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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랄라 유사프자이 - 나무위키

말랄라 유사프자이

최근 수정 시각:
말랄라 유사프자이
Malala Yousafzai
말랄라
언어별
성명
ملاله یوسفزۍ (파슈토어)
ملالہ یوسفزئی (우르두어)
출생
국적
직업
사회운동가, 前 블로거
학력
에지배스턴 고등학교 (졸업)
옥스퍼드 대학교 (PPE / 학사)
경력
UN 평화대사 (2017.4. ~)
수상
필라델피아 자유메달 (2014)
세계어린이상 (2014)
노벨평화상 (2014)
배우자
아세르 말리크 (2021년 결혼)
종교
링크
인스타그램 아이콘

1. 개요2. 생애3. 평가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키스탄 북부 스와트밸리 출신의 여성 교육 운동가이자 최연소 노벨상 수상자.

2. 생애[편집]

말랄라의 아버지 지아우딘은 엄청나게 진보적인 교육자로서 말랄라가 태어났을 때 기뻐했다.[1] 심지어 족보에 파란 잉크로 이름을 기재했는데, 아들이 아니면 족보에 잘 기재하지 않는 이 지역에서 그랬다는 건 성차별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이걸 뭐라고 하던 친척들에게 당당하게 대꾸하였으며, 남동생들에게도 말랄라를 차별하지 않도록 가르쳐왔다. 교육자이기도 한 아버지는 남녀공학 학교까지 운영하며 여자에게도 교육 받을 기회를 줘야 하며, 타 종교를 억압하지 말고 공존을 인정해야 한다는 개념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말랄라가 가진 사상과 생각 역시 개방적인 아버지 영향이 큰 건 당연하다. 하지만 문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이 세력을 넓히면서 파키스탄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드러났다. 말랄라의 가족은 파키스탄 북부 지방에 거주 중이었기 때문에 아버지 또한 탈레반에게 비난을 받고, 학교도 심심치 않게 테러를 당해야 했다.

말랄라도 아버지에게 교육을 받았지만, 탈레반이 자신이 사는 곳을 망쳐놓고 여성의 인권을 짓밞는 것을 보고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는데, 당시 11살이었던 말랄라는 자기 목소리를 냈다. 2009년 1월, 영국 공영방송 BBC우르두어 블로그에 '굴 마카이'라는 필명으로 탈레반 정권 아래에서의 삶과 그들이 억압한 여성들에 대해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말랄라의 글은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분노를 느끼기 시작한 탈레반이 2011년 12월에 제1회 파키스탄 청소년평화상을 수상한 뒤의 말랄라에게 살해 협박을 했는데, 말랄라는 개의치 않고 용감하게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갔다.

그러나 탈레반의 살해 협박은 그대로 실현되었는데 2012년 10월 9일, 말랄라는 하굣길 스쿨버스 안에서 갑자기 들이닥친 탈레반 병사에게 총을 맞았다. 말랄라의 기억에 따르면, 한 남자가 운행 중이던 스쿨버스를 멈춰 세우고 버스에 올라타서 "여기서 누가 말랄라냐?"라고 묻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전부 쏘겠다"고 하자, 그녀는 신원을 밝혔고, 그 남자는 곧바로 말랄라에게 다가와서 총을 쐈다고 한다. 이때 그녀가 맞은 총알은 이마와 얼굴, 그리고 목을 관통해 척추 근처 어깨에 박혔는데[2] 현지 병원으로 옮겨진 말랄라는 부어오른 뇌 때문에 두개골 일부를 들어내는 수술을 받았고[3], 집중 치료를 위해 10월 15일 영국 버밍엄의 퀸 엘리자베스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아버지는 당시 인터뷰에서 "우리 딸이 장한 겁니다. 정말 장한 겁니다. 망할 광신도, 아니 이슬람을 더럽히는 쓰레기들은 이런 어린 소녀에게도 총을 들이대면서 세계에서 자기 이름을 다시 더럽게 알렸군요."라며 통곡했다.

이후 탈레반은 말랄라가 살아난다면 그녀와 아버지 모두 죽일거라고 공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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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원 당시의 말랄라
이후 2013년 1월에 무사히 퇴원했다. 단, 신변 위협[4] 때문에 그녀와 그녀의 가족, 아버지를 옹호하던 친척 몇몇은 모두 고국인 파키스탄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영에 체류 중이다. 아버지 지아우딘은 버밍엄 주재 파키스탄 영사관에서 교육 담당관으로 일하고 있다. 이후 말랄라는 유엔(UN) 본부 단상에 선 것을 비롯해 다양한 매체와의 인터뷰와 연설 및 말랄라 펀드 조성을 통해 파키스탄은 물론 시리아, 나이지리아, 케냐 등 저개발 국가 어린이들의 교육권 보장을 위한 운동을 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와 만나서 파키스탄에 민간인이 무인기 공격에 휩쓸려 죽기 때문에 멈춰달라고 하였다.

노벨평화상 수상 당시에 오전 10시 화학 수업에서 구리 전기분해를 배우던 도중에 선생님을 통해 수상 소식을 처음 전해들었다. 말랄라는 수상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곧바로 물리 수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2017년 7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옥스퍼드 대학교의 레이디 마가렛 홀으로부터 조건부 합격 통지를 받아 PPE[5] 전공으로 입학했다.# 2020년 6월에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졸업했다.#

2018년 3월 31일에는 탈레반의 총격 6년만에 파키스탄을 방문하여 고향인 스와트밸리에 도착했다.#

캐나다 명예 시민권을 받았다.

