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무공훈장 수훈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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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규 朴魯珪 | |
출생 | |
사망 | |
학력 | |
계급 | 준장[1] |
복무 기간 | 1946~1951 |
대한민국의 군인이다.
임실군 둔남면출신으로 소학교를 졸업하고 가난한 형편으로 인해 생업에 종사하다가 중일전쟁 당시 을종간부후보생으로 입대한 전적이 있다. 광복이후 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졸업과 동시에 육군 참위로 임관했다. 초임은 재정관이였으나 야전 지휘를 희망해 제4연대 작전장교로 임명되어 여순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내려갔었다. 순천을 탈환하고 여수로 진격하여 목표를 탈환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오른쪽 어깨에 총상을 당해 1개월 동안 병원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 교무처장을 거쳐 1949년 6월 수도경비사령부 작전참모, 1950년 1월 옹진전투사령부 작전참모로 임명되어 한국 전쟁을 앞두고 북한군과 여러번 국지전을 치렀다. 육군보병학교 고군반을 수료하고 1950년 5월 중령으로 진급해 제6보병사단 2연대 1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춘천-홍천 전투, 강릉 전투에 참가했으며 지연전에 투입되다가 문경에 있는 이화령에서 북한군과 전투를 벌였다. 북한군 제1사단의 맹공을 받고 2, 3대대가 퇴각했지만 그가 있는 1대대는 파상공세를 버티고 백병전까지 펼치며 진지를 사수했다. 이후 급하게 재편성된 2, 3대대가 합류해 북한군에게 연풍까지 역공세를 가해 800명을 사살했다. 전투 후 전사한 자신의 부하를 업히고 북한군, 아군 모두 매장했다.
이후 대령으로 진급했고 제2보병사단 31연대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2보병사단장은 1951년 2월 28일 후방에 침투해 경북에서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던 북한군 제10사단을 포위섬멸하기로 결심하고 북한군의 예상 통로 일월산 부근을 차단하도록 명령하였다. 제31연대는 명령에 따라 병참선을 경계하던 일월산 남서쪽의 장갈령을 차단하였다. 제31연대는 1951년 3월 1일 새벽에 북한군을 기습 공격하여 많은 피해를 입혔다. 동시에 보현산 일대에서 일월산 남쪽으로 이동한 제17연대와 제32연대도 3중 차단선을 설치하여 일월산 일대를 차단하였는데, 북한군 제10사단은 800명과 400명으로 2개조를 편성하고 차단선 돌파를 시도하였다. 이에 3월 5일부터 제2사단은 전 병력을 투입하여 5일간 일월산-통고산으로 적을 추격하였다.
이 당시 박노규는 장갈령에 있다가 임무 변경으로 1951년 3월 3일 경북 봉화군 소천면 일월산 일대에서 아군 보급로 확보에 주력하였다. 그러다가 북한군 병력 1,500명이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해 진지를 돌파하려 하자 한 손에 권총을 빼어들고 진두지휘했다. 그러나 북한군 총탄이 박노규의 복부를 관통하고 이어 3발의 총탄이 손과 복부에 명중함으로써 현장에서 즉사했다. 이 당시 제3대대장 이오열 중령도 함께 전사했다.
그해 준장으로 추서되었고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으며 국립서울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 교무처장을 거쳐 1949년 6월 수도경비사령부 작전참모, 1950년 1월 옹진전투사령부 작전참모로 임명되어 한국 전쟁을 앞두고 북한군과 여러번 국지전을 치렀다. 육군보병학교 고군반을 수료하고 1950년 5월 중령으로 진급해 제6보병사단 2연대 1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춘천-홍천 전투, 강릉 전투에 참가했으며 지연전에 투입되다가 문경에 있는 이화령에서 북한군과 전투를 벌였다. 북한군 제1사단의 맹공을 받고 2, 3대대가 퇴각했지만 그가 있는 1대대는 파상공세를 버티고 백병전까지 펼치며 진지를 사수했다. 이후 급하게 재편성된 2, 3대대가 합류해 북한군에게 연풍까지 역공세를 가해 800명을 사살했다. 전투 후 전사한 자신의 부하를 업히고 북한군, 아군 모두 매장했다.
이후 대령으로 진급했고 제2보병사단 31연대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2보병사단장은 1951년 2월 28일 후방에 침투해 경북에서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던 북한군 제10사단을 포위섬멸하기로 결심하고 북한군의 예상 통로 일월산 부근을 차단하도록 명령하였다. 제31연대는 명령에 따라 병참선을 경계하던 일월산 남서쪽의 장갈령을 차단하였다. 제31연대는 1951년 3월 1일 새벽에 북한군을 기습 공격하여 많은 피해를 입혔다. 동시에 보현산 일대에서 일월산 남쪽으로 이동한 제17연대와 제32연대도 3중 차단선을 설치하여 일월산 일대를 차단하였는데, 북한군 제10사단은 800명과 400명으로 2개조를 편성하고 차단선 돌파를 시도하였다. 이에 3월 5일부터 제2사단은 전 병력을 투입하여 5일간 일월산-통고산으로 적을 추격하였다.
이 당시 박노규는 장갈령에 있다가 임무 변경으로 1951년 3월 3일 경북 봉화군 소천면 일월산 일대에서 아군 보급로 확보에 주력하였다. 그러다가 북한군 병력 1,500명이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해 진지를 돌파하려 하자 한 손에 권총을 빼어들고 진두지휘했다. 그러나 북한군 총탄이 박노규의 복부를 관통하고 이어 3발의 총탄이 손과 복부에 명중함으로써 현장에서 즉사했다. 이 당시 제3대대장 이오열 중령도 함께 전사했다.
그해 준장으로 추서되었고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으며 국립서울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었다.
- 2020년 2월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었다.
[1] 추서 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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