면 가방이 있다. 일반적인 방독면 가방보다 더 단순하게 생겼는데 주로 서울, 경기도 지역에서 직원사복중대들이나 1985~1992년까지 있었던 전경사복중대들이 사용하였다. 타 지역이나 1994년 이후 의경사복중대들은 이 가방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일반적인 방독면 가방을 매고 다녔다.빨간색 가방이 해당 방독면 가방이다.[44]
창설 초기에는 진압 시 단봉이나 맨손에 사과탄이라고 부르는 작은 최루탄을 주로 사용했다. 실제로 1986년, 1987년 영상 등을 보면 아무것도 없이 맨손으로 시위자들을 붙잡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당시에는 깨방, 사복방패등으로 불리는 거북이 모양 방패는 없었고 일부 대원들이 일반적인 진압방패를 지참하였다.
그러다가 80년대 후반 이후 사수대들이 조직화되고 쇠파이프등이 시위 현장에서 심심찮게[45] 등장하자 경찰측에서는 기존의 사용하던 경찰봉을 대신하여 죽도를 사용하는 등의 방식으로 이에 대응했다.[46]
사복중대는 더 나아가 죽도에 철근을 박거나 아예 쇠파이프를 진압에 동원하기도 했으며 유명한 거북이 방패가 이 시기에 도입되었고 90년대 중반에는 근접분사기가 도입되었다.
1994년에 전환된 의경중대들도 기본적인 무장은 비슷했다. 진압복도 색만 다르고 동일했으며 진압방패나 거북이 방패, 봉, 근접분사기 등 장비도 유사했다. 다만 진압방패의 길이가 길어졌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47] 전체적으로 후기로 가면서 무장이 더 충실해진다고 볼 수 있다.
시사저널 1991년 5월 16일자 기사에 언급된 백골단의 일상.
이들은 정복중대를 보조하여 기동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시위대를 밀어버리거나 검거하는 역할을 하였다.
당시 일반 전경부대가 1선에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다가 상황이 고조되면 명령에 의해서 양 옆쪽에서 백골단이 체포나 추격을 시도했고[48][49] 이렇게 되면 시위대는 도망가거나 다시 뭉쳐서 공격대형을 이루었는데 백골단이 시위대 중 앞에서 지휘하던 주동자들을 뛰어가 붙잡고 무자비한 구타를 시도하니 다들 주춤거리게 되고 더 이상 다가서지 못했다고 할 정도였다. 이렇게 되면 시위대들은 공포감에 몰입되어 패닉상태에 빠졌으며 특정 건물 등을 목표로 100m 간격을 두고 시위대를 붙잡고 밀어붙이는 무지막지한 진압을 시도하고 붙잡히면 반 죽음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공포의 부대였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간이 사다리 위에 올라간 기자를 날아차기해서 떨어뜨리거나, 집 안으로 도망간 학생을 문 부수고 들어가 머리잡고 끌고 나오기(남녀 가리지 않음), 출발하려는 지하철에 유리창을 깨고 난입해서 모조리 체포하기, 학교 안에 들어가서 도서관에서 멀쩡히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을 머리 잡고 끌고 나오기 등등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폭력성을 보였다. 이러한 폭력은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에게도 무자비하게 행해졌기 때문에 1990년 KBS 사태 당시 백골단 300명이 여의도 본사로 투입돼 조합원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해 117명을 연행한 바 있었다. 물론 군사정권 시기 정부와 언론의 묵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때로는 검거한 시위자들을 인근 경찰서로 연행하는 대신 멀리 떨어진 교외에 그대로 내버려 두고 가거나 현장에서 잔인하게 구타하고 내버려 두기도 했다.[50]
이들의 기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례로 상황시 방독면을 쓰고[51] 서울역에서 명동까지 구보할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허세가 조금 섞여 있기는 하겠지만, 목격담과 출신대원들의 고백도 있는 것으로 보아 완전히 허황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최루탄이 기본적으로 사용되던 당시에는 진압에 참여하는 거의 모든 중대가 방독면을 쓰고 구보를 하며 훈련하였고 2000년대 초반까지도 수도권 진압 선봉중대, 지방 선봉중대들은 훈련명목 또는 체벌로써 정화통까지 끼운 상태에서 방독면 구보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물론 떡실신했다. 서울역에서 명동역까지는 거리는 네이버 지도 기준으로 2.4㎞ 정도라고 한다. 대략 도보 30분 정도 거리다. 그런데 1998년 만도기계(현 대유위니아) 파업 이후 시위 진압에서 최루탄을 사용하지 않게 됨에 따라 막바지 백골단들은 방독면 착용을 하지 않았다.
