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의 협화어에 대한 내용은 협화어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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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어 ᠮᠠᠨᠵᡠ ᡤᡳᠰᡠᠨ[1] | Manju gisun Manchu language | ||
유형 | ||
어순 | 주어-목적어-동사 (SOV) | |
서자방향 | 좌종서(왼쪽부터 세로쓰기) | |
문자 | ||
주요 사용 지역 (또는 공용어 지정 국가) | ||
원어민 | 6명 제2언어 이용자 1000명 이상 (2017) | |
계통 | ||
언어 코드 | ISO 639-2 | mnc |
ISO 639-3 | mnc | |
글로톨로그 | manc1252 |
ᠨᠠᠮᡠ ᡠᡳᡴᡳ᠈ ᠰᡠᠸᡝᠨᡳ ᡨ᠋ᠠᡵᡳᡵᡝ ᠰᠠᡵᠠᠰᡠ ᡳ ᠮᠣᠣ᠈᠈
namu uiki, suweni tarire sarasu i moo.
(나무 우이키, 수워니 타리러 사라수 이 모오.)
나무위키, 여러분이 가꾸어 나가는 지식의 나무.
이전의 역사는 여진어 참조.
여진족들은 만주에 있을 당시 언어기록이 거의 없다시피했다. 비록 금나라 시기 여진 문자가 있었으나 한화 및 금의 멸망으로 사멸하였고, 이후 원-명의 영향을 받아 몽골 문자와 한자를 조금씩 쓰긴 했지만 그 양이 많지 않다. 하지만 조선은 그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여진어를 할 수 있는 역관을 양성했고, 관련 기록도 많이 남겼다.
17세기 초,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만주족으로 정체성을 재정의하고, 몽골 문자를 개량해 만주 문자를 만들었다. 그때부터 만주족은 기록문화를 시작했으나, 미처 이것이 확립되기도 전에 입관하여 중국 대륙을 장악하면서 문화적으로 월등히 수준이 높은 한족을 지배하게 되었다. 만주족은 대륙을 장악한 후 만주어, 한어(漢語) 및 몽골어를 공식언어로 지정하고, 모든 공식 문서에 만주어-한어를 같이 쓰도록 했다.
청 정부는 관학을 세워 만주어를 가르치고 관리등용 시험 때도 만주어를 요구했다. 특히 만주인이 문관이 되려면 반드시 만주어와 몽골어의 번역 시험을 보도록 했다. 공식 문서는 만주어가 원본이 되었고 그것에 한어를 덧붙였는데, 이러한 형식의 문서를 만한합벽(滿漢合璧)이라 한다. (그래서 지금도 자금성에 가면 한자와 만주 문자가 함께 적혀 있는 현판을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수백만 인구의 만주족이 만리장성 이남의 1~2억 인구를 가진 한족을 지배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압도적인 한어의 언어환경 때문에 점점 지배층들도 만주어를 잊기 시작한 것이다. 지배층이 되면서 학식을 갖기 위해 한족 학자들을 데려다가 한문을 배우며 공자왈 맹자왈 하기도 하고, 한족 시종이나 부하들을 여럿 거느리고, 한족 여성을 처첩으로 두고 통혼하여 혼혈하다보니 점차 중국화되어 결국은 중국어가 일상어의 자리를 차지했다. 여기에 강희제가 강희자전을 편찬하면서 청 황실 내에서도 한어의 사용을 허가했고, 황실까지 중국어가 상용되게 된다.[7]
보다 구체적으로 보면, 18세기 건륭제 연간에 이미 황자들도 만주어에 서툴러 만주어를 잘하는 것이 차기 대권구도 예측에서 강점으로 여겨지고[8], 열하일기에도 건륭제가 조선인 역관에게 만주어를 할 줄 아는지 물었다가 약간 할 줄 안다는 만주어 대답을 듣자 기뻐했다는 썰이 전해질 정도다. 그러나 건륭제는 정복 전쟁을 위해 팔기군을 제법 빡세게 굴리는 자칭 십전노인(...)이었고, 이런 팔기군 내의 군사언어로서라도 만주어는 여전히 청나라의 국어이자 기인과 고관들의못하면 망신살 뻗치는 기본소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준가르를 정복한 만주족 장수인 오야 조혜에 관련된 일화도 전해져 온다. 건륭제는 그를 추켜세워준다고 과거 시험의 최종예선 내지는 본선 조별리그 격인 베이징 회시의 감독관으로 앉혔는데, 정작 당사자는 스스로를 '글도 모르는 까막눈'이라며 사양하였음에도 건륭제는 끝까지 억지로 밀어주었다. 물론 고위 지휘관이 정말 아무 글자도 모르는 문맹이었다기보다는 한어한문보다 만어만문에 더 익숙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강건성세의 만주족들은, 주로 군사 분야에서의 능력과 실적이 담보된다면 만어만문만 잘해도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9]
마찬가지로 건륭제 시절, 만주족의 본거지였던 성경 출신 만주족 관리가 베이징으로 와서 건륭제를 알현하게 되었는데, 한화된 베이징 출신 만주족이 아니라 알짜배기 동족출신 만인 관리가 출사함을 기쁘게 여긴 건륭제가 만주어로 이야기했으나 이 순혈 만주족 관리가 못 알아듣자 상당히 실망했다.
다만 이 이야기를 만주어의 쇠퇴로 해석하지 않고 만주어 방언의 '분화'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중국어의 지역별 방언은 그 편차가 사실상 서로 다른 언어 수준인데, 순치 및 강희 연간부터 전국 각지의 팔기주방에 정착한 만인들이 구사하던 만어도 시간이 지날수록 지역 한족들의 방언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기 뚜렷한 차이를 보였을 것이다. 이 추정을 근거로, 학자들은 베이징식 만주어를 구사하던 황제 및 중앙정계 귀족들과 묵던식 만주어를 구사하던 신하의 만주어가 특히 입말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여 서로 간에 쉬이 통하지 않았으리라고 분석한다. (실제로 전국 각지의 청나라 관리들이 쓰던 근고한어 관화도 민족을 불문하고 모어와 별개로 익힌 언어였으므로, 만주어 역시 베이징·만주·각 지역 주방 등 지역이라던가 포의·하급군인·팔기한군 등 계층에 따라 크게 나뉘었으리라는 추정이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팔기군 역시 삼번의 난 이후로는 녹영과 혼성부대를 이루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한인은 맘대로 드나들지 못하는 만주에서 나고 자란 만주인 관료들도 건륭제가 만주어로 물을 때 우물쭈물 더듬거리며 대답은 한어한문으로 하곤 했다는 기록을 보면, 건륭 후반기에는 만주인들 사이에서도 만어보다 한어를 제1언어로 쓰는 경우가 점점 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건륭제는 나이가 들수록 의식적으로 만인 관료에겐 일부러 만주어로 우선 하문하고 못하면 갈구는(...) 등 만주어 사용을 장려하며 심지어는 만주어 연구자들을 동원하여 만주어 진흥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이미 18세기 건륭제 시기에 중국을 다녀온 조선 사신들이 만주어가 사라져가는 현상을 목격했고, 만주족이 입관 후 100년이 지나니 이제는 한족과 구별할 수 없다는 기록을 남겼다. 정조 시절 베이징에 사신으로 갔다온 박지원이 남긴 열하일기에서도, 그간 야만인이라고 무시하던 만주족이 입관 후에는 상당히 세련되고 예의바르다고 칭찬하면서도 만주어를 하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진족들은 만주에 있을 당시 언어기록이 거의 없다시피했다. 비록 금나라 시기 여진 문자가 있었으나 한화 및 금의 멸망으로 사멸하였고, 이후 원-명의 영향을 받아 몽골 문자와 한자를 조금씩 쓰긴 했지만 그 양이 많지 않다. 하지만 조선은 그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여진어를 할 수 있는 역관을 양성했고, 관련 기록도 많이 남겼다.
17세기 초,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만주족으로 정체성을 재정의하고, 몽골 문자를 개량해 만주 문자를 만들었다. 그때부터 만주족은 기록문화를 시작했으나, 미처 이것이 확립되기도 전에 입관하여 중국 대륙을 장악하면서 문화적으로 월등히 수준이 높은 한족을 지배하게 되었다. 만주족은 대륙을 장악한 후 만주어, 한어(漢語) 및 몽골어를 공식언어로 지정하고, 모든 공식 문서에 만주어-한어를 같이 쓰도록 했다.