2021년 3월에는 애플과 파트너십을 맺고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로 했다.#

파슈토어, 우르두어, 영어가 유창하다.[6]

CNN이 말랄라 유사프자이가 7월호 영국 보그의 커버걸이 됐다고 보도했다.#

탈레반 점령 이후 아프간 언론사 TOLO NEWS와 인터뷰를 가졌다.#

2021년 11월에 파키스탄 크리켓 위원회의 경기력 향상센터 단장 아세르 말리크와 결혼했다.#

2023년 개봉한 파키스탄 영화 '조이랜드'에 총괄 제작자로 이름을 올렸다.

2024년 개봉한 미국 다큐멘터리 영화 '마지막 해녀들'에 제작자로 이름을 올렸다.

3. 평가[편집]

여성인권이 보편화된 지역에선 훌륭한 평가를 받는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총을 맞아 죽을뻔 했고 신변 위협을 받고 있는데도 계속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니 높은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다.

단, 탈레반을 대하고 살아야 하는 서북부 파키스탄 현지에서 유사프자이에 대한 평가는 호불호가 갈린다. 한쪽은 위에 나온 서술대로의 평가, 다른 평가는 계집 주제에 괜히 삽질해서 공동체에 모욕을 주었다는 평가인데, 이 지역에선 후자가 압도적이다. 왜냐면 워낙 성차별이 심한 지역이라서 아직도 여성의 권리가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 다만 그들을 무조건 욕할 수도 없는데, 스와트밸리 주는 아프가니스탄에 가까운 만큼 탈레반이 극성을 부리니 그녀를 지지해도 내색하지 못하고 욕하며 탈레반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도 꽤 많다.《내가 말랄라를 싫어하는 이유》라는 글이 남존여비 / 가부장적 사고방식에 갇힌 후자의 의견을 풍자적으로 비판하고 있다.[7]

그리고 류샤오보에 대한 중국 당국의 처사를 비난한 것에 대해서 중국 매체들이 '''그녀는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고 믿겠지만 서방 언론이 그런 언급을 하도록 구체적으로 요구한 것이며 그녀는 도구로 쓰였을 뿐"이라며 평가절하하고 있다.# 그리고 이후 중국 정부는 202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공세 당시 탈레반 정권을 승인, 지지하였다.

말랄라에 대한 다수 여론이 좋지 않은 파키스탄이지만, 정부 차원에서 그녀를 비판한다거나 탄압하지는 않는다. 파키스탄 정부의 성향은 탈레반과 다르고[8] 국제 여론의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이기 때문. 만에 하나라도 그녀가 탈레반이나 다른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지면 파키스탄 정부는 탈레반 문제 때문에 골치가 아파진다.

파키스탄과 앙숙지간인 인도 정부는 말랄라 유사프자이를 칭찬하는 성명을 낸 적이 있다.

하지만 현재 그녀는 고향으로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가도 탈레반과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 위험으로 인해 신변이 안전하지 못하며, 부패한 파키스탄 정부가 그들을 제대로 보호하리라는 보장이 없다.[9]

4.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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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미 유수프
셰이크 압둘라흐만 알수다이스

[1] 말랄라의 자서전《나는 말랄라》에 따르면 자국인 파키스탄을 "아들을 낳으면 축포를 쏘고, 을 낳으면 커튼 뒤에 숨기는 나라"라고 표현하며 비판했다. 하지만 아버지 지아우딘은 말랄라가 태어난 걸 기뻐하였고, 말랄라도 "정말 우리 아버지 같은 분에게 태어나서 내가 축복을 받았다"라면서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밝혔다.[2] 총 3발. 출처[3] 두개골 조각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뱃속에 집어넣었다고 함.[4] 그녀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학교까지 아예 탈레반의 대대적인 테러를 당하며 무참히 부서졌다.[5] 철학·정치학·경제학[6] 출처는 영어 위키백과[7] 다른 이유도 있는데, 바로 탈레반이 이 지역 주민들에게 복수한답시고 총이라도 쏴대면 그야말로 눈 떠보니 알라 옆에 와있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8] 애초에 근본 자체가 다르다. 파키스탄의 국부모하마드 진나이슬람 모더니즘을 제창하며 비(非) 무슬림을 차별하지 말 것을 주장했고,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파키스탄 정부도 근본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 이슬람주의가 득세하는 바람에 정책이 뒤집어졌지만 전 국민이 존경하는 진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를 수는 없는 모양인지 탈레반에 비해 세속적인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덕에 유사프자이가 살던 서부에 비하면 정부의 통제가 어느정도 이루어지고 있고 파키스탄의 주요 대도시들이 몰려있는 동부 지역은 세속주의 성향이 강하며 이때문에 대놓고 여성들이 히잡을 안쓰고 서구식 복장과 화장을 하고 다니거나 음주나 흡연하는 사람들도 꽤 보이는 편이다.[9] 이미 정부기관이라는 ISI부터 탈레반과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는 마당에 다른 조직이라고 괜찮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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