물론 아무리 백골단이라고 해서 무적은 아니었다. 특히 초창기로 갈수록 백골단의 무장은 가벼웠고, 그만큼 무장 시위대와 정면으로 붙으면 크게 다칠 수 있었다. 그래서 백골단이 활약하기 위해선 정복중대가 확실하게 뒤를 받혀줘야만 했다. 다만 후기로 가면서 사복중대의 무장도 꽤 튼실해졌다.
사실 정부의 지원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초창기 장비는 무전기 하나만 쥐어줬으며 한 번 출동을 나가면 3, 4일은 기본으로 길에서 노숙을 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노숙자라고 생각해 먹을 것도 줬다고... 장비도 부족하여 죽도[52], 쇠파이프, 돌 같은 것을 스스로 구했다고 하나 실상은 시위현장에서 시위대가 버리고 간 것을 주워 썼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에서 문민정부로 바뀌면서 장비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고 상기 서술한 무기들은 불법진압도구라고 하여 쓰지는 않게 되었다.[53]
직원사복중대는 지원자를 모집해서 구성되었는데 대부분 장신, 유단자 위주로 경쟁률이 높았고 군필자가 대다수였다. 특히 특전사와 해병대 출신들이 많이 특채됐으며 명령에 복종하는 군대식 특성을 가진 전의경 기동대와는 다르게 보다 자율성 있는 진압을 실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문민정부 시절엔 전의경 신병들을 체력 테스트해서 성적 좋은 대원들을 모두 사복중대로 보냈다고 하니 체력 하나는 끝내주는 셈이었다.
또한 백골단은 내부적으로도 폭력 진압을 조장했으며, 대학이건 사업장이건 마구잡이 연행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었다. 이런 폭력적 강경 진압에 시위대도 가만있지 않고 대항하기 시작했는데 큰 역할을 하던 것은 녹두대나 오월대 같은 대항조직이다.[54] 캠퍼스에서 사복경찰이 학내 지도부를 검거하던 1960~1970년대에도 자구적으로 형성되었던 사수대가 있었지만 1980~1990년 이후, 그리고 유신정권과 신군부와의 투쟁에서 더욱 규모가 커지게 되었다. 검거하려는 백골단과 시위자를 지키려는 사수대의 규모는 경쟁적으로 커졌다. 사수대가 하도 강력하게 저항하다 보니 백골단도 나중에 가면 생명을 걸어야 할 정도가 되었는데 사수대를 검거하려다 역으로 두들겨맞고 부상당하거나 심하게는 살해되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다.#시위진압 중 사망한 전의경 순직자 명단#
백골단(사진 속 중대는 전남82중대)에 맞서는 녹두대의 패기. 뒤에 일반 시위대가 보인다. 장소는 광주광역시 조선대학교 정문 앞.
이들은 정복중대를 보조하여 기동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시위대를 밀어버리거나 검거하는 역할을 하였다.