청 정부는 관학을 세워 만주어를 가르치고 관리등용 시험 때도 만주어를 요구했다. 특히 만주인이 문관이 되려면 반드시 만주어와 몽골어의 번역 시험을 보도록 했다. 공식 문서는 만주어가 원본이 되었고 그것에 한어를 덧붙였는데, 이러한 형식의 문서를 만한합벽(滿漢合璧)이라 한다. (그래서 지금도 자금성에 가면 한자와 만주 문자가 함께 적혀 있는 현판을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수백만 인구의 만주족이 만리장성 이남의 1~2억 인구를 가진 한족을 지배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압도적인 한어의 언어환경 때문에 점점 지배층들도 만주어를 잊기 시작한 것이다. 지배층이 되면서 학식을 갖기 위해 한족 학자들을 데려다가 한문을 배우며 공자왈 맹자왈 하기도 하고, 한족 시종이나 부하들을 여럿 거느리고, 한족 여성을 처첩으로 두고 통혼하여 혼혈하다보니 점차 중국화되어 결국은 중국어가 일상어의 자리를 차지했다. 여기에 강희제가 강희자전을 편찬하면서 청 황실 내에서도 한어의 사용을 허가했고, 황실까지 중국어가 상용되게 된다.[7]
보다 구체적으로 보면, 18세기 건륭제 연간에 이미 황자들도 만주어에 서툴러 만주어를 잘하는 것이 차기 대권구도 예측에서 강점으로 여겨지고[8], 열하일기에도 건륭제가 조선인 역관에게 만주어를 할 줄 아는지 물었다가 약간 할 줄 안다는 만주어 대답을 듣자 기뻐했다는 썰이 전해질 정도다. 그러나 건륭제는 정복 전쟁을 위해 팔기군을 제법 빡세게 굴리는 자칭 십전노인(...)이었고, 이런 팔기군 내의 군사언어로서라도 만주어는 여전히 청나라의 국어이자 기인과 고관들의
준가르를 정복한 만주족 장수인 오야 조혜에 관련된 일화도 전해져 온다. 건륭제는 그를 추켜세워준다고 과거 시험의 최종예선 내지는 본선 조별리그 격인 베이징 회시의 감독관으로 앉혔는데, 정작 당사자는 스스로를 '글도 모르는 까막눈'이라며 사양하였음에도 건륭제는 끝까지 억지로 밀어주었다. 물론 고위 지휘관이 정말 아무 글자도 모르는 문맹이었다기보다는 한어한문보다 만어만문에 더 익숙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강건성세의 만주족들은, 주로 군사 분야에서의 능력과 실적이 담보된다면 만어만문만 잘해도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9]
마찬가지로 건륭제 시절, 만주족의 본거지였던 성경 출신 만주족 관리가 베이징으로 와서 건륭제를 알현하게 되었는데, 한화된 베이징 출신 만주족이 아니라 알짜배기 동족출신 만인 관리가 출사함을 기쁘게 여긴 건륭제가 만주어로 이야기했으나 이 순혈 만주족 관리가 못 알아듣자 상당히 실망했다.
다만 이 이야기를 만주어의 쇠퇴로 해석하지 않고 만주어 방언의 '분화'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중국어의 지역별 방언은 그 편차가 사실상 서로 다른 언어 수준인데, 순치 및 강희 연간부터 전국 각지의 팔기주방에 정착한 만인들이 구사하던 만어도 시간이 지날수록 지역 한족들의 방언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기 뚜렷한 차이를 보였을 것이다. 이 추정을 근거로, 학자들은 베이징식 만주어를 구사하던 황제 및 중앙정계 귀족들과 묵던식 만주어를 구사하던 신하의 만주어가 특히 입말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여 서로 간에 쉬이 통하지 않았으리라고 분석한다. (실제로 전국 각지의 청나라 관리들이 쓰던 근고한어 관화도 민족을 불문하고 모어와 별개로 익힌 언어였으므로, 만주어 역시 베이징·만주·각 지역 주방 등 지역이라던가 포의·하급군인·팔기한군 등 계층에 따라 크게 나뉘었으리라는 추정이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팔기군 역시 삼번의 난 이후로는 녹영과 혼성부대를 이루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한인은 맘대로 드나들지 못하는 만주에서 나고 자란 만주인 관료들도 건륭제가 만주어로 물을 때 우물쭈물 더듬거리며 대답은 한어한문으로 하곤 했다는 기록을 보면, 건륭 후반기에는 만주인들 사이에서도 만어보다 한어를 제1언어로 쓰는 경우가 점점 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건륭제는 나이가 들수록 의식적으로 만인 관료에겐 일부러 만주어로 우선 하문하고 못하면 갈구는(...) 등 만주어 사용을 장려하며 심지어는 만주어 연구자들을 동원하여 만주어 진흥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이미 18세기 건륭제 시기에 중국을 다녀온 조선 사신들이 만주어가 사라져가는 현상을 목격했고, 만주족이 입관 후 100년이 지나니 이제는 한족과 구별할 수 없다는 기록을 남겼다. 정조 시절 베이징에 사신으로 갔다온 박지원이 남긴 열하일기에서도, 그간 야만인이라고 무시하던 만주족이 입관 후에는 상당히 세련되고 예의바르다고 칭찬하면서도 만주어를 하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19세기 가경제, 도광제, 함풍제 등 황제들은 청나라 말기 각종 대 변혁에 시달리며 한가하게(?) 정체성 확립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동치 연간 양무운동을 계기로 한인 신사층들이 중용되며, 사실상 한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여 만어를 잘 못해도 공무 및 일상생활에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설상가상으로 서태후 시대에는 아예 만한합벽의 원칙을 폐지하고 만주족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자금성에서도 한어만 사용하게 되었으며, 최후반에는 만주족 황제조차도 만주어를 모르는 지경이 되었다.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의 모어도 한어였으며, 그의 자서전에서는 옛날 공부할때 만주어 성적이 가장 나빴다는 언급이 있다. 만주어는 청나라 소조정 시절에 열심히 배운다고 배웠음에도 거의 익히지 못해 "일어서"라는 의미의 "일리" 한마디만 겨우 했다. 다른 사람의 회고록에 따르면, 선통제는 만주어 성적이 가장 나빴으나 부지런하게 공부해서 일상적인 회화가 가능한 수준이 되고 더 공부해서 만주 문자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문맹이라도 모어의 일상적인 회화 정도는 전문적으로 배울 필요가 없이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익힌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때 만주족 황실에게 있어서도 만주어는 사실상 외국어나 다름없었다.
청나라 멸망 이후에 만주어는 일상 언어로는 거의 쓰이지 않게 되고, 두 방언도 소멸하여 사어가 되었다. 윤승운 화백은 "1930년대 외국 학자가 만주를 이 잡듯이 뒤졌으나 간신히 두메산골의 노부부만 찾을 수 있었다.'는 일화를 소개하며 누르하치가 통탄할 노릇."이라는 논평을 남기기도 했다.
그래도 만주족은 청 왕조의 귀족 신분이었기에 현재 중국인 중에서는 교육수준이 높다. 학계나 예술계에도 만주족이 많다고. 또한 언어와 문화 상당 부분은 이미 한족에 흡수되어, 만주족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신분증에 표시된 민족 표시 뿐이다. 가끔씩 아이신기오로(Aisin Gioro) 씨 같은 만주족 성이 남아 있기도 하지만, 현재는 대부분 그것도 진(金) 씨로 치환되어서 이름 보고는 구별하기 힘들다. 중국의 진(金) 씨는 조선족이 아니면 대체로 만주족이다.
물론 만주족이 일방적으로 중화문화와 한족에 동화되기만 한 건 아니다. 만주족이 상용하던 중국어가 바로 표준 중국어의 바탕이 되었다. 즉 모어가 만주어인 고관들이 상용했으며, 한족 화자가 듣기에 어딘가 부자연스럽던 중국어가 표준 중국어가 되었다는 셈이다.[10] 또한 표준중국어를 서양에서는 만다린이라는 명칭으로 부르는데, 일설에 의하면 한족들이 서양인 선교사들에게 만주어를 설명할 때 "만주족 어르신(满大人)이 쓰는 언어"라고 지칭하는 한데서 유래했다.[11]
만주어 차용단어가 관화의 베이징 방언[12]과 동북 방언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긴 했다. 그리하여 중국 아나운서 상당수는 만주족의 본거지였던 랴오닝성-헤이룽장성 출신이 많은데, 그 이유는 여기 발음이 표준중국어와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특히 랴오닝성 선양 방언이 만주어 단어 차용도가 제일 높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중국 출신 방송인 장위안이 바로 여기 출신이다.
사실 소수의 지배민족이 다수의 피지배민족에게 언어적으로 동화되는 현상은 전세계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만주족만의 현상은 아니다. 중근세 이란의 튀르크계 지배층 또한 만주족과 비슷한 경우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데, 이는 지배민족이 소수이더라도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매우 우월한 경우이다.[13][14] 만주족의 경우는 만주과 중국이 한반도와 매우 가까운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눈에 뜨이는 현상일 뿐이다.
일제강점기에 만주국에서 청년기를 보낸 박정희와 김일성이 만주어에 능숙했다고 알려져있기도 하지만 이건 와전이다. 왜냐면 만주에 들어선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에서는 표준 중국어를 '만어' 즉 '만주어'라고 칭했기 때문이다.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진짜 만주어는 당시에도 이미 쓰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만주국에서 그냥 무시해 버렸다.[15] 만주국에서 말하는 만주인은 한족과 몽골인이었고 만주국은 중국어와 몽골어, 러시아어가 형식상 공용어였다.