당시 일반 전경부대가 1선에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다가 상황이 고조되면 명령에 의해서 양 옆쪽에서 백골단이 체포나 추격을 시도했고[48][49] 이렇게 되면 시위대는 도망가거나 다시 뭉쳐서 공격대형을 이루었는데 백골단이 시위대 중 앞에서 지휘하던 주동자들을 뛰어가 붙잡고 무자비한 구타를 시도하니 다들 주춤거리게 되고 더 이상 다가서지 못했다고 할 정도였다. 이렇게 되면 시위대들은 공포감에 몰입되어 패닉상태에 빠졌으며 특정 건물 등을 목표로 100m 간격을 두고 시위대를 붙잡고 밀어붙이는 무지막지한 진압을 시도하고 붙잡히면 반 죽음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공포의 부대였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간이 사다리 위에 올라간 기자를 날아차기해서 떨어뜨리거나, 집 안으로 도망간 학생을 문 부수고 들어가 머리잡고 끌고 나오기(남녀 가리지 않음), 출발하려는 지하철에 유리창을 깨고 난입해서 모조리 체포하기, 학교 안에 들어가서 도서관에서 멀쩡히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을 머리 잡고 끌고 나오기 등등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폭력성을 보였다. 이러한 폭력은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에게도 무자비하게 행해졌기 때문에 1990년 KBS 사태 당시 백골단 300명이 여의도 본사로 투입돼 조합원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해 117명을 연행한 바 있었다. 물론 군사정권 시기 정부와 언론의 묵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때로는 검거한 시위자들을 인근 경찰서로 연행하는 대신 멀리 떨어진 교외에 그대로 내버려 두고 가거나 현장에서 잔인하게 구타하고 내버려 두기도 했다.[50]
이들의 기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례로 상황시 방독면을 쓰고[51] 서울역에서 명동까지 구보할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허세가 조금 섞여 있기는 하겠지만, 목격담과 출신대원들의 고백도 있는 것으로 보아 완전히 허황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최루탄이 기본적으로 사용되던 당시에는 진압에 참여하는 거의 모든 중대가 방독면을 쓰고 구보를 하며 훈련하였고 2000년대 초반까지도 수도권 진압 선봉중대, 지방 선봉중대들은 훈련명목 또는 체벌로써 정화통까지 끼운 상태에서 방독면 구보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물론 떡실신했다. 서울역에서 명동역까지는 거리는 네이버 지도 기준으로 2.4㎞ 정도라고 한다. 대략 도보 30분 정도 거리다. 그런데 1998년 만도기계(현 대유위니아) 파업 이후 시위 진압에서 최루탄을 사용하지 않게 됨에 따라 막바지 백골단들은 방독면 착용을 하지 않았다.
물론 아무리 백골단이라고 해서 무적은 아니었다. 특히 초창기로 갈수록 백골단의 무장은 가벼웠고, 그만큼 무장 시위대와 정면으로 붙으면 크게 다칠 수 있었다. 그래서 백골단이 활약하기 위해선 정복중대가 확실하게 뒤를 받혀줘야만 했다. 다만 후기로 가면서 사복중대의 무장도 꽤 튼실해졌다.
사실 정부의 지원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초창기 장비는 무전기 하나만 쥐어줬으며 한 번 출동을 나가면 3, 4일은 기본으로 길에서 노숙을 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노숙자라고 생각해 먹을 것도 줬다고... 장비도 부족하여 죽도[52], 쇠파이프, 돌 같은 것을 스스로 구했다고 하나 실상은 시위현장에서 시위대가 버리고 간 것을 주워 썼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에서 문민정부로 바뀌면서 장비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고 상기 서술한 무기들은 불법진압도구라고 하여 쓰지는 않게 되었다.[53]
직원사복중대는 지원자를 모집해서 구성되었는데 대부분 장신, 유단자 위주로 경쟁률이 높았고 군필자가 대다수였다. 특히 특전사와 해병대 출신들이 많이 특채됐으며 명령에 복종하는 군대식 특성을 가진 전의경 기동대와는 다르게 보다 자율성 있는 진압을 실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문민정부 시절엔 전의경 신병들을 체력 테스트해서 성적 좋은 대원들을 모두 사복중대로 보냈다고 하니 체력 하나는 끝내주는 셈이었다.
또한 백골단은 내부적으로도 폭력 진압을 조장했으며, 대학이건 사업장이건 마구잡이 연행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었다. 이런 폭력적 강경 진압에 시위대도 가만있지 않고 대항하기 시작했는데 큰 역할을 하던 것은 녹두대나 오월대 같은 대항조직이다.[54] 캠퍼스에서 사복경찰이 학내 지도부를 검거하던 1960~1970년대에도 자구적으로 형성되었던 사수대가 있었지만 1980~1990년 이후, 그리고 유신정권과 신군부와의 투쟁에서 더욱 규모가 커지게 되었다. 검거하려는 백골단과 시위자를 지키려는 사수대의 규모는 경쟁적으로 커졌다. 사수대가 하도 강력하게 저항하다 보니 백골단도 나중에 가면 생명을 걸어야 할 정도가 되었는데 사수대를 검거하려다 역으로 두들겨맞고 부상당하거나 심하게는 살해되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다.#시위진압 중 사망한 전의경 순직자 명단#
백골단(사진 속 중대는 전남82중대)에 맞서는 녹두대의 패기. 뒤에 일반 시위대가 보인다. 장소는 광주광역시 조선대학교 정문 앞.