만주족은 대다수가 이미 한족화되었으며 일부는 몽골인[16], 한민족[17], 둥간족[18]에 동화되어 버렸다.[19] 그 당시에도 우리가 만주어라고 지칭하는 언어는 많이 쓰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공용어 중에 하나로 지정할 필요가 없었을 듯하다.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의 모어도 한어였으며, 그의 자서전에서는 옛날 공부할때 만주어 성적이 가장 나빴다는 언급이 있다. 만주어는 청나라 소조정 시절에 열심히 배운다고 배웠음에도 거의 익히지 못해 "일어서"라는 의미의 "일리" 한마디만 겨우 했다. 다른 사람의 회고록에 따르면, 선통제는 만주어 성적이 가장 나빴으나 부지런하게 공부해서 일상적인 회화가 가능한 수준이 되고 더 공부해서 만주 문자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문맹이라도 모어의 일상적인 회화 정도는 전문적으로 배울 필요가 없이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익힌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때 만주족 황실에게 있어서도 만주어는 사실상 외국어나 다름없었다.
청나라 멸망 이후에 만주어는 일상 언어로는 거의 쓰이지 않게 되고, 두 방언도 소멸하여 사어가 되었다. 윤승운 화백은 "1930년대 외국 학자가 만주를 이 잡듯이 뒤졌으나 간신히 두메산골의 노부부만 찾을 수 있었다.'는 일화를 소개하며 누르하치가 통탄할 노릇."이라는 논평을 남기기도 했다.
그래도 만주족은 청 왕조의 귀족 신분이었기에 현재 중국인 중에서는 교육수준이 높다. 학계나 예술계에도 만주족이 많다고. 또한 언어와 문화 상당 부분은 이미 한족에 흡수되어, 만주족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신분증에 표시된 민족 표시 뿐이다. 가끔씩 아이신기오로(Aisin Gioro) 씨 같은 만주족 성이 남아 있기도 하지만, 현재는 대부분 그것도 진(金) 씨로 치환되어서 이름 보고는 구별하기 힘들다. 중국의 진(金) 씨는 조선족이 아니면 대체로 만주족이다.
물론 만주족이 일방적으로 중화문화와 한족에 동화되기만 한 건 아니다. 만주족이 상용하던 중국어가 바로 표준 중국어의 바탕이 되었다. 즉 모어가 만주어인 고관들이 상용했으며, 한족 화자가 듣기에 어딘가 부자연스럽던 중국어가 표준 중국어가 되었다는 셈이다.[10] 또한 표준중국어를 서양에서는 만다린이라는 명칭으로 부르는데, 일설에 의하면 한족들이 서양인 선교사들에게 만주어를 설명할 때 "만주족 어르신(满大人)이 쓰는 언어"라고 지칭하는 한데서 유래했다.[11]
만주어 차용단어가 관화의 베이징 방언[12]과 동북 방언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긴 했다. 그리하여 중국 아나운서 상당수는 만주족의 본거지였던 랴오닝성-헤이룽장성 출신이 많은데, 그 이유는 여기 발음이 표준중국어와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특히 랴오닝성 선양 방언이 만주어 단어 차용도가 제일 높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중국 출신 방송인 장위안이 바로 여기 출신이다.
사실 소수의 지배민족이 다수의 피지배민족에게 언어적으로 동화되는 현상은 전세계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만주족만의 현상은 아니다. 중근세 이란의 튀르크계 지배층 또한 만주족과 비슷한 경우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데, 이는 지배민족이 소수이더라도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매우 우월한 경우이다.[13][14] 만주족의 경우는 만주과 중국이 한반도와 매우 가까운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눈에 뜨이는 현상일 뿐이다.
일제강점기에 만주국에서 청년기를 보낸 박정희와 김일성이 만주어에 능숙했다고 알려져있기도 하지만 이건 와전이다. 왜냐면 만주에 들어선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에서는 표준 중국어를 '만어' 즉 '만주어'라고 칭했기 때문이다.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진짜 만주어는 당시에도 이미 쓰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만주국에서 그냥 무시해 버렸다.[15] 만주국에서 말하는 만주인은 한족과 몽골인이었고 만주국은 중국어와 몽골어, 러시아어가 형식상 공용어였다.
만주족은 대다수가 이미 한족화되었으며 일부는 몽골인[16], 한민족[17], 둥간족[18]에 동화되어 버렸다.[19] 그 당시에도 우리가 만주어라고 지칭하는 언어는 많이 쓰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공용어 중에 하나로 지정할 필요가 없었을 듯하다.
현대 만주어의 현황은 이 기사를 참조. 불과 200여년 전만 해도 아시아 최고강대국의 공용어로 끝발 날리던 민족의 언어가 바로 지금 사라져 가는 현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민족간 평등을 내세운 공산당이 만주 내 여러 소수민족 대상의 유화책을 실시함으로서, 민족어를 행정어로 사용하는 소수민족 자치주나 자치현, 민족어로 교육하는 민족학교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는 한글이 한자와 반드시 병용된다. 법원에서도 중국조선어로 재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만주족은 이미 1949년 당시에 대부분의 인구가 한족에 동화되었기 때문에 민족어로 가르치는 학교를 세울 수조차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만주족의 친척 민족인 시버족이 1만 명 가량 남아있어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자치현을 세우고 민족교육을 실시했으며, 그 덕에 21세기 현재까지도 시버어의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시버어는 만주어와 80%의 어휘를 공유하는데, 화자의 수가 3만 명이 넘고 시버어로 된 방송까지 할 만큼 일상에서의 사용 빈도가 제법 높아 근시일 내에 소멸될 가능성은 낮다. 다만 시버족 젊은이들도 입말만 할 뿐 시버 문자를 익히는 사람이 드물어서 시버족 어른들은 이를 우려한다.[20]
시버어와 만주어는 어휘가 비슷하긴 하나 완전히 같은 언어는 아니며, 특히 조사 면에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또한 문자도 만주문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자신들의 특유 발음에 맞추어 약간 개량한 시버문을 사용한다. 그럼에도 두 언어는 특별한 학습 없이 일부 상호 의사소통이 가능한 언어로(#), 만주어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또한 시버어를 만주어로 구분하는지 아니면 별개의 언어로 취급하는지에 따라 만주어를 사어가 아닌 사멸위기언어로 구분하기도 한다.(이훈, 만주족 이야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민족간 평등을 내세운 공산당이 만주 내 여러 소수민족 대상의 유화책을 실시함으로서, 민족어를 행정어로 사용하는 소수민족 자치주나 자치현, 민족어로 교육하는 민족학교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는 한글이 한자와 반드시 병용된다. 법원에서도 중국조선어로 재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만주족은 이미 1949년 당시에 대부분의 인구가 한족에 동화되었기 때문에 민족어로 가르치는 학교를 세울 수조차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만주족의 친척 민족인 시버족이 1만 명 가량 남아있어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자치현을 세우고 민족교육을 실시했으며, 그 덕에 21세기 현재까지도 시버어의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시버어는 만주어와 80%의 어휘를 공유하는데, 화자의 수가 3만 명이 넘고 시버어로 된 방송까지 할 만큼 일상에서의 사용 빈도가 제법 높아 근시일 내에 소멸될 가능성은 낮다. 다만 시버족 젊은이들도 입말만 할 뿐 시버 문자를 익히는 사람이 드물어서 시버족 어른들은 이를 우려한다.[20]
시버어와 만주어는 어휘가 비슷하긴 하나 완전히 같은 언어는 아니며, 특히 조사 면에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또한 문자도 만주문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자신들의 특유 발음에 맞추어 약간 개량한 시버문을 사용한다. 그럼에도 두 언어는 특별한 학습 없이 일부 상호 의사소통이 가능한 언어로(#), 만주어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또한 시버어를 만주어로 구분하는지 아니면 별개의 언어로 취급하는지에 따라 만주어를 사어가 아닌 사멸위기언어로 구분하기도 한다.(이훈, 만주족 이야기)
2007년 북만주 헤이룽장성 치치하얼시 싼자쯔(三家子) 마을의 모습을 담은 영상. 만주어 모어 화자의 대부분이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 사실 말이 좋아 대부분이지 2017년 기준으로 겨우 10명 남짓한 숫자이고, 그것도 모두 80~90대 노인들이라 그 수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실제 만주어 구사자와의 인터뷰. 노인과 인터뷰하는 사람은 상술한 시버족이다. 앞부분은 거의 표준중국어며, 인터뷰에서도 표준중국어와 만주어를 함께 쓰고 있다. 듣다보면 중국어와 발음이나 성조가 전혀 다른 못 알아들을 언어가 중간에 간간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만주어이다.
2017년, 만주족 노인(왼쪽)과 시버족(오른쪽)의 대화. 사전 지식 없이 그냥 들으면 두 사람이 다른 언어를 구사한다는 사실을 잘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언어가 유사하다. 본 영상의 대화 분석은 여기를 참조.
중국에 있는 소수민족들 대부분이 현재 모어를 잊고 중국어(한어)만 사용하고 있으며, 모어를 쓰는 모국이 있는 조선족이나 몽골족 같은 경우도 조상의 모어를 잊는 경우가 많아지는 실정에 절대 전망이 밝지 않다. 게다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문화대혁명 초반인 1966-69년을 제외하면 대체로 건국 당시 내세운 소수민족 정체성 보호의 약속을 지켰지만, 시진핑 집권 이후로는 소수민족어 교육시간을 줄이게 하고 있다. 소수자 보호 및 대입 가산점 특혜에 대한 한족의 불만이 쌓이고 한동안 억누르고 있던 중화주의의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전에 조선족은 대학입시 때 조선어 문제지로 시험을 볼 수 있었으나, 현재는 한어로만 출제된다.)
일부 뜻 있는 만주족들이 만주어를 복원시켜 보려고 노력 중이지만 글쎄… 히브리어가 기적적으로 현대에 부활한 예도 있지만 이마저도 이디시어의 영향을 짙게 받은 발음과 아랍어와 판박이인 문법[21] 때문에, 몇몇 반시온주의 유대인들과 하레디 민족주의자들은 현대 히브리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나마 만주족 자치현의 초등학교에서는 소수문화 보호 차원에서 만주어 수업을 진행하지만, 만주족 아이들의 모어도 중국어이고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는 중국어를 주로 쓰기 때문에 만주어를 대강 익히는 수준에 그친다. 게다가 만주족이라고 해도 중국어가 모어인 선생들이 만주어를 가르치다 보니 아쉬운 점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콩글리시로 영어를 가르치는 것과도 마찬가지인데, 성조도 성조지만 특히 음절 하나하나 끊어 읽는 특징은 위의 만주족 노인에게는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만주어 학습자나 구사자가 가장 많은 나라는 그래도 중국이며, 몇몇 대학에는 만주어과나 만주어 과정이 설치되어 있다. 청나라 역사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익혀야 하는 언어이기 때문에 청사 전공자들도 공부한다. 살아있는 언어로서의 만주어는 의미가 없어졌지만 만주어를 취미나 역사 덕질용(...)으로 공부하는 사람도 많으며, 조상의 언어를 익히려는 만주족이나 조상의 제2언어를 익히려는 몽골계 중국인[22] 그리고 청나라에 관심있는 중국 역덕[23]들이 공부하기도 한다. 중국어 동영상 플랫폼인 비리비리 또는 샤오홍슈를 보면 만주어 강의가 있으니, 중국어에 능통하면 온라인으로도 공부할 수 있다.
그 밖에 몽골의 울란바토르 대학에 외국으로는 유일하게 만주어학과가 있지만[24] 공부하는 사람은 영 적다. 한국에서도 일부 대학에서 기초 만주어 과목을 개설하고 있고, 미국이나 영국의 명문대학들에도 개설된 만주어 관련 과목들이 있다.
그나마 만주족 자치현의 초등학교에서는 소수문화 보호 차원에서 만주어 수업을 진행하지만, 만주족 아이들의 모어도 중국어이고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는 중국어를 주로 쓰기 때문에 만주어를 대강 익히는 수준에 그친다. 게다가 만주족이라고 해도 중국어가 모어인 선생들이 만주어를 가르치다 보니 아쉬운 점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콩글리시로 영어를 가르치는 것과도 마찬가지인데, 성조도 성조지만 특히 음절 하나하나 끊어 읽는 특징은 위의 만주족 노인에게는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만주어 학습자나 구사자가 가장 많은 나라는 그래도 중국이며, 몇몇 대학에는 만주어과나 만주어 과정이 설치되어 있다. 청나라 역사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익혀야 하는 언어이기 때문에 청사 전공자들도 공부한다. 살아있는 언어로서의 만주어는 의미가 없어졌지만 만주어를 취미나 역사 덕질용(...)으로 공부하는 사람도 많으며, 조상의 언어를 익히려는 만주족이나 조상의 제2언어를 익히려는 몽골계 중국인[22] 그리고 청나라에 관심있는 중국 역덕[23]들이 공부하기도 한다. 중국어 동영상 플랫폼인 비리비리 또는 샤오홍슈를 보면 만주어 강의가 있으니, 중국어에 능통하면 온라인으로도 공부할 수 있다.
그 밖에 몽골의 울란바토르 대학에 외국으로는 유일하게 만주어학과가 있지만[24] 공부하는 사람은 영 적다. 한국에서도 일부 대학에서 기초 만주어 과목을 개설하고 있고, 미국이나 영국의 명문대학들에도 개설된 만주어 관련 과목들이 있다.
청사 연구자라면 만주어 사료를 읽어낼 능력은 갖춰야 한다. 사실 만주어 뿐만 아니라 중근고한어와 중근세 몽골어도 중요하긴 한데, 중국사를 깊이 연구하는 학자라면 다들 오늘날의 표준 중국어 정도는 간단히라도 배우기 때문에 중근고한어 쪽으로의 진입장벽은 상대적으로 낮다. 그리고 미디어에서도 잘 다뤄지지 않는 등의 이런저런 제약이 있어도 결국 대부분의 만주어 사료는 중화권에 남아있고 중화권의 중국어 화자들에 의해 더 넓고 깊게 연구되기 때문에 그쪽에의 접근을 위해서라면 결국은 만몽한어를 모두 할 줄 알아야 한다.
청나라는 상당수가 아직도 번역, 해독이 되어 있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만주어 기록 및 공문서들을 남겼다. 하지만 20세기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만주어 자료를 단순 한문기록의 번역으로 봐서 소홀히 하였다. 특히 민국 초반 청사고를 집필할 때 대부분의 학자들이 만주어에 능통하지 못했고 한문사료만 참고하여 청나라 역사를 썼는데,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만문과 한문기록의 차이에 주목해 만주어 사료들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20세기 후반부터 만주어와 비슷한 시버어를 쓰는 시버족들 연구자들이 중국의 역사 연구기관에 대거 채용되어 건륭제 시기까지 남은 만주어 사료들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이런 흐름을 신청사(新淸史)라고 한다.
이렇게 학술언어로서 만주어는 오히려 과거보다 위상이 크게 올라갔다. 이는 청조를 바라보는 학계의 시선과 연관이 있다. 과거에는 이민족이 세웠으나 한족에 동화된 중화제국으로서의 평가가 일반적이었으나, 만주어와 만주어 사료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면서 청나라만의 독자적인 면이 많이 부각되어 이것이 이른바 '신청사'라는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한족이 중심이 된 현 중국정부도 한족을 지배했던 전시대인 청나라와 그 주체민족인 만주족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차원에서 만주어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사실 전문가들의 연구나 대중매체 속의 만주어 재현을 통해 흔히 접할 수 있는 만주어는 문헌자료가 풍부하게 남아있는 청대 만주어이고, 북방 관화의 영향을 역수입한 현대 만주어는 청대와는 상당히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외국 사극에 비유하면 윌리엄 1세의 영국 정복을 사극으로 묘사하며 현대 영어가 아니라 중세 노르만어, 프랑스어, 라틴어로 대본을 짜거나 무굴 제국 초대 황제 바부르의 인도 정복을 사극으로 묘사하며 힌디어가 아니라 근세 차가타이어, 근세 페르시아어로 대본을 짜는 셈인데, 당연히 현대어와는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만주어의 근연관계에 있는 시버어도 현대에 와서는 만주어와 상당히 달라져서 전문적인 통번역까지는 아니어도 상호간 진입장벽이 생긴 마당에 당연한 일. 자세한 설명은 이 영상을 참조.
청사는 물론 중앙아시아사[25]와 한국사 연구[26]에도 필요한 언어라서 문헌어, 학술어로서 앞으로도 계속 존속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자들의 수요는 중국뿐만 아니라 아니라 한국에도 꽤 있어서 심지어 만한사전(만주어-한국어)까지 나와있을 정도다. 그리고 현대 만주족 또한 압카이 한(하늘의 왕)에 대한 만주 샤머니즘 제사나 청나라의 역대 황제들 및 유학자들에 대한 유교 제사를 지낼 때 만주어를 쓰기도 한다.
청나라는 상당수가 아직도 번역, 해독이 되어 있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만주어 기록 및 공문서들을 남겼다. 하지만 20세기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만주어 자료를 단순 한문기록의 번역으로 봐서 소홀히 하였다. 특히 민국 초반 청사고를 집필할 때 대부분의 학자들이 만주어에 능통하지 못했고 한문사료만 참고하여 청나라 역사를 썼는데,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만문과 한문기록의 차이에 주목해 만주어 사료들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20세기 후반부터 만주어와 비슷한 시버어를 쓰는 시버족들 연구자들이 중국의 역사 연구기관에 대거 채용되어 건륭제 시기까지 남은 만주어 사료들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이런 흐름을 신청사(新淸史)라고 한다.