백골단은 여러모로 악명을 떨쳤는데 시위진압 중 1991년 4월 당시 명지대생이었던 강경대를 이들이 진압하면서 철근이 든 죽도와 쇠파이프로 때려죽이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악명을 떨쳤다. 당시 강경대는 시위대에서 사실상 낙오된 상황이었고 학교 담을 넘어 도주하던 중 백골단 5명에게 철근이 들어간 죽도와 쇠파이프로 두부를 구타당한 후 길거리에 버려졌으며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곧 사망하였다. 강경대를 살해한 백골단 대원들은 공판에서 반성은 커녕 오히려 강경대에게 있지도 않은 화염병 혐의를 뒤집어씌웠고 이에 분노한 민가협 회원들이 공판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강경대 치사사건’ 첫 공판서 유가협 울분 폭발, 자식을 가슴에 품은... 강경대 열사 아버지
강경대 사망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 와중에 5월 성균관대생 김귀정도 경찰에게 집단구타당해 사망했다. 그래서 성균관대 명륜캠퍼스엔 "김귀정 생활도서관"이라는 동아리가 지금까지 내려온다. 사후 김귀정의 유족이 백골단의 폭력진압으로 사망한 것으로 국가배상청구 소송을 걸었고 정부에서 거부했다가 대법원에서 공무원을 특정할 수 없더라도 국가배상을 인정할 수 있다고 판결하였다(95다23897)
1996년 3월 연세대 노수석도 일명 토끼몰이 진압 와중에 사망했다는 시위대 측의 주장이 있다.[55]
백골단에 의해서 사람이 죽는 일도 존재했기 때문에 중경상을 입는 경우는 다반사였다. 1980~90년대에 전교조 주도의 소위 '참교육 운동'을 전후해 발생한 '고등학생운동(이하 고운)' 활동[56]을 했던 고등학교 시위대도 있었는데 백골단에 의해서 진압된 고등학생 시위자의 어지간한 뼈마디가 모두 골절된 경우도 있었다지만 언론에는 안 나왔다고 한다.
1991년 5월 7일에 백골단은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57]의 빈소로 쳐들어가 영안실 벽을 깨부수고 박창수의 시신을 탈취하기도 했다.
1991년에 안양병원 영안실로 난입한 백골단들. 이들은 영안실 벽을 뚫어 박창수 노조위원장의 시신을 탈취해갔다.
강경대 사망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 와중에 5월 성균관대생 김귀정도 경찰에게 집단구타당해 사망했다. 그래서 성균관대 명륜캠퍼스엔 "김귀정 생활도서관"이라는 동아리가 지금까지 내려온다. 사후 김귀정의 유족이 백골단의 폭력진압으로 사망한 것으로 국가배상청구 소송을 걸었고 정부에서 거부했다가 대법원에서 공무원을 특정할 수 없더라도 국가배상을 인정할 수 있다고 판결하였다(95다23897)
1996년 3월 연세대 노수석도 일명 토끼몰이 진압 와중에 사망했다는 시위대 측의 주장이 있다.[55]
백골단에 의해서 사람이 죽는 일도 존재했기 때문에 중경상을 입는 경우는 다반사였다. 1980~90년대에 전교조 주도의 소위 '참교육 운동'을 전후해 발생한 '고등학생운동(이하 고운)' 활동[56]을 했던 고등학교 시위대도 있었는데 백골단에 의해서 진압된 고등학생 시위자의 어지간한 뼈마디가 모두 골절된 경우도 있었다지만 언론에는 안 나왔다고 한다.
1991년 5월 7일에 백골단은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57]의 빈소로 쳐들어가 영안실 벽을 깨부수고 박창수의 시신을 탈취하기도 했다.
1991년에 안양병원 영안실로 난입한 백골단들. 이들은 영안실 벽을 뚫어 박창수 노조위원장의 시신을 탈취해갔다.
- 영화 1987에서도 등장한다.
- 과거 백골부대, 즉 3사단 출신 장병들에게는 북한군과 함께 증오의 대상이었다. 부대의 명예인 백골의 이름을 더럽힌 겁쟁이 빨갱이 집단으로 규정함과 동시에 오죽하면 만나면 죽여버리고 싶다는 말을 하는 이들도 있었을 정도. 백골(白骨)로 애칭이 겹치다 보니 발생하는 유무형의 피해가 꽤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출타 중 3사단 부대마크인 졸리 로저를 보고 백골단 아니냐며 해코지를 당해 국군 3사단 소속 군인이라고 해명하느라 진땀을 뺀 장병들도 있었다는 일화가 종종 떠돈다. 경찰 기동복이 군복과 비슷한 국방색이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인 듯.[58]
- <실록 백골단> - 유인철 저. 영재출판사. 1991. 백골단 1기였던 저자가 자신의 경험담을 토대로 저술한 수기이다.
3. 라쳇 & 클랭크 시리즈의 등장 무기[편집]
자세한 내용은 라쳇 & 클랭크: 공구전사 리로디드/무기 및 도구 일람 문서 참고하십시오.
원래 이름은 따로 있지만, 업그레이드되면 이름이 테러리스트가 되기 때문에 번역 과정에서 1번 항목의 집단 이름을 따 왔을 거라고 추정하는 의견이 많았다.
[1] 땃벌은 함북 방언으로 땅벌을 의미한다. 즉, 서북청년단처럼 이북계 우익 청년단임을 암시하는 이름이다. 백골단보다 더 전투적이고 드센 어감 때문인지 21세기에도 한국판 돌격대, 우국기사단 류의 단체를 비판할 때 가끔 언급되는 이름이기도 하다.[2] 중봉(중형 진압봉)에 단봉을 엮은 것이다.[3] 다만 시위 이름과는 다르게 실제로 저 날 백골단이 해체된 건 아니다. 백골단은 후술하겠지만 2000년대 들어 시위의 양상이 변화하고 그에 따른 경찰의 진압 방식이 바뀌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4] 88 기동 순찰대 출범[5] 정확하게는 5000단위 의경사복제대의 출동 장면이다. 의경 사복제대의 경우 비슷한 시기의 전경사복중대가 평범한 경찰버스를 타고 다닌 것과는 달리 준중형버스를 이용했다.[6] 물론 경찰관들이나 현역 전의경 및 전역자들도 비공식적으로는 백골단이라는 말로 사복체포조를 지칭하기는 했다.[7] 사실 1985년 하반기 이전에도 각 지역에 사복체포조, 사복중대라고 불리는 기동부대들이 존재하긴했다. 다만 문서에서 설명하는 바와는 꽤나 다른 성격의 부대들이었던 것 같지만 이들 대부분이 1985~1986년 사이에 문서에서 말하는 형태의 사복중대로 바뀐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아예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8] 1~4기동대에 각각 2개 중대씩 존재했으며 96~98중대는 88올림픽 이후 증설된 부대다.[9] 다만 전경사복중대가 상대적으로 훨씬 자주 진압작전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직원사복중대들은 정말 큰 상황이 아니면 나서지 않았다고...[10] 공식적으로는 88올림픽기동순찰대라는 이름으로 1986년에 창설되었는데 일반 기동대와는 달리 부대번호가 5000단위였다. 위에 나오는 5150제대가 대표적인 의경사복제대로 동대문경찰서(현 혜화경찰서) 직속부대였으며 주로 성균관대학교와 대학로 부근을 담당했다고 한다.[11] 뿐만 아니라 80년대 후반부터 대간첩 작전을 목적으로 하는 작전전투경찰을 시위진압에 동원하는 것에 대하여 관련법 해석을 두고 문제제기가 많아 1989년부터 기동중대 대원들을 전경에서 의경으로 점진적으로 교체하고 있었는데 이 문제가 강경대 치사사건으로 다시 불거지면서 교체작업이 서둘러 완료된다. 법개정 등을 거쳐 "치안업무보조"라는 항목을 명시해 작전전투경찰(전경) 및 의무전투경찰(의경) 모두 시위진압 투입에 문제 소지를 없앰.[12] 80~89중대까지 10개 중대(1, 4기동대에 3개 중대, 2, 3기동대에 2개 중대씩)로 운영되었는데 앞서 말한 80단위 직원중대와의 관계는 불명이다.[13] 1994년 서울대에서 열린 5차범민족대회 당시 진압을 시도했다가 크게 실패한 후 서울청에서는 대대적인 기동대 개혁을 실시하였는데 그 개혁의 일환으로 의경사복중대가 창설되었다. 직원사복중대는 아무래도 직업경찰관들로 이루어졌다 보니 일부 상황에서 진압에 소극적으로 임하거나 돌발행동을 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는 말이 있다.[14] 반사복중대라고도 했다.[15] 연세대 사태 이후 사복중대로 전환되었다고 한다.