이렇게 학술언어로서 만주어는 오히려 과거보다 위상이 크게 올라갔다. 이는 청조를 바라보는 학계의 시선과 연관이 있다. 과거에는 이민족이 세웠으나 한족에 동화된 중화제국으로서의 평가가 일반적이었으나, 만주어와 만주어 사료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면서 청나라만의 독자적인 면이 많이 부각되어 이것이 이른바 '신청사'라는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한족이 중심이 된 현 중국정부도 한족을 지배했던 전시대인 청나라와 그 주체민족인 만주족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차원에서 만주어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사실 전문가들의 연구나 대중매체 속의 만주어 재현을 통해 흔히 접할 수 있는 만주어는 문헌자료가 풍부하게 남아있는 청대 만주어이고, 북방 관화의 영향을 역수입한 현대 만주어는 청대와는 상당히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외국 사극에 비유하면 윌리엄 1세의 영국 정복을 사극으로 묘사하며 현대 영어가 아니라 중세 노르만어, 프랑스어, 라틴어로 대본을 짜거나 무굴 제국 초대 황제 바부르의 인도 정복을 사극으로 묘사하며 힌디어가 아니라 근세 차가타이어, 근세 페르시아어로 대본을 짜는 셈인데, 당연히 현대어와는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만주어의 근연관계에 있는 시버어도 현대에 와서는 만주어와 상당히 달라져서 전문적인 통번역까지는 아니어도 상호간 진입장벽이 생긴 마당에 당연한 일. 자세한 설명은 이 영상을 참조.
청사는 물론 중앙아시아사[25]와 한국사 연구[26]에도 필요한 언어라서 문헌어, 학술어로서 앞으로도 계속 존속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자들의 수요는 중국뿐만 아니라 아니라 한국에도 꽤 있어서 심지어 만한사전(만주어-한국어)까지 나와있을 정도다. 그리고 현대 만주족 또한 압카이 한(하늘의 왕)에 대한 만주 샤머니즘 제사나 청나라의 역대 황제들 및 유학자들에 대한 유교 제사를 지낼 때 만주어를 쓰기도 한다.
소멸한 언어, 만주어를 연구하는 이유는?(#)
고려-조선은 여진족-만주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안보상, 경제상의 이유로 여진어나 만주어를 구사하는 역관을 양성했다. 그리하여 자체 관련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노걸대라고 하여 역관들의 외국어 교재를 마련하여 교육했는데 여기에 여진족/만주족의 노걸대도 있기 때문이다. 노걸대에는 외국 글자 옆에 한글로 외국어의 음이 다 적혀 있다.[27] 만주어 연구하는 학자들 입장에서는 표음문자로 당대 음을 고스란히 표기해놓은 기록이 현전하니 고마울 따름. 또한 중국 만주 지역의 치치가르, 하르빈 등 일부 지명에는 만주어가 한어로 음차된 형태로나마 현대에도 남아있다.
현대에는 소수언어인만큼 배울 수 있는곳은 거의 없고 혼자서 독학을 해야하는데 한국어 교재, 중국어 교재, 일본어 교재, 영어 교재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만주어를 자습할 수 있는 자료로는 박문사에서 나온 역주 청어 노걸대신석과 집문당에서 나온 만주어 대사전 등이 있다. 다만 권당 가격이 5만원, 10만원씩 하는 고가템에 파는 곳도 거의 없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서는 알타이어학 연구를 위하여 만주어 수업을 학부 전공선택 과목으로 개설하고 있다. 대학원생도 가끔 연구를 위해 수강한다. 그리고 언어학과 관련된 학과들, 동아시아사 연구 외에도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만주어 수업을 듣는다. 문자를 눈에 익히기 위한 연습 교재로 청대에 제작된 목판본 문헌을 스캔해서 사용하는데 목판의 빈번한 인쇄로 글씨의 가장자리가 흐릿해지거나 점이 떨어져 나간 경우, 심지어 쥐나 좀벌레로 인한 피해가 있어 해석에 골머리를 앓는다. 다만 만주어의 음성학에 친숙한 사람이라면 오류를 범할 가능성은 낮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은 영화 최종병기 활의 만주어 자문을 제공하기도 했고 일반인(이라고는 하지만 대부분은 유목민족사, 명청사학자들)을 대상으로 가끔씩 강좌를 열고 있다. 최종병기 활 때문에 만주어 강좌의 인기가 오르기도 했다.(#) 이 외에 "만주어 문법 자료 집성"과 "청어노걸대 신석" 등 만주학총서 시리즈도 출간했다. 황명으로 작성한 딱딱한 공문서 같은 것만 있을 것 같지만 의외로 구어체가 잘 살아있는 삼번의 난 참전수기, 몽골 초원 너머로 사행을 갔다온 이번원 관료의 견문록, 만주의 시조신화나 만주족들이 만주어로 번역하여 돌려보던(!) 희곡 서상기의 만한합벽본 등도 번역했다. 만한사전도 나왔다.(#)
상위 문단 인터뷰 기사(소멸한 언어, 만주어를 연구하는 이유는?)에 등장한 사람이 저술한 초급 만주어라는 서적이 있으며 기초지식을 쌓기에 좋은 책이다. 하지만 만주 문자가 인쇄체의 한계로 깨져있어서 이 부분은 따로 배우기를 권하고 문법은 여러 파트로 나뉘어져있어서 한번에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만주어 문법은 매우 쉬우니 작문연습도 많이 해보자). 회화파트는 정말 잘 되어있고 삼전도비 전문이나 팔세아 등이 수록되어있다.
이글루스의 역사 밸리에서 활동했던 블로거 길공구(현 네이버 블로그 활동)가 만주어 덕후라 중세 북방민족사와 더불어 노걸대를 비롯한 만주어 학술게시물 역시 자주 올리는 편이다.
중국에서 발행되는 만주어 관련 자료는 상당히 많고, 최신 연구성과를 반영되어 업데이트되어 있다. 중국에서 발행되는 만주어 교재는 만주족 자치현에서 가르치는 초등학교용 입문용에서부터 대학에서 가르치는 고급, 전공용까지 모두 있다. 비리비리와 같은 중국의 동영상 플랫폼에는 만주어 강좌도 있다. # 중국어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구해서 공부해보는 것도 좋다.
일본 서적으로는 츠마가리 토시로(津曲敏郎)의 "만주어 입문 20강"과 카와치 요시히로(河内良弘)의 "만주어 문어 입문"이 있다. 둘 다 일본서적답게 체계적으로 알기쉽게 설명해놓았는데 전자는 설명이 많고 후자는 품사별로 그 특징을 서술해놓았다. 다만 만주어 입문 20강은 연습문제의 해답이 없어서(...) 옥의 티라고 볼 수 있다.
영어 서적으로는 "A Colloquial Manchu Grammar"을 추천한다. 1892년에 출판된 좀매우 오래된 책이지만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가 저술한 "A Manchu Grammar"도 있는데 위키북스에서 직접 볼 수 있다.
고려-조선은 여진족-만주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안보상, 경제상의 이유로 여진어나 만주어를 구사하는 역관을 양성했다. 그리하여 자체 관련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노걸대라고 하여 역관들의 외국어 교재를 마련하여 교육했는데 여기에 여진족/만주족의 노걸대도 있기 때문이다. 노걸대에는 외국 글자 옆에 한글로 외국어의 음이 다 적혀 있다.[27] 만주어 연구하는 학자들 입장에서는 표음문자로 당대 음을 고스란히 표기해놓은 기록이 현전하니 고마울 따름. 또한 중국 만주 지역의 치치가르, 하르빈 등 일부 지명에는 만주어가 한어로 음차된 형태로나마 현대에도 남아있다.
현대에는 소수언어인만큼 배울 수 있는곳은 거의 없고 혼자서 독학을 해야하는데 한국어 교재, 중국어 교재, 일본어 교재, 영어 교재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만주어를 자습할 수 있는 자료로는 박문사에서 나온 역주 청어 노걸대신석과 집문당에서 나온 만주어 대사전 등이 있다. 다만 권당 가격이 5만원, 10만원씩 하는 고가템에 파는 곳도 거의 없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서는 알타이어학 연구를 위하여 만주어 수업을 학부 전공선택 과목으로 개설하고 있다. 대학원생도 가끔 연구를 위해 수강한다. 그리고 언어학과 관련된 학과들, 동아시아사 연구 외에도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만주어 수업을 듣는다. 문자를 눈에 익히기 위한 연습 교재로 청대에 제작된 목판본 문헌을 스캔해서 사용하는데 목판의 빈번한 인쇄로 글씨의 가장자리가 흐릿해지거나 점이 떨어져 나간 경우, 심지어 쥐나 좀벌레로 인한 피해가 있어 해석에 골머리를 앓는다. 다만 만주어의 음성학에 친숙한 사람이라면 오류를 범할 가능성은 낮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은 영화 최종병기 활의 만주어 자문을 제공하기도 했고 일반인(이라고는 하지만 대부분은 유목민족사, 명청사학자들)을 대상으로 가끔씩 강좌를 열고 있다. 최종병기 활 때문에 만주어 강좌의 인기가 오르기도 했다.(#) 이 외에 "만주어 문법 자료 집성"과 "청어노걸대 신석" 등 만주학총서 시리즈도 출간했다. 황명으로 작성한 딱딱한 공문서 같은 것만 있을 것 같지만 의외로 구어체가 잘 살아있는 삼번의 난 참전수기, 몽골 초원 너머로 사행을 갔다온 이번원 관료의 견문록, 만주의 시조신화나 만주족들이 만주어로 번역하여 돌려보던(!) 희곡 서상기의 만한합벽본 등도 번역했다. 만한사전도 나왔다.(#)
상위 문단 인터뷰 기사(소멸한 언어, 만주어를 연구하는 이유는?)에 등장한 사람이 저술한 초급 만주어라는 서적이 있으며 기초지식을 쌓기에 좋은 책이다. 하지만 만주 문자가 인쇄체의 한계로 깨져있어서 이 부분은 따로 배우기를 권하고 문법은 여러 파트로 나뉘어져있어서 한번에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만주어 문법은 매우 쉬우니 작문연습도 많이 해보자). 회화파트는 정말 잘 되어있고 삼전도비 전문이나 팔세아 등이 수록되어있다.
이글루스의 역사 밸리에서 활동했던 블로거 길공구(현 네이버 블로그 활동)가 만주어 덕후라 중세 북방민족사와 더불어 노걸대를 비롯한 만주어 학술게시물 역시 자주 올리는 편이다.
중국에서 발행되는 만주어 관련 자료는 상당히 많고, 최신 연구성과를 반영되어 업데이트되어 있다. 중국에서 발행되는 만주어 교재는 만주족 자치현에서 가르치는 초등학교용 입문용에서부터 대학에서 가르치는 고급, 전공용까지 모두 있다. 비리비리와 같은 중국의 동영상 플랫폼에는 만주어 강좌도 있다. # 중국어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구해서 공부해보는 것도 좋다.
일본 서적으로는 츠마가리 토시로(津曲敏郎)의 "만주어 입문 20강"과 카와치 요시히로(河内良弘)의 "만주어 문어 입문"이 있다. 둘 다 일본서적답게 체계적으로 알기쉽게 설명해놓았는데 전자는 설명이 많고 후자는 품사별로 그 특징을 서술해놓았다. 다만 만주어 입문 20강은 연습문제의 해답이 없어서(...) 옥의 티라고 볼 수 있다.
영어 서적으로는 "A Colloquial Manchu Grammar"을 추천한다. 1892년에 출판된 좀
중국어 관화의 영향으로 현대에는 발음이 많이 바뀌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만주어 발음들은 대체로 중국어의 영향이 커지기 전, 중국에서는 중근고한어를 쓰던 시절의 발음으로 현대 만주어와는 차이가 크다.
- 장모음 : oo, ii
- 이중모음 : ai, ei, oi, ui, ao, eo, io, uo[30]
- 삼중모음 : ioi
양순 | 순치 | 치경 | 경구개 | 연구개 | 구개수 | ||
비 | /m/ ᠮ | /n~ɲ̟/ ᠨ | /ŋ~ɴ/ ᠩ | ||||
파열 | 유기 | /pʰ/ ᡦ | /tʰ~tʲʰ/ ᡨ᠋ | /cʰ~kʰ~qʰ/ ᡴ | |||
/kʰ/ ᠺ | |||||||
무기 | /p/ ᠪ | /t~tʲ/ ᡩ | /c~k~q/ ᡤ | ||||
/k/ ᡬ | |||||||
파찰 | 유기 | /t͡sʰ/ ᡮ | /ʈ͡ʂʰ~t͡ɕʰ/ ᠴ | ||||
/ʈ͡ʂʰɨ/ ᡱᡳ | |||||||
무기 | /t͡s/ ᡯ | /ʈ͡ʂ~t͡ɕ/ ᠵ | |||||
/ʈ͡ʂɨ/ ᡷᡳ | |||||||
마찰 | /f/ ᡶ | /s~ɕ/ ᠰ | /ʃ~ʂ/ ᡧ | /x~χ/ ᡥ | |||
/sɯ/ ᠰᡟ | /x/ ᡭ | ||||||
접근 | /ɻ/ ᡰ | /j/ ᠶ | /w/ ᠸ | ||||
설측 접근 | /l~ʎ̟/ ᠯ | ||||||
전동 | /r/ ᡵ |
현대에 와서는 만주 문자를 쓰기도 하지만 로마자로 전사하는 경우도 많은데 크게 묄렌도르프(Möllendorff) 전사법과 압카이(Abkai) 전사법이 있다. 대한제국 시기 조선에 있었던 그 묄렌도르프 맞다.
M | A | ||
ᠠ | a | a | /ɑ/ |
ᡝ | e | e | |
ᡳ | i | i | |
ᠣ | o | o | /ɔ/ |
ᡠ | u | u | /u/ |
ᡡ | ū | v | /ʊ/ |
᠊ᡟ᠊ | y | /ɯ/ | |
ᠨ | n | n | |
ᠩ | ŋ | ng | |
ᡴ | k | k | |
ᡤ | g | g | |
ᡥ | h | h | |
ᠪ | b | b | /p/ |
ᡦ | p | p | |
ᠰ | s | s | |
ᡧ | š | x | |
ᡨ᠋ | t | t | |
ᡩ | d | d | |
ᠯ | l | l | |
ᠮ | m | m | /m/ |
ᠴ | c | q | |
ᠵ | j | j | |
ᠶ | y | y | /j/ |
ᠺ | k | k | |
ᡬ | g | g | /k/ |
ᡭ | h | h | /x/ |
ᡵ | r | r | /r/ |
ᡶ | f | f | /f/ |
ᠸ | v[40] | /v/, /w/ | |
ᡮ | ts | ||
ᡯ | dz | /t͡s/ | |
ᡰ | ř | /ɻ/ | |
ᠰᡟ | sy | ||
ᡱᡳ | c'y | ||
ᡷᡳ | jy |
한편, 청나라 강희제의 황9자이자 옹정제가 극혐(...)하던 황8자당의 행동대장이던
자세한 내용은 만주어/어휘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만주어/문법 문서 참고하십시오.
si saiyūn - 안녕/안녕하세요
baniha - 감사합니다
ume antaharara - 천만에요
giljaki - 죄송합니다
bi - 네
akū - 아니요
inu - 그렇습니다
waka - 아닙니다
bi ~ se oho. 나는 ~살입니다.
angga isi 맛있게 드세요, 잡수세요, 드세요
baniha - 감사합니다
ume antaharara - 천만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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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천군, 최종병기 활, 남한산성, 연인에서 만주어를 사용하는 장면이 나오므로 들어보면 어떤 느낌인지 대략 알 수 있다. JTBC의 사극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에서도 청나라 인물들이 만주어를 사용하며, 킹덤(한국 드라마)의 프리퀄 영화 킹덤:아신전에서도 여진족 인물들이 만주어를 사용하고[42] 생사초에 관련된 만주어 금석문이 등장한다.
뭐니뭐니 해도 대중들에게 만주어를 가장 강하게 각인시킨 것은 영화 최종병기 활로, 만주어가 한국어와 거의 비슷한 비중으로 쓰인다. 특히 후반부에는 대사가 만주어가 한국어보다 더 많이 나올 정도.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다들 만주어 한마디는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ᠮᡠᠰᡝᡳ ᠮᠠᠨᠵᡠ!(우리들의 만주!), ᡝᡩᡠ᠋ᠨ ᠪᡝ ᠪᠣᡩ᠋ᠣᠮᠪᡳᠣ(바람을 계산하느냐), ᠮᡳᠨᡳ ᠪᡝᡵᡳ ᠪᠠᠨᠵᡳᠪᡠᡵᠠᠩᡤᡝ ᠸᠠᡵᠠᠩᡤᠠ ᠠᡴᡡ (내 활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지 죽이는 목적이 아니다.) 등….