#[16] 각 기동대당 1개 중대 정도씩 이동되었다.(8, 24, 37, 54중대 -> 75, 76, 77, 78중대) 또 사복중대 말고도 정복중대 중에서 13중대가 유일하게 이동되었다.(79중대)[17] 이후 현재의 제5기동단으로 바뀌었다.[18] 강원도와 충청북도, 그리고 제주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19] 8, 90년대에는 광주청이 없었기 때문에 전부 전남청 소속이었다.[20] 90년대 중후반부터 유명했던 중대들로 1994년을 전후로 창설되었다. 각각 2중대가 82중대로, 5중대가 83중대로, 8중대가 84중대로 전환되었고 2중대를 제외하면 정복중대들이었다. 3중대도 1996년 중순까지 정복중대였다. 참고로 직원으로 교체된 1중대도 81중대로 변경되었는데 82, 83, 84중대와는 달리 90년대 중후반에 해체되었다.[21] 특히 3중대는 중대 전체가 언제나 흑카바를 입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다.[22] 119중대나 149중대가 그러했다고 한다.[23] 실제로 사복중대 혹은 진사복중대라는 말과 개념은 2000년대 초중반까지 남아 있었고 화염병전담타격대와 같은 형식으로 운영되었다. 다만 각 지역에 남아있던 80단위 직원중대들은 1999년까지 모두 해체되었다.[24] 다만 이후에도 거북이 방패를 들거나 흑카바에 흰운동화를 착용하는 등의 차이가 있긴 했다.[25] 서울 기준으로 지방별로 차이는 존재한다. 부산, 전남 등 일부 지방은 2000년대 초반까지도 청바지, 청자켓을 입거나 특유의 헬멧을 착용하였다. 전남 84중대[26] 2005년 농민대회에서 농민 2명이 사망하면서 이전처럼 활동하지 못하게 되었다.[27] 영상 속 음성을 토대로 상설부대가 아니라 일단위(비상설중대) 직원들이라고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비상설중대는 교통/경무/형사 등 타 부서 경찰관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규모 시위와 같은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소집된다.[28] 사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 명령과 지휘계통이 다르면 통제할 권리가 없어서다. 타 지휘관이 도와달라고 해서 도와줬다가 일이 꼬였을 때 직속상관에게 깨지는 건 본인들이다.[29]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 문화개선 정책을 펴기 이전까지.[30] 창설 초기에는 진압검열 때 직원중대가 자꾸 삽질을 하자 옆에서 구경하던 전의경중대가 대놓고 놀려대서 시비가 붙은 일화도 있다. 이러한 평가는 촛불시위 당시 일부 경찰관기동대 직원들이 근무 중 당구장에 출입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며 심화되기도 했다.[31] 의무경찰 중대가 대형을 유지하며 시위자들을 저지하면 경찰관기동대가 체포조 역할을 하는 것이 창설 초기의 구상이었다. 다만 변수가 많은 현장 특성상 이것이 얼마나 지켜졌는지는 불명.[32] 2022년 기준으로 의무경찰 폐지로 인해 신규대원 선발이 중단되면서 대부분의 중대가 통/폐합되었다. 광역시단위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대원중대가 완전히 사라진 경우도 있었으며, 그나마 있는 부대들도 교통전담중대 등으로 전환되곤 했다.[33] 이전에도 개인적으로 혹은 중대 자체적으로 바이저를 없애고 다니거나 방석모용 철망을 붙이는 경우가 있었다.[34] 주로 대외적인 이미지 때문이었다. 백골단을 상징하는 것은 특유의 오토바이 헬멧이다 보니 헬멧 자체에도 안 좋은 이미지가 붙었다.[35] 머리에 부상을 당한 경찰이 피를 흘리며 부축받는 장면이다.[36] 서울로 한정한다면 사복중대들은 전부 이 헬멧을 썼다고 봐도 무방하다.[37] 여름철에는 일명 중대티라고 해서 중대 자체적으로 반팔 남방이나 티 종류를 맞춰 입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사실 모든 중대들이 그러하였으며 오늘날 각 기동대, 기동중대들도 마찬가지이다.[38] 2000년대 이후로는 진사복이라고 불리기도 했다.[39] 1997년 이전까지는 왼쪽가슴의 경찰마크가 없고 앞섬도 벨크로가 아니라 똑딱이로 여미는 형식이었다.[40] 각반의 무릎 부분과 발목부분은 접어 버리고 착용하는 일도 많았다.