다만 만주어에 대한 재현을 열심히 했다고 해도 꽈찌쭈가 한국어 하듯이(...) 그냥 한국어 억양으로 만주어 단어를 줄줄 읊는 수준이다. 많은 배우들에게 단기간에 대사를 가르쳐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본어나 중국어처럼 참고로 들려줄 언어 자료가 풍부한 것도 아니니(...). 때문에 언어에 대한 감각이 좋은 사람들은 어쩐지 어색하다고 느낄 수 있다. 덕분에 오히려 자인이가 만주어를 쓰는 장면은 현실성이 높아진 감이 있지만, 후반부 쥬신타가 남이에게 "그저 날 능멸하려던 것이냐?!" 라고 외치는 장면 등, 감정 실린 만주어가 나오는 장면이 매우 어색하게 처리되었다. 위의 만주어 인터뷰 영상이나, 만주족 노인과 시버족의 대화 영상을 보면 확연히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오히려 이런 디테일은 만주어 전문가라 해봤자 역사학 전공자들이 대부분인 한국보다는 언어학적으로 연구를 진행하는 언어학자나 비슷한 언어인 시버어 화자도 많기 때문에 드라마나 영화에서 시도한다면 훨씬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지만, 만주족 자신들이 이미 청나라 말기에는 한족에 거의 동화되어 버렸고, 상업적인 목적에서 만들어지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미 사어가 된 것이나 다름없는 외국의 소수민족 언어 재현을 중시해봤자 크게 흥행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한국은 커녕 중국에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43]
아무튼 이 덕에 2010년대 중반부터, 병자호란 시기를 다루는 한국 사극에서 청나라 측 인물들이 만주어를 쓰는 경우가 많아졌다. 다만 고려나 조선이 금-청 및 여진-만주족과 얽히는 사극 소재가 생각보다 풍부한 편은 아니라 소재가 쉬이 고갈되는 게 문제다.
최종병기 활을 본 중국의 만주족이 영화 제작자에게 감사편지까지 보냈다. 외국인들이 자기네들도 영 모르는 조상의 언어로 영화를 만들었으니(…). 중국 최대의 UCC 사이트인 비리비리의 '한국 사극에서의 중국 모습'이라는 영상 모음엔 한국 사극에서 묘사되는 청과 만주족의 모습도 같이 끼어있다. 이런 한국 드라마의 재현에 대해서 많은 중국 네티즌들이 신기해하기도 하며, 그 재현에 대해 호평을 한다. "만족(만주족)을 제대로 재현하는 건 중국보다 한국이 더 낫다"는 평이 많다.[44] 비리비리 댓글창이나 한국 영화에 관한 사이트를 보면 남한산성에서 만주어를 쓰는 용골대나 숭덕제의 캐릭터를 이야기하며, 황제의 딸이나 보보경심 같은 청나라 궁중드라마에 어째 한어가 쓰이냐, 실제 재현에 따라 만어로 제작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는 중국 네티즌들의 이야기도 자주 보인다.[45][46]
중국에서 만드는 청대 사극에서 만주 문자나 만주어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n아거(황n자), 버일러(패륵), 호쇼이 친왕(화석친왕), 도로이 균왕(다라군왕)에 이은 황족의 3등급 작위), 어푸(액부, 부마와 같은 뜻), 아마(아버지) 등의 기본적인 단어는 명대 사극에서는 나오지 않는 청대 사극만의 재현에 해당한다.
태보 영상 자막 중 만주어가 있다. 조혜련과 태보의 저주에 있다.[48]
만주어판 주문은 토끼입니까?가 동인서클에서 발매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어의 외래어/기타 문서 참고하십시오.
보이니치 문서가 사실 만주어를 독자적인 문자로 기록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만주어로 된 위키백과 인큐베이터가 있다. 인큐베이터란 새 언어판 위키백과를 만들기 전에 뼈대를 갖추고 시험을 하기 위해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고 사용자들의 동의를 얻으면 정식 위키백과로 출범할 수 있다. 다만 만주어의 경우 참여자가 영 적어서인지(...) 인큐베이터 상태로 남아있다. 그리고 만주 문자가 아닌 로마자를 쓴다. 만주어 위키백과 인큐베이터 헌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유난히 케이온!, 러키☆스타, 내여귀, 로리 등의 오덕관련 용어들이 유난히 많이 기재되어 있다(...). 게다가 중국어 위키백과의 만주어 문법 항목에서는 일본어와 비교를 하면서 일본어(...)와도 비슷하다고 설명하고 있고, 거기에다 내여귀(!)의 주인공도 나오고 있다.
한국에서는 울산대학교의 김두현 교수와 경상국립대학교 역사교육과의 이선애 교수가 만주어에 능통하다.
만주어로 된 위키백과 인큐베이터가 있다. 인큐베이터란 새 언어판 위키백과를 만들기 전에 뼈대를 갖추고 시험을 하기 위해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고 사용자들의 동의를 얻으면 정식 위키백과로 출범할 수 있다. 다만 만주어의 경우 참여자가 영 적어서인지(...) 인큐베이터 상태로 남아있다. 그리고 만주 문자가 아닌 로마자를 쓴다. 만주어 위키백과 인큐베이터 헌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유난히 케이온!, 러키☆스타, 내여귀, 로리 등의 오덕관련 용어들이 유난히 많이 기재되어 있다(...). 게다가 중국어 위키백과의 만주어 문법 항목에서는 일본어와 비교를 하면서 일본어(...)와도 비슷하다고 설명하고 있고, 거기에다 내여귀(!)의 주인공도 나오고 있다.
한국에서는 울산대학교의 김두현 교수와 경상국립대학교 역사교육과의 이선애 교수가 만주어에 능통하다.
- 위키 북스의 간단한 만주어 교육 자료. 모두 영어로 되어 있다.
- 온라인 무료 외국어 학습 플랫폼인 멤라이즈의 만주어 코스: 현 기준 1520 단어로 문자 그대로 타 외국어 학습하듯이 가볍게 배울 수 있는 사이트. 일정 시간이 지나면 예전에 배웠던 단어를 다시 복습할 수 있는 플랫폼 자체의 기능이 있다. 기본 베이스는 영어 기반으로 만주문자와 한국어는 학습시 음성파일 재생과 함께 옆란에 나란히 뜨므로 직관적인 시청각적 참조가 가능하다.
[1] 일부 환경에서는 이 글자들이 네모 혹은 공백으로 보일 수도 있다.[사진출처] : 위키미디어 공용[3] 원래 만주 문자는 왼쪽부터 세로로 쓰지만, 컴퓨터는 가로쓰기가 기본이기 때문에 유니코드에는 반시계 방향으로 90도 돌아가 왼쪽부터 가로로 쓰는 형태로 등재되어 있다. 사실은 아랍 문자처럼 오른쪽부터 가로로 쓰는 형태가 되었어야 맞는다.[원형] [5] 'manju'는 '만주족(민족명)'만이 아니라 '만주족의' 또는 '만주인의'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어 관형사로도 기능한다. 다만 'manju'를 강조하거나 사전적으로 기술할 때는 속격조사 'i(의)'를 결합하여 표현한다.[6] 만주(满洲)라는 말은 일본이 괴뢰국가 만주국을 건국하기 위해 정략적으로 썼기 때문에, 满洲라는 단어는 중국(대만 포함)에서 금기시된다. 그러므로 중국에서는 满洲语, 满洲族보다는 满族,满语를 사용하는 편이며, 이것은 북한에서 사용하는 남조선이라는 말이 대한민국에서 금기시되는 것과 비슷하다.[7] 순치제 때 자금성을 접수하면서 명나라를 섬기던 내시나 궁녀들 일부도 청나라에서 다시 재취업 일하게 되었는데, 당연히 황실의 시종이나 궁녀들은 한어를 썼을 것이다. 더구나 만주족은 거세가 금지되어 있었기에 황궁에서 일하는 내시들은 모두 한족이었다. 다만 만주족 궁녀는 존재했고, 일부는 황제의 승은을 입어 황후까지 오르기도 했다.[8] 몽골인 후궁 소생인 황5자 아이신기오로 영기가 만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여 차기 대권주자로 주목받았으나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는 등 건륭제가 너무 오래 살아서 황자들이 대권을 노려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나는(...) 일도 여럿 있었다. 또한 건륭제의 노년기에는 가경제를 포함해 차기 황권 경쟁자들도 대부분 조선계 또는 한족계 포의 출신 후궁에게서 난 아들들이다보니 어머니의 품에서부터 만주어보다는 한어를 더 많이 접하며 자란 터였다.[9] 이 이야기는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과거, 중국의 시험지옥>에서 우야 자오후이(烏雅兆惠, 오아 조혜, 1708~1764)의 일화로 소개된다. 다만 책의 주제가 만주어 흥망사와는 무관한데다 역자들도 이쪽엔 무지한지 그냥 한족 이름처럼 읽은 '조혜'라고만 언급된다. 자오후이는 용비 호자씨(일명 향비)를 포로로 잡아 건륭제에게 바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10] 사실 영어도 마찬가지다. 프랑스어가 모어였던 노르만인은 자신들이 정복한 토착민에게 영향을 받아 고대영어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노르만인들이 쓰던 부자연스럽던 영어가 표준영어가 되면서 중세영어는 고대영어와 형태가 상당히 바뀌어버렸다.[11] 또는 말레이어의 고관을 뜻하는 menteri에서 파생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간에 "높으신 분들이 쓰는 언어"에서 유래한 것은 둘 설 모두 같다.[12] 베이징 방언과 베이징 표준어(보통화)는 다르다. 베이징 표준어는 근현대 중국 정부가 베이징 방언을 다듬어 만들어낸 국가표준어지만 베이징 방언은 수백년간 베이징 시민들이 써오던 토착방언이다. 마찬가지로 현대 서울말을 다듬어 만든 표준어와 서울 방언은 다르다.[13] 로마의 정복 아래 유럽 전역에서 쓰였던 라틴어, 아라비아 반도의 소수언어였으나 종교의 힘으로 중근동 공용어가 된 아랍어, 현대의 식민지 출신 독립 국가에서도 계속 쓰이는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그 예로 들 수 있겠다.[14] 그래서 만약 일제강점기가 실제보다 더 오랫동안 이어졌다면 해당 대체역사에서 한국은 독립 후에도 일본어가 공용어 내지는 그에 준하는 취급을 받는 언어가 되었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15] 인구 절대 다수가 한족인 만주를 직접 점령도 아니고 괴뢰국으로 통치해야 하는 일본은 대다수 중국인에게 너희는 중화민국과는 다르다는 정체성을 어떻게든 심어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온갖 수를 다 동원했고 이 과정에서 선통제도 데려와서 옹립했다. 왕도낙토의 오족협화 낙원이라는 대동아공영권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감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제의 프로파간다는 이미 틈관동 이래 만주에 들어찬 대다수 한족 만주국인들에게 씨알도 안 먹혔다. 한편 만주족들은 만주국 수립 이전까진 터줏대감으로 어느 정도 대접받는 지위에 있었으나 만주국 수립 이후에 일제는 일본어도 못하는 만주족들이 활용가치가 없어서 그 자리를 조선인들로 채워버린 탓에 만주족 지위는 만주국 건국 이후 완전히 소수민족으로 더욱 떨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다.[16] 신해혁명 당시 열하나 내몽골 내지는 만주 서쪽의 몽골족 거주지로 도망친 이들.[17] 랴오닝성 번시시의 번시 박씨의 경우 청나라 때는 만주팔기로 분류되었다가 이후 한족으로 재분류되었고, 1982년에는 조선족으로 재분류되었다. 그리고 신해혁명을 피해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도망친 만주족도 일부 존재했으며, 그런 사례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례도 있다.#[18] 신장 일대에 주둔하던 일부 만주족들이 한족이나 후이족들과 함께 코칸드 칸국에 의해 전쟁포로가 되어 중앙아시아 각지에 노예로 팔렸는데, 이러한 연유로 둥간족 일부는 만주족 조상을 두고 있다.[19] 20세기 초반 만주에 거주하던 중국인의 주류민족은 만주족이 아니었다. 만주족은 청나라가 중원을 제패하면서 상당수가 중원으로 넘어가 살았고, 만주는 청나라 시대 내내 인구가 희박한 빈 땅이었다가 19세기 중반 경부터 주로 산동성에 거주하던 한족들이 대거 이주해 와서 오늘날의 동북 3성 주민이 된 것이다. 당연히 그 이주자들의 언어는 만주어가 아닌 중국 화북 지방의 관화였다.[20] 2016년 뉴욕타임즈의 중문판 기사인데, 젊은이들의 무관심속에 자기 민족 전통이 소멸될 것을 우려하는 시버족 원로들의 걱정을 전하고 있다.[21] 다만 아랍어가 히브리어와 같은 아프리카아시아어족임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22] 실제로 중국의 몽골어가 독립국가 몽골의 몽골어에 비해 만주어의 영향이 더 많이 남아있다.[23] 최근에 여의전이나 연희공략으로 꽤 늘어났다.[24] 현대 외몽골인의 반만주족/반중 감정과는 별개로 만주어는 몽골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역시 필수적인 언어이다. 몽골이 청나라의 지배를 받은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25] 청나라는 준가르를 무너뜨리고 지금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지역을 자국의 지배 하에 두었는데, 신장 위구르 자치구는 지리적, 문화적으로 중앙아시아로 분류된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 외에도 준가르의 지배 하에 있었던 지역은 지리적으로는 중앙아시아로 분류된다. 그 외에 준가르가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땅을 침략하여 키르기스인들을 복속시키고 더 나아가 현대 카자흐스탄의 전신인 카자흐 칸국도 침략했다가 사르타이에 의해 저지되어 카자흐 칸국 정복이 무산된 역사도 있다. 그리고 코칸트 칸국은 청나라의 조공국이 되기 전까지는 청나라의 서쪽 변방을 약탈하여 한족 포로들(오늘날 둥간족의 조상)을 끌고 가기도 했다.[26] 승정원일기와 만주어로 작성된 청나라 측 기록이 반영되지 않고 병자록과 조선왕조실록에 의존한 정묘호란, 병자호란 연구는 오류투성이 반쪽짜리임이 201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밝혀지고 있다.[27] 청어노걸대 말고도 삼역총해, 팔세아, 소아론 등도 있다.[28] oi와 ū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모음뒤에서는 두번 쓴다. ex) oilohonᠣᠢᠯᠣᡥᠣᠨ[29] ye에서는 /je/로 발음된다.[30] 이중모음은 반드시 i나 o로 끝난다.[구] 31.1 31.2 31.3 31.4 i가 뒤에 붙을 때만 구개음화되어 변이음으로 난다.[양] 32.1 32.2 32.3 양성모음 앞에서[34] '-ng' 바로 뒤에 'g'가 오는 경우 'g'가 비음화되어 연구개 비음이 된다. ex) wanggiyan(왕얀), ningguta(닝우타) 등. 원래 /g/로 발음 되었으나, 음운 변화로 /ŋ/이 된거라 지명은 g를 발음하기도 한다.[36] 현대 만주어에서는 ts로 파찰음화[40] a, e에만 붙는다[41] 윤탕이 읽고나서 태우라고 했는데 윤아가 잊어버리고 태우지 않았다.[42] 허나 조선에 사는 여진족(성저야인)들은 한국어를 사용한다.[43] 이것은 일부에서 지적하듯이 딱히 중국만 그런 것도 아니다. 리처드 1세와 존 왕만 하더라도 앵글로-노르만 프랑스어가 모어이고, 영어는 거의 모르고 프랑스어를 상용했지만, 영국 드라마나 영국 영화에서는 모두 영어만을 사용한다. 무굴 제국 역대 황제들도 페르시아어가 모어였지만, 무굴 제국을 배경으로 한 인도 드라마·인도 영화와 파키스탄 드라마·파키스탄 영화에서는 힌두스탄어(힌디어/우르두어)만을 사용한다.[44] 특히 만주족의 변발 형태가 청나라 말기의 음양두가 아닌 금전서미(일명 쥐꼬리)를 제대로 재현해서 호평이라 카더라...[45] 일부에서는 광전총국이나 중국 공산당 당국의 검열 때문에 못만들어진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만, 만주족 자체가 독립은커녕 한족에 거의 동화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리 정치적으로 민감하지 않다. 중국에서는 민족갈등을 유발할 수 있거나, 소수민족을 악마화하는 드라마는 제작이 금지되기는 하지만 (이건 정치적 올바름이 정착된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 원주민들이 악역으로 나오는 서부극은 이제 자취를 감췄다.) 만주족의 후손들이 지금 한족이랑 거의 구분이 없어졌기 때문에, 굳이 민감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소수민족의 보호 정책을 없애는 것으로 악명 높은 시진핑 정권조차 안 건드리는 민족이 바로 만주족이다. 만주어 제작 드라마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제작비의 상승 및 외국어 연기로 관객의 공감능력 악화라는 상업적 이유가 가장 크다고 보면 된다. 어떻게 보면 한족 왕조 배경 중국 사극에서 실제 전근대 중국어 대신 평범한 중국 사극 말투가 나오는 것과도 비슷한데, 실제로 재현을 중시해서 중국어의 궁중용 고어가 대사에 많이 들어가는 송나라 배경의 청평악(2020) 같은 사극은 시청률도 좋았고, 컬트적인 팬들의 찬사를 받기는 했지만, "자막을 봐야 내용을 알 수 있다"는 시청자들의 불평도 많았다.[46] 중국 공산당은 건국 초기에 레닌주의에 입각해서 소수민족 문화 보호를 약속했다. 잘 볼 수 있는 예로 조선족 상당수가 아직도 모어를 한국어 방언인 중국 조선어로 쓰고, 대부분 한국어를 알아듣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만주어가 사어가 된 것은 청나라 시절부터 스스로 동화되었기 때문이지 중국 정부가 말살정책을 편 게 아니기 때문에 사극에 만어 사용이 금지된다거나 한국 영화에 등장하는 만주어에 중국인들이 불쾌하게 여긴다는 일부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47] 제작비 문제 탓에 세트장에 있는 만한합벽 현판을 일일이 철거하기가 힘들어서 나타나는 반영 오류로 추정된다.[48] 근데 이 영상에는 별의별 자막이 다 있어서 놀랍지가 않다..... 자세한 건 조혜련과 태보의 저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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