[41] 이건 일반 진압복(일명 완전진압복, 완진)도 마찬가지다.[42] 나중에 1기동대의 몇몇 정복중대들은 아예 전원 간이진압복을 착용하기도 했다.(1997년 상반기 한때 3중대는 정복 중대이면서도 전원 간진+사복 헬멧 착용)[43] 비슷하게 사복헬멧도 정복중대 고참이나 직원들이 쓰고 다니기도 했으며 아예 앞서 말한 1기동대 내에 정복중대에서는 봉조는 사복헬멧을, 방패조는 일반 방석모를 착용하기도 했다.[44] 사진속 경찰들은 1기동대 직원사복중대원들이다. 이 시기에는 서울에선 직원사복중대만 운영하였다[45] 백골단의 강압적 진압에 대한 자구책으로 생긴 현상이라는 말도 있다.[46] 이 시기부터 진압봉이 점점 길어진다.[47] 1990년경에 좀 더 길어진 진압방패가 사용되었다. 1994년에 전환된 의경중대들은 원래 정복중대였기 때문에 기존에 쓰던 것을 사용한 것이다.[48] 전형적인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기병대'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49] 보통 다탄두 발사기나 최루탄 발사기를 통한 최루탄 발사를 신호로 돌격이 이루어졌다.[50] 만신창이가 된 부상자를 길가에 버려둠으로써 학생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려는 의도였다. 영화 1987에도 등장하는 장면이다.[51] 정화통을 빼고 달리지 않았다. 최루가스가 만개해 정화통을 끼고 뛰었다.[52] 안에다 철심을 박아넣어서 보강하는 경우가 많았다.[53] 물론 문서 상단의 편곤처럼 사제무기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54] 비슷한 사례로 노조도구사대에 대항키 위해 '파업자위대'를 두었다.[55] 그러나 노수석은 부검 결과에서 사인은 선천성 심장이상이었음이 확인되었으며 이후 유족이 노수석의 머리에 부상의 흔적이 있다고 과잉진압에 의한 사망임을 주장했지만 1999년의 민·형사소송에서도 경찰의 과잉진압과 노수석의 사망간에는 인과관계가 없으므로 유족 측이 패소하였다.[56]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오름> 2006년 제10호, 2016년 7월 시사in 기사도 참고할 것.[57] 1981년부터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하여 줄곧 한진중공업에서 일하다가 1987년부터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에 가입하여 3년간 노조 내 회계감사로 일하다가 1990년에 노조위원장으로 선출하고 이듬해에 부산노련 부의장 겸 전노협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처우 개선이라는 명분하에 1991년 2월 대우조선 투쟁지원 연대회의에 참석하다 경찰에 의해 '제3자 개입금지 위반'으로 구속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고 그해 4월에 있었던 강경대 구타치사 사건에 항의하며 단식투쟁을 벌이다가 의문의 부상을 당해 안양병원에 입원했고 5월 6일 안양병원 마당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당시 사인은 단순 비관자살로 판명되었지만 유족들은 반발했고 13년 뒤인 2004년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하여 안기부가 개입했다는 설이 있으나 자료 및 증거불충분으로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론나게 되었다. 그러나 사망 다음날 빈소에서 시신을 탈취한 것을 보면... 그나마 당국의 노조탄압 속에 의문사를 당한 점을 인정하여 2014년에는 '민주화운동 관련 사망자'로 인정되었다.[58] 여담이지만 전/의경들이 휴가를 나갈 때 사복을 입게 된 이유도 시위 참가자로부터 구타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떠돈다. 악명이 높은 만큼 원한도 많아지는 것은 당연지사기도 하고. 규정상 기동복이 원칙이나 병원진료를 목적으로 한 외출이 아닌 이상 모든 부대가 사복으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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